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소설

네팔여행

알라스카김 2013. 7. 19. 15:19

네팔여행

 

오랫동안 나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자유(自由)란 사내의 손을 뿌리치고 휘적휘적 홀로 앞으로 나아간다. 사내의 손은 처음 동반자적 작은 격려나 가벼운 충동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어두운 미궁으로 나를 끌어들이는 불길함이었다.

일상은 무료했고 머릿속 생각은 더 이상 나를 생산하지 못했다. 최소한의 활동만으로 기근을 견뎌내는 결빙기의 북극곰처럼 하루하루 나는 흐르는 시간 속에 웅크린 채 언제 자멸할지 모르는 짐승처럼 나태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으로 실금실금 가라앉던 몸을 어느 순간 추스르며, 다리를 힘껏 뻗어 부상을 시도한다. 곧 수면으로 몸이 튀어오를 것이란 예감으로 팔과 다리를 열심히 휘젓는다. 밝은 태양과 신선한 공기가 곧 나를 반기리라. 생각만큼 숨은 가쁘지 않고 두려움도 크지 않다.

불쑥 여행 을 감행한 것은 다시는 기약할 수 없는 내일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2013.06.21(금)

 

 203동에 사는 7148호 개인택시 기사는 세상일에 관심이 많다. 오전 5시에 내가 사는 205동 입구에 차를 대기시켜 달라는 아내의 부탁을 받고,지난 밤 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왔건만,새벽 2시에 다시 3시에 두 번이나 잠을 깼지만, 단골손님의 안면이 두려워 다른 기사에게 부탁하지 않고 이렇게 몸소 달려왔노라 너스레를 떨었다. 광주 고속버스터미널까지 오는 동안 그는 잠을 설친 사람답지 않게 날씨와 비행기의 고도와 내가 찾아갈 여행지에 관한 그의 상식을 계속 주절거렸다. 여행 잘 다녀오십시오. 인사치레의 값으로 그는 남들보다 5천원을 더 올려 받았다.

 

 오전 6시 40분에 출발한 고속버스가 인천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0시 15분. 예상 소요시간 4시간 30분보다 훨씬 빨리 도착한 지라 탑승수속을 밟는 데 시간은 충분했다. 피지여행을 다녀온 게 5년 전이었으므로 공항은 여전히 낯설었다. 출국장 곳곳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욱 그러했다. 오후 1시 35분 출발예정이던 중국남방항공 광저우행 338기가 1시간이나 지연되어 탑승장 홀을 다시 서성인다. 면세점을 기웃거리다가 마헤시군(君) 부모에게 줄 선물로 인삼차와 혹시나 해서 튜브식으로 만든 볶은 고추장을 샀다. 최근 들어 증세가 두드러진 변비 때문에 화장실도 두 번이나 다녀왔다. 토끼똥 같은 변을 조금 보았다. 화장실 곁에 기도실이란 팻말이 보인다. 선교여행객들을 위한 배려가 아닌가 싶었지만 안을 살펴보지는 않았다.

 

 게이트앞 대기석 의자엔 중국인들로 붐빈다. 빈 시간을 채우려고 배낭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를 꺼내 읽기 시작한다. 2005년 NYT가 선정한 올해의 책이라 한다. 작가는 ‘토스또옙스키’의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같은 20세기의 탁월한 ‘총합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세계적 문학 수준에 도달한 작품이라는 평도 따랐다.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 세계적 수준을 탐색하는 데 열중한다.

 

 광저우에서 짜증난 것은 통과여객 탑승구역으로 들어가기 전 이민국의 검사를 받는 일이었다. 냉방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검사대 앞에 1시간 여 줄을 서며 땀을 흘렸다. 카트만두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1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다시 책을 펼쳐 글을 읽는다. 글을 읽지만 지나간 문장들이 기억에 남지 않는다. 특별하다 싶은 곳에 밑줄을 그어도 쉽게 머릿속에 저장되지 않는다. 나이 때문이라면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은 세련되고 차분하였지만 전 작품(상실의 시대)처럼 독자의 감성을 촉발시키는 힘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집중력을 떨어뜨린 원인이기도 했다.

 

 비행기가 카트만두 공항에 닿은 시각이 현지시각 저녁 10시 무렵이었다. 한국은 이미 하루가 지난 새벽 2시. 체류비자(2주) 발급수수료로 20불을 지불했다. 혹시나 싶어 3주를 얘기하니 40불을 달라고 해서 예약된 귀국일자에 맞추기로 한다.

 공항 밖은 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도착장은 인도 뉴델리의 인디라 간디공항보다 규모도 적다. 택시.호텔을 외치는 호객꾼들이 두어 명 나섰지만, 몬순시즌이라 관광객이 드문 것도 일조한 듯, 시골소읍의 기차역처럼 한산하고 침침한 불빛아래 앉아 있는 영접객들도 조용하다.

잠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중에 ‘마헤시’군이 어두움을 뚫고 불쑥 얼굴을 내밀며 다가왔다.

성냥갑처럼 작고 낡은 택시가 어두운 도로를 헤치고 달린다. 일본산 Suzki 승용차라 운전석이 오른쪽이다. 인도를 거쳐 수입된 낡은 중고차로 개인명허로 영업하는 택시는 거의 여일하다. 짐가방을 들어준 청년은 ‘마헤시’의 동생인 ‘키린’ . 나이는 28세. 6개월 전 결혼을 했고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군부대에서 의약품을 취급하는 군인인데 토요일이 공휴일이라 저녁에 외박을 나온 것이라 한다. 

 도로는 차선표시가 없고 건널목도, 신호등도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가 한 번씩 경계석으로 좌우통행을 구분한 곳이 나타났다. 시내로 진입한 차가 잠시 좁은 비포장 골목길로 접어들더니 꼴깍 멈췄다. 차에서 내려 어두운 비탈길을 조심스럽게 몇 발짝 걸어 내려가니 물이 흐르는 천과, 천을 경계로 좌측엔 축구장만한 초목지가 우측으론 3층 콘크리트 건물이 나타난다. 늦은 시각인데도 대문을 열자 61세인 마헤시의 아버지가 나와 두 손을 얼굴 앞에 모으며 손님을 맞는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손님과 주인이 만남의 회포를 서로 나눌 길이 없다. 노인(?)은 마치 장성한 아들이 밤늦게 친구를 집으로 데려온 경우처럼 문을 여닫는 그의 역할이 끝나자 그만 방안으로 사라진다.

 

방 2개와 소파가 놓인 응접실, 샤워시설을 겸비한 수세식 변기가 놓인 화장실 등이 있는 2층은 뜻밖으로 훌륭했다. 한국 돈으로 시가 1억 원짜리 집이라 해서 또 다시 놀란다.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땀을 씻은 후 잠자리에 들었다.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06.22(토)

 

 네팔에서의 공휴일은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이다. 달력은 음력을 기준으로 하고 모든 국경일(종교적 축제일)도 달의 차고 기움에 따라 정해진다. 요일의 날짜는 네팔 숫자와 그레고리력의 아라비아 숫자를 병기하고 있다. 지폐도 이처럼 네팔숫자와 아라비아 숫자를 좌우 상.하단에 함께 쓰고 있다. 우스운 것은 그들의 해(年)는 그레고리력보다 57년이 앞서 우리의 2013년이 네팔력으로 2070년이다. 카트만두에 살고 있는 네와르(Newars)족의 경우는 오히려 880년이 뒤진 1133년이라고 한다. 공식적으로 네팔의 신년은 음력으로 4월 14일이다. 눈이 녹아 농사가 가능한 시기인데 히말리야의 기후와 무관하지 않다. 엉뚱하게도 네와르족의 경우는 10월 하순에서 11월 초순 사이에 신년을 맞이하는데 이는 그들의 종교적 규율에 따름이다. 모든 절기나 공휴일이 해마다 바뀌어 양력을 기준으로 하는 외국 여행객들은 관공서나 은행 등의 서비스를 받을 경우 혼란스러울 것 같다.

 우리의 추석이나 구정에 해당되는 네팔의 가장 큰 축제를 그들은 다사인 명절(Dasain stoppages ; 악마를 물리친 여신 Durga를 찬양)이라 부르는데 9월과 10월사이의 15일을 즐기기 위해 온 국민들이 고향을 찾아 대이동을 하므로 이 기간 중에는 택시.버스.비행기 좌석을 구하기가 힘들뿐 아니라 트레킹이나 산악등반을 위한 포터나 가이드를 구하기도 매우 어렵고 설령 구할 수 있다고 해도 비싼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축일은 제9일(가축 등을 잡는 날)과 제10일(집안의 어른들로부터 축복을 받는 날)이며 은행과 관공서는 제8일부터 제12일까지 문을 닫는다고 한다.

 

 휴일이어서 그런지 아침이어도 사람의 기척이 뜸하다. 잠에서 깬 시각이 오전 5시였다. 여명은 그보다 이른 시각이었는지 이미 창밖이 훤했다. 거실로 나와 커텐을 젖히고 밖을 구경한다. 도랑으로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고 풀이 자란 공터에는 소들이 고개를 숙인 채 풀을 뜯고 있었다.

 마헤시의 약혼이 깨졌다는 얘기는 어제 도착해서야 들었다. 조금 허망했다. 네팔여행을 결행한 것은 그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다. 마헤시는 한국에 나온 지 2년 만에 결혼식을 핑계로 회사로부터 2개월 휴가를 받아 나보다 1주일 전에 먼저 귀국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집안 식구들이 발 벗고 나서서 새로운 처녀를 구하고 있으니 휴가기간 안에 결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낙관하고 있었다.

 그의 혈통은 힌두카스트 중 제일 상위인 브라흐만(Brahman)이고 인구의 13%를 차지하는 브라만-힐족이다. 그러므로 그의 신부가 될 여자는 일테면 같은 족속의,고등교육을 받은,아름다운 처녀여야만 했다. 오늘날 카스트제의 신분계급은 가족의 이름에 그 흔적이 남아 있을 뿐 사회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어지고, 단지 신분이 종족(혈통)과 종족 고유의 종교로써 구분되고 있었다. 그래서 힌두교인은 힌두교인과 결혼해야 하지만 그 혈통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마헤시가 한국에서 같은 공장에 근무하는 ‘언저나’라는 몽골계통(타망족)의 네팔처녀와 한 차례 연애를 시도했던 것이 그 예다.

 

 세수를 마치고 거실에 앉아 책을 읽고 있자니 마헤시가 나타나 삶은 계란 두 개와 주스 한 컵을 담은 그릇을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아침 식사는 언제 하느냐고 물으니 보통 9시가 넘어 한다고 한다. 일반 직장의 출근시각이 오전 10시이기 때문이란다.

