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소설

Nobody

알라스카김 2008. 9. 25. 22:06

대학시절의 내 별명이 마카로니 서부극의 대명사인 '후랑코 네로' 주연의 타이틀인 Nobody 였다.

집안에서 공동으로 경영하던 양조업이 부도로 하루 아침에 파산에 이르자 집안 식구들은 피난민들처럼 뿔뿔이 흩어졌고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던 나는 마땅히 할일도 없고해서 대학시험에 응시했지만 막상 합격통지서를 받고나니 등록금이나 책을 살 돈을 마련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 당시 우리는 집안의 주정공장이 있던 당리동에서 부업으로 닭을 치며 살았는데 차츰 계란을 팔아 사료값을 댈 수 없어 궁여지책으로 닭장방을 지어 전세를 놓아 생계를 꾸리는 형편이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당뇨합병증이 심해 낙향하여 주복그물질로 심신을 달래고 있었으며 그때 이미 동생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성남의 공단으로,먼 친척이 운영하던 고향의 양식장으로 품을 팔러 집을 떠나 있었다. 나도 그만 국제시장 어귀의 아무 점포라도 찾아가 점원 노릇이나 하며 장사를 배워볼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어찌 어찌하여 입학금을 먼 친척이 마련해주어 어렵사리 대학생이 될 수 있었다.

대학시절의 나의 행색은 그로테스크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옹색하였다. 예전 잘 살던 시절에 아버지가 입었던 구식 양복은 체형이 맞지않아 입을 수도 없고 해서 고민끝에 자갈치 시장에서 염색한 스몰 군복을 한벌 구입해 사철을 버텼다. 얼굴에는 늘 까실까실한 구렛나루 수염이 트레이드 마크인 양 덮혀 있었다. 대학 이 학년 때까지 나는 그런 모습으로 못골시장과 대연동 골목을 주름잡고 다녔다.

도시락이나 담배는 학우들이 골고루 나누어 부담해 주었고 술은 선배들이 모인 자리만 찾아 다니면 해결되었다. 자칭 문학도라 치부하며 대학신문에 낯설고 조잡한 잡문을 실어 고료라도 받는 날이면 그 동안 신세진 학우들을 불러 술자리를 배설했고 ,나중 고료를 훨씬 웃도는 술값은 형편이 괜챦은 친구들이 지갑을 열어 보태었다.

유신정권 시절 제목도 없이 나는 늘 우울했다. 가난이 지겨웠고 군사독재정권의 서슬이 두려웠고 나의 궁색한 꼴에 식상하여 멀리 달아난 버린 계집애들이 원망스러웠다. 종장엔 세상 모든 것들이 내겐 억울한 대상이었다. 유일한 해방구는 술이었다. 나와 더불어 풍진 세상을 억울해 하는 동지라도 얻는 날엔 그의 주머니를 털어 통음하기 일쑤였고 술이 부족하면 통행금지를 피해 여인숙으로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스며들기도 하였다.

크리쓰마스 이브 날이었던갑다. 충무동 왕자극장 앞 포장마차에서 곱뿌잔(주둥이가 긴 소줏잔)으로 석 잔 술에 취해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앉을 자리가 없어 손잡이를 잡고 섰다가 마침 에덴공원으로 밤나들이를 하러 가노라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아베크족들이 눈에 띄길래 울컥 머리가 뜨거워져 나는 그들을 향해 일갈했다.

" 이 똥강아지 같은 것들 ! 크리쓰마스가 네 할아버지 생일이라도 되냐 ? 교회도 다니지 않는 것들이 크리쓰마스 이브는 왜 찾아먹고 지랄들이야. "

모순과 부조리한 세상 일이 불만이어서 그 무렵 항상 가슴속에 비수를 품고 다니던 나는 서부극에서 후랑코 네로가 보여주었던 그 망나니같은 익살을 그런 식으로 왕왕 표출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재치있는 친구가 내게 부쳐준 별명이 Nobody 였던 것이다. 

Nobody 란 별명에 은근슬쩍 동의한 것은, 그 무렵 내가 처한 암울한 환경에 대한 반발심리로 자신을 마치 무소유주의자인 양 너절한 입성으로 즐겨 치장한데다 술에 취하기라도 하면 세상에 대한 야유와 저주의 방편으로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객기와 익살을 남발하고 다녔던 때문이다.

언론과 정치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하고 몇 몇 지사(志士)들의 목숨을 건 투쟁과 박해가 겨울 밤 양철지붕 아래서 듣는 바람소리로 지나가도 모두들 꿀먹은 벙어리 마냥 이불속에 웅크린 채 눈을 감는 시대였다.

그래도 살아있는 것은 젊은 피여서 대학가들은 연일 데모로 들끓고 단발적으로 휴교령이 내려지던 시대였다. 나도 그들처럼 데모의 대열에 끼이고 싶었다. 그것이 젊은 청년학도의 사회적 시대적 소명이라고 믿었다. 사복을 한 정보과 형사가 학내에 상주하고 박경원 내무부장관이 데모현장에서 사진에 찍힌 자는 모두 구속하겠다고 공갈을 치던 무렵이었다.

75 년 5 월 . 중간고사 시험이 임박한 어느 날, 수산경영학과 3 학년 선배로부터 바닷가 둔치로 모이라는 쪽지가 날라왔다. 부산대와 동아대를 휩쓸고 간 물결이 드디어 대연동 고개를 타고 넘어왔던 것이다. 당시 학장은 예비역 해군장성이었는데다가 어로과,기관과는 해군 ROTC 를 받았고 전교생 수가 1,000 명 남짓인 학교였는지라 남부서(南部署) 형사도 출근부 도장만 찍었지 설마했으리라.

