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문학상 -우수상2013 부산일보 해양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2013 부산일보 해양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그때 그 삶의 비늘들을 다시 들추어 보다’
- 미시적(微視的) 사건으로서의 1986~1990년 북태평양어장
최희철
1) 역사 없는 것들
역사라고 하면 먼저 ‘거대함’을 떠올립니다. 가령 위대한 영웅이나 왕을 중심으로 벌어진 어떤 사건을 생각하는 게 그것이지요. 물론 그런 역사인식도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그 방식은 역사의 벽을 두껍게 만들어버려 오히려 우리를 역사라는 현장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거나 혹은 거꾸로 그 속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현장 속에 있었던(혹은 마땅히 있었어야 할) 뭇 존재(생명)들은 거대한 벽 앞에서 역사를 자신의 삶과는 분리 된 것으로 여기거나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때 실제 주인공들은 어떤 중심으로부터 기획되고 유포되어 온 ‘거대함’의 그늘 속에서 우울하거나 놀랍다 혹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부정적 허무주의를 경험하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역사라기보다는 거대 권력에 의해 이미 도구화 된 것이며, ‘역사를 만드는 과정’도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기 위한 공정(工程)일 뿐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백번 양보해서 그게 역사를 이해하는 하나의 관점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역사란, 강물의 탕탕한 흐름 즉 무수한 사건과 그 사건 속에서 삶을 살았던 구체적 존재들의 운동성으로서의 궤적 그 자체가 아닐까요.
역사란 구체적 삶을 살았던 존재들의 숨결입니다. 거대한 역사의 이면에는 이름 없는 혹은 규정할 수 없는 ‘주변’들이 사건의 파편처럼 ‘작용과 반작용’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걸 ‘미시적 사건들’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삶의 비늘과 같은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할지라도 냄새를 맡아 보면 기억이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것들 말이죠. 하여 현재의 삶을 친친 감으면서 마치 흑백사진의 인화(印畵)과정처럼 모든 것들이 다시 드러나게 되는 것이죠. 그건 삶이 딱딱한 고체로 이루어진 양적(量的)인 그 무엇이 아니라 끈적끈적한 액체로 이루어진 질적(質的)인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게 아닐까요. 그것은 사건들을 통해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우리가 늘 역사를 통해 반성의 지대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거에 갇혀 버리는 꼴이 될 겁니다. 차라리 지금을 통해 사건들의 기억을 새롭게 구성해 보려는 것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미시적 사건들이란 늘 현재의 맹아(萌芽)와 같은 것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원양어업’ 역시 국가나 자본이 중심이 되어 독점적으로 생산 되어왔고 또 그들이 관리하고 소유했었던 ‘거대함’의 역사만은 아닐 겁니다. 그리고 당시 어선에 승선했던 특정인물의 관점도 아닙니다. 차라리 그 모든 것들이 뒤엉키면서 만들어내었던 삶의 운동성 같은 것이죠. 거친 바다 위에서 파도 및 시간과 싸웠던 모든 어선원들, 인간의 욕망 대상이었던 바다와 포획된 생명들이 만들어낸 사건들 말입니다. 더불어 비록 바다라는 현장에 함께 있진 않았지만 어선원 가족, 그리고 육상의 직원 및 산업정책과 자본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양어업이라고 하면 흔히 갖게 되는 이미지, 즉 거친 바다에 도전하여 자연을 개척한다는 ‘정복자’의 일방적인 관점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원양어업의 역사’는 산업정책, 자본, 기쁨과 성공, 슬픔과 실패 혹은 욕망과 억압, 생산과 파괴 등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직조(織造)된 미시적(微視的) 사건들이며 더불어 ‘거대한 기억’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그 기억은 어떤 시기와 장소에서 일어났던 과거적 실체(實體)가 아니라, 지금의 관점으로 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에 관한 욕망이란, 한 때 우리의 몸과 맞닿아 있던 ‘사건들’이 어떻게 작동하였으며, 그것들이 현재의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지를 알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역사를 기술(記述)’하는 것 역시 ‘전문가’들만의 영역은 아닐 겁니다. 현장 곳곳에서 겪었던 사건들이 너무 사소하고 정리되지 못한 것이라서 사료(史料)가 될 수 없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소하고 정리되지 못한 사건들’은 그것 자체로 생생한 현장의 숨결이었고 ‘거대 역사’에 숨겨진 억압과 허구성을 고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현장의 숨결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데, 그것은 오히려 그게 기록되지 못했다는 것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성과 논리로 열 수 있는 의식의 영역이 아니라, 현장에서 사건을 겪으면서도 말하지 못했거나 당시엔 알 수 없었던 의식 이전의 세계, 가령 무의식의 욕망과 관련된 것들이었으니까요. 안타깝게도 ‘역사의 주인공’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겪었던 사건들을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그들에게 ‘도구’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게 ‘역사 없는 것들’의 의미입니다. 하지만 기록되지(하지) 않았다고 해서 사건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살아왔었고 또 살아온 것들을 말해왔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보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그걸 말 할 수 없었다는 걸 생각하면 안타까움은 더 깊어집니다. 바다가 존재했었고 그곳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바다를 닮은 아니 바다와 함께 삶을 살았던 존재들의 사건들이 기록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다가 늘 ‘생산성’과 관련된 ‘효율과 성과’의 영역으로 보여 지는 것은 분명 우리 문명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몸은 모든 사건들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몸이 갖고 있는 거대한 운동성으로서의 기억말이지요. 아니 거대한 기억의 운동성이라고 해도 될 겁니다. 하여 오래된 것일수록 더 강한 분출 에너지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잠재성의 세계에서 천천히 운동하는 사건의 기억들 말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란 과거의 것이기에 지금은 생각할 필요가 없거나 박제(剝製)화 된 장식물이 되어서는 안 될 겁니다. 우리가 겪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은 과거에 실제로 일어난 것이고 과거를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단순한 되새김질이 아니라, 어쩌면 살아있는 현재를 지향(指向)하며 터져 나오는 방언(方言)과 같은 것이니까요. 당시 그곳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하였거나 말해지지 않았던 것들이 기억이라는 통로를 타고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미세한 사건으로서의 북태평양어장’은 중심이 과거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유정(油井)과 같은 ‘기억의 덩어리’면서 현재와 쌍방향으로 작동하는 어떤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기록하려는 것들은 비록 제 손으로 기록되는 저의 기록이긴 합니다. 하지만 당시 ‘잡어(雜魚)’처럼 살았던 주변인(周邊人)의 시각으로 기록된 것들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당시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욕망과 억압에 관한 성찰이기도 합니다. 우린 보통 바다 혹은 승선생활이라고 하면 낭만적이거나 막연하게 자연에 대한 거친(혹은 아름다운)도전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바다 역시 인간이 살아가는 하나의 구체적인 장(場)이었을 뿐입니다. 그곳에는 너무 잡다(雜多)하고 작아서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있었던 고민과 행복 그리고 갈등과 협력들이 공존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든 지금이든 바다는 우리 삶과 동떨어진 곳이거나 쉽게 닿을 수 없는 막연한 ‘이상향(理想鄕)’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세상을 사는 방법으로서의 독특한 ‘현장’이었고, 자신의 꿈과 우상(偶像)이 발견되거나 다시 쓰여 지기도 하는 ‘살아가는 공간’이었습니다. 마치 갑판에 갓 올라와 펄떡이는 잡어처럼 우린 그곳에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잡어처럼 사는 것, 그게 우리의 사는 방식이었고 바다 위에서 거친 파도와 힘든 노동을 견디게 해 준 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운명을 긍정하면서 삶을 사는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선원들 그리고 트롤어구와 생명으로서의 수많은 물고기들, 거대 욕망과 소수의 욕망이 뒤섞이는 그 모든 것들의 끈적끈적한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싶습니다.
<잡어(雜魚)-최희철>
어선에서 돈이 되지 않는
어획물이 잡어다.
잡어는 렛고 컨베이어를 통해 버려지거나
틈새에서 냉동되어
어떤 규정성도 갖추지 못한 채
어창에서 뒹군다.
악천후와 함께
바다는 바람에 취해 휘청거리고
산더미 같은 파도가 갑판을 때린다.
쓰러질 듯 심한 롤링으로
머리털이 주뼛주뼛 설 무렵
하여 먹은 것이 모두 게워 올려지는
힘겨운 피항(避航) 시간
마이너스 30도, 어창(魚倉)에 숨어들어
소주병을 까며 잡어의 어육을 먹는다.
슬픔은 모두 왜 그렇게
차갑고, 딱딱한지...
잡어를 먹는 놈들은
모두 잡놈들이다.
2) 원양어업에 대하여
그 이전에도 그랬겠지만 1980년대의 바다, 특히 원양어업은 거대한 기계문명과 자연과의 충돌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개척한다는 의미로서의 바다 즉 나침반, 시계, 망원경, 범포, 천측도구 같은 수동적인 항해 도구를 갖고 도전정신으로 헤쳐 나갔던 바다는 지금 우리 앞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때의 ‘도전 정신’란 일방적인 ‘서구(西歐)’의 관점이었을 뿐입니다. 가령 어떤 항로나 대륙을 발견하고 어장을 개척했다는 것은 매우 주체(主體) 중심 혹은 인간중심적 관점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왜냐하면 그곳엔 개척을 주도했던 특정 인간의 욕망이 작동하기 수천 년 전부터 바다와 생명들이 있었고 그곳에서 그런 것들과 어울려 삶을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인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양어업이란 ‘도전이나 개척’이라기보다는 그곳에서 이미 살고 있었던 모든 것들에게 우리 삶을 기대려 했던 방식 혹은 시도였다고 해야 할 겁니다. 그것은 주변에 대하여 자신이 겸허하게 고개 숙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변을 자신의 시각에서가 아니라 ‘주변의 시각’에서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미 원양어업은 거대한 생산체계를 갖춘 산업시스템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원양어업은 자본의 욕망을 위한 아바타(avatar)였다는 말이죠. 연근해가 아니고 10일 혹은 몇 달씩 항해해서 먼 바다로 나가는 것은 모두 ‘경제적 이익’과 관련된 것이고, 그것은 자본의 욕망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삶의 방식을 어떻게 변화시켜왔는지를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인간이 걸어 온 길이 모두 영광스러운 것은 아닐 겁니다. 물론 그걸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또는 폄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원양어업의 공과(功過)를 잘 들여다보되 지나친 것이 있다면 덜어내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삶은 모두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니까요.
3) 북태평양(bering sea)어장과 수산회사들
저는 1986년경 가을, 인도양의 오만(oman)어장에서 30개월 조업을 마치고 귀국하였습니다. 당시 특례보충역에 편입된 상태라 귀국하면 6개월 정도는 쉴 수 있었습니다만, 돌아와 보니 가정형편이 그렇게 개선된 것도 아니라서 북태평양 트롤 수산회사에 근무하던 선배의 꾐(월급도 많고 두세 달에 한 번씩은 집으로 돌아 올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 우여곡절 끝에 북태평양(이하 북양) 어장으로 출어하는 트롤(trawl)어선에 승선하게 되었는데 오만에서 1항사로 근무하였던 것과는 달리 2항사로 승선하게 되었습니다. 북양어장은 오만어장과는 다른 게 많았습니다. 오만어장이 349~469톤 정도의 트롤어선으로 오만 근해의 저서(底棲)어종을 대상으로 하는 저층트롤어장이었다면, 북양어장은 1,000~5,500톤 정도의 대형트롤어선으로 수심이 평균 3,000미터 가까이 되는 공해(公海, open sea)어장에서부터 저서어종을 대상으로 하는 알라스카 연근해어장이 있었고, 조업 방식도 공해어장에서는 중층 트롤어업이면서 우리 어선이 직접 그물을 던져 조업하는 ‘자체조업’이었고, 알라스카 연근해 즉 미국의 배타적 경제수역 내(exclusive economic zone, EEZ , 經濟水域)로 들어가면 우리의 자체조업이 아니라 미국의 자선(子船, 150~300톤 정도 되는 어선)들이 잡아주는 어획물을 받아서 가공처리하기만 하는 합작 사업(joint venture)이라는 걸 하였습니다.
흔히 원양(遠洋)이라면 막연하게 멀리 있는 넓은 바다라고 상상하지만 실제로 ‘원양어업’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가령 오만이든 알라스카어장이든 모두 연안과 몇 마일(nautical mile, 海里, 해상 거리의 단위 약 1, 852m.) 떨어지지 않은 해역에서 조업을 하는, 그곳에서 보자면 ‘연근해(沿近海)어업’이라고 할 만한 가까운 해역이었습니다. 다만 북양의 공해어장은 깊은 수심과 육지와의 거리를 생각해 본다면 진정한 원양어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북양의 공해어장이란 지금의 러시아, 미국의 영토로부터 200마일보다 먼 즉 배타적 경제수역의 바깥이었으니까요.
오만어장은 위도(緯度)가 북위(北緯) 20도 정도의 아열대(亞熱帶)지대라서 매우 더운 해역이었지만 북양어장은 위도가 우리나라보다는 훨씬 높은 북위 37도~60도라서 매우 추운 해역이었습니다. 그곳에도 계절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더위는 거의 없었다고 해야 할 겁니다. 간혹 봄이면 알라스카의 강으로부터 얼음 덩어리(遊氷)들이 떠내려 와서 배의 운항을 어렵게 했었는데 그 이름만으로도 춥고 을씨년스러운 날씨의 연속이었습니다. 인간에게 춥거나 덥다는 것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다양한 삶의 양상을 만들어냅니다. 특히 추위란 더위와는 달리 삶 폭을 움츠러들게 하면서도 그것에 상응하는 응전을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북양 어장은 추위 그 자체가 하나의 극복하기 힘든 노동조건이었고 위협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거대한 파도가 배를 덮치고 그 파도의 힘에 휩쓸려 내려가지 않아야 한다는 안간힘이 늘 가슴 한 곳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상상력의 범위에서 발휘되는 이미지들이 아닙니다. 정말 리얼(real)한 것이지요. 추위는 하늘이나 바다 뿐 아니라 마치 초월적 기운처럼 온 세계에 내재해 있었기 때문에 더 리얼한 것처럼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두려움 앞에 선 리얼한 삶! 하지만 그런 두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그물을 던지고 고기를 잡으려 했습니다. 그게 인간의 두려움에 대한 응전이자 살아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무리 혹독해도 생명은 살 틈을 찾아내고 말지요. 그게 없었다면 생명 아니 우리는 지금 없었을 겁니다. 그러므로 북양어장은 더운 해역의 오만어장에서 돌아온 저에게 새로운 욕망을 일으키게 했던 것 같습니다. 마치 전의(戰意)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생명은 스스로 자기를 조직하여 주변을 물들여 나갑니다.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관점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없는 자연 혹은 바다는 무의미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인간이 바다를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바다와 인간이 분리된 게 아니라는 의미이지요. 만약 인간이 없다면 바다는 순수한 물질덩어리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곳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생성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은 늘 무엇에 대한 의식이니까요. 그 인간 앞에 바다가 있고 바다 앞에 인간이 있습니다. 서로 평등하고 동시적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인간과 바다는 자율적이면서도 서로를 지향하고 있는 셈이지요. 제가 생애의 일정기간을 바다와 함께 했다는 게 그런 의미였기를 빕니다.
인도양의 오만어장 그리고 대서양의 다른 어장들은 기지(基地)라고 불리는 연안의 항만물류도시를 중심으로 어업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기에 선원들은 항공기 등을 이용해 몸만 기지로 가면 되었습니다. 가령 라스팔마스, 오만, 파키스탄, 뉴질랜드, 포클랜드 같은 어장이 그랬는데 그런 곳에서 조업하는 어선들을 통칭 ‘기지선(基地船’)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곳에서 일정한 계약 기간 동안 머물면서 기지를 중심으로, 그곳에서 보자면 연근해 어장에서 조업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당시 30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집을 떠나서 생활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한 달에서 두 달 정도 조업을 하면 만선(滿船)하여 기지로 돌아갈 수 있으므로, 흔히들 상상하는 오랫동안 땅과 격리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령 오만 같은 이슬람 지역은 종교적인 이유로 여러 가지 즐거운 일들이 대부분 통제된 생활을 하였지만, 다른 기지의 경우 조업에서 지친 몸과 정신적 스트레스를 충분히 풀 수 있는 다양한 즐거움이 기지 주변에 널려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기지를 중심으로 하는 어업은 상대적으로 자본금이 작은 수산회사들이 진출했었는데 임금은 월급제가 아닌 ‘보합제(步合制’)였습니다. 어선에서의 보합제란 매월 일정한 생계비를 받고 어기(漁期)를 다 마치면 어획성적을 정산(精算)하여 이익 금액을 직급별로 나누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어획물 생산량과 가격, 어선에서 조업 중 발생한 비용 등에 대한 정보를 잘 알 수 없는 선원들은 제대로 배당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게다가 구체적인 계약 조건을 선장 이외에는 잘 알 수가 없어서 귀국하여 정산할 때 회사 혹은 선장과의 심각한 갈등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대체로 이런 계약의 경우 회사는 선장과만 계약 할 뿐 다른 직급의 노동조건과 임금조건은 모두 선장에게 일임되었습니다. 하지만 선장 뿐 아니라 다른 직급의 선원들도 좀 더 많은 배당금을 받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에, 한 번 갈등이 발생하면 바닥을 드러내는 싸움을 벌이기도 하였고 판결을 위해 법정까지 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선원들이 피해를 보는 사례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가령 선원의 ‘중도귀국’ 같은 게 바로 그것입니다. 기지에서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승선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선원에겐 선장이 중도귀국이라는 처벌 아닌 처벌을 내렸는데, 그렇게 될 경우 왕복항공비 및 체류비용을 해당 선원이 고스란히 감당해야했기에 중도귀국 당할까봐 전전긍긍하였고 그것으로 선원들의 불만을 잠재우는데 악용되었던 점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북양트롤어선은 기지선들과는 달리 ‘월급제’였습니다. 수산회사들도 비교적 자본금이 큰 회사들이었는데, 선원들 하나하나가 승선하기 전 육상의 지사(대체로 부산에 있는)로부터 자신의 임금 조건에 대한 사항을 통보받고 직접 계약을 하므로 월급제 방식은 보합제 방식과는 달리 임금에 대한 불화가 거의 없는 편이었습니다. 이것이 육상의 직원으로부터 배에서의 구체적인 노동조건과 강도를 설명 들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선원들이 자신의 임금조건을 쉽게 알 수 있었고, 조업을 마치면 우리나라 항구(대체로 부산항)로 귀항하는 것 때문에 중도하선과 관련된 선원들의 심적, 경제적 부담 역시 없었습니다. 더불어 보합제와 월급제 방식은 노동의 강도에서도 많은 차이가 났었습니다. 가령 기지선의 경우 어획량이 많거나 그물 사고가 나면 시간외(오버타임)근무를 하는 경우가 많았었는데, 그게 임금으로 어떻게 계산되는지를 물을 수도 없었으며, 보합제라는 명목으로 거의 반강제적으로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월급제의 경우 시간외근무는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편이었습니다. 게다가 작은 수산회사들은 회사 재정의 어려움으로 가끔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고, 심한 경우 연료나 어구 등을 제때에 구입하지 못해 조업 중에 계약이 파기되어 선원들이 몽땅 중도 귀국을 하는 경우도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조차 회사의 속임수일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계약이 만기로 끝날 경우 선원들에게 보합배당금을 지급해야하니까 중간에 어획성적이 나쁘다거나, 재정이 어렵다는 핑계를 만들어 계약을 깨고 조업하던 선원들을 불러들이고는 다시 선원구성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기존의 선원들에게는 계약이 깨졌다는 것을 빌미로 일정한 위로금만을 지불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1986년 당시 북양어장에 출어하는 대형 수산회사들은 적어도 그런 문제만큼은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4) 명란(明卵) 철 그리고 출항 준비
명란 철(명태의 산란은 12~04월)을 딱 맞게 겨냥할 순 없었지만 대개 12월 중순쯤에 부산에서 출항하면 명란 철에 맞추어 북양의 공해어장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1986년 당시엔 공해에서 자체조업과 관련된 국제적인 규제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명란 철이 되면 한국, 일본, 러시아, 폴란드, 중국, 대만 그리고 간혹 자선이었던 조그마한 미국 어선들까지 200여척이 모여들어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의 어로작업이 행해졌습니다. 공해는 광활한 북태평양(bering sea, 베링 해)중에서 미국과 러시아의 영토로부터 200마일 안쪽을 제외한 해역임에도 불구하고 그 넓이만도 엄청났습니다.
제가 취업했던 신라교역(주)의 경우 보통 배가 부산에 입항하면 4일에서 7일 이내에 출항하는 편이었습니다. 다른 회사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입항 기간은 매우 짧은 편이었습니다. 입항한 선원들이 느끼기엔 육상의 직원(부산지사의 직원)들이 배를 빨리 출항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회사로 볼 땐 그게 이익이겠지만 선원들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불만 중 하나였습니다. 1년에 한 번씩 수리조선소에서 정기적인 점검과 수리를 할 때도 빈틈없는 업무의 집행으로 선원들이 육상에서 긴 휴식시간을 갖기는 매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보통의 경우 조업을 마치고 배가 입항하면 기본적으로 점검하고 수리하는 작업들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기관관련 수리가 많은 편이고 갑판의 어로장비들도 수리를 하거나 조업 중 닳아버린 갑판기계 부위를 복원(育成, 육성이라고 하였음)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수리업체 노동자들은 아예 배에서 침식(寢食)을 하면서 작업속도를 최대한으로 높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수산회사로부터 특별수당을 더 받을 수 있는 말을 그들로부터 들었습니다. 반면에 다른 회사의 경우 적어도 신라교역보다는 훨씬 더 여유 있는 ‘입항휴식’ 기간을 준다고 하여 다른 회사에 근무하던 선원들이 무척이나 부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특히 신혼이거나, 연애 중인 선원들은 정말 하루 아니 한 시간이 아쉬웠을 겁니다. 출항하는 날 배로 돌아오는 게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이라고 말하는 선원들도 있었으니까요.
출항을 하려면 선원구성이 되어 있어야 하고 선용품(船用品)을 실어야 합니다. 선원 구성은 기지선과는 달리 해당 어선의 선장이나 항해사들이 직접 하질 않았습니다. 부산지사에서 상시적으로 선원을 모집하여 입항에 맞추어 승선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기지선의 보합제란 어떤 의미에서 일종의 ‘독립채산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므로 해당 어선의 선장이 모든 것을 관리하고 결정합니다. 하지만 북양트롤선의 경우 선원이 더 필요하거나, 하선하려는 선원이 있다면 선장이 점검하여 회사에 건의하거나 보고를 하지만 그것에 대한 결정은 모두 육상의 지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명란 철엔 선원들을 최대한 많이 승선시키려고 합니다. 1,500톤급 한길호의 경우 80여명의 선원을 승선시켰고 항해사도 5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선원들을 승선시키는 이유는 명란 철이라 일손이 많이 필요하기도 하였지만 어장에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중도 귀국을 하는 선원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장에서도 운반선이나 탱커(tanker, 연료공급선)를 통하여 보충선원들을 받기도 합니다. 당시 북양트롤선은 3개부서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먼저 갑판부는 배의 운항과 어로작업을 담당하는 부서로 선장(배의 대표이기도 함)을 비롯한 항해사, 갑판장, 갑판원 및 처리부원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기관부는 엔진이나 발전기를 비롯한 배의 모든 기계를 담당하는 부서로 기관장, 기관사, 조기장, 기관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통신부와 조리부를 합쳐서 ‘통사부’라고 했는데 보통 통신장(국장)은 한 명이고 조리부는 조리장(주자)과 조리수, 조리원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외에 위생사, 전자사, 전기사 등이 있었습니다. 선원의 숫자가 너무 많다보니까 같은 배에 승선해서 일해도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야 이름들을 겨우 알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5,000급 정도 되는 대형트롤선의 경우는 처리실에서 근무하는 선원들이 선장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선에서도 다른 산업분야와 마찬가지로 자동화, 기계화가 점점 가속화 되면서 선원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추세에 있었습니다.
선용품은 갑판과 기관용품 그리고 주식과 부식 등을 말하는데 그것을 선적(船積)하는데 거의 하루 정도가 걸렸던 것 같습니다. 출항 하루 전날 납품업자들이 몰려들기 때문에 배에서는 어떤 순서를 정해야만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먼저 부두에 도착한 납품업자들의 물품을 먼저 선적해 주어야 했으나 그곳에도 편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납품업자들 중에는 물품을 먼저 싣기 위해 항해사나 갑판장을 찾아와 ‘급행료’ 명목으로 뇌물을 주는 경우가 있었는데, 뇌물은 대체로 술, 음료수 같은 선원에게 필요한 물품이었고 일정한 금액의 돈을 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육상 직원들은 그런 뇌물 현장을 보고도 크게 간섭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이 매일 있는 게 아니라 출항 할 때로만 한정된 것이고, 그게 어쩌면 선용품을 싣고 빨리 출항하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육상 직원들은 배에 와서 선원들이나 항해사들에게 대체로 직접적인 업무 간섭은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육상 직원들보다는 배에 관해서만큼은 선원들이 더 잘 알고 있는 전문분야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입, 출항과 관련해서 선원들로부터 불평을 듣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불만의 ‘벌집’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괜히 건드렸다가 불만이 폭발할 경우 오히려 자신들이 육상의 상급자로부터 배에 가서 제대로 처신을 하지 못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항해사나 갑판장에게 어떤 방식이든 맡겨두는 게 물품을 빨리 그리고 순조롭게 싣는 방법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절차상 항해사와 같은 배 측 담당자의 인수확인이 필요하였으며, 모든 선용품들은 배에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원들의 관점에서 만족스러워야 했던 것입니다. ‘급행료’ 같은 뇌물을 받는 게 일종의 비리인 것은 맞지만 그게 정확하게 누구에게 손실을 끼치고 있는지는 잘 알기가 어려웠습니다. 보합제와는 달리 월급제에선 누구든 월급 이외의 수익이 생기는 것은 무조건 자신에게 이익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다만 뇌물을 주는 납품업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뇌물비용만큼 물품 가격을 부풀렸을 것이고 그것은 결국 회사의 비용으로 잡힐 겁니다. 그런데 공산품처럼 이윤이 높지 않은 물품은 뇌물주기를 꺼려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공산물은 다른 선용품들과는 달리 독점적 지위가 없어서 납품 경쟁이 치열하여 스스로 ‘단가 후려치기’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지선의 경우 부식 납품 업자들은 납품을 위해 항해사들에게 현금을 뇌물로 주기도 했는데 심지어는 항해사의 한국 통장계좌에 매월 일정금액을 입금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선원들의 갖은 잔심부름을 해주기도 했으며 상륙하면 자동차를 수배해서 관광을 시켜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납품하는 부식 가격에 그런 ‘수고비’를 첨가했을 겁니다. 처음 온 납품업자들 중 몇 명은 ‘관례(?)’를 잘 몰라서 뇌물을 주지 않고 버티다가 시간은 시간대로 다 잡아 먹고 나중에 납품 수량까지 오류가 생겨 항해사로부터 인수증에 확인도장을 받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습니다. 납품한 물품의 수량이 모자라는 일은 납품업자의 잘못이기도 하겠지만 본선에서 선원들이 악의적으로 물품을 빼돌린 탓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물품은 부두의 바닥에서 본선 카고 윈치(cargo winch)로 올려 지기 때문인데, 납품업자가 한 명 정도 와서는 물품의 수량을 선원들과 함께 점검하기도 힘들었고, 여러 명의 선원들에 의해 선용품 창고로 옮겨지기 때문에 옮기는 과정에서 선원들이 마음만 먹으려 물품을 빼돌리는 것은 너무 쉬웠던 것입니다. 주, 부식의 경우는 납품 업자가 오랫동안 고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납품업자가 학교 선후배일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경우 본선의 횡포(?)는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어구(그물 따위)용품은 대부분 그런 경우였습니다. 어구 회사에서 입항 중인 항해사들에게 접대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보통은 고급식당에 가서 요리를 먹고 2차로 술을 마시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접대를 통해서 어구회사의 선, 후배는 항해사들에게 자신의 존재감도 부각시키고, 본인도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모두 나쁜 관습을 배우고 만드는데 동참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우리의 수산업이나 선원생활을 갉아 먹는 악습이었지요. 따져보면 그게 아닌데 문득 자신이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여 그 알량한 권력을 휘둘렀던 것이고, 순간 그 모든 상황이 자신에겐 즐거움이었으며, 자신의 이익으로 축적되고 있다고 여기는 잘못된 관행 같은 것 말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내부에 있는 자신이 그동안 증오했던 적의 모습일 것입니다. 억압하는 괴물을 닮아가는 모습 말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외부의 그 무엇을 내면화하는 버릇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많이 다녔던 길을 별 생각 없이 따라 가는 것이죠. 사실 습속을 쉽게 뿌리치긴 어렵습니다. 그런 수렁에 빠져 있으면 생각이 열리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린 생각의 동물이라기보다는 습속의 동물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문득 예상치도 못했던 ‘변화와 충격’에 생각이 열릴 때까지 말입니다.
아무튼 출항 준비는 모든 선용품들이 배에 선적되면 끝납니다. 그 하룻밤이 아쉬워서 저는 같은 2항사인 동기와 남포동 거리로 쏟아져 나가서 술을 마셨습니다. 내일이면 출항이니까요. 그리고 다시 그 지겨운 바다와 한바탕 싸움을 벌여야 하니까요. 그날이 아마도 크리스마스 이브였을 겁니다.
5) 출항
도선사(導船士, pilot)와 예인선(tug boat)에 의해 배가 안벽(岸壁)에서 떨어지고 부산의 외항(外港), 즉 오륙도 근처까지 빠져 나오면 도선사는 돌아가고 본선 운항은 선장에게 맡겨집니다. 특별한 게 없다면 그때부터 모든 선원들은 항해당직 체계로 바뀝니다. 배의 운전도 ‘다양한 엔진(속도 변화)’을 쓰는 ‘all station all standby’ 상태에서 최고 속력을 내는 ‘sea speed(최대 속력)’ 상태로 바뀌게 됩니다. 어선은 상선들과는 달리 고급연료인 ‘방카A’을 사용하기에 입, 출항할 때 연료를 교체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없습니다. 반면에 상선은 입, 출항 할 때 ‘방카C’에서 ‘방카A’로 연료를 교환하여 다양한 엔진을 쓸 수 있도록 대비합니다. 항해당직은 1항사, 2항사, 3항사로 나뉘어 서게 되는데 북양어선에는 수석 1항사(‘초사’라고 하는데 ‘chief officer’의 일본식 발음)가 있고 차석 1항사도 있으며, 2항사도 2명 이상인 경우가 많아 항해당직은 대개 3교대를 하거나 간혹 4교대를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부산항을 빠져나와 쓰가루해협(津輕海峽, 북해도(北海道)와 본주(本州) 사이의 좁은 해협)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항해에 큰 어려움은 없는 편입니다. 부산항을 빠져나왔다 싶으면 북동(NE) 방향으로 코스를 잡고 그냥 쭉 가면 되니까요. 배에서 방위(方位)는 동서남북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지만 주로 360도 방식을 씁니다. 그러니까 동쪽은 090도이고 북동쪽은 045도가 됩니다. 동해에서의 특징은 오징어 채낚기 어선들을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인데, 바다에서 특히 야간에는 그들의 존재감이 너무 빛나서 아주 멀리서도 환하게 보입니다. 그게 너무 근접해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건 그들이 밝혀 놓은 수많은 집어등(集魚燈) 때문인데 찬란한 태양만큼이나 밝습니다. 사실 집어등이라곤 하지만 오징어가 그 불빛 때문에 모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강렬한 빛을 피해 집어등이 설치된 어선의 선저, 즉 어두운 배의 바닥으로 오징어가 피하게 되는데 그걸 낚시 바늘로 잡는 방식입니다. 오징어 채낚기 어선 경험자에 의하면 불빛이 얼마나 뜨거운지 그 밑에 앉아 작업할 때는 반드시 안전모를 써야하고 그렇지 않으면 머리털이 다 빠져 버릴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바다에서 육지로 접근할 때 가장 먼저 만나는 게 불빛입니다. 빛은 멀리서 보면 ‘붉은 색’이 먼저 보입니다. 붉은 색의 파장이 가장 길기 때문인데 그래서 그런지 어둠 속에서 보면 육지의 불빛은 그렇게 화려해 보이진 않고 비슷한 빛들은 마치 곤충 떼들이 모여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어떤 의미를 갖고 있지요. 등대나 부표의 빛도 그렇습니다. 얼마나 밝으냐, 몇 번 깜박이느냐, 색깔이 뭐냐 하는 것 말이지요. 해안선으로 접근하면 단지 붉기만 했던 빛들은 마치 태엽장치가 풀린 인형처럼 작은 떨림과 함께 점차 제 색깔을 드러냅니다. 해안선 부근이 사람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가 아니라면 불빛은 드물고 등대나 부표(buoy)의 빛 정도가 고작이지만 쓰가루해협은 좀 달랐습니다. 수많은 불빛을 볼 수가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오랜 우주여행을 하다가 지구로 귀환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가까워질수록 주름이 펴지면서 보석처럼 빛나는 구체적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요.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이라 그런지 추운 겨울에도 육지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사실 그건 흙냄새일 것인데 추운 바다에선 잘 느껴지지 않지만 인도양 같은 곳에서는 바다에서 조업하다 항구로 접근하면 더위와 함께 흙냄새가 온 몸에 끼쳐오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음식냄새 같으면서 땀 냄새 같기도 한 것들로 그건 아마도 살아있는 것들의 체취(體臭)일 겁니다.
