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과장
맏아들의 결혼날짜를 잡고 나서 영수는 청첩장을 돌릴 명단을 뽑기 위해 근 삼십 년을 지니고 온 낡은 대학노트를 꺼냈다. 젊어서 한때 업무관계로 만남이 빈번했던 사람들의 연락처는 휴대폰이 나온 뒤로 거의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그래도 교직에 종사하는 지인들은 용케도 연락이 가능했다. C가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창원에 있는 모 고등학교의 교장이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한때 계모임을 같이 했던 K가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며 연락이 왔던 십년 저쪽의 일이었다. 결혼식장에 나타난 그는 이미 머리가 백발이었다. 토요일이었지만 학교 일을 마다하고 억지로 시간을 내어 원행을 한 걸음인지라 황송하기도 해서 축의금만 내고 곧장 돌아가겠다는 그를 영수는 간곡히 붙들었다. 폐백이 끝나자마자 영수는 K를 앉혀둔 식당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주 앉기가 무섭게 서로 술잔을 건네며 그동안 적조했던 일상사의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오직 한 길로 정진하더니 어느덧 교장선생님이 되셨네. 자네는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야. 자네가 부러우이.”
“ 나는 자네가 더 부럽더만. 자네는 젊어서 회사 일로 세계를 주유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고 자네 큰 아들이 우리 애보다 한 살 위지? 결혼은? ”
“올 해 서른이네. 작년에 창원에 있는 H중공업에 입사했는데 아직 처녀가 없어.”
“자네 매형은? 퇴직하신 지가 오래되었겠네. 아직 건강하시제?”
“참 자넨 모르겠구만. 돌아가신 지가 언젠데. 벌써 십년도 넘었어. 섬에 있던 분교들이 많이 없어졌잖아. 그 바람에 일찍 일손을 놓으셨지. 쉬신 지 삼년 만에 간경화가 왔지. 매일 술로 살았다더만...”
“그게 무슨 소리고...왜?”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을 느끼며 영수는 삼십년 전의 추억을 파노라마처럼 머리에 떠올리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1978년 이른 봄이었다. 영수는 부푼 꿈을 안고 T시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고 있었다. 고등학교 교사로 채용되었다는 기쁨과 함께 늘 선망해왔던 교직에 첫 발을 내딛는 것이 그에겐 더없는 행운이라 여겼다. 그가 근무한 학교는 2대 째 이사장이 대물림하고 있는 사립학교였다. T시에 내리자마자 영수는 학교의 연구주임이라는 자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가 미리 마련해둔 하숙집을 찾아 가 짐을 풀었다. 다음 날 교사 임용장을 받기 위해 학교 교문을 들어서던 그는 초라한 학교 건물에 다소 실망하였다. 교사(校舍)는 기역자식의 이층건물이었는데 도색을 제때 하지 않은 양 을씨년스런 느낌을 자아내었고 축구장의 절반규모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운동장은 갑갑함을 더했다. 교무실도 마치 시골의 면사무소처럼 좁고 초라하여 근엄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더욱 기괴한 것은 교장이란 사람의 면모였다. 그의 나이는 불과 마흔 다섯이었으나 큰 키에 기름을 발라 올백으로 넘긴 머리가 반백이었고 긴 얼굴에 매서운 눈매까지 보태면 그의 외양은 영락없이 오십 중반의 아주 늠름한 풍채를 지닌 자였다.
영수 외에도 그해 새로 부임해온 젊은 교사는 여선생 두 명을 포함하여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날 저녁 교장주최로 신임 선생들을 위한 회식자리가 펼쳐졌는데 교장의 언동이 유별나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회식이 끝날 무렵이었다. 교장이 오른 팔을 뻗어 영수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어-이, 거기 김샘하고 신임 남자 샘들 세 명은 나하고 이차가야 해, 알았나?”
식당현관에서 구두를 꿰고 있는데 연구주임이 영수의 어깨를 툭 치더니 잠깐 보자는 눈짓을 보냈다.
“김선생, 교장하고 이차 가거든 술 조심해서 마셔요. 교장이 무슨 말을 하든 함부로 대꾸하면 안 됩니다. 내 말 꼭 명심하세요.”
교장은 신임 선생들을 부둣가의 선술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데운 정종 됫병을 가져오라고 해서 맥주 컵에 가득 부어 한잔씩 돌렸다. 술잔이 세 순배 돌자 교장의 혀가 꼬부라지기 시작하더니 그의 입에서 거침없이 육두문자가 튀어 나왔다.
“요즘 젊은 선생들 말이야, 이 새끼들 말도 잘 안 듣고 말이야. 언제 손을 함 봐야겠어.”
동석한, 초면인 젊은이들은 모두 좀 더 마셔야 성이 풀리겠다는 표정이었으나 그 중 침착하게 생긴 C가 교장을 부축하여 서둘러 자리를 정리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다음날 부기과목을 가르치는, 우스갯소리 잘하는 삼십 초반의 남자 선생이 영수에게 다가와 어제 별 일 없었느냐고 걱정스레 물었다. 이차의 정종파티는 교장이 신임 선생들에게 베푸는 통과의례로 그의 권위에 복종을 다짐하는 자리라고 했다. 그는 부산의 D대학 법과를 나와 고시에 세 번이나 고배를 마신 뒤 낙향하여 지금의 학교에 초임교사로 근무했다고 하는데, 이사장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여 아주 젊은 나이에 교장으로 등극했다고 했다. 회식자리에서 멋모르고 교무행정을 따지다가 그에게 뺨을 얻어맞은 자 한 둘이 아니었다며 그는 시키지도 않은 얘기를 덧붙였다.
아침저녁으로 선생들을 호령하는 교장은 가히 무서운 고양이였고 선생들은 초라한 쥐였다. 아무려나 영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나날이 재미가 쏠쏠했다. 무역영어를 가르치는 3학년 수업시간에는 곧장 취업을 해야 하는 그들의 형편을 감안하여 배운 지식을 탈탈 털어 틈틈이 교양강좌도 곁들였다. 수업시간에 들면 재미난 얘기를 해달라는 아이들의 주문이 자연 빗발쳤다. 가르치는 일의 보람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영수는 절로 감탄하며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비록 지금은 준교사지만 미구에 교원시험에 응시하여 정교사 자격증을 따겠다는 포부를 다지기도 하였다.
여름방학이 끝나자 군복무기간을 호봉에 가산한다는 교육부의 발표가 있었다. 그런데 월급날이 되자 호봉계산에 불만을 가진 선생들이 서무주임의 멱살을 잡는 일이 벌어졌다. 늠름한 교장선생이 이를 좌시할 리 만무했다. 삼일 간의 가을추수방학이 시작된 날, 교장의 지시로 선생들은 빠짐없이 좁은 교무실에 모여 호봉제에 대한 세미나를 경청해야만 했다.
발표자는 초등학교 교사출신인 연구주임이었다. 우연하게도 그는 영수의 대학선배였고 그런 인연으로 그는 갓 임용된 영수를 연구부에 소속시켰다. 교장이 두 눈을 부릅뜨고 분위기를 압도하는 가운데 연구주임이 차근차근 발표를 이어가는데 갑자기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군복무기간과 상관없는 여선생 한 분이 들어봤자 시간낭비라고 여겼는지 교장에게 번쩍 손을 들어 발언을 신청했던 것이다. 그녀를 채용할 때 약속한 그녀의 호봉을 왜 일 년이 넘도록 깎아 먹었느냐는 항의성 발언이었다. 그녀는 삼십대 후반의 서울사람이었고 가족과 떨어져 자취생활을 하는 영어선생이었다. 몇 초간 서로 옥신각신 하는 말이 오갔다 싶었는데 갑자기 노발한 교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물 컵을 들어 그 여선생을 향해 사정없이 던지면서 고함을 내질렀다.