바닷가 둔치의 잔디밭으로 뛰어가던 순간 나는 가슴이 쿵딱거리는 희열과 스릴을 만끽했다. 점령지로 내닫는 해방군의 심정이 그랬으리라. 피아(彼我)가 분명한 전장에는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는다. 승리가 아니면 오직 죽음 뿐인 것이다.

잔디밭에는 식품공학과와 증식학과 경영학과 위주의 신입생들과 우리 또래인 2 학년 학생들이 뒤섞여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언제 소문을 들었는지 사복형사가 뒷짐을 진 채 지켜 서 있고 학생처장 교수도 눈에 어른거렸다. 십 분 정도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정작 우리를 소집한 장수가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체되자 몇 몇 학생들은 다시 교실로 들어가려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 때 누군가가 3 학년 주동학생은 그를 아끼는 지도교수에게 손목을 잡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얘기를 하였다. 그러자 모두들 웅성거리며 해산할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면 안되는데... 중간고사 시험공부도 안해 놨는데...젠장,주동이 아니면 참모라도 나서야 하는것 아니냐. 일이 이렇게 싱겁게 끝나는 것이 싫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흩어져 가는 학우들을 불러 세웠다.

" 여러분! 여기 나온 이유가 뭡니까? 우리가 부대나 동대 학생들보다 생각이 모자랍니까 아니면 용기가 없는겁니까? 여러분들이나 나나 함 외쳐보기라도 하자 하고
모인 것 아닙니까? 칼을 뺏으면 함 휘둘러라도 보자 이겁니다. "

아- 그 순간 나는 바로 녹두장군이었고,또는 운봉길 의사(義士)였다.

전쟁터에서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드리는 이유를 알만했다. 인간의 의식에 내재하는 투쟁심을 유발시키는 명분은 격문이나 도도한 연설에서 비롯되지만 일단 싸움터에 나온 장정들의 피를 끓게하는 것은 단연 취타악기인 것이다. 여기저기서 호응하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때 머리 뒤에서 카메라 셔트를 눌리는 소리가 찰칵하고 들렸다. 그러나 이미 고조된 나의 기운은 뒤를 돌아다 볼 여가가 없었다.

" 에- 먼저 구호를 정합시다. 그리고 교문을 나서 가두시위를 하게되면 어디로,언제까지 할 것인지 생각해봅시다. 우리의 행동이 무엇을 위함인지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인지 시민들에게 알리는 호소문이나 플랜카드같은 것은 준비가 안돼 있으니 할 수 없겠고..."

학생회에서 주관하는 것도 아니고,그 당시 운동권 따위의 조직적인 사주가 존재한 것도 아니어서 이런 즉흥적인 단체행동이 어느 산(山)까지 번질 불길일지 막연한 걱정이 찾아왔다. 식공과 2학년 대의원이라는 키큰 학우가 앞으로 나와 구호를 정하는 일을 도왔다. 대충 구호가 정해지자 나는 150 여 명의 학우들을 4 열 종대로 세우고 교문을 향해 진군명령을 내렸다. 식공과 반장과 나는 자연 선두에 서서 대장노릇을 하게된 것이다.

1 호관 건물을 빠져나와 교문으르 향해 돌진하는데, 아뿔싸! 철제교문은 굳게 빗장이 걸려 닫혀있고 문밖에는 벌써 완전군장한 전경들이 겹겹이 도열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2.



교문 앞에 당도하자 우리는 전경들과 서로 으르릉거리는 사자들처럼 먼저 기 싸움에 들어갔다.

" 언론탄압 중단하라! 유신헌법 철폐하라! 박정희는 물러가라! "

민주공화당이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해 개헌통과선인 122 명을 확보하기 위해 야당(신민당)의원 3 명을 포섭하여 국회별관에서 날치기 통과시킨 삼선개헌이 1969 년 10월이었고, 제 7 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야당후보에게 50 만 표차로 간신히 당선된 후, 베트남의 공산화를 핑계삼아 종신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통과시킨것이 1972 년 10월이었다.

억눌린 국민의 참정권은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지 국회라는 제도는 살려두었으되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한 전국구의원인 유정회를 국회에 밀어 넣었고,야당은 이미 정치자금에 코가 끼어 집권당의 거수기로 전락해버린 시절이었다.

국민의 눈과 귀인 신문마저 보도검열에 막혀 지리멸렬하였는데 , '75 년도 초에는 제일 강성 반골인 동아일보를 매장시키기 위해 광고탄압이 자행되었다. 또한 유명 지식인과 반체제 인사들에게는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정보원들에의해 아침부터 밤까지 사찰당하는 무형의 감옥이었다. 마치 Big brother(大兄)가 등장하는 조지 오웰의 '1984 년'이 현실화되는 느낌이었다.

