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콩쥐의 눈물

알라스카김 2009. 4. 15. 15:54

                           

 

 

나는 아무래도 좋아. 기집애 아무리 속이 아파도 그렇지 사람 면전에다 대고 그렇게 빈정거릴게 뭐람. 아니 렉서스를 끌고 나오면 안 되는 법이 있냐고. 롯데호텔쯤 되면 고급차를 타는 게 어딘데. 도어맨들이 허리를 굽히고 인사하는 폼이 벌써 다르다고. 그 기분을 느껴본 사람은 알아. 그래서 다들 돈 있으면 명품을 찾고 고급외제차를 사는 게 아니냐고. 자기도 돈만 있어봐. 나보다 심하면 심했지 나을게 뭐 있을라고. 자기나 나나 이 년제 초급대학 을 나온 주제에 교양이 별 수간데? 기껏해야 외제 화장품 이름 몇 개, 영국제 이태리제 옷·가방 브랜드 몇 개 주워섬기는 게 교양의 전부 아니냐고. 어차피 100년을 못 채우고 사는 인생, 궁색하게 살게 뭐람. 기회가 닿아 부를 누리면 죽기 전에 세상구경이나 실컷 하고 여기저기 구경 당기면서 맛있고 기름진 음식 많이 먹고 멋있는 명품옷 쭉쭉 빼입고 그렇게 즐기는 게야. 아-이젠 돈 때문에 고민하고 싶지 않아. 매일 저녁 편하게 잠들고 아침이면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고 싶어 .남편은 이제 그 나이에 결코 실패할 일은 없을 거야. 나의 남은 인생은 그러므로 보증수표나 다름없어.

정숙은 낮에 헤어진 혜숙을 떠올리며 혼자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혜숙은 그녀의 H여대 동기동창이었다. 대학시절 지근에 있는 S대학의 ROTC 남학생들과 미팅을 한 적이 있었는데 혜숙은 졸업 후 이 년 만에 그때 만난 남학생과 결혼을 했다. 운동선수인 그녀의 남편은 알고 보니 정숙의 남편이 된 성욱과 같은 과 동기동창이었다. 정숙이 성욱을 만난 것은 대학연합서클에서였다. 성욱은 어깨가 넓고 키가 큰 남자였다. 그때 그는 김해에서 버스로 먼 길을 통학했는데 서클모임이 있는 날은 밤늦도록 막걸리집을 전전하다가 막차를 놓쳐 번번이 부산에 있는 친구들 집에서 잔다는 얘기가 떠돌았다. 정숙의 눈에 비친 성욱은 시골출신답게 우직스러웠다. 옷차림은 늘 후줄근하였고 술에는 항우장사였으며 문학과 철학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한 청년이었다. 정숙이 대학을 마치고 밀양의 고향집에서 가사를 돌보고 있던 어느 여름 날,문득 방위병 군복차림의 성욱이 그녀의 집을 찾아왔었다. 성욱은 그때 집이 가까워 무심코 한 번 들렀다고 했다. 그 날 이후로 그는 일요일이면 빠짐없이 정숙의 집을 찾았다. 동네 젊은 남정네들이 눈을 부라리며 쳐다보거나 말거나 정숙은 4년제 대학생인 그의 발길이 고마워 그와 함께 밀양의 삼남면 넓은 들판의 농로를 하염없이 거닐곤 했다. 벼가 무르익어 고개를 숙일 무렵이 되자, 정숙은 저도 모르게 부쩍 일요일이 기다려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년 후, 성욱이 은행에 취직을 하자 정숙은 곧바로 그의 아내가 되었다. 신혼살림을 꾸민 곳은 김해에 있던 성욱의 집이었다. 그 집의 세대주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오직 아들 하나만 보고 살아온 젊은 시어머니였다.

 

 