쓰가루해협은 좁은 곳이라 그곳을 통과할 땐 반드시 선장이 브리지(bridge, 조타실)에 올라와 봅니다. 특히 여름에는 안개가 끼는 경우가 많아 북양어장으로 오갈 때 가장 조심스러운 항해구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고라는 것은 그런 곳에선 오히려 잘 일어나지 않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자신 뿐 아니라 상대방도 관심을 집중하여 주의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지요.
6) 북양 어장 가는 길
부산항을 출발하여 공해어장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10~12일 정도가 걸립니다. 트롤어선은 여객선이나 상선, 군함 등에 비해 매우 느린 편입니다. 그리고 어선은 다른 배와는 달리 출항할 때나 입항할 때 모두 적재물이 많이 선적되어 있는 편입니다. 연료와 각종 어구 그리고 선용품 등을 가득 싣습니다. 심지어 연료의 경우 특별히 제작한 비닐부대를 이용하여 어창에 싣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선은 배의 밑바닥이 상대적으로 넓은 편이고 무게중심이 낮아 속도와 같은 기동성 보다는 안전성과 힘에 중점을 두는 편입니다. 어장까지 이동을 하는 동안은 각종 부서에 필요한 일을 하게 되는데 갑판부의 경우 주간에는 어구를 만들거나 수리합니다. 처리실에서는 처리실, 피시본드(fishpond), 급냉 및 급냉준비실(robby), 어창(魚艙) 같은 곳을 정비하고 청소합니다. 북양어장의 공해에선 중층트롤그물 사용하는데 그물의 몸통은 어망전문회사에서 제작된 것을 구입합니다. 예전에 알라스카 근해에서 자체조업이 가능했을 땐 저층트롤어업을 했기에 관련된 그물도 자체적으로 배에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중층트롤에서 사용하는 그물은 ‘로프망(rope net)’이라는 특수한 그물로서 배에서 자체 제작하기는 어렵습니다. 대신 몸통 그물의 뒤에 붙여 바다 속에서 어획물이 최종적으로 모아지는 트롤그물의 끝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코드엔드(끝자루, cod end)’는 자체적으로 만듭니다. 코드엔드는 트롤그물의 끝 부분이지만 대량의 어획물이 마지막으로 담겨져 갑판 위로 끌어올려지는 것이기에 매우 중요한 부위의 그물입니다. 단순히 그물의 끝에 있다는 의미로 ‘끝자루(코드엔드)’라고는 해도 그 크기와 무게가 엄청났습니다. 코드엔드 한 개(한 틀) 만들 때에도 갑판부 전원이 달려들어 2일 정도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코드엔드는 높은 합사수(망사의 굵기를 나타내는 단위)의 망지(網地)로 만드는데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망지를 2겹 이상하고 부력(浮力)을 위해서 플로트(float)를 몇 개씩 안에 넣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냥 길쭉한 자루처럼 만드는 게 아니라 중간 중간 일정한 간격으로 와이어로 허리띠 역할 하는 것을 만들어서 어획물이 한 쪽(특히 뒤쪽)으로 쏠려 코드엔드가 터지는 것을 방지 합니다. 갑판에선 그물만 만드는 게 아니라 필요에 따라 와이어를 자르거나 와이어의 매듭을 만들기도 하고, 무링라인(mooring line, 배가 접선할 때 배를 묶어 고정시키는 굵은 로프)을 점검하고, 카고 윈치 혹은 트롤윈치에 감겨있는 와이어에 구리스(grease의 일본식 발음)를 발라(먹인다고 함) 부식을 방지하기 위한 작업도 합니다. 하지만 어장에 도착하여 조업하는 것에 비하면 이때가 그래도 여유 있는 시간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해가 지면 갑판에서 하던 일은 멈추고 선원식당에서 여러 가지 교육이 있습니다. 주로 항해사들이 선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데 외국인(수산청 직원이나 미국수산회사 대리인)과 관련된 주의사항, 어획물 처리요령, 소화훈련 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오래된 선원들은 매 번 듣는 것이라서 외울 정도가 되지요. 그리고 선원들은 어장에 도착할 때까지 정해진 순서에 따라 브리지로 올라와서 항해당직을 두 시간씩 서게 되는데,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한 명은 전방을 견시(見視, 감시)하고 한 명은 수동으로 전환된 조타기(操舵機, steering wheel, 핸들)를 직접 잡습니다. 사실 대양(大洋)에서의 항해는 자동조타(auto pilot)로 가는 게 보통입니다만 선원들이 브리지로 와서 수동으로 조타기를 잡는 이유는 어장에서 피항(避航)할 때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저기압을 만나 피항할 땐 배를 자동으로 조타(운전)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배의 속력을 앞바람이나 파도에 맞춰 최소한으로 낮추기 때문에 반드시 수동으로만 운전이 가능합니다. 이때 수산전문학교에서 위탁교육을 위해 승선한 실습항해사들도 항해 당직을 서게 됩니다. 그들은 입, 출항과 관련된 항해기간이 아니면 안타깝게도 자신의 전공과목을 실습해 볼 기회가 없습니다. 실습생들은 어장에 도착하면 학과를 불문하고 처리부원으로 투입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다로 나와서 현장의 밑바닥을 느껴 보는 것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에 비해서 그들이 전공과목과 관련된 것을 배워 가는 것은 매우 적은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들은 힘들지만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라는 생각으로 참고 견디며 실습기간이 지나가기만을 인내하는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당시엔 그들이 처리실 작업구역 중에서도 가장 힘든 곳에 배치되는 것이 거의 관행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위탁교육이라는 실습을 통해서 아마도 세상이 만만치 않음을 혹은 그들에겐 쉽게 열리지 않는 문이었음을 깨달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렵고 힘들수록 주변을 돌아봐야 하는데 그게 참으로 힘든 것 같습니다.
간혹 멀미가 심한 선원들(실습생 포함)을 모아서 어창에서 특수 훈련을 합니다. 특수라고 해봐야 차가운 바닥에서 멀미를 극복한다는 이유로 군대식 교육을 받는 것인데, 그게 얼마나 실효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30℃의 어창에서 방한복을 입고 이리저리 뛰고 구르다 보면 땀이 나고 멀미가 극복되는 모양입니다. 사실 저는 배 멀미를 처음부터 느끼지 않아서 멀미에 대한 고통을 잘 모릅니다. 기억하기론 멀미가 심했던 사람들도 땀을 흠뻑 흘리는 훈련을 받고나면 더 이상을 멀미를 호소하지 않았는데, 진짜 멀미를 극복해서 그런 것인지 훈련을 받기 싫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1회 정도의 이선(離船) 훈련을 비롯한 소방훈련을 합니다. 이선 훈련이라고 해봐야 비상시 자신이 승선해야 할 구명정 앞에 자신에게 할당된 장비를 갖고 빠른 시간 내에 모이는 일입니다. 가령 담요를 갖고 와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등을 갖고 와야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때 훈련을 하는 날은 알려줬지만 실시 시각은 알려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점심시간 전후에 하는 게 보통이라서 모두들 준비를 잘 갖춘 덕에 한 두 번만 하면 선장이 원하는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교육이나 훈련을 매우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가령 승선 경험이 많은 갑판장도 이날은 미리 옷과 구명동의(求命胴衣)를 껴입고 침실에서 대기하며 자기 구명정 조원들에게 실수가 없도록 하라고 다그칩니다.
7) 어장 도착과 자체 조업 풍경
쓰가루해협을 통과해서 오호츠크 해를 감싸고 있는 캄차카 반도를 지나면 바로 북태평양어장(베링어장)입니다. 기상이 좋은 날은 어장에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북양어장에서의 보이스로 교신(voice, 직접 목소리로 교신한다는 의미, 주로 150메가 무전기.)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북양의 공해어장에선 자체조업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도착하기 전부터 그곳에서 이미 조업하고 있는 한국 어선이나 같은 회사의 선단 어선들로부터 어장에 관한 정보를 듣게 됩니다. 북양의 공해어장은 ‘베링 해(bering sea, 북태평양의 다른 이름으로 사람이름에서 따온 것)’의 일부분인데 미국과 러시아의 영토에서 200마일 바깥 해역으로 ‘open sea’라고도 합니다. 공해어장의 특징은 중층트롤어업으로 명태를 잡는데 주로 주간에만 조업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986년 당시의 명란 철엔 가끔 야간에도 조업을 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대부분 야간에는 어군(魚群)을 찾는 일만을 하였습니다. 야간에 혹시 어군이 있더라도 그 밀집도가 너무 약했기 때문에 밤새도록 그물을 바다에 넣고 끌고 다녀봐야 채산성은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어군을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야간에 본 어군이 주간에도 그 자리에 있을 거라는 것과 주간에 그게 어획이 가능할 만큼 뭉쳐줄 거라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브리지에서 어군을 확인하는 것은 초음파 탐지기였는데 야간에 볼 수 있는 어군이란 게 거의 콩알 크기만 한 초음파반응 자국이었습니다. 그걸 보고 아침 혹은 주간에 조업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어군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거의 신념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군의 이동을 예측하거나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걸 혼자서 판단하는 항해사는 거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음날 어획성적의 부진에 대한 위험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로 나라별로 힘을 합쳐서 어군을 탐지합니다. 한국 어선들은 회사별 혹은 야간에 당직을 서는 수석1항사(수석 1항사를 야간 조업을 책임지고 ‘야간전투’를 벌인다는 의미에서 ‘야전사령관’이라고 불렀음)들의 ‘인간관계’가 어군 탐지의 방향성을 결정합니다. 함께 몰려서 다니면 실패할 확률도 적을 뿐 아니라 실패를 해도 비난을 많이 받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간혹 야간에 콩알만 한 어군도 탐지할 수 없을 경우 먼 거리로 긴 항해해서 어군 탐지를 나가는데 몇 척이 모여서 밤새도록 일정한 구역과 방향으로 항해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때 수석1항사는 아예 브리지에서 내려가서 자기 침실에서 쉬기도 하지요. 고기가 없어 광범위한 어군 탐지를 하게 되면 거의 쉬는 시간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때 하급항해사(보조 당직자)가 항해를 주도하면서 간혹 어군 탐지기에 찍히는 점들의 위치를 어장도나 ‘비디오 플로터’에 표시 해 둡니다. 이때 수석 1항사와 마찬가지로 하급항해사도 기분 좋은 해방감을 누리게 됩니다. 그동안 할 기회가 없었던 보이스 교신도 마음대로 하고 다른 배 동기들의 소식을 듣기도 하지요. 그리고 해가 뜨기 직전에 투망할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각종 보이스 채널을 통해서 어젯밤 다른 배들의 어군 탐지 정보를 수집하고 인간관계를 총동원해서 투망자리를 찾아야했습니다. 어떤 첨단 계기나 어군탐지 능력보다도 인간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결국 투망시간이 가까워지면 대부분의 수석 1항사들은 합의(?)를 보게 됩니다. 투망자리를 합의하지 못하였을 땐 마치 야간 어군탐지의 모든 수고가 물거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허둥대기도 합니다. 하여 학교 선배나 경험이 많은 수석 1항사들이 선동(?)하고 투망 자리를 잡으면 그 부근에서 비슷한 방향으로 투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배의 크기와 예망 속력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을 감안해서 투망을 하게 됩니다. 가령 예망 속력이 느린 배는 빠른 배들 보다 조금 앞에서 투망을 하도록 해 줍니다. 다만 뒤에 오는 다른 배의 정면에서 같은 방향으로 투망하는 것은 금기사항입니다. 어부들은 다른 어선의 그물이 지나간 자리를 자신이 다시 지나가는 것을 죽기보다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선장이 올라올 무렵과 본격적으로 밝아지는 시점 즉 아침 8시쯤에 자신의 배 밑바닥에 어군이 밀집되어 있어야 ‘최고’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걸 맞추기란 신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자주 그런 경이롭고 우연한 행운이 생기면 좋을 뿐이죠. 어군 탐지기에 어군의 기록이 하나도 찍히지 않는 것을 ‘백판(白板)’이라고 하는데, 선장이 브리지에 올라왔을 때 백판이 계속해서 나온다면 수석 1항사의 입장은 매우 곤란한 지경이 됩니다. 더구나 선장이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어군탐지기의 백판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정말 면목 없고도 억울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때 지난밤에 일어난 던 일 즉 자신은 결코 알 수 없었던 한계와 무능함의 무게가 온 몸으로 서서히 가위처럼 눌러 옴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리 야간에 열심히 어군 탐지를 했다고 하더라도 주간에 기록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야간에 불성실한 어군 탐지를 했다는 것으로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간혹 성질이 못 되고 급한 선장은 브리지에 올라와서 백판이 계속될 경우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양망(그물을 올려)을 해서 어장 이동을 하고 다시 투망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급적이면 아침에 양망하여 어장을 이동하지 않습니다. 아침에는 어군이 밀집을 시작하는 시간이기에 아침, 그 몇 시간이 그 날 하루의 어획성적에 중요한 시점이고, 양망하고 투망하는 시간이 너무 길기에 조금은 참으면서 예망을 계속하게 됩니다.
간혹 야간에 좋은 어군기록을 발견하여 투망을 미국경제수역(200마일 이내)이내에서 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대책 없이 마구잡이로 하는 게 아니라 200마일을 기준으로 하여 약 10~15마일 정도 들어간 곳에서 공해 쪽으로 빠져 나오는 방향을 택해야 합니다. 이때 일본 어선들의 동향은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그들의 정보력은 빠르고 정확하기로 소문나 있었는데 미국 해안경비대의 본부가 있는 코디악(Kodiak)에 정보원이 거주하고 있다는 수문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위치보다 경제수역 안쪽으로 일본어선이 있는 날은 안전한 날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정보는 예전에 한국어선에서 근무했던 일본 어로장으로부터 흘러나오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의 투망을 어군 기록이 많고 그게 좋은 어획성적으로 연결된다고 하더라고 선장들이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미국의 해안경비대(coast guard)에서는 가끔 공해까지 비행기를 출동시켰기에 고성능 카메라에 사진이 찍히게 되면 골치가 아파지는 것이었습니다. 북양어장에 출어하는 어선들은 배 양현(舷)의 외판과 탑 브리지(top bridge) 바닥에 아주 크게 신호부자(call sign)를 적어 놓았기 때문에 쉽게 판별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인공위성이나 GPS가 발달한 요즈음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1970년대 이전, 북양 어장의 전성기 때는 공해 조업에서 저층트롤어구로도 좋은 어획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986년에는 명란 철에만 잠시 공해조업이 가능했을 뿐 그 이외의 기간에는 조업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어획이 형편없었습니다. 그 많던 명태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요, 그것은 명태 어군은 그대로 있는데 어업 기술이 못 따라가서 잡을 수 없었던 게 아니라 이미 너무 많이 잡아 버려서 어군이 대폭 감소해서 그랬을 겁니다. 제가 처음 출항한 그 항차엔 그래도 야간에 가끔은 조업이 가능할 정도의 어군이 밀집해 있었습니다. 저녁에 투망하여 밤새도록 그물을 끌고 다니면 2,000팬 정도가 잡혔으니까요, 하지만 대부분 야간에는 주간 조업을 위해 어군을 탐지하는 일만 했습니다. 그리고 1986년에는 모두 ‘로프망(rope net)’이라고 하는 중층트롤용 전문 그물을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그물의 날개(소매)부분이 특수한 재질의 로프로 만들어져서 그물코의 길이를 현저하게 키운 그물이었습니다. 보통 그물 한 코라고 하면 크다고 해도 손바닥 정도의 크기를 떠올릴 텐데, 맨 처음 개발된 로프망도 그물코 하나의 길이가 1미터가 넘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바다 속에서 펼쳐진 그물의 크기가 엄청나게 커지고 물의 저항을 적게 받는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물코가 그렇게 크더라도 바다 속에서 전개되어 그물을 끌고 다니게 되면 그물코 사이에 물 흐름으로 인한 장벽이 생겨 한 번 들어온 물고기가 빠져 나가지 못한다는 것에 착안한 것이었습니다. ‘로프망’ 덕분에 중층트롤그물의 크기는 엄청나게 커지고 바다 속에서 그물을 끌고 다니는 예망의 힘(속력)도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중층트롤어구에서는 그물의 입구 특히 망고(網高)가 가장 중요했는데 1,500톤급 트롤어선에서 자그마치 망고가 50미터가 넘었고 5,000톤급에서는 100미터나 되었습니다. 사실 말이 50~100미터이지 육상에 있는 건물 높이와 비교해 보면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보통 주간에 형성되는 어군의 덩치가 몇 십 미터에서 겨우 100미터 안팎인 것을 생각한다면 로프망의 거대성은 놀랄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첨단의 거대한 어로 장비를 갖고도 자체조업의 어획 성적이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어군이 확 줄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공해에서 자체조업으로 얻게 되는 어획물은 왠지 공짜라는 느낌을 주는 모양입니다. 회사에서는 가급적이면 공해조업을 끝까지 하라고 하였으니까요.
인간이 만든 어구가 점점 첨단화되고 거대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슬픔일 수 도 있습니다. 자업자득 혹은 자승자박이라고나 할까요. 사실 자연은 그들의 산물을 우리에게 공짜로 주는 것은 맞지만 인내력의 한계와 규칙을 갖고 있습니다. 마치 인간의 간(肝) 같다고나 할까요. 어느 정도까지는 증세조차 없다가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도저히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말지요. 더불어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호흡’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 들이마시면 반드시 한 번은 속에 있는 것을 내 뱉어야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무엇이든 순환하여 돌아오는 것이지요. 그런 생각을 한다면 자연이 주는 공짜라는 게 반드시 어떤 것(특히 인간)을 중심으로 흐르는 일방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될 겁니다.
8) 중층트롤 어업에 대하여
1)투망(投網)
아침이면 야간의 기록과는 다른 형태의 기록이 생성되거나 야간에 있었던 기록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수가 있습니다. 기록의 이동은 약간의 규칙성을 갖고 있는데, 그걸 잘 찾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령 며칠 동안 동쪽이면 동쪽, 북서쪽이면 북서쪽 따위로 이동하는데 그러다가 며칠 후 기록이 뚝 끊어져서 한동안 헤매다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해역에서 새로운 기록을 발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 기록이 예전의 기록과 서로 연계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자연이 갖고 있는 ‘우연성’이라고 하는 본성일 겁니다. 그걸 인간이 그것도 초음파라는 단순한(?) 계기로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저 그것을 쫓아다니는 것이죠. 그러고 보면 어군탐지를 하고 탐지된 명태를 잡기 위해 투망하는 것은 ‘무리들의 습성’을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늑대무리가 먹이를 위해 긴 거리를 쫓아다니는 방식과 비슷해 보입니다.
아침에 투망하는 자리를 일명 ‘지게자리’라고 하였는데 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가서 좋은 위치에 지게를 놓아야 나무하기가 쉬운 자리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나무를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아침에 해가 뜨기 직전 수석1항사는 좋은 자리를 골라 투망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투망지점에서 어군이 발견되는 게 아니라, 아침 8시를 전후해서 밀집된 어군을 만날 수 있는 지점을 예측하여 투망을 해야 하는 것인데 그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겨울철 북양어장은 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한 날이 거의 없었습니다. 로프망은 가볍고 예민하여 기상이 나쁘면 투망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바람이나 파도가 있는 날, 추운 새벽에 투망을 몇 번이고 실패하여 다시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게 너무 어렵고 힘들었으므로 몇 번의 시도 끝에 투망을 성공하면 갑판에서 갑판장을 비롯한 갑판부원들이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독립만세가 아니라 ‘투망만세’인데 그걸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프망의 그물코가 너무 커서 바다의 여러 상황에 의해서 엉켜버리는 경우가 많았던 것인데 최종적인 투망 성공은 브리지에서 판단됩니다.
브리지에서 그물을 던지라는 ‘렛고(let’s go)’ 신호를 하면 선미(船尾)에서 카고 윈치(cargo winch)의 후크(hook)에 코드엔드의 끝을 걸어 바다로 던집니다. 코드엔드가 바다 속에 들어가면 배가 전진하는 힘 때문에 그물 몸통이 슬립웨이(slipway)로 딸려내려 갑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로프로 되어 있는 그물의 소매와 입구부근입니다. 특히 그물입구엔 ‘네트존데(net sonde, 바다 속에서 그물의 상태를 수신하고 그 정보를 어선의 선저에 있는 감지부로 알려 줌)’라고 하는 전자계기가 부착되어 있으므로 그게 물속으로 들어가면서 뒤집어지거나 그물코에 걸리면 절대 안 됩니다. 그게 뒤집어지면 그물의 상태는 물론 어군이 그물 속으로 얼마나 들어가는지를 브리지에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갑판장은 로프 부분의 그물이 바다 속에 들어가면 일단 멈추게 해서 그걸 잘 살피게 됩니다. 그래서 엉키거나 뒤집어진 게 없다는 것이 확실해야 계속해서 그물과 연결된 후릿줄(pendent wire)을 풀어줍니다. 후릿줄은 복잡한 방법으로 전개판(otter board)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개판은 트롤어선을 상징하는 것 중 하나로 그물의 좌, 우 폭을 넓혀주는 어구인데, 비행기 날개의 원리를 이용해서 바다 속에서 옆으로 자꾸 벌어지려는 힘을 갖게 됩니다. 그물과 연결된 후릿줄이 다 나가면 전개판은 트롤윈치에 감겨있는 메인 와이어(main wire rope)와 연결됩니다. 예전엔 물속에서 그물을 옆으로 전개하는 게 어려워 두 척의 배가 그물을 끌었는데(쌍끌이 저인망), 전개판 덕분에 한 척의 배로도 그게 가능해졌습니다.(외끌이 저인망) 메인 와이어와 연결된 전개판은 이제 트롤윈치로 조정 하게 됩니다. 이제 바다 속으로 들어간 트롤그물 전체를 어군이 밀집해 있는 수심까지 내려야 합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중요한 것은 트롤그물이 바다 속에서 제대로 전개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브리지의 ‘네트레코더(net recorder, 그물의 입구에 장착되어 있는 네트존데로부터 발신된 그물 및 어군의 정보가 선저의 감지부로 전송되고 그 정보를 다시 브리지에서 수신하여 최종적으로 정보가 기록되는 계기, 그물의 상태와 어군, 그리고 그물 속으로 들어가는 어군의 모습과 보여주는 계기이며 망고계(網高計)라고 함.)’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갑판장이 꼼꼼하게 확인하고 ‘투망만세’를 외쳤다고 하더라도 브리지의 네트레코더가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투망은 실패한 것으로 됩니다. 그래서 다시 그물을 올려 다시 투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 ‘로프망’이 나왔을 땐 이런 투망 작업을 서너 번씩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선미에 가급적 와류가 생기지 않도록 배의 속도를 최대한 낮추기도 하고 심지어는 투망하고픈 방향과는 상관없이 가급적이면 평온한 해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방향으로 투망하기도 하였습니다. 한 번 투망하는데 30분 정도가 걸리는데 추운 새벽에 잘못되어 투망을 몇 번 하게 되면 선원들과 항해사는 완전히 지쳐버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투망이 지연되는 것 때문에 어군을 따라잡는 것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투망이 끝나고 나면 수평선이 희뿌옇게 밝아 옵니다. 어제와 같은 아침처럼 보이지만 어제의 흔적이 한 꺼풀 정도 벗겨진 아침이라고나 할까요. 그건 어제와 동일한 아침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낮게 드리운 태양의 감빛 광채를 머금은 겨울의 황혼 같은 아침, 아침 풍경은 아주 옅게 벗겨지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때 바다 위에서 꿈틀대던 인간도 꿈틀대기를 멈추고 한 번쯤은 아침 하늘을 쳐다보게 되는데, 그때 드디어 어젯밤의 흔적도 허물처럼 벗겨지다 못해 짓물러지고, 그 잠자리 옷처럼 얇은 기억의 막들이 마치 흐르기를 멈춘 시간처럼 칸칸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미세하고도 가득하게 우리에게 밀려오는 아침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2) 예망(曳網)
투망이 끝나면 바다 속에서 그물을 끌고 다니게 되는데 예망(曳網)이라고 합니다. 보통 트롤어선들의 예망 속도는 5노트(knot, 1노트는 1시간동안 1마일을 가는 속도) 정도가 됩니다. 예망 속도가 빠를수록 어획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리합니다. 가령 남들이 두 번 끌고 다닐 구간을 세 번 다닐 수도 있었고, 빠르기 때문에 다른 배 앞을 자신이 가로 질러 가기도 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트롤선에서 이미 예망을 하고 있는 다른 배 앞을 자신의 그물을 끌며 지나가는 것은 큰 실례를 범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어 잠시 침범하는 것은 몰라도 다른 배 앞에서 계속해서 그물을 끌고 다니면서 자신의 선미부분을 뒤에 오는 배에게 보이도록 한다는 것은 욕먹을 짓이었습니다. 그때 다른 배에서 자기 배를 보고 어떤 쌍욕을 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마치 자동차 운전석에 앉으면 ‘괴물’이 되는 것처럼, 자신의 욕을 상대방이 들을 수 없다는 이유로 심한 욕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보통 투망 직후 일정시간동안은 같은 방향으로 줄을 서서 예망하는 게 보통입니다. 한국 선단은 비슷한 해역에 모여서 예망을 하고 다른 나라 배들도 그렇게 합니다.
다른 나라의 어선들에 비하면 한국 어선들은 노후하여 예망 속도가 느린 편입니다. 우리어선 중에는 일본의 ‘중고(中古)어선’이 많았습니다. 대서양, 인도양에서 조업하는 기지선도 1980년대엔 일본으로부터 중고어선을 구입하여 투입하였습니다. 선박대금을 한 번에 다 주고 구입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할부로 구입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금을 다 지급할 때까지는 배의 선적항을 파나마와 같은 제 3국으로 해 놓았다가, 대금을 다 지불하면 우리나라로 변경하곤 했지요. 그런 걸 ‘편의치적선(便宜置籍船)’이라고 하는데 세금혜택 등 여러 가지 이점이 있었던 걸 알고 있습니다. 일본 어선들은 배의 성능, 그물, 정보력 등 모든 면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는 일본 어선들이 어디서 조업을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찾느라 부산을 떨기도 했습니다. 간혹 한국 어선에 일본인 어로장이 승선하는 경우도 있었고, 예전에 한국 어선에 승선했던 어로장이 일본어선에서 일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땐 인맥을 이용하여 정보를 얻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면에 러시아나 폴란드 어선들은 어선의 성능은 좋을지 몰라도 투망이나 예망은 주먹구구에 가까울 정도로 엉망이었습니다. 특히 폴란드 어선들은 어획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예망코스를 절대로 변경하지 않으려고 고집하는 북양어장의 ‘무법자’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예망 중 그들과 코스가 걸릴 것 같으면 일찌감치 우리가 조금씩 변침(變針)을 하여 걸리지 않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예망에 있어서 배의 속력(힘)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브리지에서는 배의 속력을 늘 최대로 하고 싶어 하지요. 당시 북양트롤선들은 대부분 CPP(control pitch propeller)라고 해서 ‘가변피치프로펠러’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배의 속력을 높일 때 엔진의 회전수를 높이는 RPM(분당 엔진 회전수) 방식이 아니라, RPM은 늘 최대로 한 채 프로펠러 날개의 각도를 조정하는 방식의 엔진입니다. 선풍기를 상상하시며 쉽게 이해가 될 겁니다. 선풍기의 날개가 지금처럼 되어 있질 않고 만약 책받침처럼 평평하다면 아무리 돌려도 바람이 일어나질 않을 겁니다. 반면에 날개의 각도를 지금과 반대방향으로 한다면 바람은 앞으로 나오질 않고 뒤로 나갈 겁니다. 트롤선에서는 피치각도(날개각도)를 기관실에서 조정하지 않고 브리지에서 조정한다는 겁니다. 대형 상선의 경우는 모두 RPM 방식을 사용하므로 속도를 높이려면 회전수를 높이고 후진하려면 회전 방향을 바꾸는데 반해서 트롤선들은 회전수나 방향은 늘 일정하지요. 트롤선은 이런 방식이 아니면 조업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투망, 예망, 양망 할 때 늘 다양한 엔진을 즉각적으로 사용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기관실은 엔진의 사용에 있어서 소외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여 브리지가 기관실의 사정도 모른 채 과도한 엔진을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그 때 기관실에서 브리지로 엔진을 과도하게 사용하지 말라고 연락이 오기도 하지요. 이때 기관장과 선장의 관계가 큰 변수인데, 보통의 어선에선 기관장이 선장에게 엔진 사용에 관한 건의는 할 수 있을지언정 강력한 항의는 하지 못합니다. 기지선에선 더욱 그렇죠. 하지만 기관장이 학교의 선배이거나 적어도 동기일 경우 엔진을 과도하게 쓴다 싶을 때마다 브리지로 전화가 올 수도 있습니다. 그때 항해사들은 중간에 끼어서 곤욕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엔진을 장기간 과도하게 사용할 경우 실린더 헤드에 무리가 가서 조업 중 수리를 위해 엔진을 멈추어야할 때도 있습니다. 북양의 기상을 생각할 때 엔진을 멈춘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기관실과 브리지 간의 힘의 관계라는 게 참 묘하여 서로의 불만사항이 수뇌부끼리 바로 전달경우는 드물고 하급 항해사나 기관사들을 통해서 전달된다는 겁니다. 문득 함께 목욕을 하다가 기관사가 항해사에게 ‘배기온도가 너무 높다, 엔진 좀 무리하게 쓰지 말라’고 말하는 방식이지요. 하지만 브리지로선 순간순간 다른 어선들과 경쟁적으로 예망을 해야 할 때가 있으므로 그걸 잊어버릴 때가 많았습니다.
중층트롤어선에 소나(sonar)라고 하는 수평분해능(分解能)이 가능한 어군탐지 장비가 없었을 때는 비교적 한 방향으로 몇 시간씩 예망을 하였다가 어군 기록이 끊긴다 싶으면 방향을 돌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소나의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예망 방향은 소나가 기록을 잡아내는 방향으로 변경되기가 일쑤였습니다. 간혹 소나가 있는 어선과 없는 어선이 조업을 같이하다보면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소나가 있는 어선에서 오른쪽으로 어군이 탐지되어 오른쪽으로 가고 싶은데, 옆에 있는 소나가 없는 어선은 그걸 알 수 없으므로 예망 방향 바꾸기를 꺼려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거의 모든 어선들이 소나를 장착하고 난 뒤에는 예망의 방향이 일정하지 않고 제멋대로여서 그물 사고가 날 확률이 더 높아졌던 것 같습니다. 보통의 어군 탐지기는 수직분해능만 가능해서 자신의 배 밑 부분의 일정한 범위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층트롤어업에선 소나가 거의 필요 없지만 공해어장 같은 광활하고 수심이 깊은 중층트롤어업에선 소나는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공해어장에서는 명태를 잡습니다. 명태는 주간에 일정한 수심에서 밀집된 상태로 머물러 있는데 수심 구간은 보통 200~400미터 정도가 되었습니다. 예망 중에는 그물을 그곳까지 내려야 했는데 대략 메인 와이어 길이를 수심의 3배 정도 풀어주면 되었습니다. 가령 200미터에 그물을 맞추고 싶으면 전개판에 연결된 메인 와이어를 600미터 정도 주면 되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습식기록지’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브리지는 탐지기록을 습식기록지에 기록하는 감지바늘(황동으로 만든 펜) 움직이는 소리가 요란했습니다. 습식기록지의 원리는 일종의 전기 자극에 대한 화학반응이었는데, 나중에 ‘왔다 갔다’하면서 기록하는 ‘기록 펜’ 대신에 ‘멀티 펜’이라고 해서 같은 ‘습식기록지’식이라고 하더라도 소리 없이 기록하는 계기가 나왔습니다. 어군의 밀집 두께가 있으므로 그 두께의 어느 부분에 그물을 맞추어야 하는지는 그때그때 달랐습니다. 그물이 수심에 맞추어지면 브리지에 있는 네트레코더를 통해서 명태가 그물 속으로 들어가는지를 확인하면서 다시 미세하게 메인 와이어의 길이를 조정해야 합니다. 가령 어군의 밀집한 윗부분(기록의 상단 부분)에 맞추면 입망(入網, 어군이 그물로 들어가는 것) 되는 경우도 있었고 중간이나 바닥에 맞추어야 입망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입망을 위해 와이어를 주었다 감았다 하면서 그물을 자주 움직이는 것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와이어를 풀어 줄 때는 큰 영향이 없지만, 와이어를 감을 때는 바다 속에 펼쳐진 거대한 트롤그물의 장력 때문에 배의 예망 속도가 거의 제로에 가까워지고 그 순간부터 그물이 안정될 때까지는 입망이 순조롭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와이어를 다 풀어주지 말고 입망을 확인하면서 와이어를 미세하게 조정하여야 했습니다.