밟을수록 강해지는 것이 잡초라 했던가. 김수영( 金洙暎. 1968 년 작고,암울한 시대상황을 칼빛언어로 비판한 참여시인 ) 시인의 시 "풀" 이 그 시절 내겐 유일한 위안이었다.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발목까지/발밑까지도 눕는다
바람보다도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성급한 학우들이 대문을 부수고 나가자고 외쳐 대고 있었다. 흥분한 군중심리를 적절히 통제하고 조절하지 않으면 장수로서 자격이 없다. 나는 구호가 끊어지지않게 팔을 휘저으면서 교문에서 동편으로 백미터 상거한 소나무 동산을 주목했다. 동산에 잇대어 담벼락이 쳐져 있었으므로 동산위에선 담을 짚고 용호동으로 이어지는 차도로 쉽게 뛰어 내릴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 동산 쪽으로 넘어 가자! "

무리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우루루 동산 쪽으로 내달았다. 그러자 전경들도 우리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잽싸게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순간 나는 우리가 담을 뛰어 넘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누군가가 담을 뛰어 넘는다 하더라도 저들의 타격방망이에 머리가 터질 것이고 설사 육박전이 벌어진다해도 물리적으로 우리가 불리한 것은 자명하였다. 차도로 뛰어내려서 다시 대오가 형성되리라는 것은 절대 장담할 수 없다. 뛰어 넘는다면 내가 먼저 결행해야지만... 내가 옥쇄를 당하면 이 행사는 그것으로 끝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일동- 투석! "

담벼락 밑에 새까많게 깔린 전경들을 향해 돌멩이들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곧이어 매케한 최루탄이 동산을 휘감았다. 최루탄에 시야가 불투명한 채로 약 오분 간 투석전이 진행되었다. 눈을 뜰수도 숨을 쉴수도 없게되자 나는 일단 후퇴명령을 내렸다. 동산을 내려와 대오를 정렬한 후 나는 일행을 이끌고 3호관 이 있는 북편 담벼락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에도 담벼락 밑에서 전경들이 곤봉을 꼬나쥐고 어디 내려오기만 해봐라며 임전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이동선을 그들은 손바닥 꿰듯 읽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넘어야할 담벼락의 높이는 무려 2 미터가 넘었다.

" 다시 교문 앞으로! "

교문 앞에서 다시 전경과 대치하여 구호를 외치면서 나는 다음 작전을 궁리했다. 그러나 전략이 나올 수 없었다. 목이 말랐지만 물을 떠다 나르는 여학생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시간을 버텼을까,학생회 회장이 무리 앞에 나타났다. 나는 학교측에서 마무리수로 그를 끌어낸 것이라고 짐작했다.

" 여러분! 학우들의 충정은 저도 동감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대책없는 시위만 할께 아니라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강구합시다. 제 말에 동조하시면 지금 바로 대강당으로 모여 주세요. "

교수와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한 채 대강당에서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결론은 시국선언문 작성과 시내 모처에서 모일 모시에 만나 궐기하자는 게릴라식 시위방법이 채택되었고 이를 학생회가 주체가 되어 내일이라도 행동개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보과 형사들이 그리 순진했을까?

오후 내도록 나는 미술부 교실에서 낙서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해가 어스름해서 교문을 나섰는데 그 때 벌써 휴교를 알리는 대자보가 교문 앞에 나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집에 이르러 골목입구에서 두 명의 남부서 형사들에게 나는 양팔을 붙들려 짐짝처럼 짚차에 실려졌다. 

교문 앞에서 연행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할 정도로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어서 짚차에 올라 타고서도 나는 태연했다. 그들이 우리 집에 들러 나오던 길에 나와 마주쳤으므로 나의 귀가를 기다리던 어머니는 뭔가 불길한 낌새를 느꼈을 터이지만 하룻밤도 아니고 며칠이 될지 모를 구금이라면 그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어찌할꼬..그 것이 젤 큰 걱정이었다.

형사들은 나를 학교로 데려간다고 했다. 학장이 간곡히 부탁하여 훈계방면하기로 했으니 학교에 가서 반성문을 작성해야 한다고 했다. 지나가는 소도 웃을 얘기였다.
대연동 고개를 넘으면 학교로 들어서는 용호동입구 정거장 다음이 남부 경찰서고 또 그 맞은편에 일명 삼일공사라는 정보부 건물이 있었다. 그들이 정보부 요원이 아닌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경찰서에서의 수모는 상상외로 경미했다. 담당형사는 머리를 다친 전경들의 사진과,돌을 쥐고 와인드 업을 하고 있는 나의 사진을 동시에 보여주며 고생깨나 하게 생겼다고 엄포를 놓았다. 또 열손가락을 펴서 지문을 찍고 정면과 측면으로 세워 사진을 찍는 등 범죄자 취급을 하는 것은 영화에서 많이 보아 의례적인 일로 받아 들였다.

그들이 찍은 시위현장의 사진이 수 십 장이었는데 대부분 내가 표적이 되어있었다.그 사진들을 곁눈으로 흘끔거리면서 내 얼굴이 사진발을 참 잘 받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형사에게 말했다.

" 형사님 ,그 사진 몇 장 기념으로 제가 가지면 안될까요? "

잔뜩 주눅이 들어 얼굴에 피색을 잃고 있던 식공과 대표가 그제서야 허리를 일으키며 쿡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금방 요절을 낼듯이 우리들을 몰아세우던 형사들은 밤 열 시 쯤 잠시 사무실을 나갔다 오더니 우리들을 잡범들이 득실거리는 유치장에 가두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오후 학생과 직원의 인도하에 우리는 무사히 풀려났다. 학내시위로 그쳐 경찰서의 체면이 선데다가 우발적인 시위였고 또 해산과정에서 학교측이 경찰에 적극 협조한 것이 참작된 것이었다.

반성문 겸 각서를 쓰라기에 형사들과 몇 번 실랑이가 오고 갔지만, 창자의 끝에 붙은 혈기까지 죄 긁어내어 외쳤던 그 시위가 한갓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 쯤으로 치부된 바에야, 까짓 철없는 아이가 된들 한탄스러울게 뭐냐 싶었다.