 저녁 무렵 부엌에서 전기밥솥에 쌀을 앉히던 혜숙은 가슴이 답답했다. 곧 대학을 졸업할 큰 딸 아이가 여름방학을 틈타 미국에 어학연수를 다녀오겠노라 보채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은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갔다 온다더니만. 남편은 그런 돈이 어디 있느냐며 코웃음을 쳤다. 남편이 형부의 회사에 취직하여 월급봉투를 갖다 준 것은 겨우 일 년 남짓이었다. 수영코치로 젊은 세월을 전전하던 끝에 모 사립대학 총장의 배려로 어렵사리 체육학과 전임강사 자리를 얻어 교수자리를 넘본다고 대학원을 다닐 때는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총장이 교수들의 신임을 잃어 다른 학교로 자리를 뜨게 되자 그도 그만 직장을 잃고 말았다. 혜숙의 삶은 그래서 최근까지만 해도 늘 곤고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늦게 돌아온 남편에게 정숙은 신랑 덕에 바다가 보이는 언덕위의 60평짜리 빌라에 살게 되었는가 하면 고급 외제차를 몰고 다닌다고 말했다가 남편에게 늘씬하게 얻어맞을 뻔 했다. 다 큰 딸들이 제 아비의 팔을 뒤에서 낚아채지 않았다면 큰 사단이 날 뻔했다. 짐승처럼 표효하던 남편의 육성이 다시금 혜숙의 등골을 쓸어내렸다. 낮에 정숙이가 불러 호텔에서 양식을 얻어먹고 돌아온 때문이었다.

- 망할 년! 그래 죽은 남편 무덤도 마르기도 전에 개가를 해? 그 년 이제 보니 완전 갈보 아냐. 당신, 앞으로 정숙이 그 년 한 번만 더 만나기만 해봐라 다리를 분질러 놓을 테야.

그날 밤 이후로 혜숙은 남편에게 정숙의 얘기를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내외가 각각 대학동기동창이었고 졸업 후 줄곧 똑같이 부산에서 생활을 한지라 부부끼리 만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성욱이 죽기 전까지만 해도 사내들은 일주일에 두어 번 바깥에서 만나 술자리를 함께 할 정도로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성욱이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쓰러져 숨을 거둔 그날 밤부터 출상하는 날까지 남편은 성욱의 빈소를 떠나지 않았다. 대학동기들이 단체조문을 하고 간 날에도 그는 밤새도록 혼자 빈소를 지키며 소리 내어 울었다고 했다. 자정이 넘어 조문객들이 다 떠나간 뒤에는 그들이 먹다가 남긴 술병들을 싹쓸이하다시피 마신 후 텅 빈 친구의 빈소 앞에서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울었다고 했다. 어려서 홀로 된 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처지가 같았고 졸업 후 30년 가까이 대학동기회 모임에 회장·총무일로 번갈아 봉사한 인연이 그랬고, 술자리라면 누가 제 마누라를 업어가도 거들떠보지 않을 만큼 끈질겼던 애주가들로서 둘의 우정은 각별한 것이었다. 술을 좋아해 나이 사십을 넘기도록 둘 다 운전면허가 없었는데 술자리가 길어지는 날이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집에 전화를 걸어 제 마누라에게 차를 갖고 나오게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술자리가 끝이 없는 남편들의 고약한 버릇을 고쳐보겠노라며 여자들끼리 꾀를 내어 성욱이 죽기 5년 전에서야 남편들에게 운전면허를 따게 한 사연이 이랬다.

- 당신들 두 사람이 술 마실 때는 늘 이렇지요. 간단히 한 잔만 하자고. 그런데 간단히가 늘 3차,4차가 되는 게 왠지 알아요? 운전면허가 없으니 브레이크를 밟을 줄 몰라서 그렇단 말이에요. 나이 오십 줄에 들기 전에 운전면허라도 따세요. 아이들 시집·장가보낼 때까지는 살아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오래 살려면 술도 이제 조금 줄이셔야죠.

성욱의 사십 구제를 마친 날 대학동기들은 1주기 때 모두 다시 모이자고 다짐을 하고 헤어졌다. 그 무렵 대학동기들은 정기모임이 있을 때마다 성욱의 사람 좋은 모습을 상기하며 술잔을 돌리기 전에 일동으로 짧은 묵념을 드리곤 했다. 성욱이 회장을 맡으면서 야유회나 등산모임을 주선할 때는 늘 동부인을 종용하였으므로 몇 년 안 되어 부인들이 준회원으로 대접받을 만큼 대학동기모임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러므로 누구나 하나같이 나이 오십에 생을 마감한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애석해 하며 한 동안 그를 추모 했다. 그러나 성욱의 첫 기일을 기다리던 친구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었다. 정숙이 남편의 대학동기들과 연락을 끊고 잠적한 것은 훨씬 오래 전이었다. 궁금하여 안달이 난 나머지 성욱의 대학동기들이 정숙의 근황을 알려고 혜숙을 찾았을 때는 정숙은 이미 유럽으로 결혼여행을 떠난 뒤였다. 혜숙은 그러나 정숙이 결혼을 했다는 얘기를 남편이나 그의 친구들에게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남편이 남겨준 돈을 더 까먹기 전에 머리도 식힐 겸 몇몇 친구들과 외국으로 관광을 떠난다고 들었다며 매번 애매하게 둘러대었다.