더불어 예망 중에는 배를 자유자재로 조선(운전)하기 어렵습니다. 예망하는 것을 ‘방질’(투망부터 예망, 양망까지를 모두 통칭하기도 함)이라고 하는데 고기도 잡아야 하고 다른 배와 예망 방향이 엉키는 것도 미리미리 피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특히 기상은 좋지 않은데 기록이 있어 배들이 좁은 코스로 몰릴 때는 그물 사고는 물론 배들끼리의 접촉사고도 날 수 있었습니다. 안개가 많이 끼는 여름철 북양어장의 해면은 호수처럼 잠잠하지만 시계(視界)가 거의 제로가 되어버려 하루 종일 레이더를 켜 놓고 쳐다보면서 조업해야 했습니다. 특히 당시엔 상대 선박의 항적(航跡)을 추적하는 알파레이더가 없어서 항해사들이 일일이 레이더의 커서(cursor-레이더의 스크린 위에 있는 방위 및 거리 측정용 투명판 위에 그어진 금)를 맞춰서 감시해야만 했습니다.
특히 야간조업에선 주간과 달리 다른 배의 불빛만 보고 그게 무슨 배인지를 알아내야 합니다. 가령 자신의 배 앞에 다른 배가 있을 경우 그게 한국어선이라면 배의 이름까지 알아야 하는 게 항해사 특히 하급(보조당직자) 항해사의 임무입니다. 쌍안경으로 척 보면 어느 나라 배인지, 한국어선이라면 선명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서로의 코스가 걸려도 보이스 교신으로 그 배를 호출하여 피할 수 있었고 그곳의 조업정보도 알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처음 항해사로 승선해서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적어도 몇 개월은 고생을 해야 알 수 있게 되는 것인데 상급자가 불쑥 물어보았을 때 모른다고 하면 혼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끔 상급 항해사 중엔 자신의 초보시절은 잊은 채, 그런 질문으로 함께 당직을 서는 하급항해사를 당황하게 하고 혼내 주면서 은근히 쾌감을 즐기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북양어장에는 한국 어선들이 20여척 밖에 안 되었지만 합작 사업을 하러 미국 경제수역내로 들어가면 자신의 파트너인 자선(子船)들의 불빛도 알아야 했으므로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숙련이 되면 불빛만 보고도 배 이름을 알 수 있었고, 어느 나라 배인지도 다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논리적인 이성작용이 아니라 ‘몸의 감각’이었던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경지에 오르는 것 말입니다.
3)양망(楊網)
양망은 끌고 다니던 그물을 배로 올리는 작업입니다. 양망을 시작하기 전에 양망을 알리는 부저가 울리고 트롤 윈치로 메인 와이어를 감기 시작합니다. 하루에 한 방 조업하는 걸 생각하면 그날을 마감하는 시간입니다. 와이어를 감는 것만으로도 5분 정도가 걸리는데 양망은 투망의 역순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메인 와이어를 다 감으면 전개판이 올라오는데, 전개판이 수면에 뜨기 직전엔 윈치를 천천히 감아야 합니다. 잘못하면 전개판이 선미의 선저(船底)와 충돌하여 전개판에 연결된 와이어가 끊어지거나 선미의 외판(外板)이 찢어지는 사고가 날 수도 있습니다. 보통 트롤선에는 ‘윈치실과 윈치맨’(winch man)이 따로 있었고, 조업 중엔 갑판부원 중 몇 명이 교대로 늘 윈치실에서 당직을 섭니다. 하지만 오만어장에 있을 때 윈치컨트롤 박스(조작반)가 브리지 안에 있어서 제가 직접 잡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지만 나중엔 그게 오히려 편한 것 같았습니다. 전개판을 최대한 당겨 선미에 있는 갤로우스(gallows-‘교수대’라는 뜻으로 트롤어선의 선미에 있는 전개판 등을 걸어두는 육교모양의 마스트)에 걸면 그물에 연결된 후릿줄을 감습니다. 그리고는 곧이어 갑판으로 날개그물과 몸통그물이 올라오기 시작하는데, 그때 선미나 브리지에서 코드엔드를 보면 명태가 대략 얼마나 들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획이 좋으며 코드엔드가 선미 쪽 멀리서부터 수면으로 약간 뜨게 됩니다. 그건 아마도 명태들의 부레 때문일 것입니다. 양망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 어획물이 든 코드엔드를 갑판으로 올리는 작업입니다. 한길호의 경우 일단 명태가 2,000팬 이상 들면 갑판장이 더블블록(double block)이라는 배력(倍力)이 더 강력한 블록으로 코드엔드를 올리게 됩니다. 코드엔드와 몸통 그물의 연결부위까지 어획물이 꽉 차면 ‘한 방 떴다.’라고 하는데 그것을 갑판 위로 올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가끔 너무 많이 들어서 그 상태로는 코드엔드를 갑판 위로 올릴 수 없을 경우, 갑판원(주로 갑판장)이 선미 쪽에서 그물을 타고 내려가서 코드엔드 끝의 밑 부분 그물코를 칼로 조금 찢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명 ‘설사’라고 하는 건데 어획된 명태를 조금 버리면서 재빨리 코드엔드를 갑판으로 올리는 방법입니다. 그때 엄청나게 많은 갈매기 떼들이 명태의 속살을 먹기 위해서 달려들지요. 그 자지러지는 것 같은 생명들의 함성소리가 지금도 제 귀에 쟁쟁거리며 공명하는 것 같습니다.
트롤어선의 선미는 그물을 올리고 내리기 좋도록 경사면으로 되어 있는데 그곳을 ‘슬립웨이(slipway, 선미의 경사면)’라고 부릅니다. 이곳에서 갑판으로 빵빵한 코드엔드를 끌어 올릴 때 브리지에서 해야 할 것은 배가 가급적이면 좌우로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상이 좋지 않을 땐 코드 엔드를 안전하게 올리기 위해서 배를 돌려서라도 그렇게 해 주어야 합니다. 코드엔드가 갑판에 올라오고도 배가 좌우로 흔들리지 않도록 해 주어야 하는데 잘못하면 육중한 코드엔드에 갑판원이 깔려버리는 사고가 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코드엔드가 갑판에 올려 지면 갑판 위에 설치된 처리실과 연결된 문을 열어 그곳으로 어획물을 붓는데 한 번 만에 쭉 부어지는 게 아니라서 코드엔드의 밴드들을 카고 윈치 후크에 걸어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단계별로 차례로 부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획물들이 미끄러져 잘 내려가도록 ‘동키호스(donkey hose, 갑판에 설치된 해수가 나오는 호스)’로 해수(海水)를 흘려주기도 합니다. 어획물은 처리실에 있는 ‘피시본드(fish pond-물고기들의 연못이라는 뜻)’에 부어지는데, 피시본드는 갑판에서 아래로 즉 처리실 쪽으로 내리면서 열 수 있는 육중한 유압식 문과 연결되어 있고, 그 문은 ‘피시본드 해치(hatch)’라고 합니다. 어획량이 5,000팬 정도 될 경우 어획물을 피시본드에 붓는 것만으로도 몇 십 분이 걸리는 일입니다. 당시 북양의 공해어장에서는 하루에 한 방 그러니까 아침에 투망하여 주간 내내 그물을 끌고 다니다가 해가 지면 양망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야간 조업이 없을 경우 양망이 끝나면 다음 날 새벽 투망할 준비를 해 놓고 처리실로 내려가려 어획물을 처리합니다. 선원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의 강도와는 상관없이 그물에 고기가 많이 들면 아이들처럼 좋아했습니다.
<행복한 설사-최희철>
쌍안경에 눈깔을 박은 3항사.
“이빠이 들었네예, 고또(code end)가 터질 정도로”
선미(船尾)를 향해 목을 빼던 처리원들은
담배를 입에 문 채 모두 처리실로 내려가고
갑판원 하나가 따블블록(double block)을 가져간다.
선미방향 저 멀리 둥둥 떠 오른 코드엔드는
차가운 지구의 껍질,
북태평양 거친 파도 위에서
뱃놈들의 생애가 헹구어지고 있다.
청춘은 34미리 스틸 와이어 같은 것
쩍쩍 소리를 내며 드럼(winch drum)에 감기고,
심해(深海)에서 올라 온 와이어(wire)들은
서로 짓이겨 지면서 수압의 기억을 새긴다.
구리스(grease)속으로 뚝뚝 흐르는
소금기의 혼백을 새겨 넣는다.
양망(揚網)은 각개전투처럼 숨 막히게 진행되고
갑판장이 보망칼(deck knife)을 꺼내들고
공룡의 등걸을 붙잡고 슬립웨이를 내려간다.
트롤그물이 힘에 겨워 숨을 몰아쉬고 있다.
갑판장이 그의 배때기를 가른다.
명태들이 쏟아져 내린다.
상처 딱지 같은 간밤의 눈바람이 떨어진다.
행복한 설사다.
갈매기 떼들이 자지러질 듯 울어대며
심해(深海)의 내장을 쪼아 먹는다.
9) 처리실 풍경
피시본드에 부어진 어획물(공해어장에서는 주로 명태)은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처리대로 나오면서 곧바로 처리부원들에 의해서 처리되는데 어획량에 따라서 처리 방법이 달라집니다. 명란 철이 아니라면 대부분 명태는 그냥 팬(pan, 직사각형으로 양철로 만든 것)에 담겨지는데 그걸 ‘라운드(round)’ 처리라고 하고 가장 빨리 처리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어획물을 팬에 담는 걸 ‘나열’이라고 하는데 명태의 경우 머리가 팬의 가장자리로 가도록 하여 양쪽으로 담고 그렇게 두 겹으로 담습니다. 그때 팬의 중앙은 명태의 꼬리부분이 만나면서 움푹 들어가게 되는데 좀 더 작은 사이즈의 명태로 그곳을 메우고 그걸 ‘앙꼬’라고 합니다. 팬의 한쪽 끝에 명태를 다섯 마리 가지런하게 놓을 수 있는 크기라면 ‘5통’ 사이즈라 부르고 6마리면 ‘6통’이라고 합니다. 가장 큰 사이즈가 4통이며, 8통 이상은 ‘노가리’라고 해서 당시엔 라운드 제품을 하지 않습니다. 명란 철에는 명란을 채취해야 하므로 머리를 자르거나 배를 갈라서 제품을 만드는데, 머리를 잘라 명란을 꺼내고 나머지 몸통 부위를 제품화하는 것을 ‘드레스(dress)’라고 하며, 명란을 채취하기 위해 배만 가르는 것을 ‘할복’이라고 하는데 명란을 꺼내고 난 다음 할복된 몸통을 ‘할복태’라고 합니다. 필요에 따라 할복태도 제품으로 만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나중에 육지의 공장에서 가공제품의 원료로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수루미(surumi)라고 해서 이른바 ‘게맛살’의 원료를 만드는 게 주요 처리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1,500급 어선에는 수루미 기계가 없었고 보다 큰 대형어선들은 수루미 기계를 대부분 갖추고 있었습니다. ‘게맛살’은 실제 게의 살이 들어간 게 아니라 명태와 같은 물고기로 어육으로 만들고 게의 향을 첨가한 제품입니다. 사실 북양트롤선 처리실은 육상의 여느 공장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엄청난 양의 어획물들이 끝임 없이 처리대로 밀려 나오고 처리부원들의 악다구니와 복잡한 기계음들, 이곳저곳에서 이루어지는 분업과 협업들, 모두들 컨베이어 속도에 맞춰 자신의 신체를 움직이지요. 자신이 예전부터 그렇게 일해 왔던 것처럼, 마치 자신이 기계의 일부인양 컨베이어의 속도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합작 사업에서 어획량이 엄청나게 많을 경우 수놈은 바로 버리거나 라운드 처리를 하고 암놈은 할복하여 명란을 꺼낸 후 할복태 처리를 하였습니다. 처리작업 중 가장 명태를 많이 소비할 수 있는 작업은 수놈은 그냥 버리고 암놈은 할복하여 명란만 꺼내고 버리는 것입니다. 그걸 ‘할복’이라고 했는데 합작 사업 중에 어황이 좋아 그렇게 몇 번 해 본 기억이 납니다. 그때 중요한 것은 손에 잡자마자 수놈과 암놈을 몇 초 만에 구별하는 것이었는데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명태의 배를 봐서 배가 도톰하게 부르면서 배지느러미가 짧으면 암놈이었고, 배가 부르지 않으면서 배지느러미가 길면 수놈이었습니다. 명란 철에는 갑판부, 기관부, 통사부 3개의 부서가 부서인원에 걸 맞는 할당량을 걸어 놓고 경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땐 관련 부서의 선원들이 모두 동원됩니다. 상금은 명란 보너스의 일부를 걸어 놓고 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조삼모사(朝三暮四)와 같은 게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처리부는 3개의 부서가 있었는데 처리대에서 명란을 채취하고 어획물을 자르거나 팬에 담는 나열반과 급냉(急冷)반, 어창(魚艙)반이 있었습니다. 나열반 중에서 신참선원(수산전문학교 위탁교육생은 대개 이 일부터 시작함)은 주로 처리대 위로 올라가서 어획물들을 팬에 담기 좋도록 밀어주는 역할을 하였는데, 기상이 나빠 배가 많이 흔들릴 경우엔 힘들고도 위험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리고 피시본드에 들어가서 처리대로 어획물이 나갈 수 있도록 처리대와 연결된 컨베이어 벨트 쪽으로 어획물을 밀어주는 작업이 있는데 이것 역시 매우 힘 든 일 중 하나였습니다. 처리대 쪽에서의 작업이 끊어짐이 없도록 하려면 어획물을 컨베이어 벨트 쪽으로 밀어주는 작업 또한 끊임이 없어야 하는데, 피시본드에 어획물이 꽉 차 있을 때는 컨베이어 스위치만 작동하면 되는 아주 쉬운 일이지만, 피시본드의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사람이 직접 피시본드로 들어가서 밀대로 어획물을 일일이 밀어내야했기 때문에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이 일을 간혹 항해사나 선장이 운동 삼아 내려와서 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 선원들이 상급자를 골려줄 작정을 하고 처리 속도를 높여 버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드레스(dress)는 머리를 자른 제품이라고 했는데 피시본드와 처리대가 연결되는 부위에 전동 카터기를 설치하고, 스텐리스 철편을 이어서 만든 컨베이어 위에 명태의 머리부위를 걸어두면 자동으로 명태가 커터기로 옮겨지면서 머리가 잘리는 구조였습니다. 다만 컨베이어에는 사람이 직접 명태의 머리를 걸어 주어야 했기에 배가 많이 흔들릴 경우 카터기의 회전칼날에 의해 손가락 등의 절단 부상을 입을 수 있는 위험성이 늘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팬에 담긴 모든 어획물은 급냉실에서 4시간 정도의 급속냉동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얼리는 것을 어선에선 오히려 ‘굽는’다고 하였고, 구워진 어획물을 어창에 적재하려면 팬과 팬에 담긴 어획물을 분리해야 했는데 이 작업을 ‘탈팬(탈판)’이라고 합니다. 급냉부가 하는 일이 어획물이 담겨진 팬을 급냉실 선반에 넣거나 꺼내고 탈팬을 하는 일입니다. 급냉실 선반(conductor)에 그냥 어획물이 담긴 팬을 올려놓기만 하면 얼려지는 게 아니라 선반들끼리 강하게(전기나 유압의 힘으로)눌러 주어야 합니다. 보통 선반은 5층 정도로 되어있었고 선반 사이에 어획물이 담긴 팬을 올려놓고 위에 있는 선반으로 아래의 팬을 누르면 선반에 내장되어 있는 파이프로 냉매가 흐르도록 하여 급속(4시간 정도)으로 어획물이 냉동되는 장치였습니다. 탈팬이 끝나면 제품화 된 어획물들은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어창으로 내려갑니다. 어창부는 이때 어창으로 내려온 냉동제품을 적재적소에 쌓는 일을 합니다. 어창과 급냉실의 냉매(冷媒)는 모두 ‘암모니아 가스’를 사용하였는데 당시 암모니아 가스가 남자의 정력에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 있어서 가급적이면 어창이나 급냉실에 오래 있으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급냉부나 어창부도 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어창엔 그런 냄새가 나지 않았는데 급냉실은 들어가면 매캐하고도 시큼한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자극하였습니다.
공해어장에서 조업할 때 처리실에서 특별한 재미는 연어를 발견하는 일이었습니다. 며칠 만에 한두 마리가 들면 혼자서 먹는 법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명란 철엔 스팀 파이프 위에다가 명란을 구워 먹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공해조업에서는 명태만 어획되었기에 가끔 올라오는 연어가 아주 귀한 음식 취급을 받았습니다. 알라스카 연근해 어장에선 저층트롤이므로 다양한 어종들이 올라와서 먹거리들이 많았지만 공해어장에선 정말 먹을 게 없었습니다. 처리실 바닥이 늘 흥건하게 젖어있고 미끄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항해사도 브리지 당직을 마치면 처리실 당직을 서게 되어 있었는데 항해사가 처리실에 어슬렁거리는 것을 선원들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항해사를 일종의 감시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적당한 장소에서 쉬는(?) 항해사들이 있었고, 처리실 상황은 처리장이나 반장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가끔 처리실 상황 보고를 아예 처리실에서 반장이 브리지로 직접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기지선 조업에선 매번 양망할 때마다 피시본드에 부어진 어획물의 구성내용을 브리지로 재빨리 정확하게 보고해 주어야 합니다. 그걸 ‘맘보’라고 하는데 그것을 토대로 다음 코스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10) 합작 사업
공해어장에서 어획량이 현저하게 떨어지면 알라스카 연근해로 어장이동을 하게 됩니다. 그곳은 미국의 경제수역 내 즉 영토에서 200마일 안쪽에 있는 해역입니다. 알라스카 어장은 광범위한 대륙붕으로 수산자원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자체조업이 아니라 미국 어선들과 ‘합작 사업(joint venture)’이 이루어졌습니다. 말이 합작 사업이지 한국 어선들이 미국의 어선들로부터 바다 위에서 물고기를 사서 가공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가공만 하는 한국 어선을 모선(mother boat)라고 불렀고 미국 어선들은 자선(catcher boat)이라고 하였는데, 모선들이 1,000톤에서 10,000톤까지의 대형선이라고 한다면 자선들은 100톤에서 300톤 내외의 작은 배들이었습니다. 한국의 수산회사들은 미국은행에 달러로 미리 일정금액을 입금 해 놓아야 자선들로부터 어획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기억나는 미국회사로선 ‘profish’가 있었는데, 미국 수산회사는 대리점의 형태로만 운영되었고, 미국 자선들은 대부분 선장(대형선의 선장, 즉 captain과는 달리 작은 배는 skipper라고 하였습니다.)을 비롯한 선원들의 독립채산제로 운영되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보합제’인 것 같았는데 이익금 배당 비율에는 차이가 컸던 것 같습니다. 고기를 별로 못 잡아도 우리보다 훨씬 많은 배당금을 받아 간다고 했으니까요. 자선은 5명 정도의 선원들이 승선했는데 그들의 겁 없는 도전정신만큼은 인정해 주어야 했습니다. 알라스카 어장에서 그 작은 배로 말입니다. 승선 경험이 많은 웬만한 경력자들도 그 배를 타면 배 멀미를 느낀다고 하더군요. 우연한 기회에 자선들의 현황을 본 적이 있었는데 등록말소 이유가 대부분 침몰(sunk, sink의 과거형)이었습니다. 자선들의 코드엔드에 어획물이 가득차면 모선들이 접근하여 코드엔드만을 넘겨받는(delivery) 방법이었습니다. 코드엔드가 모선으로 올라오면 모선에선 미국 수산회사의 대리인과 항해사가 어획물(원어-原魚)의 양을 측정 하였습니다. 원어량 측정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는데 단일어종이라고 판단될 경우 코드엔드 전체 체적을 구한 다음 그곳에다가 미리 합의된 밀도와 수분함유량을 적용시켜서 구했습니다. 어종 구성이 다양할 경우엔 어획물을 피시본드에 부어서 샘플을 조사한 다음 그걸 다시 전체 원어량에 적용시키는 방법이 있었고, 제품화 된 생산결과를 보고 측정하는 경우엔 생산량에다가 수율(收率, 원어량 대비 생산량 비율)을 적용시키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원어량을 측정을 할 때 대리인과 항해사는 가끔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다투기도 합니다. 그게 가장 심할 경우가 제품수율 문제였습니다. 실제 생산비율보다 수율을 낮게 적용하여 원어 대금을 계산하면 자선측이 이익이 되지만, 수율을 높게 적용하면 모선 측에서 이익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끔 어획량에 불만이 생기면 자선 측에서 다시 수율을 측정하여 새로운 수율을 만들자고 했지만 인원이 많고 생산시스템을 장악한 모선에게 자선 혹은 자선의 대리인은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심각한 갈등이 있을 경우 자선은 특정 모선에 어획물을 줄 수 없다는 선언을 하지만 널린 게 자선이이라 그리 큰 문제가 될 수는 없었고, 그래서 그런 사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다만 모선의 본사가 부실하여 입금이 되지 않았을 경우 자선은 냉정하게 어획물 인도를 잘라 버렸습니다.
명란 철에는 명태를 집중적으로 어획하려고 하지만 4월경이 되면 명란 철도 서서히 끝나게 됩니다. 명란은 정란(正卵)이라고 해서 일종의 미성숙란을 최고의 것으로 칩니다. 하지만 4월로 갈수록 알은 성숙하여 명란은 일종의 성숙란이 되는데 그러면 알의 알갱이가 커지고 명란의 내부에 물이 생깁니다. 그런 것은 모두 성숙란 혹은 수란(水卵)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색깔이 변한 것도 있었는데 자색란(紫色卵)이라고 해서 성숙란, 수란과 함께 3등급 가장 낮은 품질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과는 달리 정란임에도 불구하여 채취 과정에서 명란이 파손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은 ‘파란(波卵)’이라고 해서 2등품으로 취급하였습니다. 파란은 명란을 꺼내는 과정에서 대부분 생기는데 당시 ‘파란율을 낮추자’는 게 ‘생산구호’가 되었습니다.
합작 사업은 대개 명태로 시작해서 명태 쿼터가 끝나면 가자미와 대구 그리고 이면수 및 적어(赤魚) 잡는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명태는 알라스카 어장 전반에 걸쳐 분포해 있어서 명태만 잡기도 했지만 다른 어종과 혼획(混獲) 되어 올라왔습니다. 대구는 유니막(Unimak) 섬 근처가 주 어장이었으며, 이면수는 세구암(Seguam) 섬 근처가 주요 어장이었습니다. 우날라스카(unalaska)섬과 더불어 그런 섬들은 모두 알라스카 서부 알류산(Aleutian) 열도(列島)를 이루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면수 어장은 섬과 섬 사이로 그물을 끌고 다녀야 하는 어장이라 해류가 매우 강했으므로, 상대적으로 더 크고 엔진 힘이 센 자선이 유리했습니다. 그래서 명태나 대구 어장에선 어획 성적이 좋지 않았던 자선들도 이면수 어장에서는 놀라운 어획량을 올리는 경우가 많았고, 반면에 명태 어장에선 날고 기던 자선도 세구암 어장에서는 힘을 못 쓰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세구암 섬엔 ‘세구암 산’이라고 있었는데 활화산이었으며 제가 그곳에 있는 동안 딱 한 번 화산활동을 하여 배에서도 미약한 진동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세구암 어장은 합작 사업의 끝물이라 자선들의 어획실적이 부진하면 모선들은 공해어장으로 이동하거나 부산으로 귀항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1) 올림픽 시스템과 장기 조업
알라스카 어장의 주요 어종은 명태(pollock), 대구(cod), 가오리(skate fish), 가자미(sole)류와 임연수(Atka mackerel), 적어(赤魚) 등이 있었습니다. 가자미는 각시가자미(yellowfin sole), 돌가자미(rock sole), 참가자미(flat head sole) 등이 있었는데, 겨울철 합작 사업의 백미는 명태이고 명란 채취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 알라스카 연근해의 명태 자원은 엄청났습니다. 1986년엔 알라스카 어장에 도착하자마자 명태 어획성적이 너무 좋아서 얼마간은 오직 ‘할복’만으로 명란을 채취하였을 정도니까요. 그건 수놈은 그대로 버리고 암놈은 명란만 채취하고 버리는 방식이었는데, 그때 명란 제품 수율이 6~7%로 밖에 되지 않았지만 명란 가격이 워낙 좋아서 그렇게 해도 수산회사들은 수지를 맞출 수 있었습니다. 다만 자원의 효율적 이용이란 측면에서 보면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수놈과 암놈의 할복태를 그냥 바다로 버리는 게 바다환경을 오염시키는 측면도 있었지만 그것은 생산의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엄청난 낭비였습니다. 물론 그것의 단초는 명란이라는 명태의 특수부위를 비싼 가격으로 먹는 인간의 독특한 식습관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모두 ‘지속가능한 생산’ 방식은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나중엔 미국의 수산당국에서도 어획된 물고기를 일방적으로 바다에 버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1986년, 미국수산청은 쿼터(quota) 소진방식을 올림픽 시스템으로 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이 시스템은 쿼터가 모두 소진될 때까지 어장을 계속 개방하는 것인데, 가령 명태 100만 톤이 쿼터라고 한다면 그걸 다 소진할 때까지 어장을 폐쇄하지 않았으므로 명태를 계속해서 잡을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물론 금지어종을 포함한 모든 어종은 쿼터가 따로 정해져 있었는데, 어떤 방식이던지 금지어종 특히 게(crab)의 쿼터 소진양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비록 명태 쿼터를 다 소진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금지어종의 쿼터가 소진되면 어장은 문을 닫아야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금지어종이 아닌 어종은 비록 쿼터를 다 소진했다고 할지라도 쿼터가 남아있는 어종과 섞여서 어획 되었을 때 10%이내에선 어획이 가능했습니다. 올림픽시스템 쿼터 소진방식 때문에 모선들은 어장을 떠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모선의 경우 만선(滿船)이 되어 한국에 한 번 갔다 오면 한 달 이상 걸리기 때문에 그 사이 다른 모선들이 쿼터를 다 소진해 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에는 계절(혹은 분기)별로 쿼터를 나누어 배분했기에 어장에 와서 30~50일 정도 합작 사업하면 만선이 되었고 그러면 계절별 쿼터도 다 소진되어 순조롭게 귀항을 하여 어획물을 하역하고는 다시 어장으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올림픽 시스템이 시작되면서 모든 모선은 합작 사업을 연속적으로 그것도 장기간 어장에 머물면서 해야 했고, 만선이 되어도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운반선을 통해 어획물을 전재(轉載-어획물을 옮겨 싣는 것)하고 다시 어장으로 복귀하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연료와 주, 부식은 탱커(tanker)나 운반선을 통해서 어장에서 공급 받았습니다. 올림픽 방식으로 탱커와 운반선 업체가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쿼터 소진 방식으로 생긴 난 게 ‘장기조업’이었습니다. 한 번 출항하면 보통 6개월 이상 심한 경우 1년 가까이 바다 위에서 생활해야 했던 것입니다. 집을 오랫동안 떠나서 생활해야 하는 오만어장에서 돌아와 두세 달 간격으로 한국으로 들어 올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하여 승선한 북양 트롤선이 더 고독한 작업 환경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말이 6개월이지 어떨 땐 1년 가까이 바다에서 조업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회사에서는 어선이라는 게 가급적이면 정기(의무적) 수리점검 이외에 항구에 정박해 있는 것은 생산과 수익의 측면에서 손실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은근히 장기 조업을 바라는 눈치였습니다. 저는 거의 1년 4개월을 바다 위에서 생활해 본 적이 있는데, 바다 위에서 승진되면서 같은 회사의 다른 배로 전선하라고하여 그렇게 되었습니다. 당시 장기조업이 얼마나 심했던지 북양에서 4년여를 근무하면서도 6항차 정도 밖에 하지 못했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장기조업은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 관점이 생길 수도 있었습니다. 먼저 나이가 많은 선원의 가족들은 드러내 놓고 말하진 못하지만 장기조업을 은근히 바라는 것 같은 눈치였습니다. 하지만 젊은 선원의 가족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장기조업을 통해 일정한 자금이 모아지면 가급적 빨리 선원생활을 청산하려고 하였습니다. 또 장기조업으로 인해 가정에서 여러 가지 불화가 생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내가 바람이 나거나 바람이 난 것으로 여겨서 대판 싸우거나 이혼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결혼을 하였지만 자식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 어려워서 오직 자식 생산을 위한 휴가를 받기도하였습니다. 회사에서는 장기조업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장기조업수당’라는 특별수당을 지급하였는데 그 돈이 얼마가 되어야 하느냐 그리고 어떤 방식(임금처럼 온라인으로 가족통장으로 지급되느냐 아니면 입항하면 선원들 손에 직접 쥐어줄 것이냐의 문제)으로 지급할 것이냐를 갖고 논란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월급쟁이들의 비애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장기조업은 모든 것을 차치하고라도 노동 강도라는 측면에서 볼 때 과도하다는 게 지배적이었습니다. 선원이라는 직업은 육상의 여느 직업과는 달리 생의 일정한 기간에만 종사하는 ‘특이성’이 있는 직업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보통 육지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거나 잊으려고 바다로 나온 사람도 있었고, 미래를 위한 준비를 위해 일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저처럼 수산관련 전문학과를 전공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원양어업이라는 게 자신과 주변의 살아있는 냄새가 가득한 거주지를 떠나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게 무척 고통스럽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장기조업 제도는 어느 노동 조건 못지않게 선원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장기조업, 그것도 춥고 거친 바다 그리고 어장 근처의 육지에 입항이나 상륙도 불가능한 곳이라 더욱 어려웠을 것이고, 그런 어려움이 누적되어 많은 선원들의 하선을 결심케 했으리라 보여 집니다. 장기조업으로 인해 아무리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선원 생활을 자신에게는 물론 자신의 주변 특히 가족을 향해 더 이상 이게 좋은 직업이니 조금만 참아 달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12) 외국인들
합작 사업을 할 때 미국 수산청에서 옵서버(observer) 1명과 미국 수산회사 대리인(representative) 1명이 승선합니다. 옵서버는 우리가 자선으로부터 받는 어획량과 금지어종(게, 연어, 광어, 청어, 산호 등)의 양을 측정합니다. 대체로 옵서버는 수산관련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어선에 승선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마디로 ‘순진’하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옵서버를 경험한 난 뒤에 좀 더 수입이 나은 대리인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 우리의 눈에 좀 특이한 것이라면 여성들이 알라스카라고 하는 춥고 험한 바다 그리고 선박 생활에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어선의 크기가 1,000톤 이상이라곤 하지만 알라스카의 바다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 승선한 옵서버들은 ‘멀미’로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았고 보름 정도를 버티다가 업무도 수행하지 못한 채 탈진하여 항구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멀미’의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극복할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면역 유전자가 내장된 것처럼 말입니다. 옵서버는 대리인과는 달리 영업이익과 직접적으로 관련은 없습니다. 말 그대로 ‘관찰자’였습니다. 미국경제수역 내에서 한국 어선들이 자국에게 손해가 되는 짓은 하지 않는지 그리고 쿼터는 어떻게 소진되고 있는지를 관찰하고 기록하여 보고하는 업무였습니다. 반면에 대리인은 모선과 합작 사업 파트너인 미국 자선의 이익을 대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몇몇 대리인은 대리인이 일방적으로 어느 회사의 이익을 대변하게 아니라 마치 경기의 심판처럼 중간입장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서로의 이익을 대변하려다 보면 손해를 보지 않으려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갈등이란 다름이 아니라 자선이 어획해서 전달된 원어에 대한 양을 어떻게 측정하고 결정하느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자(尺)나 저울로 측정할 때 눈금을 어떻게 읽을 것이냐 하는 것부터, 제품화 되어야 할 원어가 모선의 부주의로 바다에 버려지는 것 그리고 제품의 생산 수율을 어떻게 결정할 것이냐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측정 눈금을 읽는 것은 그리 큰 갈등이 생기지 않았고 가끔은 옵서버가 객관적 입장에서 읽어 주기도 했으나, 원어가 바다로 버려지는 것에 대해서는 가끔 브리지로 올라와서 항의를 해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럴 경우도 대리인이 그 현장을 직접 확인한 경우는 거의 없고 지나가던 자선이 모선의 ‘렛고 통(처리실에서 외판으로 나 있는 구멍)’으로 버려지는 것을 본 다음 대리인에게 항의를 전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현장을 보존할 수 없는 문제라서 그리 큰 갈등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품의 생산 수율 문제는 갈등이 심해져서 대리인과 항해사가 처리실로 내려가 수율을 다시 측정하는 일도 생기곤 했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대리인은 모선 측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샘플 할 때 수율은 모선에서 언제나 모선 측에 유리하게 조정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요, 가령 제품 생산 수율이 70%라고 합의했다면 제품량을 확인하여 ‘제품량÷0.7’해 주면 됩니다. 하지만 처리실에서의 실제 수율이 60%라면 모선측이 이득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제품이 70kg 생산되었다고 할 때 70%가 수율이라고 하면 원어량 100kg로 계산해서 돈을 지불하면 되지만, 실제 수율은 60%이므로 실제로 모선으로부터 받은 원어는 116.6kg가 되어서 모선은 16.6kg만큼의 원어를 그냥 받은 게 됩니다. 그래서 대리인은 생각보다 원어량이 적게 나온다 싶으면 처리실 작업 상황을 확인해서 제품 수율을 낮추어 달라고 하지만 본선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더라도 본선에서는 제품의 10%이상은 속일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왜냐하면 어창에 적재된 양이 ‘생산일지(logbook)’에 기재된 제품량 보다 10% 넘게 보유하고 있으면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는 미국 경비정(coast guard)의 검색을 피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대리인이 아무리 기를 쓰고 막으려고 해도 모선이 10% 이내에서 제품량을 속이는 것은 당연한 권리(?)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선에 적재된 어획물을 운반선에 전재할 때 파손되는 비율, 그리고 운반선이 입항하여 하역할 때 파손되는 비율까지 생각해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대리인은 한국어선이 늘 음성적인 장부(under logbook)을 작성하고 자신들의 자원을 훔쳐간다고 생각하여 흥분하곤 했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사실 자원을 훔쳐가는 것으로만 친다면 그들이 더 먼저이고 심했던 것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오직 일확천금을 위한 욕망으로 그것을 도전 정신으로 포장한 채, 아메리카 원주민의 땅에 와서 총칼로 노략질 한 것으로 세운 문명이니 말입니다.