“이 가시나 말이면 다 하는 줄 아나?”
그 당장 영수는 등골에 소름이 쫙 끼치는 듯 몸을 떨었고 다른 몇몇은 입을 쩌억 벌리고 경악했다. 일순 모든 시선이 날아가는 물 컵을 따라 그 여선생에게로 집중되었고 물이 반쯤 찬 유리컵은 순식간에 그 여선생이 앉은 책상모서리에서 폭삭 깨어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깜박하고 정신을 차린 젊은 남자선생 몇 명이 그녀에게로 급히 다가가 얼굴을 숙인 채 웅크리고 있는 그녀를 일깨웠다. 다행스럽게도 책상 밑으로 달아난 유리파편이 그녀의 스타킹을 긁어 놓은 것 외엔 얼굴은 물론 몸에도 다친 흔적은 없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 챈 연구주임이 잠시 휴식을 선포했다. 운동장에 나와 영수와 함께 삼삼오오 무리를 지은 자들은 초임선생이거나 교장의 친위부대와는 일정거리를 유지하던 고참선생들이었다. 하나같이 “세상에 우째 이런 일이...?”라는 표정이었고 교장의 만행에 대해 뭔가 대책을 세워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날 저녁 삼십대인 사회과 선생의 주도로 스무 명 가까운 선생들이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바닷가의 한적한 식당에 집결하였다. 교직원의 절반이 약간 넘는 인원이었다.
주된 논의는 깡패 같은 교장선생을 몰아내자, 모두 일괄사표를 쓰자, 사학비리와 교장의 비행에 대한 문책을 위해 교육청에 진정서를 내자는 방안들이었다. 깡패 같은 교장을 몰아내자는 데에는 모두 이견이 없었으나 그 실천방안이 문제였다. 국민들의 억눌린 의지가 여기저기서 소리죽여 똬리를 틀고 있던 유신정부 시절이었고 교사들의 단체행동권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누가 어떻게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일괄사표를 쓰자는 안은 교사들의 울분을 표현하는 방법은 될지 몰라도 죄 없는 학생들을 볼모로 삼는 비겁한 짓이었다. 준교사인 영수에겐 큰 상관이 없었지만 어차피 다른 학교로 이적을 해야 하는 정교사의 경우는 이사장이나 교장의 눈 밖에 나는 사표는 곧 교사직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전직 학교장의 동의서가 없으면 공립이든 사립이든 이적이 불가했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나머지 교육청에 진정서를 내는 일도 용두사미격의 헛된 일일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 동안 웬만한 교육청 감사는 돈으로 감싸고 주물러 온 이사장이었으므로 가재와 게 편인 그들 간에 교사들의 진정이 제대로 반영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느꼈다.
열띤 논쟁의 끝은 시계가 밤 10시에 가까워지자 점차 체념으로 바꿔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자괴의 한숨소리마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영수를 약동시켰다. 오랜 시간의 갑론을박 끝에 스스로 지친 선생들은 낮에 있었던 그 모멸찬 기억으로부터 하나 둘 몸을 빼 도망갈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론도 없이 이렇게 의견만 무성해서는 여기에 모인 우리들의 공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다들 같은 마음이시겠지만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그것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직에 몸담은 저로서는 오늘 일이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나이 어린 자의 만용이라 해도 좋습니다만, 이런 일이 학교 내에서 당연시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이 사립학교의 생래적인 윤리라면, 그래서 억울해도 참고 넘어가야 한다면 저는 선생노릇에, 그리고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할 세상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가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이 일을 부산으로 올라가 언론에 폭로합시다. 텔레비전과 라디오방송국이나 신문사로 찾아가서 저희들의 입장을 알리는 겁니다. 오늘 이 모임이 자칫 교장에게 알려지거나 또는 자체적으로 교장이나 재단이사장이나 교육청을 상대로 대책을 강구한다면 아무런 소득이 없을 것이라 감히 단언합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선생들의 눈이 모두 휘둥그레지며 서로들 눈치를 살폈다. 우선 당국의 보도제한이 심한 언론이 하찮은 시골학교의 비행과 비리를 선뜻 기사화 하겠느냐는 의구심이 첫째였고 T시에서 살림을 차린 지 오래인 중년의 선생들이나 학생데모의 경험이 없는 젊은 선생들은 외지로 출정하여 거사를 도모하는 일이 자칫 두렵기도 하고 그 실천방법이 영 생소한 눈치였던 것이다.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아무도 입을 떼지 않자 모임의 주창자인 사회과 선생이 신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리의 직장이 교장의 독선과 만행으로 짓밟히는 것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다들 이견이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김선생 얘기대로 사태를 급격하게 몰아가기보다는 보다 이성적인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 생각엔 몇 몇 대표를 뽑아 이 일을 교감선생님과 먼저 상의를 해 봄이 어떨까 하는데...”
여자 선생들과 중년층 남자 선생 몇몇이 선뜻 그의 의견에 찬성을 표시했다. 교감은 교무실의 좌장으로 사십 초반의 나이에 교장과는 달리 비교적 합리적이며 부드러운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다. 곧 다음 날 오전 중으로 교감 집을 방문할 사람들이 정해졌다.
영수는 그 같은 선배들의 결론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로나 세상물정에는 다소 초연하려는 학교선생들의 전통적 인습을 감안하면 그 방법이 그들에겐 더 탁월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국어선생 C가 교감 면담명단에 포함되었다. 그는 사유의 경계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영수보다는 두 살이 많았는데 그 해 5월에 결혼을 해 영수의 하숙집과 지근거리에 신혼 방을 꾸민 터라 퇴근 후면 거의 매일이다시피 함께 술자리를 나누곤 하였다. 그가 연구주임의 처남이었던 것도 서로 마음을 터놓고 지내게 된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때 이십대인 남자선생이 모두 열 명이었는데, C처럼 같은 해 장가를 든 동료가 세 명이나 더 있어 나이 고하를 떠나 모두 친구처럼 벗하며 T시의 바닷가 선술집들을 시골한량처럼 휩쓸고 다녔었다.
“교감도 결국은 이사장의 끄나풀이야. 우리를 믿고 교장을 쫓아내는 데 소매를 걷어붙일 위인은 결코 아니라고 봐. 서로 좋은 게 좋다고 얼버무리려할 게 틀림없어. 결국 면담대표들만 교장 눈에 찍혀 학교를 떠나야 될 거야. 만일 우리의 뜻이 관철되지 않는다면 수업거부 등 단체행동도 불사하겠다는 뜻을 꼭 전하라고. 문제는 말이야, 서로 엇박자가 나면 교장이 잔머리를 굴려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을 동원해 우리들을 겁주려고 할지도 몰라. 방학이 끝나기 전에 사태를 신속하게 매듭지으려고 하겠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일 교감을 만나거든 단단히 하라고 영수가 C에게 이른 말이었지만 C의 의지는 영수보다도 더 확고했다. 회의를 하노라 술을 마시지 않은 탓인지 해안가를 끼고 집으로 돌아오는 밤길은 평소와는 달리 유난히 멀고 지루한 느낌이었다. 어두운 밤바다의 안벽에는 장어통발 어선들이 병아리들처럼 이마를 모은 채 잠들어 있었고 간간이 부는 선들바람에 부표용 장대로 쓰는 대나무의 깃발들이 가볍게 몸을 뒤척였다. 어두운 가을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그날 밤 두 남자는 술도 마다하고 집 근처 골목의 갈림길에서 악수만 나눈 채 헤어졌다. 좀은 서글프고 우울한 밤이었다.