 그의 아버지는 공무원 출신으로 지금은 월 180불 정도의 퇴직연금을 받고, 군인인 키린의 월급은 140불 정도인데 동생은 휴일인 토요일마다 집에 온다고 한다. 가족생활비가 평균 300불 정도라고 하니 빠듯한 생활인 셈이다.

 아침 식사로 남방쌀에 콩을 넣어 만든 졸인 된장맛을 내는 피클과, ‘달’이란 채소를 넣어 끓인 국과 나물무침 한 가지가 둥근 접시에 담겨져 나왔다. 인도처럼 진한 카레향이 나지 않아 거부감이 덜했다. 마헤시가 내가 갖고 간 고추장을 꺼내 그릇에 조금 얹어준다. 아침식사가 그다지 거북하지 않다. 식후에는 숟가락으로 떠먹는 요구르트(yak curd)를 내어 놓는다.

 

 식사를 끝낸 후 트레킹을 알아보려고 시내로 나섰다. 유독 찻길주변으로만  먼지가 자욱하다. 그래서인지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 중 검은색 마스크를 끼고 있는 자들이 많았다. 교차로마다 교통경찰들이 서 있었지만 그들이 딱지를 끊거나 하는 일은 없고 서로 꼬인 차량행렬을 푸는 일에 열중했다. 황사의 주범은 사람이 다니는 흙길의 먼지와 낡은 차량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매연이었다. 찻길을 점령한 채 드러누운 소는 그렇다 쳐도 길거리를 배회하는 집 나간 개들의 숫자가 더 나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차도는 오트바이와 삼륜승합차와 일본산 소형택시와 버스와 트럭들로 어디서나 붐볐다. 차선과 신호등과 건널목이 없어 언제 어디서나 비보호 운전자들이었지만 교통은 황토빛깔의 강물처럼 요란하게 또는 소리없이 출렁이며 흘러가고 있었다.

 

 카트만두는 언덕이 많다. 아주 오랜 옛날 호수였다는 고고학적 연구가 뒷받침하듯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몇 개의 큰 분지로 나뉘어져 있다. 네팔인들도 자신의 도시를 카트만두 계곡(Katmandu Valley)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산과 호수로 이루어진 오늘날 미국 씨애틀의 도시모습이 그 옛날 카트만두와 닮지 않았을까?

 인도를 여러 차례 다녀본 나의 경험에 의하면, 카트만두에서 가장 의아한 점이 도시를 점령한 가옥들의 모습들이었다. 무엇보다도 길거리에서 천막을 치고 살아가는 빈민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고, 집들의 구조도 대부분 콘크리트와 벽돌로 세운 2-3층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이유를 1943년에 카트만두를 강타한 대지진에서 찾았다. 그 당시 카트만두에 발생한 지진으로 순식간에 8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16천 명의 부상자와 가옥의 4분의 1일 파괴된 미증유의 큰 재난을 겪었던 것이다.

 카트만두에서 가장 땅값이 비싸다는 두르바광장(Durbar Sq.)을 찾았다. 마헤시에 의하면 가장 요지의 땅값이 평당 우리 돈으로 4-5천만 원이라고 했다. 도로변도 깨끗하고 최신유행의 서구식 패션 옷가게들도 더러 눈에 띄었지만 이마에 붉은 칠을 한 사두(Sadu)와 걸인행색의 아이들도 내 곁을 지나간다.

 

 여행사를 찾아 트레킹 예약을 했다. 여행사에서 나의 체류시간을 감안하여 랑탕(Lang Tang)코스를 권하며 세끼식사와 숙박비에 가이드 비용을 더해 10일 코스에 550불을 달라고 했다. 한국에서 출발할 때 환전한 돈이 전부 600불이었는지라 코스를 8일로 줄여 440불을 치렀다. 트레킹에 관한 사전정보를 마헤시에게 미리 부탁했건만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말았으니 난감했다. 트레킹 비용을 처음부터 고려하지 못한 나의 불찰이었으므로 나중에 여비가 필요하면 마헤시에게 돈을 빌려 쓰기로 마음먹었다.

 

 점심때까지 시간이 남아 트립후반 박물관(Tribhuvan Museum)을 찾았다. 19세기 말에 지은 왕궁으로 2001년까지 세 왕(Kings Tribhuvan,Mahendra,Biendra)이 머무른 곳이었으나 지금은 한때 그들이 거처했던 집일 뿐,아이러니하게도 네팔에는 현존하는 왕족이 없다. 이름만 박물관이었지 왕들이 거처하던 방과 집무실과 접견실의 모습이 고작이었다. 실내에 전등을 밝혀 놓지 않아 창으로 깃든 햇살에 비친 희미한 형상들만 일별하고 나왔다. 왕들의 전신 초상화와 사냥한 짐승들의 박제품들이 기억에 남을 정도다. 특히 접견실 왕의 자리 좌우에 호위군사처럼 사나운 표정 그대로 박제되어 세워진 벵골 호랑이의 모습은 기념할 만 했다. 왕궁의 정원은 연못이 없어서인지 그윽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박물관을 나오니 입구의 돌을 깐 보도에 개 한 마리 팔자 좋게 늘어져 낮잠을 자고 있다. 길가에 무책임하게 버려진 쓰레기와 도로변에 엎드려 있는 걸인이나 때에 절은 노숙자와 다를 바가 없다. 18세기 중반 네팔을 통일하고 국경을 확정한 Gorkha(Pokhara 와 Katmandu의 중간에 위치한 도시)왕국의 Shah왕을 시작으로 왕정이 종식된 2007까지 약 250년에 걸친 왕들의 치세기간은 짧다. 그러나 사라진 왕족들의 이야기만으로 네팔의 역사를 결코 폄하할 수는 없다.

 점심을 먹으러 한국음식점을 찾았다. 카트만두의 한국식당은 믿을 만한 곳이 못 된다. 한국에서 근로자 생활을 했던 자들이 한국음식을 흉내 내어 만들어 내므로 맛에서 견줄 바가 못 된다. 그럼에도 소주 1병의 값이 1,000루피(약 12불)에 달했다.

 

 저녁 어스름. 침실에서 책을 읽는 중 정전이 되었다. 마헤시가 급히 올라오더니 비상용배터리에 연결된 전등을 켜준다. 지금은 우기여서 정전시간이 짧다고 한다. 겨울로 접어들면 도시의 정전시간이 심할 경우 16시간 계속될 때도 있다고 한다. 수력발전으로 생산된 전력을 인도나 중국에 수출까지 하는 나라에서 시간을 정해 놓고 정전을 한다는 사실이 언뜻 믿기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꿈은 ‘해변의 카프카’에서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 나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나의 가장 만족스런 작품’이라며 그가 어깨에 힘을 주었다고 하지만 나는 허전해서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할 지 잠시 망설인다. 평자들의 끼워 맞추기식 해설도 수긍할 수 없다. 서사의 곳곳에 나타나는 그리스 신화와 서양의 고전문학과 현대음악에 대한 그의 깊은 조예가 세계적 문학수준을 뒷받침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다시 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째 풀리지 않는 변비를 걱정하며 잠들다.

 

 

06.23(일)

 

 깨어난 시각이 오전 5시. 배낭을 꾸리는 중에도 세 번이나 화장실을 찾았으나 소식이 없었다. 마헤시가 나타나 ‘히마(Hima: 눈雪이란 뜻을 가짐)’의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고 말한다. ‘히마’는 마헤시와 같은 시기에 홍어가공공장에 취업한 아가씨다. 그녀는 일 년 뒤 네팔에서 결혼식을 치르고 그녀의 남편을 유학비자로 한국에 데려오려고 수속을 밟았으나 한국대사관에서 아내의 취업연고지인 나주시 소재 동신대학교의 입학동의서가 문제되어 비자발급이 거절당한 사연이 있었다. 동신대학교간 서류절차를 당시 이사였던 내가 도운 것을 고맙게 생각해서 이참에 만나보라는 연락이 서로 된 때문이리라. 마헤시를 통해 그에게 트레킹을 다녀온 뒤 보자고 전했다.

 

 집을 나서기 전 마헤시로부터 만 루피(14만 원 상당)를 빌렸다. 버스 출발지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7시. 시외버스터미널인 셈인 그곳은 사람과 차들로 아침부터 붐볐다. 길가의 약국에서 변비약을 사서 나오는데 가이드를 맡은 젊은이가 웃으며 다가왔다. Surendra Thapa(28세.미혼). 몸매는 날렵하고 얼굴표정은 나이에 걸맞게 순진했다. Surendra는 12년간 왕후의 섭정을 받은 19세기 Shah왕조의 어린(9세) 왕세자의 이름과 같다. 청년은 자신을 카스트의 크샤트리아 계급인 체뜨리(Chhetri:군인,관료계급) 혈통이라고 밝힌다. 힌두교를 믿으면 카스트를 바꿀 수 없다. 청년의 영어는 발음이 어눌한데다 나의 말도 쉬 알아듣지 못해 앞으로 의사소통이 힘들겠다 싶었지만 그의 나이와 경력을 감안해 참기로 했다.

 

 마헤시가 생수 2병을 사주고 떠난다. 버스는 출발예정시각인 7:30을 조금 지나 움직이기 시작한다. 인도에서 사들인 TATA그룹의 마크가 붙은 중형버스는 돌이라도 싣고다닐 만큼 견고해 보인다. 우리가 탄 버스는 마을마다 서는 완행이었다. 관광객을 위한 익스프레스 버스나 지프차는 별도계약 사항이었다. 모든 대중교통수단은 개인영업허가로 움직인다고 하니 사고가 나면 당장 사상자에 대한 보상이 문제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버스는 곧장 시외로 접어든 느낌이다. 차가 달리는 길은 산의 허리를 감고 돌고 도는 3미터 가량의 좁은 포장도로다. 반대편에서 오는 차와 마주치면 커브길마다 여분으로 만든 공터를 이용하여 아슬하게 비켜간다. 그래서 커브길을 만날 때마다 버스기사는 박자가 빠른 날카로운 경적을 울린다. 시간이 흐를수록 창문밖 산 아래를 내려다보기가 겁났다. 7부능선을 파고드는 고도 500-700미터 이상인 도로의 한 쪽은 경사각도가 거의 60도로 느껴질 정도로 절박하다. 가파른 산기슭에 있는 논과 밭은 모두 계단식으로 조성되었고 그 모양이 좁고 가늘다. 벼는 2모작으로 지금이 모심기 시기인데 일손이 적은 대부분의 터에는 옥수수만 익어가고 있었다.