또 하나의 갈등은 치졸해 보이는 것 같지만 한 식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한길호 선장은 옵서버를 포함한 어떤 외국인이라도 특별히 대우를 잘 해주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평소에도 그러하였는데 특히 수율 같은 걸로 문제를 일으키고 난 다음에야 오죽하였겠습니까. 미국수산청과 합의한 규정에도 그들은 사관급과 같은 대우를 해 주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 약점(?)을 이용하여 끼니때마다 밥, 된장국, 김치, 콩나물 따위를 식탁에 올리면 웬만한 미국인은 거의 먹질 못해 미치려고 하였습니다. 나중엔 도저히 참기 어려운지 선장에게 항의를 해 보기도 하지만 선장은 눈 하나 깜작하지 않았으므로, 대신 항해사들에게 찾아와서 은근히 친한 척 하면서 자기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을 좀 해 달라고 애원하다시피 하였습니다. 특히 맥주 같은 술은 구하기 힘들었기에 그들은 거의 사정하다시피해서 항해사에게 몇 캔씩 얻거나 항해사들과 함께 ‘파티’를 갖고 싶어 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인들은 스스로를 ‘party animal’이라고 할 정도로 함께 술 마시고 노래하고 대화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간혹 다른 어선들과 접선하여 자기들끼리 만나기라도하면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밤새도록 웃고 떠드는 걸 종종 보았습니다. 저놈들은 ‘땅덩어리가 넓어서’ 할 얘기도 많은가 보다하고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서로 만나서 쉽게 웃고 떠들고 이야기하는 모습은 좋아 보였습니다. 간혹 자선에서 그들을 위해 음식을 주기도 하지만 그들도 우리와 함께 모선에서 장기조업을 하는 사정이고 보면 그들이 한국음식에 대한 고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음식으로 그들을 고통에 빠뜨리게 하는 벌칙(?)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옵서버이고 대리인이지만 그들 역시 오래 동안 함께 생활하다보면 친구처럼 다정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여성인 경우가 제법 많았습니다. 어떨 때는 둘 다 여성일 때도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업무상 여러 가지 문제점도 부드럽게 풀리는 때가 많았습니다. 바다 위에서의 장기조업으로 지친 남성들이 여성에게 딱딱하고 거칠게 대할 이유는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당시엔 항해사든 선원이든 ‘서구적’인 것을 좋게 보려는 시각을 갖고 있던 시절이라 ‘실생활에서 필요한 영어’ 같은 것 하나라도 더 배워보려고 그들과 친해지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옵서버나 대리인이 여성일 경우, 남성들만 있는 어선에서 생길 수 있는 게 ‘성(性)’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을 매우 개인적인 측면으로만 여기기에 성에 관한 문제는 섹스 혹은 성욕과 관련된 문제에 국한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중에 단지 마음속으로만 성욕을 품거나 스스로 그 성욕을 해결하는 것은 일단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기에 큰 문제가 되질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선원과 외국인 여성이 눈이 맞아 합의한 사랑 혹은 섹스 역시 큰 문제가 되질 않는 것 같습니다. 다만 ‘sexual harassment’로 불리는 ‘성희롱이나 폭력’은 문제가 되었는데, 법적으로 문제가 제기 된다면 되면 모선 회사 측으로서는 피해보상 뿐 아니라 조업에도 심각한 차질도 생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희롱을 당한 여성의 입장에선 인권침해라는 심각한 법적, 도덕적 문제를 넘어 나중엔 정신적 외상(trauma)까지도 입을 수 있는 문제가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북양어장에 오기 전에 이미 다른 수산회사에서 그것과 관련된 문제로 인해 미국에서 소송이 제기된 사례가 있어서, 출항 전 본사의 ‘수산부장’이 직접 배로 와서 사관급 선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한 바가 있었는데, 먼저 성과 관련된 우리와 미국인들의 관점 차이,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관점 차이에 대해서 설명하였고, 그런 문제가 생겼을 때 회사 측에 막대한 손실을 끼치고 당사자도 엄청난 피해를 볼 수 있으니 필히 조심해달라는 당부를 하였습니다. 사실 바다나 육상 할 것 없이 우리나라 남성들의 ‘성 평등’과 관련된 성의식 수준은 아주 저급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외국인이 여성일 경우 선원들보다는 사관 특히 항해사들과의 사건이 일어날 소지가 많았던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외국인들은 거의 모든 시간을 항해사들과 함께 보내기 때문입니다.
사실 청춘을 배에서 보내야했던 선원들로서는 ‘성욕’을 어떻게 이해하고 처리할 것이냐가 큰 문제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결코 인간(생명)이라면 성욕은 이겨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단순하게 남성이 여성을 혹은 여성이 남성을 욕망하는 게 성욕의 실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우리는 그렇게 길들여져 왔기에 성(혹은 섹스, 성별, 성애)을 매우 개인적인 문제로 취급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여 늘 성욕이라고 하며 성기와 관련지어서 생각을 하게 되지요. 하지만 성은 개인적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넓게 보면 ‘삶의 기술’에 속하는 문제가 아닐까요. 그것은 우리 삶의 다양한 측면에서 성과 관련된 정치학이 우리 몸속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젠더의 문제나 성소수자의 문제를 비롯해서 남녀평등의 문제 심지어는 성인지적 관점 같은 것이나 남성과 여성 노동문제, 가족 내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 분담 문제들까지 확대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을 이해하고 체득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성해방’이나 ‘성 평등’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에 습속처럼 남아있는 남성중심, 특히 가부장적 남성중심의 억압적 체계를 잘 이해해야하고 바꾸어 나아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 장기조업이라는 시, 공간적 단절로 인해 선원들에게 성욕의 과도한 빈곤과 포화가 빚어내는 모순이 온 몸을 지배했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13) 피항
우리가 태풍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종의 ‘저기압’입니다. 북양어장에도 겨울엔 저기압이 올라오는데, 우리나라에 흔히 만나는 열대성 저기압보단 위력은 약하지만 어선이 조업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정도입니다. 피항이 결정되면 조업을 중단하고 갑판에 있는 모든 기계와 그물들을 고박(固縛)한 채 배는 앞바람을 받으면서 서서히 앞으로 전진 하는 방법으로 저기압이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 갑판과 마찬가지로 처리실도 흔들거나 넘어질 것들을 고박하고 특히 배수(排水)관련 시설을 점검합니다. 열려있던 ‘렛고 구멍’도 안에서 잠그고 배수펌프를 준비해 둡니다. 그리고 처리부원들에게 일정한 간격으로 처리실에 침수가 있는지를 살피게 합니다. 합작 사업 중에 저기압이 올라오면 자선들은 모두 우날라스카 섬의 항구(dutch haber)로 들어가 버립니다. 처음 승선하여 피항을 겪게 되면 약간의 공포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강한 바람이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불어오고 파도가 배를 뒤덮을 정도가 되며, 파도와 배가 부딪히는 소리가 웬만한 대포소리보다 크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롤링(rolling, 배가 좌우로 기울어지는 현상)이 심해지면 의자가 넘어질 정도가 되는데, 그래서 북양어선에선 옷장이나 책상 서랍은 모두 잠글 수 있게 되어 있고 커피포트 같은 것도 밑바닥이 고정된 곳에 놓아둡니다. 의자는 피항을 시작하면 아예 한 쪽 구석에 눕혀놓습니다. 심지어 잠자는 버릇까지 바뀌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습관적으로 한 발을 약간 들어 벽에 기대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나중에 그 버릇은 서서히 없어졌지만 간혹 그런 행동이 나오는 가 봅니다. 결혼해서 아내가 저의 잠버릇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으니까요. 식당에서도 특별한 조치를 취한 후 식사를 하게 되는데 그것은 물에 적신 광목을 식탁 위에 까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위에 놓인 밥 그릇, 국그릇이 웬만해선 넘어지지 않습니다. 간혹 식탁 위에 밥과 국그릇이 놓일 자리를 미리 약간 파 놓은 배도 있습니다. 뜨거운 국물이 있는 음식은 가급적 삼가고 그냥 비벼서 먹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겨울철 피항이 잦다 보면 선원들은 익숙해져서 생활에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피항 중에도 장기와 바둑을 두는 경우가 있는데 바둑의 경우 알통에다가 물을 부어 바둑알이 물에 젖게 하면 웬만한 배의 기울어짐에도 판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피항 중 식사시간에는 가급적 배를 크게 회두(回頭) 시키지 않으려 하고 부득하게 그렇게 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선내 방송하여 선내에서 단단히 준비하도록 시간을 줍니다.
피항을 하게 되면 선원들은 오히려 좋아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조업이 중단되기 때문에 브리지와 기관실 당직을 제외한 모든 업무가 중단됩니다. 피항은 하루 이틀 만에 끝날 때가 많지만 심할 경우 일주일 정도 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일명 ‘피항 아다리(あたり)’라고 하는데 선원들의 축제기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평소에 멀리를 전혀 느끼지 않다가도 피항으로 배의 흔들림이 심해지면 뒷머리가 약간 띵한 증세를 겪게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미세한 멀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승선경험이 많지 않는 사람은 술은 마시지 않는 게 좋습니다. 선원들은 침실이나 선원 식당에 모여 비디오를 보거나 카드놀이 등을 합니다. 특히 평소엔 보기 어려웠던 ‘문화영화’라고 불렀던 X등급의 도색(桃色)영화를 보기도 합니다. 문화영화는 출항할 때 납품업자가 갖다 준 것인데 그것 말고도 지나간 연속극이나 미니 시리즈 그리고 코미디 프로를 녹화해서 보내줍니다. 어장에 올 때까지 거의 다보고 어장에서는 다른 배와 교환해서 보기도 합니다. 보통 조업 중에는 도색비디오는 잘 보여주지 않는 편이나 피항 할 땐 특별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문화영화를 조업 중엔 보여주지 않는 이유가 선원들의 건강을 생각해서라고 하는데 약간 궁색한 변명일 뿐입니다. 문화영화라곤 하지만 화질이나 내용면에서 지금에 비하면 ‘고색창연’할 정도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보여 주어도 보지 않을 정도로 화질이 저질이었습니다. 그래도 당시엔 그 질 낮은 화질 작품을 보고 또 보고 하면서 몸도 달구고 머릿속에 새기기도 하였답니다.
피항을 결정할 때 같은 선단 내의 배라면 경쟁의식이 발동하기도 합니다. 당시 신라교역에는 한길호, 한진호가 쌍둥이 배로서 여러 면에서 비교되고 경쟁되었습니다. 어획량에서부터 피항을 결정하고 조업을 재개하는 것까지 그리고 입항 할 때 얼마만큼 어획량을 적재하여 입항하느냐에 관한 것까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부질없고 위험한 짓이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자기 자신이 경쟁이라고 하는 잣대를 들이댄 결과일 겁니다. 파키스탄 어장에서 갈치어군이 터져 만선을 하였음에도 좀 더 좀 더 하면서 어획물로 엄청난 과적을 하였다가 카라치(karachi)항에 입항하여 해수와 담수의 부력(浮力) 차이 때문에 배가 전복해 버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한진호, 한길호 두 배는 선장들의 이성적(?) 판단으로 경쟁이 그다지 격렬하진 않았지만 서로가 상대방을 늘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보통 어선의 경우 출항 할 때와 만선하여 귀항 할 때, 배에 실려 있는 ‘총무게’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출항할 때는 연료유와 기타 어구들을 많이 싣고 있기 때문이고 귀항할 때는 만선한 어획물들 때문인데, 어선의 경우 상선들과는 달리 양현에 표시되어 있는 흘수(吃水, draft)를 무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오래 동안 어선 생활을 하면서도 흘수의 눈금을 읽어 본 적이 거의 없으니까요. 단지 북양트롤선의 경우 부산항에 입출항 할 때 도선(導船)이나 항만요금 때문에 읽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또한 두 배의 경우 어창에 어획물이 좀 적재되기 시작하면 ‘무게중심’이 낮아지는 관계로 ‘롤링(rolling)’이 한층 심해지는 게 그 특징이었습니다. 무게중심이 낮아지면 배의 복원력이 좋아져 안전하지만 심하게 좌우로 흔들린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사실 어선은 여객선이나 상선과는 달리 조업을 위한 배이기에 좀 흔들리는 것은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피항할 때 거대한 파도를 만나 파도와 배가 부딪히면 파도의 일부분이 강한 힘으로 배를 덮쳐옵니다. 그때 배는 잠시나마 파도 속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파도가 브리지 아니 탑 브리지를 넘어 갑판에 떨어질 때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배가 파도의 마루부분을 지나 내려올 경우 선수부분이 바다에 먼저 닿으면서(사실은 떨어지면서) 선수갑판 쪽으로 엄청난 양의 바닷물이 유입되는데, 마치 대형 고래가 잠수하다가 호흡을 위해 몸을 뒤틀면서 수면위로 올라오는 모습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때 엄청난 양의 바닷물이 선수갑판에서 배의 양 현에 있는 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을 보면 장관입니다. 그리곤 바다가 갈라지는 쩍쩍 하는 소리와 ‘푸후’하는 배의 자맥질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배는 파도의 경사면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면서 강한 진동을 하게 되는데 배 전체가 심하게 흔들릴 정도였습니다. 마치 배가 계단을 덜컹거리며 미끄러져 내려가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그걸 높은 브리지에서 보고 있는 게 처음엔 약간 무서웠지만 나중엔 마치 바이킹 게임을 하는 것처럼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흔들리지만 결코 우린 쓰러지지 않는다는 자신감 때문이었을까요.
피항은 선원들에게만 휴식시간이 아니라 하급항해사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 줍니다. 그들에게도 처리실 당직이 중단되는 것은 물론 브리지에서 선장이나 상급항해사들이 자리를 비운 준 틈을 타서 다른 배에 승선하고 있는 학교 동기생들과 보이스 교신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조타륜(키)도 피항 당직으로 올라 온 선원 2명이 교대로 잡게 되므로 하급 항해사 역시 즐거운(?) 피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일주일 정도 피항을 하게 되면 노는 것도 지겨우니 이제 날씨가 좀 잠잠해 졌으면 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피항할 정도가 되면 배의 요동(rolling과 pitching)이 너무 심해 머리가 늘 흐릿하기 때문입니다. 저기압이 어장을 지나갈 시점이 되면 파도와 바람의 방향이 바뀌게 되는데 피항의 끝물에는 그 영향으로 파도의 방향이 일정한 곳에서 오질 않고 여러 방향에서 오기 때문에 배의 롤링이 가장 심하게 됩니다. 롤링은 각도로 표시되는데 이론적으론 45도만 넘어가지 않으면 안전하다고 하지만, 보통 15도만 넘어가도 뭔가를 잡지 않고는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을 정도이며, 만약 25도 정도가 넘어가면 마치 배가 뒤집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고 머리털이 곤두서는 극심한 공포감도 느끼게 됩니다. 피항의 끝물엔 롤링의 각도도 커지고 횟수도 잦아지는데, 삼각파도라고 해서 파도도 크고 그 방향성을 예측할 수 없어서 배가 옆으로 파도를 한 방향에서 연속으로 얻어맞게 되면 전복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피항 중에 엔진이라도 고장 난다면 아주 위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엔진이 고장 나면 배의 조선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파도를 향한 배의 응전(應戰)이 불가능해져서 전복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집니다.
대양에서 피항 하는 방법 중 하나가 ‘heave to’인데 끝없이 앞바람과 파도를 맞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때 배의 속도는 5노트 정도(가변 pitch 방식의 엔진에서 ‘전진 5도’ 정도를 사용합니다.)인데 최소한 엔진을 적게 쓰면서 겨우 조타만 가능하게끔 하는 게 핵심입니다. 이땐 엔진을 많이 쓰면 배가 큰 파도와 부딪혀 진동이 심할 뿐 아니라 배가 부서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배의 ‘태풍-되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풍에 대한 저항도 굴복도 아닌 상태 말입니다. 피항을 생각하면 모비딕(moby dick)에 나오는 에이헤브(Ahab) 선장이 떠오릅니다. 거대한 모비딕의 몸에 작살을 꼽고 자신의 운명을 다하는 에이헤브 선장의 행동을 보면서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한계를 숭고하게 넘어서는 ‘모비딕-되기’ 혹은 ‘지각 불가능한 것-되기’라고 느꼈던 것입니다. 황천(荒天)에서 거친 파도와 바람을 맞아 배가 자신의 최대 엔진과 조타능력으로 싸우기 보다는 파도(자연이라고 하는 신)에 몸을 맡기는 게 피항이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그것은 어쩌면 니체(Nietzsche)가 말한 운명애(運命愛)가 아닐까요. 그 운명애를 완벽하게 구현하는 사람이 초인(超人)이고요. 그건 그냥 배가 바다의 상황을 긍정하고 맡기는 것일 뿐 굴종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반면에 자신의 힘을 과도하게 확신한 나머지 자연의 힘을 이기려 한다면 배는 침몰하고 말 것입니다. 침몰한다는 점에선 ‘에이헤브 선장의 행동’과 ‘자신의 힘을 과도하게 확신한 배’가 비슷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에이헤브 선장은 운명에 몸을 던진 것이지 운명을 적대시하여 맞서 싸운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천후에 최대 엔진을 쓰며 최대 조선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운명을 깔아뭉개려는 짓일 뿐 아니라 운명이 두려워 그것을 탈출하려는 짓이기도 할 겁니다. 그것은 결국 운명을 능멸하는 짓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배는 그야말로 운명을 다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검은 수렁에 갇히는 전주곡일 뿐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런 것으로 가득하지 않을까요. 운명을 긍정하라는 말이 운명에 굴복하라는 말이 아님을 안다면 삶의 ‘태풍 되기’가 언제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며 또 그게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태풍이 지나가면 바다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평온의 시간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러고 보면 태풍이 바다의 실체인지 평온이 바다의 실체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반복되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들 사이 매달려 있는 것이겠지요. 그때 수평선 저 너머로 태양이 떠오르고 갈매기들이 날아오릅니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듯 그렇게 혼돈의 시간은 지나갔습니다.
14) 노동조건
북양 어장의 명란 철, 처리실 작업은 피항할 때 이외에는 멈추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 명란 철엔 3교대를 하였습니다. 여기서 3교대란 8시간 일하고 16시간 쉬는 게 아닙니다. 거꾸로 16시간을 일하고 8시간을 쉬는 것인데 교대시간 때 식사하고 씻는 시간을 생각하면 실제로 잠자는 시간 7시간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휴식시간이 없었습니다. 과거 북양어장이 호황기일 때는 4교대까지도 했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18시간 일하고 6시간 쉬는 것이었는데 ‘산업혁명’ 때의 노동시간과 비슷합니다. 과연 그게 가능했는지 상상이 가질 않습니다. 물론 1년에 한 번, 명란 철은 3~4개월 정도 밖에 되질 않았고 명란 수당도 지급되었다고 하지만 과히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노동 강도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때를 경험했던 선원들의 말에 의하면 피곤을 풀어주기(쫓기) 위해서 피로회복제(아로나민 골드)가 지급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처리실에서 너무 졸음이 쏟아져 오는 바람에 바로 앞에 있는 팬 속의 명란이 순간적으로 보이질 않아 선별을 위해 명란을 집어야 했는데 그게 어려울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물론 오래된 기억들이라 전달되는 과정에서 덧붙여지거나 더 강하게 표현된 것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하루 6시간 밖에 쉴 수 없는 노동을 생각하면 왠지 오래 된 시간의 상처를 핥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쓰라리고 더 아프기만 합니다. 처음에 북양어선에 승선하여 처리실 내에 화장실이 있는 걸 보고 의아해서 물어보았더니 모두 그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땐 일하다가 너무 힘드니까 화장실 간다는 핑계를 대고 침실로 도망(?)가는 사람이 있어 처리실 문을 잠그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시로 상급자들이 내려와서 인원을 점검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당시엔 북양트롤어선의 수입이 좋으니까 아무도 하선하려고 하질 않았고 서로 오랫동안 배 타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몸이 좀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면 하선하라고 할까봐 꾹 참고 일하는 선원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육지에선 북양트롤어선에 승선하기 위해 많은 대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승선을 위해 배경 좋은 사람의 힘을 빌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득이 항차마다 몇 명씩 골라서 하선시키기도 했다고 합니다. 몇 항차 하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다고 하니 분명 과거엔 황금알을 낳은 북태평양 어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모든 선원들의 노동과 맞바꾼 ‘땀과 부족한 잠’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더 확대해 보면 어장을 개척을 지원한 정부와 학계 그리고 자본을 투자한 기업의 공도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원동력은 잡초처럼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노동 강도를 감내 해야 했던 어선원들이었을 것이고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 노동이 지금 우리를 있게 하는 힘이 된 것입니다.
4교대 뿐 아니라 3교대도 힘든 노동조건이었습니다. 다만 명란 철이 끝나면 2교대 작업으로 환원되었습니다. 명란 철엔 명태 어획성적(합작 사업포함)이 좋아 할복을 할 때도, 드레스 제품을 만들면서 명란을 채취할 때도 처리실은 쉬는 시간이 없이 돌아갔습니다. 다만 명란 철이 아닐 때 라운드 처리를 하면 처리대의 처리속도(나열속도)가 빨라져 더 이상 팬에 담을 고기가 없거나, 급냉실에 입고된 어획물이 아직 안 얼려져서 급냉실에 넣을 공간이 없어서 쉬는 시간이 생기기도 했는데 우리는 그런 것을 모두 ‘아다리(あたり)’라고 했습니다. ‘아다리’라는 말은 다양하게 사용되었는데 어떤 음식을 먹고 잘 못되었을 때나 혹은 나쁜 짓을 하다 걸렸을 때, 반대로 제수 좋을 일을 만났을 때 가령 작업 중 쉬는 시간이 생겼을 때 사용하였으며 ‘우연하게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1986년경엔 비교적 명란 철만 지나면 노동 강도는 그렇게 높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어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인데, 합작 사업이 끝나면 공해어장으로 이동하여 자체조업을 해야 했는데 어획성적이 매우 저조하였습니다. 아침에 투망하여 하루 종일 그물을 끌고 다니다가 저녁에 양망하면 1,000~2,000팬 정도 밖에 잡히질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야간에 거의 조업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군형성이 미미하기에 밤새도록 어군을 찾으러 돌아다녀야했습니다. 다만 장기조업이 문제였고 많은 선원과 사관들은 그와 관련된 스트레스가 심했습니다. 특히 장기조업을 마치고 부산에 입항해서도 충분하게 쉴 수 있는 휴식시간을 가질 수 없다는 게 더 큰 스트레스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육지에서 먹고 살만한 직업들이 많았기에 수산회사들은 선원수급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승선하겠다고 한 선원들이 출항하는 날 배로 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집단적으로 승선을 거부하는 사태가 생겨 배의 출항날짜를 며칠 조정하는 경우도 생겼었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말쯤 동남아 등지로부터 외국인 선원들을 고용하기 시작하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국내선 상선에도 중국교포들을 3~5명씩 승선시키기 시작할 무렵이었으니까요.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은 운반선에 승선한 동남아에서 온 선원들이 알라스카 추운 날씨에 거의 눈만 내놓은 복장으로 갑판에서 일하던 모습입니다.
북태평양 어장의 황금기엔 자체조업만으로 한 달 정도 조업하면 만선을 하였기 때문에 신라교역 소속 1,000톤급 한일호는 선원들이 가장 승선하고 싶어 하는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입, 출항 및 조업까지 포함하여 두 달 정도면 귀국을 할 수 있으니 좋았던 것이고 임금도 당시의 육상 직종에 비하면 엄청나게 높았다고 합니다. 하여 당시의 힘든 노동 조건 속에서도 아무도 하선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베링 해에서 출발(현장 발)하여 부산항에 도착하는 기간 10~12일 동안에도, 좀 더 많은 어획물을 많이 실어 오기 위해 갑판, 피시본드, 처리실로 하루에 한 번씩 냉동 어획물 옮기는 일까지 하였다고 하니 실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1986년에도 만선하여 입항할 때 경우 부식을 넣어두는 육고(肉庫)에도 어획물을 채웠습니다.
북양 어선에선 입항하면 선원들이 하역작업은 하지 않습니다. 부두에 소속된 항만노동자들이 있어서 수산회사 육상직원들과 부두노동자들이 하역을 담당하였습니다. 북양어장이 황금기였을 때 선원들은 입항해서 고기를 몰래 팔아먹었다고 합니다. 항만 주변의 업자들과 짜고 밤 당직 시간에 배로 사람을 불러 어창에서 몰래 고기를 팔아먹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삼각 커넥션(?)이었는데 선원과 주변 식당 그리고 화물운전자가 모의한 것입니다. 하지만 신라교역 같은 회사의 경우 육상직원들의 엄중한 감시로 고기 한 마리 밖으로 방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원 뿐 아니라 하역을 담당했던 항만노동자들도 작업이 끝나면 고기 몇 마리를 옷 속에 숨겨서 슬쩍 가져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신라교역에서는 그것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역을 하다보면 냉동 어획물이 많이 파손됩니다. 냉동된 상태에서 떨어져 나온 고기(어획물 조각)를 ‘바라’라고 하였는데 상품성이 떨어지는 것이었죠. 사실 인간은 1차 생산물에 대한 ‘공짜’라는 생각을 부지불식간에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원들이 현문 당직을 서는 경우엔 항만 노동자들이 가져가는 적은 양의 ‘바라’는 대체로 눈 감아 주는 편이었습니다.
입항하면 수리업체들이 들이닥쳐 배의 구석구석을 수리한다고 갑판 위에 난장을 쳤습니다.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밤이 되어도 집으로 돌아가지고 않고 야간에 ‘잔업’을 하였습니다. 선원들은 당직표에 따라 정박당직만 수행하면 되었었는데 다만 입항해서 아쉬운 게 있다면 입항기간이 너무 짧아 그리운 사람들과 좀 더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짧은 휴식 후 육상에서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바다로 나아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육상에서의 시간이 거의 없으니 그게 당시 북양어선에 승선하는 모든 선원들의 불만이었을 겁니다. 선원들에게 입항기간의 길고 짧은 것 그리고 그 기간 동안의 휴식은 어쩌면 노동조건에 속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바다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휴식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육상처럼 일요일이나 공휴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바다에서의 휴식이란 불규칙할 뿐 아니라 실제론 휴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피항 같은 경우 흔들리는 배를 비롯한 모두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노동을 하고 있다고 간주해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어획이 저조하거나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휴식시간 역시 생산 공정 중 불규칙하게 생기는 간극이었을 뿐입니다.
15) 전재(轉載) 작업
전재 작업은 쿼터 소진의 올림픽 시스템 방식과 장기조업이 이루어지면서 중요한 작업 중 하나가 되어버렸습니다. 대체로 베링 해는 겨울철엔 기상상태가 좋지 못합니다만 오히려 어황(漁況)은 겨울철이 좋아 전재할 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어창에 어획물이 차면 조업을 더 이상하기 어려우니까요. 운반선은 어획물만 운반하는 게 아니라 보충선원, 주식과 부식 및 여러 가지 선용품 그리고 심지어는 연료유까지 싣고 와서 조업선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보통 북양어장에서는 두 배가 물품을 주고받을 때 아주 큰 중량물이 아니라면 수면에 뜰 수 있고 방수가 되도록 비닐로 꽁꽁 싸서 바다위에 던지면 다른 배가 접근하여 긴 갈고리로 건져 올리는 방법을 씁니다. 그리고 사람의 이동은 바다가 좀 잠잠해 지기를 기다려 고무보트(모터가 달린)를 이용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지금 생각하면 바다의 수온이 너무 낮아(2℃) 매우 위험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바다에 빠지기라도 하면 낮은 수온으로 수 분만에 심장이 멎어버렸을 겁니다. 넓은 바다에 빠진 사람을 찾기란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비슷합니다. 머리부위가 수면위에 떠 있다하더라도 배에서 보면 파도 등에 가려서 보이지 않기 때문인데, 실제로 항해 중에 사람이 빠지면 배를 돌려 그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몇 천 톤급의 배가 한 바퀴 돌아가면 0.2마일 이상의 공간이 어긋나 버리고 그렇게 되면 지나왔던 자리를 되찾기도 어렵고, 더구나 빠진 사람을 눈으로 확인하여 건져낸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전재를 하려면 두 배가 접선(接船)을 해야 합니다. 오만어장에서 갈치 철엔 주간에만 조업을 하고 해가 지면 어군이 수면으로 떠오르면서 흩어져버려 조업할 필요성이 없어져 매일 접선을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일단은 배의 크기가 북양어선보다 훨씬 작은 300~400톤급이고, 해면의 상태도 아주 평온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북태평양은 다릅니다. 먼저 운반선이 어장에 도착해도 저기압 등으로 접선은커녕 조업선, 운반선이 함께 피항을 하고 있을 때도 있었으며, 어황에 따라 접선 날짜를 정확하게 잡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접선은 가능할지라도 전재 작업을 할 수 있는 양호한 기상(氣象)상태가 몇 시간 정도 밖에 안 될 것으로 예상된다면 그걸 위해 힘든 접선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운반선도 어장에 올라와서 만선하기까지 심한 경우 몇 달을 소비할 수도 있었습니다. 기상도를 살펴가며 접선계획이 잡히면 가장 해면이 평온한 곳에서 두 배가 이동하기도 했는데, 알라스카 연근해일 경우 접선 후 앵커를 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기상상태가 앵커를 놓을 정도가 되지 않으면 두 배가 미약한(낮은) 엔진을 써 가면서 접선한 상태를 유지한 채 이동하면서 전재 작업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접선 자체도 쉽지 않았습니다. 먼저 배들이 1,000톤~5,000톤에 이르는 어선으로 서는 대형선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북양어장으로 오는 운반선들은 선수근처의 외판 옆면에 ‘사이드 프로펠러(side propeller)’가 있어서 접선하기가 한결 쉬웠습니다. 어느 정도 배를 접근시켜 놓고 사이드 프로펠러를 이용해서 거리를 좁힐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접선을 마무리하기 위해선 두 배를 무링라인(mooring line)으로 서로 묶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무링라인을 상대방의 배로 보내는 게 접선을 위한 첫 번째 작업입니다. 어느 정도 배가 가까워지면 선수(갑판장), 선미(갑고수)가 ‘히빙라인(heaving line)’이라고 하는 빨랫줄 정도 굵기의 로프를 치게 됩니다. 히빙라인 끝에는 모래주머니기 달려있는데, 그것을 빙빙 돌리다가 적절한 시점에 놓게 되면 원심력을 이용하여 다른 배로 날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간혹 히빙라인의 날아가는 범위를 늘이기 위해 모래주머니가 아니라 샤클(shackle bolt)의 수놈부분을 넣어서 사용하는 갑판장도 있는데, 이게 날아가서 상대방 배의 선원 머리에 맞는다면 큰 사고가 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접선을 위해 갑판으로 나온 모든 선원들은 반드시 안전모를 써야 하고 상대방 배와 상황을 늘 살펴야 합니다. 히빙라인이 전달되면 그것의 끝에 무링라인을 묶고 난 다음 상대방에게 신호를 보내고, 히빙라인을 던진 배에서 그것을 당겨 무링라인 끝의 고리부분을 자신의 배 갑판에 있는 비트(beat)에 걸면, 무링라인을 보낸 배에서는 윈치를 이용하여 무링라인을 감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선수와 선미가 비슷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감아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배가 삐딱하게 붙으면서 충돌할 수도 있습니다. 보통 북양트롤선의 한 쪽 현(주로 우현)엔 커다란 고무펜더(fender)를 매달고 다녔는데 가격이 1,000만 원 이상 되는 것으로, 대형펜더 덕분에 접선할 때 서로의 외판을 부딪치는 사고를 상당부분 감소시켜 주었습니다.
