인도에서 온 편지(소설집)
해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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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상
프롤로그
나를 낳고 키운 것은 싱싱한 남해바다와 그 바다의 자식인 바람이었다. 그 날 높새바람이 불어 바다에는 온 종일 하얀 웃음소리가 났다 했다. 메일스트롬(Malestrom) 같은 자궁 속에서 부서진 조류의 파편들이 소용돌이치며 울부짖으며 세상 밖으로 나를 유도했다. 나의 귀를 처음 연 것도 강퍅한 바람에 다 죽어가던 양철지붕의 울음소리였다.
멸칫배 망쟁이였던 아버지는 뒷개에서 빈 드럼통을 두드리며 고기떼를 쫓고 있었고 새벽에 상륙하는 어부들의 밥걱정에 어머니는 늦은 밤 몸을 풀고도 밤새 한 숨도 못 잤다 했다. 그러므로 밤이며 아침이며 나를 재우고 깨운 것은, 구조라의 앞개와 뒷개를 무동을 태워 노닌 것은 순전히 싱싱한 남해바다와 그 바다의 자식인 바람이었다.
인도에서 온 편지
1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서 만 8개월 만에 휴가 차 서울로 돌아온 장오는 왠지 모를 무력감에 빠져 일주일 내내 꼬박 집에서 잠만 청했다.
아내와는 별거중이었고, 아이들은 부산에서 올라온 칠순의 모친이 건사하고 있었기에 막상 집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었다. 러시아에서 근무하는 동안 부실한 음식에 시나브로 건강이 쇠약해진 탓인지, 한국인과는 감성지수가 영 딴판인 러시아 사람들과 부대끼며 받은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장오는 마치 약 먹은 병아리처럼 한 동안 쏟아지는 졸음에 겨워 비몽사몽으로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머리에 불쑥 떠올랐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는 수첩을 꺼내 그 사람의 전화번호를 찾기 시작했다. 정향숙. ㅈ 자 란을 몇 번이나 훑어보았지만 그녀의 이름이 없었다.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음직한 페이지에는 흐릿한 글자의 흔적만 있고 이름도 전화번호도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잠실에 있던 그녀의 아파트를 두 번이나 찾아 간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예 동(凍)과 호수(號數)도 기억나지 않았다. 지난 8개월 동안 러시아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녀의 이름을 한 번도 머리에 떠올리지 않았을까. 언젠가 자취하는 아파트에서 그릇을 씻다가 와이셔츠 주머니에 넣어둔 수첩이 개수대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 때 연필로 써둔 것이 그만 물에 얼룩져 날아가 버린 것이리라 짐작될 뿐이었다.
지난 겨울, 장오와 그녀는 명동의 어느 맥주집에서 함께 마주하고 있었다.
“러시아로 가지 않으면 안 되나요?”
그녀가 애원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1월 초에 방한하는 볼쇼이 발레단 공연 초청장을 두 장 얻어 놨는데…”
맥주에 쓰린 가슴을 씻어 내며 그녀가 또 그렇게 말했다.
러시아행은 아내와 별거를 결심하면서부터 움직일 수 없는 일이 되어 있었다. 그런 개인적인 일은 차치하더라도 극동 러시아는 장오에겐 뭔가 새로운 일에 몰두할 수 있는 희망의 신천지로 여겨졌던 것이다. 장오는 장차 한국에서 생필품들을 가져가 러시아인들에게 팔고 그 댓가로 수산물을 받아 한국에 내다파는 일을 계획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수개 월 전부터 결혼에 대한 서로의 의중을 탐색해 왔었지만, 마치 설익은 감을 따서 한입 덥석 베어 문 아이들처럼, 그날도 마음의 행로를 찾지 못한 채 서로가 겉도는 말만 하고 있었다.
“아이가 자꾸 눈에 밟혀서…”
언젠가 그가 결혼이라는 단어를 끄집어 낸 적이 있었지만, 그녀는 한참을 생각하다 그렇게 은근슬쩍 비켜간 적이 있었다. 장오는 그녀와 잠시 멀리 떨어져 결혼이란 문제를 다시 한 번 찬찬히 생각해 볼 일이라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날 두 사람은 기약도 없이 헤어졌던 것이다.
장오는 그녀를 꼭 다시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러시아로 떠나기 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접속했던 그녀의 전화번호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장오는 입었던 옷을 도로 벗어던진 후 부리나케 책상서랍을 열어 그녀에게서 받았던 편지뭉치를 찾고 있었다.
2
인도 북부의 히말리야 산맥에 가까운 고원으로 여행을 왔습니다. 산정호수에 떠 있는 나무로 지은 호텔에서 민재와 둘이 밤을 보냅니다. 호수위에 비치는 달과 달 빛이 그려놓은 은빛 호수의 물결에 몽롱히 취해 봅니다. 이곳으로 오르기 위해 우리는 조랑말을 탔지요. 마치 성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4년 전 인도출장 길에서였다. 인도행은 방콕에서 비행기를 갈아 타야했다. 대기 시간이 무려 아홉 시간이었다. 방콕공항의 상공에는 한 떼의 먹장구름이 어디론가 쓸려가고 있었고 열린 창문으로 아열대 지방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얼굴을 덮쳐왔다. 통과여객구역(transit area)에서 스낵으로 허기를 때우고, 면세점들에 널린 관광상품들을 샅샅이 둘러봐도 도대체 그 긴 시간을 때울 엄두가 나지 않아 장오는 게이트 앞의 의자에 앉아 작정하고 월간잡지를 꺼내 들었다.
잡지의 광고문안까지 눈으로 핥듯이 읽어갈 무렵, 웬 젊은 여자가 어린 남자아이 하나를 데리고 다가와 그의 옆에 앉았다. 힐끔 곁눈으로 보니 김포공항의 출국심사대에서 함께 줄을 섰던 여자였다. 탈렌트처럼 얼굴이 자그마하고 턱이 갸름하게 생긴 여자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녀의 눈은 이지적이면서도 사뭇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의 발 앞에 놓인 것은 공병우 한글타자기였다. 어느새 공항청사의 마당에는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고, 머리 위로 밤 열 한 시 반 뉴델리·런던행을 알리는 시그널에 불이 들어왔다. 그녀가 아이의 손을 잡고 먼저 일어섰다.
“영국으로 가시나요?”
좁은 통로를 앞서 걸어가는 그녀를 향해 아홉 시간의 무료함이 불쑥 그에게 말을 시켰다.
“아뇨, 인도예요.”
명랑한 톤의 대답이 금방 돌아왔다. 그녀도 무진장 심심했던 모양이었다.
게이트 통로가 끝나자 계단 아래 넓은 대기실이 나왔고 체크인(check-in)을 하기 위해 잠시 기다려야만 했다. 대기실에서 장오는 자연스럽게 그녀와 나란히 앉게 되었다.
“인도에는 무슨 일로… 상사 주재원 가족인가요?”
“아뇨, 공부하러 가는 거예요. 곧 학기가 시작되거든요.”
“그럼 초행이 아니네요?”
“맞아요. 한 달 전에 미리 와서 대학등록도 하고, 살 집도 이미 얻어 놓았어요. 그 동안 아이 전학 준비하느라고 한국에 다녀오는 길이예요.”
“아이까지 동반유학을 한다구요? 그럼 아저씨는 어쩐대요?”
뜬금없이 그녀의 남편이 걱정되어 그가 그렇게 물었다.
“호 호 호… 제가 아이와 떨어져선 못 살거든요.”
재치 있게 그녀는 즉답을 피해갔다. 아이와 동반유학을 하게 된 이유야 어떻든 인도의 델리에서 장차 한국인을 접하게 될 일이 장오에겐 무엇보다 기뻤다.
“집에서 아이랑 지내면 김치도 담고… 하겠네요?”
“그럼요! 인도에 오래 머무실 건가요?”
그의 질문에 숨은 뜻을 그녀는 금방 알아차린 듯 했다. 과연 재치있는 여자로군. 그녀의 명랑하면서도 재치있는 말투에 장오는 호감이 갔다. 탑승수속이 시작되었다. 그는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며 서둘러 용건을 말했다.
“저희 회사 배가 인도에서 고기를 잡거든요. 한 달 정도 있을 건데… 김치 먹고 싶을 때 연락해도 될까요?”
“옵 코오즈(Of course)!”
그녀의 대답이 무우를 베듯 시원스러웠다. 그녀의 전화번호를 얻고 나니 장오는 큰 짐을 던 기분이었다. 아- 김치를 먹을 수 있다니... 그녀와 재회한 것은 TW-608호가 인도 서북부에 위치한 GOA 항으로 입항하기 이틀 전,뉴델리에서 체류한 지 열흘이 지난, 이른 3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3
350톤급 트롤어선인 TW- 608호를 인도 어장에 투입하기까지 장장 6개월이란 시간이 소요되었다. ’80년도 초반 파키스탄에서 모 수산회사의 기지장으로 일한 적이 있는 K씨가 S 어업 소속 선박명이 기재된 인도정부의 어업허가증을 들고 ’88년 8월엔가 그의 회사를 방문하였다. 당시 D수산으로부터 인수한, 북해도 명태어장에서 뛰다가 한일 간 어업협정의 결과로 퇴출된, 동 선박의 용처에 골몰하던 회사는 K씨의 제안을 받아들여 장오를 실무 책임자로 내세워 인도어장 진출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S어업에서도 처음에는 이란 어장의 대안으로 인도 어장 진출을 긍정적으로 검토한 모양이었지만 어장의 경제성이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끝내는 선박 투입을 거절했는지라, 속이 탄 인도측에서 그 대체선박을 구하기 위해 K씨를 단순브로커로 내세운 셈이었다.
K씨의 기억을 빌리면, 예전 파키스탄으로 올라가던 자기 회사 배들이 시험 삼아 인도 국경근처에서 그물을 내린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조기를 한 방씩 건져 올린 적이 있었다고 했다. 어느 선장은 밤에 스리랑카와 근접한 인도의 남부해협을 통과할 때 바다에서 조기가 꽥-꽥 하며 울어대는 소리를 들었다고도 했다. 그 선장은 그 때 그 조기떼들이 연평도에 산란을 하러 가는 길일 것이라 추측했다고 한다.
일견 인도 서부연안의 세로로 길게 늘어진 대륙붕을 생각하면 어종도, 어장도 다양할 듯싶지만, 유엔에서 200해리 경제수역이 결의된 1974년 이전에 어느 누구도 인도어장을 제대로 탐험한 자가 없었으므로, 물어보는 사람들마다 “고기는 있을게야.” 라는 애매한 대답만 들려주었다.
일개 수산회사가 단독으로 시험조업을 결행한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며 투기였다. 장오의 첫 번째 출장은 어장성을 검토하는 사전답사가 목적이었다. 약 한 달 동안 K씨와 동행하여 그는 인도의 서부지역, 특히 파키스탄과의 접경지역인 구자라트(Guzarat) 주를 중심으로 한 포구와 항만시설 등을 살피고 다녔다.
선박의 기지로 제일 적합하다고 판단된 포반다르(Porbandar) 항에서 이른 아침 어시장을 둘러보았는데 병어 ,조기, 민어, 갈치, 한치와 갑오징어 등이 눈에 많이 띄었다. 당시 조기,한치는 국내 어가가 좋은 어종이었고,병어와 갑오징어는 일본판이 좋았다. 문제는 입어허가 조건인 24마일 이원(以遠)의 어장형성 여부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장오가 처음으로 만난 인도는 충격과 혼돈 그 자체였다.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에서 입국심사를 받기위해 기다리던 중 배가 아파 달려간 화장실에서 그는 그만 손수건을 휴지통에 버려야만 했었다. 쪼그리고 앉는 변기의 왼편에 웬 수도꼭지가 달려있었는데 그것의 용도를 안 것은 훨씬 나중 일이었다.
마침 그 때가 라마단 시기여서 공항주변에는 성지 순례를 떠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얀 무명옷을 입은 채 그냥 아무데서나 누워 사람의 발길을 무디게 했다.
후덥한 기후와 코를 찌르는 낯설고도 생소한 냄새들. 봄베이 해안가에서 만났던, 몇 십 년 째 먼지를 둘러쓴 남루한 석조건물들과 창문마다 행려병자처럼 널려있던 빨래들. 돼지움막 같은 집안에서 긴 의자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던 생기 없는 눈빛의 공창(公娼)들과 공기 중에 날아다니던 만연한 황사(黃沙). 땟국물이 덕지덕지한 천막 안에 나뒹굴고 있던 쭈그러진 양은그릇과 거적으로 된 잠자리들. 연료로 쓴다고 호떡처럼 손으로 빚어 바람벽에 발라둔 시골마을의 쇠똥들… 들판에서는 여인네들이 이륙하는 비행기를 향해 함부로 허연 궁둥이를 까며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다. 그러므로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가축들이 차라리 정답고 아름다웠다.
4
혼탁과 남루. 올드델리와 봄베이의 거리 곳곳에서 장오가 느낀 인도의 첫 이미지가 그랬다. 아프리카 흑인들의 윤기나는 피부와는 달리, 사람들은 거의가 마치 때에 절은 듯 탁한 느낌의 검은색 피부였는가 하면 헐벗은 농토를 버리고 도시로 몰려온 집 없는 빈민들의 무리들이 하늘을 지붕 삼아 도시 곳곳에서 잡초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도시의 풍경은 시궁창 같은 역겨움과 인도 특유의 향신료 냄새로 범벅이 되어 그의 눈과 코를 괴롭혔다. 한번은 여행자 상대의 싸구려 호텔에서 토스트와 커피를 주문한 적이 있었는데, 써빙하는 웨이터가 가져온 커피잔이 이빨이 빠진데다가 컵 안에는 잘 씻지 않은 녹차잔처럼 누런 얼룩이 끼어 있었다. 더욱 기가 찬 것은 닳아서 너덜너덜한 소매깃 밖으로 드러난 웨이터의 시커먼 손과 손톱 밑에 낀 새까만 때를 보고 그만 등 뒤로 소름이 돋았던 것이다.
구자라트(Guzarat)에서 돌아온 두 사람은 뉴델리의 다랴간즈(Daryaganj) 에서 출판인쇄업을 하는 인도 대방사(對方社) 사장인 ‘누스라트 알리(Nusrat Ali)’씨를 만났다. 어시장에서 목도한 어종을 감안하면 어장의 경제성은 희망적이라고 판단되었다. 다만 지속적으로 조업이 가능한 어장을 찾는 일이 숙제로 남아 있었다.
알리씨는 오십 초반의 얼굴이 길고 ,매부리코에다가 윗머리가 훌렁 벗겨진 이슬람 교도였다. 줄담배인 골초였는데 엄지와 검지로 구멍을 만들어 파이프인 양 거기다 입술을 대고 담배를 빨아들이는 모습이 왠지 음흉스럽게 느껴졌다.
인도입어의 형식은 외국어선의 용선규칙(The chartering regulation of foreign vessel)이란 법률에 근거했다. 내용인즉 인도에서의 어업운영자는 당연히 인도인이어야 하고 인도선원들의 수는 전체 승무원 수의 25프로 이상이어야 하며, 어획고의 20프로를 어업운영자의 몫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측에서 보면 이 20프로가 용선입어료인 셈이었다.
이런 것은 어디까지나 서류상의 구비조건이지만, 정작 선박운항 상의 요구사항이 고민이었다. 어장은 인도 서부해안의 24마일 외측으로 제한하고 있었다. 또 하나, 어획물의 하역은 반드시 인도 내의 항구에서 세관의 입회 하에 행하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어장의 제한구역 설정은 연안어민들과 유전시설의 보호, 군사적 목적 등을 위한 것이었지만, 산란을 위해 또는 몬순씨즌 육지에서 쏟아지는 유기질 영양물을 찾아 연안으로 몰리는 떼고기를 잡는데 있어서 24마일 규정은 거의 치명적인 장애요소였다. 또한 어획물 하역을 위한 매 항차 입항은 비조업일수를 증가 시킬 뿐만 아니라 어장과 인근한 적소의 항구를 찾기가, 또 업무지원을 위한 직원 파견 등의 어려움 등이 내포되어 있었다.
한 가지 더 신경을 쓰이게 하는 대목은 어획고의 금액산정 기준을 인도 당국이 정하는 국제시세로 적용한다는 것이었는데, 어획물이 외국으로 반출될 경우 인도에서는 수출로 간주되므로 수출세를 납부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이 정한 국제시세는 한국이나 일본 어가와 상반되는 것이 많았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100원 짜리 고기가 그들의 시세로는 1,000원이 되는 식이었다.
영국의 식민지를 겪은 나라인지라, 정부의 규정은 문자 그대로 엄격하고 빈틈이 없었다. 그러나 장오가 알리씨와 계약을 하자고 마주했을 때는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법의 집행과 운영을 맡은 사람들의 재량이었다. 그러나 그 놈의 재량 때문에 장차 그가 겪어야만 했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5
인도에서는 식사를 해결하는 것이 제일 큰 고민이었다. 두 번째 출장부터는 마지못해 미국의 호텔 체인인 홀리데이 인(Holiday Inn)에 투숙하여 호텔에 있는 중국식당을 단골로 이용했다. 뉴델리에는 한국식당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식당조차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벌써 세 번째 방문이었지만 장오는 그 때까지 인도음식에 적응하지 못했다. 아침과 점심은 언제나 바나나와 우유로 때웠고 저녁은 샥스핀 스프에 계란이나 새우 볶음밥으로 해결했다. 수돗물도 석회질이 많아 늘 생수병을 달고 다녀야만 했다. 한 번은 구자라트에서 물 때문에 설사를 만났는데 화장실을 찾는 일도, 휴지를 구하는 일도 불가능해 어릴 때 소 찾으러 산에 갔을 때처럼 길옆으로 들어가 반반한 돌로 해결하였던 적이 있었다.
도회지의 빈민들도 그렇지만, 시골도 민가에는 대부분 변소가 없고 소나 개처럼 생각날 때마다 사람들을 피해 땅에 쪼그리고 앉으면 그만이었다. 포반다르(Porbandar)의 어느 골목길에서는 개와 소와 아이들이 내질러 놓은 똥들을 피해 걷느라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였다. 그것이 천연이고 원시이며 자유고 평화였음을 깨닫기에는 아직 시간이 일렀다.
토요일 오후. 열흘 동안이나 버텨온 메마른 식사로 머리가 허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장오는 마지못해 그녀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집주인이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학교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의 귀가를 기다리는 동안 장오는 알리씨로부터 인도의 역사를 배웠다.
아쇼카 왕조에서는 불교가, 무굴제국에서는 이슬람교가 힌두교와 더불어 공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시절만 해도 종교 간의 갈등이 없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인구의 80프로인 힌두교인과 고작 10프로에 불과한 이슬람교도간에 왕왕 살육을 부르는 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 쉽게 납득이 가질 않았다. 종교의 모순은 신념에 따른 맹종을 요구할 때 비롯된다. 석가는 입적할 때 절도 짓지 말고 종파도 만들지 말라고 했다지 않는가.
이슬람교도라 그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 주말이라 소주에 삽결살이 생각났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틀 뒤면 돼지고기와 소주를 잔뜩 실은 TW-608호가 도착할 예정이었다. 1시간을 기다린 끝에 그녀와 통화가 되었다. 저녁을 얻어먹으러 가도 되겠느냐고 묻자 그녀가 즐거운 목소리로 승낙했다. 문화인인 알리씨가 프랑스산 적포도주를 한 병 종이에 싸주었다. 장오는 그로부터 차와 기사도 하루저녁 빌렸다. 그녀의 집으로 가는 길에 그는 바자르(시장)에 들러 나리과의 노란색 꽃을 한 묶음 샀다.
꽃과 포도주. 문앞에서 그녀가 화사하게 웃었다. 웃는 그녀의 볼에 능금빛 홍조가 반짝 물들었다가 사라졌다. 그런 그녀가 마치 아주 그리웠던 사람이기나 한 것처럼 그 순간 장오는 잠시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그녀와 그녀의 어린 아들을 존중하고 싶었을 뿐 결코 다른 마음은 없었다.
반찬으로 김치대신 배추 겉절이가 나왔다. 날리는 쌀로 지은 밥이 숟가락에 곱게 담기지 않아서 그랬는지 그녀는 중국식 볶음밥을 만들었다. 겸손하게도 그는 맵싸한 겉절이와 고추장으로 입맛을 달랬다. 식탁에는 붉은색 굵은 초를 켰으며 바닥에는 벌써 인도식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아이를 재운 뒤 두 사람은 식탁에 앉아 어른거리는 촛불을 마주하고 남은 포도주를 나눠 마셨다.
“무슨 과목인데요?”
“미술이에요. 회화.”
“그림이라면 왜 인도에서 굳이…?”
세느강과 세쟌느의 이름을 동시에 떠올리며 그는 그렇게 물었다.
“그림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고, 실은… 인도를 배우는 거예요.”
그녀의 남편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녀의 뜻이 그렇게 고귀한 바에야 그 순간 그가 남자일 필요도 없었다. 시간이 꽤 흘렀다.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내일이면 고아(Goa)주의 ‘바스코 다 가마’ 항으로 떠나며 돌아올 땐 김치를 양껏 가져 오겠다고 말했다. 대문을 나서는데 그녀가 등 뒤로 쫓아오며 그를 불러 세웠다.
“저기요… 황 선생님 같으면 읽으실 것 같아서요.”
그녀가 건넨 것은 손때가 묻지 않은 소설책이었다. 제목의 끝이 비였다. 그녀가 소설가였음을 알게 된 장오는 너무 뜻밖이어서 순간 감격했다.
6
해발 356미터에 자리한 뤼쉬케쉬(Rishikesh)에 왔습니다. 이곳은 힌두교의 성지로 유명한 곳이지요. 전 세계의 유명하다는 아쉬람(Ashram)들이 몰려 있고, 명상프로그램을 통해 성자나 초인이 되려는 영혼들이 끊임없이 몰려드는 곳입니다. 걸인 행색을 한 히말리아의 수행자인 사두(Sadhu)를 만나 물었습니다. 당신의 고행은 무엇을 위함입니까? 내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가 이윽고 말했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함이라고… 백 루피 지폐 한 장을 그의 손에 쥐어주며 나는 왠지 모를 부끄러움과 슬픔에 사로잡혀 한 동안 정신을 놓고 말았습니다.
고아에서 장오는 꼬박 20일을 허비하고 말았다. 선박입어의 선결조건으로 선박안전검사를 받아야만 했었는데 문제는 선박검사관이 보리수 나무그늘 아래에서 묵상하는 성자였기 때문이었다. 외국어선이 인도에서 활개치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그의 신념 때문에 일주일, 일이 바빠 시간을 낼 수 없다고 또 일주일을 뭉기적거렸다. 관리들의 부정과 부패가 심하다는 얘기는 진즉에 들은지라 처음에는 인도 대방사 직원을 시켜 돈 봉투를 내밀기도 했지만 그도 본 체 만 체하였으므로 장호는 미치고 폴짝 뛰고 싶었다.
인도 수산청으로부터 입어허가서상의 선명개서(船名改書)를 받는데 소요된 시간이 2개월이었는지라 참는 데는 이력이 붙었지만, 통과의례인 선박검사에까지 그렇게 시간을 지체하고 있자니 본사에 대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팔을 걷어붙이고 찾아간 해안가에 인접한 그의 집무실은, 아니나 다를까 수령이 몇 백 년은 되어 보이는 우람한 보리수나무 그늘 아래 있었다.
어선의 경제성은 일단 출어가 시작되고 나면 조업일수의 극대화가 제 일순위다. 어선이 항구에 일없이 묶여 있다는 것은 조업손실로 직결되며, 더구나 그것이 선주의 행정미숙에 기인한다면 선원들로부터 이유 불문하고 매 맞을 일이었다. 검사관은 까무잡잡한 얼굴에 산적두목 같은 눈썹을 한 뚱보였는데, 인도어장에서의 어업협력을 통한 시험조업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에 대해 장오가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으나 그는 의자 등에 몸을 가눈 채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장오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더 이상 이유 없이 검사가 지연되면 상부기관에 고발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그의 사무실을 박차고 나왔다. 그의 열정에 감동했는지 아니면 독한 놈은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라고 여겼는지, 바로 이튿날 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두 시간 뒤에 배로 갈 테니 수검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라는 것이었다. 전 선원들은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이열 횡대로 갑판에 도열한 채 멀리서 쾌속보트로 접근하는 검사관 일행들을 기다리느라 침을 꼴깍거리고 있었다.
선원들로부터 거수경례를 접수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무굴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악바르 황제를 연상시켰다.
소방시설 점검 때는 갑판장이 동키호스를 들고 바다를 향해 힘차게 해수를 쏘아 올렸는데 그가 그만하라는 말도 없이 딴 곳을 기웃거리는 바람에 온 갑판이 물바다가 되기도 했다.
승선 삼십 분 만에 산적두목은 오천 루피의 돈 봉투와 죠니워커 다섯 병과 영국산 던힐 담배 다섯 보루를 보트에 싣고 유유히 사라졌다. 조업에 굶주린 TW-608호는 그날 오후로 냉큼 바다로 나섰다.
그녀는 58년생 개띠였다. 책머리의 저자 이력에는 그간의 작품목록이 여섯 개나 되었는데 모두가 생소했다. 저자근영(著者近影)이란 사진은 안경을 끼고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이었는데 실내의 광선처리가 미숙했는지 실루엣이 명료하지 않은 게 조금 거슬렸다. 소설은 밋밋하고 싱거웠다. 남녀의 애정씬에서는 키쓰조차 피해갔다.
그녀가 공병우 한글 타자기를 들고 있던 모습이 그제서야 장오의 머리를 관통했다. 그러나 그녀가 유명작가가 아닌 것이 오히려 안심이었다. 선박을 출항시키고 뉴델리로 돌아와 약속대로 양철통에 담긴 선박용 김치 한 통을 그녀에게 건네느라 장오는 한 차례 더 그녀를 만났다.
전화로 들려오는 그녀의 말로 짐작컨데 그녀는 학교생활을 무척 재미있어 하는 눈치였다. K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서울의 모 여중학교 국어선생을 한 경력이 있다고 했으므로 그녀가 늦은 나이지만 학생노릇은 잘 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지만 영어로 진행되는 학습이라 이론적인 면에서는 아무래도 좀 걱정이었다. 김치통을 들고 그녀의 집에 도착하고 보니 인도대학에 유학 온 무용전공의 한국 처녀 두 명이 와 있었다. 첫 눈에 그녀들에게 김치를 나누어 주려는 그녀의 배려를 읽을 수 있었다. 그 날 장오는 젊은 처녀들에게 눈길을 주다가 그녀와 개인적인 얘기는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한 채 헤어지고 말았다.
인도조업은 순탄하지 못했다. 어장을 제대로 찾지 못해 어탐이동일수가 허다했다. 갑오징어는 구경도 못하고, 병어는 한 마리도 올라오지 않았다. 답답해진 선장이 야음을 틈 타 연안 10 마일 안으로 침범해서 서너 번 조기떼를 건져 올렸지만 곧 해군경비대의 레이다에 포착되어 인도 대방사로 경고전문이 날라 들었다.
선장도 선원도, 데스크의 장오도 애가 탈 노릇이었다. 시험조업의 경우 조업의 불예측성을 감안하여 선원들에겐 고정급의 비율을 높여 소득보장을 회사가 책임져야 했음에도 갑과 을 모두 대박의 꿈만 쫓아 보합제 계약을 한 것도 애간장을 태우는 원인이었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오래지 않아, 한국에 돌아온 지 두 달도 채 안되어 장오는 다시 인도행 비행기를 타야만 했다.
7
배는 파키스탄과의 접경해역에서 연안어장을 기웃거리다가 인도 해군 경비정에 덜미를 잡혀 포반다르항에 억류되어 있었다.
알리씨는 이런 경우 어떻게 손을 써야하는지를 몰라 장오의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지난번 수산청으로부터 어업허가서를 발급 받을 때 알리씨가 보인 행정수완을 익히 아는지라 그가 이번 일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장오는 전전긍긍했다.
행정재판을 받아 벌금을 받는다 해도 인도에서라면 빨라도 3개월의 시간이 걸릴 일이었다. 그래서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은 상책이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알리씨는 대학을 나온 인텔리에다 출판업을 하는 문화인이었지만 부모가 내린 올드 델리의 그 많은 땅들을 다 팔아먹고 지금은 겨우 책이나 찍어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그는 영락없는 몰락한 양반집의 무능한 아들이었다.
공무원들에게 급행료를 지불한다든지, 사업상의 일로 관리들에게 소원하는 일 등은 알라신의 계율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며 양반체면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행여 자기에게 장차 큰 불벼락이라도 떨어질 것은 아닌지 걱정만 태산이었다.
궁리 끝에 인도를 소개한 K씨가 장오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라면 해결사를 한두 명 쯤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K씨가 소개한 친구는 산지브 칸나(Sanjiv Kanna) 라는 삼십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그는 장오와도 면식이 있는 친구였다. 그도 한국어선들을 인도에 입어시키려는 욕심이 있어 지난 번 출장때 어찌어찌 물어 호텔로 장오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칸나는 그 방면에 유능했다. 곧바로 인척들을 동원하여 해군사령부의 높은 양반을 물색하였고 작업에 들어간 지 일 주일 만에 TW-608호를 해방시켰다. 벌금으로 미화 5만 불이 지불되었고 그의 수고비로 5천 불이 지급되었다. 선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으나 장오는 선․기장과 사관들을 다독거려 겨우 배를 출항시켰다. 배를 떠나보낸 후 포반다르항의 한적한 방파제를 걸어서 돌아올 때 그의 심정은 참으로 막막했다.
억류된 배에 타고 있던 해군장교 하나가 가리키는 갑오징어의 주요 서식지는 연안 3마일 안쪽이었다. 라스팔마스를 기지로 아프리카 서안어장에 입어하는 트롤선들은 갑오징어를 쫓아 수심 5미터 모래밭에까지 기어오르다 배가 백사장에 얹히기도 했다지 않는가. 그곳에서는 기총사격을 하는 경비정을 피해 내린 그물을 칼로 끊어내고 도망하는 경우도 허다했으며, 그냥 대책없이 만세를 불렀다가 뜨거운 사막의 수용소에 갇혀 일 년 이상을 썩었다는 선장이 한둘이 아니었다. 종내 어장을 찾지 못한다면 저 선원들의 아우성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차장님, 해군 경비정 단속을 미리 내통하여 알 수 없겠습니꺼?”
통영수전을 나와 대서양 어장 경험이 있는 선장은 장오가 요령부득이라 생각했는지 그렇게 물어 왔지만 자신이 없었다. 봄베이로부터 파키스탄 접경수역까지 종단하며 두어 차례 어탐을 해봤지만 여기다 싶은 어장을 발견 할 수 없어 그는 결국 연안을 쳐들어가는 불법조업을 감행한 것이었다. 훗날 파키스탄 어장에서는 그의 말처럼 해군 우두머리를 구워삶아 한시적으로 연안어장을 파헤쳐 재미를 본 한국선주들이 있었지만 결국 전 외국어선 철수라는 철퇴를 맞고 한국 조업선들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무릇 광활한 어장에서 어선 한 척으로 시기별로 목표어종을 정해 주년(周年) 조업지를 확보한다는 일이 처음부터 무모한 일이 아니었던가. 힘이 빠지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뉴델리의 수산청을 찾아가 해역별 어획통계를 조사하기도 하고, 인도의 서남부에 위치한 코친(Cochin)항으로 어업전문가를 배알하러 가기도 했지만, 참치연승 조업에 관한 얘기만 배터지게 들었을 뿐 24마일 이원의 트롤어장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했다.
코친에서 돌아온 직후라 기진맥진하여 아침도 거른 채 호텔에 누워 있는데 전화벨이 힘차게 울렸다.
“저예요. 마침 계셨네요. 오늘 오전수업이 없어서… 지금 로비에 와 있어요. 커피나 얻어 마실까 해서요.”
8
그녀는 암청색의 엷은 주름치마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 흰 살결은 아니었지만 로비의 의자에 다소곳이 앉은 모습이 청량한 느낌을 주었다. 간단한 경양식과 음료를 파는 그릴로 옮겨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그녀는 레모네이드를 시켰다.
“그래 학교 공부는 어때요?”
장오는 그녀가 마치 누이동생이나 된 듯 친근하게 물었다.
“선생님이나 급우들이 친절하게 대해줘 재밌게 지낸답니다.”
그녀는 그의 출장간 일에 대해 물었고, 그는 그녀의 아들이 초등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는지를 물었다. 아이들이란 환경만 좋으면 언어장애는 금방 따라가는 법이었다.
“민재가 벌써 영어로 일기를 쓴답니다. 아이들의 언어로 생각하고 표현하지만 내가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선박일로 마음이 무거웠으나, 대방사간 운항경비 정산만 마치면 다음 주 화요일 비행기로 귀국할 계획이었다. 머리도 식힐 겸 오늘 하루는 그녀와 시간을 보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황 선생님은 인도구경을 많이 하셨겠네요?”
외국출장을 더러 다닌 편이었지만 생각이 짧아 의도된 관광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습관화된 주입식교육과 치열한 생존경쟁 같은 직장생활 탓인지, 외국에 나가도 항상 과업완수가 최우선이었고 시간이 남아돌면 겨우 한다는 생각이 술이나 토박이 여자를 찾아 환락가를 기웃거리는 일이었다. 박물관을 찾고 유네스코에 등록된 문화유산을 찾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오로지 그녀를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장오는 먼저 그녀와 함께 릭샤를 타고 인디라 간디의 기념관을 찾았다. 구경을 마치고 난 후 시장기를 느낀 그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외관이 그럴듯한 어느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인도음식에 익숙한 듯 탄도리 치킨과 로티를 주문했다. 양파와 채소를 썰어낸 샐러드와 따뜻한 물에 레몬을 띄운 찻잔모양의 사기그릇이 먼저 나왔다. 장오는 그것이 아침에 그녀가 마신 레모네이드인가 싶어 그릇의 물을 한 모금 홀짝 마셨다. 그때 그녀가 입을 가리며 킥킥거리고 웃었다. 그러고는 그녀가 장오에게 보란 듯이 오른손을 그릇에 담그며 손가락을 꼬무락거렸다.
맨손으로 로티를 찢고 닭살을 뜯어 커리를 묻혀 손으로 집어먹는 맛이 일품이었다. 생강과 레몬즙을 섞은 매콤한 양념을 발라 탄도리에 구워낸 닭고기에, 각종 향신료를 배합해 국물이 있도록 끓여 낸 흔히 카레로 통하는 커리와, 기름에 부친 밀가루 떡인 로티를 손으로 버무려 입에 넣고 씹는 맛이 각별했다. 맨손으로 음식들을 함께 버무리는 것이 그 맛을 배가시킨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미련하고 게으른 그가 인도식으로 인도음식을 처음 맛보는 순간이기도 했다.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누면서 얘기를 하다 보면 상대에 대한 친밀도가 급속도로 높아지는 법. 식사를 마치고도 두 사람은 서로 헤어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가 또 릭샤를 불렀다. 두 사람은 뉴델리에 영국인들이 꾸며 놓은 센트럴 파크를 찾아갔다. 영국식 공원이 다 그러하듯 공원 안에는 조그만 늪이 있고 오리나 백조들이 수면위로 떠 다녔다. 두 사람은 키 큰 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는 잔디밭으로 가, 앉거나 드러누운 자세로 얘기를 나누었다.