교감은 그저 웃기만 했다고 C가 말했다. 홍안에 부처상인 그는 평소에도 늘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는 젊은 선생들이 이해하고 참아달라는 얘기만 하더라고 전했다. 그래서 일행의 좌장격인 사회과 선생이 최후통첩인 양 추수방학이 끝나더라도 교장탄핵에 동참한 선생들은 수업에 참가하지 않겠노라는 결의를 전하며 방학의 끝 날인 내일까지 대책을 알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교감 집을 나왔다는 얘기였다. 대책이라는 게 뭐 별 것도 아니었다. 교장이 선생들 앞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공개사과를 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겠노라 다짐하는 정도일 것이며, 재단의 야료로 발생한 호봉문제는 즉각 원상회복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런 상식적인 얘기조차 교감이 교장이든 이사장에게 직접 진언할 것이란 희망은 희박했다. 오히려 선생들의 결의만 알리는 꼴이 되고 그들은 콧방귀를 뀔 것이 분명했다. 감히 시골학교 선생들이 또는 직장을 구하지 못해 학교추천으로 얼씨구나 달려온 선생 초짜들이 재단과 학생들을 볼모로 파업을 하리란 것은 그들의 상상 밖이라 생각되었다. 육감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압박의 손이 곧 자신들의 주변을 죄어올 것이란 예감에 영수는 자연 긴장했다.
교감 집을 다녀온 뒤로 줄곧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던 C가 그의 대학동기인 부기선생 L과 같은 마산출신인 수학선생 K 등을 불러 대낮부터 술판을 벌렸다.
“나는 학교가 이런 데라곤 미처 상상도 못했어. 교장이래도 평교사에게 존칭을 쓰는 직장이 어디 있겠어. 학교라는 직장은 정말 인격자들만 모인 곳이라 알았어. 그래서 선생들이 학부모와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줄 알았지.”
K가 지극히 당연한 얘기로 먼저 보따리를 풀었다.
“나는 마산으로 돌아가 부기학원이라도 열거야. 존경이고 뭐고 월급이 이렇게 적어서야 어디 먹고 살겠어?”
마산에서 출퇴근을 하던 L이 실질적인 문제를 들어 꼬리를 물었다.
죄다 영수보다 두 살 위였고 또한 봄철에 앞 다투어 장가를 든 친구들이었다. 준교사였던 영수의 월급이 12만원, 정교사 초봉인 그들은 14만원이었다. 그 당시 대졸은행원 초봉이 18만원 정도였고 제일 잘나가던 종합상사의 대졸사원 초봉은 20만원 수준이었다. 부산에 아내를 둔 영수의 경우 하숙비 3만원과 이것저것 떼고 나면 아내에게 생활비로 쥐어주는 돈이 고작 5만원에 불과했다. 학교선생이란 자부심을 제외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돈이었다. 하다못해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를 부산에 홀로 두고 아내를 T시로 불러올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낮술에 불쾌해진 얼굴로 해가 떨어지기엔 아직 이른 시각인데도 모두 C의 집을 나섰다. 모두 다 심란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일처럼 하루 낮밤을 동맹하여 술을 마셔댄 기억을 상기했지만 C의 부인의 입덧이 심한 탓에 서둘러 자리를 파한 것이었다.
갓 결혼한 선생의 아내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배가 불러왔다. 생물학적 반응이 그토록 정확하고 어김없이 나타나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스무 살에 시집와 2년째 소식이 없는 아내의 결함은 자궁미숙이었다. 어린애가 아기를 낳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두렵기도 하여 영수는 그저 세월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한편으론 튼튼한 자궁을 가진 그들의 아내들이 내심 부럽기도 하였다. 일찌감치 잠을 청하려고 영수는 이부자리를 깔았다. 바로 그때 하숙집 아주머니가 방문을 두드리며 전화를 받으라고 말했다.
“나요. C선생하고 우리 집에 좀 내려오시오.”
연구주임의 목소리였다. 그의 말투를 언제나 차분하고 공손하였다. 영수는 그의 호출이 무슨 뜻인지 대번에 짐작되었다. C도 술이 덜 깬 얼굴이었다. 연구주임의 집은 하숙집에서 불과 3분 거리에 있었다. 영수의 하숙집도 C의 전셋집도 다 그가 주선한 터였다. 영수보다 겨우 십년 연상인 그는 앞머리가 벗겨져 벌써부터 중년의 중후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부산의 S대 중식학과를 나온 그가 왜 젊어서부터 시골의 초등학교 선생에 입문하였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중식학과를 나온 대학동문들이 T시 인근의 해수면에 굴양식사업을 운영하며 큰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루 한 쪽에 놓여진, 그가 손수 만들었다는 커다란 어항 속에는 수 십 마리의 물고기들이 현란한 색채를 뽐내며 수초사이를 헤엄치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중식학과를 나온 유일한 증표였다. 그는 어항에서 부화한 고기새끼들을 같은 동료교사들에게 분양하는 것을 유일한 취미로 삼고 있었다.
“자, 내 술 한 잔씩 받아요.”
그는 나이 어린 처남에게도 언제나 존댓말을 썼다. 주전자로 부어주는 술은 따끈한 정종이었다. C의 누님이 마루에 차려진 술상 옆에서 잘 말린 북어를 손으로 뜯고 있었다. 예쁘고 아담한 얼굴에 몸가짐이 아주 수굿한 여자였다. 만날 때마다 영수는 내게도 저런 누님이 한 분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술이 조금 깬다 싶은 참에 따끈한 정종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후끈하고 다시 얼굴이 달아올랐다.
“김선생, 학교 선배니까 하는 말인데… 이번 일에 김샘은 물러나시오. C선생도 마찬가지고.”
드디어 기다리던 얘기가 그의 입에서 떨어졌다. 교감을 통해 전달된 우리들의 결의가 예상한대로 개별적인 무마공작으로 진행되는 셈이었다.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단체행동을 한단 말고? 이 학교 개교 이래 많은 훌륭한 졸업생들이 전국에 산재해 있는데 그들의 명예에 똥칠을 해서는 안 돼. 선생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총동창회에서도 가만있질 않을 거라. 그리고 C선생이나 김샘은 나와 무관한 사람들이 아니잖아. 내 얼굴을 봐서라도 당신들은 이 일에서 빠져야만 해.”
둘 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연구주임이 다독거리듯이 다시 한 얘기였다. 예로부터 예향의 도시로 소문난 T시는 예술방면에 재주 많은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서부 경남지역 중에서도 T시의 사람들은 말씨가 빠르고 그 말씨처럼 머리회전도 빨랐다. 비록 지방의 허름한 상업고등학교였지만 역사만큼이나 많은 인재들이 사회곳곳에서 유능한 일꾼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만약 선생들이 수업거부로 지역사회에서 물의를 빚는다면 학교의 명예는 말할 것도 없고 졸업생들의 자존심도 큰 상처를 입을 것은 뻔한 이치였다.