일 주일간의 휴교가 끝나고 학교는 다시 문을 열었지만 내가 마음 붙이고 정주할 안식처는 어디에고 없었다. 간조 때면 바다새들이 모이는 둔치에 나가 열린 바다를 보며 우울한 마음을 달래보려 하였지만 늘 가슴으론 황량한 바람을 느껴야만 했다. 무력감.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을 때부터 나를 괴롭힌 것은 이 세상을 구제하기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 때 동산에서 차도를 향해 몸을 던지지 못한 것이 내내 후회스러웠다. 때가 아니면 물러나 때가 이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선현의 지혜를 미처 깨닫지 못한 나이에 나는 오직 나의 용기 없음을 부끄러워 했다. 군사독재정권의 총칼이 두려워 웅크리며 그 지난한 세월을 침묵하던 식자나 정치인들을 나는 증오했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이 오로지 교과서 속에서만 유효한 진리라면 우리가 배우고 깨우친다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다는 말일까. 정의. 민주. 자유. 호국선열. 행동하지 않는 양심. 이런 단어들이 머리를 맴돌았고,다시는 그런 비겁한 경우로 자책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혁명은 창조가 아니야. 정반합(正反合)의 물리적인 현상이야. 근대 이후의 독재정권은 교묘하게도 당근으로 채찍을 견뎌낼 출구를 마련했어. 당근은 억눌리는 힘의 압력을 둔화시키고 분산시키기 때문이야. 그리하여 또 다른 혁명은 특별한 희생을 요구하느라 시간을 소모하며 더디게 오지. 특별한 희생은 한 세대를 망치기도하고 그들의 삶의 형태를 변모시키기도 해. 목숨을 버려서라도 지켜야할 이념들을 내팽겨치게 하는가 하면 소심한 사람들에겐 편하게 사는 것만이 최고의 선이라 믿게하지. 사람과 사람간을 이간시키고 분열시키고 변절시키기도 해. 로마시대에 벌써 이상적인 공화정이 생겼건만 정치란, 정치의 발전이란 도대체 기대할 것이 못돼.

그즈음 나는 남포동의 막걸리 집을 전전하며 디오게네스와 같은 철학자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자신을 물리적인 투사의 길로 내몰아 갔다.

3.

물리적 투사의 길이란 거창한 용어를 구사했지만 실은 길거리 망나니 꼴이 맞을 것이다. 내가 자주 애용하는 막걸리 집은 구 시청앞 남포동 입구에 있는 빈대떡 집이었다. 그 집은 일층과 지하를 함께 쓰고 있었는데 지하에서 술판을 벌리고 있으면 마치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진듯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싸구려 선술집이었는지라 막노동판 사람들이나 공장에 다니는 젊은이들이나 주머니가 가벼운 어깨들의 단골집이기도 하였다. 이런 부류의 손님들은 대개 예닐곱 명 쯤 되는 단체손님들이어서 그들은 술이 거나해지면 질서없이 마음대로 떠들고 또 젖가락으로 술판을 두들기며 목포의 눈물이나 두만강 푸른물이나 돌아가는 삼각지 등을 목청 높혀 불러제끼는 것이 다반사였다.

어느 날 하루,나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옛 친구를 길거리에서 만나 예의 술집 지하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그만 두고 회사 점원 노릇을 하며 가계를 도우고 있었는데 차마 학업의 꿈을 접을 수 없어 그 즈음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막걸리를 세 주전자 째 비우고 있었는데 웬 젊은 무리들이 지하로내려왔다. 그들은 자리에 앉자말자 저들끼리 비속한 육두문자를 주고 받으며 천장이 떠나가도록 떠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고함소리에 우리의 대화는 자주 끊어졌다. 그러자 키가 꽤 큰 편인 그 친구가 그들을 일별하더니 못참겠다는듯이 한마디 던졌다.

" 어-이, 너거만 손님이가. 좀 조용히 못해? "

그 소리에 그들이 입을 닫고 모두 다 우리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개 우리 또래로 보였고 그 중 좌장인듯한 사람은 나이가 우리보다 대 여섯 살은 더 들어 보였는데 그가 친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우리 자리로 성큼 걸어 왔다. 친구 옆으로 다가 선 그가 느닷없이 오른 팔을 번쩍 치켜 들었다. 순간 그의 손에서 소주 병이 불빛에 파랗게 반사되었다. 다음 순간 퍽 하고 소주 병이 친구의 머리위에서 깨어져 흩어졌고 친구의 머리에서 선홍색의 피가 솟아 올라 귓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나는 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친구의 머리와 그 무법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망연자실 하였다. 곧 정신을 차린 나는 급히 머리를 굴렸다. 내가 술잔이든 다른 물건으로 그에게 반격을 한다면 나도 친구의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 친구는 친구대로 빨리 지혈을 해야만 했다. 나는 마침 술을 나르려고 내려와 있던 아줌마에게 파출소에 알리고 친구를 가까운 약국에라도 좀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 후 무법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 당신, 나하고 밖에 나가서 한 판 붙자. 비겁하게 무기같은 것은 쓰지 말고."

무법자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하더니 계단을 걸어 오르는 나를 따라 나섰다. 시간이 저녁 여덟 시 쯤 되어 밖은 벌써 어두었다. 행인들의 왕래가 많은 거리에는 싸울 공간이 없다고 생각한 나는 용두산 공원의 4.19 의거탑을 머리에 떠올렸다.

뚜벅뚜벅 광복동 길로 접어드는 나의 등에다 대고 그가 소리쳤다.

" 임마 어디로 가노? 가까운데도 쌔-애 삣는데."