“남편은 뭐하시는 분인가요?”
“시향에서 연주하는 사람이예요.”
“유학비용대랴, 혼자 살림하랴 고생이 많겠네요.”
“…………”
남편에 대한 질문이 계속되자 그녀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9
바라나시에 왔습니다. 도시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강가(Ganga:갠지스 강)에 맞닿은 가트(Ghat:돌 계단)에 나앉아 역사보다, 전설보다 더 오래된 이 도시의 진경을 바라 봅니다. 사람과 짐승들의 배설물과 화장한 시신들의 잔해까지 보듬고 강물은 성스럽게 흐르고 있습니다.
어떤이는 그 강물에 얼굴을 씻고 기도를 올리고, 어떤 이들은 빨래를 합니다. 심지어 이 물을 마시면 마음을 정갈하게 한다고 믿는 이도 있습니다.
영국인들은 이를 두고 야만이라 했다지만 관습과 인식의 차이를 무시한 저들의 무지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저들의 믿음을 흉내낼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곳에서 재가 되어 강가에 뿌려지면 영원히 태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죽음이 생각나면 다시 이곳으로 오리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힌두교인을 따라 놋쇠그릇에 강물을 떠 담았습니다. 집에 돌아가 목욕할 때마다 한방울 씩 목욕물에 떨어뜨린다고 일러 줍니다.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선 극히 말을 삼가는 그녀에게 내심 당황했지만, 언젠가 미국에서 접대차 나온 젊은 여자에게 결혼했느냐고 물었다가 그녀가 그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가버린 일이 생각나 몸에 배인 사적인 궁금증은 접기로 했다. 그러므로 장오는 다만 그녀의 인도 공부를 도우는 조력자의 역할에 만족하기로 했다.
이튿날은 그녀와 그녀의 아들인 민재와 함께 버스로 5시간이 걸리는 아그라(Agra)의 타즈마할을 찾았다. 타즈마할은 무굴제국 5대 황제였던 샤자한이 총명하고 지혜로웠던 부인 뭄타르마할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22년에 걸쳐 지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화려한 무덤이었다. 순백색의 대리석으로 지은 본당내부로 들어설 때 그들은 신발을 벗어야만 했다. 본당내부의 창틀과 천장에는 대리석에 홈을 내어 박아 넣은 색색의 돌과 보석들이 꽃문양을 이루어 오묘함을 자아냈다.
“모자이크의 일종인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 기법이래요. 설계는 이란 사람이 했고 1630년대에 이 걸작을 만들기 위해 이탈리아, 프랑스, 중국 등지에서 내노라 하는 최고의 건축 기술자들이 초빙되었다고 해요.”
“대단한 열정이네요. 왕비에 대한 사랑이 이렇듯 아름다운 건축물로 남는다는 게…”
그녀는 여행지마다 유적에 얽힌 유래와 역사 등을 사전에 미리 메모해 놓고 있었다. 소설가다운 습관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인근 야무나 강가에 자리한 아그라성(Agra Fort)도 구경했다. 무굴제국의 3대 황제인 악바르가 요새로 지은 성인데, 후일 샤쟈한이 궁전으로 변모시켰다 한다. 후궁들의 살았다고 하는 네모진 자그마한 방들이 정원을 가운데에 두고 사방으로 빙 둘러 있는 것이 이색적이었다. 포로의 탑이라는 뜻을 가진 무삼만 버즈(Musamman Burj)에 이르자 그녀가 또 메모수첩을 열었다.
“샤자한은 말년에 그의 아들인 아우랑제브의 학대에 쫓겨 이곳에 8년간이나 유폐되었대요. 저 강 아래 보이는 타즈마할을 향해 생전에 못다 한 사부곡을 부르며 쓸쓸한 여생을 마쳤다 합니다.”
무삼만 버즈에서 바라보는 타즈마할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고 고혹적이었다. 달밤에 홀로 성벽에 기대어 부인이 누워있는 타즈마할을 내려다보는 샤자한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 애틋한 마음을 가늠해 보았다.
여행에 재미를 붙인 참에, 월요일 저녁에는 그녀의 식구와 올드 델리의 붉은성(Red Fort)에서 영화를 구경했다. 더위도 식힐 겸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좀 더 그녀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서 장오가 제안한 데이트였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시절의 국내 정황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였는데, 그에겐 영화는 뒷전이고 옛 성터의 돌계단에 앉아 아이스케이크를 입에 물고 그녀와 담소를 나누는 즐거움이 지극했다. 그녀도 이심전심으로 영화에는 무심한지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아 손가락질을 하더니 그에게 불쑥 이런 말을 던졌다.
“인도에 흠뻑 젖어들고 싶어요. 인도인들의 태평스런 삶과 그 근원인 영혼의 자유에 대해서 말이예요.”
그는 인도의 궁색한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인도의 음식을 먹어보고, 타즈마할을 보자 점점 인도가 아름다운 나라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릭샤나 택시를 탈 때 벌떼처럼 엉겨드는 걸인 소년들조차 차츰 정답게 느껴졌다.
바로 그 다음 날 그는 한국행 비행기를 탔고, 그 후 그녀로부터 인도기행에 관한 짧은 편지들을 받기 시작했다.
10
12/8 N 18.30 E 70.25 한치 4톤 봄베이 서남어장 어탐중. 선장
12월이 되도록 7개월간에 걸친 어획량은 400톤에 불과했다. 라스팔마스 기지트롤선 일 년 평균 어획량인 1,000톤에 비해 형편없는 어획고였다. 주 어장을 찾지 못해 사방팔방 널뛰듯이 어탐만 하느라고 실조업일수가 150일도 채 안되었다.
한치를 잡았다는 어획보고는 가뭄에 콩 나듯 하였고, 이곳이 어장이다 싶어 두 번째 투승을 하면 그물에 해초만 잔뜩 걸려 올라오는 그런 식이었다. 잡어도 좀 잡았다 하면 능성어나 민어 일색이어서 국내시세가 형편없는 어종이었다.
선내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음은 불을 보둣 뻔한 일이었다. 어로계약의 수정을 하든지, 아니면 직책별 보장급제를 도입하든지 결단이 요구되는 싯점이라 판단되어 장오가 사장에게 고언을 드렸으나 배가 깨지는 한이 있어도 계약수정은 불가하다는 말씀만 내렸다. 신어장 개척에 대한 철학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엔 포클랜드 어장에서 오징어채낚이 어선들이 이익을 많이 내고 있었는지라 회사 전체 경영수지를 놓고 볼 때 TW-608호 한 척에 투자를 한다 해도 큰 무리는 아니라 생각되었지만 오너의 결심이 요지부동이라 장오만 죽을 맛이었다. 바다에는 고기가 산다. 고기가 있으니 어장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단독조업으로 어장을 찾는 데 어려움이 따를 뿐이었다.
타 업체에서도 초기엔 인도어장의 어획결과에 관심이 집중되었고 심지어 장오에게 인도입어절차를 물어오기도 했었다. 답답한 나머지 그 회사들을 붙들고 동반출어를 종용해 보기도 했지만 조업실적이 부진하자 모두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단독조업의 애로가 어떠한지 선장의 고충을 생각하노라면 측은한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그의 널뛰기식 어탐이 맘에 들지 않았다. 처음 탐험한 봄베이 서남어장에서는 요리도리라는 손바닥만 한 빨간색 돔이 꽤 잡혔지만 어가가 문제였다.
크리스마스를 열흘 앞두고 장오는 을지로 지하상가에서 캐롤송 테잎과 조그만 트리 셋트를 사서 항공우편으로 인도의 그녀에게 보냈다. 눈이 오지 않는 상하(常夏)의 나라에서 화이트 크리스마스 캐롤송을 듣는 기분이 궁금했다.
트리를 세우고 깜빡이는 불빛을 바라보며 캐롤송을 듣습니다. 한국이 그립고, 겨울바람이 그립고, 귀한 선물을 보내주신 선생님이 고마워서 눈시울을 붉힙니다.
정월 중순 무렵 그녀로부터 짧은 서신이 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선박으로부터 아랍 에미레이트의 두바이 항으로 긴급입항한다는 전문이 날아들었다. 유류보급이 핑계였지만 선원들의 조업거부가 원인인 듯 싶었다. 며칠 째 어탐보고만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중동판이 유리한 잡어가 60여 톤 실려 있었으므로 현지판매를 위해 두바이에서 선구대리점을 하는 현지교포를 통해 어가 견적을 부탁한 후 장오는 다시 출장을 서둘렀다. 인도 대방사로부터 매 항차 발생하는 항비정산서가 월별로 답지했으나 비용명세서에 불명자료가 많아 이참에 인도에도 들러 시시비비를 가릴 생각이었다. 매부리코 양반이 기타로 분류한 것은 거마비라 둘러대었으나 엉터리가 분명했다. 인도에서 두바이로 오가는 여정이었다. 짐을 꾸리기 전에 그는 남대문 시장으로 가 그녀에게 선물할 건조미역과 건멸치를 샀다.
인도에 도착하자 말자 장오는 일전에 신세를 진 산지브 칸나를 만났다. 그에게 연안어장 침범을 위한 보험(?)을 들 방안을 연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날 저녁 그녀가 호텔로 잠시 들렀다. 그가 가져온 선물을 건네자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표정을 지었다. 감사하다는 뜻을 몸짓으로 보이는 그녀가 기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두바이를 다녀와 다시 연락할게요.”
“저도 따라 갔으면 싶어요. 그 쪽 더위가 대단할 텐데…”
“제가 선박일로 가기 때문에 같이 가도 별 도움이 안 될 겁니다.”
여행이라면 자다가도 깨는 여자인가 싶었다. 선원들한테 부대낄 생각을 하니 장오에겐 그녀의 호기심을 채워줄 여유가 없었다.
11
공항에는 정석인 씨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각오는 했지만 인도의 날씨가 건조하고 따끈따끈하다면 아랍 에미레이트는 습도가 높고 뜨끈뜨끈한 느낌이었다. 머리가 짓눌리는 듯한 뜨거운 태양은 차마 올려다 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에어컨을 튼 차에서 내리면 안경에 뿌옇게 김이 서렸다. 아라비아해의 오만만에 가까운 후지와라 항에 배가 입항을 한지라 두바이에서 사막을 가로지르며 길게 뻗은 도로를 차로 3시간 여 달려가야만 했다. 기름이 나지 않았다면 중동사람들은 여태도 양을 치는 유목민들로 살았을 터였다. 나무가 자라는 산 같은 산은 보이지 않았고 길가엔 바위덩어리 일색의 황량한 언덕만 드문드문 누워 있었다. 역사는 밤에 쓰여진다는 말을 한 사람은 그 옛날 페르시아인이었을 것이란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우선 하역작업을 시켰다. 컨테이너작업은 낮에는 엄두가 나질 않아 오후 5시 무렵부터 일을 시작했다. 부두에 서 있자니 한증막에 앉아 있는 듯 땀이 온몸을 적시며 줄줄 흘러 내렸다. 세 컨테이너 분량의 고기는 정석인 씨가 처분했다.
능성어나 부레를 먹는 민어류는 중동사람들이 즐겨 먹지만 비늘이 없는 문어나 오징어류는 이슬람의 계율로 먹지 않는다고 했다. 값비싼 새우류는 석유냄새가 나는 해역에 많이 서식한다. 이란 어장에 입어했던 S 어업의 경우 입어료조로 어획물 중 비늘고기를 현물로 주고 새우나 갑오징어 등 고가어종을 남겨 재미를 보았는데, 하도 어획물의 종류와 수량을 속여 먹은 탓에 거짓말을 싫어하는 아랍인들의 노여움을 사 쫓겨났다고 들었다.
하역을 끝낸 다음 날 선장이 불러 배로 가니 선원들이 죄다 선내식당에 모여 장오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원들은 돈이 안 되니 여기서 전부 하선을 하겠다고 했다. 장오는 선주의 동의 없이 무단하선을 하면 귀국 항공비는 본인들이 부담해야 하는 것을 아느냐고 선원들을 다그쳤다. 올 것이 왔구나 싶어 그는 마음을 모질게 다잡았다. 그 때 조기장이라는 작자가 험상궂은 얼굴로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시펄- X같게 생겨갖고… 비행기 삯 낼 돈이 어딨어?”
어로계약에 명시된 문구를 무시하고 막가자는 얘기였다. 처자식을 떼어놓고 먼 이국의 바다에서 조그마한 배에 몸을 의탁하고 사는 뱃사람들의 애환은 그렇다 쳐도 그들의 한결 같은 소망은 대어만선(大魚滿船)이었다. 고기가 많이 잡혀야 고된 어로작업으로 인해 쑤시는 삭신의 고통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잊어버리는 법이었다. 이것은 조어(釣魚)를 취미로 삼는 낙시꾼들에게도 마찬가지 이치였다. 고기를 못 잡는 그들의 지금 심정이 오죽하랴, 그러나 조기장의 일성은 좀 심했다 싶었다. 여기서 자칫 물러서면 배를 달아매는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선장은 이미 그의 권위를 상실한 분위기였다.
“그래- 시방 내가 당신 X같이 생겼다켓나? 어디 니 바지 풀어봐라. 니 물건이 내 얼굴 같기만 하면 조기장은 공짜로 비행기 태워 준다.”
조기장의 서슬에 잔뜩 긴장감이 감돌던 식당 안은 장오의 응수에 그만 웃음바다가 되었다. 선내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사람들로 빽빽한 식당 안은 무더웠다. 장시간 입씨름을 하고 있을 형편이 아니었다. 각설하고 그는 미리 생각해 둔 답안을 내밀었다.
“어획실적이 나빠 회사도 죽을 맛이다. 여러분들에게 굳이 신 어장 개척의 사명감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다만 회사의 정책에 따라주는 대가로 어획고와 상관없이 일인 몫의 보장급으로 백만 원을 지급하겠다.”
보합제 선박에선 최하급 선원의 몫을 1인 몫으로 친다. 배에서 먹고 자고 한 달에 백만 원이라면 당시로선 그리 낮은 수준은 아니었다. 고기를 좀 잡았다하는 배가 정산하면 일 인 몫이 백오십 만원 정도였으니깐. 그 때 회사 차장인 그의 월급이 백 오십만 원이었다. 모두들 자기 인몫수를 떠올리고, 매월 회사에서 지급되는 생계비를 생각하고, 돌아가면 목돈으로 얼마를 찾을 것인가를 머리속으로 각자 분주히 계산했다.
갑판장은 그래도 24개월 고생은 무리라고 했다. 장오는 선원교체를 하더라도 6개월의 시간은 있어야 된다고 그를 타 일렀다. 어차피 조업에 재미를 잃은 자들이기에 계약만기는 기대할 수 없다고 보았다. 선원들을 진정시킨 후 회식하라고 양고기를 보너스로 실어주었다.
중동지역에 주재원으로 살다온 어느 선배는 아이들이 허구한 날 쇠고기보다 양고기타령이라서 애를 먹는다고 했다. 정석인씨를 따라 간 식당에서 양고기 특유의 노린내를 양념으로 죽인 다음 뜨거운 돌 위에 구워낸 불고기 맛은 별미였다. 식후에 담뱃대 주둥이만한 종지에 담아주는 독한 터키식 커피는 입안의 느끼한 잔재를 말끔히 잠재웠다.
배가 출항하기 전에 갑자기 선원 세 명이 보따리를 싸고 배에서 뛰어 내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선박 대리점으로 내달렸다. 뱃전에 기대선 선장이 그 광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그냥 집에 보내주라고 했다. 처음 배를 타는 초자여서 배에 있어봐야 도움도 안 되는 녀석들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배를 보내고 나니 허전하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하기도 했다. 장오는 문득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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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 공항 면세점에서 일산 게임기를 한 개 사고 세안용 크림과 라일락 향수를 한 병 또 샀다. 이번엔 그렁그렁한 눈물은 보이지 않겠지. 지난 밤 전화를 내어 무엇 필요한 것이 없냐니깐 웃기만 하더니 대답으로 공항에서 픽업을 하겠다고 했다. 후지와라항의 부두에서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왜 들었을까? 아이들 엄마하고는 상사(相思)의 예를 잊은 지 오래였다. 잦은 해외출장이 원인이기는 했으나, 언제부터인가 아내에 대해 그는 공허한 심정이 되어 있었다. 퇴근하여 집에 일찍 들어가는 날이면 그녀는 그림공부를 핑계로 늘 바깥으로 나돌았고 아이들은 늦은 엄마의 귀가로 저녁을 굶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짜증이 났고, 늦게 들어온 아내와 버릇처럼 말다툼을 하곤 했었다. 아내는 저도 자신이 열중할 뭔가를 찾는다고 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생활이긴 했으나 그가 회사일에 몰두하여 집안일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만큼 아내라도 자식들을 건사하며 집안 살림을 충실히 해주기를 바랐다. 곧 마흔이 넘을 나이를 생각하고, 그때가 되면 넓은 아파트라도 한 채 구해 제대로 된 가정생활을 해 보리라 다짐하곤 했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는 조금만 더 고생하고 참아달라며 아내를 위로했지만, 아내의 방황은 사뭇 일상의 궤를 벗어난 듯싶어 장오는 늘 조바심이 났다. 그리고 차츰 그런 아내에게 그는 실망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줄 선물을 사면서 아내의 얼굴이 잠시 떠올랐고, 그는 그런 자신의 이율배반적인 행동에 대해 조금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가신 일은 무사했는지요? 사막에 가서 오아시스를 한 번 보고 싶었는데…”
그 무렵 그녀는 기사가 딸린 승용차를 자가용으로 쓰고 있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올 때 벌써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그녀가 호텔방까지 따라 온지라 룸써비스를 불러 삶은 가재요리를 시켜 함께 저녁을 먹었다. 상을 물리고 커피까지 마시고 있자니 장오는 그녀가 마치 오래된 혈육처럼 느껴졌다.
“그래 인도공부는 많이 했습니까?”
“웬걸요, 틈틈이 여행 다닌 것 외엔 별로예요. 한국에서 철학이나 종교계통의 수행을 목적으로 온 자들은 목표가 뚜렷하니깐 정진을 하는 만큼 공부가 되겠지만, 저는 단지 흥미차원인데요.”
“인도에서 제일로 치는 흥미라면 무엇입니까?”
“힌두교의 정체성이라면 너무 거창한가요? 강물에 몸을 씻음으로 속세의 죄를 씻고, 이승과 내세의 복을 비는 행위는 불교와도 유사하지만 갖가지 믿는 신들이 많고 종교적 형식도 다양하여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나는 인디아 항공에서 만든 잡지를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인도의 예술과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가 영어로 실려 있었는데 그녀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되어 기내에서 들고 온 것이었다. 잘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물어보라며 그녀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가 그녀가 읽어가는 문장을 눈으로 따라가기도 했다. 남자가 자신의 옆으로 다가와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코 잡지에 눈을 묻고 있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천진스러웠다.
잠시 후 그녀가 민재를 떠 올리더니 일어서며 갈 채비를 차렸다. 그는 들고 온 선물을 종이가방에 넣어 그녀에게 건네며 집에 가서 풀어보라고 했다.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 그런 선물을 받기엔 둘 사이가 아직 석연챦았기 때문이라 짐작했다. 장오는 황망해 하는 그녀를 진정시킬 요량으로 양 팔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듯이 잡았다. 그 때였다. 놀란 닭처럼 그녀가 화들짝 몸을 빼더니 다급하게 외쳤다.
“아-싫어요. 그러지 마세요.”
정작 놀란 것은 그였다. 그녀의 공포에 질린 표정하며 앞뒤 가리지 않고 갑자기 튀어나온 비명이 그랬다. 한 순간이고 찰나였지만 마치 그녀가 얘기하지 않은 어떤 은밀한 부분을 훔쳐본 느낌이었다.
“불손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요. 놀라게 했다면 사과드립니다.”
그녀도 엉겁결에 취한 자신의 행동이 무안했던 모양인지 고개를 숙였다. 엘리베이트를 타고, 호텔 현관까지 걸어갈 때까지도 그녀는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13
칸나는 보험에 대해 묘안이 없다고 말했다. 해군 함정이나 경비정이 출동할 때마다 기동일자와 해역을 선박에 통보하는 일은 사전에 해군사령부와 내통해야 가능한데, 인도 경우 파키스탄과 달리 작전해역이 넓은데다 그런 일이 일찍이 유례가 없는지라 어렵다는 애기였다. 물론 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그에 따른 경비도 만만치 않을 것이며 자칫 그들의 덫에 걸려들 위험도 있는 법이었다. 인도어장에 대한 탐구는 사장의 투자마인드가 바뀌지 않는 한 미구에 막을 내리리라 생각되었다.
다음 날, 장오는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호텔 지하 바에서 댄스페스티발이 있는데 구경이나 하자고 했더니 그녀가 저녁시간에 맞춰 김밥을 해 온다고 화답했다. 김치를 섞어 만든 김밥은 꿀맛이었다. 그녀는 얼굴에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쉴 새 없이 김밥을 입에다 우겨넣는 그의 모습을 시종 즐거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민재가 게임기에 빠져 식음을 전폐할 정도라고 전했다. 황사가 많은 기후라 피부가 꺼칠해지기 십상인데 크림을 얻었으니 참 다행이라고도 했다.
그녀는 검정색 주름치마에 주홍빛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페스티벌 안내문에 정장차림을 요구했었는데 덕분에 색상의 조화가 빚어낸 그녀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지하 바는 예상 밖으로 한산했다. 두 사람은 구석진 테이블로 자리를 잡고 흐르는 음악을 안주삼아 일본 사람이 발명한 키스 오브 파이어(Kiss of Fire)를 주문했다. 바탕은 짐빔(J&B )같은 강렬한 위스키를 쓴듯했으나 술잔 테두리에 발린 설탕 맛이 목을 부드럽게 해 주었다.
“선생님은 종교가 있으세요?”
“모태신앙은 아니지만 기독교예요. 세례받은 교회의 목사님이 결혼주례를 봤지요.”
“저는 아직도 신앙이 없어요. 신념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인도 공부는 그래서 제겐 더욱 절실한 것인지도 몰라요.”
“사실 저는 싸르뜨르 같은 실존주의자에 가깝죠. 교회생활은 불교에서 개종한 모친에 대한 효심으로 시작되었지만 하나님이 절대구원의 주체가 된다는 데에는 아직도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선민(選民)의 하나님이지 창조주인 만물의 하나님은 아니라고 봐요.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비로소 기독교가 민족종교의 굴레를 벗고 보편성과 세계성을 띄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뭔가 더 얘기를 하고 싶은 듯했으나 말문을 닫고 술잔의 뿌리를 매만지며 침묵했다.
장오는 웨이터를 불러 페스티벌을 한다더니만 왜 이리 조용하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페스티벌 참가자들이 없어 오늘 행사는 취소되었다는 말이었다. 음악이 흐르고 희미한 나이트 조명이 흐르는 플로어가 눈에 들어 왔으나 황당하고 허망하여 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칵테일이 거듭되자 그녀가 부드러운 술로 바꾸었다. 그래 오늘은 그녀의 심중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어렴풋한 그녀의 화두를 따라가 보자. 그런 생각을 하며 그가 물었다.
“향숙씨의 인도 공부는 소설가로서의 호기심인가요, 아님 인간적인 번뇌를 씻기 위함인가요?”
“둘 다예요. 그러나 둘 다 자신이 없어요. 지금에야 저는 단지 구경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얘기를 하면 실례가 될지 모르겠네요. 향숙씨의 글에는 작중인물들의 감정이나 의식의 흐름에 필연성이 결여되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뭔가 솔직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가슴이 없다고나 할까…”
장오는 서점들을 돌아다니며 그녀의 작품들을 몇 편 구해 읽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녀의 성격이 작중 인물들에게도 은연중 배어 있음을 느꼈던 것인데, 말을 뱉고 나니 괜한 얘기를 꺼냈다 싶었다. 왜냐면 그가 그 말을 마치자 말자 그녀가 고개를 떨구었던 것이다. 당황한 그는 그녀를 깨워보려고 또 공연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성인이라고 불리는 신비주의자들은 인격을 던져 버리라고 하지만 저는 마음의 평화라든가 영혼의 절대 자유가 그들의 수행방식대로 현실의 삶을 도외시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데는 동의할 수 없어요. 자연이라는 게 뭡니까? 저 산과 들의 나무며 풀이며 짐승이며 벌레들을 보세요. 누가 시키지도 가르치지 않아도 종족번식과 생멸의 섭리에 따라 태초부터 지금껏 존재하고 있잖아요. 유독 인간은 마음이란 것이 있어 세상을 부자연스럽게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되지요. 저의 구원은 자연입니다. 자연에 합치하는 마음을 갖자는 것이지요.”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조용히 그의 얘기를 듣기만 했다. 장오는 이쯤에서 그만 일어서야겠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런 그녀의 침묵이 그의 신념처럼 자연스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로비로 나왔다. 그녀가 주춤주춤 엘리베이터까지 따라왔으나 장오는 그녀를 제지했다.
“저기 의자에 앉아 계세요. 김밥 그릇은 제가 갖고 올게요.”
호텔방까지 그녀가 따라 온다면… 문득 어제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14
아그라와 바라나시의 중간쯤에 위치한 카주라호(Khajuraho)에 왔습니다. 이곳의 수많은 사원은 천 년 전에 달의 신 찬드라의 후손이라 믿는 찬델라 왕조에 의해 건설되었다 합니다. 캄보디아 의 정글 속에서 발견된 앙코르 와트를 연상시키는 락쉬마나 사원은 법의 신으로 불리우는 비쉬누 신에게 봉헌된 것이라 합니다. 사원 곳곳의 외벽에 양각된, 외설적으로 표현된 미투나(Mituna)들의 부끄럼없는 속살이 오히려 관광객들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말(馬)과 성행위를 하는 남자와 그를 바라보는 여자상’에 대한 구경은 안내문으로 대신했습니다.
힌두교의 신은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신만큼이나 다양하여 심지어 아내와 자녀같은 식솔도 숭배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힌두교와 불교의 정신이 혼합된 저 앙코르 와트같은 건축물에서 느끼듯이 종교에 대한 신념 또한 내겐 불가사의입니다. 곳곳의 사원을 돌며 마치 천 년 전에 펼쳐진 믿음의 홍수에 휩싸인 듯 했습니다.
인도에서 돌아온 후로 그녀는 달포 간격으로 그에게 기행문을 써 보냈다. 장오는 그녀가 지금은 정신적으로 방황에 가까운 시간을 갖고 있으며 머지않아 어떤 깨달음에 도달할 것이라 믿었다.
선박은 한 동안 잠잠했다. 보장급에 대한 그의 결정은 회사에선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식으로 받아들어졌으며, 어획보고에 대한 그의 신경도 자연 무디어져 가고 있었다. 그 무렵 사장은 알젠틴 어장의 오징어 채낚이 입어를 모색하고 있었고 이를 통해 제 이의 사업부흥을 꿈꾸던 싯점이라 인도어장의 적자는 잠시 모두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는 듯했다.
이듬 해 5월로 접어들자 선박이 기어이 스리랑카의 콜롬보 항에서 만세를 불렀다. 더 이상의 조업은 무의미하다며 선원들이 배를 박차고 뛰어내려 시내로 잠적했다는 선장의 보고였다. 이쯤 되면 백약이 무효다 싶어 직원을 보내 배를 수습키로 하고, 일방 인도어장에 도전할 교체선장을 물색했다. 다행히 박영일이란 대학 3년 후배가 나타났다. 한 눈에 영리하게 보였고 일언지하에 자기라면 어장을 찾을 자신이 있노라 장담했다.
그래 다시 도전해 보는 거야. 기관장과 직장급은 박 선장이 구해왔다. 콜롬보 항에서 선박 인수인계를 하기로 하고 신규선원들의 규합이 끝나는 대로 비행기 스케쥴을 잡았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사장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참치 독항선 한 척과 TW-608 호를 묶어 부산의 들어보지도 못한 회사에 배를 매각해 버린 것이었다.
알젠틴 사업에 필요한 자금확보가 이유라고 했지만 배를 인수한 회사가 부산에서 일반 유통업을 하다가 원양어업이 돈벌이가 큰 사업이라는 얘기만 듣고 달려든 아마추어여서 장오는 망연자실했다. 실무자의 의견을 들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선박매각을 결정한 사장의 장사치 같은 단견에 장오는 치를 떨었다. 더욱이 선박대금의 절반 이상을 어음으로 받기로 했다고 하여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은 어장성이 결정되지 않은 인도어장의 배를 선뜻 사들인 그 사람들의 배짱이었다. 어음이 중간에 부도라도 나면 배와 선원에 대한 사후수습도 십중팔구 장오의 몫이었다. 그런 저런 생각에 엉망진창인 기분이 되어 인도사업의 인수인계를 위해, 그 해 7월 그는 그의 생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인도행 비행기에 다시 몸을 실었다.
15
장오는 부산에서 올라온 선박 인수팀이란 사람들과 고아(Goa)까지 동행했다. 박 선장은 콜롬보에서 선박을 끌고 바스코 다 가마까지 올라와 장오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수팀들에게 배를 맡기고 나니 서글프고 안타까운 심정에 가슴이 울혈했다.
장오는 저녁에 선장만 따로 불러내어 백사장이 있는 해변가로 달려가 밤늦도록 통음했다. 처음 이곳에 배를 입항시키고 선박검사를 기다리느라고 소일할 때 한 번은 선장과 기관장이 화류촌을 가자기에 그가 말했다.
“여기는 포루투칼 식민지였던 데라 화류촌같은 것은 없어야.”
“차장님, 사람 무시하는 겁니꺼? 전에 상선 탄 선원이 그러는데 저 뒤쪽 해안가로 가면 행님, 아가씨 있어! 하는 집들이 있다카는데예.”
여자 밝히는 데는 선원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바스코 다 가마는 철광석을 실어 나르는 상선들의 출입이 잦은 항구였는데 부지런한 경상도출신 상선 아저씨들이 진작부터 술집의 삐리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쳐 놓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동란 직후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판자촌을 방불케 하는 남루한 사창가에서 인도 여인을 품는 것이 그에겐 정서적으로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파도에 많이 시달려 비위가 좋아진 선원들은 누울 자리가 맨 땅이면 어떻고 진흙탕이면 어떠냐는 식이었다.
“영일아, 비록 회사가 바뀌었다만, 니가 인도어장에서 반드시 깃발 하나 꼽아 주었으면 한다.”
“형님, 걱정마이소. 나도 신 어장 개척했다는 소리 한 번 들으면 소원이 없겠소.”
TW-608호와의 인연은 그 것으로 끝인가 했다. 배 값으로 받은 어음이 제 날짜에 무사히 결제가 되기라도 했다면…
뉴델리로 돌아와 메부리코 알리씨와도 이틀에 걸쳐 작별연습을 했다. 그 동안 선박경비 정산 문제로 그에게 무던히 시달렸음에도 뒤끝이 없는 그를 그는 각별하게 대해 주었다. 헤어지던 날 알리씨는 그에게 코란 경전을 선물했다.
밤 11시 30분에 출발하는 방콕행 비행기를 예약한 후 장오는 그녀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한국어선의 인도입어를 성사시켜 달라고 만날 때마다 목을 매다는 칸나도 동석시켰다. 호텔의 중국식당에서 닭고기 요리와 해산물 요리를 시켜 먹으며 그녀에게 앞으로 인도에 올 일이 없어졌으나 행여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칸나씨의 도움을 받도록 하라고 일렀다.
공항으로 가는 그녀의 차 안에서 그녀가 몸을 장오의 어깨 쪽으로 슬쩍 기대면서 말했다.
“이게 무슨 냄새인지 알아 맞혀 보세요.”
축농증으로 고생한 적이 있는 그는 그 때서야말고 아둔하기까지 했다.
“선생님이 사다주신 라일락향수예요.”
한국에 돌아온 뒤 이 장면을 회상하면 그런 그녀가 언제나 애타게 그리웠다. 그러나 배를 남의 손에 쥐어주고 떠나는 심정이 하도 복잡했던지라 그녀가 준비한 그 소중한 마음을 그 때에는 미처 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짐을 부치고 난 후 두 사람은 공항의 커피숍에 마주 앉았다.
“그림공부도, 인도공부도 열심히 하세요. 기행문도 계속 써 주시구요.”
성불하라는 얘기가 입 밖으로 나올려다 말았다. 고타마 싯타르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드가야(Bodhgaya)는 불교의 성지순례지로 남아 있지만 10세기 이후 인도에선 불교가 사라졌던 까닭에서였다.
“그 동안 선생님을 만나 즐거웠습니다. 인도에서 제가 찾고자 했던 것이 조금씩 구체화되는 듯도 했고요.”
나는 그녀가 작가로서 가슴에 커다란 병을 앓고 있다고 짐작했다. 글을 쓸 수 없음으로 인해 얻게 되는 흡사 무병(巫病) 같은 것을. 그가 담배를 꺼내 물자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그는 그녀가 담배를 피우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담배를 한 모금 짙게 빨아들이더니 창쪽을 향해 길게 내 뿜었다. 소리 없이 다가온 연기가 그의 얼굴을 뒤덮었다.
짙은 시름이 깃든 표정으로 그녀는 공항 밖을 응시하기도 했다. 얼핏 그녀의 눈에 물기가 어린 듯도 했다. 이런 경우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혼자 뭔가를 속으로 삭이노라 애쓰는 것이 역력한 그녀를 달랠 마땅한 말이 종내 생각나지 않았다. 커피잔은 이미 오래전에 비어 있었다.
시계가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장오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갈 시간이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게이트 앞에서 그녀를 향해 뒤돌아보았다. 그 때였다. 머리를 숙인 채 얼굴을 손으로 가린 그녀가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16
게이트 안으로 들어선 그는 탑승구 앞의 의자에 앉았으나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마치 숙명과도 같은 엄청난 회한의 파도가 그의 전신을 엄습했다. 짐만 부치지만 않았어도 그는 게이트를 박차고 나가 그녀를 뒤쫓아 갔을 것이다. 그녀가 운 것은 결코 두 사람의 이별이 아쉬워서가 아닐 것이다. 다만 자신이 불쌍하고 역겨웠을 것이다. 잠시 아쉬움의 감정이 북받쳤겠지만, 정작 마음이 이끄는 대로 솔직하게 그 마음을 다 표현하지 못한 자신이 미워서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작 나는 그녀에게 무엇이었단 말인가. 그런 생각에 미치자 그는 갑자기 울부짖고 싶은 심정이 되고 말았다.
장오는 그 순간 자신의 감정을 그림 그리듯 글로 표현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만약 손에 잡히는 곳에 술병이 있었다면 한모금에 목안으로 털어넎고 싶은 그런 심정이기도 했다. 장오는 서둘러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생각보다 더 빨리 손이 지면을 채워 나갔다. 자신의 평생 그렇게 신들린 듯이 글이 쓰여지기는 처음이었다.
연극은 끝났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연출자에게 아직 메세지가 다 전달되지 않았다고 소리치려 합니다.
꽃이 붉으면 붉은 대로 아름답다고 말해야 했습니다. 꽃의 색깔은 제 각각이지만 아름다운 것은 죄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당신이나 나나 기쁨을 찬양하는데 너무 인색했던 것은 아닌지요. 5월의 산처럼 온갖 풀이며 나무들을 키워내는 대지였어야 했습니다. 창공을 나는 새처럼 거침없는 자유였어야 했습니다.