“그래도 교장의 그런 행동은 용납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교장의 무뢰배 같은 언사가 어디 한 두 번이었습니까? 우리들이 굳이 교장을 쫓아내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교장의 사과는 받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C가 타협의 여지를 두고 그의 매형의 눈을 응시하며 던진 말이었다. 연구주임은 교장의 핵심참모였다. 그 자신 교육행정의 경험이 일천하였으므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두루 거친 연구주임을 브레인으로 활용하는 셈이었다. 그래서 모두 연구주임의 서열이 교감 다음이라고 알고 있었다. 채 마흔도 안 된 나이에 교장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므로 필시 그는 가까운 장래에 재단이 운영하는 중학교든 고등학교의 교감자리에 오를 것이란 꿈에 부풀어 있었다. C의 똑 부러지는 어투에 연구주임은 상체를 뒤로 젖히며 잠시 그의 처남을 노려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C의 눈빛도 만만치 않았다. 어느새 연구주임의 벗겨진 머리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영수에게로 고개를 돌려 느물거리는 웃음을 던지며 말했다.
“그래도 너거가 좀 참으면 안 되겄나? 선생들의 뜻은 내가 다음에 때가 되면 교장에게 전하도록 하겠네. 김샘 그라면 되겠제?”
갑자기 하대하는 선배의 비릿한 말투가 비위에 거슬렸다. 맥주잔으로 술잔이 오간 것이 불과 서너 순배였건만 그의 어투에 벌써 술기운이 자욱했다. 순종할만한 가치가 없는 얘기였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의 공든 탑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 사람 두 명은 연구주임이 맡아서 처리해 줘요. 틀림없이 교감이 그렇게 부탁했을 것이다. 오가는 얘기에 긴장감이 돌자 그의 부인이 슬며시 자리를 비켜 방으로 들어갔다.
“선배님 죄송합니다. 저는 다른 선생들과 뜻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선배님의 조언대로 장차 좋은 선생이 되겠노라 내년에 정교사 자격증을 따겠다는 마음도 가졌습니다. 그런데… 저, 선생 안 할 겁니다.”
후배의 당돌한 발언에 선배는 입으로 가져가던 술잔을 입술에 댄 채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공립이든 사립이든, 직장으로서 학교는 인격적으로 서로 존중받는 사회로 알았습니다. 선생은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수하는 목적 외에도 저들의 인격도야를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할 덕목도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실망이 큽니다. 이건 뭐 신발 찍어내는 공장도 아니고… 교장이라는 사람이 꼭 노가다 심장입디다.”
말을 뱉은 김에 속이나 풀겠다고 내처 던진 얘기였다. 그 때서야말고 학교생활 중 제일 짜증스런 풍경 하나가 영수의 머리를 들쑤셨다. 수업종이 울리고 선생이 출석부를 들고 교실로 들어선 뒤에도 앞문과 뒷문으로 먼지를 풀풀 날리며 쥐새끼들 마냥 우르르 뛰어들던 학생들의 무례한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바야흐로 취기가 온 몸으로 번지고 있었다.
“김샘, 학교를 그렇게 단순하게 보면 안 돼. 그 말은 침묵하는 다수의 선생들을 욕되게 하는 소리야. 학교가 무슨 도 닦는 곳으로 아는 모양인데 우리들에겐 어디까지나 직장이고 조직이란 말이야. 그러니 위계질서가 있어야하고 상명하복이 필요한 거라고. 교장선생을 그렇게 비난만 해서는 안 돼.”
연구주임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어찌 보면 옳은 얘기이기도 했다.
“그래도 선생들이나 학교가 이사장이나 교장의 사유물은 아니잖습니까? 선생들의 복리후생비라든가 과학실습교제비 등이 이사장 개인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은 제쳐두고라도 선생들을 무슨 자기 종인 양 취급하는 교장의 횡포는 어쩌란 말입니까? 그런 교장을 타고난 제 성격이려니 하고 침묵하는 것이 무슨 도덕입니까?”
영수의 목소리도 포르테, 포르테시모로 변해갔다. C가 고개를 돌려 놀란 눈으로 그런 영수를 바라보았다.
“김샘 아직 멀었어. 사회생활을 좀 더 해 봐야 철이 들겠어.”
연구주임이 조롱하는 어투로 영수를 눌러 앉혔다. 조롱을 당했다고 생각한 영수는 머리가 지글지글 끓어올랐다. 그 순간 그의 무람한 성정이 폐부에서 슬그머니 머리를 내밀더니 한순간 마치 악령처럼 그를 사로잡았다.
“예, 제가 아직 어려서 세상이치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불의한 것을 보고도 그게 다 세상일이니 묵인하라는 말씀은 아무리 선배님이라 해도 틀러먹었습니다. 저 그만 가보겠습니다.”
발악이라도 하듯 연구주임의 면전에 그 말을 내뱉고는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마루에서 내려 신발을 꿰고 있는 데 갑자기 집채 같은 파도가 부서지는 듯한 둔중한 파열음이 영수의 뒤통수를 때렸다.
뒤를 돌아보니 자리에서 일어선 연구주임의 왼손에 다듬이 방망이가 불끈 쥐어져 있었다. 그가 다듬이 방망이로 제 자식처럼 아끼던 어항을 내려친 것이었다. 수족관만큼이나 큰 어항의 유리가 민망한 모습으로 부서진 채 어항속의 물과 고기들이 술상위로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C는 쏟아진 물이 아랫도리를 흥건히 적시는데도 마치 참선에 들어간 스님처럼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안방 문이 급히 열리면서 C의 누님이 뛰쳐나왔고 벗겨진 머리까지 온통 시뻘겋게 물든 연구주임은 자신의 폭력에 스스로 도취된 듯 이글거리는 눈으로 영수와 C를 번갈아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 어디 너거 맘대로 해 봐. 성윤이 너도… 나나 너거 누나가 어찌 되든 니 쪼대로 해. 일어나 내 집에서 썩 나가!”
연구주임의 발악에 C가 괴로운 표정으로 일어서더니 영수를 따라 나섰다. 조용조용 웃으며 나눌 얘기가 결코 아님을 그도 알아챈 듯 했다.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로 접어들 때까지 두 사람은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영수는 다소 경망했던 자신의 언사에 대해 찜찜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고 C는 연구주임이 그의 누나를 들먹이며 간접적으로 동맹탈퇴를 강권한 말에 속이 쓰렸다. 각자의 집으로 나뉘는 갈림길에서 영수가 C를 불렀다.
“C선생, 다른 선생님들의 동향을 한 번 챙겨 보세요. 아무래도 2단계 행동지침을 준비해야 될 것 같소.”
모레면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올 것이다. 내일 중으로 교장으로부터 무슨 명확한 답변이 없으면 어쩔 것인가. 사전에 2단계 행동지침을 명확하게 해두지 않은 상태라 대책회의가 필요했다.
하숙집 아주머니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영수는 또 다시 잠을 깼다. 시계가 밤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C의 집에는 사회과 선생을 위시한 대표들이 다 모여 있었다. 일 학년 국어를 담당하는 여선생 P와 생물담당 여선생 J도 합석해 있었다. 모두 미혼이었다.
“먼저 J선생님 얘기를 들어봅시다.”
내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사회과 선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녁 무렵이었어예. 웬 남자가 찾아와서 정보과 형사라고 하면서 모레 학교에 출근하지 않으면 구속될 거라고 겁을 주고 갔어예.”