 

 가파른 고원지대의 집들은 모두 모둠발로 길가에 세워져 있었다. 도로에 맞대어 길 아래 아슬아슬 나무나 철근으로 기둥을 세워 2층으로 지었다. 이름이 붙은 마을은 산의 경사가 완만하거나 분지를 이룬 곳에 자리할 뿐이었다. 버스는 길가에 집이 있고 타고 내리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나 멈추었다. 자연 버스의 통로는 일쑤 사람들과 콩,옥수수,쌀 등을 담은 곡물보따리들로 가득찼고 더 큰 짐들은 버스의 지붕까지 사람과 함께 오르락 내리락거렸다.  

          

 4시간 넘게 달려온 차가 넓은 분지형 마을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게 한다. 마을 한 쪽으로 급류가 흐르고 수력발전소 같은 건물이 있고 학교와 시장과 주유소도 보인다. 다시 달려 가야할 고원지대를 향해 신들메를 고치는 곳이리라.

수렌드라가 내게 양해를 구하며 오른손으로 밥과 반찬을 섞어 입으로 가져간다. 예전 인도여행에서 식사할 때 손으로 빚어내는 그 오묘한 맛을 경험한 터라 그가 부럽기조차 하다. 일어설 때 식당의 계산대 앞에 붉은 색 화려한 꽃이 접시에 담겨 있어 이름을 물으니 네팔의 국화인 ‘랄리구라스’라고 한다. 5월이면 트레킹코스의 곳곳에 만발한 랄리구라스 군락을 만날 수 있다고 들었지만 지금은 6월 하순, 그 화려한 꽃을 행여 다시 만날 수 있으랴 싶어 급히 사진기를 들이댔다.

히말리아에 다가갈수록 산은 높고 가파르게 솟아 있다. 버스 창가로 내려다보는 길 아래는

천 길 낭떠러지란 말이 실감나 등에 소름이 돋는다. 오후가 되자 산과 산을 휘감아 드는 운해로 먼 곳은 차츰 구름 속에 갇힌다.

람체(Ramche;1,800m)부락에 못미처 갑자기 버스가 승객들을 푼다.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도로를 망쳐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한다. 길에 내려서니 이미 길은 비포장도로인 채 진흙탕이 되어 있다. 람체까지 질척거리는 길을 약 20여 분 걸었다. 오토바이나 몸이 가벼운 차들은 그래도 흙탕길을 지나간 듯 바퀴자국이 선명하다.

람체에서 기다리고 있던 버스가 비포장 길을 비틀거리며 달린 지 채 30분도 안되어 또 다시 손님들을 푼다. 승객들은 묵묵히 차에서 내려 안개 속 산길을 걷기 시작한다. 운해로 시계가 전방 5미터에 불과하다. 곧 비가 뒤따랐다. 수렌드라가 자기 배낭에서 레인코트를 꺼내 내게 입혀주고 자신은 비에 무방비로 걷는다. 솟구친 산의 경사가 급격한 곳을 지날 땐 소름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들에겐 우기의 일상사였지만 내겐 무모한 일이었다. 비씨즌이라 버스를 탄, 그것도 완행버스를 탄 외국인은 내가 유일했다. 그때 밤에 이동하는 차는 절대 타면 안 된다는 가이드북의 경고가 머리를 스쳤다.

산비탈에 자라는 나무들은 뿌리를 옆으로 뻗힐 여유가 없어서 저마다 키만 멀쑥하다. 가지를 제대로 펼치지도 않고 모두 하늘에 닿으려는 의지만 뚜렷하다. 홀로 직립할 땅만 있으면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하나같이 머리를 세우고 있다. 길가에 위태롭게 서있는 집들도 혼자 선 나무들과 진배없다. 인간은 자연을 숙주로 하는 기생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 갈아탄 버스가 깊게 패인 흙길을 좌우로 크게 비틀거리며 나아간다. 구름의 바다를 버스는 배처럼 나아간다. 앞이 캄캄한 천 길 낭떠러지인 좁은 산길을 헤쳐가는 운전기사의 뒷모습은 마치 거센 파도와 마주선 선장의 굳은 어깨를 연상시킨다. 양팔을 죽 뻗어 잡은 둥글고 큰 핸들이 대형선박의 조타기를 닮았다.

버스에 탄 사람들은 하나같이 태연하여 어느 순간 버스가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해도 영영 그만일 것 같다. 나 혼자 바짝 긴장하여 버틴 시간은 불과 10여 분 남짓. 버스가 멈추고 수렌드라가 내게 여권을 달라고 해서 내려가더니 잠시 후 돌아와 여기서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외국인의 출입을 체크하는 군인초소가 있고 초소 아래 길 양옆으로 집들이 도열한 마을이 보였다. 여행사가 트레킹의 출발지로 삼은 둔체(Dunche:1,960m)에 닿은 것이다. 길가에 선 작은 호텔에 들어서니 시계가 오후 5시를 가리켰다. 잠들기 전 변비약을 두 알 먹었다.

 

 

 

06.24(월)

 

 어젯밤 팔과 정강이 아랫부분이 몹시 가려워 모기약을 바른 후 다시 잠들다. 모기 소리가 나지 않아 혹시 빈대가 아닐까 궁금했지만 하룻밤 신세라 쉬이 잊었다. 개 짖는 소리에 놀라 눈을 뜨니 벌써 날이 밝았다. 창밖을 보니 검둥이 한 마리가 컹컹거리며 걸어간다. 멀리서 작은 개들이 연이어 합창을 하고 수탉이 우짖는 소리도 들린다. 먼발치로 산머리는 하얀 운무가 연기처럼 감싸고 있다.

 

 뒤가 마려워 화장실을 찾았다. 변비약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용변을 보았으나 변이 묽고 양도 적었다. 네팔에 온 뒤로 포만감을 느낀 식사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으므로 크게 괘념치 않았다.

호텔의 식사메뉴를 보니 음식내용은 간단했으나 목록은 일견 세계적이다. 나는 토스트 2개와 계란후라이를 시켰고 수렌드라는 네팔식 밥을 먹는다. 여행사가 제시한 계약조건에 술.커피.음료는 개인부담으로 명시되어 있다. 문제는 식사였다. 식사는 한 가지 메뉴만 허용된다는 것이다.그렇다면 계란후라이 값은 내가 지불해야 한다. 한 끼 식비의 상한선을 정해놓고 그 범위 내에서 골라먹든지 더 먹고 싶으면 추가되는 값을 내든지 해야 옳지 않느냐며 수렌드라에게 따졌지만 딱하게도 그는 말귀가 어두웠다. 

 

 한국에서 챙겨온 스틱을 꺼내고 무릎보호 밴드를 착용하고 있는데 호텔주인이 점심때가 되면 비가 내릴 터니 우비가 있어야 한다고 참견한다. 그 말에 수렌드라가 주인에게 얇은 비옷을 하나 산다. 날씨가 흐리고 고지인 점을 감안해서 나는 소매가 긴 얇은 윈드자켓을 꺼내 조끼 위에 입었다. 호텔을 나온 시각은 오전 7시.

차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제 우리가 탔던 버스가 지나간 길이었다. 그 버스는 랑탕코스의 출발지로 유명한 샤브루베시(Syabrubesi)가 종점이었다. 둔체로부터 1시간 거리였으나 수벤드라가 나의 일정에 맞추느라 출발점을 바꾼 것이라고 한다.

 

 고원지대에서 만난 주민들은 모두 티베트 출신의 몽골리안들이었다. 길가의 낮은 집들은 나무와 돌로 얼기설기 바람벽을 세운 뒤 함석을 씌운 것인데 가난에 찌든 형색이 집 안팎으로 확연하다. 길거리나 집 주위를 배회하는 닭과 염소들의 둥지가 다 그 집안에 있다고 하니 사람과 짐승의 잠자리가 어떻게 구분되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드문드문 긴 막대기에 청.백.적.녹.황색의 순서로 세로로 배열된 깃발을 달아 세운 집들이 보인다. 또는 작은 오색기를 줄에 매달아 허공에 걸쳐놓은 모습도 보인다. 언뜻 짚히는대로 티벳불교의 상징물이리라 여겼다.

 마을 한 가운데를 지나 S자 형으로 굽어지는 차도는 계곡을 향해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마을을 조금 벗어나 돌이켜 보니 차도를 중심으로 산의 위아래로 완만한 경사지에 제법 많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우리나라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Secondary school이 있을 정도로 취학아동이 많다는 증거였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 위로 좁은 다리를 건너니 다시 오르막길이다. 길가에 앉아 돌을 깨고 있는 여인을 만났다. 얇게 층을 이룬 편무암들이다. 돌들은 용도에 따라 쪼개기고 하고 부수기도 한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산들은 솟은 모양이 다시 가파르다. 길 오른편의 절벽하단에 길을 내며 바위를 쪼갠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절개지의 방호벽은 전무하여 찻길에 뒹구는 돌덩이들이 자주 나타난다. 절벽을 피해 도로 경계석이 있는 길 왼편으로 걸음을 옮긴다. 가파른 산과 산 사이 물이 흐르는 계곡의 폭도 좁아 길 맞은편 산의 풍경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높은 곳에서 하얀 물줄기가 길게 절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이 이채롭다.

 

 2시간이 넘게 차도를 걸었다. 오르막길이 끝나자 다시 ‘Thulo Bharku'라는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키가 작고 얼굴이 가무잡잡한 사내들이 여기저기 모여있다. 얼굴이 꾀죄죄한 아이들이 다가와 ’나마스테(Namaste: 헬로!)‘라고 외친다. 수렌드라가 생수를 사러 가게에 간 사이 잠시 쉬겠노라 길가에 엉덩이를 깔고 앉는 순간 뒤가 급하다는 신호가 왔다. 살며시 일어나 수렌드라를 재촉하여 길을 서둔다. 그러나 걸음을 함부로 내딛을 수 없을 만큼 괄약근이 요동을 친다. 아무래도 길에서 낭패를 당할 것만 같아 진땀이 흐른다. 집들이 보이지 않는 어느 지점에 이르러 바지끈을 풀 생각이었지만 몸이 그때까지 참아줄지 자신이 없다. 그런데 수렌드라가 여기서부터 산을 탄다는 얘기를 했다. 이 상황에 평지도 아닌 산길을 오르다니...간신히 산길을 택해 몇 발짝 움직였지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눈앞에 집 두 채가 가로막았지만 나는 수렌드라에게 얼굴을 찡그려 급한 사정을 말하고 집 뒤로 휑하니 달려 풀섶에 엎드렸다. 네팔의 변비약은 효능이 탁월했다. 땀에 흥건히 젖은 채 뒷마무리를 하는 순간 손등과 팔이 동시다발적으로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엉겅퀴 같이 생긴 풀인데 닿으면 쏘는 미세한 독침이 잎사귀와 줄기에 촘촘히 박혀있다.