" 따라와 임마. 사람들 안 보는 데로 가는기야. "

그의 폭력에 친구가 머리를 다친 것은 분한 일이다. 그가 깡패인지 노가다 십장인지
는 몰라도 무식하고 완악한 작자임에는 틀림없고, 또 내보다 힘이 센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릎을 꿇고 빌 수는 없다. 친구를 부축하고 내가 패잔병처럼
술집을 나온다면 그 수치를 나중에 어찌 감당할 것인가. 다시는 비겁함에 치를 떨지 않기로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술집에서 싸움을 건다는 것은 경제성이 떨어진다. 져도 이겨도 부끄럽지 않으려면 일대 일 결투가 최선이다. 또 구경꾼이 없으면
설사 코피가 터지고 이빨이 흔들리는 타격을 입고 패한다 하라도 부끄러움은 면할 수 있는게야. 또 행여 결투장까지 가는 도중에 이 작자가 마음이 바뀌어 화해를 청하다면 다친 친구에게 사과를 담보로 용서해 주는거지 뭐.

용두산 공원을 오르는 계단을 밟으며 나는 이렇게 전의를 가다듬었다. 4.19 의거탑에는 조명이 없어 어두웠다. 바닥은 잘게 썬 돌이 깔려있어 움직임에 조금 지장이 있을듯 싶었다. 그와 대치하기 전에 먼저 나는 상의와 안경을 벗어 한 쪽에 치워 두었다. 걸어 오는 동안 술이 조금 깬듯 했지만 어두운 곳에서 안경까지 벗은지라 거리를 포착하는 것과 그의 움직임을 읽는 것이 용이하지 않을 것같아 다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우뚝 선 채 나의 준비를 기다리고 있지 않는가. 그의 눈빛을 읽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싸움을 한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까지 이르러 이 싸움을 물릴 수는 없는 것. 나는 태권도의 대련자세를 취하며 선제공격을 위해 그에게로 몸을 날렸다. 

 

앞발차기와 오른발 돌려차기를 시도했으나 상대는 발이 닿지않는 거리에서 가볍게 응수의 스텝을 밟고 있었다. 다시 상체를 들이밀며 원투 스트레이트를 날렸으나 허탕이었다. 그의 허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그레코로망식의 힘겨루기는 역부족이라 판단되어 잠시 거리를 유지하며 물러섰다가 다시 발차기를 시도했다. 그가 뒤로 몸을 빼길래 또 한번 돌려차기가 들어갔는데 발이 지면에 닿는 순간 ,그의 상반신이 내게로 쏠리는가 싶더니 코가 으깨지는 충격이 왔다. 연이어 복부의 급소로 어퍼컷이 들어왔는데 그 순간 나는 그만 땅으로 주저앉으며 쓰러졌다. 그의 발이 내 머리를 밟을 차례라고 생각했으나 숨이 막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코에서 뜨거운 피가 흘러내려 입술을 적셨다. 아- 이대로 깨지고 마는가 싶었다. 그런데 그가 쓰러진 나를 위에서 내려다 보며 이렇게 말했다.

" 짜-아식, 폼만 좋았지 별것 아이네. 일어나서 안경끼고 다시 덤벼봐."

저 놈은 어깨야. 서두르는 법도 없고 자세가 너무 침착해. 그래도 쓰러진 나를 짓밟지 않는걸 보니 괜찮은 놈이야. 거리 측정이 안되는데다가 상대의 움직임을 제대로 읽을 수 없으니 이 싸움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나는 몸을 추슬려 일어서며 그에게 말했다.

" 형씨,내가 졌소. 내려 갑시다. "

친구는 약국에서 간단한 치료를 한뒤 붕대를 감고 집에 갔다고 했다. 어깨의 무리들도 사라진 뒤였다. 친구의 일을 사과하며 어깨가 내게 술잔을 건넸다.

" 나- 남포동 제일극장 앞에서 놀아. 술먹고 싶을 때나 누가 괴롭히는 일이 있으면 찾아와. 극장 앞에서 땅개를 찾으면 돼."

그는 칠성파 소속의 꼬마두목 쯤 되어 보였다. 그를 의형으로 삼은 탓인지 나의 겁없는 결투는 그 후에도 계속 되었다. 남포동 빈대떡 집에만 가면 십중팔구 싸울 일이 생겼다. 대부분 망나니같은 주객들의 무례함을 응징하기 위해서였지만,어떤 경우는 내가 먼저 술기운에 시비를 자초하기도 하였다. 4.19 의거탑에서의 결투전적은 8 전 7 패 1 무승부였다. 술이 취하면 고스톱조차도 안되는데 몸을 놀리는 싸움이 제대로 될리가 있었겠는가. 입술이 터지거나 눈에 피멍이 들거나 코피를 흘려 핏자욱이 난 옷을 벗어놓는 아들을 어머니는 언제나 연민과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릴 때부터 형제들과 달리 유별난 짓을 밥먹듯이 해온 아들이었기에 나의 그런 기행을 어머니는 인내하며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셨다. 1 무승부라는 것은 용두산 계단을 오르는 내 모습에 기가 질린 어느 심약한 위인이 싸우면 뭐하노 내려가서 술이나 한 잔 더하자고 청해서 그리 된 것이다.

세상-유신독재-돌아가는 꼴이 하도 부아가 터져, 나의 가난한 형편이 지겨워서 , 또는 늘 허전한 마음에 끊임없이 찾아드는 여자에 대한 열망으로 치마만 걸쳤다 하면 여자의 뒤 꽁무니를 �던 내 꼬락서니가 불쌍해서 그렇게 자진하여 나를 망나니같은 싸움꾼으로 만들어 갔던 것이다. 그런 Nobody 의 우스꽝스런 행진에 찬물을 끼얹는,그래서 정신이 번쩍들게 한 사건이 일어난 것은 대학 3 학년이던 '76 년 6 월이었다.