P도 같은 얘기를 주워 섬겼다. 정보과 형사라는 작자들이 주로 젊은 여선생들만 골라 엄포를 놓은 상 싶었다.
“개새끼들! 시국사건도 아닌데 구속이라니… 웃기는 짬뽕이야. 거 보세요. 이사장이 벌써 공권력에 줄을 댄 거라고요.”
영수는 그의 예감이 적중했으므로 자못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을 동원했다면 교감을 통한 직보(直報)가 이사장에게 까지 올라갔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사장은 교장의 깡패 같은 버릇을 눈감아 주고 싶었을 것이다. 교무행정이었든 재단경영이었든 학교재단이 지금껏 별 탈 없이 지내온 것은 패기 넘치는 젊은 선생들의 불만을 적절히 통제해온 교장의 무작스런 성깔 덕이었다고 이사장은 믿고 있으리라. 무지막지한 유신정권의 서슬 앞에 모두가 숨죽이며 엎드려 있는 판에 한낱 선생들이 데모를 하다니. 설마 그러려니. 교장이나 이사장은 하나같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자, 어쩌시렵니까? 교장은 선생들 앞에서 사과할 생각이 없는 듯 하고 형사들까지 앞잡이로 내세워 겁을 주는데…”
영수는 내친 김에 사회과 선생을 몰아붙였다. 단체행동에 대한 결의가 유야무야로 그친다면 모두 미구에 학교를 떠날 결심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이전에도 교장의 눈 밖에 난 선생들은 한 달이 멀다하고 보따리를 쌌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교장은 그 자리를 메울 싸구려 선생들을 마산이나 부산 등지에서 잽싸게 조달해 왔다. 영문도 모른 채 학생들은 그들로부터 열악한 지식을 전수받으며 나이를 먹어갔다. 그러므로 그들만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은 지나간 세월의 숱한 오류들을 결코 반성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내일까지는 기다려보아야 안되겠습니까?”
사회과 선생은 예측할 수 없는 학생들의 소요나 공권력의 개입을 걱정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칫 교육청으로부터의 징계 같은 불이익이 떨어질 것을 염려하는 듯 했다. 교직을 평생의 직업으로 작정한 선생들은 앞으로 그들에게 닥칠 만일의 사태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이렇게 합시다. 내일 낮 동안 학교에서 아무런 기별이 없을 경우 김 선생 말대로 부산으로 가 방송국에 진정서를 돌립시다. 부산으로 가는 막차가 자정에 있으니 내일 밤 모두 터미널로 모이도록 합시다. 물론 단체행동에 반대하시는 선생님들은 개인적으로 모레 아침 정상출근을 하시구요.”
C가 단호하면서도 간명하게 사태를 정리했다.
“부산에 같이 가지는 못해도 저는 출근을 하지 않을 거예요.”
여선생 P가 C의 말을 받아 간접적인 동의를 표했다. 그녀의 말에 힘을 얻었는지 나머지 선생들이 하나 둘 터미널에 나오겠다며 동의를 표했다.
“그러면 사회과 선생님께서 방송국에 돌릴 진정서를 준비해주셨으면 합니다. 교장의 폭언이나 비행에 관한 것 하고 재단의 비리부분을 둘로 나누어서 기사를 작성해 주시지요.”
선생들의 호응에 고무된 C가 마무리도 자신의 몫인 양 분위기를 압도했다.
날이 밝자 재단이나 교장과 특별한 연고가 없는 몇 몇 남자선생들로부터도 형사들의 방문을 받았다는 소식이 답지했다. 힘으로 밀어붙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믿는 것은 군사문화의 소산이었다. 목적이 숭고하면 수단과 방법이 아무리 무례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아군이 죽어야 한다는 승리주의가 그 모든 것을 합리화시켜 주었다. 자정 무렵에 은밀하게 T시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은 그러므로 모두에게 신념처럼 굳어져 갔다.
영수는 부산에서의 행동책을 자임했다. 그가 믿은 것은 TBC 부산지국에서 사회부기자로 근무하던 K선배였다. 그 선배를 찾으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것이라 믿었다. 공교롭게도 늦은 밤에 떠나는 승객은 선생들뿐이었다. 설혹 다른 누가 있었다 해도 영수는 자신들뿐이었다고 기억하고 싶었다. 자신들의 음모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는 생각에, 정보과 형사들을 보기 좋게 따돌렸다는 생각에 모두들 온 몸이 짜릿하고 가슴까지 서늘했던 것이다.
남녀 모두 합쳐 15명의 인원이었다.
조방 앞에서 버스를 내려 새벽 네 시경 그들은 중앙동골목의 어느 여관방으로 스며들었다. 더러는 벽에 기대어 졸린 눈을 감았고 영수와 몇몇 수뇌급 선생들은 머리를 맞대고 행동전략을 꾸몄다. TBC는 영수가 솔선하고 MBC 라디오 방송국은 사회과 선생이 맡기로 했다. 중점기사는 교장선생의 비행과 독선과 얼치기 폭언사례였다. 모월 모일 모시에 뺨을 얻어맞은 자, 얼굴에 소주를 덮어 쓴 자, 데운 정종이 담긴 주전자에 머리를 얻어맞은 자, 얼굴에 침을 받은 자, 제 어미와 헐레 붙어먹었다며 욕먹은 자, 그래서 모두 보따리를 싸고 달아나고 쫓겨났던 선생들과 ‘너 참 잘 생겼네.’하며 어깨를 붙들린 여선생들까지 거의 대부분이 교장의 흉보기 기사였다.
연명으로 서명한 서류를 각자 가슴에 품고 이른 아침 선생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 흩어졌다. 무사히 일이 끝나면 다음 일은 개별적으로 알아서 처신하자고 다짐했다. 진정서에 서명한 자들은 모두 한 몸이고 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일에는 아무도 앞장서지 않는다. 즉 주동자가 없다는 얘기였다. 뒷일은 재단측과 교육청에서 알아서 할 일이었다. 그들은 불량배 같은 교장만 쫓아내면 그만이었다. 재단측의 몇 가지 예산횡령은 단지 추측기사였다. 선생들의 호봉책정에 대한 문제도 사필귀정으로 여겨 주변적인 얘기로 다루었다. 그때 TBC 방송국은 중앙동 대로변의 KAL빌딩 근처에 있었다. 그런데 출근시각이 지났는데도 K선배가 보이지 않았다.
시계가 오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그는 종내 나타나지 않았다. 출입구 로비에서 출근하던 사람들을 살피다가 아무래도 틀린 일이다 싶어 영수는 선생들을 이끌고 2층에 있는 기자실을 찾았다. 노타이 차림의 남방셔츠나 점퍼를 걸친 남자들이 문을 밀고 우르르 들어서자 실내에 있던 말쑥한 신사들이 처음에는 모두 뜨악한 표정으로 출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맨 뒤로 머리 긴 여선생 두 명이 등장하자 그들의 눈빛이 다소 수그러들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하얀 와이셔츠에 물방울무늬의 넥타이를 약간 비틀어 맨, 키 큰 젊은이가 성큼 나서며 그들을 막아섰다.
“실례지만…K기자님을 찾아왔는데요.”
“K기자님은 취재차 지방출장중이십니다.”
아뿔사, 하필이면 오늘에사 부재중이란 말인가. 영수는 처음부터 자신들이 폭로하려는 사안이 기사로서 얼마나 가치가 있겠는지를 염려했다. 그래서 여의치 않을 경우 선배에게 떼를 써볼 요량이었던 것이다.