기상 상태가 좋지 못할 때, 그리고 선장의 접선 실력(배를 미세하게 조선하는 능력)이 시원치 않을 경우 접선을 위해 여러 번의 접근을 시도할 때가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접선이 이루어졌다고 가정한다면, 배를 접근시키고 히빙라인, 무링라인 교환하고, 두 배가 붙으면 추가 무링라인을 인출하여 선수, 선미를 보강하고, 배 사이에 그물을 치고 사다리를 놓고 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보통 1시간 이상입니다. 하지만 접선시도가 몇 번 실패로 돌아가면 그때 갑판원들은 추운 갑판에서 몇 시간을 떨면서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때 갑판원들은 브리지를 쳐다보며 원망 섞인 눈초리를 보내면서 입으론 육두문자 내뱉을 때가 많습니다. 접선이 완료되면 힘든 전재 작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더 짜증이 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접선을 시도할 때부터 완료될 때까지 전 갑판원이 갑판에서 대기해야 하는데 그렇게 지겹고 힘든 접선이 끝나면, 곧이어 전재 당직 시간에 걸려 바로 전재 작업을 위해 어창으로 투입되어야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잘못된 ‘아다리’라고 해야 할 겁니다. 입, 출항 그리고 접선할 때 잘못 걸리면 그렇게 당직시간이 연속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운반선과 접선이 완료되면 일단 운반선을 타고 온 보충선원들이 넘어오고 싣고 온 물품들을 받습니다. 그리고 미리 짜여진 ‘전재 당직표’에 따라 선원들은 나뉘어져 전재 작업이 시작되는데, 보통 경험이 없는 선원들은 운반선에 배치됩니다. 그리고 경험 많은 선원들은 본선으로 배치되는데 이유는 본선의 입장에서 볼 때 운반선 선창(船倉, hold)엔 어획물이 어설프게 적재되더라도 그것은 운반선의 책임이지만, 본선의 어창에서는 생산된 날짜 그리고 배의 균형(balance)까지 맞추고, 전재해야 할 어종과 양 등등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선의 어창엔 컨베이어 시스템 등이 잘 구비되어 있지만 운반선에서는 본선에서 실려 온 어획물을 거의 맨 몸으로 적재해야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운반선 측에서는 어획물을 자신의 선창에 잘 적재해야 했으므로 운반선으로 넘어온 본선 선원들에게 잘 좀 적재해 달라고 술과 안주를 뇌물(?)로 내 놓기도 합니다. 전재 작업은 하나의 어창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선수와 중간 어창 등과 같이 2개 이상의 해치를 열고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6시간을 일하는 중간에 한 번 참을 먹는 시간을 가지는데, 참을 먹는 시간에는 운반선으로 넘어 갔던 선원들이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끔 운반선에서 이미 술을 제법 마셔버려 취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사실 전재 작업은 힘들기도 하지만 위험한 작업입니다. 비록 전재 수당을 받는다곤 하지만 아무도 전재 작업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30℃의 어창에서 꽁꽁 얼려진 냉동 어획물은 이미 생선이 아니라 ‘바위 덩어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가끔 카고 윈치 후크에 매달린 ‘목꼬(もっこ, 어획물을 담아 운반하기 위한 삼태기 같은 것으로 그물이나 와이어로 만듭니다.)에서 어획물이 떨어지기도 했는데, 특히 운반선 측이 더 위험한 것은 본선에서 실려져 온 목꼬의 어획물이 운반선 갑판(어창 해치 옆)에 대기하고 있던 중, 배가 흔들리면서 그곳에서 몇 개의 어획물이 운반선 선창 내로 떨어져 운반선 선창의 해치 밑에서 작업하던 선원들을 위협하거나 강타할 수가 있습니다. 실제 그런 경우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으며 그것 때문에 사망사고까지 발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특히 두 배가 조금씩 항해를 하면서 하는 전재 작업은 배가 흔들릴 수 있기에 매우 위험합니다. 그리고 기상이 나쁘다 할 수 없는 날도 북태평양의 겨울은 거친 바다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접선하고 전배 작업을 하는 것은 쉬운 게 아님을 넘어 위험함의 연속이었다고 해야 할 겁니다. 접선을 완료하기 위해 무링 라인을 당기고 또 그것을 탱탱하게 긴장이 될 정도로 감아야 하는데 배와 파도의 힘에 의해서 굵은 무링 라인이 터져 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때 터진 무링 라인이 선원을 때려 버릴 수도 있는데, 그 경우 뼈가 부러지는 것은 예사이고 사망사고까지 날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 어선들은 일본이나 다른 어선들에 비하면 노후 된 배들이라 무링 라인을 거는 비트나 페어리더(fair leader) 등이 낡은 상태에서 부러지거나 뽑히면서 선원을 강타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비트나 페어리더는 모두 금속으로 된 중량물이므로 그게 날아와서 몸과 부딪힌다는 것 정말 아찔합니다.
기상이 좋지 않은 날은 이선(離船) 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선할 때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할 일은 운반선으로 넘어갔던 선원들이 본선으로 넘어 오는 일입니다. 선원들은 배에서 자체 제작한 둥근 통(금속으로 둥그렇게 만들었으며 한 번에 10명 정도가 탈 수 있는 것으로 격투기 UFC 경기장의 축소판을 생각하면 됨.)을 타고 넘어 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런 통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그냥 그물이나 와이어로 만든 목꼬를 타고 다녔는데 기상 악화로 이선할 때 매우 위험했습니다. 특히 카고 윈치로 그것을 옮기는 과정에서 흔들리는 배와 함께 상하 요동이 너무 심해서 선원들을 실은 목꼬가 갑판에 패대기쳐지는 대형사고가 날 뻔 했던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접선한 배는 바람과 파도의 영향으로 서로 당기는 힘이 발생해서 배의 외판이 충격을 받아 구부러지거나 부서지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보통 조업선은 오른쪽으로 운반선의 왼쪽과 접선을 많이 하는데 장기조업을 하고 입항할 무렵이면 오른쪽 난간 파이프 중에 성한 게 하나도 없을 정도였고 외판이 찢어지거나 일그러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특히 운반선은 어선이라기보다는 상선(商船)에 가깝고 그런 이유로 항해 속도 등이 중요하기에 어선과는 달리 상단이 하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었고 날씬했는데, 어선과 접선하였을 때 배가 상하로 크게 출렁거리게 되면 운반선의 상단 외판이 어선의 외판 상단을 누르면서 강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 번은 폴란드 운반선과 접선하여 기상이 갑자기 악화되는 바람에 이선을 해야 했었는데 폴란드 선원들이 협조를 해 주지 않고 미적거린 것과 폴란드 운반선의 생김새 때문에 한길호의 오른쪽 외판이 완전히 박살나버린 경험을 했었습니다. 외판 상단만 부서진 게 아니라 연돌과 선미까지 긁히고 선미에 전개판을 걸어두는 갤로우스까지 찌그러져버리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 버린 것입니다.
전재 작업으로 인하여 제가 아는 후배 한 명은 운반선 선창에서 작업 도중, 떨어지는 냉동 어획물이 머리 부위를 강타 당하여 사망하였고, 선배 한 분은 터진 무링라인에 맞아 기절하여 긴급 출동한 헬리콥터에 실려 알라스카 병원으로 후송된 적이 있으며, 저도 2항사 때 운반선에서 작업하다 바로 발 옆으로 냉동어획물 서너 개가 떨어지는 위험한 순간을 경험을 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아찔한 순간이지만 그걸 어찌 운이 좋았거나 나빴다 라고만 할 수 있을까요. 모두가 터무니없는 노동 강도와 조건 때문이었다고 말해야 옳지 않을까요? 안전제일이라는 구호나 캠페인이 필요한 지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 사고는 모두 노동 강도와 조건에 대한 구조적 문제에서 발생합니다. 아무리 안전을 지키려고 해도 노동 강도와 조건이 험악하다면 언제든지 나올 수 있는 사고입니다. 북양어장의 거친 바다환경, 배라는 특수조건 그리고 장기조업과 바다위에서의 조업 그리고 전재 작업 같은 것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그런 사고의 잠재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들이지요. 그런 잠재성을 염두에 두질 않고, 운이 나쁘다거나 안전의식을 강화하는 정도로만 그런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매우 심각한 비인간적인 처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인간으로서 타자(他者)로서의 인간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그것과 더불어 사고의 보상 문제에까지 이르면 대체로 회사들은 성실하지 못한 태도를 취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두 억울하고 한 많은 죽음이 되지요. 때론 인간의 삶이 어떤 거대함에 힘 한 번 제대로 못 쓰고 쓸려가기도 하는 것이라곤 하지만, 그런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찾아내고 또 다른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학습하고 그것을 서로에게 불씨처럼 전해 주는 게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해 왔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걸 모른다면 아니 알아도 어떻게 삶에 적용시켜야 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그것은 스스로 ‘물질화’ 된 것임을 자인(自認)하는 꼴이 될 겁니다. 하지만 우린 그런 것들을 학교에서 혹은 사회에서 많이 배우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아닌, 아니 우리가 아닌 타자들을 어떻게 발견하고 사랑해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그건 인간에 관한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거친 바다 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가족을 사랑하고 걱정하였듯이 우리에게 잘 보이지 않는 주변을 더 찾아내고 넓혀나가야 할 것입니다.
16) 선원 그리고 사건들
기억나는 사건 하나는 한진호 탈 때 조리부의 싸움이었습니다. 조리부원은 음식을 담당하는 관계로 술을 확보할 수 있는 조건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담당하다보니 안주 같은 것도 만들어 먹기 좋았을 것입니다. 조리부는 출항 준비 중 주, 부식을 실을 때부터 납품 업체로부터 귀한 대우를 받기도 하고, 뇌물성 돈이나 물품을 받기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조리장은 양반이라고 불리만큼 조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조리부원은 모두 4명인데 한 명은 사관식당을 담당하는데 ‘싸롱(싸롱보이)’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주방장(주자), 조리수, 조리원이 있습니다. 단합대회를 겸해서 점심 이후부터 먹은 술에 모두 많이 취해버린 것 같았습니다. 예전에 그런 일은 없었는데 말입니다. 조리장은 술에 취해 일찍 뻗어버리고 조리수에게 저녁을 하라고 했는데, 조리수가 조리원에게 저녁 식사에 국수를 준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조리원은 어찌 저녁 식사에 국수를 내 놓을 것이냐고 하면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실 선원식당에서 식사 할 때 준사관(갑판장, 조기장 등)들의 입김이 여간 센 게 아닙니다. 그래서 식사에 문제가 있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조리부를 불러 질타를 하곤 합니다. 그러니까 조리원이 생각하기에 저녁에 국수를 올린다면 존사관들에게 엄청난 욕을 먹을 게 확실하기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조리수는 조리원이 자기 명령에 불복했다고 조리원을 욕하고 때리다가 급기야 싸움이 일어났는데, 조리원이 반항하며 달려드니까 순간 옆에 있는 식칼로 협박하다가 내리쳐 버린 모양입니다. 칼이 조리원의 관자놀이 근처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유혈이 낭자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제야 주변에 있던 선원들이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현장으로 달려와서 싸움을 말렸습니다.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는 조리원을 죽여 버려야 한다고 소리치는 술 취한 조리수를 몇 사람이 달려들어 칼을 뺏고 선원식당 옆에 있던 3항사 방에 감금해 버렸습니다. 그리곤 칼에 맞은 조리원은 머리를 붕대로 감아 2층 제 방에 눕혀(숨겨) 놓았던 것이죠. 브리지에서 당직을 마치고 설마 제 방에 조리원이 있는 줄은 모르고 문을 열었던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머리에 붕대를 친친 감은데다가 붉은 피까지 배어 나온 마치 시체 같은 사람이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보니 섬뜩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날따라 현창 밖으로 북양의 달빛이 교교하게 비치고 있었거든요. 아무튼 그 사건으로 선장은 배에 있는 모든 술을 바다에 버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하여 항해사가 관리하던 창고의 술을 비롯해서 갑판부, 처리부, 기관부 할 것 없이 모든 술을 바다에 버려버렸습니다. 모두에게 아까운 술들이었지요. 하지만 술, 싸움, 칼, 피 등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부산에 입항하여 새로운 선원들을 싣고 어장으로 가던 중 항해 당직을 위해 올라 온 선원의 말에 의하면, 다른 배에 있을 때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며 작년 12월 크리스마스 때 일어난 일을 말했는데 바로 그 술병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작년 합작 사업을 할 때 피시본드에서 어획물을 밀다가 병뚜껑을 따지 않은 소주 5병이 올라와서 정말 맛있게 마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겐 경이로운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던 것이죠. 우리가 버린 소주들이 차가운 알라스카 바다 속에서 뿔뿔이 흩어져 재기를 꿈꾸던 중, 어떤 자선의 그물 속에 들어갔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가 타고 있던 배로 넘겨졌겠지요. 참으로 멋진 부활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개의 조업선에서는 술을 통제하는 편입니다. 노동 강도도 센데다가 술을 늘 통제하다보니 술을 한 번 입에 되면 욕심이 생겨 쉽게 취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평소엔 아주 조용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도 술을 통해서 야성(野性)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곤 한 번 무너진 좋은(?) 이미지를 회복하지 못해서 중간에 귀국하는 선원도 있었습니다. 상선의 경우 술을 통제하지 않고 선원들의 자유의사에 맡겨 둡니다. 사실 어선도 술을 살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자신이 구입한 술은 자신이 알아서 합니다. 다만 배에서 공용으로 구입한 술은 항해사들이 관리합니다. 기지선이나 장기조업을 하는 북양어장의 경우 선원들이 갖고 있는 술은 바다에서 일찍 동이나 버립니다. 그러니까 술이 귀한 것이죠. 그래서 술 한 병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술을 얻으려면 관리자인 항해사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처리부원들은 당직을 마칠 무렵이면 회나 ‘알 탕’을 준비하여 항해사를 자기들의 침실로 초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항해사가 답례로 소주 몇 병은 들고 가지요. 명절이나 회식이 있는 날은 술이 배급됩니다만 그것으론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늘 무엇을 해주는 대가로 술을 요구합니다. 항해사의 머리를 깎아 줘도, 무엇을 수리해 주거나, 청소를 해줘도 술을 요구하지요. 술을 적당히만 마시고 위와 같은 큰 사고만 없다면 술은 언제든지 마실 수 있도록 하는 게 좋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술 또한 음식이니까요. 북양어장에서 모든 술 종류는 면세품이었기에 입항해서 집으로 돌아갈 때 ‘양주’ 한 병쯤을 챙겨 놓았다가 가지고 가는 선원들도 있었습니다. 당시엔 육지에 있는 사람들은 배를 탔다하면 무조건 배 사람으로부터 양주나 양담배 등과 같은 ‘물 건너 온 선물’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북양어장은 출항하여 어장에서 외국 땅에 발디뎌볼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그래도 육지 사람들은 그런 사정을 잘 모르지요.
조업선에서 선원들의 놀이는 그렇게 다양하지 못합니다. 명절엔 배 전체가 선원식당에서 모여 크게 한 판 노는데 노래자랑과 윷놀이, 제기차기, 바둑, 장기, 오목 대회 그리고 갑판에서 그물실로 만든 공으로 미니 축구 등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평소에 가장 많이 하는 놀이가 카드 게임의 하나인 ‘훌라’였습니다. 당시는 요즈음 유행하는 ‘전투 훌라’는 없었는데 여름철이나 야식 무렵 그리고 피항할 때 침실과 선원식당에서 여러 팀의 게임이 벌어졌습니다. 게임도 배마다 유행하는 게 있었습니다. 어떤 배들은 고스톱만 치거나, 장기를 두는 곳이 있었는가 하면 조그마한 윷가락을 만들어 와서 윷놀이를 하는 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훌라를 가장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훌라는 다른 게임에 비해서 스릴감이 높고 도박성이 강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훌라할 때 판돈은 모두 ‘담배’였습니다. 담배 한 갑을 단위로 게임을 했는데 노름판에서 판돈으로 너무 자주 주고받다 보니 담배 포장지가 손때를 타서 너덜너덜해져 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판돈용 담배는 전기테이프로 모서리를 친친 감아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문제는 판돈을 많이 잃은 사람이 어떻게 노름빚을 갚을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담배와 주류(酒類) 등은 모두 면세(免稅)였기 때문에 그리 금액은 큰 게 아니었습니다. 술은 배에서 필요한 양만큼 주문을 하고 담배는 개인이 주문한 것을 항해사가 취합해서 선장에게 보고했는데, 어느 날 100보루를 주문하는 선원들이 있어서 알아보니 ‘노름빚’을 갚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면세품이라 가격이 낮고, 마음대로 양껏 주문할 수 있다곤 하지만 너무 심한 것 같아 그렇게는 주문해 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항해사들은 당사자들 사이에서 노름빚을 조금 탕감해 주라고 말해 보기도 하고 차라리 입항해서 현금으로 갚으라고 권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담배 100루 같으면 엄청난 양인데 결국 바다에선 다 피우지 못해 입항하면 집으로 가지고 가야 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북양트롤선도 부산에 입항하면 세관직원들이 검색을 하러 올라옵니다. 다만 출항하여 외국 항으론 입항을 하지 않으니까 검색이 그리 까다롭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담배나 술이 면세품이라 항구의 정문(gate)을 통과하는 게 늘 문제가 되었습니다. 어선들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어선들의 전용부두에 계류합니다. 그래서 면세품에 대한 감시는 허술한 편입니다. 면세품의 경우 개인이 사용하던 담배 몇 보루, 양주 1병 정도는 집으로 가져갈 수 있었지만 담배 100루를 들고 정문을 통과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선원들의 또 하나의 놀이는 무엇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박제(剝製)를 만드는 것도 그 중 하나였는데 오만 같은 곳에선 거북이나 가재 등을 박제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알라스카 어장에선 그런 게 금지어종이니 엄두를 못 내고 명태나 대구 혹은 이면수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건 박제라기 보단 말려서 니스를 칠해 놓은 수준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어떤 외국인(대리인)은 여러 어종의 어탁(魚拓)을 뜨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그 일을 해 왔던 것 같았습니다. 미리 준비해온 다양한 색깔의 한지에 우리가 흔한 물고기라고 생각했던 명태와 가자미 등을 어탁 해 놓으니 제법 그럴싸한 작품처럼 보였습니다. 그걸 고향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판매한다고 했는데 수입이 꽤 괜찮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명태의 이석(耳石)을 귀걸이의 장식용으로 판매한다면서 모으고 있었습니다. 유아(幼兒)의 이빨 같은 작은 이석이 저렇게도 사용되는 걸 보니 신기했습니다.
배 만들기가 한창 유행일 때가 있었습니다. 처리실이나 갑판에 깔려고 들여온 나무(두꺼운 판자)를 깎아 만드는 것인데, 나무로 기본적인 배의 모형을 만들고 그곳에 성냥이나 이쑤시개, 종이를 이용해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모형 배를 만드는 작업은 하루나 이틀 만에 되는 게 아닙니다. 판자를 대략적인 배의 본체 모양으로 잘라 대패와 사포로 깎고 문지르는 작업만도 쉬는 시간에 틈틈이 만드는 것이니까 며칠이 걸립니다. 그리고 갑판의 여러 가지 장식물 등과 범포도 만들고 배의 창문도 단추들을 이용하여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만들어 놓은 모형배가 무슨 배인지 모르겠다 싶을 정도의 정체불명의 모호한 모형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군함인 것 같으면서도 상선이거나 범선처럼 생긴 것들이 그랬습니다. 아무런 주제도 없이 그냥 좋다는 것은 다 갖다 붙여서 그렇게 된 게 아닐까 생각해 보았는데, 그런데 어느 누구도 자신이 지금 승선하고 있던 선미식 트롤어선을 만드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만들기가 너무 어려워서일까 아니면 자신이 승선하고 있기에 무감각해져 버렸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부끄럽거나 생각하기 싫어서일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이 만들었던 것은 어쩌면 그들이 육지에서 늘 상상해왔던 배의 완벽한 이상형으로서의 ‘이데아(idea)’ 같은 게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그것은 판타지(幻想)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실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완벽함의 다른 이름, 가령 ‘진선미’ 같은 것 말이죠. 유선형으로 잘 빠진 몸체하며 전체적으로 하얀 순수함 그리고 그들이 장식했던 것들의 화려한 배치가 힘든 선상생활의 결정체인 것처럼 빛나기도 했습니다.
배에선 문구류를 구입할 때 순간접착제도 함께 신청하는데 대부분 모형 배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순간접착제는 항해사로부터 처리장을 통해서 귀하게 유통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처리장에게 잘 보여야 한 통 정도를 얻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귀국할 때쯤이면 모형 배 만드는 작업은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모두들 경쟁적으로 만들기에 참여하여 선원침실로 내려가 보면 무슨 기능시합장에 온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톱밥과 나무 가루 그리고 접착제의 휘발성 냄새와 줄로 무언가를 긁어대고 사포로 문지르는 소리 등등. 예리한 칼날로 조각을 하며 작품에 혼을 불어넣는 선원들은 모두 예술가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작품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물론 다른 작품을 평가절하하기도 하였는데, 서로에 대한 평가가 심해져 하루아침에 자기 작품을 폐기처분하고 다시 새로운 작품을 시작하기도 하였습니다. 폐쇄된 시공간에서 생길 수 있는 왜곡된 집단심리라고 할까요, 혹은 자기 내부로 어떤 편집증이 발동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지만, 육상에 있는 사람들은 선원들이 귀국할 때 바다냄새 나는 물건 하나쯤은 들고 오기를 바랐던 것이고 선원들은 육지에 살고 있는 그리운 사람들의 기쁜 얼굴을 생각하면서 모형 배를 만들었을 겁니다.
또 하나 특이한 놀이는 성기(性器)의 표피에 작은 구슬을 박는 것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유행이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때 그런 바람이 배를 휩쓸 정도로 불었었습니다. 칫솔대를 갈아서 넣는 사람도 있었고, 출항할 때 육지에서 진짜 금으로 작은 구슬을 만들어 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걸 박을 때 마취를 하는 게 좋은가, 하지 않는 게 좋은가에 대한 논쟁으로 시끄러웠고, 고통스러움을 잘 참아내는 걸 용기처럼 여겼습니다. 당시 갑판장은 60살 정도가 되었는데 젊었을 때 박아 넣은 구슬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핑계는 마누라가 못 빼게 한다는 것이었는데 마치 비빌 병기(?)처럼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재밌는 것은 젊은 사람들 중에는 한 번 넣고 난 뒤에 다른 사람의 평가에 따라 몇 번을 뺏다 박았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위치나 크기에 대해 다른 사람의 평가를 반영한 것인데, 그 아픔을 생각하면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피어싱(piercing)의 일종이었습니다. 자신의 살을 뚫을 때 아픔을 참아내면서 스스로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말입니다. 저는 그게 섹스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이라는 ‘실용적(?)’인 측면보다, 그렇게 하고픈 욕망을 참으로 존중해 주고 싶습니다. 물론 섹스를 남성성기 중심으로 본 것이라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 북양어장에선 섹스 할 기회가 없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먼 장래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무기를 벼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게 거짓되고 과장된 정보에 의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주변으로부터 흘러 다니던 갖가지 정보에 쉽게 동요하고 그게 진리라고 믿어 버렸습니다. 그게 오히려 단절된 시공간에서 살아가는 방법이었을까요. 그런 놀이들이 쉽게 잠잠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마치 감기라는 증세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아주 ‘비실체(非實體)’적인 것이죠.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한 사람, 한 사람 그렇게 감염 범위를 넓혀가면서 그 증세로 인해 어느 날 문득 모두가 기침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로 북태평양(트롤선)에선 본래 감기바이러스가 없습니다. 외국인과 운반선에서 보충선원들 중 감기증세가 있는 사람이 넘어 오면 그게 서서히 유행합니다. 그리고 한 바퀴 돌고난 뒤에 마치 저기압이 소멸하는 것처럼 어디론가 사라지지요. 하지만 그건 사라지는 게 아닐 겁니다. 어딘가에서 잠복하고 있는 것이죠. 선원들의 놀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게 유행하는 가 싶다가도 이내 사라지고 다른 게 유행하고 한 번 유행하면 마치 아이들처럼 단순하게 그것에 매달리고 몰입하는 집단심리 같은 것 말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만들었던 모형 배, 그리고 성기의 구슬들이 아직도 건재하며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걸 만들면서 꿈꾸었던 욕망의 극대화가 이루어졌거나 아니면 최소한 한 번이라도 만나 보기나 했는지도 궁금합니다.
17) 그물 사고들
저서(底棲)어종을 대상으로 하는 인도양, 대서양에선 그물사고가 잦습니다. 그물을 해저에 붙여 끌고 다니기 때문인데 그물이 해저에 있던 암초 등에 걸리면 단순하게 그물이 찢어지는 일에서부터, 와이어가 터지거나 심지어 트롤윈치에 연결된 ‘메인 와이어(main wire rope)’가 터져 그물 전체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걸 ‘통걸이’라고 하는데 어선에서 일어날 수 있는 대형사고 중 하나입니다. 통걸이를 당하면 ‘카고 후크’로 대형 갈고리 같은 것을 만들어 잃어버렸던 자리를 하루 종일 끌고 다니면서 찾아야 했습니다. 또 다른 대형 사고는 트롤그물의 코드엔드 부분이 프로펠러(screw propeller)에 감기는 일입니다. 코드엔드는 합사수가 높은 굵은 그물로 두 겹 이상으로 되어있고, 힘줄로 사용된 와이어도 여러 개이며 심지어 그물 밑판이 닳지 말라고 달아둔 일명 ‘코드엔드 털’도 엄청나기에 프로펠러에 감기면 수 백 마력의 엄청난 힘으로 돌아가던 엔진도 멈춰버리게 됩니다. 수심이 따뜻한 해역에서는 주로 항해사들이 잠수하여 그걸 풀어내지만 그 작업은 최소한 반나절 이상 걸리는 대공사라고 해야 할 겁니다. 더구나 그물이 감기면서 프로펠러가 휘어지기라도 한다면 배의 운항이 불가능할 수도 있게 되어 배는 수리조선소로 끌려가야 합니다. 그물이 감긴다는 게 실패에 실 감기듯이 차곡차곡 깔끔하게 감기는 게 아니라, 엄청난 힘으로 회전하던 프로펠러를 멈추게 할 정도니까 와이어는 감기면서 짓이겨지고, 폴리에스터 성분인 그물은 감기면서 발생하는 열에 의해서 녹으면서 압착되기도 합니다. 물속에서의 작업이란 잠수구를 착용하고 들어가서 쇠톱으로 일일이 와이어를 잘라내는 작업을 말하는데 전문 잠수장비가 없으므로 배 위에서 수동으로 공기펌프를 저어서 산소를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때 물속으로 들어가서 그물과 와이어를 잘라내는 작업을 하는 사람은 그 순간 ‘영웅’ 혹은 ‘주인공’이 됩니다. 그리고 위에서 시소처럼 생긴 공기펌프 손잡이를 젖는 사람은 마치 노예처럼 추호의 빈틈도 없이(쉴 틈 없이) 젖어 주어야 합니다. 물속에서 작업했던 사람이 올라와서 산소공급의 미흡함에 대한 약간의 불만을 말하기라도 한다면 ‘노예’들은 선장에게 완전히 작살날 수도 있으니까요.
저층트롤에선 투망을 마치고 예망 할 때 항해사는 선미에 걸려 있는 ‘톱 롤러(top roller)’의 움직임을 눈이 뚫어져라 감시해야만 합니다. 톱 롤러는 트롤윈치의 ‘메인 와이어’가 ‘전개판(otter board)’으로 연결되면서 지나가는 곳인데, 해저 속에 있는 그물이나 전개판이 충격을 받게 되면 흔들리게 되고 그 충격이 톱 롤러에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와이어가 터지지 않고 암초에 걸리게 되면 메인 와이어에 장력이 전달되면서 순간 메인 와이어가 ‘슬라기(slack, 풀어주다 혹은 미끄러지다)’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윈치실에서 근무하는 사람(winch man)은 트롤윈치드럼(winch drum)의 브레이크를 재빨리 풀어주어야 더 큰 그물 사고를 막을 수 있습니다. 당연히 이때 브리지에서는 배의 속력을 낮추어 주어야 하고, 메인 와이어의 풀림 현상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싶으면 주의 깊게 살피면서 메인 와이어를 천천히 감아야 합니다. 이때 배는 그물의 장력으로 인하여 뒤로 밀리면서 그물이 프로펠러에 근접할 수 있는데, 이때 엔진을 조금 사용해서 그물이 늘 배의 후방에서 나오게 해야 그물이 프로펠러를 감아먹는 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그물이 많이 파손되지 않기를 바란다면 엔진을 가능하면 적게 써야 하지만, 프로펠러를 보호하려면 엔진을 어느 정도는 써야하는 딜레마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층 트롤은 그물 사고가 많이 나는 편이라고 했는데 그물의 밑판이 찢어지는 경우가 가장 흔한 그물 사고입니다. 저층트롤그물은 위판보다 밑판에 더 굵은 그물을 씁니다. 보통 그물은 실의 굵기를 ‘합사수’로 표현하는데, 빨래 줄이라고 생각했을 때 합사수는 한 가닥이 몇 개의 ‘단위실’로 되었는지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합사수가 높을수록 굵어진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단순한 낱실(외올)을 꼬아 단사(single yarn)을 만들고, 그 단사를 꼬아 편자사(plied)를 만들고, 이 편자사를 2~3 가닥 합쳐서 하나의 망사(netting twine)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복사(cabled yarn)라고 합니다. 그리고 편자사의 가닥을 수적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고, 망사 속에 편자사를 꼬면서 금속물질 등을 섞을 수도 있고, 꼬는 방향(S, Z)을 다르게 함으로써 망사의 물리적인 성질이 변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천연섬유에 의존하였으나 지금은 대부분 합성수지계 제품을 쓰고 있습니다. 가령 로프망의 경우는 가늘면서도 장력이 강한 게 그 특징이지요. 그러면 같은 마력이라도 큰 그물을 차고 다닐 수 있고, 예망력이 높아지면서 어획성적이 좋아지는 겁니다.
저층 트롤선에서는 예망 중엔 선미의 갤로우스에 매달려 있는 톱 롤러의 움직임을 잘 감시하여야하고 트롤윈치의 클러치도 빼 놓아야합니다. 클러치를 넣어 놓은 상태에서 예망하다가 그물이 해저의 장애물에 걸리게 되면 그물이 크게 파손되거나, 그물과 배를 이어주는 ‘메인 와이어’가 끊어져 버려 그물 전체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클러치는 빼 놓은 채 트롤윈치드럼의 브레이크만 잡아놓습니다. 해저에서 그물이 장애물이 걸리면 즉각 그 장력이 메인 와이어에 전달될 것이고, 그 장력은 트롤 윈치에 전달되어 그동안은 브레이크 라이닝이 트롤윈치드럼을 잡고 있지만 잡고 있는 힘보다 해저에 걸린 장력이 더 강하므로 트롤윈치드럼이 풀려나가면서 그물의 손상을 감소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항해할 때 항해사의 주요 임무중 하나가 선박이 나아가는 방향 즉, 전방을 잘 견시(見視, watch)하는 것입니다. 트롤선은 브리지가 선수에 있고 브리지 뒤편으로 갑판이 있으며, 그곳에서 투, 양망 작업이 모두 이루어지므로 조업 중에는 전방 보다 후방을 잘 살펴야 합니다. 특히 저층 트롤선의 경우 예망중일 때는 늘 선미의 톱 롤러를 포함한 모든 어로기계 및 장비의 상태와 변화 등을 잘 봐야합니다. 가령 트롤윈치드럼이 해저로부터 전해지는 장력에 의해 움직이는지는 철저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트롤윈치드럼이 장력으로 인해 풀려지는 방향으로 돌아가는 걸 ‘슬라기(slack의 일본식 발음)’라고 하는데, 그것은 급양망(비상사태)이 시작되는 신호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피치 제로를 외치며 브레이크 라이닝을 재빨리 풀어주어야 합니다.
메인 와이어의 상태도(떨림이나 출렁거림) 잘 살펴야 합니다. 예망 중엔 선속이 5노트(knot) 정도 밖에 되지 않으므로 선박끼리의 직접 충돌할 위험성은 거의 없습니다. 브리지 당직은 늘 두 명 이상이므로 후임 항해사는 타륜을 잡으면서 전방을 살펴야 합니다. 선임 항해사는 전방 보다는 후방의 모든 상황을 살피게 됩니다. 저층 트롤선의 경우 대개 5분 간격으로 레이더로 배의 위치를 구합니다. 특히 저질이 좋지 못한 ‘초밭 어장’에서는 위치를 구하는 시간의 간격은 더 짧아질 수 있습니다. 당연히 위치의 정확도가 매우 중요해지는데. 위치를 구하는 방법은 물표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저층트롤선에서는 예망코스의 정확성이 어획 성적을 좌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투망해서 예망하고 양망할 때까지를 ‘한 방’이라고 하는데, 좁은 코스에서 고기가 좀 잡힌다 싶으면 많은 어선들이 몰려와서 함께 조업해야 하므로 한 방 끝내고, 그 자리에 역방향으로 배를 돌려 ‘돌려치기’가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땐 일방통행만 허용되는데 양망을 하면 투망한 곳으로 달려가서 다시 투망을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초밭 작업에선 그물이 찢어지는 경우가 허다한데, 심한 경우는 예비그물까지 다 망가져버려 그물이 없어서(준비되지 못해서) 조업을 포기해야하는 경우가 제법 있습니다. 사실 그냥 그물만 찢어지는 경우는 그리 큰 그물 사고가 아닙니다. 모든 선원들이 함께 달려들어 그냥 기워대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물의 주요부위인 발줄(ground, 그물을 해저에 붙여주는 역할을 하는데, 와이어에 폐타이어 자른 것, 고무 혹은 금속성 공을 끼워 넣어서 만드는 것으로 트롤 그물의 밑판그물 입구에 해당함)이나 뜸줄(그물을 상하로 벌려주는 역할을 하는데 와이어에 플로트 등을 부력에 맞게 부착하여 만들고, 트롤 그물의 천장망 입구에 해당함) 등이 터지면 그 그물로는 당장 투망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투망해도 물속에서 그물의 전개가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부분을 교체해야 투망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므로 저층트롤선의 경우 ‘초밭’에서의 조업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매우 긴장된 시간의 연속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어구의 일부가 해저의 암초에 걸려 예망이 더 이상 어려운 경우도 있고, 해저에서 전개판이 암초에 부딪혀 메인 와이어가 출렁거리고, 그 출렁거리는 메인 와이어가 갑판에서 작업하고 있던 선원의 머리나 등짝을 때려 부상을 당하기도 합니다. 저질이 좋은 곳에서 예망 중일 때는 선원들이 갑판에 나와서 그물을 수리하는 경우가 별로 없지만, 그물이 작살났을 경우는 예망 중에도 예비그물을 수리하여야 하므로 어쩔 수 없이 위험스럽지만 갑판에서 선원들이 분주히 움직여야 합니다. 보통 때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예망중인 트롤어선의 갑판에서 작업할 때는 반드시 안전모를 착용하여야 합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조금 출렁거리며 슬쩍 스치는 것 같지만 맨머리에 맞으면 머리가 깨어지는 수도 있습니다. 지름 32mm의 메인 와이어는 속이 꽉 찬 금속봉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물의 파손 정도는 양망 중 선미에서 갑판장이 그물의 올라오는 상태를 보면 잘 알 수가 있는데 전체 그물이 쫙 펼쳐져 올라오므로 그물의 어디가 파손되었는지 잘 보입니다. 그때 갑판장은 그물의 어디가 다쳤는지를 수신호로 브리지에 알려 줍니다.
