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루나 김
레닌과 트로츠키가 소비에트라 이름 지은 공산당 일당독재는 70여 년 만에 그 막을 내리고 말았다. 국제공산당 그룹의 열렬한 이상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가 일찍이 소비에트 인민의 삶을 형해화(形骸化)한 삶이라고 예견했듯이, 극동의 도시 블라디보스톡의 낡고 허름한 풍경 또한 마치 해골을 대하듯 언제나 음산했던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5월 초였다. 호텔에서 바닷가 서쪽 언덕 위에 있는 아파트로 숙소를 옮겼다. 방이 두 개고 2평쯤 되는 거실과 주방이 있어 혼자 쓰기엔 넉넉한 공간이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끝자락에 사무실이 있어 아침마다 바다를 보며 출근하는 기분이 근사했다. 아침이면 언덕을 내려가 해변을 산책하고 해안절벽에 기대 지은 아무르 호텔 앞의 헬기장에서 열 바퀴쯤 달리기로 몸을 풀었다. 똥을 누이느라고 아파트에서 끌고나온 크고 늘씬한 사냥개들만 아니면 그런 아침시간이 정말 기가 막히게 즐거웠다. 월세 300 불이 집주인에겐 엄청 큰돈이었지만 호텔 숙박비에 비하면 거저인 셈이었다.
오후 다섯 시에 퇴근을 해도 고위도의 하늘엔 해가 서쪽으로 조금 비켜 가 있을 뿐 저녁이 되려면 하도 감감하여 다시 해변을 서성이기 일쑤였다. 낮이 길어질수록 남는 시간에 따챠(개인 텃밭)에 가 일하라며 시골이나 도시나 퇴근시간이 다 그랬다. 해변에 산책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도, 벤치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하는 일도 날이 갈수록 따분해졌다. 파트너를 찾아 호텔로비를 서성이던 놔리샤도 타냐도 볼 수 없는, 밤이면 썰렁한 집에서 혼자 시간을 죽이는 일이 점점 고역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어느 날 문득, 장오는 러시아어 여자 과외선생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난 1월에 만난 C 사장의 속초고 후배인 P군은 한 시간 레슨에 500 루불을 준다고 했다, 지난해 2월의 환율이 1불에 125 루불이었으나 일 년 만에 570 루불로 바뀌어 있었다. 금년 2월의 이발값이 600 루불이었다. 시시각각 인플레이션이 상승그래프를 그리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모여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진압경찰과 충돌하여 많은 중경상자가 발생했다고 들었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져 날이 풀리자마자 광장으로 쏟아져 나와 세상을 예전처럼 돌려놓으라고 아우성을 친 것이었다.
한국의 일류 원양회사인 D산업이 지주회사고 장오의 회사가 소액주주로 참여한 Rosskor 사무실은 동쪽해안가를 바라보는 레닌가에 있었다. 그 회사의 영어통역관인 모나코프를 앞장세워 장오는 레닌광장에서 가까운 어느 초등학교를 방문했다. 5월의 어느 목요일이었다. 예상 밖으로 모나코프가 데리고 나온 여선생은 젊은 조선족 여자였다.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고 했다. 참하게 생긴 얼굴에 키도 큰 편이었고 마음씨도 순박하게 느껴졌다. 한국말을 못하는 게 조금 아쉬웠지만 선 자리에서 월 100 불을 주기로 하고 가정교사로 쓰기로 결정했다. 그녀의 이름은 일루나였다.
금요일에는 아침부터 하늘이 흐리다가 오후에 비를 조금 뿌렸다. 저녁에 우산을 손에 든 일루나가 처음으로 집에 왔기로 학습방법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의 영어가 한국의 여느 고등학생 수준 정도여서 앞으로의 학습이 수월치 않을 것이라 짐작했으나 애초에 심심하여 외로움이나 달래자고 시작한 일이어서 크게 괘념치 않았다. 젊은 여자와 낮은 응접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았더니 몸이 따스해졌고 머리에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장오의 캘리포니아식 발음이 귀에 익지 않은 그녀가 가끔씩 말귀를 알아듣지 못해 얼굴을 붉혔는데 그녀의 볼에 물든 홍조가 마치 잘 익은 복숭아 빛깔 같아서 그 때마다 그는 가슴이 저릴 지경이었다.
일루나는 스물 두 살의 앳된 나이였다. 러시아어 첫 수업은 장오가 묻고 그녀가 대답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외국어를 쉽게 배우려면 현지 여자와 살림을 차리는 것이 첩경이었다. 그래서 언감생심 처음부터 그는 그녀를 아파트에 눌러 앉히고 싶은 엉큼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칠 때마다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인지 그녀는 자주 앉음새를 고치거나 옷깃을 여미곤 했다.