- 아니 남편 첫 제사를 코앞에 두고 해외여행이라니...그럼 칠순이 넘은 늙은 시어머니가 제 삿상을 봐야 했겠구먼. 이사한 집도 모른다? 그것 참,도대체 알 수 없는 노릇이군.

모두들 그렇게 혀를 끌끌 찼다. 성욱의 제삿날을 며칠 앞두고 첫 제사는 죽어도 가봐야 한다며 남편이 날마다 혜숙을 수사관처럼 괴롭혔지만 혜숙은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며 끝끝내 잡아뗐던 것이다.

밥이 끓는 소리에 압력솥의 김을 빼며 혜숙은 시계를 보았다. 집에 맨 먼저 돌아올 식구는 삼십대 후반에 얻은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이다. 다음은 대학생인 큰 딸이거나 술자리가 뜸해진 남편일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인 둘째 딸은 자정이 가까워야 귀가한다. 요즘 들어 혜숙은 식구들을 기다리는 저녁시간이 행복하다. 넉넉하지는 않으나 그래도 남편의 월급봉투는 일정하다.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남편은 더 이상 자신의 무너진 꿈에 대해 자학하지 않는다. 형부의 회사는 건축자재를 만들어 파는데 중국에 현지합작공장을 세울 만큼 사세가 확장되고 있어 앞으로도 남편의 월급봉투는 지금 같거나 조금 더 두툼해질 것이다. 올해 23살인 큰 딸은 대학졸업 후 직장을 얻으려 한다. 당장은 시집보낼 일이 없으므로 다행이다. 그러나 낮에 남편이 차를 바꿔주었다며 렉서스의 뛰어난 기능에 대해 정숙이가 장광설을 늘어놓을 때엔 왠지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신의 행복은 정숙의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녀가 삼십 년 지기 친구였지만 괜히 밉고 화가 났다.

재가한 후론 만날 사람이 자기뿐인지 정숙은 툭하면 혜숙을 불러내었다. 결혼기념으로 유럽여행을 다녀온 직후 식상할 정도로 되풀이 한 정숙의 아마추어식 여행담은 그렇다 치고 만날 때마다 새로 입고 나오는 고급양장이나 새로 옮겨 간 빌라에서의 꿈같은 생활이나 남편이 베푼 전 남편 자식에 대한 호의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을 때면 친구가 마치 원수처럼 느껴졌다. 더구나 그녀의 새 남편이 대입재수생인 성욱의 아들에게 새 차를 사주었다는 대목에서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혜숙은 아니꼬운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정숙에게 한 마디 따끔하게 쏘아붙였던 것이다.

- 흥, 나라면 그런 돈이 있으면 자선단체에 기부나 하겠다. 니가 아무리 잘났다 해도 그렇지. 그 영감이 돈이 썩어 빠졌구먼. 멀쩡한 SM5를 두고 렉서스라니. 또 웬 돈이 그리 많아 학생인 아들에게까지 차를 다 사 준다냐. 재벌도 그렇게 하진 않겠다. 야-이것아! 나는 신랑이 직장에 나가면서부터 차를 뺏어가 지금은 버스 아니면 전철을 타고 다닌다. 내 앞에서 인자 돈 자랑 그만 해라. 니는 콩쥐고 나는 팥쥐냐?

 

 

 저녁 생각이 없는 정숙은 화장실로 가 욕조에 더운 물을 받는다. 대장은 고시동기인 어느 검사장의 갑작스런 부고를 받고 오늘 아침 서울로 행차했다. 출상을 보고 오리라 했으므로 대장은 내일 저녁이라야 귀가할 것이다. 그는 정숙의 나이보다 여덟 살이나 많았다. 그가 뜬금없이 자기의 두 번째 남편이 된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정숙에게 그 같은 행운이 찾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은 당첨에 대한 희망이라도 품었을 것이지만 정숙은 자신이 재혼을 하리라는 것은, 더욱 부와 명예를 두루 갖춘 초로의 변호사를 남편으로 삼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성욱이 유언 한 마디 없이 숨을 거두고 난 후 정숙이 자신을 겨우 수습한 것은 사십 구제가 끝난 뒤였다. 그의 죽음이 너무 안타깝고 불쌍하여 정숙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유골을 모신 절에 오가며 염불을 외웠다. 대학생인 딸과 고등학교 삼 학년인 아들의 앞날을 생각하면 앞으로 혼자 살아갈 날이 쇠털 같았고 칠순이 넘은 시어머니를 봉양할 일도 꿈만 같이 아득했다. 염불을 외워도 매일 같이 부처님 전에 오백 배 천 배를 올려도 마음이 허전했다. 정숙에겐 도무지 성욱의 죽음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래서 밤이면 밤마다 꿈에 성욱을 그렸다. 오매불망 애타는 심정이어서 꿈에라도 비칠까 싶었지만 사십 구 일 동안 성욱은 단 한 번도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생각다 못한 정숙은 사십 구제가 끝나는 대로 금정산 밑의 어느 용하다는 무당을 찾았다.