 

 가옥을 뒤로 하고 눈앞의 낮은 산 고개를 향해 오르막길을 내딛는다. 스틱에 의지하여 걸음을 떼지만 금방 이마에 땀이 솟고 숨이 차오른다. 염소똥이 자꾸 발에 채였다. 오르막이 끝나자 산허리를 감고 평탄한 숲길이 나타난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소녀 두 명이 마주오며 낮은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옅은 하늘빛 상의에 검은색 짧은 치마를 입었다. 손에 책가방이 들려있지 않아 그 시간에 아이들이 웬 일로 동무하여 산길을 걷고 있는지 궁금했다.

숲길은 다시 오십여 보 가량 오르막이었다가 평탄했다가를 반복한다. 묽은 소똥과 층이 잘진 소똥이 계속 나타나 발길을 무디게 한다. 그러나 하늘이 보이지 않는 숲의 냄새가 상쾌하다. 숲은 점점 더 깊어지고 여기 저기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로 소란해 진다. 뒤따르던 수렌드라가 가끔 나를 불러 걸음을 멈추면 그가 가리키는 손끝으로 여태 가지에 남아 있는 한 떨기 붉은 랄리구라스 꽃이나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머리털이 휜 랑구르 원숭이(Langur monkey)가 보였다. 좁고 평탄한 숲길은 솔잎이나 떡갈나무 잎 모양의 낙엽이 깔려 있어 내딛는 발에 큰 부담은 없었지만 자주 나타나는 짐승의 배설물들과 오르막길은 갈수록 힘겹게 여겨진다.

 

 문득 숲길이 끝나고 하늘이 열리는 좁은 개활지에 이르러 집 한 채가 나타났다. 트레커를 상대로 음식을 파는 집은 아니었지만 마당 한 쪽에 테이블과 나무의자가 놓여 있어 마치 잠시 쉬었다 가라며 말을 건네는 것 같다. 산물을 받아 내리는 호스가 있어 손으로 물을 받아 마신다. 청량함이 이를 데 없다. 잠시 후 젊은 여인 두 명이 번갈아 나타나 수렌드라의 말 상대를 해준다. 집 뒤로 비닐하우스가 보여 뭘 재배하느냐고 물으니 약초라 한다. 허브계통의 약초는 인도.중국에 수출하는 네팔의 주요 농산물이다.

잠시 쉬었던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우리가 가려던 방향에서 가슴에 큰 칼집을 빗겨 찬 단구의 사내가 나타났다. 칼집의 끝이 비스듬히 위로 굽은 모양으로 보아 남방토인들이 흔히 쓰는 정글칼인가 싶었는데 수렌드라가 쿠쿠리(Khukuri: Ghurkha knife)라고 부른다. 쿠쿠리는 인도를 식민지로 삼은 영국이 일찍이 그 용맹을 인정하여 자주 식민전쟁의 용병으로 삼았던 네팔의 구르카 용사들이 쓰던 칼을 말한다. 영국은 아직까지도 구르카 젊은이들을 선발하여 자국의 용병으로 쓰고 있다.

 

다시 힘든 오르막을 걷는다. 숨이 차고 발에 힘이 빠져 수렌드라를 앞장서라고 하니 그는 말을 듣지 않는다. 가이드의 수칙에 충실한 것이다. 다행히 길은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산길로 접어든 후로 약 1시간 30분가량 의 시간이 흘렀다. 반갑게도 ‘Brabal'마을 입간판이 나타난다. 좌우로 돌을 쌓아 만든 게이트는 농업산림국(Agroforestry foundation)에서 만들었다는 표식이 붙었다. 게이트를 통과하자 몇 발자국 앞에 Green jungle view Res. 라는 식당이 나타난다. 마당에 앉아서 음식재료를 다듬던 30대 초반의 여인이 고개를 들어 뭘 먹으려는가 묻는다. 점심을 먹기엔 아직 이른 시각이다. 마당에 놓인 의자에 무턱대고 배낭과 지친 몸을 풀며 비스켓과 블랙커피를 시켰다. 잠시 식당이름을 지은 어느 재치있는 네팔사내를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머그잔에 담겨진 따뜻한 커피가 일시에 피로를 씻어준다. 여기서부터 1시간만 더 내리막길을 걸으면 목적지인 ’Thulo Syabru'에 도착한다고 하니 다시 힘이 솟는다.

 

 마을이 가까워서인지 소똥이 다시 발길을 더디게 한다. 말.당나귀.노새.소.염소.닭...길을 걸으면서 똥오줌을 누는 짐승들을 헤아려 본다. 제과점의 모닝빵처럼 작고 사각진 똥은 야크의 것이라 한다. 수렌드라의 어조는 확신에 차 있었지만 아직 야크를 보지 못한 나는 긴가민가했다. 산마을의 집들은 여전히 길가의 좌우로 이어졌다. 사과나무를 키우는 밭이 보이고 마당에서 도리깨로 추수한 기장(millet)을 터는 여인들도 보인다. 집과 이어진 밭에는 나뭇가지들을 줄로 횡으로 엮어 울타리를 삼았고 그 울타리의 끝에 대문이랍시고 지면에서 30센티미터 정도의 높이로 나무막대를 하나 가로로 걸쳐 놓았다.

 마을을 벗어난 길에서 ‘나마스테!’라고 외치는 어린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와 주위를 살피니 길 아래 숲속으로 나뭇꾼의 산막이 보인다. 제재된 나무를 세로로 이등분하기 위해 나무기둥을 세운 작업대 아래위로 각각 2명의 사내들이 한조가 되어 길이 2미터쯤 되는 톱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아름이 그렇게 큰 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툴로 샤브루 마을은 평지가 아닌 산의 정상에서 아래로 내려뻗은 한 가닥 작은 능선이었다. 블루스타(Blue star) 호텔의 마당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좁은 길이었다. 방을 찾아 여장을 풀고 시계를 보니 오후 1시였다. 샤워를 끝낸 뒤 땀에 절은 옷들을 물에 헹구듯 빨아서 2층 발코니의 담 위에 걸쳐놓았다. 2층에 하나뿐인 샤워겸 화장실은 옷을 벗어둘 공간이 없는 것이 흠이었다. 트레킹코스에 있는 여관들은 모두 태양광으로 전기를 만들어 물도 데운다. 집집마다 Solar power shower란 표시를 한 것이 그렇다. 겨울의 불편함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숲과 운무에 가린 먼 산들의 모습이 아름다워 다만 위로를 삼는다.

저녁이 되자 운무가 걷히고 먼 산위에 걸쳐 있는 구름사이로 붉은 석양이 비친다. 그러나 개인 하늘은 잠시. 다시 자욱한 운무가 코앞까지 몰려온다. 낮에는 계란면(Egg noodle soup)으로 가볍게 때웠지만 저녁은 내일을 위해 닭고기를 먹고 싶다고 했더니 토마토를 넣어 만든 소스로 졸인 닭고기가 나왔다. 18ml 병에 담긴 ‘Khukuri rum’ 을 시켜 수렌드라와 나누어 마신다. 네팔산 41도짜리 위스키다.

 우리 식탁에 호텔주인인 젊은 사내가 와 앉는다. 손님이라곤 우리가 유일하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외국인들을 상대하므로 호텔주인들은 대부분 영어가 원활하다. 이름은 비루(Beeru) 나이를 물으니 25살이라고 한다. 그 나이에 벌써 자식을 둘이나 둔 가장이었다. 호텔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고 어려서부터 함께 한 일이라고 한다. 호텔 이름이 너무 서구적이어서 누가 작명한 것이냐고 물으니 뜻밖에도 일본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옛날에는 이 집이 아니고 마당 앞 언덕에 대나무로 지은 초라한 여관이었지요. 그 시절부터 알게 된 일본인 단골손님이 있는데 이집을 새로 지을 때 마침 그 일본인이 왔다가 지금의 이 이름을 지어주었어요. 밤중에 누워서 보니 대나무로 엮어 만든 지붕의 터진 구멍사이로 하늘에서 푸른 별이 반짝이더라,그 황홀한 기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는 얘기와 함께...”

 

영어가 유창하다고 칭찬을 했더니 자신은 이래봬도 5개 국어를 구사한다고 한다. 5개국어란 네팔어.영어.티벳어.타망(Tamang)어.셸파(sherpa)어였다.

 

“티벳.타망.셀파족은 같은 몽골인이지만 그 사용하는 말은 다 달라요. 발음상 비슷해도 뜻이 매우 달라요. 그런데 노래는 한 가지로 다 알아 들어요. 우리 가족은 티벳국적도 함께 갖고 있어요. 내 동생은 지금 티벳에서 식당을 하며 살아요.”

 

 벽에 걸린 현악기들을 가리키니 셸파족의 기타라며 크기에 따라 7-8천 루피(약 10불)를 달라고 한다. 울림통이 야크가죽인데 줄을 튕기니 아주 명량한 소리를 낸다. 사고 싶은 마음이 쟁쟁거렸지만 앞으로 나아가야할 길을 생각하며 욕심을 거둔다. 젊은 사내는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을 꿈꾸고 있었다. 자녀의 교육과 여름철 비수기 등을 고려할 때 이 산속의 생활에 더 이상 비젼을 찾을 수 없다는 푸념이었다. 그에게 오색깃발에 대해 묻는다. 세로로 길게 만들어 길가에 세운 것(Dar Cho)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의 건강과 행운을, 공중의 바람길에 걸쳐 줄에 매단 것(Dar Ding 또는 Lung Ta)은 평화.행복.건강.축복을 비는 기도깃발인데 매년 새해에 한 번 새 것으로 바꿔준다고 한다. 아무것도 새기지 않은 백색의 세로깃발은 집에 사람이 죽거나 하는 특별한 경우라고 한다. 그들의 달력은 네팔인들의 그것에 티베트어가 추가된 티베트력을 쓴다. 그러므로 그들만의 축제일을 따로 갖는다고 한다.

 

 산속은 모기보다 파리가 극성이다. 그들은 파리를 애써 잡거나 쫒지 않는다. 인과응보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다문화 인종들로 구성된 네팔이 언제나 평온하고 천연스러워 보이는 것은 그들의 확고한 신앙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튿날 이른 아침. 맑은 하늘과 산정을 밝히는 화사한 햇살을 발견했다. 2층 발코니에서 바라보던 먼 산이 머리에 빙하를 쓰고 있어 반가운 나머지 사진에 담았다.

