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왜 사랑인가?

알라스카김 2009. 2. 12. 21:10

  2년 전 이맘때 장가든 큰 아들이 지난 12월 첫 아이를 낳았다. 산부인과에 다니면서 늘 초음파 사진으로 태아의 건강을 살핀다더니 임신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아 의사가 딱 부러지게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다만 “아이가 엄마를 닮았네요.”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온 식구들이 여아라는 사실을 미리 알아 버린 터라 출산일이 가까워질수록 아이의 이름을 짓자는 얘기가 외가와 친가 쪽에서 무성하였다. 그리고 작명의 임무는 자연 할아버지인 나의 몫으로 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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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리학과 이에서 비롯된 사주로 푸는 운명론을 나는 일찍부터 믿지 않았다. 동양사상의 진수라고 하는 주역사상이 천지만물의 생성과 소멸을 음양의 괘(卦)로 푸는 원리는 대단하다 여기지만 그렇다고, 사주로 보는 운명론을 근거로 사람의 운명을 작명 등 인위적인 수단을 통해 피해가거나 보완한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자들의 소치로 치부하고 살았다.

 

  나의 아명(兒名)이 용만(用萬)이었다. 멸치어장 하는 부잣집에 탁발하러온 중이 언감생심 지어준 이름인데 예나 지금이나 심심한 중들이 재주부린답시고 산중에서 사주니 역학이니 하는 책을 읽고선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사술을 부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하나님을 알기 전인 소싯적에는 그 스님의 백을 믿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호기심을 남발했었는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룬 것 없는 어중잽일 뿐이다. 호적에 올려 진 이름 또한 부상(富祥)이라, 부요하고 상서롭다는 이름인데 작명가가 엉터리였는지 지금껏 영험이 없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손수 지어준 이름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부끄러운 이름인 것이다.

 

  폐일언하고 나는 사랑스런 손녀 이름을 ‘사랑’이라 지었다. 여자가 귀한 집안이라 손녀라도 손자 이상으로 기쁜 선물인데 이 손녀와 장차 아롱다롱 쌓아갈 추억들을 생각하니 너무 감사하고 행복했다. 서울에 사는 둘째 아들이 삼촌행세를 한답시고 왜 사랑이라 지었느냐며 불만이었다. 한글로 ‘한빛’이라는 이름이 여자이름 같다며 초등학생때 개명(改名)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했던 녀석이다. 그놈 왈, 이번에는 무슨 애완견 이름 같다는 변이었다. 몇 달 동안 하나님께 기도한 끝에,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당사자나 매순간 사랑이 넘치는 은혜가 되느니라... 그렇게 응답받은 이름이 아니던가.

 

  나의 이러한 애잔한 마음을 이해하여 아이 부모는 물론이고 하나님의 충성된 종인 외갓집 어른들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고 하는데 고집불통인 ‘사랑’이 삼촌만 아직까지 동의서를 써주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