- 자기가 죽지 않았다고 생각해. 지금도 빙긋이 웃고 있어. 자네더러 바닷가에 놀러가자고 그러네.

무당의 말에 정숙은 가슴이 쓰렸다. 구천에 떠도는 귀신이라니. 저녁밥상을 차려놓고 방문을 여니 침대에서 일어나던 그가 갑자기 가슴에 손을 얹으며 어,어 하더니 그냥 뒤로 넘어졌던 것이다. 2년 전 지점의 차장으로 승진한 성욱은 갑자기 뱃살을 뺀다며 정숙이 나가던 일요산악회에 가입하여 열심히 산을 탔다. 주 5일 근무제가 되면서부터는 토요일마다 정숙을 데리고 명승지나 바닷가를 찾았다. 그러고도 그는 밤이면 밤마다 정숙을 열심히 사랑했다. 간혹 신문사 광고국 직원들과 회식을 갖는 날은 초저녁부터 휴대폰이 불이 났다. 그러므로 무당의 말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인가 뒤에 정숙은 해운대 달맞이고개 너머 청사포를 찾아가 갯바위에 자리를 깔고 무당의 손을 빌어 성욱의 혼령을 하늘로 보냈다. 그러나 성욱의 얼굴이 꿈에 비치지 않는 것은 여일했다. 한 동안 꿈도 꾸어지지 않는 하얀 밤이 무미하고 지겨웠다. 자식을 먼저 보낸 늙은 시어머니는 세상이 싱거운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상중에도 성욱을 화장하는 날에도 노인은 집에만 틀어 박혀 두문불출했다. 청상과부로 지낸 시어머니가 정숙에겐 시집살이 내내 두렵고 무서운 존재였다. 그래서 성욱의 살아생전에도 정숙은 맞벌이를 핑계로 밖으로 나돌았던 터였다.

 생명보험과 퇴직금, 아직 미혼인 자녀를 둘이나 둔 과부의 신세를 동정하여 직장동료들이 합심하여 만들어 준 산재보험금 등을 모두 합한 돈이 3억 원 가량 되었다. 그 돈이면 자식 둘을 뒷바라지하기엔 충분하다 싶었다. 그래도 하릴없이 뭉칫돈을 헐어가며 하루하루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어머니를 봐서라도 뭔가 돈벌이를 해야 할 입장이었다. 성욱의 뼈를 그의 고향인 김해들판에 뿌리고 온 다음날인가 싶다. 몸을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난 시어머니는 그 나이에도 아랑곳없이 당장 김해 비닐하우스 농장으로 날일을 하러 나갔다. 젊어서부터 방직공장과 들일로 생계를 감당해온 억척스러움이 그녀를 그처럼 냉정하고 깐깐한 여인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른 새벽 집을 나서는 노인은 정정했고 발걸음조차 날렵했다. 그런 시어머니를 보며 정숙은 하루빨리 자신도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결심했다.

  비누거품에 감싸여 욕조에 알몸으로 누워 있는 자신의 몸매를 욕실거울로 쳐다보며 정숙은 스스로 감탄해 마지않는다. 키가 작고 조금 마른 편이지만 균형이 잘 잡힌 체형이어서 사랑을 나눌 때면 성욱도 늘 조심스럽게 다루며 애지중지해 주던 몸이었다. 결혼 초야에 그녀를 껴안았던 대장 또한 그녀의 부드럽고 나긋한 몸놀림에 취해 숨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녀의 몸은 아직도 소녀 같은 부드러움과 촉촉한 피부의 촉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숙은 여전히 봉긋한 젓 가슴의 끝을 두 손으로 감싸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오-달콤하고 안락한 나의 여가여.