……
비행기가 연착되어 한국행 연결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장오는 항공사에서 무료로 주선한 방콕공항 근처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호텔에 누워서도 그는 쉬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엄청난 부피로 덮쳐온 해일의 여진은 밤새 그녀의 초상을 그리게까지 했다. 무려 열 장의 편지지에 앞뒤로 빽빽하게 적어나간 그의 광기어린 글은 그녀의 초상화와 함께 다음 날 아침 그녀에게 등기우편으로 부쳐졌다.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구체적인 앎이 없는데다가 그의 생각으론 그녀가 작가로서의 숙명과도 같은 고뇌를 극복하기 위해 인도로 왔다고 짐작했으므로, 그는 건강한 남자로서 단지 객고를 풀기위해 그녀를 만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와의 그런 만남이 소중했고 어떤 형태로든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자 했을 뿐이었다. 아내가 있는 몸으로, ‘남과 여’라는 영화처럼 단 한 순간의 눈빛의 충돌만으로 낯선 여자를 끌어안고 입술을 부빌 수는 또한 없었던 것이다. 미친 듯이 써내려간 글도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이 깔려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글은 그녀를 사랑한다는 직설을 피한 채 비유법으로만 일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흡사 니이체의 잠언과도 같은 그 편지를 그녀에게 보내는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이미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또한 견딜 수 없는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로부터 이해할 수 없는 편지가 그에게 당도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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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만나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알 수 없는 불안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행복이기도 하였습니다.
금지된 장난과도 같은, 공포와 불안의 반대급부로 전율하는 마음의 유희에 한편으론 감사하고 기뻐했습니다. 진정 그것은 속박이 아닌 자유였습니다.
그러나 돌아서면 이내 그것이 수직으로 추락하는 날개짓이라는 자책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그 때마다 나는 내게 화를 내곤 했지요. 그런 어리석음에 직면할 때마다 나는 산산히 부서지는 의식의 균열 때문에 절망했습니다. 이 상태가 얼마나 오래 지속 될 것인지 알지 못함으로 초조하기만 합니다.
풍성한 말의 향연같은 당신의 편지를 읽으며,당신은 섬광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유성과도 같은, 닿으면 흔적도 없이 타버릴 것만 같은 뜨거운 불길이라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열정이 내게 깊은 화인(火印)으로 남을까 두렵기조차 했지만, 당신의 글이 너무나 아름답기에 한 순간 나의 영혼이 맑아짐을 느꼈습니다.
신에게 내 삶의 절반을 양도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막막함과,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끝없는 미로에 갇혀 서서히 다가오는 파멸을 기다리고 있을 뿐인 내게 어쩌면 당신은 어둠 속에서 깜박이는 등대이며 환상입니다.
당신과의 만남이 환상이라면 나는 다시는 현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고, 이 순간과 영원을 바꾸어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헤어날 수 없는 늪이며 더욱 더 깊이 나를 빨아들이며 나의 숨통을 조여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가능한 한 당신을 적게 생각하고 당신으로 하여금 내게 선사되는 이 기쁨을 반납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 순간에도 저는 제게 화를 내고 있습니다. 또 귀에서 이명(異鳴)이 옵니다. 잠을 이루기가 무척이나 힘듭니다. 저의 소심과 박약한 의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with love 향숙
처음으로 그녀의 육성을 듣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그 동안의 침묵하던 모습의 연유를 조금은 알 듯도 했다. 그의 글이 두 사람 간에 오고간 이성으로서의 아릿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규정한 최초의 단서가 되었는지, 선생님이란 호칭은 어느새 당신으로 바뀌어져 있었으며 또 편지 말미엔 사랑이란 꼬리표가 처음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편지의 말미에서 반전하는 그녀의 심정을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금지된 장난. 유부녀란 그녀의 신분 때문에 두 사람간의 추억을 추락하는 날개짓이며 어리석은 행동이라 단언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에게 양도한 삶이란 무슨 뜻인가. 그리고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로와 헤어날 수 없는 늪이란 또 무슨 얘기인가. 작가로서의 고통이 아닌 또 다른 어떤 처절한 고뇌가 있어 그녀를 파멸로 이끌고 있다는 말인가. 귀에서 이명이 들린다면 그녀는 혹시 우울증이란 병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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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그는 그녀가 애타게 그리웠다. 마음으로는 한걸음에 인도로 달려가 그녀를 껴안고 싶었다. 거리에서, 술집에서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보아도 그에겐 무미했다. 그의 머릿속을 온통 점령한 그녀에 대한 갈망이 한 틈의 빈자리도 내어주지 않았던 탓이다. 사랑이 먼저인지 몸이 갈구하는 욕망이 먼저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사춘기에 겪었던 격랑과는 다른 또 하나의 열병이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잠언과도 같은 장문의 편지를 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인도에서의 선박인수인계가 마무리된 이후, 그는 알젠틴 신규 프로젝트에 정신이 쏠려 그녀의 일을 한 동안 잊고 지냈다. 한국국적을 유지한 채 입어료만 지불하고 조업하는 단순입어에 대한 알젠틴 정부의 재가가 목전에 도달했다는 낭보가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알젠틴 사업은 타 업체가 알지 못하도록 은밀히 진행되었고, 행여 정보가 유출이라도 될까 싶어 단순입어 성사여부에 대한 진행과정은 알젠틴의 브로커인 교포와 사장간에 극비리에 진행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즈음 한국의 5~6개 오징어선사들은 단순입어의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합작형태의 현지법인을 설립한다고 분주히 알젠틴을 들락날락거리고 있었다.
일년 전 장오는 알젠틴으로 날아가 단순입어의 가능성을 타진해 본 적이 있었다. 단순입어에 대한 그의 결론은 회의적이었다. 단순입어의 대안으로 현지 브로커와의 합작사업을 하는 것도 선뜻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군사정권의 무소불위한 권력의 힘을 익히 경험한 사장은 장오의 출장복명을 읽어 보지도 않았다. ’89년인가 메넴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만난다고 대통령궁인 핑크하우스를 다녀온 후론 그는 앞만 보고 달리는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였다. 원양어업을 한다는 사람들이 너도 나도 오징어에 목을 매다는 판국에 국내 내수에만 의존하는 오징어 시장이 천년만년 호경기로 가겠느냐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생각해 달라는 그의 진언을 사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황 차장, 그건 내가 알아서 하는 일이고 자넨 업무만 잘 받혀 주면 돼.”
거리엔 어느새 은행나무의 잎들이 노랗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사장의 대담한 투자계획에 마음이 어수선한 터에, 부서 직원이 선박수리 일로 라스팔마스행 출장을 끊어 놓은지라 몇 몇 직원들과 함께 회사빌딩 지하의 호프집에서 생맥주를 시발로 잔뜩 대취한 다음 날이었다. 입에서 술 냄새가 풀풀거리는 와중에 사장실에서 호출이 왔다.
“황 차장, TW-608호 도로 끌어와야겠어. 어음이 부도가 났구먼.”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소유권 이전을 어음결제일까지 미루었으니 배를 도로 돌려받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간 인도에서 발생한 운항경비는 몽땅 이쪽이 덮어 써야 할 판이었다. 어창의 고기는 부도낸 자들이 벌써 다 털어 먹은 뒤였다. 술이 깸과 동시에 장오는 자신이 취해야할 일들이 짜장 한꺼번에 뇌리를 엄습했다. 짧은 순간 그런 생각에 휘둘리면서 그는 사장의 얼굴을 말없이 우러러 보았다. 그 때서야말고 사장의 얼굴 위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녀의 얼굴이 오버랩 되며 떠올랐다.
19
겨울이 찾아 온 11월의 늦은 어느 날, 장오는 다시 인도로 떠났다. 남의 손에 맡긴 4 개월여에 걸친 인도어장의 재탐사도 크게 진전이 없었다. 배를 다시 찾아오는 김에 TW-608호를 남미의 포클랜드 어장으로 회항시키기로 하고, 인도사업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사장은 오징어 사업에 회사의 명운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트롤어선을 포함한 총 6척의 선박을 남서대서양(南西大西洋) 어장에 집중 투입시키기로 작심했다. 알젠틴 입어를 전제로 채낚이 어선 3척의 포클랜드 어장 입어권은 이미 반납한 상태였다. 무리수라고 생각되었지만 회사 내에 사장의 결심을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무렵 야구장에서도, 아가씨 딸린 맥주집에서도 말려 구운 오징어 안주가 서서히 퇴장하던 무렵이었다.
그녀가 인도에서 사라진 것을 안 것은 출장을 떠나기 하루 전 날이었다. 선물을 준비하려고 혹시나 해서 국제전화를 걸었더니 집주인이 나와 한 달 전에 짐을 싸서 떠났다고 말했다. 인도에서 부친 그녀의 마지막 편지를 받은 것은 그 해 6월이었고 그 직후 바로 답장을 띄웠으나 아무런 회신이 없었는데, 그는 그만 회사 일에 쫓겨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터였다.
박 선장은 인도어장에서 철수하는 것이 못내 아쉬운 심정이었다.
“선배님, 6개월만 더 시간을 주면 안 되겠습니까? 아래위로 두 번만 더 훑으면 어장도가 완성되겠는데…”
“이 사람아, 나도 안타까워. 원양회사에 몸담고 이 일이 제일 보람찬 일이라고 생각했어. 사장이 손해 볼 일은 절대 못하는 위인이라 어쩌겠나. 오징어 어기가 1월이야. 여기서 케이프타운으로 해서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항까지 가려면 20일, 어구 바꾸고 어쩌고 하면 시간이 빡빡해.”
인도에서 그녀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그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선원들의 계약을 바꾸고 고아에서 뉴델리로 돌아왔으나 뇌리엔 온통 그녀 생각뿐이었다. 밤새 그녀와의 추억들을 회상하느라 몸을 뒤척이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반쯤 젖혀진 커텐 사이로 들어온 아침햇살에 눈이 부셔 일어났다. 호텔 맞은 편 길 위에서 윗몸을 벗은 아이 하나가 수돗물에 그릇을 씻고 있었다. 아침을 준비하는구나. 집 없는 사람들의 아침거리는 무엇일까? 그녀가 곁에 있었더라면 그 궁금증을 속 시원히 풀어 주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또 다시 가슴이 쓰렸다. 그녀가 이 천연스런 인도의 모습을 얼마나 이해하고 떠났을까 그것이 또한 궁금하였다.
내가 당신을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는지 장담할 수는 없으되, 지금 내가 당신을 그리는 이 마음은 평생에 처음 느껴보는 절 실함이며 기쁨입니다. 오래 묵은 휴화산(休火山)이 어느 한 순 간 저 깊은 내부에서 펄펄 끓는 마그마를 울컥 토해내듯, 참을 수 없는 간절함입니다. 그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당신의 존재 그 자체가 그러합니다. 아무것도 개입되지 않은 순정(純精)의 보석입니다. 말이나 글로 표현하면 그 의미가 퇴색 해 버릴 것 같아, 삼가면, 오히려 가슴이 화산처럼 폭발할 것만 같아 안절부절 합니다. 당신을 향한 이 감정을 숨기지 못함은 나의 태생적인 신념이며 관습입니다.
자연스럽게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굳이 내게 한 뼘의 간격으로 몸을 기울일 필요는 없습니다. 숨 가쁘게 달려오려고도 마십시요. 서로가 생각만으로 삶이 기껍고 고귀할 수 있다면 그로써 만족하겠습니다. 당신이 처한 운명적 고통의 질곡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제가 간섭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감정에 순응하시길 바랍니다. 자연(自然)은 자연스럽게 바라보는 자에게만 은총이며 선물일 것입니다.
그녀의 알송달쏭한 편지를 향해 바람에 띄워 보낸 그의 회신은 이러했다. 그러나 소식을 끊고 자취를 감춘 이 마당에 그녀를 향한 그의 그리움은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춥고 어두운 겨울이 지나갔다. 알젠틴 어장의 단순입어사업이 사기극으로 끝이 나는 과정을 밝히느라 그 이듬해 장오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었다. 입어에 실패한 채낚이 어선들은 공해(公海)에서 연일 회사를 비난하며 선상파업으로 난동을 부렸다. 입어허가 비용으로 거금 2백만 불을 삼킨 사기꾼을 형사범으로 집어넣는데 필요한, 근거서류를 전달하려고 본사에서 직원이 날아왔다. 그런데 그가 내민 서류뭉치 속에 웬 낯선 편지 봉투 하나가 장오의 눈길을 붙들었다.
윔벌던, 영국. 정향숙.
주소 아래에 그녀의 이름 석 자가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20
지척도 분간할 수 없는 안개 자욱한 아침에 렛트 버틀러가 여행백을 들고서 혼자 독백합니다. “왓 이즈 우먼(What is woman)?”. 아무도 없는 크고 텅 빈 집에서 장장 5시간 이상이나 영화에 빠져 들었습니다.
스칼렛 오하라의 생에 대한 진지한 자세와 가식 없는 사랑의 표현에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합니다. 계단 난간을 붙잡고 눈물에 젖은 그녀가 렛트 버틀러를 향해 떠나지 말라고 절규하는 장면에서는 마치 인생의 정의가 느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아! 저게 인생이라는 것의 참 모습이야. 그 순간 내게 남은 자잘한 삶의 목적들은 모두 산산히 부서져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는 기분이었습니다.
20대 초반에 즐겨 걸었던 태릉의 가로수 울창한 길이 생각납니다. 희고 통통한 얼굴에 빨간 루즈를 바른 채 졸고 있던 갈비집 주인아주머니가 떠오르고, 노르뜨랙의 화집에서 보았던 무랭루즈란 그림이 연상됩니다.
자신의 입술보다 훨씬 더 크게 새빨간 입술을 그리고 입을 반 쯤 벌린 채 졸고 있던 글래머의 여인. 가로수 길 끝의 조그만 칵테일 바에 들러 플레이보이주를 한 잔 시켜 마시며 파리와 노르뜨랙의 생애를 생각해본 적이 있지요.
곱사등이로 파리의 어느 허름한 이층집에서 일생 그림만 그리며 살다간 화가와 그를 사랑한 무랭루즈란 술집 무희. 어떤 종류나 형태의 것이 라도 그것이 사랑이란 이름이면 다 아름답다는 결론을 얻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는 나도 사랑의 차원으로 올라가 모든 것을 차분히 정리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신의 글을 읽으며 무척이나 부끄러웠습니다. 인도에서의 나의 행각에 회의가 들었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져 절망했습니다. 성자가 되련다면 저들의 신념대로 이승의 모든 것을 잊어 버려야 하는 일이며,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자인교(Jainism)의 성자는 입고 있는 옷까지 몽땅 벗어 던졌다고 합니다.
민재를 위해서라도 한시바삐 이 구경꾼의 노릇을 단념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알젠틴에서 사기꾼과 숨박꼭질을 하노라 하루하루 피를 말리는 긴장감에 지쳐 있던 그에게 그녀의 편지는 생명수와도 같은 청량제였다. 그녀의 정신적 방황이 아이를 핑계로 막을 내리고, 영국에서 새로운 생활에 마음의 평정을 되찾은 듯 행간에 사랑에 대한 진솔한 마음을 전하고 있었기에 장오는 저으기 안심이었다.
그녀의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장오는 마침 그때 S그룹 영국지사장으로 나가있던 고교동기의 연락처를 적어주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하고, 이곳 일이 끝나는 대로 영국을 거쳐 가겠노라는 짧은 글을 띄워 보냈다.
그러고도 그는 사기꾼을 잡아넣느라고 무려 4개월을 알젠틴에 더 머물러야만 했다. 라틴계 사람들의 일에는 빨리 빨리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귀국길의 항공표를 끊기 위해 영국의 친구에게 전화를 내어 그녀의 연락처를 아는지 물었다.
“석 달 전엔가 웬 여자의 전화를 한 번 받았어. 자네 애인이었나? 자네 스케쥴을 듣고 어제 전화를 했는데 그 사이 어디로 옮겼는지 사용하지 않는 번호라고 하네. 여자 말고라도 당신이 보고 싶으니 한번 다녀가시게.”
21
7월 초순경 알젠틴에서 귀국했으나 장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같이 끔찍스런 일들이었다.
갓 입주한 쌍문동의 32평형 아파트에선 이삿짐을 풀다 만 아내가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누워 있었다. 곧이어 유체동산 압류고지서가 날라 들었고 아내가 감춰온 산더미 같은 빚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알젠틴의 사기꾼은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선 적반하장으로 사장을 상대로 외화 밀반출 혐의를 씌워 검찰청과 국세청과 내무부 치안국으로 고발장를 띄워 보냈다. 물속의 오징어를 담보로 돈을 빌려준 상인들과 꽤 큰돈을 빌려준 종합상사는 회사 소속 배들과 사장 소유 부동산을 물색하여 압류를 붙이노라 야단법석이었다. 바다에 떠 있는 배들은 저들대로 어획부진에 대한 회사의 책임을 따지노라 날이면 날마다 험악한 문구의 전문을 타전하고 있었다.
그 해 8월, 견디다 못한 아내는 제 발로 집을 나갔다. 아파트는 등기가 끝나는 대로 팔기로 하고 장오는 자신의 몽매함에 대한 참회의 의식인양 아내가 터트린 급한 빚을 하나 씩 갚아 나갔다.
한 동안 술이 아니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그는 흔들렸다. 일이 그 지경에 이르도록 아내를 방치한 자신의 무관심을 생각하면 함부로 세상에 낯을 들고 다닐 자신이 없었다. 엄마가 없는 휑한 집의 아이들은 말 수가 줄고 행동도 굼뜨는 것이 확연하여 가슴이 쓰렸다. 생각 끝에 주말이면 아이들과 도봉산을 올랐다. 산 속에 들어서면 마음에 맺힌 응어리들이 올올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산꼭대기의 바위 등을 타고 서서 아이들과 내기하듯 고함을 지르고 나면 한결 속이 후련해졌다.
나이 사십에 집을 장만하고 가장으로서 뿌듯함을 느낀 것은 말 그대로 하루아침이었고, 현실은 불혹(不惑)이 아닌 미궁(迷宮)이었다. 회사의 일은 마지못해 견뎌내는 형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각의 바다로 찾아드는 강물처럼 시간은 흘러갔고 또 다시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단풍이 짙어가는 창밖의 가로수를 맥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구룡포가 고향인 회사 여직원이 그를 깨웠다.
“부장님! 전- 나 왔어요.”
그녀였다. ‘오-하나님!’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그 말이 탄식처럼 흘러나왔다. 그녀는 잠시 물 위에 떠 있다가 밀물이면 사라지는 섬과 같았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그녀는 어쩌면 그가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피안의 땅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한 때는 알젠틴에서 귀국할 때 영국을 거쳐서라도 만나고 싶었던 간절함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불어 닥친 불행의 파문으로 말미암아 희미하게 바래어져 간 마치 먼 옛날의 아련한 그리움이기도 하였다.
생활 자체가 힘들고 고단하면 사람의 영혼은 결코 고상해질 수가 없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그녀였지만 정작 그는 우울한 아이들을 외면한 채 , 예전처럼 그녀를 기쁘게 해 줄 마음의 여유가 생겨나지 않았다. 스님이 출가하는 것이나 인도의 성자가 평생 가족도 없이 걸인처럼 떠돌아다니는 이유를 그때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인간이 터득한 지각(知覺)의 분량도 자기 자신의 체험이 아닌 먼 이웃의 얘기일 때 한낱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녀를 안타깝게 하고 절망에 빠뜨린 생의 미로 또한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어디 한 갈래뿐이던가. 마치 ‘멀고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이 장오에게는 꿈결같았다. 협궤열차를 타고 간 소래포구. 사극 드라마의 촬영이 있던 날 함께 거닐었던 남한산성의 오솔길. 노를 저으며 결혼에 대해 서로의 의중을 탐색하던 양수리에서의 보트놀이. 기어이 하룻밤을 함께 보낸 송추계곡과, 그날 밤 숨죽이며 그들을 내려다보던 황홀한 월색(月色)의 가을 산. 얼마 남지 않은 생의 순간들을 탐닉하듯 그 해 가을 두 사람은 분주히 만났다. 그러나 잠결의 꿈처럼 만남의 뒤끝은 언제나 안타깝고 허전하고 또한 쓸쓸했다.
22
차라리 이 감정이 짝사랑이었다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 봅니다. 왜 사람들은 자신의 그물 속에 상대방을 가두려고만 하는지 자유와 방종을 혼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릴 적부터 어디엔가, 누군가에게 소속된다는 것이 왜 그토록 싫었는지, 어머니는 늘 내게 ‘산 속에 들어가 혼자 살려무나.’라고 꾸지람을 하곤 했었지요.
당신을 사랑하고 있음에도 내게는 정작 나만이 가야할 길이 있는 듯 해서 머뭇거리며, 한편으론 당신의 환영 때문에 또 괴로워 했습니다.
당신이 옳았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을 지속시킬 능력이나 의지가 내겐 없다는 것을… 그것은 내 속에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내가 무수하기 때문입니다. 인도여행에서 결국은 떨쳐 버리지 못한 번뇌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다만, 이미 내 인생의 절반이 되어버린 민재를 위해 내게 주어진 남은 인생을 살며, 내게 끊임없이 안위가 되어준 내 자신과의 치열한 전투속으로 다시금 몰입해야 옳을 듯 싶습니다.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시작되면서 장오는 기어이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말았다. 원양업계에서 그래도 엘리뜨 코스를 밟아 왔다는 자부심 하나로 일 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어장으로 쫓아 다녔던 그였다. 가정의 소중함도 뒤로 미룬 채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 왔으나 아내는 끝내 그의 불혹(不惑)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또한 기울어져 가는 회사의 참담한 모습을 속수무책 지켜보는 것은 더욱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사장의 고집과 오판으로 인한 결과였지 내 잘못은 아니라며 사방천지 떠들고 다닐 일도 아니었다. 평생을 몸 바쳐 일해야 할 직장이었다면 설사 사장이 우매한 결정을 내렸을지언정 저 조선왕조의 대감들처럼 머리를 풀고 ‘아니로소이다. 그리하면 아니 되옵니다.’라며 간계(諫戒)했을 일이었다.
자기의 정체성을 찾느라고 가정을 망가뜨린 아내나, 허리끈을 졸라매고 근 삼 년 간이나 공을 들였던 아파트를 입주한 지 삼 개월도 채 안되어 매물로 내놓은 그나, 대박의 꿈을 쫓아 남의 돈을 있는 대로 끌어 부었다가 사기꾼의 농간에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사장이나, 일 년 반이나 쥐새끼 풀방구리 드나들듯 어장을 찾아 인도의 온 바다를 쑤시고 다녔던 TW-608호나, 어쩌면 모두 다 하나같이 파랑새를 찾아 헤맸던, 안타깝고 불행한 존재자였다. 누구에겐가 구속당함이 싫어 남편과 헤어지고, 자신의 근원을 찾느라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유랑하던 그녀 또한, 끝내는 육지가 되지 못하고 홀로 떠도는 외롭고 작은 섬이었다.
그녀의 마지막 편지를 다 읽고 난 후, 장오는 한 때나마 그를 용광로의 불길처럼 들끓게 했던, 그러나 종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인 그녀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만이 걸어 가야할 자신의 길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우치면서 그녀를 다시 만나는 일은 미구에 등장할 그녀의 작품으로 대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여름휴가가 끝나자마자 장오는 미련 없이 춥고 광활한 러시아로 다시 떠났다.
명태를 찾아서
1
배는 이른 새벽에 움직였다. 아직 깊은 잠에 빠져있는 항구는 아이스 블루의 여명 아래 얼어붙은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러시아식 분류로 BMRT급인 총톤수 2,000톤의 미스티키 호는 슬로우 엔진으로 외항 쪽으로 선수를 돌렸다. 그리고 배는 금세 탁 트인 바다로 들어섰다.
황장오(黃長吾)는 그 배의 임시 편승객이었다. 그는 먼저 캄차카 어장으로 나가, 그곳에서 대기 중인 K원양 소속 공모선(工母船) 파이어오니어 호에 올라가 명태수매사업의 러시아측 대표로 어로현장을 감독하는 게 임무였다. 그를 도우기 위해 삼십대인 세르게이도 동승했다. 그는 장오의 회사가 운영하는 사할린 사무소의 수산부 직원이었다.
어제 저녁 승선을 앞둔 그에게 러시아 출입국 요원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비자를 회수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해상에서의 업무가 끝나면 파이오니어호 편으로 곧장 귀국할 계획이었지만, 어렵게 발급받은 복수비자가 아까워 러시아로 다시 돌아오겠노라고 둘러대었다.
간밤에는 당직자만 제외하고 모두들 보드카에 흠뻑 취했었다. 일단 어장에 들어서면 그 때부터는 함부로 술을 마시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희고 덩치가 큰 젊은 가공사 유라는, 부모가 독일계여서 그런지 눈동자가 짙은 푸른색이었다. 어젯밤 그는 선장이 동석한 브리지 살롱의 파티에서 마시고 난 빈 맥주 캔을 손으로 우그러뜨린 후 바닥에 내팽개치며 무연히 선장에게 화풀이를 했다.
“이브게니는 이미 백만 불도 넘는 돈을 외국은행에 꽂아둔 돼지새끼야!”
술에 취한 러시아인들은 모두 멍청이처럼 보였다. 머리가 백발인, 작은 키에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늙은 선장은 유라의 도발적인 어투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듯 나다의 어깨에 얹고 있던 손을 그녀의 가슴께로 천천히 옮기고 있었다. 살롱에는 여자 두 명이 써빙을 했다. 나다는 스물다섯이고, 스베타는 스물아홉 살인데, 둘 다 아직까지 미혼이었다. 공산당이 지배하던 시절이었다면 몽땅 노처녀로 불릴 나이였다. 선장은 간밤에 틀림없이, 얼굴이 예쁜 나다를 그의 침실로 불러들였을 것이다.
미처 편승객의 침실을 마련하지 못한 탓인지 장오의 침실은 살롱으로 정해졌다. 선장은 그에게 모포를 한 장 던져주곤 잘 자라는 말도 없이 사라졌다. 아무려나, 남의 땅에서 남의 배를 타고 떠나는 길이었으므로 그는 그런 선장의 태도에 크게 괘념치 않았다.
미스티키 호는 9노트의 느린 속도로 쁘리모리 해안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선장은 해가 중천인데도 아직 조타실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선미 쪽 허공으로는 괭이갈매기 한 무리가 날개를 활짝 편 채 부지런히 따라오고 있었고, 뱃전에 부딪힌 파도의 물보라가 정오의 햇살에 눈부시게 흩어지고 있었다. 편서풍은 차갑고 매서웠다. 그때 배가 우현으로 비스듬히 기울었다. 조타수가 쓰루가 해협을 향해 침로를 바꾼 탓이었다.
장오는 선실로 내려왔다. 바다로 나오기는 했지만, 어쩐지 며칠째 마음이 무거웠다. 일주일 전, 캄차카를 향하는 미스티키 호의 편승에 동의한 일이 여전히 마음속에 찜찜한 앙금으로 남아 있었다. 최근 몇 해 동안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들이 모두 그의 뜻과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돌아가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청춘을 러시아에서 불사르겠다며 동분서주한 지난 일 년은 마치 자욱한 안개 속을 헤치고 나아가는 항해와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 러시아에서는 도무지 일반적인 상거래 원칙이 통하지 않았다. 철의 장막이 거두어지면서 세상은 변화막측의 아수라장에 빠져버린 듯했다.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같이 ‘큰일이야.’ 하며 머리를 가로저었고, 가난한 노동자들은 술에 취해 ‘모두 미치광이들이 되어 버렸어.’ 라며 울부짖었다. 말 그대로 공산주의 하의 중앙집권적 집단체제가 일거에 무너지면서 총체적인 공황에 빠져 든 분위기였다. 극동의 시민들은 헐벗고 굶주렸으며, 한때 고위 공산당 당원이었던 생산조직의 우두머리들은 이때다, 하고 육지와 바다의 온갖 자원을 팔아 오직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에 급급했다.
지난 해 겨울, 러시아 어업공단과 합작한 회사의 한국 측 지배인이었던 그는 러시아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서류로 작성된 합작사업계획이 완전히 엉터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초 합작회사의 어획물을 일본과 한국에 팔아 큰 이문을 남길 것으로 믿었던 한국의 사장은 그 계획이 무산되자, 갖가지 자원을 팔아 잇속을 챙기려는 극동의 러시아인들과 야합하여 명태쿼터의 판매권을 확보한 뒤 합작회사 운영은 나 몰라라 한 채 한국 수산회사들을 상대로 한 명태쿼터 장사에 전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바로 그 명태 수매사업의 러시아 측 해상책임자로 지금 미지의 바다로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2
장오가 러시아에 처음 발을 내디딘 것은 90년 12월의 일이었다. 그때 그는 북양 명태잡이 트롤어선을 세 척이나 운영하던 T사의 수산부장으로 재직 중이었으며 곧 시작될 명태 조업에 대비하여 러시아 수매사업용 쿼터를 확보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출장을 간 것이었다. 그에게 초청장을 보낸 사람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소재하고 있는 극동어업총국 달리바에 선을 댄 재미교포 권 선생이었다.
90년도에 접어들어 북양의 명태잡이 어선들은 미국의 베링해에서 쫓겨났다. 일시에 어장을 잃은 한국·일본·중국·폴란드 등 각국 어선들은 궁여지책으로 일명 도넛츠홀이라 부르는 베링 해의 좁은 공해수역으로 몰려가 겨우겨우 명태조업을 연명해 가고는 있었지만, 그나마도 92년에 결의된 유엔의 모라토리움으로 그곳마저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한국 원양어업의 주력 업종인 명태잡이 어선들은 하루아침에 갈 곳을 잃어버린 미아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 대비하여 일본은 정부 주도로 공모선(工母船) 위주의 대형선들을 연차적으로 감척해 왔지만, 한국은 정부의 예산부족과 선주들의 열악한 재무구조 탓으로 차일피일하다가 그만 이 같은 지경에 빠지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뜻밖으로 한국의 대형 공모선 선주들의 숨통을 트게 한 것은 80년대 중반께 소련의 제 1서기장으로 등극한 고르바초프였다. 태평양 연안국들 간에 경제협력의 길을 모색하려는 고르바초프의 동방정책으로 말미암아 캄차카 반도 양안(兩岸)과 오호츠크해가 일약 북양명태의 대안어장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었다.
러시아 극동의 관문은 하바로프스크였다. 아에로폴리트의 1백인승 제트 여객기는 서울을 떠난 지 두 시간 반 만에 그곳 공항에 착륙했다.
하늘은 흐리고 대기는 냉랭했다. 트랩을 내려 공항청사로 걸어가는 동안 활주로의 옆으로 제때 깍지 않아 웃자란 메마르고 성긴 잡초들이 눈에 거슬렸다. 지은 지 50년은 되어 보이는 낡은 대리석 건물로 들어서니 먼지가 끼고 우중충한 빛깔의 높다란 천장과 칠이 벗겨진 철제의자 등이 방문객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입을 꾹 다문 채 무뚝뚝하게 여권을 뒤적이던 출입국 관리의 모습에서 흑백필름에서나 본 시베리아 벌판의 황량한 풍경이 연상되었다.
출구를 나오니 몸매가 호리호리한 여인이 알파벳으로 그의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다. 짙은 밤색 코트에 검은 털모자를 쓴 그녀 옆에는 검정색 코트에 하얀 털모자를 쓴 소녀가 매달려 있었다. 모녀는 둘 다 입술에 빨간 루즈를 칠하고 있었다. 우유빛이 감도는 뽀얀 볼 사이로 새겨진 그 입술이 어찌나 앙증맞은지, 잿빛 하늘만큼이나 을씨년스러운 색 바랜 도시의 풍경과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모녀가 이끄는 대로 그는 낡은 유럽풍의 승용차에 올랐다. 도로는 여기저기 아스팔트가 깊게 패여 있었고, 도로 양쪽으로 쓸어 모은 눈 무더기는 시커먼 흙탕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때 커다란 공장건물에서 노동복차림의 남녀들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무리지어 걸어 나오는 모습이 차창을 스쳐 지나갔다.
차는 5층 높이의 허름한 아파트 앞에 멈추었다. 시계가 오후 5시를 가리켰으나 하늘은 벌써 어둑해지고 있었다. 전기 사정이 좋지 않은지 흐릿한 전등불에 비친 실내의 붉은 양탄자가 음산한 느낌을 주었다. 외투를 벗어 벽에 걸던 여자가 블라디보스톡행 열차는 저녁 늦게 출발한다고 말했다.
잠시 후 여인이 닭다리 두 개와 우유가 담긴 컵을 들고 나왔고, 뒤따라 소녀가 식빵과 딸기잼을 들고 나왔다. 모녀는 음식이 담긴 접시를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문득 「닥터 지바고」에서 읽었던,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행운을 기원하는 뜻으로 잠깐 마주앉는다는 러시아 풍속이 머리에 떠올랐다. 용케도 집에서 손수 만들었다는 싱그러운 딸기잼이 그의 식욕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조심스럽게 음식을 먹는 동안 모녀는 말없이 그런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당신 때문에 우리는 오늘 저녁을 굶기로 했어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블라디보스톡행 열차는 밤 8시에 출발했다. 여자는 그에게 내국인용 차표를 끊어주었다. 한 칸에 두 명이 타는 침대기차였다. 여자가 객실 안까지 들어와 작별을 고했으므로 그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자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걱정 말아요, 블라디보스토크에만 닿으면 다음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그렇게 말해도 그녀는 마치 애인을 멀리 떠나보내는 연인처럼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뭔가 팁을 바라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는 얼른 지갑에서 오십 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그녀의 손에 꼬옥 쥐어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금방 감격하는 얼굴이 되더니 그에게 다가와 감사의 표시로 살포시 그의 목을 껴안았다.
캄캄한 역사를 뒤로하고 총총히 사라지는 여자를 바라보며 그는 머리에 문득 ‘세베랸카(북극의 여인)’라는 단어를 머리에 떠올렸다.
함께 밤 여행을 할 동승객은 수염을 함부로 기른 남자였다. 사내는 굵은 실로 짠, 목이 긴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초행길인 데다가 간단한 러시아어도 미처 익히지 않은 탓에 낯선 러시아인과 밤을 함께 보낸다는 것이 아무래도 께름칙하였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사내는 이불을 이마까지 끌어당기며 잠을 청하였다.
차내로 스팀이 들어와 실내는 몹시 더웠다. 복도 끝에는 무연탄을 때는 보일러가 있었고, 뜨거운 물을 공급하는 꼭지가 달려 있었다. 그는 우선 미진한 허기를 채우려고 도시락면을 꺼냈다. 사내의 수면에 방해가 될까봐 소리죽여 라면을 우겨넣고 있는데, 그때 키가 작고 여윈 늙은 승무원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브로보드니커(여자는 브로보드니쨔)’라 부르는 승무원들은 객차마다 한 명씩 배치되어 차표검사는 물론 보일러 상태와 침대 시트 등까지 돌보아주는 게 주 임무였다. 동승객은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걸쳐놓은 가죽점퍼의 안주머니에서 차표를 꺼내주고는 곧 전과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사내의 무뚝뚝함이 공연히 장오의 신경을 건드렸다.
