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사모아- 7 (교민들과의 짧은 추억)
나를 사모아에서 매일 차로 이곳 저곳을 안내하며 편의를 제공했던 이충세(57세) 씨다. 경남 의령이 고향이라 했지만 그는 나처럼 어린 시절 부산에서 자랐다고 했다. 지금의 충무동 자갈치 부근에 집이 있었다고 하니 반가운 고향 동생을 만난 기분이었다. 용두산 언덕에 있었던 부산 기술통신고등학교 전자과를 졸업한 뒤 거제 삼성조선소에 견습사원으로 근무한 경력을 빼곤 줄곧 바다에서 생활했던,그래서 어선의 선장까지 했다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해어지기 전날 호텔에서 단 둘이 맥주를 마시면서 그는 내게 내년 이맘때 꼭 다시 와줄 것을 당부했다. 목소리에 울음이 섞인 걸 느끼며 나는 속으로 그의 앞날에 성공을 빌고 또 빌었다. 그동안 바다를 무대로 해쳐온 그의 삶이 내게 강한 영감을 준 것을 나 또한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1978년 24세때 삼송15호를 타고 이곳에 온 후로 지금껏 살고 있는 박종춘(66세)씨. 현재 고믈상업을 하는 집마당에서 한 컷을 남겼다. 길지않은 그의 선원생활과 사모아에서의 그간 생을 듣고 있노라니 한국 현대사의 굴곡과 음영을 많이 닮았다. 그는 사모아(서 사모아 포함) 원주민 여자 3명으로부터 모두 7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뉴질랜드나 호주 등에 사는 낯선 자녀들이 장성하여 최근 아버지와 이복형제들을 찾아 이곳 사모아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강하다란 원주민의 전통(모계사회)을 직접 확인한 셈이다. 현재 그가 살고 있는 이 땅은 그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었다. 완도가 고향이라면서도 늙어 이제 무슨 낯으로 고향을 찾겠느냐며 말을 잇지 못했디.
사모아를 떠나기 하루 전날 점심을 대접하겠노라 자신의 식당으로 나를 부른 기 병수(73) 사장. 68년도 월남전 참전용사로 미국 땅에 가 살겠다는 일념으로 72년 배를 타고 사모아를 찾았다고 했다. 출항 4개월 만에 선박사고가 나는 바람에 곧장 하선한 뒤 육상생활로 일관해오신 분이다. 76년이후 2000년까지 상어꼬리 장사를 했다는데 사모아에 양륙되는 상어꼬리 75%를 소화했다고 하니 대단한 사업이었다. 한 달에 백만 불의 미화를 현금으로 주물렀다는 말씀이다. 사업이 번창하자 형제들을 불러들여 일을 나누어 맡기고 본인은 선구점,한국 역수출 무역(전자제품),선물가게 등을 운영하며 꽤나 열심히 살았다고 한다. 현 식당건물은 거금 2백만불을 들여 볼링장과 연계한 스포츠센터로 지었다가 이용가치가 줄자 일부시설을 개조 식당업을 하고 있었다. 이 건물이 앉은 땅은 임대한 것이어서 지상건물은 후일 정부에 기부할 생각이라고 했다. 부인도 한국분이고 자식들도 다 미국유학 등으로 미국에 근거를 두고 있어 어쩌면 남부러울 것이 없는 해외교포 중 한 분이셨다.
우영희(81세) 씨는 충청도 천안분이셨다. 1970년 원협을 통해 스타키스트 공장의 선박수리공작소 직원으로 이 땅을 밟은 분이었다. 이후 살면서 원주민 여자와 결혼했고 자체 수리공장을 설립하여 운영하기에 이르렀으며 85년도부터 미국 건착선들의 수리를 도맡았다고 한다. 한국인으로 외국에서 성공한 인물열전에 소개되었다고 하니 그의 삶이 얼마나 건실하였는가는 더 물어볼 것이 없었다. 그는 아직도 그의 동생과 함께 수리공작소를 운영하는 현역이었다. 올해 46세인 큰 딸이 미국에서 돌아와 곁에 있고 딸 하나 아들 하나는 아직 미국에 살고 있다고 한다.
사모아 여자와 결혼하여 영주권을 얻어 미국으로 간 뒤 사모아 부인을 걷어 찬 사람 수십 명을 기억한다며, 그는 이곳 원주민들 또한 가난한 나라에서 온 천박한 한국인(Ugly Korean)들을 아직 잊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령 사모아는 국적(FLag)은 미국이지만, 주민들은 미국 시민(Citizen)이 아니다. 사모아 영주권을 얻으면 미국의 여권을 사용할 따름이고 미국내 비자취득에 편의를 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