  가게를 얻은 곳은 사·오 층은 보험회사 영업소가 들어 있고 일·이 층은 결혼 예식장으로 쓰이고 있는 오 층 건물이었다. 번화가도 아니고 한 길가도 아니었다. 그러나 친구들의 눈썰미를 빌어 보험회사 영업사원들을 겨냥하여 건물 일 층의 한 모퉁이에 체인형식의 여성용 토털패션점을 오픈했다. 보증금과 인테리어 비용으로 8천만 원이 들었다. 진열상품은 메이커에서 받아오되 잘 팔리지 않거나 철 지난 재고들은 반품처리하면 되었으므로 일단 재고부담이 없다고 보고 쉽게 결정한 일이었다. 저녁이면 학교를 마치고 온 딸이 가게 일을 도와주었다. 첫 달은 친구들과 가까운 지인들의 동정구매로 얼마쯤 수익을 남겼지만 그 다음 달부터 당장 손님들의 발길이 뜸했다. 보험사원들의 구매력은 생각보다 딴판으로 미약했다. 정숙 자신도 보험영업을 삼 년씩이나 했고 의류할인점 매니저를 한 경험도 있던 터라 손님응대나 장사수완에는 얼마간 자신이 있었지만 IMF 이후의 부진한 경기 탓인지 보험영업을 뛰는 여자들의 쓰임새가 영 딴판이었던 것이다. 차츰 한 달에 백만 원인 월세가 힘겹게 여겨졌고 보증금을 까먹는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하루하루 애가 타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성욱을 보낸 뒤 다섯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산에서 우연히 알게 된 50대 후반의 멋쟁이 언니가 웬 신사와 동행하여 불쑥 가게를 찾아왔다. 언니는 그 신사를 자기가 소속된 산악회 멤버라고 소개했다. 언니가 정장용 핸드백과 가벼운 캐쥬얼식 원피스를 하나 고르는 동안 언니와 동행한 그 신사는 몇 발짝 떨어진 가게 한 모퉁이에 지켜 서서 정숙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산에서 만난 언니들은 다들 부자거나 엘리트인 남편을 둔 속칭 상류층 부인들이었다. 산에 열심인 것은 아니었으나 건강관리를 위해 저들끼리 동무삼아 일요산악회에 가끔 나오는 상 싶었다. 조그마한 몸매에 날렵한 정숙이 한번은 산악회 후미에서 허덕이던 그들과 조우하여 길안내를 맡은 것이 인연이 되어 서로 알고 지내게 되었는데 그 언니들이 가끔 한 번씩 저들 식사모임에 정숙을 불러내었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정숙은 그들이 누리는 생활의 여유가 늘 부러웠다. 자식들의 교육으로부터 해방된 시간적 여유와 그 빈 시간을 즐기기에 넉넉하고 충분한 물질의 풍요가 그랬다.

그 언니로부터 다음 날 전화가 왔다. 가게 근처 커피숍에서 마주한 그 언니가 다짜고짜 꺼낸 얘기가 뜻밖이었다.

- 그 남자가 너와 결혼하고 싶대.

- 아니 언니, 제 입장이 어떤지도 모르고 그런 얘기를...

- 얘, 그 사람 유명한 로-펌의 대표야. 우리 신랑 친구라 같이 부부계를 오래 했어. 삼년 전에 부인이 암으로 세상을 버렸거든. 네게 아이들이 있다는 것도 늙은 시어머니가 있는 것도 다 얘기했어. 같이 살지는 못해도 생활비니 애들 학비까지 다 대겠다고 하더라. 그 남자 아들만 둘인데 지금은 다 해외로 나가 공부중이고 결혼하면 모두 분가시킬 거라 했 어. 그러니 니만 좋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그 남자와 둘이서 알근달근 사는 거야. 남자가 오래 살려면 내조하는 여자가 곁에 있어야 하거든.

  그 언니로부터 뜻밖의 청혼을 받은 정숙은 기분이 묘해졌다. 누가 자기를 흠모한다는 얘기를 듣는다는 것은 어쨌든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렇잖아도 혼자 일요산악회를 따라 다닐 때나 신문사 광고국에서 일할 때 정숙은 유혹에 가까운 남자들의 야릇한 농담을 받아넘긴 일이 허다했다. 그즈음 정숙은 사랑이 결코 하나가 아님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매일 술에 취해 늦게 귀가하는 성욱은 살가운 애정표현에 인색했다. 장성한 아이가 둘이고 둘 다 사십이 훌쩍 넘은 나이였으므로 그는 정숙의 일상사에 늘 무심하였고 일주일에 두어 번 그녀를 품에 안는 것으로써 그의 의무를 다 하는 양 부부관계에 안도했다. 그러나 정숙은 그의 무관심과 연일 이어지는 폭음은 은연중 다 그녀가 진 빚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므로 더 늙기 전에 따뜻하고 살가운 남자로부터 한 번쯤 깊이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가 문득문득 치밀었고 그때마다 남들처럼 애인을 하나 만들어 볼까 하는 괜한 생각이 들곤 했던 것이다.