다음 차례로 그가 차표를 내밀자 차표를 받아 든 승무원은 고개를 한 번 갸우뚱거리고는 이내 방을 나갔다. 달리버에서 주선한 탑승이었으므로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차표에 대해 크게 괘념치 않았다.
차창으로 스치는 들판은 희미한 백설의 세계였다. 하늘은 달도 별도 없는 칠흑이었다. 적막한 어둠 속에 드문드문 나타나는 인가의 불빛은 삵괭이의 안광처럼 그의 시선에 화살처럼 꽂혔다가 사라지곤 했다. 도착시간이 다음날 아침 8시였으므로 잠을 청하기는 해야겠는데 무뚝뚝한 동승객이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달러를 현금으로 지니고 있으니 그가 잠든 사이에 가방을 털어 달아나지나 않을까도 걱정이었다. 러시아를 먼저 다녀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내국인과 외국인의 차삯이 다른데, 블라디보스토크 행 침대열차의 경우 내국인 삯은 45루불이었다. 당시 대학교수의 초봉이 1천 루불 정도라 들었으니, 결코 적은 돈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외국인에 대한 차비는 국제시세를 적용하여 미화로 1백 달러였다. 당시 미화 1불의 공식 환율이 45루불 수준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지닌 3천 달러 가량의 현금은 낯선 동승객에겐 엄청난 돈이었다.
쉬이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장오는 침대에 누워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다. 그때 아까 본 늙은 승무원이 객실 안으로 다시 뛰어들더니 다짜고짜 그에게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신분증을 보자는 말인 것 같아 장오가 여권을 꺼내 보여주자 그는 더욱 역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차표에 대해 트집을 잡고 있는 게 분명했다. 순간 러시아는 생필품이 귀하고 특히 식량부족으로 허덕인다는 얘기가 생각나서 그는 얼른 가방에서 도시락면과 김치 팩을 꺼내 늙은이의 손에 쥐어 주었다. 뜨거운 물을 여기에 이렇게 붓고 뚜껑을 닫은 다음 조금 기다렸다가 먹으면 돼요. 이건 사이드 디시인데, 김치라고 하지요. 맛이 원더풀입니다, 그렇게 손짓발짓을 해대자 마지못한 듯 늙은이가 엉거주춤 물러났다.
동승객은 깊은 잠에 빠졌는지 그 같은 소란에도 꿈적도 하지 않았다. 자는 체하는 거야. 저렇게 나를 안심을 시킨 다음, 내가 잠든 틈에 껍데기를 홀라당 벗겨갈지도 몰라. 그렇게 그는 혼자 마음을 까불다가 할 수 없어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늙은 승무원은 밤새 세 번이나 더 그를 찾아왔다. 늙은이는 ‘명시하지 않은 것은 모두 불법이다’라는 공산당의 교시에 충실했던 것이다. 장오는 결국 1달러 지폐를 한 장 늙은이의 손에 쥐어줌으로써 그의 사명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장오는 창백한 햇살 아래 대리석 역사(驛舍)가 돌올하게 서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역에 내렸다. 숨을 내쉴 때마다 김이 부옇게 서렸고 살에 닿는 공기는 하바로스크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욱 낯설고 차가왔다. ‘동방을 다스린다’라는 뜻을 가진 블라디보스토크는 짜르 제정시대에 극동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교두보이자 부동항(不凍港)의 해군기지였고, 스탈린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극동 제일의 행정도시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눈에 들어 온 도시는 50년 가까이 머리 빗질 한 번 안한, 피폐와 남루가 깃든 고도(古都)의 모습이었다.
해군부두 쪽 바다에서 태양이 불쑥 솟아올랐으나 차가운 대기에 질렸는지 햇살은 여전히 창백했다. 부두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창날처럼 그의 이마를 베어냈다. 그는 미처 방한모를 준비하지 않은 자신을 나무랐다.
마중을 나온 권 선생의 차로 역 광장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은 언덕길을 넘으니 또 다른 바다가 나왔다. 그 바다를 굽어보는 언덕 위에 10층짜리 대형 호텔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바로 블라다보스토크 호텔이었다. 방이 텅텅 비어 있었는데도, 초청자의 사전예약이 없으면 투숙이 불가능했다. 규칙이 그러하므로 억지를 부려도 소용없는 일이라고 권 선생이 귀띔해 주었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남쪽 바다는 아무르 강의 하류 중 한 지류로, 바닷물과 합치는 곳이었다. 동쪽의 해군기지와는 달리 만의 안쪽은 강 복판까지 하얀 얼음이 깔려 있었다. 방을 나설 때마다 장오는 시린 머리가 걱정이었다. 한 번 언 머리는 녹더라도 전처럼 소생되지 않아요. 이건 대단히 중요한 얘기입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권 선생과 동행한 달리바의 통역관 블라디미르였다.
다음 날 달리바 산하기업인 연해주 수산종합회사 사장 일행이 호텔을 방문했다. 그리고 곧 그들과 협상이 시작되었다.
사장은 샴푸공장을 건설할 재원 마련을 위해 외국 판매용 명태쿼터를 할애할 생각이라 말했다. 극동어업총국인 달리바는 오츠츠크와 베링해, 쿠릴열도와 사할린 및 연해주 연안을 망라한 극동의 수산업을 총괄적으로 통제하는 기구로, 해군의 역할을 제외한 제반 해상활동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달리바 총재의 권한은 대단히 막강했다.
그들이 보유한 총 어획쿼터는 5만 톤이었는데, 장오가 얻고자 하는 양은 그 10분의 1인 5천 톤이었다. 쿼터에 대한 대금지불은 어획량에 따른 신용장 결제에 의해 이루어졌고, 러시아 조업선들이 끌어다 주는 그물자루를 한국어선이 넘겨받는 양상수매 방식이었다. 대상 어종은 체장 35센티미터 이상의 명태로 한정하고, 러시아측 대리인이 한국어선에 승선하여 매회 인수량을 함께 측정한 다음 그 수치를 러시아측에 텔렉스로 통보하면 그들이 송장을 작성하여 신용장을 네고하는 식이었다.
문제는 쿼터료였다. 1년 전, 미국과의 합의가격은 톤 당 350달러였는데 달리바측의 요구는 그보다 1백 달러가 비싼 450달러였다. 장오가 미국 가격을 예시하며 조정을 요구하자 그들은 보스와 협의해 보겠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보스는 다름 아닌 달리바의 총재를 뜻했다. 이튿날 다시 만난 사장은 보스의 지시라며 450달러 이하로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반응은 한결같았다. 명태 산란기가 코앞으로 닥치고 있었으므로 시간이 촉박했다. 권 선생도 그들의 고집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보스가 그들을 만나줄 리도 만무했다. 그들 말마따나 공장 건설을 위한 자금 마련도 시급하고, 게다가 어기가 끝나면 그만일 쿼터를 두고 그처럼 고집을 부리는 것을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산란을 끝낸 명태 가격은 고작 2백 달러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호텔에 발이 묶인 지 닷새 째 되는 날, 아침식사 시간에 권 선생과 마주앉은 자리에서 그는 고민의 일단을 피력했다.
“아무래도 콜호즈 쪽 쿼터를 알아봐야겠습니다. 권 선생은 달리바하고의 네고가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글쎄요, 내가 총재를 직접 아는 것도 아니고… 시애틀에서 알고 지낸 블라디미르란 놈의 얘기만 듣고 주선한 일이니… 그들이 이처럼 앞뒤가 막힌 사람들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 했습니다.”
권 선생도 난감해했다. 당시 러시아는 구 소련이 러시아연합국가로 바뀌면서 중앙집권적 통제경제가 시장개방과 함께 지역별 자치경제로 전환되고 있었고, 각 산업체들도 한창 민영화로 탈바꿈하는 과정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대단위 산업체나 주요기관의 우두머리들은 여전히 구 소련의 공산당 간부들이었으며, 운영방식도 자본주의의 생리와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냉전체제가 무너지자 발 빠르게 미국에 연고를 찾아 진출했던 사람들은 러시아의 자원개발에 눈독을 들인 미국자본의 첨병이 되어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블라디미르도 그 부류의 하나였다.
“황 부장, 입장이 그렇다면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콜호즈와 한 번 접촉을 해보세요.”
중개수수료를 벌겠다고 미국에서 날아온 권 선생에게는 민망한 일이었으나, 블라디미르의 지원을 받아 그는 그 날 당장 블라디보스토크에 소재한 몇몇 콜호즈 방문에 나섰다. 그 중에서 ‘연해주 어업공동체’를 방문한 것은 그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그들 역시 장오가 찾고 있는 쿼터를 넉넉히 확보하고 있었고, 아직 누구와 아무런 계약도 하지 않은 상태인 데다가, 그들 또한 SRTM급인 1,000톤짜리 트롤어선을 20여 척이나 운영하고 있었다.
쿼터를 판매한 돈이 전액 자기들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랜 사회주의 체제를 딛고 시장경제로의 전환기에서 그들의 자립의지는 매우 강렬했다. 게다가 이미 다른 회사들의 계약내용을 알고 있었는지라, 상담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렇게 하여 만 일주일 만에 바라던 명태쿼터를 확보했다.
계약이 성사된 후, 그는 블라드미르와 함께 해군부두 입구에 있는 레닌광장을 찾아가 제 2차 세계대전 승전기념탑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헤어질 때 블라드미르는 그가 쓰고 있던 검은색 밍크 털모자를 장오에게 씌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미스터 황, 머리가 얼면 희망이 없어요.”
3
파도는 여전하였으나 날씨는 쾌청했다. 겨울답지 않게 하늘에는 비늘구름이 넓게 퍼져 있었다.
저녁 무렵, 미스티키 호는 쓰루가 해협으로 들어섰다. 그는 브리지로 올라가 프런트 글라스를 통해 파도를 타고 있는 선수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불현듯 보송보송한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밤이 되자 살롱에서 또 다시 작은 파티가 열렸다. 두 여인이 시중을 드는 가운데 가공사 유라와 세르게이가 동석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어디서 구했는지 세르게이가 헬로윈 축제에서 봄직한 드라큐라 가면을 쓰고 나타나 흥을 돋우었다. 술에 취해 얼굴이 불콰해진 스베타는 우람한 젓통을 장오의 어깨에 실으며 성욕에 달뜬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미스터 황, 외로우면 언제든지 이야기 하세요. 나는 마음이 아주 넓은 여자예요.”
술에 취해 흥이 오른 러시아 친구들은 비디오를 틀더니 춤을 추기 시작했다. 송년가요제를 녹화한 테이프였다. 무심코 비디오를 보는데 문득 그의 눈길을 끄는 가수가 있었다. 기타를 치는 록그룹의 리더가 까만 머리의 동양인이었던 것이다.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는 평탄하고 반복적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우울한 느낌이 그득했다. 그러나 젊은 청중들이 악기 반주에 맞추어 양손을 머리 위로 내뻗고 손뼉을 치며 환호하는 모습은 70년대 비틀즈 공연의 열기와 비슷하여 신기했다. 그의 이름은 ‘빅토르 초이’. 조선인의 피를 이어받은 가수였고, 그가 부르는 노래의 제목은 고르바쵸프도 감동했다는 ‘뻬르멘(변화)’이었다.
간밤의 숙취로 식욕이 없어 그는 낮 동안 내내 침실에서 누워 지냈다. 흔들리는 배의 요동에 몸을 맡긴 채 수시로 뱃전을 치는 파도 소리를 듣는 외엔 멍청하고 무료한 하루를 보냈다. 오후 네 시에 티타임이 신설되고, 일곱 시 반으로 저녁식사시간이 늦춰졌지만 그는 무력감에 빠져 침실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두문불출하는 그가 걱정되었는지 저녁식사 후에 세르게이가 그의 침실을 찾아오기도 했다.
이 항해를 결심할 때부터 그는 결코 순탄치 않았던 지난날의 삶의 궤적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삶을 모색할 생각이었다. 그게 다시 바다를 만나려는 이유였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라 했다. 가장 낮기 때문에 바다는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인다. 그래서 이름이 바다였다. 강물이든 실개천이든, 세상에서 버림받아 흘러내리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바다는 육지보다 더 넓고 웅대했다. 그는 그 광활하고 풍요로운 바다의 모성에 의지하여 자신의 시름을 모조리 벗어던지고 남은 인생의 행로에 대해 해답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다시 러시아 땅에 발을 딛게 된 계기는 우연하고 엉뚱한 것이었다. 아니 우연이라는 말이 틀렸는지도 모른다. 그가 유랑하듯 러시아로 떠나오게 된 단초는 기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암종양처럼 서서히 자라왔던 것이다.
3개월여에 걸친 아르헨티나 출장에서 돌아온 그는 새로 입주한 지 한 달도 채 안 된 아파트를 급매물로 내놓아야만 했었다. 느닷없이 불거져 나온 아내의 부채는 산더미 같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회사마저 법정관리 절차를 밟고 있었다. 연안 각국이 저들 바다의 문을 걸어 잠그던 시절이었음에도 경영주는 닥치는 대로 빚을 끌어다 배 척수를 늘리기만 했었다. 배가 늘어난 만큼 그는 새 어장을 찾아 아프리카로 중동으로, 남미의 파타고니아와 알래스카 등지로 정신없이 뛰어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그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정은 파탄에 이르렀고 회사는 몰락의 길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 무렵 그는 한 대학선배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었다. 선배는 그가 부사장으로 있는 회사가 러시아에 설립한 합작회사의 현지 책임자로 몇 개월 전부터 장오를 지목하고 있었다. 그는 결국 6년 동안 봉직해 온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말았다. 조건은 월정급여 외에 현지법인이 달성할 이익금의 일부를 보너스로 받는 것이었다.
아내의 빚은 봉급생활자로선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마지못해 선배의 제안을 수락한 것은 러시아에서 한 2년쯤 고생하면 아내의 빚도 갚고 다시금 새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더욱 그의 결심을 부추긴 것은 원양어업이 처한 현실이었다. 연안국들의 입어제한이 가속화되어 해외어장이 날로 축소되었고 그나마 입어가 가능한 어장에서조차 선주들의 과당출어로 채산성이 악화되어 부도업체가 속출하는 원양업계의 현실을 직시할 때 러시아 어장은 그에게 새로운 도전을 시도해볼 만한 신천지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옮겨갈 회사의 직책은 부장이었다.
4
갑자기 하늘이 흐려졌다. 기압계 바늘은 며칠 동안 980헥토파스칼에 머물고 있었다. 브리지로 올라가 SSB로 블라디보스토크와 사할린 사무실을 호출하였으나 기상 탓인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 같은 상황에서도 어장이 가까워오는 만큼 눈이 빠지도록 그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파이오니어호의 상황도 궁금해졌다. 배가 쿠릴열도로 접근하는지 점점 피칭이 심해졌다.
밤이면 어김없이 늙은 선장의 파티에 불려가 곤욕을 치렀다. 진작부터 이브게니의 잠자리 대상이 된 나다는 그에 곁에 붙어 앉아 언제나 역한 비음을 토해냈다. 그 연인들의 은밀한 관계를 알고 있는 유일한 증인인 스베타는, 배가 불러 먹지는 못 하지만 메뉴는 읽고 싶은 엉큼한 돼지였다. 나다가 그녀의 애인에게 아양을 떨거나 오만한 몸짓으로 사랑의 포로인 이브게니에게 앙앙거릴 때면 스베타도 덩달아 온몸으로 성애의 욕구를 표출했다. 갑자기 배의 움직임이 격렬하여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머리마저 어지러워 그는 술자리를 피해 침실로 내려오고 말았다.
날이 밝자 바람이 조금 수그러든 듯했다. 브리지로 올라가 다시 SSB를 눌렀다. 처음으로 사할린 사무소와 전화 연결이 이루어졌다.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떠난 지 만 닷새 째였다.
뜻밖에 서울에 있어야 할 부사장의 목소리가 마중을 나왔다. 부사장은, 사장은 지금 모스크바에 가 있으며, 그 역시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그 쪽으로 향발할 것이라 했다. 부사장은 파이오니어 호의 입역허가는 주말쯤 해결될 것이라 말하고, 항해에 고생이 많다고 위로해 주었다.
그는 다시 블라디보스토크 사무실을 호출했다. 타라센코가 아닌 수산부 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지금까지 파이오니어 호의 허가가 지체된 것은 모스크바 수산부에서 쿼터료에 대해 이의을 제기한 때문이었다. 그 직원은, 현지사장인 타라센코가 출근하지 않은 것은 심장에 이상이 있어 지금 병원에 누워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쿼터에 대한 진행상황은 자기로서는 전혀 아는 바 없다고 말했다. 지금이 어느 땐데 아직 쿼터가 확정되지 않았단 말인가. 화가 치솟아 그는 인사말도 생략한 채 SSB를 꺼버렸다.
달리바의 쿼터 문제는 순전히 타라센코의 장난일 것이라 단정했다. 그는 부사장으로부터 타라센코가 지난 주 사할린을 다녀갔다는 얘기를 들었으므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직원의 얘기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장오가 만났던 러시아인들은 거의 대부분 거짓말로 밥을 하고 죽을 썼다. 출항하기 전, 그는 이미 달리바와 작성한 쿼터 양도와 관련한 가계약서를 첨부하여 모스크바에 송부한 터여서, 지금에 와서 가계약서 상 쿼터료가 문제된다면 달리바와 본 계약이 체결된다고 하더라도 허가가 나오는 것은 하세월일 것이었다.
타라센코는 다름 아닌 달리바 총재의 사위였다. 그래서 장오가 관련된 합작법인과는 별도로, 사장은 사업상 달리바의 영향력을 등에 업기 위해 그를 블라디보스토크 사무소의 현지 사장으로 채용했던 것이다. 그는 이제 타라센코의 얼굴만 떠올려도 진저리가 났다. 문득 지난 해 겨울의 일이 생각났다.
장오가 다시 블라디보스토크 행 야간열차를 탄 것은 만 2년 후인 ’92년 12월의 일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사무소는 기차역 맞은편의 바다로 향한 언덕배기에 있었다. 그가 전담할 합작회사는 연해주 동쪽 바다의 어업전진기지인 쁘레오브레쟈니예에 있었지만, 그는 편의상 블라디보스토크 사무소에 주재하고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처리하여야 할 일은 달리바로부터 쿼터를 사서 한국어선에 대한 입역허가를 받아내고, 한국어선에 명태를 잡아 줄 러시아 어선들을 끌어 모으는 일이었다. 한국축 파트너는 K원양이었고 투입될 공모선은 예의 파이오니어 호였다. 이 일의 핵심은 당연히 타라센코였다.
그러나 12월 초부터 준비해 온 이 일이 처음부터 삐꺽거리기 시작했다. 해가 바뀌어 1월도 하순에 접어들고 있었지만, 파이오니어 호의 입역허가가 그때까지 발급되지 않고 있었다. 이미 명란철이 개시된 지라 K원양으로부터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으며 장오에겐 하루하루가 피를 말리는 상황이었다.
행정절차가 모호해진 것은 옐친 정부가 들어서면서 자원분배 따위의 정책적인 사항과 외국어선에 대한 입어허가 등 행정사항들이 달리바가 아닌 중앙부처의 수산부로 귀속되어버린 탓이었다. 따라서 달리바가 관장하던 행정영역이 대폭 축소되었고, 덩달아 총재의 권한도 시들해져 버린 것이었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그가 옐친 정부로부터 수산부장관으로 거명되자 막강한 권력과 이권의 산실인 그 자리를 놓치기 싫어 대신 사할린 주지사로 있던 그의 친구를 추천하였다는 것인데,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국내외를 막론하고 수산업과 관련된 주요 인사들이 모조리 모스크바에 줄을 대는 바람에 그만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쳤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모든 법과 정책이 혼란을 빚고 있던 시기여서 달리바 총재라는 직함만으로도 그는 여전히 이권의 중심에 머물러 있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장오는 생각다 못해 타라센코를 앞세워 달리바 총재를 찾았다. 첫눈에도 달리바 총재의 풍채는 영락없는 붉은 곰의 인상 그대로였다. 그의 입에서는 여전히 더운 김이 뿜어져 나왔다.
달리바 총재가 그의 사위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캄차카 서안에는 유빙이 많아 당장 조업은 어려울 게야. 달리바 명의로 임시 입역허가서를 발급해줄 테니 우선 오호츠크 해에서 조업을 시작하라고.”
그 대신 붉은 곰은 선단을 가동시킬 기름을 사야한다며 1억 5천만 루불의 쿼터료 선급을 요구했다. 돈은 나중 일이고 일단 파이오니어 호의 허가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기쁜 마음에 장오는 달리바 총재에게 머리를 조아려 감읍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달리바의 임시허가라는 것이 각 해역을 관할하는 립보드에 보내는 협조공문에 불과했다. 공문을 본 캄차카 립보드는 문서에 구체적으로 어장을 명시하고 있지 않다며 일언지하에 협조를 거부했다. 그들도 이미 권력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직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리바의 임시허가서가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리자 타라센코는 소식을 끊고 아예 출근을 하지 않았다. 타라센코가 없으면 도무지 일의 추이를 파악해낼 수 없는 판국이었으므로 장오로선 자연 애간장이 녹아내릴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2월이 되자 K원양에서 자구책을 찾느라 러시아통인 임원을 파견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런데 블라디보스토크에 모습을 나타낸 사람은 놀랍게도 3년 전 그를 블라디보스토크로 초청했던 권 선생이었다. 하지만 반가운 해후도 잠시였다. 3년 전과 입장이 바뀌어버린 두 사람은 마주 앉는 일조차 괴로웠다.
“아니 그래, 허가 받아내는데 한 달이나 기다리게 하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명태란 놈들이 배가 올 때까지 알을 배속에 품은 채 기다리기라도 한답디까?”
그 무렵 모스크바에서는 한·러 어업협정을 위한 실무회의가 3차 회담까지 가는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일개 한국어선의 입역허가가 모스크바 당국의 안중에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한편 미국어장에서 쫓겨난 배들은 미숙란(未熟卵)이면 어떠냐며 이미 지난달부터 하나 둘 채란조업에 돌입하고 있었다.
“쿼터는 달리바로부터 이미 얻어놓았고, 신청서도 들어가 있으니 이왕 기다린 김에 며칠만 더 기다려 봅시다. 권 선생님을 처음 뵌 3년 전 그때보다도 더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권 선생은 그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음 날로 사할린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는 달리바 총재가 자기체면 때문에 지금껏 러시아 수산장관에게 별다른 손을 쓰지 않았다고 여기고, 사할린으로 가면 어느 누구든 예전 주지사 시절의 연고를 찾아 해결사 노릇을 할 사람이 있을 것이라 탕탕 믿고 있는 눈치였다.
권 선생이 떠난 바로 다음 날이었다. 누군가가 호텔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바람에 그는 겨우 잠에서 깨어났다. 간밤에 호텔 로비에서 한국에서 출장을 온 지인들과 우연히 만나 보드카로 대취한 끝이었다. 다음 날이 토요일이기도 했지만 장오는 그저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을 만큼 마음이 초조해 있던 참이었다. 문을 열고 보니 숨을 헐떡이며 웬 남자가 웃고 있었다. 어디론가 잠적한 후 일 주일이나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타라센코였다.
“미스터 황! 모스크바에서 어제 허가가 나왔어요. 빨리 서울에 전화해요!”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그 동안 뭉쳐 있던 그에 대한 울화도 봄눈 녹듯 사라졌다.
그런데도 캄차카 립보드의 허가서는 닷새 뒤에야 떨어졌다. 그러나 정작 K원양은 한국 정부가 신용장 개설을 미루고 있다며 파이오니어호를 어장에 투입하지 않았다. 권 선생도 연락을 끊고 있었다. K원양이 지불하는 명태 수매가격은 3년 전보다 무려 2백 달러나 뛰어오른 550달러였다. K원양은 이참에 권 선생을 앞세워 사할린의 값싼 명태를 사려는 욕심인 듯싶었다. 명태나 명란값이 금값이 아닌 다음에야 수매단가가 톤당 100달러만 낮아도 큰돈을 절약하는 셈이므로, 사실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K원양을 결코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파이오니어 호가 마지못해 서 캄차카 수역에 들어온 것은 2월 하순의 일이었다. 포란율(包卵率)이 10퍼센트가 넘는다는 인근 조업선들의 방송을 듣고 나서야 다급하여 저들의 욕심을 걷어버렸던 것이다. 메뚜기도 한철이라지 않는가. 명란조업은 결코 때를 놓쳐서는 안 될 일이었다. 입장이 난처해진 권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들르지도 않고 한국으로 직행했다. 싼 쿼터를 사는 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러시아 자선(子船)들을 일사불란하게 선단으로 묶는 일은 어획수수료에 대한 선주들의 이견 사안 등으로 결코 짧은 시간에 해결될 사안이 아니었다.
바다에서의 작업이 시작되자, 잠시 쉬었다 가라는지 바다가 기승을 부렸다. 강풍에 뒷덜미가 잡힌 조업선들은 3일이나 피항했다. 그런 반면 육지 가까운 어장은 대풍이었다. 덕분에 파이오니어 호는 자선으로부터 하루에 5백 톤씩의 어획물을 넘겨받고 있었다. 북위 53도 어장은 씨알도 굵고 알 상태도 양호했다. 잇따른 대어 소식에 고무된 K원양은 쿠릴열도 인근 어장에서 정부간 협정으로 배정된 직접조업 쿼터로 작업중이던 3천 톤급 공모선을 즉각 추가로 투입했다. 기상도 좋아 3월 중순까지는 내내 순풍이었다. 바다가 평온하니 명태어군도 53도 어장을 떠나지 않았다. 수란(水卵)이 급증한 4월 초순까지 K원양은 약 2만 톤의 어획물을 받아 실었다.
우습게도 명태사업의 성공으로 일약 스타가 되어버린 사람은 타라센코였다. 그는 본사의 배려로 서울로 초청되어 융숭한 대접까지 받았다. 내친 김에 타라센코는 사장에게 수익금에 대한 배당까지 요구했다가 거절당하고 대신 관광이나 하라고 홍콩지사로 보내졌다는데, 그 곳에서 그는 두 컨테이너 분의 잡화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그 잡화를 일 년 내도록 팔아 결국에는 그 판매대금의 절반을 자신의 부수입으로 착복했다. 그는 현지법인의 사장이랍시고 직원들까지 그의 수하로 장악하여 사사건건 장오를 배척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사무소를 통한 무역은 모두 본사에서 관장하고 있었지만, 사장은 현지법인의 제반 업무처리와 직원들의 관리 등을 모두 장오에게 위임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통솔해야 할 장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장은 다음 해 겨울의 명태사업을 대비하여 현지 사무소를 다만 유지만 한다는 입장이었으므로 명태사업의 효용성이 사라지지 않는 한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타라센코는 사장의 손아귀에서 결코 떠날 수 없는 보물단지였다.
5
드디어 배는 파라무시르와 슘수 섬으로 둘러싸인 쿠릴해에 당도했다. 배를 뒤따라 앙칼지게 불어오던 바람도 밤새 숨을 죽여 흑청색의 바다는 다시 고요해졌다. 난류인 쿠로시오 해류의 속류(續流)는 쓰루가 해협을 넘어서면서 태평양의 동쪽으로 빠져 나갔고, 캄차카 반도에서 발원하여 남하하는 오야시오 한류는 쿠릴열도의 동쪽을 타고 흘렀다. 저온, 저염의 이 해류는 플랑크톤이 풍부하여 쿠릴열도 주변에 풍성한 어장을 형성해 준다. 오야시오란 ‘물고기를 키우는 어버이’란 뜻이다.
좌현 쪽으로 머리가 백발인 정삼각형의 섬이 하나 나타났다. 그 자태가 어찌나 빼어난지 마치 겨울의 후지산을 보는 듯했다. 해도를 찾아보니 아틀라스토바 섬이었다. 배가 속도를 줄이자 11시 방향에서 작은 배 한 척이 나타났다. 달리바 소속 행정연락선이었다. 그 배는 미스티키 호로부터 달리바의 행정요원 두 명을 받아 싣고는 서북 방향으로 사라져 갔다.
이브게니는 그 연락선에 그를 세르게이와 함께 전선시키려 하였으나 연락선 선장이 정중히 거절했다. 그 때문에 이브게니는 오전 내내 불쾌한 기색이었다. 한국어선에 승선하려는 달리바 직원은 그들 외에도 두 명이 더 있었는데, 그들조차 선장의 얼굴을 보더니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조업이 임박하였으므로 선장은 밥만 축내는 손님들이 거추장스러웠던 것이다.
늦은 밤 미스티키 호는 처음으로 그물을 내렸다. 달리바 직원들의 요청으로 한국 국적선인 대진호와의 교신을 위해 장오는 브리지에서 꼬박 밤을 새었다. 대진호는 오호츠크해에서 전년도 비포란태 쿼터조업을 끝내고 현재 쿠릴열도를 향해 남하중이었다. 상봉예정 시각은 새벽 5시로 정했다. 장오가 리시버를 끄고 돌아서려는데 SSB에서 다시 그를 찾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 부장! 나 공명식이요. 여기는 웬일이요? 도대체 어느 배로 가는 길이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절친하게 지냈던 선배였다. 한때 북양 트롤선 선장이었던 그도 장오처럼 지난 1년 간 러시아합작법인의 주재원으로 근무했었다. 한국 어선들이 열어놓은 공동채널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고 반가운 나머지 안부를 물어온 것이었다.
“아이고, 행님! 반갑심더. 파이오니어 호로 가는 중입니더. 행님은 우짠 일인교? 육지에서 버는 돈이 앵꼽던교?”
“그기 아이고… 명란철이라 합작선에 올라가 감독 좀 할라꼬. 부산서 유양호 타고 나왔어. 명란철 끝나면 부산서 만나 쐬주나 한 잔 하세. 몸조심 하시고… 오버!”
“우짜든동 부산서 꼭 보입시데이! 아웃!”
속을 빼앗길 염려가 없는 사람에겐 언제나 사투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선배를 태운 유양호도 명태를 찾아 뜬 눈으로 밤을 새울 참이었다.
예망작업은 새벽 2시쯤 끝났다. 코드엔드에 든 어획물은 겨우 10톤 남짓이었다. 포란율은 3퍼센트 정도였고, 체장도 30센티미터 전후로 작은 편이었다. 어군의 밀집도가 낮다고 생각한 선장은 북쪽을 향해 어탐이동을 지시했다. 당직을 서던 2항사가 그에게 명태와 섞여 올라온 가자미를 프라이하여 우크라이나 산 포도주와 함께 권했다. 포도주는 입안에 텁텁한 여운을 남겼다.
약속한대로 새벽 5시, 대진호와 상봉했다. 여명까지 아직도 시간이 남았지만, 대진호로부터 고무보트가 내려지면서 달리바 직원들이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두 배 사이로 생겨난 커다란 파문이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그때였다. 몸집이 뚱뚱한 사내가 발을 헛디디며 물속으로 그만 풍덩 꼬나 박히고 말았다. 순간 그들을 태우려고 고무보트를 대기시키고 있던 한국 선원들이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곧이어 양쪽 배에서 쏘아대는 랜턴 불빛이 칠흑의 바다 위를 어지러이 교차했고, 미스티키 호에서 급히 내던진 라이프링이 바닷물과 마찰음을 냈는가 하면 어두운 바다 위로 사람들의 허둥대는 소리가 요란하게 퍼져나갔다. 그 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까. 수면 위로 불쑥 사람의 머리가 솟아올랐다. 고무보트의 선원 하나가 황급히 하커를 내밀자 물에 빠진 자가 힘들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입고 있던 상의는 방수복이 아닌 방한복이었다. 흠뻑 물에 젖은 사내의 무거운 몸이 간신히 보트에 올려지자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울도 파도도 없는 날씨가 그를 살린 셈이었다.
장오가 급히 대진 호 선장을 불렀다.
“박 선장, 위스키 좀 준비해 두세요!”
하지만 대진호 선장은 냉정했다.
“상태가 좋지 않으면 받아 실을 수 없소. 욕탕도 없고 의사도 없어요.”
망할 자식! 대번 그의 입에서 욕이 튀어 나왔다. 대진호 선장으로서는, 사람의 목숨보다 물에서 건져 올린 사람이 후송을 요하는 상황이라면 그 때문에 며칠 동안 조업을 못하게 될까봐 그게 걱정인 것이었다. 해상에서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누구라도 팔을 걷어붙이는 게 선원법 이전의 정리였다. 먼 바다에서 선박침몰사고가 나면 행여 죽지 않고 아직껏 표류하고 있을지 모를 실종자 수색을 위해 인근해역의 동료선박들이 적어도 사흘 밤낮을 이 잡듯 바다를 헤매고 다니지 않는가.
고무보트를 타고 있는 갑판장에게 VHF로 물에 빠진 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대진호 선장의 다급한 음성을 귓전으로 흘리며 그는 허탈한 심정이 되어 브리지를 내려왔다. 누군가가 등 뒤에서 ‘시간은 돈이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날이 밝자 다시 분주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쿠릴 해의 어황은 생각만큼 좋지 않았다. 하루 네 차례 투망에 겨우 50 톤 남짓한 어획량이었으므로 선원들은 너나없이 배가 고프다는 표정들이었다. 알을 품지 않고 있어서 어획물은 모두 머리와 창자를 뺀 H&G 상태로 동결 처리되었다.
다시 SSB로 블라디보스토크 사무실을 호출하니 대뜸 타라센코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의 성격은 바다의 날씨처럼 변덕스러웠다. 그런 그가 오늘은 봄날처럼 다정했다. 모스크바로부터는 아직 기별이 없으며 달리바의 쿼터료 문제는 다음 주 월요일이면 결론날 것이라고 그가 말했다. 며칠 전 통화에서 부사장은 만일을 대비하여 사할린의 카니프라는 수산회사가 가진 5천 톤의 쿼터로 K원양과 추가계약을 맺었으므로 파이오니어 호의 입역허가는 어떻게든 곧 발급이 될 것이라고 말했던 터였다. 누구의 쿼터로 어느 회사 자선들과 언제 어디서 조업이 개시될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허가도 떨어지지 않은 파이오니어 호를 새삼 호출하기도 뭣했다. 그렇다고 남의 배에서 열흘 가까이 식충이 노릇을 하고 있자니 바짝바짝 가슴이 타 들어갔다.
오후가 되니 하늘에서 다시 눈이 내렸다. 꽃송이만한 탐스러운 눈 덩어리가 어지럽게 바다 위로 낙하했다. 내리는 눈을 흡족한 표정으로 삼키고 있는 바다는 마치 애욕에 겨워 몸부림치는 젊은 여인의 누드를 보는 것 같았다.
함께 저녁을 먹자고 세르게이가 찾았지만 식욕이 나지 않았다. 그를 돌려보낸 뒤 마지못해 브리지로 올라가 파이오니어 호를 불렀다. 네 차례나 호출을 한 뒤에야 저쪽에서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쪽에서 ‘황 부장 일행의 승선여부는 입역허가가 나올 때까지 보류하라는 본사의 지시가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섭섭했지만 을(乙)의 입장이라 그들에게 상봉재촉을 요청하기 어려웠다. 타선들의 동정을 물으니 러시아 정부가 할애한 쥐꼬리만한 직접조업 쿼터로 오호츠크 공해 위쪽에서 작업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 말은 오호츠크의 공해도 베링과 마찬가지로 이미 문이 잠겼다는 얘기였다. 그나마 아직 누구도 수매사업을 개시한 흔적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한국음식이 먹고 싶어 미치겠네요. 다음 주엔 무슨 소식이 있겠지요.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웃!”