그리고 초밭에선 천장망 입구의 와이어가 터져 플로트가 떨어져 나가는 사고도 자주 발생했습니다. 플로트는 고가이기도 하지만 수면 위로 떠오는 것이기에 배를 몰고 가서라도 가급적이면 건지려고 합니다. 하지만 야간에 그런 사고가 나면 그걸 찾아내서 건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플로트(float)를 찾으며>
어제 밤, 초(暗礁) 밭에서 그물을 왕창 해 먹고
플로트를 찾고 있다.
씨팔, 내 생(生)이 언제
저렇게 박살나 본 적이 있었던가.
애꿎은 갑판원들만 고생 한다.
톱 브리지에서 햇또(1갑원)가
단단하게 발기한
서치라이트 빛기둥으로
어둠을 조각내며 뒤집어 놓는다.
3항사에게 악을 쓴다.
헤딩(heading) 120도, 피치(pitch) 12도
풀 어헤드(full ahead)!
좆 나게 달려라!
시방세계는 갑오징어 먹물이다.
생선들은 이 시각에도 보금자리를 재건하고 있겠지.
양현(兩舷)으로 늘어선 선원들의 담뱃불이
시뻘겋게 애를 태운다.
<초(暗礁)밭 작업-최희철>
머리통을 레이더(radar)에 틀어박아
배의 위치를 잡는다.
‘렛-고’ 소리 다급하게
갑판에 울려 퍼지고
카고 후크에 매달린 트롤(trawl) 어구는
방금 발굴된 암갈색 공룡의 뼈.
늑골에 붙어 있는 샤클(shackle)들은
닳고 닳아, 번득이는 이빨이 되어
해저의 숨통을 끊어 버릴 기세다.
그는 지층 같은 수압을 견뎌내야 하는
숙련된 잠수 기술자,
해저에 닿자마자 32미리 메인 와이어는
신경다발처럼 떨려오고
어군 탐지기는 습식 기록지에
탁, 탁, 탁, 탁
신음소리를 긁어댄다.
복제의 신호를 토해내는 동안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트롤 윈치는 바다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있다.
그런데 저층트롤의 초밭 조업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바다생태계의 모습입니다. 가령 우리가 초밭이라고 부르는 곳은 사실 바다생물들의 거주구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초밭 조업으로 인하여 그곳은 여지없이 파괴되고 맙니다. 가령 오만어장의 경우 1항차 정도를 조업하면 바다에서 그물에 의해 올라온 돌들이 1톤이 넘었는데 그걸 모두 조업 장소가 아닌 다른 곳에 버리게 됩니다. 결국 바다 속의 서식환경은 트롤어선에 의해서 심각하게 변화를 겪는 셈이고 그곳에 살던 생명체들은 살 수 없게 되거나 다른 곳을 서식처를 옮겨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저층트롤어구들은 말이 어구이지 바다 속의 생명체의 입장에선 거의 흉기에 가까웠습니다. 그물이 당기는 힘이 수 천 마력에 이르고 그 그물의 크기나 무게도 엄청납니다. 더구나 입어계약에서 조업을 허락한 것보다 훨씬 더 낮은 수심과 가까운 연안에서 불법조업을 함으로서 생태계는 여지없이 파괴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초밭작업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그물사고는 인간의 욕망과 바다생태계가 충돌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그것은 바다생태계가 자신의 삶 속으로 불쑥 들어온 검은 손을 물어뜯는 저항 즉 자신의 터전을 지켜내려는 안간힘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저층 트롤에서 특이한 그물 사고는 ‘해파리’에 의한 것입니다. 해파리 떼가 그물에 들어 코드엔드가 가득 차게 되면 해파리 형태의 특성상 서로가 밀착되면서, 이름 그대로 젤(gell) 상태의 그들이 서로 짓이겨지고 엉켜지면서 입추의 여지도 없이 빼곡하게 들어차 버립니다. 더구나 해파리는 수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으므로 그물이 아주 무거워져 버립니다. 나중엔 물이 빠지지 못해서 그물은 팽팽하니 터질 듯 부풀어 오르게 되고, 결국 코드엔드보다 약한 몸통 그물이 먼저 터져 버립니다. 물이 빠지지 않은 상태에서 코드엔드의 입구까지 해파리가 꽉 차버리면 코드엔드가 너무 무거워져서 코드엔드를 갑판위로 올리기도 어려워집니다. 몸통 그물은 몸통 그물대로 터지면서 걸레처럼 찢어져 마치 폭격을 당한 것처럼 그물의 살(망지)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그물의 뼈대만 앙상하게 올라오는 것입니다. 빵빵해진 코드엔드는 나중에 칼로 뒤쪽 아랫부분을 일부러 찢어서 설사(?)를 시켜야만 합니다. 해파리를 바다로 어느 정도 방출시켜준 다음 코드엔드를 갑판으로 올릴 수가 있는데 그땐 이미 그물 한 틀(트롤 그물 한 세트)이 완전히 작살 나버렸으므로 ‘예비그물’로 바꾸어야 할 지경이 됩니다. 해파리는 무리를 지어 해저에서부터 표층까지 떠다니므로 갑판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보이기도 합니다. 드물긴 하지만 해파리가 물속에 떠다니다가 배의 냉각수 구멍으로 흘러 들어가 온몸으로(?) 냉각수의 방출을 막아 버리는 심각한 사고를 내기도 합니다.
저층트롤어선과는 달리, 중층트롤어선에서는 선미의 톱 롤러를 감시해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수심 3,000~4,000 미터가 되는 바다에서 수심 200~300 미터 정도에 군집을 이루고 있는 어군을 포획하는 것이기에 그물이 바다 속의 어떤 장애물에 걸려 파손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다만 북양 어장의 황금기엔 명태가 너무 많이 들어서 해파리의 영향처럼 그물이 파손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때도 네트레코더(망고계)가 있었으므로 산더미 같은 명태 어군을 만나,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면 일찍 양망해 버리는 것으로 위험을 피했다고 합니다.
1989년 겨울, 명란 철이었습니다. 미국의 경제수역 내로 들어가 합작 사업하기 전에 각국의 어선들은 베링 해의 공해에서 자체조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1988년에는 주간의 어획이 그렇게 부진하지 않아서 야간에는 주로 어탐만을 하고 조업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그해에는 이상하게도 각국의 배들이 모두 야간 조업을 했었습니다. 당시 주간 조업의 성과가 좋지 않아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눈보라가 너무 심해서 브리지 앞의 선수루(forecastle)에 있는 깃발을 게양하는 깃대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란 철이라 어군이 조금만 형성되었다 싶으면 각국의 배들이(소련, 일본, 한국, 대만, 중국 폴란드) 약 200여척 몰려들어 머리가 터질 정도로 야간조업(야간전투)에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전쟁터 같았고 그러다 보니 그물사고도 많이 났었습니다.
(주) 신라교역의 쌍둥이 배 1500톤급 한진, 한길호는 모두 ‘남양어망(주)’에서 새로운 ‘로프망’을 구입하여 자체조업을 하고 있었는데, 남양어망(주) 소속의 과장이 직접 현장에 파견되어 자기 회사 그물의 어획성능을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동급의 다른 어선들이 야간조업으로 1,200팬 정도의 명태를 잡는다면, 이 새로운 로프망으론 2,500~3,000팬 정도의 명태를 어획할 수가 있었습니다. 기존의 로프망보다 날개그물의 실이 훨씬 가늘지만 장력은 강한 한결 업그레이드된 그물이었습니다. 새로운 로프망은 로프 부분의 그물코도 커지고 로프를 이루고 있는 망지(網地)의 굵기도 가늘어 졌으며, 몸통 그물 부분조차도 더욱더 개선된 망지를 사용하고 있어, 예망 할 때 물속에서의 그물 전개력이 획기적으로 좋아지고, 물이 잘 빠져나갔으므로 예망 속도를 빠르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들이 쓰고 있는 그물의 성능이 좋다고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다른 어선들도 너도 나도 회사에 연락해서 새로운 로프망을 보내달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야간에 양망을 하면 다른 배의 항해사들로부터 부러운 칭찬을 듣곤 했었습니다. 선장이나 항해사의 실력이 아니라 성능 좋은 어구 때문이었는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磨)라고나 할까요, 한진호는 명란 철 막바지 무렵 3번의 그물 사고를 연속적으로 당하게 됩니다.
어획 실적이 저조하면 작은 어군을 발견해도 서로 잡겠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래서 눈보라 속, 좁은 해역에서 기록을 따라 다니며 조업하다 보면 1,500~5,000 톤급의 거대한 어선들이 너무 가깝게 접근해 버려 거의 울부짖듯 150메가 무전기를 잡고 소리를 지르게 되는데, 그때서야 서로가 급히 조타륜(steering wheel)을 조작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지금도 브리지 선회창(旋回窓, screw view screen)을 통해 바라보던 눈보라가 몰아치는 선수루가 생각이 납니다. 눈보라가 검은 하늘에서 날아드는 날벌레처럼 브리지 유리창에 부딪히며 녹아버렸습니다. 선회창이 있는 브리지 현창의 구석진 곳에는 언제 생긴 것인지 알 수 없는 소금 분말 같은 게 먼지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것은 ‘갇힌 것’을 상징했습니다. 그리고 타들어가는 것 같은 바다 냄새, 잉잉 거리며 탁탁 튀는 선회창 회전소리와 뒤섞여 뒷머리가 띵한 미약한 배 멀미 전해오던 비릿한 울렁거림이 있었습니다. 바람과 파도 소리와 담배연기와 150메가 무전기의 16번 채널(공용채널)에서 들려오던 이방인의 단발마적인 목소리들, 보이지 않은 전방을 견시하기 위해 얼굴을 바짝 갖다 대면 찬 기운을 온 몸에 전이(轉移)시키던 차가운 유리창과 그것과 맞닿아 있는 온통 차갑고도 알 수 없는 세계, 저는 가끔 그 차가움에 코 을 부비며 선수갑판 위에서 끼~욱 거리며 날고 있는 갈매기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들 중 몇 마리는 거센 바람을 이용하여 배의 좁은 철제 난간에 착륙을 시도 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자신이 무척이나 가벼운 존재라는 것을 저에게 과시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그들은 때론 양현의 난간에 앉아 우두커니 검은 바다를 오랫동안 쳐다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그렇게도 꿈꾸던 자유와 탈주를 상징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아, 당시 한진호의 별명이 ‘갈매기’였습니다! 한국 어선들은 등록된 선명 말고도 모두 별명이 있었지요. 그럴싸한 것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말인데다가 늘 들어왔던 것이라 무심한 측면이 있었지만 처음 접하는 외국인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던 별명이 많았습니다. 가령 호박, 연산홍, 장미, 연꽃, 백합, 청포도 같은 연약한 식물성의 별명들 말입니다.
한진호의 신병기(?) 로프망은 폴란드 어선들에 의해 절단되고 말았습니다. 사고 시간은 13시경, 당직 교대를 위해 브리지로 올라가 보니 선장은 마치 만루 홈런을 맞은 투수처럼 낙담한 채로 목소리의 풀이 죽어있었습니다. 북양 어장에서의 항해사 당직은 수석 1항사가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 그리고 선장은 수석 1항사 다음 직급의 항해사와 함께 새벽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책임당직을 서고, 보조 당직자로서 하급 항해사들이 적당한 시간을 나눕니다. 폴란드 어선들의 ‘방질’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해하기 어려운 ‘전체주의식’ 어로행위라고 해야 할 겁니다. 집단 체조를 하듯 여러 척의 배가 도열해서 마치 밭을 갉아 엎는 것처럼 예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록이나 다른 배의 예망코스들을 무시하고 완전히 비생산적인 예망하고 있었던 것인데,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항해사들도 많아 교신도 잘 안 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선장은 매우 우울하고 허탈한 목소리로 그물이 부서졌음을 저에게 알리고 브리지를 내려갔습니다. 그 운명적인 첫 번째 그물 사고의 경위를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제 당직이 아니었을 뿐더러 하급자 당직시간에 일어난 사고는 상급자에게 아주 자세하게 보고되어야 하고 또 지적을 받을 만한 게 있다면 지적을 받아야 하지만, 상급자 당직시간에 일어난 사고의 경위를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꼬치꼬치 물어 볼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선장과 같이 당직을 섰던 2, 3항사에게 물어보니 우리가 폴란드 어선에게 완전히 당한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실 한국 어선끼리는 남의 그물이 부서질 상황이 되면 서로 교신을 통하여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하거나, 심지어 그 자리에서 양망을 하는 일이 있더라도 남의 그물을 완전히 절단 내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외국어선, 특히 폴란드 어선들의 일방적인 예망방식은 악명이 높았습니다. 서로의 그물끼리 부딪히거나 엉키면 모두가 피해를 입게 되지만 그물과 전개판이 부딪히면 그물 쪽이 피해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 날 저녁, 한진호는 다른 그물을 준비했습니다. 보통 트롤선은 3세트 정도의 그물을 싣고 다닙니다. 그날 밤도 좁은 해역에서 집중적으로 어군의 기록이 출몰해서 완전히 전쟁터를 방불케 했습니다. 저는 ‘야간전투 사령관’으로서 어느 때보다 강한 전의를 불태우며 전선으로 출격하였습니다. 한진호는 이리저리 튕기면서 그래도 기록을 놓치지 않고 나름대로 양호한 예망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능 좋았던 그물’이 폴란드 놈들에게 걸려 잘려 먹었다는 소식이 다른 1항사들에게도 전해졌는지 모두들 보이스 통신으로 위로의 말을 전해왔습니다. 야간의 조업은 밤새도록 예망을 하다가 대개 새벽에 해 뜨기 전에 양망을 합니다. 그리고 야간조업의 성과를 확인하고 다시 해가 뜨기 전에 좋은 자리를 찾아 다시 투망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두 번째 그물 사고는 일본어선과 깊은 관계가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짙은 새벽, 이제 길게 한 번 예망을 하여 복잡한 어선무리들을 빠져 나와서 양망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법 멀리서 일본 어선이 한 척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복잡하다 싶은 곳은 어느 정도 벗어났기에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군기록이 그래도 조금씩 나오고 있어서 예망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 뒤를 따라오는 일본어선(349톤급)은 힘이 매우 좋은 배입니다. 제가 예전에 오만어장에서 탔던 트롤선과 같은 349톤급인데 마력만 더 업그레이드 된 것입니다. 배의 크기, 즉 톤수에 비하면 엄청나다고 할 수 있는 3,000마력의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예망 속도가 아주 빨랐습니다. 우린 그런 일본어선을 일명 ‘독고다이(일본말로 특공대 혹은 돌격대라는 의미)’라고 불렀습니다. 본래 그들은 북해도의 연근해에서 조업하는 배들인데 명란 철에만 공해어장으로 올라와서 조업을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방질’이 거친 어선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때는 다들 피항할 만한 기상조건인데도 혼자서 조업하기도 했고, 폴란드 배처럼 보이스 통신으로 불러도 응답도 잘 하지 않았습니다. 대형일본선 항해사들 말로는 자신들처럼 전문수산학교 출신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배를 탄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한진호는 270도 코스로 예망하고 있었는데 그의 헤딩(선수방향)이 260도 정도가 되었을까, 한진호 좌현(port)의 선미부분에서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자꾸 가까워지기에 먼저 150메가 채널 16번으로 그를 불렀습니다. 일본어선의 선명을 잘 알 수 없었습니다. 선명도 잘 알 수가 없으므로 우리의 위도와 경도를 말한 후, 코스를 말하고 잘 못하는 일본말로 그를 불렀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영어를 모르거나 영어로 부르면 통신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입니다. 한참 후 그가 교신에 응했습니다.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 당신 배와 우리 배가 걸릴 것 같다고 말한 후 당신이 우리보다 예망 속도가 훨씬 빠르고 기록도 별로 없으니 서로가 조금 양보해서 코스를 좀 맞춰가자고 했더니 그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쌍안경으로 보니 그가 코스를 조금 오른 쪽으로 방향으로 변경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약간 좌현 쪽으로 변침하였습니다. 약간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괜찮겠지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교신을 해서 위험함을 상대에게 알렸고, 그도 긍정적인 답변을 했으므로 예망 속도가 빠른 그가 어떻게 해 주겠지 하는 생각을 해 버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와 일본어선이 서로 조금씩 변침해서 코스는 비슷해졌지만 거리가 조금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교신을 하였으나 그는 괜찮다는 말만 했습니다. 이윽고 일본어선이 옆에 나란히 붙으면서 우리의 ‘네트레코더(net recorder)’가 먹통이 되어 버렸습니다. 간혹 트롤어선들이 근접하면 네트레코더가 먹통이 되거나 ‘오류’가 생길 수 있었습니다. 네트레코더란 그물의 천장망 입구에 부착하는 것으로 천장망 아래의 정보(전파 탐지 기록)를 어선의 선저(船底)에 있는 수신부로 보내 주는 계기입니다. 그런데 다른 어선이 근접하면 전파의 간섭이 일어날 수도 있고 상대의 네트레코더 정보를 우리 선저에서 수신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상대 그물의 망고 상태와 어군기록의 입망 상태를 우리의 배에서 보여 지기도 했습니다. 일종의 전파교란에 의한 오류이지요.
아무튼 네트레코더가 먹통이 되어 버렸습니다. 누구의 그물 상태도 나오지 않은 채 네트레코더 기록지가 새까맣게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일본어선이 빨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3항사가 조타대 옆에서 ‘일본 노무 새끼’ 어쩌고 하면서 욕을 해댔습니다. 이럴 때 욕은 거의 관용구에 가깝습니다. 자동차를 몰던 사람들이 가끔 자기 앞으로 누군가가 끼어들면 혼자 소리로 욕을 하는 경우와 비슷한 것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습관적으로 항해사들은 다른 배가 접근하면 쌍안경으로 바라봅니다. 천문학자가 우주의 별을 관찰하듯 이방인의 세계를 보는 것이죠. 같은 어선이지만 호기심이 발동하여 여러 곳을 살핍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당장은 그 공간으로 건너 갈 수 없다는 묘한 괴리감이 낳은 것일 겁니다. 그러다 얼굴이라도 마주치면 손을 흔듭니다. 이윽고 일본 어선이 우리를 지나갔습니다. 네트레코더의 기록이 정상적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저는 너무 초조해서 담배를 연속으로 깊이 빨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일본어선이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기록지에 망고(網高)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진호의 정상적인 예망 때의 망고는 50 미터였는데, 망고부분이 습식기록지에 황갈색으로 찍혀야하는데 그 부분이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순간 뭔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아직도 저 일본 놈의 간섭을 받고 있는 것인가, 조금 더 기다려 보자는 생각으로 계속해서 담배를 피우면서 약 10분 정도를 더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끝내 망고계의 기록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일단은 그물사고라기보다는 천장망에 부착된 네트존데의 이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일본 어선의 그물이나 전개판이 만든 물 흐름의 영향으로 우리의 네트존데가 뒤집어졌나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만약 그물사고라면 톱 롤러에 어떤 이상 징후가 있을 것인데 말입니다. 어차피 네트레코더가 정상으로 나오지 않으니까 더 이상 조업도 불가능 하였고, 양망 시간도 가까워 졌으므로 양망을 시작했습니다. 평소보다는 조금 이른 시각이었습니다. 양망 스탠바이 부저가 울리고 갑판부원들이 하나 둘씩 갑판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윈치맨이 윈치를 힘차게 감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물이 파손되었으리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고, 단지 네트레코더가 정상이 아닌 것 같으니까 마이크로 갑판을 걸어가는 갑판장에게 그물 올라올 때 네트존데를 잘 살펴보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전개판이 올라오고 후릿줄(펜단트 와이어)들이 감기고 날개 그물이 갑판으로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날개 그물이 끝나는 곳에 천장망이 있고 그 천장망의 중앙 힘줄에 네트존데가 붙어 있으므로 갑판장의 몸짓을 하나하나를 긴장된 마음으로 살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네트존데 이상이 아니라 그물 파손되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날개부분이 많이 찢어진 것은 아니지만 ‘로프’부분이라 당장은 수리가 불가하니 그물을 바꾸어야겠다는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이 일본 놈 개새끼’ 제 입에서 욕이 터져 나왔습니다. 좋게 생각했던 모든 게 잘못된 결말로 이어져 버렸습니다. 두 번째 그물 사고 이후 저는 겁쟁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해서 그 이후론 어선들이 복잡하게 모여 있는 곳으로도 가기가 싫어졌습니다. 아니 싫어졌다기보다는 두려웠습니다. 예전에 오만어장에서 이것보다도 더 심하고 많은 그물사고도 경험했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춥고 거대한 공간이 압박하는 두려움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만어장과는 달리 이곳은 넓고, 춥고, 거대한 기계들이 유령처럼 등장하는 무대이니까요. 사실 이 사고는 나중엔 제가 북양어장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단초가 됩니다. 한진호는 연 이틀 그물 사고가 난 것입니다.
북양어장의 트롤선들이 소나(sonar)를 장착하게 됨으로써 예망코스는 많이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어군 탐지기(fish finder)가 배의 밑바닥 즉 수직 방향을 탐지하는 것이었다면, 소나는 배의 수직방향과 함께 수평 방향을 탐지하는 것으로 어군의 탐지능력이 대폭 확대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망 중이라도 어느 방향에 기록이 있는지를 알게 되고 그 쪽으로 배의 방향을 돌리고 싶은 욕망이 생기게 합니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북양에서 조업하는 한국어선들 모두가 소나를 장착한 것은 아니어서, 조업 중 사소한 분쟁(?)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소나가 없는 어선은 대개 직선에 가까운 예망코스를 추구합니다. 하지만 소나가 있는 어선은 직선으로 예망하다가도 좌우로 소나가 튀기 시작하면(기록이 소나의 화면에서 붉게 나타나면서 개구리 울음소리를 냅니다.) 급격하게 코스를 바꾸고 싶어 합니다. 가령 두 배가 나란히 평행선으로 예망을 하다가도 왼 쪽에 있는 소나를 장착한 배가 오른 쪽에서 기록이 튄다고 한다면 오른 쪽으로 배를 틀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른 쪽에 소나를 장착하지 않은 배가 있다면 그 배가 오른 쪽으로 틀어 주어야 함께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나를 장착하지 않은 배는 급격한 코스의 변경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급격하게 코스를 변경하게 되면 물속에 있는 그물 전개가 불안정해져서 기록의 입망을 별로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소나를 장착하지 않은 배는 다른 배에 의해서 예망코스를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불쾌하게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나를 장착한 배는 소나에서 기록이 없었는데도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따져 보면 ‘방질’의 문제라기보다는 당시 어로행위를 하고 있던 사람들의 심리적인 문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주 절친한 사람의 어선끼리 나란히 붙어서 예망을 하면 쉽게 코스의 변경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오히려 상대방이 갖고 있는 소나의 기록을 믿고 같이 움직여서 조업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혹시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끼리라면 소나를 가진 어선이 소나의 기록을 무기로 거짓말하는데 이용할 수도 있고, 그런 거짓을 미리 예단하고 있는 소나를 가지지 않은 어선에서는 코스의 변경을 거부하거나, 왼 쪽에 기록이 있는데도 소나를 가지고 있는 어선이 악의적인 거짓말로 오히려 오른쪽에서 기록이 튄다고 하여 상대방을 오른 쪽으로 튕겨버려 ‘백판’을 만나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 대부분의 한국 어선들이 소나를 장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나를 장착하게 되면서 방질의 혁명적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오랫동안 직선으로 길게 그물을 끌고 다니던 방질이 줄어들고, 기록이 있는 곳만 집중적으로 예망하려는 시도가 많아 진 것입니다. 이것은 투망과 양망을 자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기록의 밀도와 전체적인 분포도가 부분적으로 변했다는 것과, 기록의 분포 형태를 수평적으로 알 수 있는 소나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대서양이나 인도양 저층 트롤선은 하루에 20방 정도를 하는데 그만큼 양망과 투망을 많이 합니다. 그들의 양, 투망에 걸리는 시간, 양망을 시작해서 그물을 갑판으로 올려 고기를 피시본드에 붓고 다시 투망하여 투망 완료하는 시간까지는 약 15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아주 빠른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서양, 인도양에서는 대개의 경우 1시간정도가 적당한 예망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1 시간 이상 그물을 끌고 다닐 코스도 별로 없지만 1시간 이상씩 그물을 끌고 다니면, 코드엔드에 잡힌 고기들이 짓눌러지기도 쉽고 대서양, 인도양은 수온이 높아 어획물이 상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오만어장에서 도미를 잡을 때 더 많이 잡아 보겠다고 1시간 40분가량 예망한 뒤 양망을 하였더니 코드엔드에 담겨진 고기의 비늘이 벗겨지고 살이 터져 있는 걸 경험했습니다.
코스가 짧아졌다는 말은 소나의 영향으로 기록이 있는 구간만 집중적으로 예망을 한다는 말인데 그렇게 하려면 일명 ‘돌려치기’라는 것을 해야 합니다. 돌려치기의 몇 가지 방법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전개판까지 완전히 올린 후 배를 완전히 돌려 버리는 방법.
2. 타륜을 15도 정도 써서 천천히 변침하는 방법(전체 어구가 물속에 있는 상태로 배를 돌리는 경우인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회전범위가 아주 넓어집니다.)
3. 전개판을 완전히 올리지 않고, 메인 와이어를 50~100 미터 정도 남겨둔 채 (이때 전개판과 그물은 물속에 있습니다) 돌리는 방법.(이때 전개판이 꼬일 염려가 있습니다.)
하지만 1~3번 모두 배를 완전히 돌리고 올렸던 전개판을 내리고 그물이 정상적으로 전개되는 시간까지를 생각한다면 비슷한 시간이 걸립니다. 이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당직자의 취향이거나 아니면 당시의 주변 상황입니다. 그물을 차고 돌리기가 어려우면(좁아서) 전개판 완전히 감아 선미(船尾)에 차고 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단 전개판을 내릴 때는 다른 어선들의 선미를 조심하여야 합니다. 다른 어선의 선미부근에서 무조건 급하게 전개판을 내리게 되면 전개판이 내려가면서 상대방의 그물을 다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십자모양으로 두 어선이 예망 중에 걸리어 급박한 상황이 되면 한 쪽에서 그물을 감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물을 감게 되면 선속은 거의 제로(0)에 가까워지므로 그물이 그 자리에 멈추게 되고 그 때 다른 선박이 위험범위를 빠져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아무데서나 그물을 던져 손쉽게 고기를 쉽게 잡을 수 있다면 그런 문제들이 아예 생기도 않겠지만, 좁은 해역에서 어로작업을 하다보면 ‘신경전’을 많이 벌이게 되는데, 기록은 한정된 양이 한정된 장소에 있는 것이기에 늘 경쟁의 대상이 됩니다.
북양어장에서 조업하던 한국 트롤어선들의 브리지 당직시간에 대해 잠시 살펴보면, 부산에서 북양어장까지 대략 10~12일정도 항해를 하게 되는데 이때는 항해당직을 서게 됩니다. 항해당직이란 항해사 중에서 상급자 순으로 3명을 책임 당직자로 해서 4시간 당직을 서고 8시간 쉬는 것을 말합니다. 당직 시간은 1항사는 04~08시 그리고 16~20시, 2항사는 00~04시 그리고 12~16시, 3항사는 08~12시 그리고 20~24시이고 선장은 정해진 당직 시간이 없습니다. 다만 협수로 통과, 무중(안개) 항해, 주위에 선박이 많거나 장애물이 있을 때, 기상이 아주 좋지 않을 때 그리고 항해사가 도움을 요청할 때는 언제든지 브리지로 올라옵니다. 어장에 도착해서 조업을 시작하면 당직 시간은 달라집니다. 어선마다 사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개의 경우 선장과 수석 1항사(최고 상급 항해사)가 12시간씩 나누어 책임 당직을 섭니다. 선장은 06~18시, 1항사는 18~06시인데 보조 당직자로는 수석 1항사보다 한 단계 하급자가 선장과 조를 이루게 되는 게 보통입니다. 대부분 어선에서는 선장의 명령에 따라 당직시간이 정해집니다. 보통 수석 1항사는 18시에 교대를 합니다. 하급자는 상급자와의 교대시간을 정시에 맞추어야 하지만 선장은 대체로 아침에 좀 늦게 올라오는 편입니다. 빨리 올라오는 선장이 06시 30분 정도인데 그것은 양호한 편이고 보통 07시에 올라옵니다. 심한 경우는 09시경에 올라오는 선장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수석 1항사는 당직을 14시간 정도 서는 셈입니다. 그런데 14시간 동안 정신을 집중해서 당직을 선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선장이 브리지에서 내려갔을 때 그리고 21시 이후 어군탐지가 한창일 때 수석 1항사도 쉬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야간 조업을 할 때 쉴 수 없습니다. 늘 네트 레코더와 어군탐지기 그리고 소나 앞에서 기록을 쳐다보고 그물의 높낮이를 조절하거나, 소나가 기록을 찾아내면 예망 방향을 바꾸어 주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어장에서 어군탐지를 위해 항해할 때, 저기압으로 피항 할 때는 수석 1항사는 브리지에서 혹은 침실로 내려가서 쉬기도 합니다. 쉬는 형태도 다양한데 브리지에서 혹은 자기 침실에서 잠깐 잠자기, 캔 맥주 마시기, 선원식당으로 가서 잠깐 놀다오기 등등입니다.
야간 당직을 설 때 선임 항해사가 휴식을 취하는 것은 잠시일 뿐입니다. 그리고 아주 불규칙한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당직시간에 브리지를 떠나거나 휴식을 취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지만 제 자신은 물론이고 인도양, 북양어장에서 야간 당직을 서는 항해사들을 많이 보아왔지만 틈틈이 쉬지 않는 항해사를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잘못된 제도로부터 나온 게 아닐까요. 대체로 항해사들의 당직시간은 너무 깁니다. 보통 12시간은 기본이고 3~5시간의 시간외 근무를 하는 것 역시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고도 당직시간의 완벽한 근무 자세를 요구한다면 그게 오히려 현실성이 없는 것 아닐까요. 오만어장에서의 일입니다. 무스카트 항에서 2박 3일 동안 한 숨도 자지 못했는데 하역을 마치고 바로 출항하였습니다. 2항사 때였는데 하필이면 제 당직시간이 걸렸습니다. 외항에서 도선사가 돌아가고 선장이 브리지를 내려가면서 말했습니다. ‘2항사, 좀 피곤하더라도 항해할 때 절대로 자지마라!’고요. 하지만 저와 3항사는 너무 피곤하여 교대로 1시간씩 의자에 앉아 잠을 자기로 하였습니다. 항해를 해야 하는 항해사가 잠을 못자서 당직을 못 설 정도라고 걱정되었다면, 출항을 늦추던지 외항에 앵커를 놓고 몇 시간이라도 쉬던지 그것도 아니라면 선장은 잠을 충분히 잤으니까 한 두 시간 정도 자기가 항해 당직을 서 주던지 해야 하는 것이 옳았을 겁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충분히 개선 할 수 있는 불합리한 업무구조를 억지로 밀고 나가면서 당직업무는 빈틈없이 서 주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죠. 우리에겐 하급자일 땐 열심히 하다가 상급자가 되면 갑자기 긴장이 너무 풀어져 버리는 문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올라갈수록 못된 관행만 남지요. 그리고는 더 이상 변화를 바라지 않는 보수주의자가 됩니다. 그것도 하급자에게 권력을 남용하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하급자는 상급자의 잘못된 그 모습을 보고 배웁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원론(二元論)’의 세계인 것 같습니다. 마치 좋은 것과 나쁜 것, 편한 것과 힘든 것을 확연히 구분해서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하급자는 억울함을 느끼면서도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그것을 묵묵히 받아들입니다. 이 과정만 통과하면 자신도 상급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리고 자신이 상급자가 되었을 때 자신이 싫어했던 것을 자신의 하급자에게 시키지요. 잘못된 관행의 악순환인 것 같습니다.