그래도 젊어 한때 시어머니의 심술 아닌 심술에 지쳐 정숙이 결혼생활을 힘겨워 할 때엔 성욱은 도시락편지를 통해 열심히 정숙을 위로하곤 했었다. 한편으론 방 두 칸짜리 신혼집에서 어머니의 눈을 피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성욱은 무척 힘들어했다. 청상과부의 며느리에 대한 시샘은 옛 말 그대로여서 시어머니는 아들이 귀가할 때까지 절대로 저녁밥상을 차리지 못하게 했는가 하면, 저녁밥상을 물리고 나면 무시로 아들을 자기 방에 재우기까지 했다. 시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편집증은 첫 애가 태어날 때까지 그랬다.

- 언니, 너무 갑작스런 얘기라 혼란스러워요. 재혼한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해봤어요.

- 얘, 지금은 그렇겠지. 그냥 팔자 한 번 고친다고 생각해. 나이들이 들어서 그렇지 젊었다면 꿈이나 꿀 얘기겠어? 판검사 출신하고 니가 결혼한다는 것 꿈이라도 꾸었겠느냐고.

 

 

 막내를 재우고 나서 혜숙은 시계를 보았다. 밤 10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남편은 술접대가 있는지 초저녁 무렵 늦겠다며 전화를 했다. 큰 딸은 어디서 시간을 보내는 지 여태 기별이 없었다. 혜숙은 T·V 채널을 여기저기 돌려본다. 혼자 있는 시간이 언제나 참을 수 없이 무료했다. 그때 정숙의 얼굴이 떠올랐다. 심심할 때면 군음식처럼 찾고 싶은 것이 젤 만만한 친구였다. 낮에 목청을 돋우고 그녀를 빈정거린 일이 아직도 찜찜하다. 돈 있고 걱정 없는 축도 무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을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를 하다 나이 사십을 넘기고 나면 제일 한심한 것이 여자였다 .특별한 취미생활을 갖고 있거나 직장을 가진 여자는 그나마 형편이 나았다. 빈 시간을 때우기 위해 목욕탕에 가 동네 이웃여자들과 서너 시간씩 알몸으로 누워 있거나 계모임에 나가 수다를 떠는 재미라도 없으면, 아이들과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는 저녁시간에 T·V 연속극이 없었다면 도대체 사는 일이 얼마나 끔찍했을까. 혜숙은 어느 날 정숙이 자신의 집으로 찾아와 자랑인지 고민인지 늘어놓던 얘기를 다시 곰곰 생각해 보았다.

- 얘, 어떤 남자가 나 보고 결혼하자며 보름째 목을 매달고 있어.

- 어떤 남잔데?

- 전직검사 출신의 변호사야. 나이가 좀 많아. 삼년 전에 상처를 했대. 결혼을 해주면 아이 들 뒷바라지나 생활비를 위해 따로 돈을 대겠대. 그 대신 아이들은 할머니하고 살아야 해.

- 어떻게 니를 알고...?

- 산에 오가며 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가봐. 아는 언니를 통해 내 소식을 듣고는 그 당장 연락을 해왔어.

- 그래 니 생각은 ...?

- 나도 잘 모르겠어. 그래도 성욱 씨 생각만 하며 수절할 맘은 없어.

- 너는 아무래도 나보다 복이 많은 것 같다,얘. 성욱 씨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나 같으면 당 장 받아들이겠다. 누가 뭐라 해도 여자에겐 돈 많은 남자에게 시집가 사랑받고 호강 받는 게 제일이야. 니가 전에 화장품가게하며 보험영업하며 진 빚 때문에 성욱 씨와 살면서 얼 마나 힘들었어. 재클린이 오나시스와 재혼하는 기 어디 사랑때문이었나? 체면이나 명예가 밥 먹여 준다든? 그리고 니 나이에 그런 청혼을 받는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 해? 눈 질끈 감고 받아 들여. 그런데 니네 애들은 뭐라디? 시어머니는?

