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이름을 불러주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내가 처음 산에 오를 때는 산 정상에 오르는 일에만 전념했다.차츰 산행에 익숙해지면서는 산이 품고있는 숲과 개울과,등하산길에 만나는 바위와 나무들과 그 나무들에 깃든 새소리들을 감상하게 되었다.요즈음은 숲 속에 피어있는 야생화들을 유심히 살피며 걷고 있다.얼마 전 다녀온 지리산 천왕봉을 생각하면 장터목 근처에 자라는 틀메나무(물푸레나무과)와 제석봉 근처를 지나며 만난 사스레나무(자작나무과)와 시닥나무(단풍과)가 먼저 떠오른다.이 나무들을 기억하며 지금도 그들을 그리워 하는 것은 그 나무들의 목에 제 각각 이름표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 시골을 떠나 도회지생활을 오래한지라 산에 오르면 고작 단풍나무와 소나무만 알아봤지 나머지 활엽수나 관목들은 언제나 생면부지의 대상이었다.주위 사람들에게 그런 나무의 이름을 물어보면 제대로 그 이름을 기르쳐 주는 사람이 드물었다.자태가 좋고 아름다운 꽃잎을 피운 나무라도 만나면 그 이름을 몰라 혼자 끙끙, 한 며칠을 애를 태우다가 그만 잊어버리기 예사였다.나의 눈에 띈 그것들은 그 순간 하나의 몸짓이었지만 ,내가 그 이름을 모르는 한은,그래서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내겐 아무런 의미나 존재가 되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산이나 들에 핀 야생화들을 유심히 살피게 된 요즘에도 이름을 몰라 쩔쩔매는 일이 다반사다.손에 식물도감이라도 들고 다녀야지 하면서도 사람이 변변치 못해 여직 미련한 짓을 되풀이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와중에 등산소그룹 산행에서 찍은 꽃사진을 보고 무턱대고 금낭화라고 아는 체를 했는 가 하면, 금정산 파리봉에 올랐을 때 '솔파 파미'의 네박자 음정으로 지겹게 울어대던 새를 '파리 琶璃새라 명명한 우를 범하기도 했다. 아기 손가락만한 노란 꽃을 좌우로 주렁주렁 매달고 있던 그 꽃나무의 이름이 '산괴불 주머니'이며, 음색이 퉁소처럼 삽상하면서도 그 음량이 마치 테너색스폰 소리처럼 굵고 부드럽던 그 새가 다름아닌 "검은등 뻐꾸기 '였음을 안 것은 극히 최근이다.그 이름이 하도 궁금해서 ,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 인터넷과 여기저기 서점을 찾아 다니며 알아냈던 것이다. 아내는 이런 나를 마치 결백증이나 편집증환자로 치부하지만 무릇 자연에 대하여 그렇게 무심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오히려 나는 나보다 더 심각한 환자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읽은 '산에서 살다'(최성현 지음)란 책은 이런 나를 산에 가 살라고 와장창 부추겼다.그 사람의 자연에 대한 사랑과 자연과의 조화로움에서 이끌어 낸 삶의 성찰들이 부럽기도 하였지만 정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가 집 근처 또는 산속에 지천으로 자라는 식물들의 이름들을 죄 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노루쟁이,별꽃,노루오줌,방가지똥,청가시덩굴,도깨비바늘,미나리아재비,주름조개풀,벼룩나물,여뀌,쥐오줌풀...불러줄 이름들이 있는 각각의 식물들과 벗하며 살아가는 그는 결코 외로운 산지기가 아니었다.태고의 원시인들처럼(전하는 설화에 의하면 그들은 동식물들과 대화를 하며 살았다고 한다), 낮이나 밤이나 그들과 더불어 숨쉬고 대화하며 산다는 것이 나를 와장창 부럽게 만든 것이었다.
이처럼 눈으로 만나는 대상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불러주는 일의 참된 기쁨이 어디 동식물에만 국한된 일이겠는가.
2006.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