“저는 K기자님의 대학후뱁니다. 좀 앉아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젊은이는 병아리 기자였는지 고참으로 보이는 사람을 찾아가 몇 마디 애기를 나누더니 다시 돌아와 자리를 권했다. 회의용 소파는 넓고 길었다. 영수와 C선생 등 몇 명이 나란히 앉자 고참기자 두 명이 더 합세하여 맞은편에 정좌했다. 소파에 앉지 못한 다른 선생들은 앉은 자들을 호위하듯 소파 뒤에 서 있었다. 교원증을 내밀어 신분을 밝히고 난 뒤 연대서명한 진정서를 테이블에 꺼내 놓으며 영수는 자초지종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교무실에서 여선생보고 대놓고 가시나라 카고, 얼굴을 향해 물 컵을 날리는 이 사람이 우리 교장선생님이라면… 이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영수의 그 말에 처음엔 심각한 표정으로 주목하던 기자들이 너나없이 입을 배시시 열며 웃음을 흘렸다. 아 도대체 그런 무식한 사람을 교장에 앉히다니. 그런 기막히고 놀라운 일이 다 있었다니. 영수는 그 웃음의 의미가 억눌리고 힘없는 자들에 대한 저들의 연민이고 동정심이라 생각했다.
“저희들이 언론을 찾은 첫째 목적은 이런 작자를 교육계에서 영원히 추방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재단 측에도 장차 투명한 경영을 통해 학교발전에 더욱 적극적으로 노력해달라는 저희들의 뜻을 공개적으로 알리려는 것입니다.”
결론을 짓듯이 비장한 어조로 영수가 말을 마치자 그들은 A4용지로 넉 장에 걸쳐 작성된 진정서를 뒤적거리는가 하면 마주앉은 손님들과 그 뒤에 병풍처럼 둘러선 사람들을 일별하며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하였다. 그래도 기사감은 아냐. 사회적으로 부각시킬만한 사안이 못돼. 한낱 지방도시의 이름 없는 학교에서 발생한 교장과 선생들 간의 소사(小事)일 뿐이야. 그들의 머뭇거림이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사로서의 가치가 없다면 만사휴의가 아닌가. 내일이라도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출근을 하든지, 또는 다른 직장을 알아보며 보따리를 쌀 궁리를 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자 몸에서 땀이 솟고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여기 오시기 전에 재단측이나 교육청 민원창구 등을 이용해 보실 생각은 안하셨습니까?”
자기들이 맡아서 곤란하다 싶은 경우 누구나 의례 하는 말이었다. 너희들도 별 수 없는 놈들이군. 영수는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우리도 내부적으로 조용하게 해결해 보려고 했지요. 저희들의 뜻은 교육현장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겁니다. 교감을 통해 저희가 전한 말은 교장이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반성한다면 선생들 앞에 공개사과라도 하라는 거였어요. 그런데 오히려 정보과 형사들을 앞세워 단체행동을 할 경우 잡아넣겠다고 공갈을 칩디다.”
“흠… 고약한 사람들이군.”
영수가 조금 들뜬 목소리로 그렇게 외치듯이 말하자, 삼십대로 보이는 기자 하나가 마음이 동요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선생님들의 사정과 뜻은 충분히 알았습니다. 저희 방송이 저녁 6시부터 시작되니깐 그 전에 내부적으로 충분히 검토한 후 보도여부를 결정하겠습니다. 보도순서에 밀리면 내일 방송에 나갈 수도 있습니다. 만약 보도가 나가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은 선생님들이 교장과의 싸움에서 반드시 이길 것이라 믿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설 때까지 아무도 사진을 찍자는 말이 없었다. 하기야 기사가 화면으로 나가면 누구의 얼굴을 비춘단 말인가. 고참기자는 진정서만 두고 가라고 말했다.
라디오방송국으로 간 일행들과는 부산역 앞 역전다방에서 재회하기로 했다. 영수일행은 C를 포함한 남자 세 명만 남고 모두 내일 통영에서 보자며 헤어졌다. 다방에 도착하니 사회과 선생 등은 벌써 와 영수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계가 11시 30분을 조금 넘고 있었다.
“라디오 정오뉴스를 들어 봅시다. 운이 좋았는지 MBC에서 대학동기를 만났어요.”
텔레비전 방송국의 반응이 탐탁하지 않았다는 말을 영수가 전하자 사회과 선생이 밝은 얼굴로 위로하듯 그렇게 말했다.
라디오뉴스를 기다리는 동안 영수는 계속 보리차를 청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으나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그에겐 힘겹고 벅찬 일이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방송을 통해 교장에게 일격을 가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내용인즉 초라하기 짝이 없는 일이기도 했다. 예산횡령이란 재단의 비리란 것도 단지 추측기사였으며 그 규모도 너무 소소한 것이었다. 또한 호봉적용상의 문제도 학교 측의 계산착오였다면 더 이상 추궁할 건더기가 없는 얘기였다. 그러므로 단순히 자질미달인 교장의 품행을 두고 선생들의 수업을 마다하고 떼를 지어 방송국에 진정서를 들고 몰려왔다는 것은 어쩌면 명분이 약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든 선악과 명분에 대한 객관적 판단이 선행되어야 하는 법이었다.
“오늘 낮 10시 경, T시에 있는 T상고 교사 일부가 교장의 품행과 재단 측의 몇 가지 비리를 성토하는 진정서를 들고 저희 방송국을 찾았습니다. 교사들이 연명으로 서명한 진정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밖에도 교사일동은 교직원복리후생비, 도서 및 과학실습교재비의 전용 등 재단 측의 몇 가지 비리도 지적하였습니다.”
교장의 적나라한 육두문자는 방송용어가 아니었으므로 생략되었다. 방송국의 주관적인 레토릭도 생략되었다. 다만 오늘 그런 일이 있었다는 식의 간결하고도 건조한 보도였다. 뉴스 말미에 나온 30초가 될까 말까 한 짧은 멘트였지만 매스컴을 탔다는 그 자체만으로 모두는 안도했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의 방송을 같은 시각에 T시의 누가 얼마나 많이 들었을까 생각하니 아쉬움이 뒤따랐다. 역시 라디오보다는 신문이 더 나았을지 몰라. 새삼 그런 후회가 밀려왔다. 메아리도 없이 사라진 아나운서의 멘트를 생각하니 싱겁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모두 다 허탈하고 멍한 표정들이었다.
“교육청에서 이 보도내용을 결코 간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일이라도 진상조사단이 학교로 내방할 것입니다. 자, 그러니 이제 돌아가 학교 측의 기별을 기다려 보도록 합니다.”
사회과 선생이 분위기를 추스르며 일행들을 일깨웠다. 누가 점심을 먹자는 얘기도 없었다. 영수는 부산에 있는 어린 아내를 보고 싶은 생각도 듣지 않았다. 마음이 두서도 없이 초조하기만 했다. 내일이라도 학교나 교육청에서 어떤 대응을 할지 그게 걱정이었다.
T시에 닿은 것은 늦은 오후였다. 함께 뜻을 모았으나 부산에 출행하지 않은 자 중에 학교에 출근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다들 내일 아침까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기가 힘들었다. 젊은 또래 선생들이 자연스럽게 C의 집으로 발길을 모았다. 그리고 임신 4개월인 C의 아내는 마치 혁명가의 아내처럼 태연하게 술상을 차렸다. 7시 무렵이 되자 C가 텔레비전을 틀었다. 혹시나 하고 그는 채널을 TBC에 맞추었다.