배는 어군을 찾아 다시 북상했다. 어느덧 눈발이 걷힌 바다에는 다시 칠흑의 어둠이 깔렸다.
그날 밤 일찍 잠자리에 든 장오는 어지러운 꿈에 시달렸다. 쁘레오브레쟈니예에 살고 있는 소피아의 얼굴이 보였고, 집 나간 아내의 모습도 어른거렸다.
문득 잠에서 깨어 일어나 밖으로 나오니 백수인 여행객을 축복이라도 하듯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바다에 떨어진 눈송이들은 명멸하는 야광충처럼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서서히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울적해진 기분을 달래보려고 그는 자정을 향해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식쓰, 파이브, 포, 쓰리….
그때였다. 아이들을 남겨둔 채 집을 떠나던 아내의 풀죽은 뒷모습이 느닷없이 눈앞을 가로 막았다. 남자의 직업이 오랫동안 자주 집을 비우는 경우에 발생하는 지극히 통속적인 이유만으로 과연 그녀는 스스로 가정을 포기했던 것일까.
“나도… 나만의 인생을 갖고 싶었어요.”
아내는 다만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장오는 직장 일에 파묻혀 가정에 무심했던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면서도 당장 집을 팔지 않으면 안 될 큰 빚을 남긴 채 보따리를 싸서 떠나는 아내를 정작 붙들 수가 없었다. 파경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 그가 먼저였는지 아내가 먼저였는지 당시엔 분간조차 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어린 아이들을 키우는 가정주부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오랜 시간 방황했었다는 것을 그 당시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스트의 불빛이 산란하며 이내 헝클어졌다. 봄 바다에 떼 지어 익사하는 노란 나비들처럼 바다가 그의 눈앞에서 한동안 어지럽게 명멸하고 있었다.
6
파라무시르 섬 주변의 쿠릴해는 며칠째 평온했다. 조업이 시작된 후로 갈매기 떼가 배 꽁무니를 줄곧 따라 다녔다. 예전에 베링해에서 만난 놈들과는 달리 더 날렵해보였다. 더러 게으른 놈들은 바람에 겨드랑이가 낚여 한 마장이나 뒤로 밀려났다가 다시 몸을 씰룩이며 종전의 허공으로 복귀했다. 부지런하고 악착스런 놈들은 바람보다 더 빠르고 바람보다 더 강했다. 날개에 잔뜩 힘을 모아 공중에 잠시 몸을 고정시켰다가 포착된 먹이를 향해 한 순간 총알처럼 돌진하며 부리를 바다에 메다꽂았다. 영리한 새들은 날 수 있을 만큼만 포식하고 배가 부르면 날개를 접고 소화가 될 때까지 바다 위에 몸을 맡겼다. 갑판이나 연돌(煙突)이나 선교갑판 위에서 뒤뚱거리다 선원들에게 생포되어 불고기 신세가 되는 새는 모두 멍청이들이었다.
저기압이 머무는 바다에는 바람이 사방팔방에서 불어왔다. 성급하고 힘센 자들은 닥치는 대로 죄 부여잡아 내팽개치며 화살처럼 날쌔게 제 갈 길을 달렸고, 동네 마실가듯 건들거리는 자들은 수평선 너머에서 언제나 소리 없이 잠멸(潛滅)했다.
배는 비틀거리면서 그물을 끌었다. 명란 수율의 변화는 미미했다. 선장은 여전히 쿠릴어장에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씨알이 작은 어획물은 곧장 슬립웨이(slip way)로 미끄럼을 탔다. 4백 미터 해저에서 그물에 갇혀 올라 온 명태는 급격한 수압의 변화로 저마다 아가미가 터져 처참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어부들은 상한 고기들을 바다에 버렸다. 그럴 때마다 갈매기 떼가 게걸스럽게 모여들었다.
오후 티타임 때 처음으로 ‘만냐 까샤(좁쌀로 만든 죽)’가 나왔다. 장오는 러시아 친구들을 흉내 내어 치즈를 죽에 풀어서 먹었다. 곁에서 시중을 들던 스베타가 러시아에서는 육아식(育兒食)이라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처럼 남의 배에서 사육당하는 기분으로 지내야 할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느덧 미스티키 호에 승선한 지도 열흘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브리지에서 예망 코스를 따라 읽다 쿠릴열도의 작은 섬들과 마주치면 버릇처럼 아이들 얼굴이 눈에 밟혔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싶었는데 여전히 형상도 분명치 않은 꿈들이 그를 괴롭혔다. 썰물에 시달리다 겨우 보금자리를 찾아든 게의 은둔처럼 잠은 엷고 고단했다.
미스티키 호를 타기 보름 전, 그는 사장에게 사표를 제출했었다. 연말 휴가차 서울로 돌아온 길이었지만 다시 러시아로 떠날 마음이 영 생겨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가 책임졌던 합작법인이 1년도 채 못 되어 유야무야가 되어버린 때문이었다. 사장은 블라디보스토크 사무소의 부실한 영업실적 책임을 합작사업의 부진과 함께 싸잡아 그에게로 떠넘겼다. 사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사업의 최고선(最高善)이라 믿는 자였다. 남에게 줄 돈은 최대한 미루고, 받을 돈은 새벽같이 찾아 가 받아내야 한다는 무지막지한 지론의 소유자였다. 그의 뺨따귀를 후려쳐도 맘이 개운치 않았겠지만, 그는 거두절미하고 어미도 없이 미아 신세가 된 아이들을 핑계로 사직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합작사업을 절름발이로 만든 것은 출자금과 기타 금전적인 관계에 있어 쌍방 간의 신뢰에 금이 간 게 그 단초였지만, 무엇보다도 선박들이 조업에 임할 수 있는 쿼터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게 주된 원인이었다.
우리나라 연안의 면허어업은 금어기나 조업금지 수역만 피하면 별다른 규제가 없다. 당국은 쿼터 대신 척수를 제한할 뿐이어서 어업허가에 높은 권리금이 따라다녔다. 그러므로 경영자의 입장에서는 바다에 고기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일 뿐이었다. 미국의 경우 해마다 연간 총 어획량을 정해놓고 쿼터가 소진되면 조업을 중단시키는 소위 올림픽시스템이라는 것을 적용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의 쿼터관리가 과학적이고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
구 소련 체제에서는 어선이 계획생산의 도구였으므로 어선을 건조하여 지역이나 해역별로 배치하면서도 경제척수(經濟隻數)라는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어촌계와 흡사한 콜호즈나 대형선단을 이루는 어업단위는 국가에서 할당한 목표생산량만 달성하면 고기가 알을 까든 새끼를 낳든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극동의 경우 블라디보스토크에 틴로(Tinro)라는 자원조사연구센터가 매년 어자원의 분포와 자원총량에 대한 조사자료를 토대로 해역별 총 어획허용량을 산정하고 있었지만, 장오가 러시아에 뛰어들던 무렵의 러시아정부의 쿼터분배정책은 그 실상을 파악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다시 말해 생산단위별로 어선 규모나 척수에 비례하여 쿼터가 배정되는 것이 아니고, 내국인용 쿼터마저 유상과 무상으로 구분하여 캄차카나 사할린이나 마가단이나 연해주 할 것 없이 각 어업단체의 대표들이 쿼터를 손에 쥐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합작법인이 운영할 배는 모두 4척이었다. 그 배를 풀가동하자면 연초에 획득한 쿼터량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데도 합작회사 사장으로 내정된 가가린이라는 자는 장오의 그 같은 분석에도 태연했다. 한 번도 인생의 실패를 경험해 보지 않은 자 특유의 낙관이었다. 모자라는 쿼터는 그때 가서 사거나 빌리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이었다. 그는 ‘공산주의는 비록 실패했지만 조국은 결코 국민들을 저버리지 않는다.’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황 부장, 합작법인의 연간 수익배당금은 아무리 적게 잡더라도 1백만 달러는 될 거요. 그 20프로를 드리면 어떻겠소? 나는 황 부장이 러시아에서 내 사업이라 생각하고 창의적으로 일해 주기 바라오.”
“사장님,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내 손으로 고기를 잡는 것도 아니고… 러시아 사업을 어떤 행운이나 어느 한 사람의 창조적 노력에만 의지한다면 실패할 확률이 더 크다고 봅니다. 축구가 어디 한 사람이 하는 게임입니까?”
서울을 떠나오기 전, 사장이 제안했던 성과급을 단호히 거절했던 그의 판단이 결과적으로 옳았던 것이다. 아무리 여건이 잘 갖춰졌다고 하더라도 해양사업의 성패는 50퍼센트가 하나님의 소관이었다. 제아무리 인간이 재주를 부린다고 해도 바다 밑의 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3월이 되어 출어시기가 임박하자 장오는 한 동안 쁘레오브레쟈니예에 머물렀다.
처음 그곳을 찾았을 때의 기억을 그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곳은 아주 먼 옛날의 꿈속에서 보았음직한, 어쩌면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피안의 땅처럼 느껴졌다. 쁘레오브레쟈니예를 생각하노라면 언제나 몽환적인 그리움이 가슴에서 흥건히 배어 나왔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코란도를 타고 출발한 시각이 오후 한 시 반이었고 목적지에 도착한 시각은 밤 여덟 시 경이었다. 차가 무인지경의 비포장도로에 접어들자 영하 10도가 넘는 차가운 대기와 온통 하얀 눈을 덮어쓴 산하(山河)의 풍경에 그는 질겁하고 말았다. 바다가 가까워질수록 산등성이들은 모두 까까머리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산에는 모두 도토리나무 천지여서 그 모습이 그야말로 산산(山山)하여 입가에 웃음이 배이기도 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외진 길의 여행은 황망하고 쓸쓸했다. 사위가 어둑한 시간, 차에서 내려 눈밭에 오줌을 누노라니 그는 마치 자신이 멀리서 부쳐져온 한 장의 엽서 같은 존재처럼 여겨졌다. 적막한 산속의 광활한 침묵과 무거운 냉기에 곧 소름이 돋았고 그 순간 살아 있음이 너무 외롭고 위태롭다는 느낌과 함께 나이 사십에 원동의 허허벌판을 휘젓고 있는 자신이 너무 무모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산에서 흘러내린 개울물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바다를 향해 달려오다가 넓은 하천에 이르러 덥석 동장군에 발목을 잡혀 하얗게 얼어붙은 곳을 지나자 비로소 하나 둘 인가가 나타났다. 기사가 가리키는 객사는 마을 입구의 언덕 위에 외따로이 있었다. 객사에서 바라본 마을은 어둠에 묻혀 사방을 분간할 수 없었다. 멀리 눈아래로 바다가 보인 것은, 비로소 목적지에 당도했다는 안도감이 든 것은 다름 아닌 정박한 배에서 발사된 따뜻한 불빛 때문이었다.
극동 연해주에 속한 이곳은 위도 상 바다를 사이로 일본의 홋카이도와 마주보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어업전진기지였다. 오직 수산물 생산을 위해 인위적으로 지어진 부락이었으므로 주민들은 우크라이나나 백러시아 등지에서 강제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공동부락의 자치를 위해 경찰서와 소방서, 병원과 학교가 있었으며 마을 한 복판에는 공회당과 마가진(상점)과 바자르(시장)도 있었다. 이들 외에도 노래와 춤과 영화 같은 오락을 전담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다. 공공기관에 속한 사람들을 제외하곤 모든 주민들이 쁘레오브레쟈니예의 트롤선단기지로부터 생활비를 타 쓰고 있었다. 선단의 어선세력은 대형트롤공모선을 비롯하여 100여 척에 이르렀다.
배들은 출항일자가 잡히지 않아 언제나처럼 부두에 우두커니 묶여 있었다. 출어를 미적거리는 이유를 알아보니 유류나 어구, 선용품 등 출어에 필요한 보급품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돈이 있어도 마음대로 물자를 살 수도, 설사 살 물건이 있다고 해도 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는 오지까지 실어 나를 방도가 여의치 않다는 얘기였다. 한국에서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었지만, 제 일처럼 걱정하는 자는 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쁘레오브레쟈니예에 도착하여 그가 맨 처음으로 한 일은 현지 실정을 반영한 각 선박들의 조업예상 경비를 뽑아내고, 조업율에 따른 수익금을 추산한 사업계획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그 사업계획서를 가가린의 턱밑에 들이대고 배들의 조기출어를 읍소한 것이 벌써 일주일째였지만, 가가린은 장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상심과 후회가 가슴으로 빗발쳐 하루하루 견딜 수 없게 되자 장오는 결국 쁘레오브레쟈니예의 현실을 인정하고 노처녀 소피아처럼 자신이 꿈꾸었던 인생의 일부분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제가 자란 곳은 카스피해 부근의 작은 도시였어요. 대학을 졸업한 뒤 우편물처럼 이곳에 떨어졌지요.”
소피아는 장오의 통역관이었다. 쁘레오브레쟈니예에서 그를 위로하고 구원한 것은 지혜의 눈을 가진 소피아였다. 그녀는 주말만 되면 객사에서 홀로 쓸쓸히 지낼 그를 걱정하여 ‘치소뜨보드니예’나 ‘투사바야’와 같은 풍광이 뛰어난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치소뜨보드예는 약수가 샘솟는 깊은 산속 휴양지였고, 투사바야는 마치 어디선가 공룡이 뚜벅뚜벅 걸어 나올 것만 같은 원시 모습을 갖춘 절경의 해변이었다. 치소뜨보드니예를 찾아가 하룻밤을 보낸 어느 날, 그는 소피아의 뜨거운 애무를 받았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장오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녀를 품에 안고자 했다. 그녀와 살을 맞대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비로소 자신이 살아있는 존재자임을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그의 말에 정작 놀란 것은 부사장이었다. 그는 해가 다르게 급변하는 러시아 상황을 감안할 때 당장 눈앞에 닥친 명태사업을 현장에서 지휘할 사람은 장오뿐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애당초 개척사업인 러시아 간 수산업 합작프로젝트의 선봉장으로 장오를 선택한 자신의 체면도 우습게 될 지경이었던 것이다.
“사장에 대한 섭섭한 감정은 잊어버리게. 우리가 수산대학을 나와 이제껏 원양어업에 몸 바친 그 세월을 한 번 생각해 보게. 러시아 땅에서마저 희망을 찾아내지 못 한다면 이제 우리가 찾아가야 할 곳은 지구상 어디에도 없네.”
선배의 뜨거운 충고에 그는 그만 눈물을 삼키고 말았다. 불과 삼십 년 남짓한 세월에 원양어업은 벌써 사양산업이라는 치욕의 팻말을 목에 걸고 있었던 것이다.
7
강풍이 난리를 치며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풍력계급으로 미루어 ‘세븐(7)’은 넘을 된바람이었다. 바다 위로 백파가 만발했다. 파두(波頭)는 깨어져 사방팔방으로 연신 물보라를 흩날리고 있었다.
장오는 다시 블라디보스토크의 타라센코를 불렀다. 대답은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말 뿐이었다. 심지어 자선을 구하는 일도 애로가 많다며 손을 내저었다. 쁘리모리 지역 자선들은 어획수수료조로 톤당 280달러를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 달리바에 지불하는 쿼터비가 300달러였으므로, 그 가격이라면 밑지는 장사였고, 작년의 150달러와 비교해도 불과 1년 만에 두 배 가까운 인상이었다. 이러다간 명태 수매사업도 올해가 끝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답답하여 파이오니어 호를 불러 보았으나 그쪽도 본사로부터 구체적 지령이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허탈해 하는 그가 보기에 딱했는지 1항사가 어제 낮에 누군가가 파이오니어 호와 영어교신을 하더란 얘기를 슬쩍 들려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달리바 쿼터에 대한 사업진행이 불투명하자 참다못한 K원양에서 다른 쿼터를 사들인 건 아닐까. 만약 일이 그렇게 전개된다면 조만간 세르게이를 데리고 집으로 갈 배편을 찾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브리지를 내려올 때 큼직한 파도 뭉치가 하나 성큼 뛰어오르며 물보라와 함께 선체를 밀쳐냈다. 연이어 쿵! 하는 충돌음과 함께 선저부의 철판이 파르르 떠는 충격이 뒤따랐다. 풍하에 놓인 배는 전후좌우로 흔들리며 괴로운 몸짓을 계속했다. 배가 흔들릴 때마다 그의 몸뚱이도 흔들렸다. 마음이 먼저 흔들리고 다음으로 신념이 흔들렸다. 작업에 열중인 선원들과 달리 무위도식하는 그에게 바람은 감당할 수 없는 선동자였다. 바람은 마치 손 마른 자와 같아 바다를 시비하여 송사하는 자이기도 했다. 바람이 없다면 결코 바다는 부풀어 오르지 않을 것이다. 선수가 파곡(波谷)으로 깊이 머리를 처박을 때면 행여 다시는 복원(復原)되지 않을까 싶어,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바람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온종일 파도에 시달린 터라 기분전환을 할 요량으로 세르게이를 불러 조촐한 파티를 열기로 했다. 먼저 세르게이를 가공실의 유라에게 보내 광어와 가자미를 한 마리씩 구해오도록 했고, 마실 것은 2항사에게서 2달러를 쥐어주는 것으로 해결했다. 세르게이는 익숙한 솜씨로 회를 떴고, 초장은 그가 만들었다. 초대 손님으로 배에서 제일 한가한 통신장을 부르는 한편 현창(舷窓)을 열어 바다 위에서 서성거리는 바람까지 불러들였다.
나이가 쉰 두 살인 알렉산더는 유순한 사람이었다. 솔베니아산 ‘아포스톨스카’라는 보드카는 쓴맛이 입에 오래 남았다. 얼굴을 찡그리는 그를 보며 알렉산더가 ‘도드나’를 하지 않아 그렇다며, 한 입에 털어 넣은 술잔을 머리 위에 거꾸로 세우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강렬한 알코올 냄새와 혀와 목젖에 남는 쓴맛을 떨쳐내려는 심리가 ‘도드나’라는 특이한 주법을 만들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맛보는 생선회는 꿀맛이었고, 보드카를 삼킨 위장은 더할 나위 없이 개운했다. 보드카는 혈관 속에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 스스로 불꽃처럼 타올랐다.
손님들을 보낸 뒤 그는 머리 꼭대기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잠을 청했다. 내일은 또 내일의 바람이 불겠지. 해일처럼 곧장 잠이 밀려왔다. 모처럼 맞는 깊고 아늑한 밤이었다.
다음날 아침 유라가 장오를 찾아왔다. 오후에 자기 방으로 놀러오라는 말끝에 모처럼 명란수율이 5퍼센트가 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하며 아이처럼 웃었다.
잠시 후 알렉산더가 찾아와 전문을 한 장 건네주고 갔다. 발신인은 타라센코였다.
입역허가 발급됨. 파이오니어호로 즉시 전선바람. 상봉 위치 북위 54도, 동경 153도. 달리바 자선 미스티키, 도로즈도브로호 2척. 콜호즈 자선 오그니, 치빠예쁘, 스텔랴드호 3척. 끝.
그는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파이오니어 호로부터도 자진하여 연락이 왔다. 상봉 위치까지는 대략 스무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마침 미스티키 호도 침로를 서 캄차카 해역으로 바꾸고 있었다. 그래서 미스티키 호도 달리바의 전문을 받았으려니 여기고 급히 선장인 이브게니를 찾아가 전문을 보여주며 지금 파이오니어 호를 만나려 북상하는 길이냐고 물었다. 놀랍게도 그의 대답은 ‘노!’였다.
“이 배는 외국어선에 고기를 잡아다 줄 그런 멍텅구리배가 아니오.”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신조선이라 할 만큼 배의 장비가 신식으로 잘 갖춰진데다가, 흠잡을 곳 없는 가공실 시스템을 감안할 때 미스티키 호가 다른 공모선에 고기를 잡아다 줄 이유가 없었다. 한술 더 떠 그는 스터링 기어에 문제가 생겨 캄차카의 페드로 파블로스크 항으로 입항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능청을 떨었다. 달리바와 자선계약이 되었다는데 무슨 소리냐고 장오가 눈꺼풀에 힘을 주자 이브게니도 덩달아 얼굴을 험악하게 구기며 되받아쳤다.
“육지에 있는 놈들이 바다 사정을 어찌 알까! 흥, 어림도 없지!”
그러면 나는 어떡하느냐. 다른 자선용 어선에라도 풀어줘야지 않느냐. 짐짓 울상을 지으며 그렇게 다그치자 지금은 조업중이라 뭐라고 말할 수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그야말로 노회하고 음흉한 돼지였다.
세르게이를 시켜 전문에 호명된 콜호즈의 배들을 접촉해 보니 그들 또한 모두들 처음 듣는 얘기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앞으로 닥칠 어장에서의 일이 결코 만만치 않을 것임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었다. 장오는 당장 다음 행보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유라는 귀한 브라질산 원두커피를 내놓았다. 그의 아내인 듯한, 벽에 걸린 사진 속 여인도 푸른 눈동자를 가진 미인이었다. 그는 러시아가 싫다며 배를 내리면 서둘러 여동생이 사는 핀란드로 이민을 가겠노라고 말했다. 그에게 오늘 저녁 사시미 파티에 참석할 용의가 있느냐고 물으니 사시미는 싫다며 대신 자기가 ‘피크 포이스’란 덴마크 요리를 만들어주겠다 했다. ‘키 큰 소년’이라는 뜻의 그 요리는 밀크 2리터에 어육 0.5킬로그램, 소금과 설탕 반 스푼에 버터를 넣고 버무려 삶은 것인데, 어육으로는 청어가 제격이고 명태살도 괜찮다며 제법 가공사 티를 냈다. 거기에 백포도주를 곁들인다면…. 입에서 절로 군침이 돌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장오는 전문을 들고 다시 이브게니를 찾았다. 짐작한대로 그의 대답은 어제처럼 불가(不可)였다. 그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배신감마저 들었다.
“이브게니 선장, 나는 임무를 수행하려고 이곳까지 나왔소. 당신에게는 고기잡이가 중요하듯이 나도 마찬가지요. 애시당초 당신 배를 탄 것은 당신 배가 파이오니어 호와 함께 선단을 이룰 자선이고, 또 나를 파이오니어 호까지 데려다 줄 것으로 믿은 때문이었소. 파이오니어 호도 어제부터 약속장소에서 표박중이지 않소? 그런데 이처럼 시간만 끌면 도대체 날더러 이 얼음바다를 헤엄쳐가라는 말이요?”
장오는 중간에서 통역을 하는 세르게이의 표정을 살폈다. 손을 흔들어 대며 장오의 말을 전하는 그의 감정이입이 절묘했다.
“미스터 황, 나는 여기서 조업을 더 계속할 생각이오. 작년에 파이오니어 호와 함께 조업을 해봤지만 한국 사람들은 아주 날강도들입디다. 그래서 파이오니어 호를 만날 생각이 없어요. 정 뭣하시면 파이오니어 호더러 이쪽으로 내려오라 그러쇼.”
혹을 떼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혹을 하나 더 붙일 판이었다. 그 사이 두 배 간의 바다거리는 150마일로 좁혀져 있었지만, 조업 손실을 보지 않으려는 선장의 고집이 일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처음부터 당신 생각이 그러하였다면 진작 다른 배를 주선해 주었어야지요. 며칠 전 선원을 풀어주고 간 도브르도즈 호에라도 말이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 파이오니어 호를 부르라니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그건 당신 문제요. 내 인생을 당신이 책임질 수 없듯이 당신 문제를 내가 해결해 주리란 생각은 버리쇼. 우리는 지금 열심히 명태알을 모아야 한다고요.”
이브게니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자신의 논리에 스스로 만족한 듯 입가에 엷은 웃음까지 띄웠다. 이럴 경우 선택은 언제나 두 가지뿐이었다. 상대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며 그의 이기심을 일거에 짓밟아버리든지, 아니면 그런 그의 이기심을 역이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리 준비해 간 봉투를 슬쩍 건네며 말했다.
“이거 1천 달러입니다.”
아까운 돈이었지만 그 동안 세르게이와 둘이서 먹고 자고 한 경비에다 열두 시간이나 달려가야 할 러시아 배의 기름값이라 생각하니 맘이 편했다. 아니나 다를까 봉투를 받아 쥔 이브게니의 입이 함지박만큼이나 벌어졌다. 약효는 금세 나타났다. 이브게니는 그 즉시 브리지로 올라가더니 항해사에게 파이오니어 호의 표박지점을 향해 전속항진을 명령했다.
북상하는 길에는 잘게 부서진 유빙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파도의 산은 조금씩 키를 높여갔고, 피칭의 정도도 점차 격렬해졌다. 제법 성깔을 가진 저기압 하나가 북상하고 있다는 기상통보도 나온 참이었다. 따라서 파이오니어 호와 상봉하더라도 조업이 곧바로 시작될지 의문이었다. 기상도 기상이려니와 육지와 바다의 상황이 서로 엇박자를 긋는 것이 장오의 제일 큰 근심거리였다. 더구나 날씨마저 사흘들이 변덕을 부리니 과연 3월말까지 과연 계약톤수를 다 채울 수 있을지도 또한 의문이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파이오니어 호가 시야에 들어 왔다 그 순간 장오는 북양에 출어했던 수십 척의 공모선 가운데 가장 몸집이 큰 파이오니어 호에 승선한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설레었다. 한편으론 앞으로 그가 맞닥뜨릴 모선에서의 일을 생각하며 일말의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문득 15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당시 한․미 공동사업의 선단요원으로 선정된 그는 비행기로 앵커리지를 거쳐 알래스카의 코디악(Kodiak) 섬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자선 편으로 우약만(Uyak bay)으로 가 8천 5백 톤급 공모선인 ‘북능호(北凌號)’로 옮겨 탈 계획이었다.
자선의 출항을 기다리며 호텔 발코니에서 내려다 본 코디악 항은 조용하고 아담했다. 북위 57도의 고위도에 위치하고 있지만, 해양성 기후의 영향으로 4월 말인데도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굵은 통나무를 세워 만든 선착장에는 장난감 같은 고깃배들이 올망졸망 머리를 맞댄 채 계류하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눈 속에 파묻힐 것만 같은 그런 한가한 어촌 풍경이었다.
북능호에 승선한 직후 자선과 첫 교신을 가졌던 순간은 두고두고 그를 괴롭혀 온 악몽 같은 기억이었다.
미처 사물을 정리하기도 전에 항해사로부터 자선인 ‘캡틴 죠’ 호 선장이 장오를 급히 찾는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는 급히 VHF의 리시버를 켰다. 그러나 잡음이 뒤섞인 상대선 선장의 말 중에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윈치(Winch)와’ ‘트러블’(Trouble)이라는 단 두 마디뿐이었다.
“우쥬 플리즈 리피트 어게인?(Would you please repeat again?)”
다급해진 그가 재차 물었으나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그는 땀을 뻘뻘 흘렸다. 게다가 사정을 알아챈 상대방 선장이 마구 욕설을 퍼부어대어 그는 당장 쥐구멍에로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그는 어림짐작으로 양망중 윈치에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판단하고 모선의 1기사와 조기장을 문제의 자선에 보냄으로써 겨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로 미국 자선들과 교신하기 위해 브리지로 올라갈 적마다 그는 마치 저승사자에게 끌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저승사자는 다름 아닌 당직사관들이었다. 그러나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그는 뜻밖의 구세주를 만났다. 구세주는 페라곤 호의 브라운 선장이었다. 그는 청년 시절 몰몬교 선교사로 한국생활을 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어느 날 자선들과 보이스를 나누고 있던 그의 어눌한 말을 듣고 사정을 알아차린 브라운이 자주자주 중간에서 통역을 해 주었던 것이다.
파이오니어 호를 눈앞에 둔 그의 걱정과 두려움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한 배에 탄 한국 사람들끼리 갑과 을의 입장에서 명태라는 어획물을 두고 밀고 당겨야 할 난처하고도 지루한 싸움이었기 때문이었다.
8
날이 밝았다. 저기압을 앞지른 덕분에 해황은 퍽도 맑고 평온했다. 정동(正東)으로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파이오니어 호의 위용은 참으로 눈부셨다. 북능호에 비하면 파이오니어 호의 몸무게는 그 세 배에 가까운 2만 3천 8백 톤이었다. 전장이 200미터를 넘었고, 승선 인원만도 3백 명에 달했다. 북능호는 이미 80년도 중반에 고철로 해체되고 말았지만, 파이오니어 호는 쉰 살 가까운 나이임에도 아직껏 바다를 지키고 있었다. 미국 어장이 종료 휘슬을 분 다음, 파이오니어 호는 갈 곳을 잃고 부산 외항에서 한숨만 짓고 있다가 러시아 어장이 열리자 다시 몸을 일으킨 것이었다. 법정관리에 들어간 K원양은 한때 그 많던 배들을 모두 남에게 넘기고 이제는 북양트롤 공모선 두 척과 파이어니어 호 한 척만으로 재기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파이오니어 호 갑판으로는 마치 기항하는 항공모함처럼 선원들이 줄을 짓고 있었고, 10층 건물 높이쯤 되는 톱 브리지 상갑판에서는 선장을 비롯한 사관들이 곧 넘어올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공모선 뱃전으로 사다리가 내려졌다. 맨 먼저 사다리를 탄 사람은 멋진 마도로스 모자를 쓴 이브게니였다. 그 뒤를 치마를 걸친 나다와 스베타가 따랐다. 여자를 본 한국선원들은 갑자기 발작이라도 난 듯 환호성을 내질렀다.
30미터 가까운 폭을 가진 널따란 갑판으로 올라서자 지금껏 출렁이기만 하던 바다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로서는 상선을 오래 탄 L 선장이 낯설었지만, J 선단장은 이름난 선장 출신이어서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현역 시절에 선원들로부터 호랑이 선장이라고 불릴 만큼 급하고 저돌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북양에선 제일 고기를 잘 잡기로 호가 난 자였다. 파이오니어 호를 명태가공 공모선으로 개조한 것도 그의 작품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 환갑이 다 된 나이임에도 쓰러져 가는 회사와 명운을 함께 하고 있었다.
“선단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캄차카에서 선배님들을 뵈오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황 부장도 수대 출신이오?”
“예! 새까만 후뱁니다.”
“아이구 잘 됐네… 후배라니 안심이구먼.”
그렇게 승선신고가 이루어졌다.
점심식사를 마친 미스티키 호 손님들은 곧 자신들의 배로 돌아갔다.
스베타는 장오를 앞세워 위스키 한 병을 얻을 심산이었으나 실패했다. 첫 대면부터 선단 측에 손을 내밀기는 아무래도 겸연쩍은 일이었다. 거의 울상이 된 그녀를 보자 가슴이 조금 쓰라렸다. 미스티키 호의 식객으로 매사 불편해 하던 그를 끼니 때마다 누이처럼 챙겨주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위성전화로 서울 본사의 부사장에게 그간의 경위를 보고했다. 그리고 작업을 시작하면 어느 쿼터부터 써야 할지를 물었다.
“우선 카니프 쿼터부터 먼저 쓰도록 해. 서 캄차카 3천, 캄챠카 쿠릴 1천, 그리고 북 오호츠크 1천, 모두 5천 톤이야.”
“달리바 것은요?”
“그건 아직 모스크바 승인이 안 떨어졌어. 다음 월요일 타라센코가 해결한다고 했으니, 그리 알고 진행하도록 해요.”
“여전히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있군요.”
풀리지 않기로는 쿼터뿐이 아니었다. 부사장은 타라센코가 보낸 전문을 인용하며, 달리바 소속선 두 척에다 쁘리모리 콜호즈 유니언 세 척과 연결될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현장 사정은 전혀 딴판이었다. 그가 접촉한 자선 모두가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콧방귀를 뀌었고, 지금까지 편승하고 있던 미스티키 호 역시 회사는 회사이고, 나는 나다는 식이었다.
“지금 어장에 와서 보니 소니코 쿼터 5만 5천 톤에 이미 러시아 공모선이 13척이나 떠 있고 거기에 50여 척의 자선들이 붙어 있어요. 자칫하면 자선을 구하지 못해 사업을 망칠 판입니다. 통보받은 자선들은 하나같이 저는 모르는 얘기라며 오리발을 내밀고 있고요. 어장에 와 보니 자선들이 저들 마음대로 공모선을 선택하여 움직입니다.”
그렇게 현장상황을 전하며 자선 선주들에게 강력하게 항의해 달라는 것으로 통화를 끝냈다.
자선과의 수매조업을 시작하기 위해선 맨 먼저 캄차카 립보드의 검사관을 승선시켜야만 했다. 그래서 현장에 출동중인 캄차카 립보드 대장을 찾으니 이미 서 캄차카로 몰려든 러시아 공모선들에 배정을 마친 다음이라 인원의 여유가 없다고 했다. 하는 수 없어 대장의 양해 하에 마가단 립보드 소속 검사관을 대신 받기로 했다.
오후 6시 경 마가단의 책임 검사관인 유리가 파이오니어 호로 올라 왔다. 유리를 보자 L 선장은 대뜸 역정을 냈다. 캄차카 담당 검사관을 태워야지 왜 마가단 담당관을 태웠느냐는 시비였다. 장오가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였지만 선장은 불쾌감을 떨쳐내지 않았다. 선장의 말처럼 검사관의 임무가 소속 관할수역에 한정됨은 상식이지만, 장오는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크게 문제될 사안은 아니라고 지레 짐작했던 것이다.
“앞으로 검사관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는 황 부장이 모두 책임지세요.”
그 말을 남기고 L 선장은 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선장의 그런 태도를 보며 장오는 장차 그에게 닥쳐올 일들이 더욱 염려되었다. 외국 어선에 검사관이 승선하는 경우 검사관에게 지불하는 승선수당은 본선에서 지급하며 검사관과의 행정적인 일 또한 본선의 책임이었다.
저녁 식사 후 세르게이로 하여금 거명된 자선들을 차례로 불러 보았으나 짐작한대로 응하는 배가 한 척도 없었다. 생각 끝에 지난 해 연말 두 달에 걸쳐 파이오니어 호에 어획물을 공급했던 자선들을 하나씩 불러 어획상여금을 받아가라고 꼬드겼다. 어획상여금이란 콜호즈에 지급하는 어획수수료 중 선원들에게 직접 떼어주는 톤당 20달러였다. 이를 명란조업과 연계시켜 현장에서 선장들에게 직접 달러로 지급하겠다고 꼬드긴 것이다.
지난 11월 중순, 장오는 비포란태(非包卵太) 수매사업의 자선문제로 또 한 차례 홍역을 치렀다. 여기저기 콜호즈를 들쑤셔 확보한 자선 두 척은 기상이 나빠 공모선을 지척에 두고도 일주일째 피항 중이었고, 나홋드까에서 출발한 배들은 거리가 한참 멀었다. 그들이 과연 공모선이 기다리고 있는 서 캄차카 어장까지 약속대로 달려올는지도 의문이었다.
더욱이 회사와의 계약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구는 친구들이라면 자선을 자청하고 나선다한들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돈을 받겠다며 당장이라도 달려오는 배가 있다면 상여금을 미끼로 파이오니어 호의 자선으로 활용할 작정이었다.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할 때 그가 들고 온 돈이 5만 달러 정도였고, 운반선 편으로 장차 부쳐져 올 10만 달러를 생각하면 미끼는 넉넉한 편이었다.