- 엄마만 좋다면 자기들은 괜찮대. 아들이 더 적극적이었어. 돈 때문에 엄마가 고생하지 않 아도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야. 시어머니도 아들이 남겨준 돈을 다 드리겠다고 하니 입이 쩍 벌어지더라.

그런 정숙이 은근히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얄미웠다. 결혼식에 참석한 대학동기들도 너나없이 정숙이가 늘그막에 횡재했다며 입을 깐죽거렸던 것이다. 늦게 본 아들 녀석이 커가는 재미라도 없었다면 돈 못 버는 남편을 만나 이제껏 고생만 해온 자신이 엄청 불행한 여자라고 자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혜숙은 생각한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혜숙은 남편인가 싶어 무심코 전화를 받는다. 전화선에서 난데없이 코맹맹이 소리가 울렸다. 정숙이었다. 혜숙은 그가 앉아 있다는 생맥주집으로 달려갔다. 남편이 서울에 가서 다음날 돌아온다고 하더니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걸까. 그런데 코맹맹이 목소리는 웬 일일까 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아니나 다를까,정숙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혜숙은 가슴이 철렁했다. 남편이 서울로 출장을 갔다며 함께 저녁을 먹자고 해서 만난 지 일주일도 채 안 되었던 것이다.

- 혜숙아, 나...... 요즘 힘들어.

- 가시나야, 무슨 일인데 그래?

- .........

정숙은 혜숙의 묻는 말에 아무런 말도 없이 생맥주 잔을 들었다 놓았다만 한다. 성마른 혜숙은 제 앞에 놓인 500cc 맥주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시고 만다. 정숙은 늦은 밤 불러낸 친구에게 미안한지 마지못해 입을 떼었다.

- 저번에 혼자서 잠든 날 성욱 씨가 꿈에 나타났어.

- 왜 갑자기...?

- 모르겠어. 내가 저질러 놓은 빚 때문에 자기가 힘들다며 짜증을 부리다가 대뜸 헤어지자 고 그랬어.

- 평소에 그런 말 하던 사람이 아니었잖아. 그 빚은 성욱 씨 생전에 주례에 있던 아파트를 팔아 다 정리했다며. 그 때문에 그래?

- 아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성욱 씨가 꿈에 나타난 후로 그냥 마음이 아파.

그 말을 끝으로 정숙은 맥주만 거푸 두 잔을 비웠다. 정숙의 눈가에는 얼핏 눈물이 글썽거리는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밤 12시가 가까웠다. 정숙이 술에 취한 것 같아 혜숙은 서둘러 그녀를 부축하여 대로까지 나와 택시를 잡아주었다. 혜숙은 정숙이가 성욱의 꿈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것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더군다나 말끝을 흐리던 정숙의 마지막 말이 자꾸만 머리에 맴돌아 마음 한 구석 불길한 생각마저 들었다. 점잖고 돈 많은 사람과 재혼하여 부럽다 못해 얄밉기까지 한 정숙이었지만 그녀가 또 다시 불행해지는 것은 친구로서 결코 원치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맥주를 물마시듯 들이키는 정숙을 더 이상 다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혜숙은 늦은 밤까지 맥주를 마신 까닭을 남편이 물어오면 뭐라고 둘러댈까 하고 잠시 고민했다. 정숙과 만나는 일은 여전히 남편에겐 비밀이었다.

 

 

 대장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욕실의 거울 앞에서 화장을 지우던 정숙은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살핀다. 며칠째 식사를 거른 흔적이 얼굴에 역력했다. 정숙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대장은 서울서 이틀 밤을 묵은 뒤 귀가했다. 볼일이 있어 하루 더 묵겠다는 전화가 걸려 왔으나 왠지 전화속의 목소리가 전과 달리 살갑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만에 죽마고우들과 지인들을 만나느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그땐 별반 마음에 두지 않았었다. 대장이 집으로 돌아온 날 정숙이 반가운 얼굴로 양복을 받아들었지만 대장은 데면데면한 얼굴로 좀 생각할 일이 있다며 곧장 자기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정숙은 저녁을 먹었느냐고 물어볼 틈도 없이 등을 돌리는 대장의 태도에 뜨악했다. 그날 밤 대장은 정숙이 잠들 때까지 혼자 서재에 머물렀다. 대장은 그 뒷날 예고 없이 술이 취해 귀가했는가 하면 그 다음 날은 저녁을 먹은 후 오래도록 또 서재에 머물렀다. 전보다 말수가 준 데다 그가 계속 덤덤한 표정을 지었으므로 정숙은 혼자 속으로 애만 태울 뿐이었다. 갑자기 꿈에 나타나 발악하듯 그녀를 저주하던 성욱의 얼굴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마음이 스산하던 참에 대장의 침울한 언행이 계속되자 정숙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 안절부절 했다. 나이 차가 많고 직업과 신분이 그런 사람이라 저편에서 애살맞게 굴지 않는 한 그녀가 함부로 투정을 부리는 것은 감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젊어서 애면글면 사랑을 한 것도 아니고 아이를 낳아 서로 함께 기른 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상대편에서 일방적으로 좋다고 해서 멋모르고 마음을 주었던 사람이었다. 초로의 홀아비가 겪었을 고독이 얼마나 혹독했으면 대장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당신이 하자는 대로 다 해주겠다며 덤벼들었을까.