 

 

 

 

06.25(화)

 

집들이 길을 에워싸고 있다. 그래서 골목집들은 마당이 없다. 건너편 산으로 가기위해 마을을 벗어나 계곡까지 계속 급한 경사를 타고 내려간다. 물레방아로 마니통을 돌리는 작은 취구르 앞에서 여인이 흘러내리는 물에 채소를 씻고 있다. 계곡에 다다르기 전 옥수수로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당나귀들과 만난다. 주둥이에 밥그릇을 매달았다. 드디어 산에서 흘러내린 물들이 모여 포말을 이루며 세차게 흐르는 계곡과 만난다. 스텐강으로 만든 구름다리의 길이가 100미터가 넘을 듯하다. 계곡을 건너 다시 길은 작은 능선을 향해 오르막이다. 맞은 산의 능선에 올라 지난 밤 묵었던 ‘Thulo Syabru' 마을을 바라본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집들의 모습이 마치 비상을 준비하는 새들을 보는 듯하다.

 

 

당신이 그리워 항용 우르럽니다

한 줄기 바람이거나

산맥을 넘는 저 기러기 되어

무수겁의 당신 품에서

히말리아로 살으렵니다.

언젠가 그 날에는  

 

 

히말리아의 산들은 대부분 꼿꼿이 서 있다. 그래서 계곡은 협착하고 산은 저마다 성급하게 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샤부루 마을이 시야에 사라지자 왼편 산 아래 또 다른 계곡이 나타난다. 한 구비 고개능선에 인적없는 집 한 채가 나타난다. 길이요 마당인 작은 터에 쉬어가라는 듯 나무로 만든 의자와 탁자가 놓여 있고 지붕을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놓았다. 그곳에서 두어 송이 늦도록 가지에 붙어 있는 랄리구라스 꽃을 발견했다.

계곡으로 다시 내리막길을 걷는다. 오늘의 목적지인 Lama hotel(Changtang: 2,480m)까지 줄곧 계곡산행임을 나중에야 알게 된다. 계곡물이 넘쳐 길이 물에 잠긴 곳을 건너느라 등산화가 젖고 말았다. 길가에 앉아 젖은 신과 양말을 벗어 물기를 털어낸다. 우리 뒤에서 광주리에 짐을 잔뜩 싣고 포터 2명이 나타났다. 광주리의 멜빵을 어깨가 아닌 이마에 걸었다. 놀랍게도 모두 샌들을 신고 있다. 짐무게가 60키로라 한다. 작은 체구였으나 드러난 종아리의 근육이 마치 조각처럼 강인하고 뚜렷하다. 그들은 샤부로베시에서 출발하여 라마호텔까지 가는 중이었다.

휴식중에 하산길인 처녀 두 명을 만났다. 생긴 모습으로 보아 북유럽에서 온 아가씨들이었는데 가이드도 없이 다니는 모습이 참으로 의연하다. 초행이라면 그들이 사전에 준비한 트레킹 정보가 얼마나 치밀했을까 잠시 생각해 본다.

Bamboo( 1,970m) 마을은 아래 위 산장이 두 채였는데 비수기라 5일마다 손님을 교대로 받는다고 한다. 아랫채 주인부부는 마당에서 대나무 광주리를 꾸미고 윗채 마당에선 주인 남자가 동그란 돌판 위에 물을 끼얹으며 도끼날을 갈고 있다. 그 마당에서 성숙한 닭들이 이리저리 쏘다니고 있다. 수컷이 암컷의 갈기를 물고 기마자세를 취하려 하자 암컷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난다. 그때 집안에서 머리에 수건을 두른 어린 동자가 나타나 낯선 손님을 향해 말없이 다가온다. 사람이 그리운 눈치는 아니다. 잠시 눈을 맞추던 아이가 돌아서더니 마당의 닭들을 물리친다. 가까웠고 목적지까지 남은 시간이 3시간이라고 해서 커피와 함께간단한 식사를 주문했다.

주방겸 식당인 건물벽에 나붙은 간판에 Welcome to bamboo 란 영어와 함께 ‘어서오십시요’란 한글을 발견한다. 한국의 트레킹 애호가들이 찾아오기 시작한 세월이 오래되었다고는 하나 저렇게 흔적을 남기는 집요함은 드물다. 오만한 친절이다.

 

Bamboo를 떠나 계곡의 반대편 기슭으로 다리를 건넜다. 지대가 점점 높아질수록 계곡물은 더욱 성급하다. 마치 미쳐 날뛰는 말처럼 바위를 흉포하게 뛰어오르고 그 소리는 우레와 같이 숲을 진동시킨다.

문득 상선약수(上善若水 )라는 글귀가 머리에 떠올랐다. 노자(老子)는 물의 물리적 성질(생명의 근원,서로 다투지 않음,낮은 곳으로 흐름)을 일컬어 최고.최선.최미의 가치를 물에 비유했다. 또한 천하에 유약한 것이 물이지만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며 물이 모이면 강하다는 것, 낙수가 떨어져 댓돌을 뚫는 이치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래로 격렬하게 치닫는 물소리가 너무 폭력적이어서 물이 곱게만 보이지 않는다. 물도 그 처지에 따라 생각이나 행태가 달라지지 않는가. ‘처지에 눈이 달린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을 만난다. 그래서 저 물이 장차 무엇을 해할지 두려움마저 들었다.

 

날씨가 흐려지더니 나뭇가지 사이로 비가 듣는다. 계곡이 깊어질수록 길이 가파르고 발걸음도 더뎌진다. 스틱을 내뻗는 팔에도 힘이 실리지 않는다. 처음 오르막에선 30분마다 걷고 쉬기를 반복했지만 점점 쉬는 시간이 잦아진다. 숨이 턱에 차면 가이드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쉬고 만다. 고지가 2,000m쯤 되는 곳에서 마침 한 무리 당나귀를 만난다. 몰이꾼이 세 명, 당나귀가 열다섯 마리에 달하는 대규모 행렬이다. 비가 와 당나귀 등에 비닐을 덮어주느라고 그들이 길을 점령하고 지체하는 사이 Surendra가 꺼내준 얇은 비옷을 걸친다. 나귀들이 지나간 자리, 갓 떨어진 배설물 위로 파리들이 사정없이 엉겨붙는다. 블루스타의 식당에서 음식위로 덤벼들던 파리들이 생각났다. 나는 애써 파리를 쫓거나 잡으려 했지만 Surendra는 별무관심이었다. 호텔주인 ‘Biru’는 “여름이 가면 다 사라져요.”라며 나의 예민한 반응을 일축했다. 하챦은 벌레에게까지 생명존중의 신앙심을 보여주는 그들의 영혼앞에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숨이 가빠도 웬지 마음이 허전하고 안타깝다. 비탈의 경사가 급하므로 숲의 풍치를 감상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다시 발길을 멈추고 숨을 몰아쉰다. 산소부족인지 나의 부실한 체력 탓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나의 지친 모습이 걱정된 Surendra가 나의 배낭을 제게 달라고 한다. 포터의 경험이 있는 그가 4-50키로의 짐은 아무렇지 않다고 하는 바람에 염치없이 배낭을 벗어 주었다. 샤브루를 출발하기 전 마헤시가 전화로 나의 몸 상태를 물어와 힘들면 도중에 돌아오겠다고 대답한 마당에 정작 1,000m 를 더 올라가는 내일 여정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몸이 가벼워져 살 것 같은 기분도 잠시, 오르막을 극복하느라 나의 어깨와 다리가 연신 고통의 신호를 보낸다. 호흡을 고르며 오전에 만났던 포터들의 찬찬한 발걸음을 흉내내어본다.

드디어 오늘 산행의 피크인 고개마루에 닿았다. Bamboo를 떠난 후 2시간이 조금 지난 셈이다. Guest house의 안내판에 ' Rimche 2,450m' 라고 씌여져 있고 Tamang Herritage 로 가는 길은 왼쪽이라는 표시도 보인다. 마당의 나무의자에 앉아 신과 양말을 벗고 발을 식힌다. 그때 화살표시의 숲에서 우산을 쓴 타망여인들이 무리지어 나타나 우리가 나아갈 길로 사라져 간다. 따뜻한 커피가 꿀맛이다. Lama hotel 까지 1시간은 더 걸릴 것으로 생각했는데 뜻밖으로 10여 분 남았다고 한다. 나의 걸음이 빨랐다기보다는 가이드의 예측이 잘못된 경우다.

 

Lama hotel은 기대와는 딴판으로 초라하다. 가이드북의 지도에 산장의 이름이 장소를 대표하고 여정을 위해 체력을 비축하는 곳이란 설명이 곁들어져 있어 내딴엔 제법 규모있는 숙박촌을 기대했었는데 마을 초입에 나타난 산장이름이 바로 Lama Hotel이었을 뿐 여느 산장과 다름없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2층 복도 끝에 좌변기가 놓인 화장실이 있다길래 다행이다 싶었는데 나중에 가서 앉으려다 보니 물이 나오지 않았으며 1층에 있는 화장실겸 샤워실도 옷을 벗어둘 공간이 없어 불편하기가 이를 데 없다. 밤엔 복도와 계단통로의 불이 없어 더욱 난감했다.

오후 5시 무렵. 복도가 시끌벅적해 나가보니 충청도에서 왔다는 40대 후반의 한국부부와 덴마크에서 왔다는 모녀 한 쌍이 보였다. 밖은 비가 주룩거리고 있었다. 모두 젖은 옷을 벗어 말리느라 한 동안 부산한 모습이었다. 1층의 로비겸 식당인 방에 나무를 때는 난로가 있어 손님들 모두 여기저기 처놓은 줄에 옷가지를 널어 놓고 모여 있었다. 사내는 네팔방문만 11번 째, 트레킹은 6번 째인데 랑탕코스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놀랍게도 그들은 압력밥솥과 코펠.버너까지 갖추어 와선 된장국을 끓여 둘 만의 저녁식사를 했다. 가이드도 없이 대략의 루트만 지도에서 읽고 다니는 그들이 대견했다. 내가 잠깐 시설의 불편함을 늘어놓자 사내가 이 깊은 산에서 이만하면 됐지 뭘 더 바라느냐며 핀잔섞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4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티벳인 부부와 12살 난 수다쟁이 소녀가 지키는 Lama Hotel의 정경도 쉬이 잊지 못할 그림이었다.

 

 

 

 

06.26(수)

 

한국인 부부는 아침을 마친 뒤 곧장 산장을 떠났다. 빙벽을 타오르는 알피니스트들의 관심이 오직 정상정복인 것처럼 그들의 관심사도 오직 나아가야할 앞길일 뿐이었다. 길동무삼아 함께 가자고 말을 건네려던 나의 생각이 무색할 정도로 그들의 태도는 의연했다.