" 쟈-는 '위하여'란 말인데 '쟈 즈다로비야!' 는 건강을 위하여, 행운을 빈다는 말은 '쟈 우다쵸!' 성공을 기원한다는 말은 '쟈 웃떼흐!'라고 하지요."
술자리에서의 건배사를 물으니 그녀가 손에 밤알을 쥐어주듯 또박또박 가르쳐준 말이었다.
일주일이 후딱 지나갔다. 토요일 오후엔 그녀가 사촌여동생이라는 '나탈리아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나탈리아는 러시아에선 혼기가 찬 열여덟 살이었다. 우스리스크 대학에서 한국인 목사로부터 한국말을 배운지 7개월짼데 한국말을 해보고 싶어 저희 언니를 졸라 함께 왔다는 얘기였다. 아- 이 두 여자와 이 아파트에서 함께 먹고 자면 얼마나 좋을까. 다만 한 달만이라도 말이다. 부질없이 그렇게 자꾸 김치국을 마셨다. 그는 일루나에게 5천 루불을 주며 토요일이니 자매간에 쇼핑이라도 하라고 선심을 썼다. (잘만 보이면 그보다 더 큰 선물도 줄 수 있어. ) 사람을 얕잡아 보는 짐승 같은 교만이 마음속에서 제 멋대로 일렁거렸다.
다음날인 일요일 오전에는 그녀가 나탈리아 말고도 두 돐이 지난 '뺘샤'라는 아들까지 보듬고 왔다. 아이 아버지는 빠띠쟌스크에 사는 사람인데 헤어진 지 오래라 했다. 그 말끝에 다음 일요일엔 그녀가 아예 살림살이를 몽땅 챙겨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한가한 시간이면 무얼 하세요?"
나탈리아가 벌써 네 번째 던지는 질문이었다. 대답하기가 민망하여 웃기만 했는데 그녀의 호기심이 집요했다.
" 책을 읽거나 바닷가에서 산책하고... 그래도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오. 나탈리아가 곁에서 말동무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나탈리아가 먼저 웃고 그 말을 러시아말로 전해들은 일루나가 뒤따라 웃고, 자매간에 함께 깔깔대며 또 웃었다. 여자들이 낯선 남자에게 품은직한 야릇한 감정이 그들의 웃음 속에 묻어있었다. 마흔 살 먹은 홀아비였던 그는 짐짓 민망했다. 라면을 끓여 점심을 대접하고 바닷가로 내려가 함께 산책을 한 후 그녀들과 헤어졌다.
6월 두 째 주엔 에드워드라는 수산부 직원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사회간접시설에 대한 투자가 수십 년째 멈춰버린 듯 도시의 도로는 곳곳에 아스팔트가 벗겨져 울퉁불퉁했다.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의 운전은 위험했다. 공항으로 난 도로에선 툭하면 추돌사고가 났으며, 한 번은 차창으로 튕겨져 나온 여자가 길가에 숨진 채 누워있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그 무렵 장오는 한국 D수산의 주재원으로 파견된 대학 후배를 만나 그와 함께 아무르 호텔의 카지노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처음 해보는 카드놀음에 슬슬 빠져들고 있었다. 가로수의 잎들은 하루가 다르게 녹음이 짙어지고 언덕 아래에 누운 바다의 물빛은 눈부신 햇살을 머금은 채 명징한 남색으로 점점 바뀌어져 갔다.
어느덧 6월도 하순에 접어들고 있었다. 하루는 일루나가 입을 딸막거리더니 마지못해 꺼낸 얘기가 이랬다. 다음 주 7월부터 우스리스크의 단과대학에서 한 달간 영어회화반 개강이 있다. 거기에 꼭 다녔으면 한다. 그러자면 한 달 동안은 일요일만 과외가 가능하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일루나와 단둘이 마주앉는 일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다 싶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 만나야 한다니 괜한 외로움이 앞섰다. 카지노 출입이 한가한 시간을 때우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었으나 일루나와 매일 만나는 즐거움은 또 다른 재미였던 것이다. 그래도 젊은 여자가 공부를 하겠다고 저리 열심인데 싶어 월급은 똑같이 쳐줄 테니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북한과의 무역업무를 담당하던 K가 그예 회사를 그만 두었다. 해양대학을 나와 상선을 한 십 년 탄 모양이었으나 사업을 하다 부도를 낸 아버지 탓으로 마흔이 넘어서도 돈을 모을 수 없었다고 했다. 호주에 이민을 간 것은 70년대에 이미 자발적인 이민을 선도한 해양대 출신들의 개척정신에 힘입은 바 컸으나, 장사로 독립할 만한 재력도 없어 아내와 두 딸을 호주에 남겨둔 채 어언 십 년 가까이 해외를 떠돌고 있었다.