일요일 아침에는 늘 함께 다니던 산행도 마다하고 대장은 일이 있어 사무실에 나간다며 집을 비웠다. 대장이 집을 나간 뒤 한 동안 넋을 놓고 있던 정숙은 집안청소라도 할 생각으로 대장의 서재로 들어섰다.

 대장의 책상 위에는 웬 신문이 펼쳐져 있었다. 날짜를 보니 삼일 전 신문이었다. 대장이 서울에서 올 때 가져온 것인 듯싶었다. 그 신문을 대장이 며칠째 계속 읽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처음에는 혹시 대장의 신변과 관계가 있는 무슨 중요한 기사가 났는가 싶었다. 정숙은 부리나케 신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신문의 왼편에는 특별히 주목할 만한 기사가 없었다. 신문의 오른쪽으로 눈길을 돌리는데 하단에 검은 상복에 가슴에 흰 깃을 단 여인이 손수건을 입에 묻고 오열하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기사의 타이틀은 대장의 친구인 검사장의 장례식에 관한 것이었다. 평소 공과 사의 경계가 분명했고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과 신망을 받았다는 생전의 고인을 추모하는 기사 외에 남편의 영전에서 낭독했다는 검사장 부인의 추도사가 일부 인용되어 있었다.

 

 

 당신과 만나 함께 살아 온 지난날들이 내겐 너무 행복하고 소중했던 추억이었음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태어난 두 아들 영준과 영식은 또 얼마나 자랑스럽고 훌륭한지요. 당신이 생전에 가족과 세상 사람들에게 베푼 그 지극한 사랑의 발자취를 저도 뒤따르겠습니다. 여보, 사랑합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평안하소서.

 

 

 기사를 읽고 나자 머리가 명료해지는 느낌이었다. 정숙은 대장이 친구의 앞선 죽음에 크게 상심했거나 그게 아니라면 사별한 전 부인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의 존재는 그에게 있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가 사육하는 애완동물인가 그게 아니라면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놀아나는 꼭두각시인가. 그때 불현듯 성욱의 얼굴이 떠올랐고 정숙은 일순 수치심에 휩싸여 저도 모르게 오열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찾아온 눈물의 강은 깊고도 길었다. 저녁시간이 조금 지나서 술자리가 있어 늦겠다는 대장의 무뚝뚝한 전화를 받았다. 대장의 음성이 오늘따라 더욱 낯설게 느껴졌다. 음울한 시간의 공백을 참다못해 정숙은 혜숙을 만나러 집을 뛰쳐나갔던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란 신념이 일거에 무너진 터였지만 정숙은 친구에게조차 자신의 심정을 차마 다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입에 묻은 술기운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숙은 대장이 잠든 방으로 갈 마음이 생겨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방으로 들어가 잠들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녀는 벗었던 옷을 다시 껴입은 뒤 살며시 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아이들을 찾아갈까 하고 발길을 차고로 향했다가 정숙은 마음을 바꿔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대로로 나섰다. 희미한 네온 불빛 사이로 그녀는 무작정 걸었다. 등 뒤로 멀리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정숙은 동백섬의 전망대에 이르러 우두커니 어두운 밤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다의 끝에서 하얀 포말이 줄지어 부서지며 끊임없이 백사장을 핥고 있었다. 파도는 뭍에 대한 바다의 지극한 사랑이며 그리움이었다. 정숙은 자신이 살아오면서 정작 누구를 간절히 그리워한 적이 있었는지 자문해 보았다. 한때 성욱을 오매불망 꿈에 그렸던 것이 진정 사랑이었는지 그리움이었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 순간 정숙은 밀려드는 지독한 외로움에 치를 떨었고 흐트러진 머리와 어깨를 들썩이며 또 다시 오열하기 시작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