Gumanchock 까지는 완만한 계곡산행이었다. River side라는 산장이 한 채 나타났다. 젊은 아낙이 침구를 꺼내 볕에 말리고 있었다. 천막으로 하늘을 가린 나무탁자 옆으로 강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평탄하다. 키가 작은 남자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그에게 따뜻한 커피를 한 잔씩 시켰다. 안내판에 ‘Horse riding avaiable'란 문구가 있어 요금을 물으니 Langtang에서 Kyanjan Gompa까지 1인당 200불라고 한다. 두 사람이면 350불에 해줄 테니 주문을 해라, Langtang에 있는 자기 누이에게 연락해 말을 준비해 놓겠다며 몇 차례인가 나를 재촉했다. 그냥 물어본 것이라고 하니 그때서야 물러선다.

 

 

다음 마을은 'Ghora tabela'. 길 왼편으로 드문드문 개활지가 나타나 시야가 한결 편했다.

개활지의 숲들은 정글의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잔디가 깔린 어느 곳엔 노란 꽃잎을 단

이름모를 키작은 야생화가 무리지어 피어 눈길을 사로잡았다. 조금 더 걸어가니 군인들의 주둔지라는 팻말과 함께 트래커들의 신분을 확인하는 초소가 나타났다. 체크맨은 뜻밖에도 군인이 아닌 사복차림의 민간인이었다. 그가 대뜸 나를 보며 한국말로 인사를 건넨다.

“서울에서 왔어요,부산에서 왔어요? 저... 한국어 시험에 합격했어요. 물.담배,학교....”

신나게 한국말을 주섬거리던 그가 신체검사 등 두 가지 절차만 밟으면 곧 한국에 갈 수 있다고 Surendra에게 자랑까지 했다고 한다. 한 때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미국이민의 열병을 앓았던 우리들처럼 네팔의 젊은이들도 한국행 취업열병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후 Surendra는 시간만 나면 내게 한국에 갈 수 있는 묘책을 물어왔던 것이다.

그에게 한국인 부부가 언제 지나갔느냐고 물으니 35분전이라고 했다. 그들이 조반을 챙긴 후 마당에 서 있던 내게 인사도 없이 떠난 때가 우리보다 10분 전쯤이었으니 꽤 부지런히 걸어 간 셈이었다. 식당에서 미역국으로 아침을 먹던 그들에게 한국엔 언제 돌아가느냐고 물었더니 나와 같은 날 같은 비행기였다. 결국 같은 시각,같은 장소에서 마주칠 그들이 이 숲속의 유일한 한국인인 나를 몰라라하며 그처럼 서둘러 걸음을 옮긴 뜻은 무엇일까 짜장 궁금했다. 고속도로에서 한계속도 이상으로 앞차를 추월해 가던 자들에 대해 느꼈던 어렴풋한 연민과 같은 심정이었다.

 

 

개활지에서 다시 앙증맞은 야생화 군락을 만나 풀밭에 퍼질고 앉아 사진을 몇 장 찍으며 쉬었다. 그때 River side산장의 주인 남자가 나무판자 두 장을 등에 지고 Langtang으로 간다며 지나간다.

다음 마을인 Thangshyap은 고지였으므로 평탄하던 길이 어느덧 가파른 오르막길로 바뀌었다. 숨이 차고 이마에서 솟는 땀이 끊임없다. 거듭 오를수록 왼편의 곧추선 바위산들이 다가오며 작은 물줄기를 쏟아내는 폭포를 보여주었다. 그 모습을 담기 위해 자주 디카를 꺼냈지만 실은 숨을 고르기 위한 핑계였다.

 

Thangshyap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산장이라곤 고작 두 채뿐. 손님을 맞는 티벳여인의 인상이 유순하다. 오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돌아가신 큰 이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 고향 거제도의 구천동 이모님은 농사와 방물장사를 병행하며 평생을 전전했어도 늘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으셨던 분이었다. 아담하게 꾸며진 식당의 한쪽 벽에 달라이 라마 사진과 티벳불교 형상물을 꾸며놓고 작은 놋쇠잔들을 차려놓은 것은 여늬집과 다름없다. 창밖으로 산 아래를 굽어보니 운무가 다시 산머리를 감싸며 몰려오고 있었다..

Surendra는 그의 몫으로 시킨 감자튀김을 몇 조각 입에 대더니 배가 부르다며 나에게 미루며 급히 밖으로 사라진다. 아침부터 뒤따르던 길에서 좌우를 두리번거리다 잠시 사라지더니 Riverside에서도 화장실부터 찾던 그였다. 배탈이 난 게 분명했다.

식당밖으로 나오니 어젯밤 숙소에서 만났던 덴마크 처녀가 포터와 함께 마당에 도착해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뒤처져 가이드와 함께 오고 있다고 한다. 마당에 퍼질고 앉아 다리가 아프다며 얼굴을 찡그리던 그녀가 문득 식당 뒤편의 가파른 바위산을 가리키며 내게 저 깃발이 뭐냐고 물었다. 얼핏 바위틈에서 흘러내리는 물인가 싶었는데 바위산의 중턱에서 하얗게 움직이는 것은 과연 펄럭이는 깃발이었다.

자세히 보니 불경을 적은 천인 ‘타르쵸’를 깃대에 매달아 세로로 세워 놓은 ‘다르쪽(Dar Cho)'이었다. 그제서야 마당 한 켠에도 길게 세로로 세운 하얀 깃발이 눈에 보인다. ’다르쪽‘은 건강과 행운의 번성을 소원하며 진언(만트라)이나 다라니경을 찍은 천이나 오색기도깃발을 바람에 나부끼게 만든 깃발이다. 이와 달리 줄에 매단 깃발은 ’다르딩'(Dar Ding) 또는 룽따(Lung Ta)‘라고 하는데 ’다르쪽‘과 마찬가지로 산이나 옥상,고개,다리,물가 등 바람길에 어김없이 매다는 그들만의 종교적 풍습이다. 오색깃발의 다섯 가지 색상(청.백.홍.녹.황)은 토착종교인 브라만교(뵌교)에서 유래하며 각각 하늘,구름,강,부처님법을 관장하는 신,땅을 상징하지만 대체로 모든 살아있는 존재로 이해하고 그에 대한 축복과 신원을 뜻한다고 한다.

 

그나저나 일 년에 한 번 간다는 깃발을 누가 어떻게 저 가파른 곳까지 이르러 깃대를 꽂았을까 쉬이 짐작이 가지 않는다. 깃발이 나부끼는 소리를 ’바람이 불경을 읽는다‘라고 말하는 티벳인들의 신심은 삶의 터전에서 보살의 인격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의 염원일 것이다. 그것은 무수겁의 세월동안 윤회하며 하화중생과 상구보리를 지향하고 살아가는 끝없는 과정적 삶인 것이다. 믿음은 가르침대로 따라 행하는 것. 기독교 신자인 나는 순간 그들의 태생적 믿음 앞에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덴마크에서 온 모녀의 걸음을 걱정하며 발길을 옮겼다. 능선을 타는 코스여서 Lang Tang이 그리 멀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다시 검문소가 나타났다. 검문소 아래로 군인막사가 보이고 대문이랍시고 구멍을 낸 나무기둥에 두 개의 나무막대를 꽂아 걸쳐 놓았다. 검문소 초소벽에 붙은 서양여인의 사진이 눈길을 붙들었다. 사람을 찾는 벽보였다. 네팔어로 쓴 글씨를 읽은 Surendra가 전해준 얘기는 이랬다. 3년 전 둔체에서 가이드 없이 랑탕 코스로 간다고 떠난 30대 후반의 미국여자가 실종되어 헬리콥터로 수색을 하는 등 야단법석이 났으나 아직까지 오리무중이라는 것이다. 가족이 내건 상금은 놀랍게도 미화 2천만 달러였다. 산행 도중 마주친 혼자 다니는 외국인은 모두 남자였음을 기억하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서부개척역사를 가진 미국인들의 모험과 도전정신은 우리 같은 동양인들이 감히 흉내낼 수 없는 것이지만 그녀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소홀한 대비는 이해할 수 없었다. 깊은 산속을 걷는 트레킹이 아닌 단순관광이라면 혼자만의 여행는 얼마나 아름다운 길인가.

랑탕 초입에서 다시 긴 구름다리를 건넜다. 또 다른 골짜기에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길가에 Yak Cud(야크 버터) ,Sale Yak(야크 팜)란 안내판이 보여 야크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우기가 시작되기 전 목동이 야크를 끌고 건너편 삼림으로 들어 가 여름 한 철 키우는데, 싱싱한 풀을 뜯어 먹은 살찐 야크들은 개울물이 얕아진 가을이면 다시 마을로 돌아온다고 한다.

길가에 집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벽돌은 모두 일일이 돌을 깍고 다듬어서 사용하였다. 마을에 닿기도 전에 산장이 나타났으므로 이곳의 숙박업이 한 철엔 꽤 짭잘함을 느낄 수 있었다. 대부분 함석지붕의 단층이거나 목재로 올린 2층집이었다. 마을의 전경이 눈에 잡히는 길목에 여러 채의 산장이 나타났다. 젊은 티벳여인이 지키는 산장의 앞마당에서 커피 한 잔을 시킨 후 그녀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녀가 자기 집에 묵으라고 권했으나 언제나 마당이 바로 길이었으므로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아침 일찍 충청도 양반이 건네준 타이레놀 2알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길은 수월했다. 거의 3,400m에 달하는 고지였지만 Thangshyap 직전의 오르막길 외에는 계속 능선길이어서 숨이 가쁘거나 몸에 어떤 이상징후도 느낄 수가 없었다. 고산지대 사람들은 거리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모든 안내판에는 거리가 아닌 높이만 표시되어 있고 여행 안내서에도 Elevation 만 강조하고 있었다.

마을 입구의 작은 개울가에 물레방아로 마니차를 돌리는 ‘추르뗀’이 나타났다. 한 개면 ‘취구르’,두 개 이상이면 ‘추르뗀’이라고 부른다. 작은 개울의 폭만큼 일렬로 세워 감싼 벽돌집 안에 늘어선 ‘취구르’가 여섯 개였다. Lang Tang 은 넓은 개활지에 자체 농사도 짓고 사는 대규모 산장마을이었다. 길가의 마당이 넓은 산장을 택해 짐을 부렸다. 오후 3시 무렵이었다. 화장실이 좌변기여서 안심이었다. 비수기라 손님은 우리가 유일했다. 마당 한 가운데 떨어져 있는 욕실이 부담스러웠지만 ‘이 높은 산중에서 그런 거 찾으면 안 됩니다.’라던 충청도 양반의 충고가 도움이 되었다.