4.
하사관학교 인사과에 근무하던 변 세현(卞世鉉)이가 휴가를 나왔다. 우리가 몰려간 집은 자갈치 건어물 시장 끝에 있는 할매복국집이었다. 세현이는 청천문학회 동기로 절친했는데 키는 작았으나 눈빛이 아주 형형하여 야무진 느낌을 주는 친구였다. 부대 역사학과를 다니다 군에 갔는데 벌써 상병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의 휴가를 반기느라 지금은 부산시 교육청 장학사로 있는 신 종국(申鐘國)과 부산외대 불문학과 교수인 최 춘식(崔春植), 그리고 지금은 죽고 없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부대(釜大) 미술과에 다니던 세현이랑 전원(田園)문학회 동인이었던- 친구가 모였다.

막걸리를 얼마나 마셨는지 겁이 없어진 우리는 할매집에서 나와 자갈치 골목을 걸어 가면서 뭔가 큰 일을 벌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맘같아선 완월동으로 직행하고 싶었으나 학교하고 집만 아는 종국이가 있어 니나노집 같은데서 술을 더 먹자 하고 내가 앞장서며 , 우리는 영진장 호텔 쪽으로 발길을 꺽어 남포동 큰 길로 나가기 전 충무동 방향으로 꺽어지는 좁은 골목길로 접어 들었다.

선원들을 상대로 바가지를 쒸우는 색시집이 즐비한 골목을 들어선 것이 불행의 단초였다. 

골목길에는 어깨를 드러낸 얇은 원피스 차림의 아가씨들이 술집 앞에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어떤 식의 술집인지 몰라 안을 기웃거리며 세 번 째 술집 앞을 지나치는데 아가씨들이 덥썩 우리들을 붙들고 늘어졌다. 술집의 외관이라는 것이 옛날 적산가옥들인 목조건물인데다가 휘황찬란한 간판이 걸린 것도 아니어서 아가씨들 술추렴비만 조금 더 들겠거니 생각했다.

아가씨들을 앉혀놓고 술을 먹는 것은 또 처음이었기에 호기심과 야릇한 흥분마저 일어났다. 군복을 입은 세현이는 그래도 군대 근처 니나노집 경험이 있으리라 믿었지만 다른 친구들은 쑥맥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내가 앞장을 서니 무심코 따라들 왔다.

좁고 가파른 나무층계를 열 계단 쯤 올라 가니 다다미가 깔린 방이 나왔다. 술상은 소주에다가 깍은 과일과 구운 생선접시가 놓여진 조촐한 차림이어서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술값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막걸리 집에서 세현이를 위해 각자 조금 씩 술값을 추렴해 내었고 내 딴으론 이차 술값은 세현이가 내겠거니 짐작했다.
인사과에서 병들의 휴가계나 외박증을 끊어주는 보직을 맡고 있어 본의 아니게 돈 봉투를 받는 일이 자주 생기고 그래서 이번 휴가 나올 때도 술값 정도는 넉넉하게 갖고 나왔노라 자랑삼아 얘기했던 것이다.

아가씨 두 명이 우리들 사이로 끼어 앉았다. 막걸리를 잔뜩 마신 뒤라 소주가 들어가니 얼굴에서 불이 나는듯 했다. 주량도 주량이지만 술 욕심이 과한 내가 젤 취했고 다음으로 부대 다니던 친구와 춘식이가 취한듯 했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가고 혀가 꼬여 이야기가 힘들게 되자 우리는 젓가락으로 술판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가 메들리로 이어졌고 아가씨들은 노래 중간 중간 우리들 입으로 술잔을 들이 밀었다. 그 사이 안주접시가 열 개나 비워져 나갔다. 가만히 보니 아가씨들이 노래는 부르지 않고 연신 안주만 입에 쑤셔 박는 것이었다.

" 이봐,아가씨 안주만 죽이지 말고 노래를 불러야지. "

처음엔 그렇게 젊잖게 나무랬다. 아가씨들이 미안한지 동백아가씨와 처녀 뱃사공을 한 곡 씩 돌아가며 불렀고 나는 그 사이 이 층 방문앞에 놓여진 커다란 플라스틱 물통에 오줌을 누러 나왔다. 그런데 나무계단에 안주 그릇이 층층히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과일이면 열 쪽,굴이면 다섯 개 그런식으로 나실나실하게 담은 안주 그릇들을 보자 나는 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 어이 너거 안주 한 접시에 돈이 얼마고? "

방으로 들어와 앉자말자 나는 아가씨에게 대뜸 그렇게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에 나는 경악했다. 안 주 한 접에 이-삼 천원이라고 했다. 담배 한 갑이 백원하던 시절이었다. 대학 근처의 한달 하숙비가 이 만원이 채 안되었고 내가 다니던 국립대학 한 학기 등록금이 십 이 만원이었다. 하룻 밤 여관비가 천 오백원 이었고 여관에서 부르는 아가씨 몸값이 또 그 정도였다.

" 이거 완전 도둑놈 소굴이네. 안주 값이 그리 비싸면서 너거는 이 때까지 너거 맘대로 안주를 넣었다 ? 에라이 똥물에 빠져 죽을 년들! "

나는 술상의 접시들을 집어 방을 나눈 칸막이로 된 창호지 문을 향해 던졌다. 내가 그렇게 야단법썩을 떨자 부대(釜大) 다니던 친구도 접시 를 집어 던지며 가세했다. 접시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어지자 아가씨들이 황급히 아래 층으로 달아났다. 나는 분을 참지 못한 채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할 지 몰라 가쁜 숨만 몰아 쉬었다. 친구들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들 얼굴만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파출소 순경을 부른다? 학생 신분이라면 동정을 살 수는 있겠지만 술값을 가지고 그들이 면책을 해주리라는 것은 기대 난망이었다. 그렇다고 그 당시 우리 주제에 누가 만 원 이상을 품에 넣고 다닌다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층계가 쿵쾅거리더니 건장한 사내 두 명이 방으로 들어섰다.