9
바다는 잔잔하였으나 하늘은 어제와 달리 구름이 끼어 우중충했다. 다행히도 저기압은 캄차카 반도를 비켜나 알류산 열도 쪽으로 동진중이었다.
오후 늦게 반가운 소식이 하나 날아 왔다. 하바로스크 콜호즈 소속인 키로보 호 선장이 방선(放船)을 하겠다는 연락이 왔던 것이다. 선장은 붉은 얼굴에 구렛나루가 무성한 젊고 건장한 사내였다. 위스키를 몇 잔 받아 마시고는 기분이 얼큰해지자 당장 야간작업 때부터 파이오니어 호에 붙겠다고 말했다. 너무 고맙고 반가운 나머지 그에게만 특별히 톤당 23달러의 상여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그의 면전에서 수첩에다 또박또박 러시아 알파벳으로 ‘비탈리 빅토르비치 살라긴’이라는 긴 이름을 쓰고 그 밑에 ‘23달러’라고 적어서 그에게 보여 주었다. 비탈리 선장은 대만족이었다.
밤이 되자 달리바 소속 도로즈도브 호 선장이 또 제 발로 찾아왔다. 얼굴과 볼에 주름이 깊게 파인 중년이었다. 당장 조업을 시작하라는 본사의 지시가 있었다며 코드엔드를 받아갔다. 다시 자정 무렵에는 닛사 호와 코스트로바 호 두 척이 상여금을 받기 위해 접선을 해 왔다. 닛사 호는 뛰어난 어획실적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엔진에 문제가 있어 애를 먹고 있었다. 선장은 기관을 정비한 다음 합류를 약속했다. 코스트로바 호는 실적은 저조한 편이었으나 당장 작업에 가담하겠다고 장담하여 코드엔드를 실어 주었다. 지난해 조업에 참여한 배는 모두 아홉 척이었다. 그 중 절반만 건져내어도 성공이라고 장오는 생각했다. 그 배들은 모두 제 몫의 상여금을 받기 위해 반드시 파이오니어 호를 방문할 것이었다.
자선들을 모두 보낸 다음 장오는 톱 브리지로 올라갔다. 산들바람이 불고 있었고, 별은 뜨지 않았다. 깊은 밤중인데도 그물을 끄는지, 여기저기로 점점이 흩어진 작업선들의 불빛이 밤바다 위에 노란 꽃잎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다시금 알라스카와 베링어장의 풍경들이 장오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다로 통하는 기억의 문은 언제나 그의 손끝에 가까이 닿아 있었다. 기억의 문을 열면 그것이 무엇이든 마치 어제 일어났던 일처럼 생생했다.
핸드레일에 담배를 비벼 끄고 톱 브리지를 내려오는데 세르게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미스터 황, 비탈리 선장이 어획물을 넘겨주겠다며 지금 달려오고 있어요.”
그랬다. 후방 1백 미터 거리로 자선의 눈부신 전조등이 다가오고 있었다. 비탈리 선장의 키로보 호였다. 브리지에선 이미 모선의 선미 타워에 올라간 항해사에게 작업개시를 명령하는 워키토키 소리가 들려왔다.
자선으로부터 수신호를 받은 파이어오니어 호 갑판원들이 메신저 로프(messenger rope)로 연결된 부이 라인(buoy line) 슬립웨이를 통해 바다로 투하했고, 그것을 자선에서 주워 올려 코드엔드의 행깅 와이어(hanging wire)에 연결하자 어획물이 가득 든 코드엔드가 자선으로부터 이탈되면서 수면 아래로 잠겨들었다. 그러자 모선의 스팀윈치가 곧 요란한 소리를 내며 힘차게 돌아갔다. 윈치의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와이어에 묶인 키보로 호의 코드엔드가 마치 고래가 유영하듯 물거품을 일으키며 빠른 속도로 끌려왔다.
부상하는 잠수함처럼 모습을 드러낸 코드엔드는 터질 듯 풍만하고 우람했다.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어획물을 향해 모선의 선원들도 탄성을 질렀다. 길이가 24미터나 되는 그물망에 1미터 간격으로 둘러쳐진 피이 로프 밴드(P.E rope band)의 수조차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풍족한 수확이었다. 이윽고 코드엔드 후미 밴드에 후크를 걸어 데리크(derrick)로 높이 달아 올린 다음 코드엔드의 잠금 로프를 풀어 젖히자 싱싱한 명태 무더기가 물보라를 튀기며 와그르르 피쉬 빈(fish bin)으로 쏟아져 내렸다.
“스빠시버! 비탈리 빅토르비치!”
그물의 상태를 보려고 멀찍이 갑판에 모습을 드러낸 키로보 호 선장을 향해 장오는 크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고마움을 전했다. 인수한 어획량은 50톤이었다. 더욱이 잡어를 포함한 체장 미달 고기는 계산에 넣지 않는다는 계약조건 덕분에 때문에 30퍼센트가 넘는 어획물이 공짜로 사라졌다.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80톤 가까운 인수량이었다. 체장미달이라고 하더라도 연육(煉肉)이나 어분(魚粉)의 원료로는 훌륭했기 때문에 파이오니어호로서는 30톤 가까운 공짜고기를 얻은 셈이었다.
아침식사도 하기 전에 키로보 호가 다시 2차 양망 분을 끌고 왔다. 갑판에 내려서니 해면 위로 해무가 자욱하고 차가운 바람이 일었다. 그물망의 부피가 전보다 조금 적다고 생각되었다. 이번에는 인수량이 30톤으로 계량되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 곰곰 생각해보니 수매반장인 천씨의 샘플링이 교묘했다. 그물의 입을 열어 고기가 쏟아지는 양상을 관찰한 결과 개구부의 좌우 가장자리로는 소형어가 중간부분으로는 대형어가 많았다. 그런 현상은 아무래도 고기의 무게가 갖는 중력 작용인 듯 했다. 다시 말해 넓은 공간으로 덩치가 큰 고기가 자연스레 쏠리는 현상이었다. 천씨는 계속하여 가장자리에 바켓츠를 갖다 대었고 그것도 소형어가 눈에 뛰게 많을 때만 쏟아지는 고기에 샘풀링 바켓츠를 갖다 대었다.
천씨가 구사하는 또 다른 편법은 어체의 체장을 재는 곳에 있었다. 기억자형으로 만든 10㎝ 높이의 나무 눈금자에 고기를 바르게 펴고 길이를 재는데 고기의 몸을 구부리거나 두꺼운 매직펜으로 그은 30㎝와 35㎝ 눈금을 완전히 채우지 않으면 무조건 규격미달어로 분류하는 것이었다. 천씨가 큰 고기 작은 고기로 선별한 그릇 중 작은 고기라 분류한 바켓츠를 다시 털어 장오가 재차 눈금을 재본 결과 그 중 30 프로가 큰 고기 통으로 가야할 고기였다. 규격미달어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은 고기로 구제될 고기가 나왔다.
그렇게 샘플링의 오류를 시정했음에도 장오가 목측한 수량과 계량결과치는 아직 차이가 많았다. 대략 15 톤의 고기가 셈에서 빠진 듯 했다. 장오는 천씨에게 샘플링의 문제를 지적하며 다음부터 우리가 직접 샘플링을 하겠다고 주장했다. 샘플링도 중간부분에서 2회, 가장자리에서 2회씩 각각 하기로 하고 고기가 찬 밴드를 네 등분 하여 뜨겠다고 했다. 표준성과 대표성이 없으면 샘플의 의미가 없습니다. 내 말이 맞지요? 천씨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자신의 셈에서 사라진 명태를 찾으려면 또 다른 함정을 찾아야만 했다.
다음 날 오전에는 작년에 비포란태 조업에 참가했던 다른 자선 5척이 잇달아 접선해 왔다. 그 중 두 척이 코드엔드를 받아 가겠다고 말했다. 간밤 두 차례나 어획물을 넘겨준 키보로호의 비탈리 선장에게 했듯이 그는 그들 면전에서 단정한 러시아 필체로 그들의 이름과 어획수당을 적어 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엉뚱한 데서 제동이 걸렸다. 검사관 유리가 자기는 북 오호츠크 어장만 관할할 뿐 캄차카 어획물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지금껏 파이오니어 호가 넘겨받은 어획물은 몽땅 불법어획물이 되고 마는 셈이었다.
본선을 대신해 그를 설득해야 하는 장오의 이마에 땀이 솟았다.
“유리씨, 우리가 정상적으로 자선들을 규합할 때까지 만이라도 좀 묵인해 줘요. 당신도 알다시피 지금 러시아 어선들이 이곳에 몰려 있는데 얼음밭인 오호츠크로는 언제 갈 것이며, 또 그곳까지 한 걸음에 달려올 자선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암튼 나로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유리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이 자도 역시 근무수칙만 달달 외우는 공산당원이란 말인가. 기가 막혔다. 문득 검사관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일은 그의 책임이라던 L선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궁즉통이라는 말이 있듯이 곧 해결책을 얻었다. 그날 오후였다. 키로보 호로부터 전해질 어획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공장부에서 난데없이 환자가 발생했다는 보고가 날아들었다. 가동 중인 콘베이어에 팔이 걸리면서 팔꿈치 부위를 크게 다쳤다는 것이다. 그 많은 승조원에도 불구하고 파이오니어 호에는 머큐롬이나 바르는 위생실 말고는 수술을 감당할 시설이 없었다. 급히 유리 검사관에게 닥터가 승선한 러시아 공모선이 있는지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도 20마일 북쪽에서 조업중인 캄차카 소속 공모선 시빅세프 호와 연락이 닿았다. 그 배에는 마침 캄차카 경비대의 책임검사관도 승선하고 있었다. 파이오니어 호는 곧장 북서쪽을 향해 머리를 돌리고 전속으로 달려갔다. 장오는 이참에 캄차카 경비대장을 직접 만나 유리 검사관의 트집을 잠재우기로 하고 위스키 두 병을 따로 준비했다.
은빛으로 도장된 러시아 공모선은 생각보다 외양이 세련되어 보이는 신조선이었다. 그는 환자와 함께 명태를 담는 케이지에 올라타 러시아 공모선으로 건너갔다.
시빅세프 호의 수술실은 꽤 넓은 공간을 갖추고 있었다. 공장부에 여공(女工)이 많다보니 의료실 용도 중에서 소파수술이 가장 많다며 유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러시아는 도대체가 성에 관한 한 관대하기 이를 데 없는 나라였다. 여자가 몇 명이나 되느냐니까 가공부원만 80명이라 했다. 미국과 명태 수매사업을 시작한 오래 전 북능호에도 대략 그만한 숫자의 여자들이 승선하여 차가운 알래스카 바다 위에서 6개월을 떠 있었는데, 조업을 마치고 부산으로 귀항하였을 때는 배가 불러 치마로 아랫배를 감춘 여자가 열 명이나 되었다고 들었다. 그 뒤로 여자를 배에 태운 북양의 명태배는 한 척도 없었다.
캄차카 책임검사관을 만난 장오는 먼저 양주를 선물하고 나서 어획보고 문제를 상의했다. 책임검사관은 소속이 다르니 마가단 본부의 양해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런 저런 애기를 하다 보니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조업지역은 서 캄차카일망정 오호츠크의 쿼터를 사용하는 것으로 의견이 맞추어졌다. 카니프의 쿼터는 1천 톤뿐이어서 자선 3척의 어획물만으로도 며칠 안가 동이 나겠지만 일단 해결책을 찾아낸 셈이었다. 환자의 수술이 있던 그날 밤 유리는 애인을 만나러 간다며 사라진 뒤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푸석한 얼굴로 나타났다.
10
어제는 모처럼 400톤을 건져 올렸다. 캄차트카 레닌콜호즈 소속선 세 척이 더 추가된 날부터 닷새 동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어제까지의 총 인수량이 3천5백 톤이었다. 어장은 풍요로웠으나, 처음부터 자선이 충분치 않은 게 아쉬웠다. 그런데 느닷없이 레닌 콜호즈의 대리인이라는 자가 나타나 네 척을 붙일 테니 자기들이 보유하고 있는 1만 톤의 쿼터를 소진해 달라는 제안을 해왔다. 계약이 없어 실행 불가능한 제안이었지만 찬물 더운 물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쿼터 문제는 육지에서 해결하도록 하겠다고 말하고, 흔쾌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다음 날 해가 저물녘에 맨 먼저 달려온 배가 선미에 그물을 찬 아틀라소바 호였다. 아틀라소바 호 선장은 사용하는 그물은 일산(日産)인데 인수작업이 가능하겠느냐고 물어왔다. 하지만 L 선장은 그물 구조나 재질이 국산과 유사하니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쉽게 동의했다.
곧장 그물자루를 넘겨받는 일이 강행되었다. 그물자루는 밴드 끝까지 고기로 그득했다. 스토퍼 후커(stopper hooker)로 행깅 와이어를 고정시킨 네 가닥의 브라이들 와이어(bridle wire)가 샤클로 튼튼히 고정되어 있지 않고 그냥 밴드에 연결된 쵸크 스트로프 와이어(choke strope wire)에 다발로 엉성하게 묶어져 있었다. 그게 탈이었다. 그물상태를 찬찬히 훑어 본 갑판장이 코드엔드를 가리키며 와이어의 보강 없이는 인양이 어렵다고 손사래를 쳤다. 워낙 그물에 든 고기 무게가 엄청난데다가 파이오니어호의 슬립웨이는 길이가 20여 미터에 경사각 또한 30도나 될 만큼 가팔랐다.
“그냥 렛-고(let go) 시켜버려요.”
세르게이도 겁을 냈다. 하지만 물러설 선장이 아니었다. 갑판장에게 와이어 밴드를 하나 더 보강시켜 감아올리라고 지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슬립웨이를 두어 길 끌려오는가 싶더니 툭! 하고 밴드가 터지면서 알토란같은 어획물이 몽땅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고기도 고기였지만 한 개 값이 2만 달러나 되는 코드엔드가 한순간에 유실된 것이었다.
당연히 아틀라소바 호로부터 클레임이 걸려왔다. 그런데 불같은 성격의 선단장 앞에서 L 선장은 엉뚱하게도 그물자루 인수가 가능하다는 세르게이의 말에 따랐을 뿐이라며 발뺌을 했다. 현장검증에 나선 장오에게 갑판장과 1항사의 정직한 진술이 없었다면 세르게이가 꼼짝없이 누명을 덮어쓸 판이었다. 과욕이 손실을 초래한 전형적인 사례였다.
반면 낭보도 있었다. 캄차카 경비대로부터 이제부터는 오호츠크 검사관의 업무대행을 인정한다는 소식이었다. 게다가 달라바의 1만 3천 톤 쿼터도 전량 활용해도 좋다는 허가까지 떨어졌다. 하루하루 인수량이 늘어나자 선단장과 선장은 오랜만에 살맛난다며 모처럼 웃음꽃을 피웠다. 고기잡이배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고기가 많이 잡혀야 만사형통이다. 그럴 때면 뭍에 두고 온 가족들을 생각할 겨를조차도 없었다.
조업이 시작된 지 보름이 조금 지났다. 러시아 공모선에 타고 있는 애인이 그리웠는지 유리가 갑자기 러시아 공모선인 시빅세프 호로 건너갔다. 그의 후임으로 같은 마가단 립보드 소속의 살리노프가 승선했다. 증명사진으로는 50대, 실물은 40대, 그러나 실제 나이는 34세인 친구였다. 그러나 승선하자마자 세르게이와 위스키 두 병에다 소주 세 병을 해치우는 실력을 과시했다.
그리고 이틀 후 캄차카 소속 검사관이라며 ‘알렉산더’가 승선했다. 더부룩한 수염에 인상이 고약한 40대 사내였다. 그가 나타나자 ‘증명사진 50대’인 살리노프는 그만 하선해야 할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그러나 당장 마땅한 근무선이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당분간 식객으로 파이오니어 호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L 선장이 검사관들이 있는 자리에서 장오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검사관의 승선수당인 1인당 일일 150달러는 선박 측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난생 처음으로 장오는 노 선배인 L 선장에게 그 문제는 자신의 소관이 아니며, 따질 게 있으면 검사관들에게 직접 따지라고 대들었다. 하지만 그 후유증은 만만치 않았다. 어쨌거나 칼자루는 검사관들이 쥐고 있었으니 말이다. 과연 그날 오후 두 검사관이 서부영화의 보안관처럼 갑판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먼저 알렉산더가 험상궂은 얼굴로 수매반장인 천씨에게 피쉬 빈의 용적도를 보여달라고 다그쳤다. 용적도는 전임 검사관의 서명을 받아둔 것이어서 처음부터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피쉬 빈에 담겨진 고기의 중량을 환산하는 밀도계수도 마찬가지였다.
두 검사관의 입회 하에 피쉬 빈의 용적 환산작업이 시작되었다. 먼저 천씨가 희미한 불빛 아래서 먼저 바닥의 가로와 세로치수를 쟀다. 치수는 용적도와 일치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빙긋 웃음을 지으며 알렉산더가 품 안에서 자신의 쇠 줄자를 꺼냈다. 그 줄자로 잰 결과 놀랍게도 가로 세로 모두 50센티미터씩 길이가 더 나왔다. 알렉산더가 천씨의 줄자를 빼앗듯이 하고 차근차근 눈금을 조사했다. 알렉산더의 손가락 끝이 멈춘 곳에 스카치테이프로 줄자를 이어붙인 흔적이 나타났다. 피쉬 빈의 기둥치수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으로 용적도의 도면이 엉터리로 작성된 것이 들통나버린 것이다. 엉터리로 계측한 용적차를 정식으로 계산하면 1개 어창당 2.5입방미터의 차이가 났다. 피쉬 빈은 좌우 세 개씩 모두 여섯 개였으니 그 동안 대략 14톤씩의 어획물을 빼돌렸다는 결론이 나왔다.
기세를 얻은 알렉산더는 마침 키로보 호가 양망(揚網)한 그물이 넘겨졌을 때 살리노프를 대동하여 함께 다시 공장부로 내려가 선원들의 제지를 무릅쓰고 콘베어 벨트에 바싹 붙어 서서 피쉬 빈에 담긴 어획물의 밀도를 측정했다. 그 법석으로 공장부 작업이 한 시간 가량 중단되었다. 밀도계수는 씨알의 상태, 조사 시점, 포란 상태 등에 따라 변화가 불가피하다. 그래서 명란철과 비 포란태 조업시기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검사관 알렉산더의 직권으로 산출된 계수는 평소의 0.92보다 높은 0.95로 나타났다. 그것은 장오에겐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가 놓쳐버린 어획물의 절반을 알렉산더가 찾아준 셈이었다. 정말 믿을 놈 하나도 없군. 장오는 기가 막혀 혀를 끌끌 차며 공장부를 벗어났다.
그 일로 밤새도록 브리지가 시끌벅적했다. L 선장의 고성이 울려 퍼졌고, 마각이 드러난 본선 선단의 정 부장은 브리지에서 선단장실로, 다시 선단장실에서 캡틴룸으로 정신없이 들락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혼란스러운 밤이 가고 아침이 오자 두 명의 검사관이 동석한 식당에서 정 부장이 장오를 겨냥하며 왜 검사관들과 동무하고 다니며 공장 업무를 마비시키느냐?는 식으로 노골적인 포문을 열었다.
“남의 배에서 제때 밥이라도 얻어먹으려면 알아서들 하라고!”
이번에는 정 부장의 말을 받은 L 선장이 나섰다.
“도대체 무슨 놈의 자선 주제에 모선을 이리 와라, 저리 가라, 마음대로 끌고 다니노! 우째 코끼리가 쥐새끼 꽁무니를 쫓아다닌단 말이고! 내 평생 첨보는 꼬라진 기라! 겨우 어창 좀 채운다 싶었는데, 검사관이란 놈들이 둘이나 타갖꼬 생지랄들을 안 해쌓나…”
L 선장의 그 말은 선단장을 대신하여 장오의 기를 꺾으려는 수작임이 분명했다.
식사를 마치자 이번에는 선단장이 좀 보잔다 해서 그의 방으로 갔다.
“황 부장, 자선들을 구하느라 애쓰는 거 나 잘 알아요. 그런데 걱정이 하나 있소. 내가 명란철마다 이 배에 머무는 건 바로 이 사업이 회사의 생명줄이기 때문이요. 그러니 당신이 좀 도와주어야겠소. 내 구구한 말은 더 하지 않겠소.”
무척 끄집어내기 어려운 말을 토해냈는지, 선단장이 길게 숨을 토해내며 현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 우중충한 하늘을 내다보았다.
노 선배의 심경을 읽은 그는 마냥 가슴이 쓰라렸다. 하지만 그의 처지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더 계산할 필요도 없이, 하루에 20톤씩의 어획물을 도둑맞는다고 가정할 때, K원양의 입장에서는 1천만 원 어치의 어획물을 공짜로 챙기는 셈이고, 장오의 회사 입장에서는 적어도 2백만 원 상당의 수익금이 달아나는 판국이었으니 말이다. 그는 울적해져 있는 선단장을 모른 체 하고 슬그머니 방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선단장의 애원에 가까운 협조요청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처음 키로보 호 한 척의 단독조업일 때는 몰랐으나 자선들의 수가 하나 둘 늘어나고 주야를 불문하고 작업이 이루어지자 세르게이와 더불어 장오는 눈코 뜰 새가 없었다. 한번은 갑판에서의 샘플링 작업도중 장오는 천씨 몰래 공장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다. 그 때 스타보드 쪽 피쉬 빈의 출구에서 철철 흘러나오는 명태가 콘베어를 타고 태연스럽게 작업대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쉬 빈의 출구 쪽에는 벽을 분리할 수 있게 세로로 층층이 나무로 벽을 쌓았고 각 나무판 마다 하단에 홈을 파 긴 쇠막대를 넣어 들어 올릴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가관인 것은 고무치마를 앞에 두른 가공부원이 피쉬 빈의 나무 홈에 쇠막대를 꽂고 위로 치켜들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장오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쇠막대를 집어 던지곤 줄행랑을 놓았던 것이다. 갑판 위에서 샘플링에 소요되는 시간이 삼십 분 정도였으므로 그 시간 동안 마음만 먹으면 피쉬 빈의 문을 따고 10여 톤의 고기를 빼먹는 것은 여반장이었다. 그것은 입망량이 많을 때 주로 써먹는 수법이었다.
그 날 장오는 천씨에게 호통을 치면서 계량표에 5톤을 추가시켰고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각서까지 징구했다. 그리고 코드엔드의 입망된 밴드 수가 10개만 넘으면 반드시 세르게이를 공장부로 내려가 있게 했다. 그러므로 작업의 시스템상 검수를 위해 2명이 한 조가 되는 것은 필수였다. 그러므로 행정적인 일까지 도맡아 해야 하는 장오로선 그 일을 감당하기가 무척 힘겨웠다. 본사에 검수요원의 충원을 요청하려 했으나 다행히 쿼터 소유주인 카니프와 달리바에서 각각 대리인들이 어장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이 왔다.
그날 저녁 늦은 시각에 정 부장으로부터 자기 방에서 좀 보자는 기별이 왔다. 실내등의 불빛이 희미했다. 서로 먼 바다에 나와 고생이 많다는 의례적인 인사 끝에 정 부장이 먼저 용건을 꺼내었다.
“황형도 아시다시피 저희 회사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파이오니어 호는 수리미 시설을 얹느라고 엄청난 돈을 쏟아 부은 배인데 결과적으로 K원양의 등골을 빼먹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누가 선뜻 사 갈 사람도 없는 데다 그렇다고 들어간 밑천이 아까워 헐값에 팔아치울 수도 없고. 법정관리에 들어간 지금 우리가 이 배를 끌고 나와 이러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고기도둑질을 하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는 얘기를 할 모양이었다.
“제가 뭘 알겠습니까만, 수매사업쿼터가 그나마 있기에 망정이지 지금 이런 배가 갈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기회가 있을 때 처분하는 것이 상책이었어요. 북양사업은 업계로선 다 자승자박 아닙니까? 일본은 1987년도부터 수리미선들 같은 대형선들을 다 감척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정부의 예산만 쳐다보다가 실기를 했습니다만… 참 딱한 일이지요.”
“그래서 말인데요. 황형이 좀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정 부장이 사업계획서 같은 것을 꺼내 펼쳐 보이려다가 말고 단도직입적인 얘기로 돌입했다.
“무슨 말씀인지…?”
“아까 천 반장한테 보고를 받았어요. 작년과 달리 올해는 힘들어 일을 못 하겠다고 하더군요. 일일이 다 얘기하지 않아도 아시지 않습니까?”
무슨 얘기냐고 묻고 싶었으나 그에게 적나라한 얘기를 하게 하는 것은 실례일 것 같았다.
“좋습니다. 제가 어장에 와서 느낀 건데, 저희들과 처음부터 계약된 자선들이 7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지금 겨우 2척만 조업을 하고 있어요. 선단에서는 자선을 못 붙인다고 저희를 책망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모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파이오니어 호에 자선들이 안 붙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이바노프라고 당초 파이오니어 호에 자선을 공급하겠다던 연해주 콜호즈 대리인이 선단방송에 나와 그랬어요. 파이오니어 호는 고기의 절반을 도둑질한다고. 제가 자선 때문에 힘든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러시아 사람들 지금은 나라가 뒤숭숭해서 그렇지 결코 바보들이 아니에요.”
작년에는 러시아 공모선들의 출어 척수가 미미했었다. 사업주체인 각 수산회사들은 자체적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만큼 어려운 사회여건에 처해 있었다. 특히 자금고갈로 선박유류 등 보급상황도 어려웠다. 그래서 명란철에 러시아 공모선들이 출어를 포기한 예가 많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일본의 명란 값 시세가 천장까지 치솟았고 이를 뒤늦게 안 러시아 수산회사들이 심기일전하여 일 년이 지난 지금 출어러시를 이루고 있었다.
작년 이맘 때 파이오니어 호는 하루 평균 인수 량이 500톤이었다. 상대적으로 자선들도 넘쳐났다. 공장부에서는 당일로 다 처리를 못해 자선들의 양망을 지연시킬 지경이었다. 어장제한도 해역별 구분 없이 수심 300미터 이원(以遠)으로 일정했고 단속하는 경비정이 없어 내측조업도 자선들의 독무대였다. 그래서 작년의 경우에는 서 캄차카 어장에서 일찌감치 볼 일을 다 본 셈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러나 회사가 우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이걸로 러시아 직원을 좀 달래 주십시오.”
정 부장이 하얀 봉투를 그에게 내밀었다. 직감적으로 돈이 든 봉투라 생각했다. 같잖은 생각이 들어 장오가 그게 얼마냐 물으니깐 정 부장은 3천불이라고 대답했다.
“정 부장님, 죄송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 없습니다. 저도 명색이 원양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귀사의 현실이 가슴 아픕니다. 하지만 그 돈으로 저의 이름을 더럽힐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제가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현재 본선에서 이상한 방법으로 눈속임하는 것을 일절 금한다면 총 인수량의 20프로를 감해 드리겠습니다. 동의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정 부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가지곤 회사의 사업계획이 다 틀어지는 일이라고 했다. 한 마디로 남에게 훔칠 고기로 사업계획을 짰다는 말이었다. ‘그건 당신의 문제요. 내 인생을 당신이 책임질 수 없듯이 당신의 문제를 내가 해결해 주리란 생각은 버려요.’ 미스티키 호 선장인 이브게니의 말이 생각났다.
“그럼 좋습니다. 저의 제안을 받아들일 형편이 아닌 것 같군요.저도 회사직원으로 이곳에 나와 있습니다. 저도 저의 방식대로 할 수 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장오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정 부장이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빈손으로 얼굴을 씻었다.
그날 밤 장오는 쉬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땅이 꺼져 집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기둥을 붙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사람들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사라져 버린 풍속처럼 조만간 모두 이 바다에서 모습을 감출 운명들이었다. 그 행렬의 후미에 장오도 끼어 있었다. 차라리 목을 놓고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11
연 이틀째 호황이었다. 연일 쏟아지는 물량으로 처음으로 피쉬 빈이 남김없이 꽉 찼다. 모선에선 만 하루를 바삐 움직여야 처리 가능한 물량이었다. 부득불 장오는 다음 순번의 자선들에게 작업시간을 늦추도록 요구했다.
오후에는 카니프의 대리인인 니콜라이가 승선했다. 코밑에서 턱 아래로 수염을 동그랗게 기른 얌전한 얼굴이었다. 나이는 47세, 사는 집은 사할린에 있다고 했다. 카니프의 쿼터가 다 끝나 가는데 지금 와서 어쩌냐고 물으니 추가 쿼터가 곧 나올 것이라 했다. 그 말에 이어 그는 쿼터가 안 나오더라도 명란철이 끝날 때까지 파이오니어 호에 머물 것이라며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그 말이 무얼 뜻하는지 궁금했지만 일손이 딸리는 상황이라 장오는 크게 괘념치 않았다.
바람이 잦아들었고, 영상 8도까지 치솟은 기온으로 갑판은 봄날 같았다. 사정이 허락한다면 이 어장에서 일주일만 더 풍어를 만끽하고 싶었다. 장오는 갑판의 핸드레일에 상체를 기대고 작업등에 비친 바다를 굽어보았다. 물속 저 깊은 곳에서 무리지어 움직이는 명태의 군무(群舞)가 느껴졌고, 수컷이 암컷을 부르는 노래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마치 큰 바람이 만들어 낸 물 언덕인 양 먼 수평선이 완만하게 굽어 보였다. 수평선으로 점점이 늘어선 조업선들의 불빛이 따스하고도 정답게 느껴졌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오호츠크 기단의 영향으로 동이 틀 때면 짙은 안개를 뿌렸다가 정오 무렵이면 하늘로 승화했다. 눈송이가 굵고 분주하여 갑판에 오래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바람이 불면 바다는 늘 머리를 치켜들었다. 파도는 언제나 풍하로 굴러갔고, 더러는 꼬꾸라지기도 했다. 파도는 바람보다 먼저 드러눕고 바람보다 뒤에 일어섰다. 그처럼 바다는 바람을 거스르는 법이 없었다. 바람은 바다와 대기가 만나 낳은 자유주의자였고, 바다는 언제나 바탕이 착한 어머니였다.
자선들은 어획 상황에 따라 어장을 제멋대로 옮겨 다녔다. 불황이면 북위 55도까지 북상했다가 씨알이 신통치 않으면 다시 53도 이남의 캄차카 어장으로 내려왔다. 그럴 때마다 L 선장은 자선들을 향해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조업 성격상 파이오니어 호 같은 대형선이 자선의 꽁무니를 따라다녀야 했기 때문이었다. 캡틴의 화풀이에 세르게이도 짜증이 나는지 그의 앞에서 자주 얼굴을 붉혔다.
드디어 3천 톤인 카니프의 서 캄차카 쿼터가 동이 났고, 이제는 달리바 쿼터를 사용할 차례였다. 장오는 52도에 머무르고 있는 달리바 대리인인 카푸스틴을 급히 불렀다. 상황을 설명하고 다른 배를 타고서라도 빨리 좀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틀을 북 쿠릴어장에서 버텼으나 모두 여섯 척으로 불어난 자선들은 다시 북상을 주장했다. 수란도 그러하지만 씨알이 제일 문제였다. 54도 어장에서의 인수량은 회당 고작 20여 톤이었다. 게다가 자선들은 저마다 시간을 벌기 위해 모선에다 대고 저마다 자기 쪽으로 오라고 야단법석이었다.
또한 불법조업이 없을 수 없었다. 고기는 잡되 어체의 크기가 좋아야만 했다. 가령 잔챙이 비율이 70퍼센트에 육박하면 어획량의 50퍼센트가 날라 가는 결과에 이른다. 규격미달어의 계량누락으로 자선들의 원성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모선에 배치된 검사관들조차 불법인 내측조업을 하되 경비정 단속만은 피하라고 권유할 정도였다. 경비정 지휘선인 코멘더 호는 고성능 레이더에 20노트 이상의 고속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지난 2월 중순부터는 특히 외국 어선의 자선들을 상대로 종횡무진 휩쓸고 다니면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만약 예망 중에 적발되면 공식적으로 미화 5만 달러의 벌금이 부과되고, 양망한 상태에서는 톤당 1천 달러가 가중되었다. 여타 한국 공모선들은 자선이래야 한 두 척에 불과하여 얼마든지 감시의 눈을 피할 수 있지만, 파이오니어 호는 여러 척의 자선들이 한곳에 집결되는 경우가 많아 항상 위험이 뒤따랐고 그 결과 경고를 받은 자선이 이미 서너 척이나 되었다. 때문에 경비정의 눈을 피해 야간조업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녹록치 않은 것이, 밤이면 몸체가 큰 고기들이 수면 가까이로 부상하기 때문이었다.
장오는, 전화로 또는 전문으로 그간의 상황을 본사에 전하며 K원양과의 계약을 수정할 것을 계속해서 요청했다. 그의 통신문은 통신장을 경유하여 매일매일 선단장의 귀에 들어갔다. 따라서 선단장은 그 같은 사정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굳게 입을 봉하고 있었다. 명분보다는 실리가 우선이었다.
씨알이 작은 고기가 거듭 올라오자 참다못한 알렉산더가 하루는 칼날을 뽑아들었다. 체장 30센티미터 미만의 규격미달어를 다량 어획한 자선 두 척에게 어획몰수와 벌금 5만 불이라는 벌칙이 부과됐던 것이다. 해상에서의 어획몰수란 단지 해당선박의 어획실적보고에서 누락시킨다는 의미였지만 벌금은 자선선장의 처지에서 볼 때 그보다 더한 충격은 없었다.
그런 일은 아랑곳없이 바람은 쉬지 않고 바다를 들쑤셨다. 자선들과 선단 측과의 끊임없는 마찰로 장오 또한 나날이 심신이 지쳐갔다. 그런 어느 날 모선에서 또 다시 안전사고가 발생했다. 조기장이란 자가 비번시간에 명태 알을 따러 간답시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공장으로 올라가다가 4층 높이의 바닥으로 추락하여 용수철 지지대에 처박힌 인명사고였다. 선원들에게 주어지는 채란수당을 벌겠다는 욕심이 그 화근이었다. 두 군데의 대퇴부 골절이 있었는데, 두툼한 살가죽을 뚫고 뼈가 밖으로 튀어나온 상태였고, 두부파열까지 입은 중상이었다. 인근 러시아 공모선에 승선하고 있던 의사와 책임검사관이 파이어니어 호로 달려와 후송대책을 마련하느라 브리지가 부산했다. 러시아의 해양경비대에서는 아예 환자 후송용 헬리콥터를 띄우지 않았다. 애간장이 탈 노릇이었지만, 결국 자선의 도움을 빌릴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고맙게도 푸셰크리예보 호가 가까운 키리보 항까지 갔다 오겠다고 자진하여 나섰다.
그 옛날 북능호에서도 그 같은 사고가 있었다. 전재작업을 위해 데리크의 와이어를 교체하는 갑판부를 제외하고 다른 부서는 모두 휴식에 들어간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선장과 마주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개털모자를 벗어든 항해사가 급하게 달려오더니 사고가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데리크에 연결된 와이어가 절단되어 튕겨나는 바람에 작업정장(作業艇長)의 오른쪽 다리뼈가 부러졌다는 것이다.