너나없이 술잔을 물마시듯 입으로 가져갔다. 보통 때면 술값을 만드느라 둘러앉아 고스톱 판이라도 벌렸겠지만 이 날은 이판사판 모두 술상 앞에 엎드려 술 시합이라도 하는 듯 했다. 7시 저녁뉴스 말미에 드디어 지방뉴스자막이 뜨자 모두들 등을 꼿꼿이 세우며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했다. 부산소식이 끝나고 경남소식으로 넘어가는 멘트가 있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수기로 쓴 편지묶음이 화면을 가득 채우면서 아나운서가 시골선생들의 얘기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모두는 일순간에 ‘아-자!’하며 함성을 내질렀다.
“모두 15명의 선생님들이 서명한 이 진정서는 동 학교 J교장에 대한 비난과 성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선생님들의 주장에 의하면 J교장은 평소 교사회식 자리나 교무회의 석상에서 품위 없는 언행으로 교사들의 인격을 짓밟는 일이 다반사였으며, 이에 참다못한 선생님들의 항의를 할 경우에는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폭행으로 제지했다고 합니다. 특히 3일 전 교직원 세미나시간에 발생하였던 영어담당 이모 여선생님에 대한 교장의 폭언과 폭행사건을 들어 선생님들은 교권확보차원에서라도 J교장이 즉각 물러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재단 측에도 몇 가지 학교운영에 대한 문제점을…”
방송화면은 아나운서의 멘트를 따라 진정서를 한 장 한 장 클로즈업으로 들춰가다가 맨 뒷장의 연대서명란에 이르러서는 카메라를 롱 쇼트(Long shot)로 잡고 있었다. 선생들의 인권보호를 염두에 둔 방송국의 배려였다. 영상과 육성이 함께한 뉴스를 보면서 영수는 너무 통쾌하고 감격스런 나머지 눈물이 다 고일 지경이었다. 모두들 귀가하여 저녁밥상을 마주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재단 이사장과 교장도, 교감도, 연구주임도, 교육청 관계자는 물론이려니와 통영의 주민들도, 전국에 산재한 학교동창생들도.
“라디오 방송에서 먼저 터진 것이 TBC 기자들을 부추겼을 게야. 틀림없이 일이 그리 된 게야.”
C가 큰 목소리로 지붕이 낮은 방안을 후끈, 뜨겁게 달구어 놓았다. 의기양양한 목소리였다.
그날 저녁 T시의 내로라하던 사람들은 저마다 난리법석을 피웠다고 했다. 해안침투를 노리는 밀수꾼이나 공비들에 관한 사건이 아니면 지극히 평화롭고 태평스런 고장이었다. 순진무구한 시민들은 자기들이 사는 고장이름이 뉴스에 언급된 것만으로도 간이 벌름거렸으며, 세상물정에 좀 밝은 사람들은 도대체 이 살벌한 세상에 선생들이 교장을 쫓아내야 한다면 떼를 지어 큰 도시로 출정했다는 사실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했다. 더구나 T시에 살고 있는 나이든 학교동창들은 그날 이후 한 동안 학교이름에 먹칠을 한 교장과 선생들을 싸잡아 욕을 퍼붓고 다녔다고 했다.
다음 날, C의 집에 모였던 일행들을 이끌고 영수는 그의 고향인 거제도를 찾았다. 당장 학교에 등교한 학생들의 어리둥절해 할 모습과 수군거리는 민심을 모른 체 하며 학교에서 날아 올 어떤 통지를 기다리며 T시에 마냥 눌러있기가 민망했다. 또한 가슴 한 구석으로 쓸쓸한 기분이 강물처럼 흘러들었다. 아무리 명분이 크다한들 그 방법이 폭력에 의존한다면, 또는 그 결과가 폭력과 다름없다면 그것은 만인에게 결코 존중받을 수 없다는 자각이 뒤따랐던 때문이다. 선과 악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했다.
텅 빈 해변의 백사장을 거닐면서도 모두들 별로 말이 없었다. 그 시간, 영수는 자신이 살아가야 할 남은 세월에 대해 속으로 진저리를 쳤다. 세상은 결코 자신의 생각만큼 올바르지 않았으며 자신의 마음같이 수월하지도 않았다. 앞으로 그가 걸어가야 할 그 길조차 함부로 내디딜 수 없는 캄캄한 미로처럼 느껴졌다.
사구(沙丘)는 6.25때 포로수용소를 짓느라 왕모래를 퍼낸 이후로 더 이상 예전처럼 부풀어 오르지 않았다. 1959년의 사라호 태풍 때도 많은 모래가 먼 바다로 쓸려나갔다. 그래서 간조시 물이 빠지면 언제나 경사면이 가파른 해변이 드러났다. 어릴 적 벌거숭이 아이들은 날카로운 조개껍질을 주워 점토질인 사면(沙面)에 여러 가지 그림들을 열심히 그려대곤 했었다. 태어나 눈에 익힌 것들은 모두가 황홀하고 신비롭던 시절이었다.
한 순간 매끄러운 사면위로 성큼 밀려온 바닷물이 구두를 신은 발목을 휘감았다. 그리고 곧이어 별이 총총한 밤이 찾아왔다. 그 밤에 T시에 색시를 두고 온 젊은 남자 네 명과 영수는 바닷가의 모래톱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별이 뜬 밤하늘을 오래도록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엉뚱하게도 학교대신 교육청으로부터 결근한 선생들 집으로 직장복귀를 종용하라는 연락이 왔다. 뉴스가 터진 지 만 삼 일 째였다. 시절이 시절이었던 만큼 행여 저들에게 불똥이라도 튈까싶어 교육청에서 서둘러 사태수습에 나선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수업에 복귀한 선생들에게 교감을 위시한 교장의 친위(親衛)들은 생각보다 훨씬 냉담했다. 가뜩이나 시골 면사무소 같은 교무실이 마치 알라스카의 동토처럼 음산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학생들의 반동이었다. 일부 여선생들의 경우에는 무겁한 학생들에 의해 수업거부소동이 발생했다. 교장의 친위들이 빈 수업시간을 돌며 단체행동에 연대한 선생들을 싸잡아 학교이름에 먹칠을 한 몹쓸 인간들이라며 학생들을 선동했던 결과였다.
그날 오후 교육청에서 나온 장학사는, 재단이사장의 사과와 개선방안에 대한 답변을 듣는 것으로 불미스런 사태를 일단 봉합했다. 물론 이번 사태에 연루된 선생들에 대한 권고사퇴나 이직에 대한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는 조건을 전제로 교장에 대한 불신임이나 탄핵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그리고 며칠이 못가 학생들의 분위기도 평정되었다.
그러나 한번 깨어지고 금이 간 그릇은 얼마 안 가 버려지는 법이었다. 9월이 가고 10월이 되자 선생들의 모습이 하나 둘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교장에게 물 컵 세례를 받은 서울내기 영어선생이 맨 먼저 보따리를 쌌고 뒤미처 사회과 선생이 모습을 감추었다. 10월말이 되자 C도, L도 고향인 마산으로 돌아갔다. 학교장과 개별면담을 하고 나온 선생들은 그렇게 하나 둘 학교를 떠나갔다. 따로 송별회를 열어줄 사람도 없었다. 그들이 곧바로 수월하게 직장을 옮긴 것이 재단 측의 배려였는지 저들 나름의 처신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모두 하나같이 교장실을 다녀온 뒤 이튿날로 곧장 자취를 감추었으며 일주일도 안 돼 후임선생이란 자들이 속출한 것이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이었다. 왜, 무엇 때문에 학교를 떠나는지 그들은 함구했다. 누굴 붙들고 의논할 수조차 없게 된 남은 자들의 심정은 그러므로 점점 황폐해져 갔다.
