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몽(Jamon)을 찾아서-3
하몽 접시가 일착으로 나왔다. 작은 종기에 담긴 것은 올리브 열매다. 엷게 썰인 것이 마치 붉게 물들인 대패밥같다. 포도주를 한 모금 삼킨 후 하몽 살점을 입으로 가져간다. 혀끝에 감도는 그 맛이 과연 일품이다. 스페인 사람들이 저녁 식전에 먹는다는 포도주 안주답게 생김새처럼 맛도 경쾌하다. 짜지않고 심심하면서 간간하다. 그래서 포도주와의 궁합이 가히 환상적이다. 포도주가 싫다며 수제 생맥주를 택한 K군이 예술감각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내가 상상했던 훈제건조품의 맛과는 사뭇 다르다. 도토리만 먹인 흑돼지란 말을 들은 K군이 살점에서 도토리 냄새가 난다고는 했지만 후각이 둔한 나는 글쎄였다.
접시가 비어가는 동안 나는 15세기의 대항해 시대를 떠올렸다. 말린 염장돼지고기를 실은 캐리컷 범선과 밤이면 별을 헤던 선원들과 일렁이며 춤추던 대양의 물결을 생각했다. 30여 년전 방문했던, 스페인 마드리드의 카페식 하몽식당과 아르헨티나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비뇨 데 까사(집포도주)' 선술집과 천장에 주렁 주렁 걸려있던 돼지뒷다리들도 추억했다.
해가 저물고 하몽접시가 비어가고 예상한대로 실내는 한적했다. 허기를 채운답시고 이태리식 치킨요리까지 등장한다. 특별손님을 위해 오늘 매상은 자기 책임이라던 K군의 생맥주는 불과 6잔짼데, 포도주 한 병을 비운 나는 아직도 부족하다.
그러나,깔끔하면서도 입안에 여운이 감도는 요리를 선사한 주인장에게 포도주 한 잔을 권하는 것은 손님의 예의였다.
내 소설의 주인공 일수(溢壽)는 미지의 세계와 인간의 삶에 대한 지적호기심이 왕성하고 광범위한 청년이라고 내가 말하자, 그 이름을 빌려준 K군이 대포쏘듯 내게 말했다. 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갑자기 발작하듯 내 입에서 웃음이 폭발했다. 그 순간부터 누가 말릴 겨를도 없이 3류작가와 주인공의 술자리가 되고 말았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잊고 두 사람은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들었다. 오랫만에 참 오랫만에 가져본 유쾌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