환자는 벌써 위생실로 옮겨져 위생사로부터 지혈제 주사를 맞고 있었다. 누군가가 몰려든 선원들에게 환자 상태를 설명하고 있었다.
“정강이뼈가 으스러져 오른쪽 다리는 절단된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야말로 시각을 다투는 위급 상황이었다. 자선이 있었지만, 육지까지는 이틀의 항정이었다.
장오는 미국인 업서버를 찾아 사정을 설명하고 그를 통해 미국 해안경비대에 도움을 요청했다.
“여기는 6MOD, 여기는 6MOD! 해양경비대 나오시오!”
몇 차례 호출에도 리시버는 잡음만 흘려냈다. 그는 혀가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몇 분의 시간이 흐른 뒤 겨우 응답이 왔다. 워낙 감도가 나빠 업서버가 눈살을 찌푸렸다.
“업서버님, 긴급환자 발생이라 하고 무조건 헬리콥터를 부탁하세요.”
그는 계속해서 업서버의 옆구리를 찔러댔다.
“오우, 보이! 좀 가만 계세요. 먼저 환자 상태를 자세히 설명해야 합니다. 여기는 미국 땅이라구요.”
업서버가 그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업서버의 무선을 수신한 저쪽에서는 출혈 상태, 주사한 약품명, 동맥의 절단유무와 선내조치 사항까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동맥은 붙어 있음. 진통제는 바랄긴, 지혈제는 비타민K, 포도당은 5%짜리 500cc임. 출혈이 심해 현재 스프린스 깁스를 한 상태임. 오버!”
그러자 반가운 말이 들려나왔다.
“라-져! 헬리콥터를 띄우겠으니 선박의 위치를 말하라!”
하지만 단서가 있었다. 기상상태가 급변하여 출동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다시 연락하겠다는 것이었다.
오전 내내 흐리던 하늘이 오후 들자 안개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헬리콥터가 뜨기엔 지장이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구조를 기다리는 측에서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반 시각쯤 지나 닥터가 탑승한 헬리콥터가 떴다는 연락이 왔다.
헬리콥터가 모습을 나타낸 것은 오후 네 시 무렵이었다. 환자는 이미 들것에 실려 갑판에 대기하고 있었다.
“선미 굴뚝 쪽으로 밧줄을 내리겠소. 시간은 지금부터 정확히 십 분 후요. 따라서 귀선은 바람을 안고 5노트의 속력을 유지해주기 바라오.”
헬리콥터의 빈틈없는 지시였다.
드디어 바구니가 매달린 두 가닥 밧줄이 선미갑판에 닿자 먼저 환자가 올려졌다. 갑판의 모든 시선이 헬리콥터가 떠있는 허공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흔 둘의 나이, 전북 이리가 고향인 그는 2남3녀의 가장이었다.
그리고 일 개월 후, 북능호로 한 통의 전보가 날아들었다.
존경하는선장님,사랑하는갑판장님,동료선원여러분,그리고선단의황과장님께도감사드립니다.여러분의사랑으로무사귀국하여현재부산범일동에소재하는H병원에입원가료중에있으며,한달후완치예정입니다.다리가성하게붙어있어너무너무행복합니다….
12
선장은 이제 노골적으로 살리노프의 하선을 종용했다. 그 결정은 전혀 선박 측의 권리이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는 뿌리칠 방법이 없었다.
장오는 저녁 늦게 살리노프의 방을 찾았다. 그는 이미 갈 곳을 정해놓은 사람마냥 개인 사물을 챙겨 짐을 싸고 있다가 들어서는 장오를 보자 걱정하지 말라는 듯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자선들의 잦은 어장이동과 그에 따른 선장의 신경질적 반응에 힘들어 하는 장오를 이해한다는 듯 그는 자기를 따라 하선하여 마가단에 있는 자기의 집에 놀러가지 않겠느냐며 농을 걸었다.
다음 날 점심을 마치고 갑판으로 나가니 마침 며칠 전 육지로 환자수송을 나갔던 푸셰크리예보 호가 그 보상으로 모선으로부터 유류를 받고 있었다. 바다에는 지난밤의 거센 바람 끝에 생긴 너울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L 선장의 잦은 병통에 지쳐있던 장오는 그때 갑자기 바다를 가까이서 껴안아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그는 냅다 선실로 달려가 오소리털로 만든 방한모를 찾아 머리에 둘러쓴 뒤 갑판으로 내달았다. 푸셰크리예보 호에 내려가기 위해 줄사다리에 발을 얹는데 멀찍이서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세르게이가 쫓아와 갑자기 무슨 생각으로 그러느냐며 그를 말렸다.
“걱정 마. 머리 좀 식히고 올게. 다음 양망때 돌아올 거야.”
넘실거리는 검푸른 바다는 처녀의 머릿결처럼 기름지고 비옥했다. 너울을 탄 배는 낙엽처럼 뒹굴었다. 너울 마루가 좌현을 파고들자 배는 우현으로 20도 가량 몸을 기우뚱했다. 몸을 바로 세울 수 없는 지체의 혼돈으로 말미암아 장오는 자신도 모르게 전율했다. 너울의 마루를 타넘은 선체가 골짜기로 내리꽂힐 때면 저만큼 우뚝 일어선 산마루가 통째로 배를 삼킬 것만 같아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 같은 끔직한 바다의 요동에도 러시아 선원들은 태연했다. 선원들에겐 참으로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칼로 살갗을 빚어 몸에 문신을 그리는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문신을 만드는 과정의 육체적 고통을 부족의 성원이 되는 통과의례로 간주했다. 또는 자신의 육체를 캔버스처럼 사용하여 전신에 문신으로 그림을 그리는 문신애호가들은 침이 피부를 찌를 때마다 성애의 쾌락감 같은 희열을 느끼며 그 순간 몸의 구석구석마다 엔돌핀이 샘솟는다고 말했다. 혼비백산의 전율을 견디다 못해 장오는 선실로 내려갔다. 그리곤 몸에 문신을 새기는 사람처럼 바다의 흔들림에 익숙해 질 때까지 조용히 눈을 감고 배에 몸을 맡겼다.
선원들의 떠드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보니 어느새 어둠이 내린 밤이었다. 바다는 낮과 달리 잔잔했다. 푸셰크리예보 호 선원들은 한차례 어획물을 넘긴 후 다시 예망을 하는 동안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모르도프 선장이 장오가 눌러쓴 털모자가 무거워 보였는지 가벼운 털실 방한모를 하나 그에게 건네주었다. 선원들의 메뉴는 거무틱틱한 보리빵과 소금에 절여 꾸덕하게 말린 청어가 전부였다. 과메기의 원조인 바로 그 청어였다.
장오는 마시다 남은 보드카 술병을 집어 들고 선장을 따라 조타실로 올라갔다. 바다는 낮보다도 많이 진정되어 있었다. 물결 위로 흐르는 교교한 달빛이 황홀했다. 해저 깊은 곳까지 스며든 저 달빛이 치어와 해초들을 키워냈을 것이다. 그런 달빛이 흡족한 듯 열 세물의 바다는 살갑고 포근했다. 예망코스를 읽는 모르도프 곁에서 장오는 그날 밤 달 먹은 바다를 핑계삼아 보드카에 흠뻑 취했다.
저기압이 하루가 머다하고 남쪽으로부터 북상했다. 흔히 알류샨열도로 빠져나가던 기단들이 웬일인지 며칠째 캄차카의 양안을 움켜쥔 채 맴돌고 있었다.
레닌 콜호즈 소속의 자선 세 척이 다시 57도 어장으로 북상한 것은 장오가 모선으로 복귀한 다음 날 일이었다. 틴로 조사선으로부터 그곳 수심 1백 60미터 해저에 몸체 큰 명태어군이 발견되었다는 방송을 듣고서였다. 먼저 도착한 자선이 한 시간의 예망 끝에 그물을 가득 채우고 파이오니어 호를 찾았다.
모선의 위치가 궁금해서 장오는 브리지로 올라갔다. 조타실로 들어서는 순간 L 선장이 세르게이를 향해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었다. 자선들의 북상 소식을 듣자마자 K 원양 소속 운반선인 칠보산호와 함께 모선의 북상이동을 부탁해둔 터였는데, 어장을 착각한 선장이 막무가내로 세르게이를 몰아세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항해사들이 보고를 잘못한 것을 두고 무슨 연유로 대리인에게 욕을 하느냐고 선장에게 거칠게 따졌다. 하긴 자선의 일거수일투족을 모선 측이 일방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구조적 상황에서 경비정의 눈을 피해 동분서주하는 자선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녀야 하는 모선의 운명이 딱하기는 했으나 L 선장의 이 같은 병통으로 골머리를 앓는 사람은 비단 장오 혼자만이 아니었다.
57도 어장에서도 문제는 역시 잔챙이 고기였다. 그물을 찬 채 모선이 오기까지 다섯 시간이나 기다린 자선 선장은 입망량이 70톤으로 간주된 고기가 35톤으로 계산되었다는 통보를 받자 그만 꼭지가 돌아버렸다. 끝까지 검수과정을 지켜본 살리노프와 알렉산더가 자선 선장의 항의를 듣고는 즉각 모선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그 가운데서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 지 장오의 입장은 여간 난처한 것이 아니었다.
책임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두 검사관은 노카운트 사실을 캄차카 본부에 알리고 즉각 파이오니어 호의 허가를 취소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말에 선단장과 정 부장의 안색이 갑자기 새파래졌다. 그와 선단장은 전부터 이 문제의 수정을 본사에 요구하는 장오의 전문내용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결국 하루의 말미를 달라며 검사관들을 나가게 한 뒤, 선단장이 그에게 말했다.
“이 보시오, 황 부장. 회사에서는 재량껏 현장에서 처리하라는 말 뿐이요. 우리는 포란태 가격을 지불하는 것이지, 소형어까지 지불하는 건 아니지 않소? 그래서 말인데, 노카운트 량의 30퍼센트를 인정해주는 걸로 하면 어떻겠소?”
산전수전 다 겪은 선단장도 올해 같은 상황은 처음 겪는 듯, 매사 혼란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선단장님, 러시아 배나 소니코와 계약한 한국선들의 인수조건이 대동소이한데, 파이오니어 호가 조금 방식을 바꾼다고 해서 자선들이 쉽게 승복하겠습니까? 그것만으로 그들은 변화를 감지하지 못할 겁니다. 검사관들에게는 전량 인수한다고 할 테니 50퍼센트로 조금 더 올려주시지요.”
하지만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검사관들을 다독거리는 일은 여전히 장오의 몫이었다.
한 며칠 씨알이 좋다고 안심한 것도 잠시였다. 아침부터 올라온 그물에는 90퍼센트가 청어였다. 흥분한 히다끼 공장장이 브리지로 뛰어 올라왔다. 청어는 기름덩어리여서 어분으로도 쓸 수 없으니 아예 폐기해버리는 게 낫다는 얘기였다. 그렇다고 슬립웨이를 올라오기도 전인 코드엔드를 개봉도 하지 않은 채 폐기하기는 사실상 어려운 일이었다.
청어가 가득 찬 그물자루에는 왕게도 섞여 있었다. 혼획된 왕게를 안주 삼아 장오는 검사관들과 모처럼 파티를 벌였다. 미국 어장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예컨대 피쉬 빈에서 금지어종이 발견되면 수산관의 입회하에 즉각 바다에 버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베링해에서는 그물에 걸린 광어의 중량이 60킬로그램에 육박하고 그 크기는 책상넓이만큼이나 되었다. 후크에 광어 주둥이를 걸겠다고 선원들이 두 명이나 달라붙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미국 어장에서는 바다사자 따위의 포유류도 자주 그물에 걸려왔다. 대부분 죽은 뒤여서 곧장 바다로 내던져졌는데, 수놈의 경우에는 날렵한 선원들이 미국 수산관의 눈을 피해 아주 귀중한 양물을 칼로 도려내어 귀국선물로 삼았다. 청어는 특히 버리기도 아까워 알게 모르게 구이나 회로 맛있게 먹고들 하는데, 그러다가 들키기라도 하는 날이면 치도곤을 당하곤 했다.
바람이 수그러지는 틈을 타 칠보산호가 접선했다. 본사로부터 자선에 지불할 어획수당 8만 달러가 탁송되어 왔고, 그 배편으로 러시아어과를 전공했다는 K 원양의 박 대리도 왔다. 그의 임무는 K 원양이 자체적으로 확보한 쿼터의 수매조업관리였다.
박 대리가 승선한 날 눈치덩어리였던 살리노프가 기어이 하선했다. 마가단에 가면 꼭 한 번 만나고 싶은 친구였다.
13
선단 측으로부터 난데없이 55도 어장으로 자선들을 이동시키라는 주문이 나왔다. 명란 수율이 저조한데다가 다량의 청어 입망으로 선별작업에 애로가 많고, 잔챙이의 비율이 높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자선들은 잦은 경비정의 출몰로 내측조업이 불가하며, 특히 4백 미터 이심(以深)의 해저에는 명태가 없다며 거부했다. L선장이 독단적으로 모선을 남쪽으로 움직였으나, 북쪽에서 자선들의 호출이 잇따르자 다시 선수를 돌리느라 법석을 떨었다.
그런 차에 세르게이와 니콜라이에게서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틈만 나면 둘은 침실로 들어가 소주를 마셨다. 침실에서 술을 마시려면 조리장이나 수매반장이 마련해 주는 안주가 필요했다. 보다 못해 장오가 이를 꾸짖자 술에 취한 세르게이가 그러려면 자신들의 월급부터 올려달라며 대들었다. 그는 1차적으로 수매반장인 천씨를 의심했다. 두 검수원이 술을 마시는 틈을 타 샘플링이나 밀도환산 과정에서 속임수를 쓰겠다는 수작이라 생각되었다. 계약물량을 소진하기엔 아직도 갈 길이 멀고 험했다. 그는 다시 잠자는 시간을 줄이기로 했다. 그물이 올라올 때마다 샘플링을 간섭하랴, 피쉬 빈의 문을 감시하러 공장부로 뛰어 내려가랴, 밀도환산의 계측현장을 입회하랴 마치 초인처럼 자신의 몸을 다루었다. 그런 그가 결코 달가울 리가 없는 천씨의 시선이 날이 갈수록 험악해졌다.
재주를 부릴 수 없게 된 천씨가 하루는 야료를 부리고 나왔다. 코드엔드 외부로 드러난 하얗게 색이 바랜 명태를 보고, ‘빨래고기’는 못 쓴다며 전량 노카운트를 선언했다. 예망시간이 길었거나 그물을 오래 차고 있으면 파도에 부대낀 어획물의 외피가 하얗게 변한다. 장오는 쿼터 대리인이 입회한 가운데 그렇다면 전량 폐기하자고 맞섰다. 결국 샘플링을 거쳐 빨래고기의 50퍼센트를 계산에 넣었다. 약이 오른 천씨가 갑판 위에 치부장을 홱 집어던지곤 하늘을 쳐다보며 혼자 분을 삭였다.
그러므로 배에서 먹고 자는 일이 점점 힘들어졌다. 천씨가 하루는 느닷없이 장오의 침실로 찾아와 승선하던 날 주고 간 라디오 카셋트와 우의와 공군점퍼를 회수해 가버렸다. 언제 이런 일이 있으리라 싶어 장오는 그 물건에 손도 까닥하지 않았던 터였다. 선실에 냅킨이 떨어졌다고 해도 살롱 보이는 들은 체 만 체했다. 밤이면 홑이불로는 견디기 어려워 선단의 정 부장에게 담요를 부탁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황 부장, 아직도 몰랐소? 옳은 대접을 받으려면 본인이 알아서 하셔야죠.”
매일처럼 드나드는 통신실도 어느새 그에 대한 호의를 거두어들였다. 그가 거느리는 러시아 대리인들조차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통신장의 장난인지는 몰라도 최근에는 본사와의 전화연결도 예전 같지 않았다. 달리바의 대리인인 카푸스틴으로부터도 여직 파이오니어 호에 승선하겠다는 연락이 없었다. 한 순간 외롭고 힘들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바다도 머리를 풀고 바람과 함께 울부짖고 있었다.
울적한 마음에 그는 모처럼 동향인 갑판장의 방을 찾았다. 오십대 후반인 그는 이제 뱃일도 지쳤다고 했다. 올해를 마지막으로 할망구 하고 고향에서 농사나 짓겠다고 했다. 큰 딸은 시집을 가 벌써 손자가 둘이고, 아들도 이제 번듯한 직장을 얻어 독립을 했는데 무슨 목돈이 필요하겠느냐는 애기였다.
“그래도 평생을 살아온 바다 아닌가요?”
“그래서 바다가 그리울 거라고? 천만에! 우리 고향도 바다가 울을 치고 있는데.”
“배를 내린 사람들을 만나면 육지가 갑갑하다고 맨 날 술에 절어 살던걸요. 바다에서처럼 몸이 흔들리지 않으니 오히려 편치 않대요.”
“이제 내 나이에 바다에선 얻을 게 없어. 바다를 보고 있으면 자꾸 외손자 얼굴만 눈에 얼른거리고….”
“이 모자 제가 러시아에서 산겁니다. 노후에 머리가 시리거든 쓰세요.”
장오는 선원으로서는 이미 늙어버린 갑판장에게 연민을 느끼곤 쓰고 있던 오소리털 모자를 벗어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방으로 돌아와 잠시 쉬고 있던 그에게 선단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선단장은 장오를 보더니 들고 있던 전문 한 장을 힘없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경옥아버지,결혼일을4월5일로잡았어요.늦어도3월말까지는귀국하시기바랍니다.당신의아내정숙.
“난 지금껏 아들 딸 시집 장가보낼 때 늘 바다에 떠 있었어. 그런데 막내딸 식장에마저 가지 못 한다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인데.”
“선배님, 저라면 당장 하선하겠습니다. 선단 일이야 정 부장과 박 대리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선단장은 길게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어황이 살아나고, 단 열흘만이라도 경비정이 없는 곳에서 마음 놓고 고기를 잡았으면 해. 그러면 하선해도 미련이 없겠어.”
바람은 캄차카 반도를 에워싸고 떠날 줄 몰랐다. 바람의 성미는 여전히 거칠고 강퍅했다. 풍하로 넘어지는 파도의 산은 연일 잉잉 울어댔다.
청어에 뒤섞인 명태 중에서 배가 불룩한 암태를 골라내어 복부를 누르니 배꼽에서 알이 삐어져 나왔다. 산란이 임박한 그런 대형어가, 규격 미달어가 대부분인 곳에서 함께 회유하고 있는 게 신기했다. 다시 54도 어장으로 남하했다. 역시 그곳은 씨알도 굵고 포란 상태도 양호했다. 그러나 클리모브카 호가 끌어다 준 그물에는 예외적으로 수란 명태가 70퍼센트였다.
아틀라소바 호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달리바의 대리인인 카푸스틴을 태우고 왔다. 이제 달리바의 명태 절반은 그가 지켜낼 것이라 믿었다.
54도 어장의 암태들은 배가 한껏 부푼 채 알을 물고 있었다. 명란어기의 종료가 임박했다는 징조였다. 남하한 지 이틀 째 되는 날, 바람이 잠시 멈추었다. 갑판으로 봄날 같은 온기가 퍼지고 있었다. 하늘은 다시 눈을 뿌릴 표정이었다. 인근에는 파이어니어 호와 같은 공모선들이 즐비했다. 마치 해전이라도 벌어진 듯 공모선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자선들의 모습이 첨병선(尖兵船)처럼 느껴졌다.
밤이 되자 며칠 동안 연락이 끊겼던 레닌콜호즈 소속 두 척의 자선 선장이 그물도 없이 밤늦게 장오를 찾아왔다. 둘은 대뜸 러시아 공모선과 파이오니어 호 간의 인수량을 비교해 보인 다음 조업거부를 선언했다. 러시아 공모선은 일일 평균 150톤을 계량하는데, 파이오니어 호는 50톤에 불과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두 선장이 도원결의를 하였다면 굳이 모선을 방문하지 않고 보이스로 전달해도 될 일이었다. 뭔가 다른 속셈이 있겠거니 싶어 대뜸 그들의 무례함을 꾸짖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우리 모선에는 두 명이나 되는 검사관이 타고 있었지 않느냐? 그건 규격 미달어나 청어의 혼획 탓이었지, 결코 네놈들의 어획물을 가로챈 게 아니야. 나는 한국 사람이지만 러시아 명태를 이 배에 팔러온 사람이야. 만약 너희 짐작대로 파이오니어 호에서 명태를 감춘다면 너희보다 더 억울해 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라고. 나는 이 배에 올라온 뒤로 하루에 세 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어. 명태가 알을 싸고 나면 조업은 이제 끝이야.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장오가 언성을 높여 말하는 동안 두 선장은 풀죽은 표정을 짓더니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비로소 저들의 방문 목적을 털어놓았다.
“어획수당 10달러는 다른 배에 비해 너무 적습니다.”
그들의 수당은 사할린사무소가 결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장오는 두말 않고 5달러를 더 얹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로스께 선장들은 아주 흡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14
날이 밝아서야 3월 8일이 러시아 공휴일인 ‘여자의 날’임을 알았다. 러시아에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여자들이 모두 상전 대접을 받는 날이라 했다. 그 날만큼은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으며, 모두 좋은 옷으로 치장하여 하루 종일 남자들로부터 온갖 대접과 시중을 받는다고 했다.
자선들은 일제히 그물을 걷어 올린 다음 러시아 공모선으로 몰려갔다. 어떤 캡틴은 파이오니어 호에 꽃이 있느냐고 물어오기도 했고, 없다고 하자 그물에 걸려온 우뭇가사리나 청각 따위의 해초로 꽃다발을 만들기도 했다.
공모선에 승선한 여자들은 이 날 하루를 위해 미리 예쁜 옷 한 벌을 마련해 온다 했다. 나다와 스베타도 근사한 옷을 입고 이브게니와 유라가 차려준 음식을 먹고 있을 터였다. 갈리나, 쏘오냐, 놔리샤, 류드카, 이나, 옥사나, 레나, 타냐, 빅토리아, 올냐, 넬라, 나탈리아, 소피아…. 장오는 자신이 만났던 러시아 여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외어보았다. 소피아에 이르러서는 눈시울이 붉어지기까지 했다.
이른 아침부터 공모선에 승선하고 있는 여자들을 찾아가는 자선들의 행렬이 바다 위를 요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그 광경이 마치 광장으로 몰려나오는 축제인파를 연상시켰다. 파이오니어 호에서도 검사관 알렉산더를 필두로 카니프의 대리인인 니콜라이와 카푸스틴과 세르게이까지 그 대열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 날 이른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만 하루를 쉰 푸셰카리예보 호와 아틀라소바 호가 차례로 어획물을 차고 왔다. 한쪽은 씨알이 양호하였으나 내측 조업을 강행한 아틀라소바 호의 것은 수란 비율이 높았다. 두 척 인수량이 모두 합쳐 고작 80톤이었다.
그물 인수작업이 끝나자 L 선장의 호출이 있었다. 트집쟁이 선장은 조업 실적도 부진한데 대리인 숫자가 왜 네 명이나 되느냐고 또 다시 따지고 들었다. 대개의 선주들은 무조건하고 조업실적만으로 선장의 능력을 평가하였으므로 그가 조바심을 내는 것은 당연했다. 파이오니어 호의 경우 조업실적이란 얼마나 많은 고기를 훔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신경질은 그렇다 치더라도 대리인 숫자가 적정하느냐의 여부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조업실적의 부진은 저로서도 안타깝고 죄송한 일입니다. 그러나 파이오니어 호의 현행 시스템으로 보아 대리인의 2인 1조, 주야교대 근무는 불가피하지 않습니까? 오늘이라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계량해주기만 한다면 당장 두 명으로 줄이겠습니다. 쿼터 임자가 각각이고 그들 임의대로 검수원을 파견한 터여서 저로서도 대리인들의 승선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습니다. 모선 측에서 대리인 숫자가 정 많다고 생각되면 주부식비를 따로 청구하시기 바랍니다.”
L 선장에게 그렇게 또박또박 말대꾸를 하기도 처음이었다.
“황 부장, 자꾸 씰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자선이나 넉넉히 붙여 우리 배 처리량이나 채워 주소. 오데 말 못해 죽은 귀신이라도 있나, 우째 입만 열었다 하면 그리 청산유수고? 나 원…”
L 선장과의 대면은 노상 이쪽의 약점을 들춰내어 속을 뒤집는 것으로 끝이 나곤 했다.
그러는 사이에 54도 어장이 파장을 예고했다. 그 동안 불평 한 마디 없던 키로보 호가 자신이 소속된 콜호즈 사장의 전문을 근거로 조업종료 의사를 밝힌 후 떠났는가 하면, 아틀라소보 호가 예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북상하자 다른 자선들도 줄줄이 그 뒤를 따라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달아난 자선들을 찾아달라며 본사에 긴급 타전을 하였으나 돌아온 답은 어장에서 최선을 다해 달라는 당부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3월 10일 자정을 기해 전 한국 어선들의 조업을 중지시킨다는 러시아 수산부의 전문이 선단방송을 통해 고시되었다. 어획 인수량을 밥 먹듯이 속이는 한국 어선들의 몰염치와 무도함을 오래 전부터 염려해왔던 장오의 우려가 드디어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다.
파이오니어 호가 지금까지 자선들로부터 받은 명태수매량은 겨우 7천 톤에 불과했다. 느닷없는 수매조업중단 발표가 공표되자 모선 측은 깊은 시름에 빠졌고, 장오 또한 마음이 무거웠다.
앞일을 가늠할 수 없는 막막한 상황 속에 파이오니어 호는 처음으로 피항에 나섰다. 풍속 24노트나 되는 엄청나게 쎈 된바람이었다. 웬만한 파도에도 육지처럼 꿈적하지 않던 거선도 산처럼 밀려오는 파도를 거역하지 못했다. 바람은 벗겨내기 어려운 포승이었고, 배는 꼼짝할 수 없는 그의 포로였다. 수 백 톤의 바닷물이 선수를 덮치자 선체가 크게 기울어 책상 위의 온갖 집기들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주방에서는 시소를 되풀이한 국솥이 국물을 몽땅 쏟아내어 점심때는 김치와 무말랭이만 올라왔다. 워낙 기압이 낮아, 마치 고산 지대에서처럼 밥이 설익기가 예사였다.
조업이 없어 무료한 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 당직시간이 엇갈려 접촉이 뜸했던 1항사가 장오의 침실을 방문했다. 그는 대학 1년 후배였다.
“선배님이 이 배에 승선하던 날, 저는 첫 눈에 알아 봤심니더. 축제 때나 체육대회 때 늘 앞장서서 활약하던 선배님 얼굴을 기억합니더.”
후배가 선배의 학창 시절을 회고해 주었다.
“어로학과를 나왔으면 일선 조업선이 딱이지, 굳이 공모선을 탄 이유는 뭐요?”
“송출선 선장으로 라스팔마스에도 가 봤고요, 돈도 좀 벌었지예. 헌데 뉴펀들랜드 어장에서는 죽을 고생만 했심더. 한번은 만선으로 귀항하다가 황천을 만나 물귀신이 될 뻔 했지예.”
“뉴펀들랜드라면 80년대 후반이겠네?”
“그렇심더. 1982년 삼원호가 맨 처음 입어한 이래 일곱 척으로 늘어난 한국선들은 공해임에도 불구하고 NAFO(북대서양어업조약기구)의 등쌀에 모조리 쫓겨난 게 그 10년 후였어예.”
뉴펀들랜드 인근의 북대서양에서 한국 선원들은 주로 가자미와 적어를 잡았다. 그러나 공해어장마저도 자원보호라는 명분으로 비회원국 어선들을 가차없이 축출하였으므로 한국 원양어업은 하나 둘 그렇게 생업의 터전을 잃어 갔던 것이다.
“뉴펀들랜드 어장에 비하면 여기는 호수 같지?”
같은 위도라도 넓은 대륙이 감싸는 바다의 기후는 아무래도 끈질김이나 강팍함이 덜했다. 대양을 경험한 자는 함부로 바다를 논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후배는 장오의 물음에 즉답을 피했다.
“이 어장도 올해로 끝인가 봅니더. 회사가 버텨낼지도 의문이고요. 퇴직금이라도 받으려면 아무래도 올해 명란철이 끝나는 대로 하선해야 할까 봐예.”
“선장으로 몇 어기를 뛰었으면 돈도 좀 모았을 텐데?”
“쎄빠지게 버는 사람이 있으면 신나게 쓰는 사람도 안 있습니꺼.”
그는 신나게 쓴 사람이 다름 아닌 아내였다고 말했다. 그의 아내는 그가 타국땅에서 원양어선을 타는 동안 세 살 연하의 남자와 동거하였다는데, 지금은 그 남자에게서도 버림을 받고 아이들 주변을 맴돌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한때나마 살을 맞대고 살았던 사이라 아내에게 자그만 구멍가게를 낼 밑천이라도 쥐어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은밀한 상처를 선배에게 태연하게 보여주는 것이 다 나이 탓이려니 했지만 정작 그의 얘기를 듣고 나자 잠시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신세가 장오와 더불어 영락 없이 형님 먼저,아우 먼저 하는 꼴이었다.
복도까지 나와 배웅하던 장오에게 깜빡 잊었다는 듯 후배가 등을 돌려 다가와 그의 귀에 대고 하는 말이 뜻밖이었다.
“형님, 사관식당에서 들었는데 직장(職長)들이 형님을 두고 하는 소리가 듣기 거북할 정돕디다. 꼭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은 아닌 듯한데… 참고하시라고 하는 얘깁니다.”
15
기관장의 면상에 상처를 낸 선단장은 결국 보따리를 쌌다. 그저께 일이었다. 사관식당에서 선단장의 회갑연이 벌어졌다. 조업이 없는 날이었으니 위스키와 소주잔이 막무가내로 돌았다. 그런데 술기가 오른 기관장이 파티의 주인공에게 슬쩍 농담을 던졌다가 “내가 늙었다고 맞먹는 거냐!”며 선단장이 유리 재떨이를 기관장의 면상으로 집어던져 이마를 열 바늘이나 꿰매는 소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딸 결혼날짜로 맘을 졸이던 선단장은 그 사건을 빌미로 하선을 앞당겼다. 하선하던 날 선단장은 인근의 일본 국적 운반선으로 옮겨 타면서 “내 평생 남의 배에 얹혀 타기는 처음”이라며 허허롭게 웃었다.
조업이 재개된 것은 금지령이 내려진지 닷새가 지나서였다. 금지령은 애국심이 투철한 어느 러시아 검사관이 한국선의 불법조업과 관련한 보고 때문이었다. 미국이었더라면 해당 선박을 항구로 끌고 가 어획물을 몰수하고 과중한 벌금을 물릴 터였지만, 체제가 바뀐 러시아 정부는 아직까지 그럴 정신이 없었다.
57도 어장은 여전히 청어의 혼획과 소형어의 높은 비율로 실속이 덜했지만, 그나마 수란 비율이 떨어져 위안을 주었다. 치파예보 소속 자선들이 몇 척 러시아 공모선의 전재 순번에 밀려 파이오니어 호로 달려오는 횡재도 있었다. 그러나 소형어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탓으로 어획량에 차이를 보이자 그들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서 캄차카는 더 이상 머물 자리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선장이 고집을 부리는 것은 작년 명란철에 이곳에서 불과 한 달여 동안 계약물량의 두 배를 올린 실적을 잊지 못한 탓이었다. 하지만 그 같은 어장개념은 올해 경우 이미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장오는 한시 바삐 오호츠크해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줄기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배도, 사람도 모두 다 조금씩 미쳐가는 느낌이었다. 바다가 연일 계속하여 잉잉거렸다. 바람이 몰아치면 바다는 본래의 남빛 푸른 제 옷도 다 벗어 던지고 천지사방 하얀 속살을 드러낸 채 하루 종일 미쳐 날뛰었다.
3일째 기승을 부리던 저기압이 겨우 숨을 죽였다. 바람이 물러가고 나니 모처럼 바다 위로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니 갑판에 쌓인 눈이 수북하였다. 제설을 하느라 한나절을 보냈다.
그 날, 본사로부터 난데없는 전문이 한 장 날아들었다. 다음 운반선 편으로 무조건 귀국하라는 짤막한 내용이었다. 사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어쩌면 그의 엄격한 검수에 불만을 품은 선단 지휘부의 농간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는 계약물량을 다 채울 때까진 결코 물러서지 않으리라 스스로 다짐했다. 결과가 어떠하든 지금의 그로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심정이었다. 바다로 나온 일은 자신이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다. 몸은 고단하였으나 그러므로 마음이 바빴다.
다시 저기압의 정체로 사흘간 작업을 하지 못했다. 저기압이 베링 해 쪽으로 빠져나간 뒤 자선들을 불러 모으니 닛샤 호에서만 응답이 왔다. 모두들 저기압을 피해 58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는 바위에 달라붙은 삿갓조개처럼 납작 엎드려 있었다. 날씨가 회복된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네 척이 모습을 나타냈지만, 예망 후에는 정작 저네들 러시아 공모선으로 그물을 끌고 간다는 소식에 아연실색했다. 울화가 치밀었으나 어디에도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박 대리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화가 치민 나머지 세르게이로 하여금 오늘 러시아 배에 붙은 자선들에게는 어획수당을 한 푼도 지급하지 않겠다고 통보하라 일렀다. 자연 식욕이 없어 저녁식사도 거른 채 장오는 그날 밤 캔맥주를 10깡이나 비운 뒤 브리지에 있는 소파 위에서 그만 뻗어버렸다.
다음 날 러시아 친구들이 그의 방으로 몰려왔다. 왜냐고 물었더니 당신이 곧 귀국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나도 하루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K 원양과 맺은 계약물량을 백퍼센트 달성하기 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내리지 않는다. 당신들도 고기를 도둑맞지 않도록 주의하기 바란다. 벌써 3월도 하순이다. 이제 명란 시즌도 보름이면 끝이다. 곧 오호츠크 어장으로 이동할거야. 당신들끼리 쿼터 문제로 더 이상 반목하지 마라. 각기 굳은 사명감으로 근무에 임해주기 바란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16
K 원양이 독자적으로 구한 뷔에트로스코 쿼터는 캄차카 해안경비대의 확인이 늦어진 관계로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카니프로부터 추가쿼터 5천 톤이 나온 터여서 저들이 독자적으로 구한 쿼터가 마음에 걸렸다. 오호츠크 어장에는 모두 10척의 자선들이 따라와 동경 1백 50도 인근 해역을 탐색하고 다녔다. 도처에 유빙 조각이 떠다녔다.
그런 차에 캄차카 립보드 본부로부터 검사관인 알렉산더를 일본 공모선으로 전선시키라는 명령이 갑자기 떨어졌다. 짐을 꾸리는 알렉산더에게 앞으로 10여 일만 더 버티면 명란조업이 파장이니 당신 상관에게 청하여 파이오니어 호의 조업이 끝날 때까지 더 머물러 달라고 애원했다.