" 요노-무 새끼들! 너거가 안주 그릇을 깨고 그랬나? "

삼 십 대 초반의 덩치가 우람한 어깨들이었다. 친구들은 난데없는 그들의 등장에 놀라 몸을 움츠렸다. 그들은 군복을 입은 세현이를 보자 대뜸 세현이의 어깨를 붙들더니 군인은 집에 가라 했다. 야무진 독설가지만 순진하여 깡다구는 없는 세현이가 모자를 둘러 쓰더니 뒤도 안돌아 보고 층계를 걸어 내려갔다. 아- 그 때 나는 절망했다. 군인과 더불어 용력을 다한다면 어깨들을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설사 그들을 힘으로 물리칠 수 없다손 치더라도 군인이 있으므로 험한 꼴은 면할 수 있다고 생각 되었던 것이다. 세현이가 사라지자 어깨들은 우리들에게 모두 옷을 벗으라고 했다. 종국이와 춘식이가 주춤주춤 상의와 바지를 벗기 시작했고 부대 친구도 내 눈치를 보다가 마지못해 옷을 벗기 시작했다.

" 이 쌔끼, 너는 왜 안벗어? "

" 씨-펄, 내 손으론 죽어도 못벗는다. 벗길려면 니가 벗겨라."

깡다구 빼면 시체였다고나 할까. 나는 십자가에 매달리는 예수님을 떠올렸다. 하느님이 정해 놓은 피할 수 없는 형극을...그리고 정작 두려운 것은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우리의 마음이다라는 경구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밤 난생 처음으로 나는 직싸게 깨어졌다. 

어깨들이 물러간 시각은 얼추 새벽 2 시 쯤 되었으리라. 그들이 난입한 시각이 밤 열 한 시 쯤이었으므로 그들에 의해 억지로 상의가 벗겨진 채로 내가 얻어맞은 시간은 두 시간 반 정도로 기억된다.

" 내 행님이 남부서 형사다. 너거 내 몸에 손만 대라. 그라몬 술값이고 뭐고 낼 아침에 경찰서로 바로 갈끼다."

역부족인지라 내가 그렇게 겁을 주었는데도 어깨들은 경찰이라면 저희들끼리 따로 내통하는 선이 있는지 막무가내로 내 가슴과 등을 난타하기 시작했다.

" 좀만한 새끼! 술을 먹었으면 술값이나 주고 고이 갈 일이지 접시를 깨고 난동은 왜 부려? 니 형님이 누군지 몰라도 기물 파손죄는 우짤래? "

얼굴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은 저들대로 계산이 있어 그러려니 했다. 두 명이 나의 앞뒤로 앉아 박자를 �춰가며 타격을 가하는데 술이 취해 그런지 아픔은 견딜만 했다.

" 이 새끼들,이란다꼬 내가 너거한테 살려달라고 빌 줄 아나. 차라리 죽여라 이 놈들아. "

그렇게 악을 쓰면 내 악다구니에 어깨들은 저들대로 약이 올라 주먹질을 하고 ,그렇게 두 시간 넘게 시간이 흘렀던 갑다. 그런 광경을 두 눈 멀쩡히 뜨고 속수무책 바라만 보았을 친구들의 심정이 어떠했으랴. 드디어 어깨들이 지쳤는지 손을 거두고 아랫 층을 향해 술상을 주문했다. 술상과 함께 아가씨들이 들고온 술값 계산서가 무려 오 만원에 달했다.

" 야- 니 진짜 꼴통이네 , 임마 형편이 안되면 이런데 오지 말아야지. 그건 그렇고 맞는다고 수고했다. 자- 술이나 한 잔해라. 그라고...낼 아침에 술값 갚고 ,으-잉? "

병주고 약준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던가. 나는 그제서야 몸이 허물어지며 잠이 쏟아짐을 느꼈다. 이 나이 되도록 자라면서 부모한테 맞은 것이 뺨 한 대인지 두 대인지 기억이 없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졌다. 과연 나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단 말인가. 술 한 잔을 입에 쏟아 부었지만 갑자기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 이 씨발 놈들아, 술이고 지랄이고 빨리 꺼져라. 이 쥐쌔끼 같은 놈들아. "

콧물 눈물 범벅이 되어 나는 절규했다. 어깨들은 그런 내 꼴이 민망한지 서둘러 사라졌고 친구들과 나는 곧 떨어진 자처럼 쓰러져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으나 나는 쉬이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매 앞에 장사 없다더니만 단단히 골병이 든 상 싶었다. 춘식이를 시켜 공중전화로 남부서로 정보과 박형사를 몇 차례 찾았으나 연결이 되지 앉았다. 일 년 전 데모건으로 알았고 우리를 풀어 주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연락하라고 했던 사람이다. 오전 중 그의 도움을 얻을 수 없다면 나의 계획은 무위였다. 그러니 정작 오 만원 을 구하는 일이 걱정이었다. 다들 빨리 이 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간절한지라 무릎에 턱을 괴고 고민을 하는데 ,부대(釜大) 친구가 일어서더니 잠시 다녀오겠다며 길을 떠났고 , 오전 열 한 시 경에서야 그가 마련해온 돈으로 마침내 우리는 햇볕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왕자극장 쪽으로 거슬러 올라, 남은 돈으로 국밥집에서 허기를 때우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집이 동대신동인 춘식이와 왕자극장 육교 밑으로 걸어 나오다가 도저히 이런 기분으론 백주(白晝)에 집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생각되어 나는 춘식이를 불러 세웠다.