두 번째 그물사고가 난 날로부터 보름 후 세 번째 그물 사고가 나게 됩니다. 당시 한진호 선장은 초임 선장이라 그래도 아침 교대시간에 브리지로 제시간에 올라오는 편이었습니다. 한진호 선장은 권위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함께 항해사 생활을 같이 한터라 그 벽이 좀 낮게 느껴졌습니다. 그는 늦어도 08시 경에는 올라오고 보통 07시면 브리지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3번째 그물 사고가 나던 날은 웬일인지 06시경에 올라왔습니다. 그날 밤, 같은 회사 소속의 쌍둥이 배 한길호와 함께 조업을 하면서, 기록을 따라다니느라 서로 근접하는 경우가 생기곤 하였습니다. 선장은 몇 일전 그물 사고로 인하여 신경이 많이 날카로워져 있었나 봅니다. 아니면 아침 일찍 잠이 깰 무렵 근접해 있던 다른 배의 엔진소리가 시끄러워 일어났는데, 현창을 통해 보니 너무 가까이 있는 것 같아 이런 저런 걱정스런 마음으로 브리지에 올라왔을 겁니다. 저는 한길호 1항사와 배가 너무 가까운 것 때문에 보이스로 교신을 하고 있었습니다. 각도로 볼 때 한길호가 우리 측 선미로 그물을 타고 넘는 형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1년 후배인 한길호 수석 1항사에게 제가 말했습니다.
"야 느그 좀 감아라. 그물 걸리겠다."
"형님 엔진 좀 더 써 보이소."
저는 피치 각도를 1.0도 더 올렸습니다. 한진호의 선체가 부르르 떨면서 쿵쾅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과도하게 엔진을 쓰면 배기온도가 올라가고 실린더 헤드 따위에 무리가 갈 수가 있어서 가끔 기관실에서 전화가 오기도 합니다.
"일단 감으라니까."
"감고 있습니다."
선장이 제 옆에서 네트레코더를 보면서 한길호를 향해 한마디 했습니다.
"저 새끼 미친 놈 아이가?"
"새끼, 돌려치기 빨리 할라고 하다가 ..."
선장이 저에게 지시했습니다.
"오타보드까지 감아서 좀 달려서 쭉 빠지라고 해라."
1항사 당직시간이었으므로 관례상 선장이 보이스(통신)에 나가기가 뭐 했던 것이었습니다.
"야. 오타보드 올라왔나?"
"형님 와프 50 미터까지 감았습니다."
"오타보드 완전히 올리야 될 낀데."
선장은 더 흥분한 것 같았습니다.
"저 새끼 미친 새끼 아이가?"
몇 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한길호가 본선의 선미를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선장의 입에선 드디어 욕이 터져 나왔습니다.
"저 새끼 방질 참 좆같이 하고 있네."
저는 다시 보이스로 부탁했습니다.
"조금만 더 빠지도..."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었을까, 한길호가 말했습니다.
"형님 우리 슬라기하고 있습니다."
그 지점에서 자신의 전개판을 물속으로 내리고 있다는 말인데, 선장과 저는 저러다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습니다. 선장과 저는 아직은 두 배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었던 겁니다. 3항사가 한길호와 거리를 레이더로 측정해서 계속 불러주고 있었습니다.
"저 새끼 저기서 내리면 안 되는데"
저는 보이스 수화기를 잡고 소리쳤습니다.
"어이 야, 이 사람아 잡아라!!!!!! 와프 얼마 나갔어!!!!!!!"
한길호는 점점 선미에서 우현으로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급해서 왼쪽으로 배를 더 틀었습니다. 가능하면 한길호로부터 더 빨리 멀어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선장이 초조한 심정으로 말했습니다.
"괜찮을까."
당연히 네트레코더는 먹통이 되어버렸습니다.
"느그 네트레코더 잘 나오나?"
"안 나옵니더."
한길호와 본선은 선미를 중심으로 부채 살의 방향으로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가깝다는 생각은 하였으나 그물 사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선미의 갤로우스에 매달려 있는 톱 롤러라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물이 걸린다면 톱 롤러가 출렁거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였습니다. 두 척의 배 앞으로 멀리서 역시 같은 회사 소속 신안호(5,500톤급)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신안호 부선장이 보이스로 한길호를 불렀습니다. 그는 한길호 수석 1항사하고 친했습니다.
"우린 어디로 가야 하노?“
한길호 수석1항사가 대답했습니다.
"선장님, 우리하고 갈매기(한진호 별명) 사이로 오이소."
우리와 한길호의 간격은 점점 멀어지고 얼마 후 신안호가 우리 사이로 서서히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마치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블랙홀에 빠져드는 것처럼.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당시 한길호와 우리 배 그물이 이미 걸려 있었는지 아니면 신안호가 좁은 두 배 사이를 지나가면서 두 배의 그물을 모두 걸어 버렸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한길호와 우리 그물이 먼저 걸리고 걸린 두 그물의 사이로 신안호의 그물이 들어오면서 걸린 것으로 판결을 내렸습니다. 세 척의 그물이 함께 걸려 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같은 회사의 배들이 말이죠, 우리 배와 한길호는 메인 와이어를 풀어서 신안호에서 꼬인 그물을 풀기 좋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물은 포기하고 전개판이라도 건지면 다행이다 싶을 정도의 사고였습니다. 5시간 정도의 오랜 작업 끝에 얽힌 그물들을 풀어내었습니다. 우리는 그물을 모두 탕진한 상태라 한길호로부터 구형 로프망 한 세트를 얻어 남은 조업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같은 회사니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땐 누구의 잘못인가를 밝혀내려고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믿기 어려운 불운들의 접점에 우연히 제를 포함한 모두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의 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하나의 사건이었던 것이죠. 지금도 끝임 없이 되살아나는 사건 말입니다. 우린 살면서 그런 것을 많이 겪지요. 운명 같은 3번의 그물 사고를 통해 전 더 성숙해졌을까 아니면 더 나약해졌을까.
북양어장의 중층트롤에서의 그물사고는 저층트롤과는 달리 그물과 바다생태계 간에 충돌로 일어나는 경우는 드뭅니다. 반면에 저층트롤에서의 그물사고완 달리 부지불식간에 북양의 깊은 수심만큼이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저층트롤에서의 그물사고는 사고의 감촉이 바로 느껴지고 그것에 관한 대처도 직접적으로 바로바로 이어지고 회복도 빠른데 반하여, 중층트롤에서의 그물사고는 언제, 어떻게, 무엇에 의해서 그물 사고가 있어났는지도 모호할 만큼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결과를 알게 되어 그저 귀신에 홀린 것 같은 어쩔 수 없는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는 느낌이 들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충격은 더 심하게 각인 되는 것 같았습니다. 당사자들의 무의식에 깊숙하게 내장된다고나 할까요. 그게 광활하고 차가운 바다와 함께 심한 고독감으로 밀려드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권투에서 ‘카운터펀치’를 맞아 패배한 복서 같다고나 할까요. 다시 일어섰지만 경기는 이미 끝나버린 것 경우처럼 말이죠. 그렇게 1989년 공해에서의 조업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18) 특례 보충역
병력 의무를 마치는 방법 중 ‘특례 보충역’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방위산업체에 일정기간 근무 하거나, 수산회사 등에 취업하여 일정기간 승선생활을 하면 병력의무를 다한 것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대학3학년 때 신체검사를 받고 현역입영 판정을 받으면 일단 학업 중이라는 이유로 입영을 연기하였다가, 졸업하고 승선을 하게 되면 특례보충역으로 편입되었습니다. 5년 정도를 승선해야 하는데 5년 동안 계속 승선을 한다는 것은 무리이므로 보통 5년 중 4년 정도만 승선하면 되었습니다. 이 제도는 군 입대 대신 취업도 하고 그동안 돈도 벌 수 있다는 점에서는 유리했습니다. 하지만 낮은 임금과 일정기간을 불만 없이 근무해야한다는 단점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국가와 산업체의 또 다른 이해관계를 만족시키기 위해 변형된 복무 제도라고나 할까요. 실제로 ‘특례 보충역’에 편입될 수 있는 것 때문에 어업학과를 지원하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저에게도 이런 제도가 어려웠던 가정경제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의 경우 휴학계 등을 내면서 군에 입대하였다면 집안 형편은 매우 어려워졌을 것입니다. 이런 제도는 ‘양심적 군 입대 거부자’들에게 좋은 의미로 이용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군에 가서 총을 잡는 대신 ‘사회적 봉사’ 등으로 병력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인정해 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5년 승선기간 중에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3주간 특례 보충역 훈련을 마치면 제대증을 받게 되는데 그게 ‘선박병과(船舶兵科) 이병 제대’였습니다. 3주 훈련을 마치는 날, 조교였던 현역이나 보충역 장병들은 무척 부러워하면서도 억울해했었습니다. 그곳에서 왜 사람들이 군에서 복무하는 것을 ‘군에 끌려간다.’라고 말하는지를 어렴풋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부산 만덕동에 있는 예비군 교장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그곳에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국방의 의무를 이행한다는 미명하에 소중한 시간을 허무하게 소비하고 있었습니다. 군대는 대체로 대부분 삶으로서의 질적(質的)시간을 정체시키거나 퇴보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젊은이들이 아주 단순한 노동에 동원되어 젊음의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곤 사소한 일들에 엮여서 상급자에 욕을 듣거나 얻어맞기도 하는 걸 보니 과연 한 사람의 젊고 소중한 삶이 저렇게 취급되어도 되는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군에서의 시간이 억울하고 더럽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우리와 함께 했던 조교들도 늘 군 생활을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30살이 다 되어 특례훈련을 받아서 그런지 고된 훈련은 받지 않았습니다. 사격이나 유격 같은 것도 흉내만 내고 쉬도록 해 주었습니다. 거의 예비군 훈련 수준이었다고 보면 될 겁니다. 다만 그 교장에서 근무하는 장병들은 무척 힘들어 보였습니다. 특히 보충역 병사들은 하급 장교에게 비인간적인 모욕을 많이 당하는 걸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비 오는 오후, 강당에서 영화를 보는 것으로 교육이 바뀌어서, 인근의 비디오 가게에 가서 비디오를 대여해 오라고 했는데 늦게 왔다고 때리는 것과 아침에 훈련 시작하기 전 인원파악이 늦거나, 훈련 중 준비물에 관한 것 등으로 가해지는 폭력 등 거의 일상적인 것 같았습니다. 조교들은 하급 장교를 ‘개’라고 부르더군요. 그런데 그 하급 장교라는 사람은 사관학교 출신이 아니라 일반 병 출신이었는데 일종의 콤플렉스 때문에 그렇게 습관적으로 조교들을 때리는 것 같았습니다. 특례 훈련병들에겐 동네 형처럼 잘 해 주었는데 말이죠. 아무리 계급사회라 하지만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비군 교장에서 특례훈련을 받은 우리완 달리 창원 같은 전문적인 교육장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무척 힘들었던 3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선박중대를 편성해서 따로 관리를 받았습니다. 훈련 중 회비를 3만원씩 내어서 조교들에게 뇌물을 주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훈련이 쉬워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특례보충역의 훈련보다는 쉽게 끝났던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저는 오만과 북양어장에서 승선한 경력으로 ‘특례보충역’ 기간을 채우고 3주간의 특례 훈련을 마쳐 ‘병력 의무’를 다했습니다. 대부분의 항해사들은 이 기간이 끝나면 하선을 많이 합니다. 배를 탈 때 ‘승선생활’을 빨리 마치고 ‘육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희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육상에서 뭘 하면서 살아가야할지 계획도 서 있질 않으면서 막연하게 육상근무에 대한 꿈을 꾸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배에서 내려 육상에 무언가를 하다가 배에서 번 돈을 다 날려버리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도 육상에서 회사에 다니면서 월급쟁이로 사는 사람은 실패할 확률이 좀 낮지만 자영업을 하는 사람은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바다에 있어 보면 선원, 사관, 선장할 것 없이 육지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다시 바다로 돌아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육상생활’이란 참으로 무서운 곳이기도 합니다. 아니 무섭다기보다는 ‘피도 눈물도 없는’ 곳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마치 대형그물 사고처럼 한 번 잘못 스치고 지나가면 다시는 복구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처럼 말이죠.
예전에 제가 오만에서 30월 계약을 마치고 돌아오니 병무청에서 서류가 잘못되었다고 군에 입대하라고 했습니다. 알아보니 당시의 회사에서 어장의 입어문제 때문에 늦게 출국한 게 문제였습니다. 5월까지 출국을 했어야 하는데 며칠 늦어져서 제가 승선한 흔적이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부랴부랴 월급 명세서 등을 다시 만들어서 제출했습니다. 만약 그런 게 없었다면 저는 그때 군에 입대해야했을 겁니다. 제 주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그게 무서운 관계로도 변할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런 관계들이 자꾸 만들어지는 사회는 어쩌면 나쁜 사회라고 해야 할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극히 이익관계를 추구하기 시스템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특례보충역 제도가 개인에게 어떤 이득이 있고 영향을 끼쳤는지는 각자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 집안을 절대적 가난으로부터 구해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청춘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보내버렸다는 아쉬움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선상생활을 하면서 작지만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런 생각들이 저를 점점 새로운 세계로 끌고 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절대적 가난이든 육상생활의 실패이든 모두 개인적인 문제가 아님을 조금씩 느낀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에서 나온 생각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체제 속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마치 그건 영화 ‘설국열차’의 내부와 비슷한 모습이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어렴풋하게 그곳에서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마린보이의 꿈-최희철>
위도 20도, 아열대의 바다는
끈적거릴 뿐 움직임이 없다.
끝없이 반복되는 투망(投網)질로
바람도 힘없이 가라앉아
새파란 청춘은 비릿한 냄새에 친친 감기고
숨 막혀 견디지 못하는 나는
50미터, 깊은 곳에서 예망(曳網) 중인
그물의 전개(展開) 상태를 확인해야겠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바다 속으로 뛰어 들고 싶었다.
두꺼운 현실의 장막을 찢고
발가숭이로 수압(水壓)을 잊는 곳.
푸르디푸른 빛의 세계로
와이어(wire)를 잡고 따라 내려가서
천장망(天仗網, upper net)의 입구를 붙잡고
물살을 멋지게 타보기도 하면서
갑오징어, 도미, 갈치, 민어 등과 만나고 싶었다.
그때 나는 마린보이가 되어
그들의 은빛 비늘, 현란한 춤의 절정을
산소 껌처럼 질겅질겅 씹으리라.
물 바깥의 세상을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런 상황이
오히려 나를 미치게 만들어
나와는 완전히 다른 종족들과
연애를 하고, 새끼를 낳고
생명이 다할 때까지
아니 특례보충역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행복한 용궁 속에서 머물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19) 사람들
1) 동기 예병세
동기 예병세, 제가 한길호 승선했을 때 그는 2항사로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같은 2항사이지만 차석 2항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학교 다닐 땐 저와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처음 북양트롤선에 승선한 저를 위해 많은 배려를 해 주었습니다. 오만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어장에서 약간은 고독한 항해사 생활을 하다 이곳으로 와 보니 동기도 있고, 선, 후배도 많아서 마음이 한결 편했습니다. 그와 저는 같은 방에서 둘이만 있게 되었는데 너무 친해져서 술도 같이 마시고 잦은 논쟁도 일삼곤 하였습니다. 우린 너무 떠들다가 상급자들로부터 너무 시끄럽다고 주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밤늦게까지 대리인과 옵서버의 관리에 관한 이견으로 술까지 마시면서 목청을 돋우어 악을 쓰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옆방에서 잠을 이루지 못한 선장이 너무 시끄러워 참다 참다 도저히 못 참겠는지, 선장실의 벽면을 발작적으로 몇 번인가 내려치는 일이 생겼습니다. 보통 어선의 분위기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옆방에서 선장이 주무시는데 감히 2항사들이 잠을 방해할 정도로 떠들다니, 우리는 미안한 마음에 논쟁을 그치고 조용히 잠을 청했지만 그는 다음 날 저보다 먼저 당직을 서야했기에 브리지에서 선장에게 심한 꾸지람을 들었나봅니다. 하지만 선장은 그런 우리 사이를 부러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자신은 그렇게 오랫동안 배를 탔어도 동기와 함께 한 번도 승선하지 못했다면서, 우리의 끈끈한 우정을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린 여러 가지로 우정 어린 싸움도 많이 했었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주변에선 은근히 우리의 우정을 보면서 질투을 했나 봅니다. 한길호에선 선임이든, 후임이든 모두가 우리를 하나의 몸체로 보았고, 업무 배정에도 배려를 해 주었습니다. 간혹 우리는 아래층에 기거하는 3항사들을 괴롭히기도 했는데 그들에게 가자미회, 알 탕 등을 만들게 하여 술을 진탕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바둑 실력도 비슷했고 책도 함께 읽었으며 문화영화도 관람하였습니다. 제가 당시 읽던 사회과학 서적을 그는 어렵다고 읽지 않았지만, 설명을 해주면 고개를 끄덕이며 다 알아듣곤 하였습니다. 우리는 치기 어린 20대의 객기로 술을 늦게까지 먹기도 하였는데, 맥주로 가득 찬 방광을 북태평양의 차디찬 바다에 비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칼끝보다 매서운 차디찬 바람은 우리의 자지를 오그라들게 만들었습니다. 알류산 열도의 섬들은 선명한 흑백사진 같았습니다. 모든 색들을 내부로 깊숙이 간직하였다가 마치 해질녘의 어렴풋한 윤곽 속에서 다시 드러나는 것처럼 그것은 극한의 심급에서 뿜어져 나오는 단조로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북태평양, 혹은 알라스카는 온통 흑백의 천지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오래도록 제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인가요. 그것은 어쩌면 차가움을 너무 많이 닮았습니다. 차가운 시간, 공간, 그리고 의식(意識)들의 연상 작용 말이죠. 제 젊은 날의 후반은 그렇게 행복했었습니다. 우린 동성(同性)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낌 없이 한 개의 침대를 쓰기도 했습니다. 둘 다 주간 당직이라 밤늦게 술(정종)을 마시고, 저는 너무 취해 2층 침대 위로 올라가지도 못할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방은 너무 더웠는데 왜냐하면 난방 스팀파이프가 여러 개 우리 방의 천정을 통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북태평양의 한 겨울에도 방은 영상 30도를 웃돌았을 정도였으니까요. 당연히 우리는 팬티만 걸친 채 침대에서 술에 취해 함께 잠을 자곤 했습니다. 간혹 느껴지는 그의 피부는 보드라웠고 그리고 지나치게 흰 편이었습니다. 우정은 그렇게 술에 취해 팬티만 입고 같은 침대에서 자면서 더 깊고 넓어졌습니다. 그로 인하여 저는 행복한 선원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도 그걸 느꼈을까요, 북태평양 찬 기온 속에 핀 우정의 뜨거운 꽃, 그 향기가 저에게 전해져 제가 오랫동안 선원 생활을 할 수 있었던 힘이 되었던 것과 그 뿐 아니라 사람을 믿고 좋아할 수 있게 된 것까지 말입니다.
2) Collin harrington
한일호에서 차석 1항사로 근무할 때였습니다. 그는 여류소설가 ‘콜린 맥그로우’와 이름이 비슷하다는 것 때문에 처음부터 특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콜린 맥그로우는 ‘가시나무 새(The Thorn Birds)’이라는 소설로 한국에서도 유명하였습니다. 그가 그 소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조금 의외였습니다. 당시에 전 이른바 ‘문학청년’이었거든요,. 그는 여타의 미국인답지 않게 문학이면 문학, 음악이면 음악 모르는 게 없었습니다. 그는 말괄량이 삐삐처럼 장난도 심했고 마귀할멈처럼 짓궂기도 하였으며, 아주 시끄럽다가도 간혹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몬테이너(montana)주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몬테이너’는 우리로 치면 강원도 같은 곳입니다. 험한 산악지대라는 의미지요. 그는 1960년 생, 처음엔 미국식 나이와 우리식 나이의 차이를 몰라 제가 더 나이가 많은 것으로 되었습니다. 그는 장난스럽게 우리말로 ‘오빠’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몇 개월 지나서 태어난 해를 따져보니 사실은 제가 더 어리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그와 저는 쉽게 친해진 것 같았습니다. 몇 개월 동안 바다 위에서 여자라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총각이 젊은 여자를 만났는데 싫을 리가 없었죠. 그들은 우리와는 달리 처음 본 사이라도 쉽게 친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첫 날부터 제 방으로 놀러 와서 맥주를 마시며 기타를 가져와서 제가 알고 있는 팝송도 불러 주었습니다. 나중에 너무 친해져 버려 처리실, 식당 혹은 브리지에서도 장난을 많이 쳤던 것 같습니다.
선원들이 우리가 장난치는 모습을 보고 ‘서로 사귀냐’며 놀리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 소리가 싫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변변한 연애 한 번도 해 보지 못해 본 숙맥(菽麥)이었기 때문입니다. 대학 다닐 때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지만, 혼자 좋아하는 수준이었고 사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도 미숙하여 감정을 확실하게 표시하질 못했습니다. 그가 방으로 놀러 와서 기타도 쳐주고 노래도 불러 주곤 하니까 무척이나 좋았습니다. 그는 수다가 심했는데 가끔 선장들을 도마에 올려놓고 수다를 떨거나 흉을 보면서 깔깔거렸습니다. 가끔 자선의 선장 중에는 미치광이처럼 모선에게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요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망하다가 모선의 옆구리에서 제품화가 가능한 크기의 명태가 한 마리 버려지는 것을 보면 바로 보이스 통신으로 대리인을 통해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가끔 젊은 통신장도 제 방으로 저녁에 놀러오곤 했는데 그는 아마도 저보다는 콜린과 놀고 싶어서 오는 것 같았습니다. 콜린이 그렇게 예쁜 편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받았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연애감정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비록 ‘연애감정’이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그에게 알릴 정도의 시간적, 감정적 숙성은 되어 있질 않았던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가 그저 좋았을 뿐이고 저에게 친하게 대해 주는 게 고마웠을 뿐입니다. 콜린은 저에게 많은 부탁을 했습니다. 목욕을 위해 스팀을(온수 스팀) 올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커피나 갑판의 그물더미에 숨겨 놓은 캔 맥주를 원하기도 하였습니다. 옵서버와 밤늦게 술을 먹다가 저를 불러 함께 술이 만취되도록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언제부턴가 조금씩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었는데 처리실 업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대리인으로서 선원들이 명태 드레스 제품의 수율을 너무 낮게 만들고 있고, 제품이 될 수 있는 명태가 그냥 바다로 버려진다고 선장에게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하여 나중에 3항사와 함께 샘플을 하는 단계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런 문제는 자선으로부터 제기된 것일 겁니다. 자선 선장이 강한 불만을 그에게 터뜨렸나 봅니다. 당시 콜린은 초보 대리인은 아니었습니다. 옵서버 생활도 하고 대리인 업무도 다른 어선에서 몇 번 거친 중견급이었습니다. 미국인과 한국인의 차이를 느낄 수 지점이었습니다. 제품처리 문제로 저는 수석 1항사에게 처리장, 부처리장, 반장들과 함께 짜증스러운 말을 몇 번인가 들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선원 구하기가 어려운 시절이고 어선에 승선하는 직업이 그렇게 좋은 직종도 아니어서 선원들은 활기차고 꼼꼼하게 작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6개월 이상씩 하는 장기조업이고, 보합선도 아닌 월급제 어선에서 누가 열심히 일하겠습니까.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가면서 버려지는 명태 한 마리를 얼른 뛰어가서 손으로 잡아낼 선원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 일로 그와 저는 좀 냉랭해져 버렸는데 그가 간혹 무슨 말을 걸어도 전 대꾸하지 않았으며 그가 제 방으로 놀러오는 경우도 그 이후론 한 번도 없었으며, 처리실이나 브리지에서도 그냥 쳐다보기만 할 뿐 개인적인 대화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태가 계속되자 그는 저의 당직시간에는 아예 브리지로 올라오지도 않았습니다. 전엔 제 당직 시간에 올라와서 서로의 어로일지를 살피며 자기 업무를 보았는데, 그 일 이후로 밤에 올라와서 수석 1항사 시간에 업무를 보고 내려가곤 했습니다. 점점 식어 가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전 참으로 유치하고 바보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연애를 해 본 경험이 없으니 그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거의 백치에 가까웠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어떤 심리상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에게 짜증을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처리실 업무에까지 짜증을 내었습니다. 그에게 짜증낼 상황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그 이후로 그는 저에게 업무에 관련된 것이라면 되도록 말을 걸지도 않았습니다. 대화가 끊어진 것은 물론 그저 저를 피하기만 하는 것 같았습니다. 왜 화를 왜 내었을까, 애정이 증오로 변한 것일까, 무슨 일이 저의 내면에서 벌어지고 있지는 저는 몰랐습니다.
그러던 중 그가 저에게 작은(지금 생각해 봐도 아주 작은 실수였습니다.) 실수를 하였습니다. 그가 자선의 요구상항을 잘못 전달하여 모선 선장과 자선 선장과 작은 말다툼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선에서 어구에 필요한 와이어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그가 저에게 잘못 전달해 주었고, 저는 선장에게 보고하여 어구를 만들어 보냈으나 나중에 그게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그냥 잘못된 게 아니라 자선에서 그 어구 때문에 어획에 차질이 생겼나 봅니다. 미국인들은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문제라면 아주 철저합니다. 우리 선장은 저의 잘못으로 판단하여 저를 꾸중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가 자선선장으로 부터 받아 적은 메모지가 발견되어 그의 실수로 판명되었습니다. 어구에 달린 와이어의 길이나 굵기가 다르면 어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가 브리지로 올라왔습니다. 그가 자기 때문에 선장에 꾸중들은 저에게 약간 미안했는지 웃으면서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웃음을 보는 순간 저는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화를 내어버렸습니다. 심하게 욕을 하면서 집으로 꺼져 버리라고까지 퍼부었습니다. 참으로 유치하고도 바보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그가 나중에 편지에서 표현한대로 ‘silly guy(바보)’와 같은 짓을 해 버린 것입니다.
그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푸른 눈동자의 눈가가 젖으며 눈물이 쏟아지고 그것이 두 볼로 타고 내려왔습니다. 무척 놀랐습니다. 저 앞에서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리며 여자가 우는 것을 처음 경험한 것입니다. 나중엔 저에겐 안겨 어깨까지 들썩이면서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필시 미국적인 감정표현이었을 겁니다. 그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었습니다. 순간 저의 그동안의 감정들이 부끄러울 정도로 유치했음을 느꼈습니다. 그날 밤 그가 제 방으로 왔었습니다. 그리곤 우린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의 감정(?)을 확인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책상 위에 편지 한 통과 과자 하나가 놓여 져 있었습니다. ‘너를 많이 좋아하니 앞으로 더 좋은 친구가 되자’고하는 그가 직접 쓴 편지였습니다.
콜린도 지금은 중년의 아줌마가 되었겠지요. 아이도 낳고 좋은 엄마가 되어 있을까, 아직도 몬테이너 산골에서 살고 있을까, 티끌만한 인연이 생겨 한 번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콜린 해링톤! 북양어장에서 다른 배와 접선할 때 콜린을 한 번인가 더 보았습니다. 그 때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 두면 좋았을 것을,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많이 아쉽고 그립습니다.
20) 입항 중 생긴 일
한진호는 자체조업, 합작 사업, 또 자체조업을 번갈아 하면서 오랜 시간 끝에 어창(漁倉)을 가득 채웠습니다. 드디어 그렇게도 바라던 입항입니다. 1, 2번 어창을 가득 채우고 급냉실, 급냉준비실(robby), 그리고 육고(肉庫)까지 가득 채웠습니다. 사실 그런 식으로 어획물을 채우면 안전을 위한 적재량은 이미 넘은 게 됩니다. 일종의 과적이지요, 하지만 북양트롤선은 입항할 때 대부분을 그렇게 가득 어획물을 가득 실어서 부산으로 옵니다.
긴 항해 중에는 처리실의 ‘렛고통(let's go)’을 통하여 해수가 침입하기도 합니다. ‘렛고통’이란 어획된 것들 중 오물이나 제품이 되지 못하는 물고기 등을 버리기 위해 처리실의 외벽을 뚫어서 바다로 통하도록 만든 문(구멍)인데 그 문을 열면 바로 바다입니다. 문 크기가 29인치 tv 화면 정도가 될까요. 하지만 조업 중엔 늘 처리실에 선원들이 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습니다. 어장에서 조업할 때 처리실에서는 그 문을 열어놓고, 컨베이어를 이용해서 오물을 버립니다. 만선하게 되면 그 구멍의 위치는 수면의 상, 하에서 찰랑찰랑할 정도가 됩니다. 그렇게 ‘과적’을 하여 입항한다고 했을 때, 비록 그 구멍이 막혀있다고 하더라도 기상이 조금 좋지 못하다면 항해할 때 해수가 조금씩 들어올 수도 있었는데 위험했지만 관행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급 항해사에게 당직 마칠 때마다 처리실로 내려가서 혹시라도 해수가 처리실에 들어와서 고이는지를 점검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처리실 반장들은 규칙적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그것은 배의 안전을 위해서이기고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처리실 급냉실 로비 쪽에 2번 어창의 입구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린 무지하게도 어창 입구의 문(어창 문은 육중할 뿐만 아니라 보온을 위해서 두께도 15 센티미터 정도의 두꺼운 나무문을 씁니다.)이 깔끔하게 닫힐 정도로만 냉동 어획물을 적재하면 좋았을 텐데, 조금이라도 더 싣기 위해 문은 닫지 않고 입구 끝까지 어획물로 채운 다음 그 위를 천막으로 덮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20~30팬 정도 더 실을 수 있을까요? 당직을 마치면 내려가서 처리실 바닥을 점검한 후 고인 물 있으면 펌프로 퍼내어 줘야 합니다. 그리고 렛고 구멍의 철판도 제대로 잘 닫혀 있는지를 확인하고 그 틈으로 침투하는 해수의 양도 점검해야 합니다.
입항 할 때 항해사들이 해야 할 서류는 만만치 않습니다. 각종 발주서를 취합하여 정리하고, 항차 보고서를 만들고 나중엔 서류가 한권의 논문(?)처럼 철편으로 묶여져 선장에게 제출 됩니다. 그리고 입항이라고 술도 한 잔씩 하다보면 깜박하고 처리실 점검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처리실은 비교적 배 밑바닥에 있어서 조업할 때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과는 달리 어둡고 설렁하며 몇 개의 계단을 지나서 처리실에 내려가는 것이 조금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특히 동굴 같이 길고도 음침한 복도를 지나 아무도 없을 것이 분명한 처리실로 가는 일이란 무섭기도 하였습니다. 주로 하급 항해사들이 하는 일이라지만 그래도 1항사인 저도 몇 번씩은 내려가 봐야 했던 것이 옳았을 겁니다.
한 이틀 정도 처리실에 내려가 보지 않았을까, 제가 내려간 그날은 해수가 많이 침입해서 장화를 신지 않고는 다닐 수 없을 정도가 되어있었습니다. 놀라서 급히 배수펌프를 작동시키고 처리장에게 연락해서 호통을 쳤습니다. 처리실과 가장 가까운 침실에 기거하고 있던 반장에게 처리실에 해수 침입에 대한 주의를 몇 번이고 당부하였던 것입니다. 해수는 쉽게 배수 되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려했던 어창 입구까지 해수가 조금 들어간 것 같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천막이 조금 젖어 있었고 천막을 풀어서 살펴보니, 천막 바로 밑의 명태 냉동 제품이 약간 녹아 있었는데 분명 해수에 젖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또한 천막도 자세히 살펴보니 완벽하게 어창의 입구(해치, hatch)을 덮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천막이 입구의 크기보다 조금 작은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때까지 만해도 그냥 입구의 제품 몇 개가 조금 해수에 젖었으려니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입항해서 하역을 해보니 당시 상당량의 해수가 어창으로 침입을 했었고, 해수가 냉동어획물 사이를 타고 내려가면서 그대로 얼어붙어버려, 높이로 한 줄 약 200팬 정도의 어획물이 서로 엉겨 붙어있었습니다. 관리과 직원은 육상에서 하역 하면서 그런 일이 발생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저보고 당시 상황을 보고서로 작성하여 회사에 제출 하라고 했습니다. 해수에 젖어 버린 냉동 어획물은 일단 B품으로 처리됩니다. 젖었다고 해서 냉동어획물이 녹거나 상한 것은 아니지만 외관상 깨끗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시의 상황을 거짓 없이 보고서로 작성하고 1항사인 저의 잘못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점검을 게을리 한 잘못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해수가 렛고 구멍을 통해 넘어 올 정도로 어획물은 과적한 것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누구의 책임을 따지기보다 끔직한 위험에 대한 무감각을 한 번쯤 되돌아 볼 기회가 되었을 텐데요. 과적하고도 침몰하지 않고 입항만 할 수 있다면 효율적이고, 계속적으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무감각’도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 보고서를 읽고도 회사의 사람들은 B품이 발생한 냉동 어획물에 대한 사연만 알려고 했을 뿐, 과연 이 정도였다면 혹시 배가 침몰할 가능성은 없었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을까, 아무튼 그 사건이후 처리실에 있는 어창 입구의 끝까지는 어획물을 적재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21) 더 작은 사건의 비늘들
1) 한길호 1항사는 아침마다 당직을 마칠 시간이 되면 제 동기인 2항사로 하여금 안전화를 신은 발로 선장실 위에서 유난히 소리를 내면서 걷게 했습니다. 선장보고 일찍 올라오라는 신호지요. 딸그락 딸그락 혹은 뚜벅 뚜벅 신발소리가 알람처럼 브리지에 울려 퍼집니다. 북태평양에 아침이 온 것입니다. 마음씨 착한(?) 선장은 그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브리지로 일찍 올라와 줍니다. 작은 것이지만 조금만 자기를 구부리면 ‘기분 좋음’이 됩니다.