저녁 무렵, 산 아래에서 운무를 쓸고 오는 찬바람이 방으로 밀려와 한기를 느꼈다. 잠잘 때 감기라도 들면 큰일이다 싶어 식당을 찾아 가 위스키를 시켰다.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Surendra가 다가와 몸 상태를 말하니 자기 방으로 내려가 다운자켓을 가져왔다. 부피에 비해 속에 든 솜털이 가벼워 잘 때 껴입기로 한다. Surendra와 얘기를 나누었던 사람은 독일에서 온 두 명의 청년이었는데 애플파이를 먹으러 이 집을 찾았노라고 했다. 그들은 고산증으로 더 이상 산행이 무리라고 여겨 내일로 하산을 하겠단다. 위스키로 몸이 따뜻해져 안심하고 식사를 주문하는데 Surendra가 자기가 사겠다며 ‘Khukuli Rum' 한 병을 더 추가한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 코스인 내일 산행을 생각하며 술은 더 이상 마시지 않기로 하고 식사가 나올 때까지 그와 얘기를 나눈다. 그의 결혼계획을 물으니 잔치비용만 3라크( 3십만 루피,우리나라 돈으로 3백만원 정도)가 드는데 고향인 Gorkha에서 농사를 짓는 아버지는 네 장가갈 밑천은 네가 벌어라 했단다. 결혼식을 올린다 한들 카트만두에서 생활할 집은 언제 어떻게 장만할 것인가...?

식당에서 돌아와 찬바람을 피해 복도 맞은 편 방으로 짐을 옮겼다. 다운자켓을 입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쉬이 잠이 들지 않는다. 더불어 가난한 네팔 청년의 결혼생각에 한 동안 몸을 뒤척였다.

 

 

 

 

06.27(목)

 

아침 7시에 산장을 나섰다. 우리가 묵은 산장은 드물게도 길과 경계로 낮은 돌담이 쌓여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네모 반듯하게 다듬은 돌의 표면에 글이 부조로 새겨져 있었다. 쉰 살이 넘어 보이는 주인 여자에게 이 돌이 뭐냐고 물으니 ‘마니’라고 답한다. 돌담의 세월을 물으니 할아버지 시절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마니’는 경전을 쓴 돌을 가리키고 ‘마니차’는 불경을 넣은 원통을 말한다. 여행안내서엔 ‘마니’로 쌓은 돌담을 ‘마니 월(Mani wall)'이라고 표현하고 이는 타망족에서 비롯된 유습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목각으로 새긴 우리나라의 팔만대장경과 비교할 때 돌에 글자를 돋을새김으로 만드는 마니의 작업이 훨씬 정교하고 힘들므로 그 공덕이 더 높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가 흐려 런닝셔츠를 안에 입고 조끼에 윈드자켓까지 걸쳤다. 어제는 오전 내내 날씨가 쾌청하여 반팔 차림으로 산행을 하였는데 저녁무렵에서야 양쪽 팔등이 햇볕에 그을려 붉게 변한 걸 알았고 밤중엔 따끔거리며 통증과 발열이 동반했다. 우기라 해도 공기가 맑고 하늘이 가까운 곳이라 복사열이 평지의 두 배는 될 것이라 짐작했다.

 

먼저 마을 뒷산을 넘어야 하는 코스였다. 마을을 벗어나는 곳에 돌담을 두른 밀밭가에서 중년의 아낙이 풀과 잘게 꺽은 나뭇가지를 담은 쇠쟁반에 불을 붙여 피운 연기를 밀밭으로 날려 보내고 있었다. 밀알을 갉아먹는 벌레를 쫓는다고 한다. 연기가 퍼지는 면적이 한계가 있으므로 제대로 벌레를 다 쫓으려면 그녀는 하루 종일 밭가를 돌아다녀야 할 것만 같다.

마을 뒷산 고개에 오르니 마을 입구임을 나타내는 표식으로 길의 중앙에 길게 줄지어 세워 놓은 ‘마니 월’이 나타난다. 진언(mantra)인 ‘옴마니 반메흠(Om Mani Padme Hum)'을 외는 대신 다라니경을 돌이나 천에 새겨 저들의 일상에 품고 사는 것은 순레자들의 오체투지와 함께 생각할수록 유별나고 특이하다.

한 동안 능선길이 계속된다. 가는 길에 띄엄띄엄 흐린 하늘에 나부끼는 ‘다르 딩’이 나타났다.

긴 목재를 허리에 수평으로 짊어지고 가는 포터 둘을 만나기도 했다. 나무의 무게가 거의 장정 한 사람의 값이다. 마지막 목적지인 Kanjin Gompa에서도 비수기를 이용하여 또 다른 건축물이 지어지고 있는 것이리라. 길이 좁은 곳에서는 횡보로 움직이는데 쉬는 횟수가 잦아도 걷는 속도가 우리 걸음과 별반 차이가 없다.

몇 구비를 능선을 타고 넘으니 넓은 개활지가 펼쳐졌다. 계곡의 윈쪽은 여전히 경사가 가파른 삼림이었다. 걷는 내내 시야가 트여 기분이 상쾌하였는데 놀랍게도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야생화 군락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이름을 알 순 없었지만 여러 가지 색깔로 피어있는 그 꽃들 앞에 발길을 멈추고 반가움을 전하는 시간들이 여간 즐겁지 않다. 모습만으로 그 이름을 유추할 수 있었던 야생화는 산철쭉.아기똥풀.제비꽃.개망초.찔레꽃 등이다. 이외에 좌우로 가시같은 촘촘한 가지사이로 붉은 잎을 피우고 있는 키작은 나무와 긴 꽃대 위에 노란꽃송이를 달고 있는 수선화를 닮은 꽃은 마치 아름다운 아가씨를 보는듯 마음속으로 탄성이 절로 나왔다. 개활지가 끝나는 고개마루에 오르니 드디어 눈 아래 가까운 곳에 마지막 목적지인 마을이 보인다. 사방으로 겹겹이 산들로 둘러싸인 작은 분지에 사십여 채의 낮은 집들이 머리를 맞대고 모여 있다.

Kanjin Gompa(3,860m)에 도착한 시각은 09:30. Surendra가 예측했던 11;00보다 훨씬 앞당겨진 시간이다. 그는 아침부터 나의 행보를 염려하고 걱정했던 것인데 나는 오늘 코스에서 아무런 고통도 느낄 수 없었다. 길의 절반은 야생화 무리들과 악수하며 거닐던 순탄한 개활지여서 뜻밖에도 즐거움이 넘치는 산행이었다. 야생화 사진을 찍느라 길에서 소비한 시간이 많았음에도 고작 2시간 반이 소요되었으니 트레킹코스의 마지막 두 구간은 높이에 대한 선입견이 너무 앞섰던 것이 아닌가 싶다.

라마호텔 주인장의 누이가 한다는 Super view 호텔을 찾았으나 주인이 출타중이인지 출입문이 잠겨져 있었다. 그때 바로 윗집의 남자가 나타나 자기 집으로 오라고 권한다. 나를 언제 눈여겨보았는지 한국음식도 맛볼 수 있다며 사족을 붙였다. Guest House라고 밝힌 그 집의 간판은 'Nurling Kanjin Gumba' 라고 씌어져 있었다. 남자가 자기 이름은 “Negrup"이라며 명함을 건넨다. 40대인 부부만 산장을 지키고 있을 뿐 어린 자녀들은 보이지 않아 궁금했는데 놀랍게도 자녀들은 모두 공부하러 카트만두에 나가 있다고 한다. 형편만 허락되면 깊은 산속의 부모들은 누구라도 자식들을 산 아래 큰 마을로 보냈으리라. 사는 형편이 어렵고 일손이 부족한 경우라면 세상 누구라도 자식을 집에 붙들어둘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바닷가 시골에서 집안일을 도우느라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나의 큰 고모님과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그런 경우였다.

여장을 푼 뒤 이 층의 방갈로에 나와 커피와 함께 주인 남자를 청했다. 그는 8년전 한국의 의정부에 있는 바지공장에서 3년 반을 일했다고 한다. 그 때 번 돈을 밑천으로 지금의 산장을 지었다고 하는데 한국 돈으로 땅값을 포함해서 1억 정도가 들었다고 한다. 한 해 산장수입을 물으니 9월부터 익년 5월까지 대략 5천만 원을 번다고 한다.절반이 남는 장사라고 하니 한국의 고만고만한 식당업에 비견할 만한데 네팔의 이 산중이라면 무시할 수 없는 벌이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얘기를 뒷받침하듯 주위로 건축 중인 집이 여러 채다. 어떤 집은 철근 콘크리트까지 사용하고 있다. 모두 카트만두에서 실어오는 자재다. 그 경비와 노역이 가늠이 되지 않는다. 목재의 경우 Lama Hotel( Changtang) 아래의 벌목과 제재를 하는 Syarpagaon 마을에서 목재 5개(판재 1개당 8천원)를 Langtang 까지 한 번에 1개씩 다섯 번 옮겨 나르는 포터의 임금이 4만원이라고 들었다.

 

운해가 산 머리를 감싸고 있어 오후에라도 설산을 보러 뒷산(4,500m)을 올라갈까 하던 생각을 접고 만다. 모처럼 한국음식을 맛보기로 하고 된장찌게를 주문했다. 한국인들의 입맛을 맞추려고 쌀과 된장.고추장은 주인장이 카트만두에서 직접 사다 나른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밥값이 일반 음식보다 4배가량 비싼 800루피였다. 된장찌게는 입에 익숙한 된장맛으로 그리 흠잡을 데가 없었으나 저녁에 먹은 김치찌게는 자기들 손으로 담았다는 김치맛이 낯설어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마치고 났을 때 ‘Super view' 호텔에 여장을 푼 충청도 양반이 우리 숙소로 건너왔다. 그는 국과 밥을 직접 요리해 먹으므로 편의시설보다는 주인이 편한 곳을 숙소로 정했다. 알고 보니 그의 직업은 목사였고 그가 시무하는 교회가 충청도에 있었다. 그의 잦은 네팔방문은 선교사업의 일환이었다. 그가 속한 교파의 특성상 교회 일에 큰 구속을 받지 않는 눈치였다. 김치찌게를 먹으러 저녁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 갔으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Surendra가 배가 고프지 않다며 저녁을 사양한다. 나의 밥값이 부담되어 굶으려나 싶기도 하고 낮에 그가 ’주인이 자기를 속여서 다음에는 절대 이 집을 이용하지 않겠다.‘던 말이 생각나 괜한 걱정이 따른다. 충청도 양반 얼굴도 볼겸 그를 데리고 Super view 호텔로 건너갔다. 밖은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낮 동안 낮은 곳에서 산허리를 감싸며 몰려오던 운해가 이곳에선 결국 비가 되어 내린다. 그러므로 히말리아의 숲은 우기엔 밤에도 잠들지 못한다.