북한을 다녀온 그는 결국 북한과의 상업적 거래를 포기하고 말았다. 가져올 상품도 마땅치 않았고 설사 거래가 성사되어도 상품하자로 클레임이 생기면 뒷감당이 안 되는 것이 북한과의 거래였다. 년 전에 북한이 건설공사 노임조로 러시아로부터 받은 명태를 일본상사를 통해 중국에 실어 보냈다가 품질하자로 십만 불 가량의 클레임이 발생했는데 일본상사에겐 꼼짝없이 물어주고 북한에겐 여직 한 푼도 받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도 북한출장이 클레임청산이었던 모양인데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사장에게 면목도 없고 해서 이점 저점 보따리를 싼 것이었다.
러시아에서 장오가 맡은 일도 시간이 흐를수록 제목과 내용이 애매해져 갔다. 모든 실권은 한국에서 행사했고 이곳의 투자내용은 현금이 투입되지 않은 그야말로 입으로 해 먹는 일과 같아서 결실을 맺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일이 없으니 머리가 또한 늘 허전했다. 그러므로 하루하루 시간을 죽이는 일이 힘겨워지고 마음은 또 들개처럼 황폐해져 갔다.
그러나 한편, 날씨가 따뜻해지니 마음과 달리 몸의 생물학적 기능은 활기가 돋아났다. 저녁 시간에 일루나와 마주앉아 공부를 하노라면 머리에선 늘 아지랑이가 스멀거렸다.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그녀에 대해 그가 남자로서 얼마나 인내할 수 있을지 그게 의문이었던 것이다. 해외출장 중에도 자신의 체질이 아니라며 극구 사양해왔던 카지노 출입을 최근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일루나가 채 한 달도 안 되어 가정교사 일을 관둘 것같이 말을 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며칠 전이었다. 그녀와 함께 스파게티 면으로 저녁을 때운 후 잠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키(167 센티)와 몸무게(60키로)를 묻다가 장오는 뜬금없이 그녀에게 키쓰를 청했다. 이런 일은 영화처럼 말이 나온 김에 해치워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어리둥절해 하는 그녀를 냅다 껴안으며 입술을 훔쳤지만 일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곧 정신을 수습한 그녀가 그의 몸을 밀어내며 멀찍이 물러났던 것이다.
" You are ... How do you think of me?(당신... 당신 나를 뭘로 보세요?) "
당신은 신사가 아니야, 당신은 짐승이야 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그랬다. 모국어를 쓸 수 없는 벙어리 같은 외로움이, 6월의 나른한 대기가 결국 그를 짐승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 A good and nice woman, you are. I feel, you're different from street woman. If it is hard for you to accept me, forget and excuse me of tonight . ( 멋지고 좋은 여자라고 생각해요. 거리에서 흔히 보는 여자완 달라요. 나의 무례를 받아들이기 어려우면 용서하고 잊어줘요.) "
그러나 그 날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말을 남긴 채 아파트를 떠났다.
" Take a time! "
다음 날 아파트를 찾아 온 그녀의 옷매무새는 보다 단정했으며 어제의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말과 행동에서 역력했다. 그녀가 러시아인이었다면 결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그녀와의 나이 차이가 그녀의 욕망을 제어했을 것이다. 멀리 발해국의 후손이었거나 또는 조선시대에 흘러들었을 법한 고려인의 예의범절이 피 속에 머무른 탓일 것이다. 아무튼 그는 욕망에 굶주린 한 마리 들개였다. 태백산맥과 남부군과 소설 동의보감을 다 읽고 구약성경의 이사야 편을 읽는 중이었어도 모국어를 하지 못하는 고립무원의 이방인으로서 그의 정서는 이미 자취하는 음식만큼이나 꺼칠하게 메말라져 있었던 것이다. '욕망은 과육인 사랑에 의해 감싸여 있다. 그러나 과육은 씨앗만큼 오래 가지 않는다 . 어떨 때는 사랑이 욕망보다 훨씬 허약한 법이다.' 사랑과 섹스에 관한 소설의 서평에 남긴 누군가의 글귀가 문득 떠올라 머리에 맴돌기도 했다.