2) 입항하여 기억나는 사건 중 하나는 입항기간에 태풍을 만난 것입니다. 2항사로 한길호에 있을 때였는데 하역은 거의 마친 상태였습니다. 피항이 결정되어 전 선원에게 귀선명령이 하달되었고 모두 귀선하여 점심때쯤 부산항을 빠져나와 거제도(거제도 북서쪽 해역)로 갔었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었고 섬 뒤쪽이라 파도는 심하지 않았지만 바람이 매우 강했습니다. 우리도 다른 배들처럼 앵커를 놓았지만 레이더로 위치를 확인한 결과 앵커가 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마도 어창에 적재된 어획물이 없으니까 배의 흘수가 얕아지면서 바람에 떠밀리는 것 같았습니다. 선장에게 보고하여 앵커를 올리고 난 다음 밤새도록 북양어장에서 피항 하듯이 그 좁은 해역에서 ‘heave to’ 방식으로 다른 배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돌아다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특히 군함들은 자신들에게로 어떤 배가 가까워졌다 싶으면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난리를 쳤습니다. 마치 그곳이 자기들만이 쓸 수 있는 해역인 것처럼. 그들이 왠지 겁쟁이들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앵커를 뽑은 채 좁은 곳을 이리저리 다닌다고 고생은 하였지만 한 가지 이점이라면 태풍이 지나갔을 때 어느 배보다 빨리 부산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3) 한진호 수석 2항사 때였습니다. 당시 1년 후배인 2항사는 ‘게임’을 참으로 좋아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어디서 갖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중학교 수학책에서 수학문제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대개 수석 1항사가 1등을 하였고 저와 후배가 늘 꼴지를 다투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것 이외에도 그는 여러 가지 내기를 좋아하였는데 게임의 백미는 전자계산기의 ‘1+1’을 누른 다음 ‘=’를 계속 누르면 숫자가 하나씩 증가되는데 그걸로 30초 동안 누가 많이 누르는지를 시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린 한 때 그 게임에 빠져서 틈 만나면 연습을 했습니다. 그리고 신기록을 세우면 아이처럼 좋아했습니다. 그것은 ‘갤러그’나 지금의 ‘닌테도’ 게임과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그 계산기란 게 업무용이기도 했지만 가끔은 미래를 설계하는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월급을 얼마 받으니까 몇 년 후면 얼마를 모을 수 있고 그러면 무엇을 사거나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계산기 하나로 설계한 삶은 파도가 배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금방 잊어버리곤 틈만 나면 계산기를 두드리며 다시 설계했습니다. 문득 거대한 파동(波動)의 일원으로 밀려와서 배를 한 번 기우뚱하게 만들어 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나가 버리는 것 말이죠. 그런데 계산기로 설계하고 꿈꾸었던 미래는 아무리 해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 청량음료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고개를 들어 밖을 쳐다보면 시퍼렇고 하얀 포말의 바다 밖에 보이질 않았으니까요. 그래도 계산기는 누를 때마다 톡톡 소리를 내며 ‘너는 나를 닮았다, 나를 닮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계산기의 숫자판을 통해 전해오는 탈주의 감촉들 그리고 마치 그것을 지우려는 듯 늘 뒤 따라 오던 바다냄새가 떠오릅니다.
4) 알라스카 근해엔 다시마가 많았습니다. 엄청나게 큰 다시마, 키가 10미터는 족히 넘었을 겁니다. 가끔 그걸 건져 반찬을 만들어 먹었기도 하였는데 외국인은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저걸 어떻게 먹나? 알라스카 연근해에선 대구가 많이 올라옵니다. 크기가 아주 큰 것들이죠. 그렇게 큰 것은 팬에 담기질 않아 머리를 자르고 포를 떠서 팬에 담습니다. 머리(대가리)에서 아가미를 따로 떼어내서 제품을 만들기도 하고 머리만 제품을 만들기도 합니다. 대구의 위(胃)는 뒤집어서 깨끗하게 씻어 뜨거운 물에 데친 후 소금이나 초장, 라면 스프에 찍어 먹으면 별미입니다. 그걸 우리는 ‘대창(대구 창자라는 의미)’이라고 했지요. 하지만 육지에서는 한 번도 먹어 보질 못했습니다. 대구는 대가리가 참으로 별미였는데, 우리가 먹기 위해서 제품화한 대구대가리 일부는 운반선 편으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큰 것은 밀가루 묻혀 튀겨 놓으면 치킨보다 더 맛있는 것 같았습니다. 외국인은 처음에 이것을 먹는 것도 좀 징그럽게 생각하더니 나중에 맛을 알고는 우리보다 더 잘 먹는 것 같았습니다.
5) 북양어선에서 조업 중 어군을 발견하는 것을 ‘기록을 밟았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오늘 어획이 좋았느냐를 물을 때 ‘오늘 기록 좀 밟았었냐?’고 묻기도 하지요. 기록을 좀 밟아야 어획도 좋아지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간혹 기록을 잘 밟기 위해서 운동화를 신고 브리지로 올라오는 선장도 있었습니다.
6) 피시본드는 코드엔드의 어획물을 붓고 모아지는 곳입니다. 일단 그곳에서 어획물이 모아졌다가 처리대로 나오지요. 하지만 처리대 위에 처리할 어획물이 너무 많으면 피시본드의 것은 그대로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상이 악화되어 피항이라도 하게 되면 처리가 더디어지고 피시본드에 있는 어획물들(특히 명태)은 그 안에서 몇 시간을 흔들리는 상태로 있어야 합니다. 명태는 다른 어종(가령 가자미)에 비하면 피부가 상대적으로 미끄러워서 흔들리면서 명태들끼리 마찰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 상태가 오래되면 명태의 살이 허옇게 되고 대가리부위도 피부가 벗겨진 게 약간 흰 색으로 변합니다. 그걸 ‘백태(白太)’라고 하는데 버리질 않고 모두 처리를 하였습니다. 다만 제품의 등급은 좀 떨어집니다.
7) 북양어장에 출어했던 CH호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갑판장이 기독교인이었는데 틈 만나면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고 했다고 합니다. 물론 주변에 전도도 했겠지요. 특히 출항하여 어장으로 가는 동안 바다에서 전도한 신도들과 함께 선수창고(앵커체인 룸)에 모여서 예배를 보았는데 육상의 기도원 등과 같은 수준의 강도 높은 예배였나 봅니다. 성경을 읽고 찬송을 하는 것을 넘어 큰소리로 ‘통성기도’ 같은 것을 했다고 하니까요. 처음엔 침실에서 했는데 주변 환경과 시선이 여의치 않음을 느끼고 그리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CH호 선장은 갑판장을 ‘광신도’라고 했는데, 그게 미쳤다는 의미에서의 ‘광(狂)신도’가 아니라 빛난다는 의미의 ‘광(光)신도’였습니다. 문제는 어장에 도착하여서입니다. 갑판장이 어느 날 선장을 찾아와서 일요일엔 조업을 하지 말고 쉬는 게 어떠냐고 건의했답니다. 자신이 기도를 통해서 성령으로 일요일에 쉰만큼 어획을 충분히 벌충해 줄 수 있다고 한 모양입니다. 하여 당시 불신자(不信者)였던 선장은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 건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는데, 어선이 바다에서 일요일에 쉰다는 것, 그것도 기독교의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어획이나 종교와는 상관없이 선장인 자신이 어떤 황당함에 휘둘리고 있다고 여겼던 겁니다. 하여 욱하며 올라오는 것을 참고 여러 번 설득했지만 갑판장이 굽히지 않고 계속 해서 그런 건의를 해 왔으므로 이런다간 안 되겠다 싶어 결국 당장 하선하라는 협박(?)으로 그 건의를 잠재웠다고 했습니다. 보통 상선이든 어선이든 종교를 갖고 있는 선원들을 자기들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편입니다. 가령 기독교의 경우 일요일(안식일)엔 특정 장소에 모여서 간단한 예배를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위의 경우처럼 배 전체 일정에 대해 어떤 요구를 하는 사례는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아무리 믿음이 강하고 또 자신의 종교가 절대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개인적인 신앙의 문제였다고 본 것이죠. 아무튼 최초로 북양에서 조업을 멈추고 안식일을 지키려는 종교적 시도는 해프닝으로 끝났습니다.
8) 어선에선 일본 용어를 많이 씁니다. 그건 우리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우리의 근대문화가 대부분 일본으로부터 전해졌기 때문일 겁니다. 문화의 흐름으로만 보면 어쩌면 당연해 보입니다. 그래서 사회 전반에서 일본 용어가 많이 쓰이죠. 현장에서 일본 용어를 쓰면 ‘질라이(어떤 일에 능숙한 사람을 가리키는 강원도 사투리)’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초사(1항사), 남방(No1 oiler,1기원), 보송(boat swan, bosun, 갑판장), 헷또(No1sailor, 1갑원) 같은 말에서 시작해서 그물이나 부품, 혹은 엔진의 전반에 걸쳐서 참 많습니다. 그래서 처음 어선에 승선했을 때 갑판장의 말을 잘 못 알아듣기도 하고 갑판장이 발주해 달라는 어구나 공구의 이름이 뭔지 몰라서 다시 물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물도 우와당(윗판), 시다당(밑판), 요꾜당(옆판), 소대그물(날개그물), 고또(코드엔드), 수지나(힘줄)부터 시작해서 끝도 없을 정도 많았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영어발음도 일본식으로 바꾸고 거기에다가 자신 살았던 지방의 사투리 억양까지 섞이니 정말 알아듣기 힘들었습니다. 북양어장의 어떤 선장은 배에서 우리말 쓰기 운동을 벌였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도 잠시 그런 운동을 했었는데 일본 용어를 쓰면 벌금으로 담배 한 갑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저도 가급적이면 일본 용어를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말은 받침이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떤 급박한 상황을 쉽게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도 같았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현장의 용어일 수 있을 겁니다. 언어는 마치 게임처럼 작동하니까요. 가령 갑판장이 갑판원에서 ‘시다보드에 가서 곰피에 달 다마 갖고 와라’고 할 것을 ‘스타보드(starboard, 우현)에 가서 컴파운드 와이어(compound wire)에 부착할 플로트(float) 갖고 와라’고 한다면 현장의 신속성은 무척 떨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용어가 현장의 구성원들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느냐와 관련된 것들이니까요. 학습한 것을 아무런 여과과정 없이 그대로 사용한다는 비판이 있을 순 있겠지만, 언어(혹은 용어)는 현장에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 혹은 용어는 현장의 명령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누군가가 배를 처음 승선했을 때 기존 선원들이 갑판을 가리키면서 ‘데끼’(deck, 갑판)라고 했다면 그건 ‘데끼’를 소통을 위한 수평적 설명이 아니라 앞으론 이걸 ‘데끼’라고 불러야 한다는 수직적 명령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데끼’는 현장에서 벌어지는 여러 문장 속으로 들어가면서 새로운 명령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그러므로 일본 용어에 대해서 너무 애국주의(혹은 국가주의)적 시각을 들이대는 것도 조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어란 현장에서 태어나서 자라다가 변형되고 심지어 소멸되는 것이니까요. 그렇다고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일본식 용어’를 쫓아가자는 것은 아닙니다. 현장 용어로서 일본 용어를 쓰는 것은 사실 일본 용어 그 자체라기보다는 현장에서 끝임 없이 쏟아지는 ‘정보’라고 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일본이 아니라 어떤 나라의 언어일지라도 그것을 무작정 따라가려는 것은 주체성을 잃어버리는 짓이죠. 현장 속에서 구체적 현장성에 충실한 것과 주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다른 것이니까요.
9) 제가 본 바로는 미국인 옵서버들은 자기 임무에 대체로 충실한 편이었습니다. 합작 사업을 할 때 자선의 양망 시간이 새벽 혹은 깊은 밤 시간처럼 일정하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하여 어획물이 올라오면 옵서버가 샘플을 해야 하는데 양망이 아무리 많고 불규칙해도 항해사에게 꼭 자신을 깨워 달라고 합니다. 그리곤 처리실로 내려가서 졸리는 걸 참고 견디며 샘플을 합니다. 샘플을 한다는 게 어획물을 10개의 바구니에 담고 무게를 재고 분류를 해야 하는 것이라 여간 힘든 게 아니거든요. 잠이 모자라서 꾸벅꾸벅 졸면서도 그런 일들을 빠짐없이 수행하는 걸 보니 ‘이 사람들 자기 임무에 참 충실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마도 ‘서양인의 모든 것을 마냥 좋게 보려는’ 이른바 ‘서구 지향적’인 당시 저의 관점에서 나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미국은 선진국이고 그 선진국의 국민인 백인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모범적인 것’으로 보고 싶었던 마음 말이죠. 그들도 자신도 모르게, ‘선진국이고 백인인 자신’이 ‘후진국이고 유색인종인 우리’ 앞에서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행위를 했던 것은 아닐까요? 아마 수산청으로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고 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령 그들은 몸이 아파도 우리 배의 위생사가 주는 약은 먹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일종의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의 조국이자 선진국인 미국의 재산을 자기 스스로 후진국인 대한민국으로부터 지키겠다는 것 말입니다. 너무 과도한 생각이던 걸까요. 아무튼 전 그런 행동들이 그리 좋아보이진 않았습니다. 그들이 너무 과도하고 정확하게 임무에 충실한 모습을 생각하면 왠지 서구중심적인 ‘계몽주의’를 보는 것 같거든요. 그들의 방식대로 자원에너지를 지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전 그게 오히려 누구의 것이라고도 할 수 없는 ‘욕망 전체’를 마치 본래부터 자기들의 것이었던 것처럼 배타적으로 여겼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10) 옵서버는 대체로 나이가 어립니다. 보통 20대이지요. 그런데 히스패닉계의 옵서버 곤잘레스는 나이가 자그마치 35살이었습니다. 그는 대리인은 할 생각이 없고 오직 옵서버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샘플조사도 다른 옵서버들과는 달리 열심히 그리고 정확하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처리가 끝날 무렵 피시본드로 가서 조금 남은 어획물을 이리저리 눈으로만 살펴보다가 항해사에서 어종의 구성에 대한 자문을 구한 다음 기록하여 수산청에 보고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한 번은 자신의 침실에 갔더니 게를 삶아 먹지 않겠다고 제의했습니다. 게는 금지어종이고 금지어종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이 있던 터라 안 먹겠다고 했더니, 자신은 이미 다른 배에서 많이 먹어봤노라고 하면서 오히려 자신이 여기서 먹더라도 절대 신고하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대리인과 함께 침실에서 게를 삶아 놓고 버터에 발라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 금지어종인 게는 허가를 받지 않은 이상 누구도 배에선 먹을 수 없었는데 아무튼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11) 대리인 샤론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네 아줌마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덩치는 크질 않지만 억척이었고 마음씨가 참 여린 것 같았습니다. 가끔 해도실에 있으면 서류 등을 함께 보아야하기 때문에 서로가 매우 근접 하게 되는데 독특한 것은 ‘노린내’였습니다. 제가 오만에서 맡았던 아랍인들에게서 나는 냄새가 그 아줌마에게서도 났었는데 그 냄새가 좀 강력하여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해도실에 들어오면 해당 서류를 펼쳐 놓곤 밖으로 나가 버리거나 있더라도 숨을 가급적이면 참았습니다. 그는 가끔 반갑다는 표시로 우리를 뒤에서 안으려고도 했는데 숨을 멈춘 우리는 마치 마취 포획된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버린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현대인들은 냄새가 별로 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냄새를 더러운 것으로 여겨 제거해 버리려고 하거나 인공의 그 무엇으로 가려버리죠 마치 가면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냄새가 없는 삶은 그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없는 삶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표정을 꽁꽁 묶어 안으로 감춘 채 그가 무엇을 하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는 게 요즈음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의 냄새는 우리가 살면서 쉽게 맡아 볼 수 없었던 진짜 사람 냄새는 아니었을까요. 자신의 무엇 먹었는지, 어디 살았는지를 알려주는 삶의 흔적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역사나 사건들 혹은 표정들도 모두 냄새의 계열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하여 그게 우리와 무슨 관련이 있으며 그게 어떻게 작동하였을지 알려고 하지요. 해도실을 꽉 채웠던 그의 냄새가 그리워지는 지점입니다. 그의 남편은 목수였는데 사진을 보여 주기에 봤더니 영화 벤허의 주인공 ‘찰톤 헤스톤(Charlton Heston)’을 닮아서 놀랬던 적이 있습니다. 그는 미리 준비해 왔는지 헤어질 때 많은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선물을 주고 갔습니다. 제에겐 알라스카 상징이 담긴 ‘배지(badge)’를 주었습니다.
12) 부표나 등대 같은 것은 너무 멀리 있을 경우 항해사에겐 감정이 없는 좌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멀리 보이는 것은 모두 그렇죠. 자세히 보이지 않으니까 그런 것들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죠. 마치 자신의 위치만을 단속적으로 알려주기라도 하듯 부표와 등대는 깜박깜박 정해진 간격으로 명멸합니다. 동일성(同一性)의 세계를 반복하면서 확인하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그들로 근접해서 만나게 되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어떤 색깔의 피부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그곳엔 수많은 부착생물들이 살고 있어서 무척 신기해 보이기도 합니다. ‘클로즈 업(close up)’의 힘이 마치 어떤 사물에 생명을 불어 넣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모호하게 휘어진 신비로움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멀리 있는 것과 가까이 있는 것의 신비감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멀리 있는 게 좌표(座標)적이고 동일하며 결코 접근할 수 없는 초월적 신비감이라면, 가까이 있는 것은 자신의 촉각 세계로 들어와 버린 하지만 결코 쉽게 잡혀지지는 않는 그 무엇들이 만들어내는 신비감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그것은 초월적임에 비해서 매우 내재적(內在的)인 그 무엇들이죠. 그때 그것들은 다시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13) 자위행위에 관한 것입니다. 다른 회사 배에서 일어난 일인데 여러 명이 함께 쓰는 침실에서 선원 한명이 자위행위를 하다 다른 사람에게 들켰나 봅니다. 무척 내성적인 사람이라 남들이 자신을 흉보는 것 같아 무척 우울해졌다고 합니다. 처리실에서도 식당에서도 침실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자위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결국 그는 자살을 하고 말았답니다.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하지만 전 ‘마조히즘적 저항’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자신을 억압하는 것들로부터 자신이 탈출하는 방법이지요. 자신의 현재적 삶을 다양한 현상 세계라고 했을 때 그것을 억압하는 것은 정상이라고 하는 동일성의 세계입니다. 그 잣대로서 ‘넌 정상이냐 아니냐.’를 규정하지요. 그 억압이 너무 강하여 그것을 도저히 뚫고 나가지 못한다고 여겼을 때 자살이라는 방법이 동원되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이것 역시 ‘옳거나 옳지 않음’의 관점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동일성으로서 재단된 정상세계에 대한 극단의 저항일 뿐이라는 것이죠. 전 그런 의미에서 자살을 일종의 ‘용기’로 보는 편입니다. 더불어 언젠가부터 많은 사람들은 생식과 관련되지 않는 섹스를 부도덕한 것으로 취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아마도 사회가 생산성이라는 효율성에 지배되면서부터일 겁니다. 그러면서 섹스는 가정이라는 테두리 내로 들어가서 갇히게 되고 연애결혼이라는 것도 생겼습니다. 자위행위, 그것도 바다위에서의 고독한 자위행위, 그것은 어쩌면 살아있음의 증거가 아닐까요. 무두질을 통해 한 장의 가죽이 만들어지듯 저도 그렇게 ‘자위행위질’을 했었습니다. 어쩌면 그걸 통해 늘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의 자위행위에 비해서 북태평양은 너무 넓었던 것 같습니다. 명란 속 알갱이 같았던 저의 정자들이 다시 부활하기엔!
14) 한진호 수석 1항사 때였습니다. 여성 옵서버 P가 승선한 첫 날밤, 침실에서 자던 중 선원 한 명에게 성폭력을 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배로선 큰 사건이었지만 그가 관대하게 용서를 해주어서 그냥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방에 들어와 캄캄한 어둠 속에 자신을 끌어안고 도망친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술이 취한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고 술이 깬 후 그 선원은 죄책감과 불안감으로 운반선 편으로 귀국해 버렸다고 말했습니다만, 그 모호한 지대를 제가 함부로 이어줄 수도 간섭하기도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15) 트롤어구 특히 바다 속에서 예망중인 그물을 생각해 봅시다. 옆으로도 상, 하로도 정상적으로 전개된 그물을 생각해 보면 한 눈에도 그 그물의 모든 것을 쉽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령 여러 가지 어구들이 제자리에서 제 구실을 하고 있는 질서정연한 모습입니다. 그 때 우리가 그물을 바라본다고 할 때 그물의 전체적인 형상이나 그 부품의 역할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게 정상적이라는 의미는 그런 것이죠. 우리가 이성적으로 잘 파악할 수 있고 또 반성할 수 있는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아무도 제 자리를 이탈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물이 예망 중에 다른 그물과 엉켜버린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그 땐 그물 뿐 아니라 와이어는 물론이고 샤클, 플로트 등이 일순간 엉켜버려서 자신이 지키고 있던 자리나 지위를 이탈해 버릴 겁니다. 가령 우리가 급양망할 때 부서진 그물을 올려보면 그게 어느 부분인지 순간적으로 알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파악하고 풀어내고 다시 수리하는 데 곤란을 겪지요.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했던 트롤그물, 그리고 관련된 ‘질서정연’함이 정상적인 공간을 이탈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파악하지 못하고 허둥대는 것이죠. 우리의 삶도 그런 것 같습니다. 가령 학생이 학생다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때 우리 그 사람이 학생인지 아닌지를 먼저 파악하려고 합니다. 그런 일탈이 그 사람을 학생이 아닌 것으로 여기게도 하고 또 학생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우리 마음대로 재단하기도 합니다. 마치 우리의 그물이 암초나 다른 배의 그물에 걸려서 급양망을 할 때 그물을 올려보면 걸렸었거나 찢어진 부분이 우리 그물의 어떤 부위인지를 금방 알아채기 어렵습니다. 심지어는 엉켜져 올라 온 그물이나 와이어가 누구의 것인지도 잘 분간이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 질서정연함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난감해 하면서 그 부위들을 스스럼없이 잘라버리기도 합니다. 사실 저층트롤에서 급양망을 해 보면 선장의 성격을 이 잘 드러납니다. 큰 사고일수록 차분히 대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더 흥분하면서 욕을 하고 고함을 치면서 허둥대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미 벌어진 상황에 대해서 주변을 한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쩌면 두려움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그런 두려움이 이미 내면화되어 있었던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잘라버리려고 하는 그물의 어떤 부위는 우리에겐 어떤 의미에서는 방향성도 없는 낯선 기호(記號)로 다가옵니다. 여기서 무엇이 잘되었느냐 못되었느냐 혹은 누가 더 옳으냐를 따지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 삶 혹은 우리의 주변엔 그렇게 일탈된 것이 자주 출몰한다는 겁니다. 그 일탈에 대해서 ‘질서정연한’ 관점으로만 대응한다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을 겁니다. 마치 우리가 급양망을 하면서 당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어떤 면에서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여겼던 관점을 언제나 아니 적어도 몇 번쯤은 의심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뜻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아무리 규정된 모습으로 지켜나가려고 해도 그렇게 되질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런 세상 혹은 삶은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북양트롤어선의 조업도 그런 것 같았습니다. 평온한 바다에서 오직 홀로 투망 하고 양망 하고 어군기록도 넘쳐나고 그물사고도 일어나지 않고 하는 트롤어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늘 자신과 주변이 함께 부대끼면서 조업을 하고 언제나 아슬아슬 상황이 자신에게 닥쳐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들은 잠재적이어서 바로 지금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죠. 그 숫한 어획성적, 그물사고, 인간관계, 저기압과 피항 그리고 불만과 성취감,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 등과 같은 그 모든 게 잠재적 운동이었습니다. 제가 경험했던 오만 그리고 북양어장도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탈’적 상황을 두려워하거나, 미워하거나, 현실에서 절대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몸부림쳐도 소용없다는 것이죠. 오히려 그런 상황들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즐기려는 자세가 필요할 겁니다. 어쩌면 거친 북태평양 바다 위에서 파도와 싸우며 고기를 잡으려 했던 것 자체가 삶의 일탈은 아니었을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자본과 우리의 욕망은 함께 거친 바다로 간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서로가 몸통이면서 손과 발이 되어 그 욕망들을 ‘인간중심’으로 내면화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건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지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났던 바다, 바다 속에서 살았던 온갖 생명체들 그리고 알라스카 연근해의 섬들, 바람과 눈보라 그 모든 것들은 우리의 욕망과 함께 뒤엉켜 살았던 흔적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16) 보통 아침에 집을 나섰다가 저녁쯤에 돌아올 경우, 문을 열고 실내에 들어와야 집에 왔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겁니다. 그런데 자신이 살던 도시를 벗어나 좀 먼 곳으로 며칠 동안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걸 생각해 봅시다. 그때는 꼭 자신의 집이 아니더라도, 가령 자신이 살던 도시의 경계 내에만 들어섰더라도 집에 다 온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집과 관련된 안도감을 느끼는 범위가 달라지는 것이죠. 그런데 북양에서 장기조업을 하다가 오랜만에 귀항을 하면 쓰가루 해협을 지나 동해에만 들어와도 집에 다 왔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게 만약 따듯한 봄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바다의 냄새도 완전히 다르게 느껴집니다. 바람과 물 색깔 그리고 온도와 잔잔한 해면 상태가 안도감을 더 강하게 느끼도록 해 주지요. 더구나 배가 울릉도 근처를 지날 무렵 울릉무선국 아가씨의 안내방송 목소리라도 듣게 된다면 마치 봄기운이 온 세상에 가득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예전에 오만어장에서 계약을 끝내고 비행기로 귀국할 때 서울에 도착했는데도 집에 다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만약 우리가 우주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서울이나 동해가 아니라 지구의 대기권 혹은 우주공간에서 지구가 보이는 지점이라면 마치 집에 다 온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될 겁니다. 이처럼 안도감이라고 하는 것은 위치와 시간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래서 같은 목소리라도 집 전화나 핸드폰으로 듣는 것보다 먼 바다에서 어렵사리 위성통신으로 듣는 게 더 감격스럽습니다. 예전에 중동의 두바이라는 곳에서 국제전화 선을 타고 들리던 아버지의 생애 마지막 목소리가 그랬습니다. 그 목소리는 오랫동안 잊혀 지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도 없는데 갑자기 공간 개념이 무너지거나 확장되어 버리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공간에 사는 것 같지만 결코 공간에 붙박여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사건 혹은 시간에 따라 공간은 확장되거나 축소되는 것이죠. 사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장기조업도 공간과 관련된 문제라기보다는 시간의 문제였고 더불어 심리적인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바다에서 가족과 떨어져서 생활한다는 것이란 그런 안도감으로부터 튕겨져서 늘 ‘낯선 것’들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그래서 아주 ‘순수’해져버리지요. 작은 접속에도 흥분하거나 그런 것들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동해에서의 마치 물결 위를 미끄러지는 것 같은 항해를 생각하면 꿈결 같습니다. 그때 시간은 마치 거꾸로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아직 부산항에 도착하지도 않았지만 오히려 이미 입항하여 아쉬운 입항기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하는 지점이라는 말입니다. 공간화 된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는 않을 테고 아마도 그건 자신의 몸이나 그 ‘몸의 기억’ 속에서 작동하는 살아있는 욕망으로서의 시간일 겁니다. 의식과는 별개로 휘어져 버리는 ‘욕망의 시간’이라고나 할까요. 아니면 제발 더디게 갔으면 하는 진짜 자신이 주관(主管)하고픈 질적(質的)인 시간 같은 것 말이지요.
22) 그리고 다시 북태평양
1990년 가을, 문득 새로운 바다를 경험하고 싶었습니다. 그걸 들뜬 열망이라고 해야 할까요? 밤새도록 깨알 같은 기록을 찾아다니던 어군탐지, 전쟁터를 방불케 했던 공해어장의 자체조업, 시계 제로에 가까웠던 눈보라와 칼끝 같았던 찬바람, 그리고 장기조업, 그 오랜 고독들 그것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나아가려는 바다가 어떤 바다인지는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금보다 더 넓은 기회의 세상이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건 특례 보충역이라는 의무의 굴레를 벗었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새로운 세계로 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건 아마도 여태껏 겪어온 바다와는 완전히 다른 바다일 수도 있을 겁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욕망을 꿈꾸는 것은 제가 그동안 지나치게 과거에 묶여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당시의 모든 것들이 트라우마(trauma, 정신적 외상) 같은 것에 눌려 변형되고, 다시 상징화되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게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국가나 기업으로 상징되는 자본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모두 ‘가난’을 지독한 짐으로 달고 있었던 것이죠. 모두 그걸 벗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건 거대한 민족적 ‘트라우마’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식민지에서 전쟁으로 이어진 그 억압과 잿더미에서 우리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원양어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동체 속에서 통째로 ‘희생적 삶’을 살았던 ‘역사 없는 것들’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우리는 그런 삶을 살았던 그 당시 원양어업의 모든 주역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할 겁니다.
저 역시 수산관련 학교에 들어갔던 것부터 시작해서 가난을 극복해야한다는 ‘소명의식’을 등짐처럼 지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된다는 특례 보충역이 가능한 학과를 택했던 것이고, 그리고는 20대 초반을 통째로 가족과 이별하여 30개월을 인도양, 오만 바다 위에서 생활했던 것까지 그리곤 아버지가 죽고, 전 더욱 더 ‘가장’의 역할을 하라는 사회가 정해준 ‘젠더(gender)적 규정’에 매몰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건 북태평양 어장으로 이어졌습니다. 전 그저 그동안 이 사회가 만들어준 상징으로서 삶만을 살았던 것이죠. 돈을 벌기위해 배를 타고, 항해사 업무를 수행하고, 거대한 자연을 대상으로 그물을 던지고 고기를 잡고 그리고 그게 전부인 것처럼 상징화된 것들에 매달리는 굳어 버린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게 ‘화폐의 욕망’이었을까요, 아니면 화폐의 힘으로 그 상징화된 것을 탈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지금 생각하면 그건 온통 동일성(同一性) 갇힌, 즉 낮은 곳에서 보다 더 높은 곳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건 현실에 대한 일종의 ‘부정적 허무주의’였습니다. 한 번도 자신이 살았던 삶의 비늘들을 다시 만져보거나 냄새 맡아 보지 못한 채 말입니다. 하지만 차이를 생산해 내는 거대한 반복은 멈추질 않았습니다. 오래전 명태를 잡기 위해 북태평양 거친 바다로 나갔던 선배 선원들을 비롯해서 그 모든 사건이 마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좁은 구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이끌려가던 삶의 냄새, 그게 다시 반복되었던 것이죠. 하지만 반복은 그저 옛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늘 새롭게 해석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투망할 때마다 새로운 태양이 뜨고 신선한 아침이 밝아 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전 그저 복잡한 투망질에 매몰되어 그것을 잘 몰랐던 것이죠. 하지만 반복은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이루는 튼튼한 ‘바퀴살’이었습니다. 그게 일순간 탈주의 욕망으로 변형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작은 틈새라도 찾아 기어들어가서 그 균열을 깨고 싶었던 것이죠. 그건 북양어장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을 다시 기억하고 재조직되는 삶의 편집 과정이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직도 왕국을 꿈꾸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지상으로부터 결코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으로 끝내 가겠다는 우상(偶像)으로서의 꿈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상에서 구체적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도, 이해되어서도 안 되는 욕망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그게 바로 구체적인 삶의 운동성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들이지요. 그것들이 억울하기도, 두렵기도, 슬프기도, 지겹기도 또한 즐거운 것이기도 할 겁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미워하질 않을 겁니다. 부정과 긍정적인 것들은 모두 모호한 지대에 엉켜있을 뿐입니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지대, 무수한 탈주가 일어나는 변경(邊境)지대의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어렴풋한 왕국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그곳엔 사람들만 사는 곳이 아닙니다. 빛들의 산란과 함께 제가 그동안 어획해 왔던 온갖 생명들, 명태, 가자미, 대구, 도미, 갈치, 가자미, 갑오징어 그리고 버려졌던 몸뚱아리와 영혼으로서의 잡어(雜魚)들, 바다와 섬들 그런 것들이 한바탕 어울려 극한의 자유를 누리는 왕국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차라리 우주라고 하면 어떨까요. 그것도 무한하게 열려있는 우주 말입니다. 수 십 억년 후 모든 바다가 증발해 버릴 때까지 ‘거대한 기억’으로 서서히 운행하고 있을, 지금의 삶을 있게 하는 ‘바탕적 힘’으로서의 우주 말입니다. 그게 사실은 제가 겪었던 온갖 바다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 저는 지금도 그 ‘역사 없는 것’들이 가슴에 사무치도록 그립습니다. 깊디깊은 3,000미터 두께의 바다, 북태평양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