Surendra는 덴마크 모녀들과 동반한 네팔인들과 어울려 저녁을 먹겠다고 한다. 덴마크에서 딸과 함께 온 중년 여인은 구토를 하는 등 고산증세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충청도 양반이 정로환 물약을 꺼내 ‘코리언 네츄럴 메디신’ 어쩌구 하면서 그녀에게 먹기를 강권한다.

 

비를 맞으며 혼자 숙소로 돌아왔다. 침대에 이불을 갖다 두지 않았다. 제 철에 트레킹을 오는 손님들은 으례 자신들의 침낭을 사용한다고 했다. 여름 우기에 찾아온 손님이라 주인이 잠깐 무심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불도 켜지지 않은 복도를 나서서 아래층의 주인을 찾는 일이 번거롭다. 궁여지책으로 전날처럼 다운자켓을 걸치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오슬오슬 한기가 스며들어 다시 일어나 옷들을 이중삼중 껴입고 말았다. 그래도 잠이 쉽게 들지 않는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비로소 머리를 톱으로 써는 것처럼 한 줄기 통증이 찾아왔다. 통증은 단발적으로 뜸을 두고 반복된다. 어렴풋이 이것이 고산증세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급히 일어나 가방을 뒤져 충청도 양반이 준 타이레놀 알약을 찾아 입에 넣고 삼켰다.

 

잠들기 전 내일 일정을 잠시 생각해 본다. 충청도 양반은 내일 아침 혼자서라도 뒷산 정상에 오를 것이라 했다. 랑탕코스의 끝은 인근에 있는 7천미터 고지들의 만년설을 먼발치로 감상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4,500m에 달하는 근처 산을 올라가 넓은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 마지막 남은 일인 것이다. 산 사나이들은 히말리아의 고봉을 정복하는 일은 히말리아의 신이 은혜를 베풀어야 가능하다고 믿는다. 숱한 크레바스와 눈사태 등을 피한다 해도 정상 바로 직전의 가파른 빙벽을 극복하는 것은 인간의 체력과 의지 이상으로 기상이 최대 관건이다. 운무가 시야를 가리는 흐린 날씨라면 700미터 상당의 산길을 오르는 일이 아마추어들에겐 불가능하지 싶다. 애써 올라간다 해도 흐린 날씨라면 구름에 가려 높은 산의 만녀설을 감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굳이 고산증을 무릅쓰고 가파른 산길을 오를 필요가 없지 않는가.

창밖으로 비 소리를 듣는다. 세상일은 아주 멀리 있고 떠날 때 아예 머리를 텅 비우고 와서인지 좀체 생각에 끼어들지도 않는다. 생각을 멈추는 순간 나는 히말리아의 적막한 산이거나 숲이거나 바람에 나부끼는 오색깃발이 되어 있었다.

 

 

 

06.28(금)

 

 

아침에 일어나 하늘부터 바라본다. 산 정상은 여전히 운무가 휘감고 있지만 먼 산의 꼭대기엔 밝은 햇살이 내려와 은색 만년설을 비추고 있었다. 하산이 시작되는 날이다. 마음 한 켠 설산을 마음껏 감상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지만 후일을 기약하며 주인과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소똥만 밟고 와서 소똥만 보고 가도 마음이 즐거운 건 히말리아의 미덕인가?’

아침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의 벽에 한국에서 온 어느 트레커가 그들의 산악회 엠블럼 위에 남긴 낙서를 발견하곤 실소했다. 계곡산행 내내 내가 본 것은 당나귀와 염소똥 뿐이었다. 당나귀가 퍼질러 놓은 똥을 소똥이라고 여긴 그의 기억회로가 의아하다.

여장을 챙긴 후 아랫집을 살피니 충청도 양반이 덴마크 여인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송(宋)씨도 4,300m 고지산행을 포기하고 내려가겠다고 한다. 그의 부인이 동반산행을 강력하게 거부했다고 전한다.

뒤돌아 보니 운무가 산허리를 다시 칭칭 감고 있었다. 하산의 풍경도 남다르다. 오름길에서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급선무로 여겨져 주변 경관을 자세히 감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림길에서는 미처 놓친 그림들이 없나 찬찬히 살피며 걸었다. 야생화 사진도 추가로 몇 장 더 찍었다. 충청도 양반이 오름길에 무려 80컷이나 찍었다고 떠들었기 때문이다. 히말리아에서 만난 산과 숲과 강과 사람들 외에도 개활지에서 넉넉한 햇살을 쬐며 살아가는 야생화도 빼놓을 수 없는 그림이었다. 새삼 세상천지에 존재하는 것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그 순간 무심코 내딛는 발길에 소리없이 엎드려 있던 노오란 애기똥풀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윤도현의 ‘연탄’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함부로 밟지마라

나의 찬란한 한 생애를 짓밟지 마라

작렬하는 생의 순간을

너는 한 번이라도 가진 적 있느냐

 

 

강을 경계로 왼편의 숲은 여전히 창창하고 푸르렀다. 가파른 산비탈에 꼿꼿이 서 있는 나무들의 자세가 저마다 한결같이 대견하다. 저 숲은 완성태인가? 노자(老子)는 쓸모없는 나무가 천수를 누린다고 했다. 그러므로 나무의 꼿꼿함이 오히려 염려스럽기조차 하다.

 

 

숲은 꼿꼿하다

언덕에 기대거나 결코 눕지 않는다

오로지 뿌리에 대한 믿음으로

숲은 스스로 꼿꼿하다

 

 

 

Thangshyap에 못미처 뒤따라온 송(宋)씨 부부와 만나 함께 걷는다. 그들은 Tabela에서 좀 쉬겠다며 우리를 앞서 가라고 한다. Tabela를 지나쳐 인근 숲에서 자생하는 아름드리 소나무 군락과 숲속에서 나무를 베어 송판을 만드는 사람들을 보았다. 나무를 허리에 걸쳐 메고 올라오는 사람들과도 자주 만났다.

 

 

우리는 Riverside(Gumanchok)에서 걸음을 멈추고 점심을 먹고 가기로 한다. 나는 독일인 청년들이 먹던 애플파이를 시켰다. 설탕을 친 커피를 마심은 이제 쉬는 곳마다 필수사항이 되어버렸다. Riverside 산장의 주인 남자에게 아이들은 어디서 사느냐고 물었다. 키작은 남자는 나의 질문에 기다렸다는듯이 넋두리겸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카트만두에서 공부를 하고 있어요. 한 아이에게 일년마다 6라크 정도 돈이 들지요. 저는 이 산장을 비수기동안 맡아서 하고 있는데 먹고 살기가 힘들어 아이들 학비대기가 큰 걱정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후원자가 되어주실 수 없나요? 한국인들은 돈이 많지 않습니까. 주소를 적어드릴테니 좀 도와주세요...“

오름길에 말을 타겠느냐고 몇 번이나 보채었던 그 남자는 이번에도 우는 소리를 거듭하며 나의 동의를 구했다.

'' I'm sorry, I have no idea.''

그의 간청을 한 마디로 물리치고 걸음을 옮겼으나 그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등 뒤를 따라왔다. 덴마크 모녀의 하산소식이 궁금해졌고 간밤에 꾸었던 짧은 속세의 꿈도 되살아났다. 이곳에 와서 새삼 속세의 애증을 붙들고 있으랴 싶어 머리를 흔들어 밀려드는 상념들을 쫓았다.

 

 오후 3시무렵 Changtang에 닿았다. 나는 사람이 끓지 않는 조용한 집을 원했다. 라마호텔 바로 윗집을 선택한 뒤 짐을 풀었다. 샤워를 끝낸 후 옷을 갈아입고 마당에 나섰다. 화단 한 구석에 어린 소년의 키만큼 자란 꽃나무에 핀 붉은 꽃잎이 요조숙녀처럼 찬연하다. 언뜻 장미인가 생각했으나 자세히 보니 나뭇잎만 닮았고 짙은 꽃잎은 목단화에 가깝다.

 나선 길에 라마호텔에 들르니 송(宋 )씨가 마당가에서 버너를 만지고 있다. 주인에게 chowmen용 면발을 사서 칼국수를 끓일 참이라고 한다. 시계를 보니 고작 오후 4시였다. 칼국수를 먹고 온 밤을 견딜 그들이 걱정이었지만 난바다를 자주 겪은 선원들처럼 그에겐 망설임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한국에서 온 여승들이 보였다. 그들과 일행인 스님이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일행이 5명인데 티벳순례를 마치고 내처 네팔로 향한 걸음이라고 했다. 트레킹에 대한 호기심인지 숲속의 구도명상을 위함인지 알 길이 없다.

 

숙소로 돌아와 Surendra를 불러 마당에서 산 미구엘 맥주 1병을 시켜놓고 마신다. 그는 여전히 한국행 취업비자에 관심이 많다. 공식적인 루트공략은 사전학습과정과 숱한 대기인원 등으로 하늘의 별따기인 만큼 나의 특별한 조언을 구하는 것이다. 그와의 대화는 식당으로 옮겨 저녁 9시까지 이어졌다. 그와의 대화가 힘들어 36세인 산장주인의 그럴듯한 회화실력을 빌리기까지 했다. 그들 부부도 남의 집을 세내어 운영한다고 했다. 여주인이 어두움속에서 계속 베틀을 놀리며 모직제품을 만들고 있다. 기하학적 문양의 벨트 하나를 만드는데 꼬박 3일이 걸린다고 한다. 값을 물으니 개당 1,500루피라고 한다. 2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이다. 견물생심, 사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몇 번을 고민했다. 해외에서 민속공예품을 살 경우 오래 간직하며 감상할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먼저 따져보아야 한다.

 해외취업의 문은 좁고, 그들을 노린 사기꾼들은 극성이고...그러나 Surendra에겐 해외취업이 당면 꿈이다. 서두르지 말라,꿈꾸는 자에게는 반드시 언젠가는 행운의 여신이 찾아 온다,그러나 지헤로운 자는 길이 아니면 결코 가지 않는다. 그가 어떻게 그의 생각을 정리했는지 물어보싶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그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산은 오늘밤도 잠들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