어제 그녀가 집을 나서면서 남긴 말을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시간을 가지면서 당신이 한 짓을 생각해 봐요. 아니면, 오늘 공부는 틀렸으니 그냥 쉬세요. 그게 아니면, 시간을 갖고 서로 생각해 보아요. 내게 시간을 좀 주세요. 그 중에 정작 어느 것이 그녀의 진심이었는지 모호했다. 여자에게 거절당하는 것이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처음엔 수치심을 느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장오는 스스로 경솔했다는 뉘우침이 왔다. 거듭되는 후회와 자책감은 여자를 의식적으로 탐하지 않는다는 스스로의 원칙을 망각한 대가였다. 어느 경우든 그는 여자가 제절로 마음과 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어쩌다 돈을 주고 허기진 욕망을 채울 때에도 그는 늘 긴 밤을 택했던 것이다.
비록 아이가 딸렸어도 일루나는 아직 앞날이 창창한 나이였다. 장오는 자신의 욕망을 뿌리치며 당장 다음 주부터 한 달을 쉬자고 했다. 학비에 보태라고 7월분 급료로 100 불을 준 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그가 말했다.
" 영어회화공부 열심히 해요. 나도 7월엔 식구들을 보러 한국에 다녀올까 해요. 갖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말해요. "
100 불을 거저 얻은 그녀가 황송한 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가 선물 이야기에 얼굴을 바로 하며 겨우 입을 떼었다.
" 워커맨이 있으면 영어공부에 좋은데...전에부터 얇은 가죽코트가 입고 싶었어요. 그런데 정말로 사주실거예요? "
그 순간 환한 표정으로 웃던 그녀의 모습이 눈부시도록 귀엽고 아름다웠다.
휴가 차 서울에서 여름을 보내고 장오가 블라디보스톡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8월 중순이었다. 귀임하는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K를 만났다. 그는 이미 러시아 직원 두 명을 데리고 장사를 하는 사장이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오렌지 쥬스나 초코파이 등을 컨테이너로 들여와 블라디보스톡과 우스리스크, 빠띠쟌스크 등지로 팔러 다닌다고 했다. 초콜렛을 좋아하는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초코파이는 러시아에선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좋아했고 변변한 음료수가 없는 극동지방에선 여름 날 오렌지 쥬스는 날개돋힌 듯 팔렸다. 봄에는 두 배 장사였는데 너도나도 덤벼드는 일이라 지금은 마진이 30프로가 조금 넘는다고 했다. 러시아의 보따리장사꾼들은 은행에서 년리 130프로의 대출을 얻어 한국상품들을 실어 날랐는데 마진이 100프로 장사일 때는 두 달에 30프로 가까운 이자를 줘도 수지가 맞았던 것이다. 집도 따챠도 모두 국유인 시절, 담보를 제공할 수 없었던 시민들에게 높은 금리는 당연해 보였고 또 한편으론 물가앙등으로 인한 높은 인플레이션도 감안된 것이었다.
장오 또한 회사근무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당장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일 년이라도 기한을 채우는 것이 사장에 대한 도리라 생각했고, 자립을 하더라도 러시아를 무대로 장차 뭔가 할 만한 일을 찾아보고 싶었다.
오래 비워둔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데 웬 편지봉투가 발에 걸렸다. 아- 일루나가 두고 갔구나. 8월 초에 오리라 하고 아마 몇 번 찾아왔다가 허탕을 친 모양이야. 급한 마음에 장오는 짐도 부리지 않고 봉투부터 뜯어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 만나서 말씀드려야 하는데...아직 돌아오지 않았군요. 오래 전부터 많이 생각했는데 당신에게 좋은 선생이 될 자신이 없어 늘 죄송했어요. 영어로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일이 제겐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가정교습을 그만 두렵니다. 용서하세요. 일루나 김.
추신: 요즘 한국인들이 사는 아파트에 마피아들이 습격해서 돈이나 물건들을 자주 털어간다고 합니다. 부디 몸조심 하시고 건강하세요.
편지를 다 읽고 나니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설 마음이 차마 생기지 않았다. 선물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며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짓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그는 회한에 젖어 가슴을 쳤다. 그녀에게 주려고 동대문 시장에서 구한 가죽재킷과 그녀의 아들 빠샤를 위한 장난감 총과 용산의 전자상가에서 산 워커맨은 그 해 12월까지 아파트 한 구석에 처박혀 오지 않는 주인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짐꾸러미를 볼 때마다 레닌광장 근처의 초등학교를 찾아 가려고 몇 번이나 마음을 들썩거렸지만 종당엔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일루나에 대한 미련을 버린 이유는 딱 하나, 그가 러시아에 계속 머물 것이란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註) 발해국의 땅: 러시아의 극동인 연해주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모두 그 옛날 대조영이 세운 발해국의 영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