" 야- 춘식아, 니 그 시계 좀 풀어다오. 내가 알바이트 월급타면 찾아줄께. "

춘식이는 내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묻지 않았다. 밤새도록 어깨들한테 얻어터지면서도 얼굴을 곧추 세웠던 나의 장렬함에 감동했는지 순순히 시계를 풀어 주었다. 나는 춘식이를 집에 가라하고 등을 돌려 가까운 전당포로 향했고 일금 삼 천원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왕자극장 뒷골목 여인숙으로 슬그머니 스며 들었다.

5.


나는 무력하고 나약하다. 내가 허공을 향해 손을 내젓는 이유는 오직 스스로에게 던지는 살아 있다는 신호일 뿐이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해도 세상은 끄덕없이 제 갈 길로 갈 것이고 나는 조금 씩 지쳐 결국에는 쇠퇴하고 말 것이다. 나는 죽어서 이름 석 자도 남기지 못할 잡초인 것이다. 나는 무용하며 고독하다. 광야의 울부짖는 이리 떼보다 더 무용하며 더 고독하다. 힘이 없어 아무에게도 이길 수 없고 ,그러므로 반성하지 않는 역사에 대해 ,그래서 또 다시 짓밟히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용서를 빌게할 능력도 없다. 이 굴욕감을 씻어 버리는 것은 내 안의 나를 말끔히 잊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오늘로서 죽었다.

형광등 불빛으로 발가벗은 젊은 아가씨의 몸은 우유빛으로 반사되었다. 어물전 백열등 아래서 반짝이던 물고기의 비늘처럼 허리밑으로 둥글게 휘어지는 엉덩이는 눈부셨다. 다만 그녀의 눈빛이 초점없는 물고기의 눈인 것만 빼면 그녀는 고기보다 훨씬 더 싱싱했다. 나는 간밤의 굴욕감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그녀를 무례하게 덮쳤다. 계엄령을 선포한 군인들이 대학교와 국회를 점령하듯 그녀의 자존심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천 오백원의 양심을 ,그 살덩이를 짓밟으며 비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백옥같은 허벅지는 나의 만용을 너그럽게 껴안았다.

여자의 몸이 내게 말했다. 세상은 결코 달콤한 캔디가 아니야. 험난한 바다와 형극의 골짜기를 지나 가야해. 나를 봐. 난 행복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불행하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래서 함부로 울지 않아. 산다는 것이 늘 비장하고 항상 고결해야 한다면 힘들어서 어떻게 살겠니? 시간에 맡겨. 세월이 지나고 나면 그래도 살아 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거야.

눈물겹게도 그녀의 깊고 깊은 질곡은 나의 비겁하고 때에 절은 창(槍)을 부드럽게 받아 들였다. 밤새 어깨에게 맞아 골병이 든 육신이었음에도 나의 창은 천 오백원 이상의 댓가를 받아내려고 분기탱천,기고만장하였다.

나의 이러한 만행조차 용납하는 아- 무심한 역사여. 침묵하는 시간이여.

내가 스스로 Nobody의 낡은 도포를 벗어 던지는 의식의 마무리는 충무동에서 사하구청이 있는 당리동까지의 도보(道步)행진이었다. 청천(靑天)의 눈부신 태양이 부끄러웠으나 나의 환골탈태의 결의 앞에 육신의 고행은 단지 고통 그 자체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도보순례의 시간에 내가 터득한 것은 구멍에 대한 진리였다. 즉 여자는 하나같이 다 똑같다는 것이었다. 아름다움과 인간의 영혼을 진작시키는 그 무엇인 매력(魅力)의 끝이 삽입과 연속적인 피스톤 운동에 의한 말초신경의 작렬하는 쾌감이라면 결국 남여관계의 본질은 동물적인 욕망외엔 달리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는 영원한 것에 대한 열망은 사치와 허영일 뿐이라고 믿었다.- 독자들이여! 이 대목은 가난한 대학생의 자기 합리화에 불과한 궤변으로 이해하시라.

Nobody 임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은 내가 초인(超人)에 대한 희망을 단념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또 하나. 문학청년의 흉내는 정녕 그만 두기로 마음먹었다. 스스로 "로맨티스트여 , 이젠 안-녕!" 하며 절필을 선언했다. 대학신문 편집장이었던 친구가 나만 보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 나는 나의 재주없음을 고백하고 그 동안 신문에 발표했던 나의 엉터리 작문들을 폐기해 달라고 애원했다.

나는 허공에 떠있는 나의 두 다리를 이젠 땅에 근착(根着)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너절한 나의 삶을 보다 현실적으로 개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실천적 방안의 하나로 결혼을 머리에 떠 올렸다. 졸업할 때까지 일년 반 동안 취업공부에 몰두하려면 내 천성인 여자에 대한 열망을 잠 재울 그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황당한 생각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은 순전히 교회에 나가 열심히 기도한 덕분이라 믿었다. " 두드리라 . 그러면 열릴 것이다."

1976 년 11월 25 일 남포동 제일 예식장(지금은 농협과 하나로 마트가 들어선 자리로 짐작된다). 오후 한 시. 약관 스물 네 살에 나는 신랑이 되었던 것이다. 결혼식장에서 춘식(春植)이가 축시를 지어 와 손수 낭독했는데, 오늘 밤 이제 너의 영혼을 어루만지며 열심히 사랑하라...뭐,그런 구절이 아련하다. 그리고 그 후 아무도 나를 Nobody로 불러주지 않았다.


(20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