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秋菊有情
알라스카김
2008. 9. 24. 13:19
아침저녁으로 마당을 점령한 꽃들을 보노라면 마음에 측은지심이 격동한다. 꽃봉우리의 가장자리가 이제 마악 트실해지기 시작한 것은 국화무리이고 절반쯤 개화한 것은 금잔화이다.밑둥부터 가지가 기굴한 분꽃은 진즉부터 피고지기를 거듭하고 있다.집 뒤란의 손바닥만한 텃밭에서는 상추,쑥갓,정구지 등이 사라진 뒤로 노란꽃을 주렁주렁 단 달맞이꽃이 지금 한창 왕자행세를 하고 있다. 올 여름에 아내가 수세미를 키우지 않아 잠시 소연했던 꽃밭에서 이 가을에 제 세상인양 약동하는 이 식물들에 대해 새삼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다름아닌 재개발사업때문이다.건축허가심의가 끝나는대로 이르면 내년 삼월쯤에 집이 철거되므로 한 삼년 가량은 남의 집 신세를 져야할 형편인데,이 꽃나무들을 식솔처럼 함께 데려갈 수 없는 것이 애석하고 그러므로 미구에 모두 죽어 사라질 목숨들이 가련한 때문이다. 생각다 못해 요즈음 나는 은밀한 잔치를 준비하고 있다. 국화꽃이 만발한 어느 날을 택해 나는 내 손각락 수만큼의 정인情人들을 초대할 것이다.아내가 동의한다면 미리 맛있는 김치를 담그게 하고,그날은 펄펄 끓는 물에 팥칼국수를 삶게 할 것이다.다만 나는 그 날 손님들의 선한 눈을 빌려 올해를 끝으로 이 세상을 하직할 이 꽃나무들의 영혼을 위로하려 함이다. 그리고 손님들을 맞이하는 맨 앞자리에,내 누님같은 국화꽃을 앉히려 한다. 국화는 여러 꽃 가운데 빼어난 점이 네 가지 있다. 늦게야 꽃을 피우는 것이 한 가지이고,오래도록 견디는 것이 한 가지이며,향기로운 것이 한 가지이고,어여쁘지만 요염하지 않고 깨끗하지만 차갑지 않은 것이 한 가지이다. 세상에서 국화를 사랑하면서 스스로 국화의 운치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이 네가지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는다.나는 이 네가지 외에 또 다만 등불앞의 그림자를 꼽는다-정약용의 국영시서菊影詩序 중에서. 국화를 두고,그립고 머언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고 절창한 미당未堂이나, 선선한 가을밤 하늘거리는 등잔불에 대고 국화의 그림자로 벽에다 수묵화를 그리며 완상하던 다산茶山의 눈은 아-얼마나 심미로운가.그러므로 그날이 오면... 나는 한 묶음 국화꽃을 꺽고 등불을 마련하여 선인들의 풍류를 따라하련다. 나의 정인들이여, 기별이 닿거든 그냥 선걸음에 한번 다녀가시게나. |
2006.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