이러구러 단체행동에 가담했던 선생들의 절반이 사라진 셈이었다. 남은 자라곤 성격이 온순하고 물러터진 자이거나 나이 어린 여선생들뿐이었다. 영수는 남자선생들 중에 제일 나이가 어렸다. 그러나 그 또한 결국 11월 초가 되어 교장의 부름을 받고 말았다. 교장실로 걸어갈 때, 영수는 C가 떠나면서 그의 손을 부여잡고 한 말이 언뜻 머리에 떠올랐다.
“교장이 그러더라, 진짜로 누가 주모자인지 그것만 갈켜 달라꼬….”
교장의 얼굴은 일견 바람 든 무우같이 다소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예전의 무소불위한 기상을 애써 되찾으려는 듯 문을 열고 들어서는 영수를 보더니 입을 한껏 앙다물었다. 무슨 말을 어찌 하려는가 싶어 영수는 잠시 긴장했다. 짧은 정적의 순간이 흘렀고 영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문에 붙어 서 있었다. 드디어 그가 영수를 향해 소파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자신은 책상에 일어서지도 않았다. 그런 뒤 등 높은 책상의자에 상반신을 지긋이 눕히면서 힘들다는 표정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
“김샘은 고향도 가깝고 나이도 젊고 해서 우리학교에 오래 있을 사람이라 여겼는데… 어쩌겠노? 이달 말로 사직서를 내었으면 하네.”
“아니 교장선생님, 곧 12월이고 방학인데… 그리고 선생들에 대한 권고사직은 없다고 안 했습니까?”
차라리 서서 그의 말을 듣는 게 나을 상 싶었다. 영수는 낮은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었고 교장을 그와 마주하여 여섯 발짝이나 떨어진 책상의자에 반쯤 눕다시피 앉아 있었다. 자연 영수의 언성이 높아졌다.
“흐-음. 자네, 그게 다 이사장이 체면 때문에 한 말인 걸 몰라서 그러나? 선임 샘들도 하나 둘 자진해서 학교를 떠났지 않았는가.”
겨울방학이 되면 그 틈을 이용하여 다음 직장을 알아봐야겠다고 내심 작정했던 터라 영수는 미처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내 형편을 좀 봐달라는 식으로 애걸복걸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12월 근무를 허락하지 않을 경우 퇴직금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재단 측의 얄팍한 계산이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들자 화가 치밀었다.
“그러면 이달 말로 관둬도 상여금은 달수대로 계산해 주시는 겁니까?”
교장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영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가타부타 말도 끝맺지 않고 선걸음에 문까지 성큼 걸어갔다. 그 때였다. 교장이 고양이 목소리로 ‘김-샘’하며 영수를 불러 세웠다.
“그런데 함 물어보자. 너거 이번 일을 누가 주동했노? 전부 다 모른다 하고, 지가 아이라고 하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에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영수는 입에서 육두문자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고개만 돌린 채 교장의 면상을 향해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내일부터 학교 안 나올 사람한테 그건 왜 물어봅니꺼? 다 떠난 마당에 내가 주동이었다고 말하면 우짤라꼬예?”
그해 12월까지 영수는 T시에서 뭉기적거렸다. 부족한 월급을 보충하려고 학생들을 몇 명 모아 영어과외를 하고 있었던 것이 직접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정작 T시를 떠날 마음이 영 생겨나지 않았다. 일요일이면 한려수도의 섬들을 하나씩 탐방하던 재미며, 섬과 섬 사이 노 젓는 배를 띄워놓고 갓 결혼한 동료교사 부부들과 외줄낚시로 고기를 잡고 놀았던 즐거운 추억들이 자꾸만 눈에 밟혔던 것이다. 그리하여 밤이 되면 영수는 해저터널 부근의 대폿집을 찾아 혼자 쓸쓸히 배회하곤 했다.
겨울이 오자 마지못해 T시의 생활을 접고 그는 부산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아내는 임신복을 입고 있었다. 아내의 불러오는 배를 볼 때마다 영수는 자신이 무슨 큰 죄인처럼 여겨졌다. 그래도 운이 좋아 모교에서 조교생활을 하던 친구의 도움으로 이듬해 3월 그는 서울의 제법 규모가 큰 회사에 취직을 할 수 있었다. 그 뒤로 영수는 오랫동안 T시를 향해 오줌도 누지 않았다.
서울생활에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영수는 T시에서 함께 친하게 지냈던 동료들을 수소문하여 계모임을 만들었다. 교사직을 관두고 포항제철에 입사한 수학선생 K의 집에서 첫모임을 가진 것은 1980년 봄이었다. 전쟁 통에 생사를 모르던 가족들이 재회한 것 마냥 그들은 만나자마자 희희낙락했다. 창원에 새로 생긴 고등학교로 옮긴 C는 제법 중책을 맡아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했다. 영수는 대뜸 그의 매형인 연구주임의 안부부터 물었다.
“남해의 어느 외진 섬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고 있어. 우리가 떠난 바로 그 다음 해 봄에 교장은 알몸으로 쫓겨났다더군. 매형도 그 길로 함께 옷을 벗었고… 교장은 그 고장에서 이제 얼굴도 못 들고 사는 모양이야.”
남의 얘기를 하듯 C는 태연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영수의 심정은 아주 참담했다. 난생처음으로 남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무렵,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자마자 곧 바로 전두환이란 군인이 나타나 국정을 농단하는 것을 지켜본 영수는 그때까지 그가 지켜왔던 신념들을 하나 둘 벗어 던지며 채찍과 함께 그의 발 앞에 던져지는 당근을 주워 먹는 일에 골몰하고 있었다. 또한 그가 또는 그의 세대가 맹신했던 정의란 단지 칼 차고 말 달리던 먼 옛날의 유물이며, 불의를 위한 투쟁 또한 젊은 로맨티스트들의 낭만적 과장일 뿐이라는 생각을 자기변명처럼 가슴에 품고 다녔다. 그러므로 언젠가 시간이 나면 연구주임이 좋아하는 정종을 사들고 외진 섬의 그를 찾아 가리라 속으로 다짐까지 했던 것이다.
연구주임이 오랜 전에 돌아가셨다는 C의 말에 영수는 그만 목이 메여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언젠가 정종을 한 병 사들고 그를 찾아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고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던 지난 세월이 부끄러웠고 외진 섬에서 가난한 선생으로 일생을 마감한 그에게 자신이 큰 죄를 짓고 말았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갑자기 C를 대할 면목조차 없었다. 한 동안 침묵하던 C가 마지못해 영수를 일깨우며 말했다.
“자네 아직도 그 일을 잊지 못하는구먼. 그만 고개를 들게, 이 사람아. 사람은 다 각자 자기가 감당할 만큼만 세상을 살다 가는 게야.”
그 날 젊잖게 생긴 교장선생님은 영수의 공연한 죄책감을 씻어주기 위해 회백반을 앞에 두고 혼자 소주를 세 병이나 마신 뒤 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