56도 어장은 온통 유빙 천지였다. 얼음밭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장오의 머리 속에 문득 난센의 탐험기 한 구절이 생각났다. ‘그 얼음은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우리의 주위를 꽉 죄어 밀어 붙이고 있다.’ 난센은 북극의 해류를 조사하기 위에 일부러 얼음밭에 들어가 자신의 탐험선 프람 호를 옥쇄시켰다고 했다. 얼음 사이로 집채만한 빙괴(氷塊)가 예사로이 목격되었다. 어느 빙괴 위에는 점박이 무늬를 한 바다표범 한 마리가 올라 앉아 사방을 멀뚱멀뚱 살피고 있었다. 문득 투사바야의 해변에서 만났던 어린 바다표범의 어미일까 싶어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한 바다의 풍경은 마치 낡은 흑백영화의 필름이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흐려진 하늘이 개고 날씨가 맑아지자 낮 기온은 영상이었다. 부드러운 얼음밭을 지날 때마다 마치 연꽃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선교 유리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따스했다. 햇살이 눈부신 얼음밭에서는 금방이라도 봄나물이 돋아날 것만 같았다.
북위 55도, 동경 150도 해역에서 좋은 어군을 만났다. 대형어가 60퍼센트를 넘었고, 포란율도 10퍼센트에 달했다. 수확은 13차례 전재에 총 5백 톤이었다. 어군이 흩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명태가 그의 소원을 알아들었는지 사흘 동안 호황이었다. 어획물을 받아 싣기 위해 북상한 칠보산호가 며칠째 접선조차 못 하고 주위를 맴돌았다.
사할린에 머물고 있는 부사장에게 오호츠크 해의 낭보를 전했다. 그는 뜬금없이 사할린에는 지금 눈이 엄청나게 내려 모두들 발이 묶인 상태라면서, 운반선 편으로 빨리 하선하라고 권유했다. 내색은 않았지만, 남의 배에서 장오가 눈치밥을 먹고 있는 게 그도 안쓰러운 모양이었다. 부사장은 제발 몸조심하라는 말을 세 번씩이나 반복했다.
다시 모선 측의 도둑질이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야간 검수는 니콜라이와 카푸스틴이 맡았는데, 코드엔드의 밴드 수로 목측한 어획량과 검수표의 계량치에 큰 차이가 났다. 갑판으로 내려가 수매부의 기록을 검토하였더니 피쉬빈 중량환산법에 오류가 발견되었다. 그 동안 모두 10회에 걸쳐 조작된 것으로 확인됐다. 피쉬빈의 높이 측정은 카푸스틴이 입회하였으므로 일지상 기록을 속일 수 없는데도 그 답이 일치하지 않았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었다. 따라서 그 같은 장난은 박 대리에게 매수된 니콜라이의 협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장오는 니콜라이의 검수표를 찢어 버리고 10회분의 중량을 정정하고 보니 사라진 고기수량이 무려 150톤이나 되었다. 니콜라이가 미친 듯이 길길이 뛰었다. 그러나 장오는 지체없이 녀석의 당직근무를 해지시키고 그에게 앞으로는 뷔에트로스코 쿼터 전용 자선의 것만 검수하라고 지시했다. 고기를 빼돌리려는 모선 측의 흉계는 그처럼 집요했다.
17
저기압의 직선통로에서 벗어난 오호츠크 어장은 바람이 숨을 죽인 고요한 바다였다. 얼음이 깔린 해면은 단지 제 스스로 울렁거리는 듯 했다. 해면에 얼음의 결정이 생기면 그 밑의 아직 얼지 않은 해수 속에는 염분이 남겨지고, 차츰 소금기가 증대되면 밀도가 높아진 물이 아래로 가라앉아 이로 인해 심층수의 순환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용승(湧昇)은 심층의 영양분을 끌어올리므로 자연 고기들이 몰리게 된다. 장오는 오호츠크로 어장을 옮긴 것이 백번 잘한 일이라며 스스로 기뻐했다.
56도 어장은 산란의 절정기라고 할 만큼 씨알이 좋았다. 뷔에트로스코 소속 자선을 제외하고도 하루에 450톤이나 채워냈다. 공장부도 열심이었다. 명란을 따는 작업대에는 컨베이어 벨트를 가운데로 두고 마주앉은 공원수가 80여 명이나 되었다. 그들의 손끝에서 명태의 배를 가르는 조각칼이 피스톤 같았다.
동결을 기다리는 함석팬에는 2.5킬로그램의 명란 봉지가 네 개씩 담겨진다. 공원들은 알의 성숙 정도에 따라 따로 포장을 하는데, 최고 상품인 정란(正卵)은 일본 수출가가 키로당 10달러 수준이었다.
아침부터 그물을 끌고 온 자선들이 줄을 섰다. 한시가 급한데 천씨가 노카운트를 선언하고 버틴다 하여 달려갔더니 얼음밭을 끌고 온 그물자루 외부의 어획물이 모두 꽁꽁 얼어 있었다. ‘빨래고기’ 대신 이번에는 ‘얼음고기’로 트집을 잡고 있었다. 이래저래 독이 오른 천씨는 한사코 노카운트를 고집했다. 장오가 눈에 띄지 않을 때면 그는 언제나 망나니 칼춤을 추었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장오도 아니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어획을 한 자선이 보는 앞에서 고기를 몽땅 바다에 버리자고 했다.
동태 속 알은 어차피 얼릴 터였고, 포란태의 살은 수리미로 쓰는데 하자가 없지만, 수컷이 문제였다. 수컷은 주로 중층을 떠돌지만 산란철이면 암컷과 더불어 이동했다. 수컷은 알이 없으므로 배를 가르지 않고 그대로 동결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장오는 천씨에게 어획물 전량을 버리자고 했다. 결국 50퍼센트를 감해 주는 선에서 타협을 보았다. 천씨는 언제나처럼 겨자 씹은 얼굴이었다. 날이 갈수록 그는 귀국하면 당장 회사로부터 반장 완장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하루는 선장이 세르게이의 면전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막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자선의 접선은 모선의 좌측 1백 미터 후방이 제격이다. 그런데 자선 선장이 초자인지, 위치가 틀어진 바람에 슬립웨이에서 던진 빈 그물을 낚아채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람! 이 새끼들을 확 그냥, 패 죽여버릴까 보다!”
자선이 모선의 옆구리를 들이받은 것도 아니고, 다만 작업이 약간 지체되었을 뿐이었다. 그걸 갖고 이래저래 신경이 날카로워진 선장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 것이었다.
하지만 세르게이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눈앞에서 선장의 주먹이 춤을 추자 세르게이가 그 팔을 낚아채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선장을 브리지 바닥으로 내팽개쳐 버렸다. 놀라운 것은 늙다리 선장이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는데도 그의 보좌관인 항해사들이 물끄러미 그 꼴을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장오는 황급히 선장을 일으켜 세운 다음 그를 부축하여 그의 방으로 들게 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 날부터 선장은 한 동안 브리지에 얼굴을 내보이지 않았다.
낮에는 몰랐으나, 밤이 되니 러시아 공모선들과 자선들의 불빛이 수평선을 가득 메운 채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그럴 때면 공연히 육지가 그리워졌다. 그때서야 갑자기 칠보산호를 타고 집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 생각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이 항해가 끝나면 돌아가 사직서를 쓸 계획이었다. 그리고 뭍에서의 새로운 삶을 준비해야만 했다. 그것은 미스티키 호를 타기 전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 항해는 그의 생애에 마지막이리라 예감했다. 지금 북태평양에서 온갖 악천후에 부대끼는 파이오니어호도 자신의 처지와 결코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서글픔과 안타까움이 밤새도록 가슴으로 밀물했다. 바로 곁에는 옮겨 타기만 하면 곧장 부산으로 향할 칠보산호가 몸을 출렁이며 떠 있었다.
18
계속되는 호황으로 칠보산호와 전재작업을 미룬 지 닷새째였다. 드디어 어획량이 1만 톤을 넘어섰다.
그러나 그 때부터 입망량이 10톤 내외로 뚝 떨어졌고 수란율이 증가했다. 마지막 그물의 수란율은 무려 70퍼센트였다. 선단 측에서 뷔에트로스코 간의 계약서를 보여주며 앞으로는 수란태 가격을 적용하겠다고 말했다. 장오는 아직 시기상조니 좀 더 지켜보자며 날짜를 미루었다. 화가 난 모선 측이 저네들 본사로부터 온 전문을 내보이며 앞으로는 장오의 회사 쿼터 분은 일체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는 눈도 깜짝 하지 않았다. 일일 작업량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모선 측이 어획물 인수를 거절할 가능성은 제로였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운반선과의 전재작업이 개시되었다. 전재가 시작되자 느닷없이 선단의 정 부장이 장오의 방을 손수 찾아와 그에게 하선 여부를 물었다. 한시라도 빨리 눈엣 가시를 없애고 싶다는 속셈이 분명했다.
“물론 집에 갈 때도 되었지요. 하지만 어황을 보니 앞으로 열흘은 더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칠보산호가 떠나더라도 러시아 자선편으로 하선하면 되니깐…”
말끝을 흐리며 그는 정 부장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대답이 단호하자 정 부장은 짐짓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입맛이 쓰다는 표정으로 방을 나갔다. 정 부장이 나간 지 한 삼십 분이나 되었을까? 이번에는 입가에 웃음을 가득 문 통신장이 불쑥 나타났다.
“황 부장님, 주방장 방에서 직장들 몇이 모여 청어 사시미를 만들어 먹는다고 하는데 같이 가입시더.”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검수문제로 연일 천씨와 마찰이 있게 되자 저편에서 먼저 서먹서먹해 하던 친구였다. 그러나 먼저 긴장을 푼 상대를 외면하는 것도 인사가 아니라 싶어 별다른 생각 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주방장의 방은 침대가 없는 따뜻한 장판마루였다. 위생장과 조기장 등 직장들이 모여 있다가 두 사람을 웃음으로 맞이했다. 나이든 갑판장이 보이지 않아 조금 의아했으나 데크에서 전재작업을 지휘하느라 그러려니 했다. 양주병이 보였고, 주방장이 직접 솜씨를 낸 청어회와 마른안주가 진설되어 있었다. 몇 차례 잔이 주인을 바꾸며 돌았으나 왠지 분위기가 어색했다. 그 분위기를 깨려는 듯 주방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황 부장님, 어기도 끝나가는 데 이제 갑판 나들이는 그만 하시죠. 수매반장은 돌아가는 대로 모가지가 날아갈 판이라며 밥 묵으면서도 울고불고 야단입니다. 자식 키우는 우리 같은 선원이 배 아니면 갈 데가 어디 있겠소?”
그제서야 장오는 술자리 마련이 처음부터 계획적이었음을 알아차렸다. 말로는 수매반장의 모가지 걱정이었지만, 속내는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 위생장이 얼음을 채운 위스키 잔을 장오에게 건네며 말했다.
“자, 이 잔은 우리 배 직장들을 대표해서 제가 올리는 것입니다. 아무튼 앞으로 좀 잘 봐 주이소.”
빙긋이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아낸 장오는 위생장이 건넨 잔을 단숨에 훅 비워냈다. 그런데 술이 목젖을 타고 넘어가자마자 이상한 기분이 느껴졌다. 시나브로 시야가 흐릿해지며 방이 비스듬히 기우는가 싶더니 정신이 아마득해져 갔다. 지난 겨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보드카에 대취한 끝에 길에 오줌을 누다 젊은 경찰들에게 붙들려 두 시간 동안 린치를 당할 때도 이렇지는 않았었다. 그는 허공에다 손을 내저으며 가물거리는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끝내 의식을 잃고 말았다.
눈을 뜨니 침실이었다. 현창으로 휘부욤하게 미명이 찾아들고 있었다. 목이 몹시 따가웠고, 감기가 들렸는지 코가 멍멍했다. 침대에 누운 채 그는 간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울컥 기침이 솟았다. 순간 왼쪽 옆구리로 날카로운 칼끝이 파고들 듯 극심한 통증이 엄습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도 어려웠다. 왼쪽 눈에서도 따가운 통증이 느껴졌다. 손을 뻗어 책상 위를 더듬으니 한쪽 다리가 늘어진 안경이 잡혔다. 가까스로 상반신을 일으켜 거울을 들여다보니 코뼈도 약간 부어올라 있었다. 그는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살리려 애를 썼다. 위생장 녀석이 건네 준 잔을 비운 즉시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린 데까지는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으나 그 뒤의 일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제 저녁 회식은 직장 녀석들이 담합하여 그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벌인 자리였음이 분명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음모는 정부장이 사주했을 가능성이 많았다. 하지만 사방이 적인 판에 그 경위를 캐내겠다고 덤비는 일은 무모한 짓이라 생각되었다. 어금니를 앙다문 채 장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복도로 나온 그는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가며 위생실부터 찾았다. 그를 본 위생장은 짐짓 그를 외면하는 태도를 보였다. 장오는 그에게 압박붕대와 파스를 좀 달라고 했다. 왜 그러냐고 위생장이 물었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전 내내 바다 위로 안개가 서성거리더니 오후에는 싸락눈이 흩날렸다. 큰 바람은 덤벼들지 않았으나 얼음밭을 헤치고 다니는 자선들은 거동이 아주 불안해 보였다. 배의 항적은 마치 눈 덮인 황야를 썰매가 지나간 자리 같았다. 그럼에도 조업선들을 붙들고 있는 것은 아직도 만만치 않은 어군이 유빙이 떠도는 물결 아래서 산란의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턱으로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일상업무에 매달렸다. 마침 자선 두 척으로부터 보고가 닿았다. 푸시카로보 호 선장이 좋은 어군을 발견했다며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자선이 건네준 그물은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오호츠크해는 그야말로 황금어장이었다. 두 척이 도합 다섯 차례씩의 투망을 했다. 낮 동안 받아 실은 어획량이 4백 톤이나 되었다. 늘그막에 짝을 만난 홀아비의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그는 옆구리의 통증도 잊은 채 하루 종일 검수작업을 지휘했다. 오후가 되자 피쉬 빈이 가득 찼으므로 결국 자선들의 작업을 중지시켰다.
몸이 걱정된 장오는 저녁 무렵 잠시 한가한 틈을 타 욕탕으로 찾아가 뜨거운 해수에 몸을 담갔다. 숨쉬기도 어려운 게 틀림없이 갈비뼈 몇 개가 금이 간 게 분명했다. 욕조에 누워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때서야 말고 아련하게 간밤의 일이 영화필름처럼 돌아갔다.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발길질을 한 자는 허우대가 장대한 통신장이었다. 몸부림을 치던 장오가 방바닥에 널브러지자 통신장은 장오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고, 이어서 정신이 가물거리던 그를 복도로 끌고 나와 계단 아래로 내팽개쳤던 것이다. 겨우 위스키 두어 잔에 그처럼 정신을 잃은 것은 위생장 녀석이 무슨 환각제 같은 것을 탄 것으로밖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었다. 그나마 유빙이 떠도는 바다로 내던져 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는 물속에서 눈을 감은 채 다윗의 시를 암송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바다에 안개가 끼는 날이 잦아졌다. 대기온도가 조금씩 상승한다는 징조였다. 어황은 여전히 호황이었다.
니콜라이 녀석이 다시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수매반장이 작성한 검수표를 받아들고 브리지로 올라간 그가 수량을 15톤이나 낮추어 자선에게 통보한 것이었다. 그 사실은 이튿날 로그북에서 발견했다. 수매반장의 장부도 똑같이 고쳐져 있었다. 진작부터 뷔에트로스코의 작업분만 전담하라고 했는데, 장오가 몸이 불편한 틈을 타 서로 짜고 친 장난이었다. 이를 따지고 들었더니 천씨는 니콜라이에게로 책임을 떠넘겼고, 니콜라이는 엉뚱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귀항한 스타라제보예 호를 대신하여 투입된 랑제리 호가 기름을 필요로 하여 스타라제보예 호 선장의 동의를 얻어 유류비 조로 공제했다는 것이었다.
“니콜라이, 당신 나이가 몇인데 그런 아이 같은 소리를 해요? 랑제리 호 유류비는 자기가 잡은 어획물 판매대금에서 공제하는 것이지, 무엇 때문에 다른 배 어획고에서 공제한단 말이요? 설령 두 선장 간에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칩시다. 내가 직접 확인한 검수량을 나한테 보고도 않고 당신 맘대로 고치는 행위는 누구한테서 배운 짓이요?”
말문이 막힌 니콜라이는 연신 알아듣지 못 하는 러시아 말을 중얼거리더니 발작이 난 듯 주먹으로 책상을 마구 내려쳤다. 옆에서 지켜보던, 그를 선동했던 장본인인 박 대리가 은근슬쩍 자리를 피했다.
밤바다는 옅은 안개가 깔려 있었다. 며칠간 건듯건듯 분 바람 덕택에 유빙은 잘게 조각나 있었고, 얼음바다에 휑한 물길이 틔었다. 파이오니어 호는 수리미용 첨가제의 재고가 바닥나 이틀 후에는 채란과 라운드조업을 병행한다 했다. 점차 씨알이 작아지는 게 또 새로운 근심거리였다.
이제 오늘 밤이 지나면 카푸스틴도 떠나고, 알렉산더도 하선할 것이다. 일본 어선으로 전선 명령을 받은 카푸스틴의 하선에 이어 알렉산더를 대신하여 캄차카 경비대 소속 콘스탄틴이란 자가 승선했다. 카푸스틴은 귀환하라는 회사의 지시를 미리 받고 있었던지 웃는 얼굴로 떠났다.
19
4월의 첫주가 지나갔다. 날씨는 포근했고, 저기압이 대동한 바람이 얼음 조각을 몰아내어 바다가 말끔해졌다.
다시 수란율이 70퍼센트로 급증했다. 50센티미터 이상의 체장을 가진 성어는 대개 1백만 개의 알을 쏟아내는데, 나중 수란율이 샘플보다 증가한 것은 피쉬 빈에서의 압력으로 인한 인위적 방출이 원인이었다. 통에 든 명란을 살펴보니 정란의 경우 선홍의 색깔을 잃고 누렇게 변해 있었고, 입자도 물렁물렁해 보였다. 그것을 보고 채란대장을 자처하던 위생장이 조각칼을 흔들어 대며 ‘이제 명란철도 끝났어요.’라며 흥얼거렸다.
진작부터 염려한 대로, 검사관 콘스탄틴이 결국 말썽을 일으켰다. 장오는 마침 수란율 체크를 위해 공장부로 내려가 있었는데, 세르게이가 달려와 말하기를, 지금 검사관이 검수표를 찢는 등 난리를 피우고 있다고 전해 왔다. 이유를 물으니 소형어 30퍼센트의 가산치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오가 그 문제는 쌍방 간에 이루어진 합의사항이라고 알려주었으나 그의 의지를 꺾기는 불가능했다. 외국 어선에 대한 어업관리 규정조차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를 대리한 검사관이 바다위에서 자기 재량으로 부리는 주장을 거역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난동을 부리는 콘스탄틴을 앞세우고 박 대리를 찾았다. 선단측은 검사관에 대한 예우에 언제나 소홀했다. 검사관과의 마찰은 당연히 선박 측 몫임에도 그들은 도대체가 오불관언이었다. 콘스탄틴이 고집을 꺽지 않자 선단 측은 결국 소형어 중에서 알을 밴 명태에 한하여 75퍼센트를 인정해 주겠다는 고육지책을 내놓았다.
소진한 쿼터량이 어느덧 1만 4천 톤에 육박했다. 기상의 추이로 보아 유빙이 떼지어 몰려올 때까지 앞으로 2주일은 더 조업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수란율이 높으면 높은 대로 대형어 위주의 라운드조업이 가능할 것이므로 앞으로 열흘 후면 카니프 쿼터도 모두 소진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렇게 되면 달리바의 쿼터를 보태어 도합 1만7천 톤을 소진하게 된다. 오호츠크 어장으로 이동한 것이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그러나 장오는 며칠이 지나도록 호전의 기미가 없는 옆구리가 걱정이었다. 기침을 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크게 소리를 지를 경우에도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그의 영혼까지 마구 뒤흔들었다. 갈비뼈가 완전히 어긋나기라도 한 것인지, 그러다가 자칫 어긋난 뼈조각이 내장을 요절내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이처럼 망가지고 거덜난 몸으로 앞으로 열흘이나 남은 어기의 종료까지 버텨내자는 생각은 아무래도 무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버텨낸다고 하더라도 다시 부산항까지 열흘 가까운 기간을 껄끄러운 파이오니어 호 선원들과 함께 항해한다는 것도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고심 끝에 그는 오늘 내일하며 귀항을 앞두고 있는 운반선 칠보산호로 건너가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그는 아침식사 시간에 선단 측과 사관들 앞에서 귀국의사를 밝혔다. 정 부장과 박 대리는 왜 지금에야 그 말을 하는가 싶은 섭섭한 눈빛이었으나, L 선장은 눈을 동그랗게 뜰 만큼 반갑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바로 짐을 꾸렸다. 그때 일본인 공장장 히다끼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황상, 그 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내가 무어라고 말하기는 뭣합니다만, 한국 사람들 참 문제 많습니다. 특히 선장이 이상하구요. 그건 그렇고, 이건 내가 집에서 갖고 온 오찬데 내려가는 길에 한 잔씩 마시세요.”
“히다끼상, 정말 고맙습니다.”
“황상이 이상한 선장에게서 곤욕을 치를 때마다 내가 도와주지 못해 늘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히다끼상이 L 선장을 가리켜 ‘이상한 선장’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선장의 성(姓)이 이(李)여서 그것을 원용한 그의 재치였다. 장오는 그를 위로하는 히다끼상을 향해 소리내어 웃었다.
“그나저나 러시아 사람들 하루하루가 달라요. 얕잡아 보다간 큰 코 다친다고요.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요? 그 동안 황상이 고생한 것, K 원양 사람들도 이해하고 앞으로는 정신 차려야 해요. 선단장이 하선하면서 내게 그럽디다. 황 부장 그 친구 대단하다고. 젊은 후배에게 나쁜 짓 배우라는 말은 차마 못 하겠더라고요.”
그 말을 듣자 장오는 새삼 어른스러운 J 선단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올해 수리미 생산량이 작년만 못해서 걱정이겠군요. 그나저나 이 배도 내 짐작에는 내년이면 움직이지 못할 건데,히다끼상은 어쩝니까?”
“아이구 황상, 나도 이제 손자가 생겼어요. 그렇다고 아직 은퇴하고 싶지는 않고요. 이 참에 마, 태국으로나 갈까 해요. 수리미 기계들이 베트남이나 태국에 더러 팔렸는데, 그곳 몇몇 공장에서 와 달라는 얘기가 있어서….”
“아무튼 히다끼상은 좋은 기술을 가졌으니… 평생 고기잡는 일만 해 온 저와는….”
“아이고, 황상은 아직 나이가 젊잖아요? 제 생각엔 황상 같은 성격이라면 무얼 해도 잘 할 겁니다. 요즘 세상에 무슨 일이든 사람만 올바르면 일할 곳은 많아요. 어디로 가든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히다끼 상의 그 말에 장오는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마지막 그 말씀은 꼭 명심하겠습니다. 히다끼상, 정말 고맙습니다.”
“칠보산은 덩치가 작아서 요동이 심할 텐데…… 암튼 긴 항해길에 몸 건강하세요.”
히다끼가 나가자 세르게이가 그를 찾아왔다. 하선한다는 말을 들었다며 섭섭해 하는 얼굴이었다. 업무상 공식적인 인계를 한 다음, 귀국하는 대로 승선수당 외에 특별상여금이 지급될 수 있도록 회사에다 상신하겠다고 하니 시무룩했던 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스빠시버! 당신은 정말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가 만난 허다한 한국인들은 어떻다는 말인가.
“내가 없는 동안 가능하면 천씨가 하자는 대로 따라 하세요. 그러면 만사가 편할 겁니다.”
본사에도 하선보고를 해야 했으므로 통신실을 찾았다. 지난 번 폭행사건이 있고 난 다음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통신장과 얼굴을 맞댄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날은 달랐다.
“국장님, 그 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통신장은 겸연쩍게 웃었다. 장차 부산에서 마주칠 기회도 없지 않으니 전화번호를 알려달라는 그의 말에 통신장은 한사코 거부했다. 아무래도 뒷일이 걱정된 모양이었다. 위생실에도 들러 압박붕대와 파스를 몇 장더 얻었다. 장오는 위생장은 그의 몸이 그만큼 위중하다는 사실을 여태 모르는 것 같았다.
장오는 마지막으로 러시아 대리인들과 이별 자리를 마련했다. 니콜라이는 지난날의 몇 가지 무례한 일들에 대해 정중히 사과했고, 콘스탄틴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복무태도에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20
장오가 칠보산호로 건너가자 두 배는 곧 떨어졌다. 파이오니어 호 선원들이 몇 명 뱃전으로 다가와 떠나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오소리털 모자를 둘러쓴 채 두 팔을 높이 흔드는 사람은 늙은 갑판장이었다.
칠보산호에서의 첫 밤은 꼬박 뜬 눈으로 지샜다. 귀국하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니 막막하기만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다를 떠돈 지도 어언 16년의 세월이었다.
바닷가 깎아지른 높은 절벽에 둥지를 튼 바다오리는 대여섯 개의 알을 품었다. 부화한 새끼가 깃털이 나고, 날개에 힘이 붙기 시작하면 어미새는 바다에 몸을 띄운 채 먼 허공의 새끼들을 향해 계속해서 울음소리로 낙하비행을 유도했다. 어미새의 부름에 새끼들은 하나 둘 아마득한 절벽 아래를 향해 난생 처음의 비상을 했다. 더러는 절벽에 부딪혀 죽고, 더러는 착지거리가 짧아 북극여우의 먹이가 되기도 하지만, 그 같은 소수의 희생이 오히려 자연 생태계의 평형을 유지해 준다고 했다. 만약 그에게도 바다오리 어미처럼 일찍이 인생의 항로를 가르쳐준 인도자가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앞으로 닥칠 그의 미래가 어떠하든 그는 능히 헤쳐 나갈 것이라 자위했다. 파이오니어 호에서의 짧은 선상생활에서 그는 그의 의지가 아직 녹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항구에 자주 기항하는 운반선이어서 식탁에는 갖가지 채소를 재료로 한 메뉴가 많았다. 바다에서 싱싱한 야채를 먹는 것은 선원들로서는 큰 축복이다. 하지만 육지와 격리된 먼 바다의 조업선 선원들은 소금에 절인 시들은 배추가 고작이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바다에 떠다니는 다시마를 건져 올려 젓갈에 찍어 먹기도 한다.
“황 부장도 수대를 나왔다고 들었는데 몇 학번이나 되오?”
칠보산호 선장도 바다와 육지에서 떠다니는 장오에 대한 나쁜 소문을 이미 들어 알고 있는 눈치였다.
“제 나이가 이제 고작 마흔을 넘겼습니다. 몇 학번이라고 말씀드리기도 송구스럽네요.”
“그게 아니라… 그래도 나는 바다에서 좋은 시절을 누린 입장이라 원도 한도 없지만, 황 부장은 아직도 앞날이 창창한데 원양회사들이 하나같이 문을 닫는 판이니….”
운반선 선장 역시 여수수전을 거쳐 수산대학을 나온 베테랑이었다. 원양어선 선장으로 돈도 많이 벌었지만, 사업을 하다 실패한 후 다시 배에 오른 지 10년째라 했다. 선장은 잘 나가던 동기생들이 지금은 거의 백수 신세라며 허탈한 웃음을 던졌다.
북상하는 강풍이 계속해서 항로를 막아섰다. 쿠릴열도를 지나 북해도 인근까지 내달려야 겨우 저기압권을 벗어날 것 같았다. 파도가 갑판을 휩쓸어 물바다가 되면 그때마다 갑판장이 뛰어나와 배수구를 뚫었다. 배는 바다가 시키는 대로 연신 고개를 주억 거리다가 좌우로 몸을 흔들기를 반복했다.
장오는 이따금 선상다방으로 올라갔다. 선상다방은 브리지를 말하는데, 그곳에서는 언제나 뜨거운 커피가 준비되어 있었다.
큰 형님뻘인 1항사 역시 이번 항해를 끝으로 하선을 계획하고 있었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단을 보유했던 굴지의 회사가 이제는 겨우 서너 척의 배로 연명하는 처지가 된 때문이었다. 황금시대를 구가하던 원양어업도 이제는 서쪽 바다로 잠겨 들어가는 기운 잃은 태양과 같은 꼴이었다.
장오는 연신 곤두박질치는 물보라 속 뱃머리를 이윽이 바라보았다. 그 너머 아마득한 수평선에 산등성이가 나타났다. 일본 북해도 북단의 소야 미사키였다. 이제 저 해협만 통과하면 배는 동해로 들어설 것이다.
그때였다. 장오는 명태가 춤추며 뛰노는, 바로 며칠 전 그가 떠나온 북양의 그 바다가 다시 가슴에 뭉클하며 그리움으로 넘실거리고 있음을 느꼈다. 남해의 외딴 섬에서 태어난 그를 이제껏 키우고 또한 살아갈 수 있게 해 준 것은 다름 아닌 바다였다. 그러므로 죽을 때까지 그가 머물러야 할 곳은 어쩌면 육지가 아닌 바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이 항해가 끝나면 언제 다시 그 바다를 만날 수 있으랴.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존 메이스필드의 해수(海愁)라는 싯귀가 무지개처럼 피어올랐다.
나 다시 바다로 가련다
저 호젓한 바다와 하늘을 찾아서
내 바라는 것은 오직 높다란 돛대 하나
길 가려줄 별 하나
그리고 파도를 차는 키와 바람소리 펄럭이는 휜 돛
바다 위의 뽀얀 안개 먼동 트는 새벽뿐이네
나 다시 바다로 가련다
달리는 바닷물이 부르는 소리
거역 못할 거센 부름, 맑은 목소리 쫓아서
내 바라는 것은 흰 구름 흐르고 바람 이는 날
흩날리는 물보라 흩어지는 물거품
그리고 갈매기떼 우짖는 소리뿐이네.
註
*메일스트롬(Malestrom):노르웨이 북쪽 로프텐 제도 가까이에 있는 거친 바다. 강한 조류가 서로 부딪혀서 큰 소용돌이를 이루며 울부짖는 소리가 5키로 떨어진 먼 곳까지 들린다고 한다.
*구조라(舊助羅): 경남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리, 바다를 향해 뱀머리 모양으로 돌출한 자연부락. 뒷개는 백사장이 깔려 해수욕장으로 유명하고 앞개는 고깃배들이 집결하는 부두가 있다.
1. BMRT: Bolshoi MeroZilnyi revolvnyi trauler(Big freezing fishing trawler)의 약칭임. 러시아식 어선형태분류상 전장 100미터, 총 톤수 2,000톤 이상의 대형 트롤가공어선을 말함. 북태평양에서 명태잡이 공모선의 차선으로 활용되는 것은 총 톤수가 700톤 정도인 STR(Seiner trauler refrigerator)이나 STRM(srednyi revolovnyi trauler morozilnyi)급 어선이 활용된다.
2. SSB: Single Side Band의 약칭. 短側波帶 전송방식을 사용한 진폭변조 송수신기. 대화를 할 때 일방의 얘기가 끝나야 다른 일방이 말할 수 있다. 고로 일방이 말을 그칠 때면 ‘오우버(over)’, 마칠 때면 ‘아웃(out)’라는 신호를 반드시 보낸다.
3. 립보드: Rybod. 미국의 coast guard(해양경비대)와 같은 용어임. 극동에는 관할 해역별(마가단, 캄차카, 쁘리모리 등)로 지구대가 있다.
4. 수란(水卵): 암 명태가 산란을 끝낸 무렵의 알, 포낭에 물이 차는 단계임.
5. VHF: Very High Frequency의 약어임. 고주파 선박용 무선 전화기.
6. H&G: Headed and Gutted의 약어. 고기의 머리를 자르고 내장을 제거한 형태의 제품을 칭함.
7. 마스트: mast. 배의 支柱. 무게중심의 기준이 되기도 함.
8. 연돌(煙突): 배의 굴뚝.
9. 슬립웨이(slip way): 선미식 트롤어선에서 그물을 바다로 투하하거나 인망시 작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배의 선미를 경사지게 만든 곳을 칭함.
10. 경제척수(經濟隻數): (어)선박회사에서 고정비(간접비)와 변동비(직접비)를 고려했을 때 최대의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배의 척 수.
11. 코드앤드(cod end): 그물 끝자루. 트롤어구에서 유인된 고기가 모이는 원통형의 그물 끝부분.
12. 피.이 로프(P.E Rope): 폴리에칠렌을 소재로 뽑은 실을 여러겹 꼬아 만든 로프.
13. 데리크(derrick): 짐을 끌어올리는 起重機.
14. 수리미: Surimi. 일본식 외래어. 고기의 살을 으깨어 떡처럼 만든 제품, 연육(煉肉)이라고도 함. 주로 게맛살의 원료로 쓰임.
15. 피쉬빈: fish bin. fish pond 라고도 함. 그물로 끌어올린 고기를 가공하기 전에 임시로 쏟아 부어 두는 곳.
16. 로그북(log book): 항해일지.
김부상은 1953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다. 1978년 부산수산대학(현 부경대) 수산경영학과를 졸업하였고, 한국수산개발공사 등 원양회사 및 해운회사에서 15년간 근무하였다. 현재 (사)한국해양문학가협회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부산에서 수산물 유통업을 하고 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 국민의 해양 이해력(Ocean Literacy)은 턱없이 부족하다. 해양이 영토와 다르지 않게 인식되고 해양을 통하여 지원을 얻고 세계와 교역하는 시대에 우리의 해양 이해력을 높이는 일은 당면한 과제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올해부터 우리 부산지역에서 해양소설이 신춘문예의 한 부문을 차지하게 된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 나일 수 없다. 더구나 근대 해양문학의 성장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온 곳이 부산이 아닌가? 심사를 맡은 우리는 설레는 마음을 애써 누르면서 12편의 해양중편소설을 천천히 읽어 갔다. 작품으로서 일정 수준을 견지하고 있으나 해양소설이라 하기에는 어촌의 삶을 그리는 데 치우쳐 미흡한 작품들도 있고 특징의 해양 사건들(해양사고와 교전)을 집중 추적한 소설도 있었다. 특히 후자의 소설들은 최근 한 경향인 팩션(fac-tion)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원양 조업과 상선 항해를 다룬 작품으로 체험의 질감과 제시하는 해양 사실에 견주어 해양소설로서 손색이 없는 작품들이 오래도록 관심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들 작품이 기왕의 패션을 답습하는 한편 거의 스트레오 타입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심사위원들을 즐겁게 한 것은 무엇보다 새로운 유형의 해양소설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 투고되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와 북양을 무대로 조업과정과 이를 둘러싼 원양 산업의 현실을 월경적(越境的)인 지평으로 서술한 작품이다. 지난 연대의 해양소설들이 해양체험의 구체성에 집중하면서 달라진 세계의 전망을 놓쳤던 점을 이 작품이 훌륭하게 극복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작품도 일정 정도 흠결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건들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긴장과 이완의 강도가 크지 않고 어느 부분에서는 장황해지는 등 서술의 한계를 드러낸 대목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조차 신인다운 패기로 보아 넘길 수 있을 만큼 이 작품은 삶에 대한 열정과 경험에 대한 글쓰기의 의지를 품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무엇보다 새롭고 참신한 해양소설의 등장이라는 점과 이러한 장애를 스스로 이겨낼 서술 능력을 지녔을 것이라는 기대로 김부상의 「명태를 찾아서」를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앞으로 정진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