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茶山草堂)
11월의 중순 . 가을이 겨울로 바뀌는가 ,바람이 쌀쌀하다.
더 추워지기 전에 옛 선비의 극진한 정신을 만나러 길을 떠난다.
강진군 도남면 만덕리에 있는 다산 기념박물관을 둘러본 뒤 만덕산 기슭에 있는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빈 가지에 매달린 감이 까치밥으론 너무 과하다.
초당으로 오르는 오솔길 입구. 수북히 쌓인 은행낙엽이 만추의 우수를 자아낸다. 포장된 도로 주위로 늘어선 기와집들은 주막을 흉내낸 식당이거나 한옥체험관 같은 민박시설인데, 지방자치단체의 무분별한 투자의 전형이다. 그나마 목민심서 해설서 등 다산의 유작들을 파는 간이서점이 있어 반가웠다. 손학규 선생이 목민심서를 흉내내어 지었다는 '강진일기'가 한 자리에 놓여 있었지만 사고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산 기념관에서 읽은 문구가 그런 나를 나무라는 것만 같다.
讀書是人間第一件淸事(독서야말로 인간이 해야할 첫번째 깨끗한 일이다).
정호승 시인이 다녀간 뒤로 명명된 뿌리의 길이다.
옛 어른이 남긴 그 정신이 나무의 뿌리로 드러나 다녀가는 후인(後人)들에게 깨우침을 준다는 의미로 길 이름은 아름답다. 그러나 시인의 노래는 그런 준열함과는 거리가 멀다.
고귀한 '조상의 얼'이 왜 뿔뿔이 흩어져 유물이나 유적으로만 남아 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다성(茶聖) 으로 불리는 초의선사와 함께 다산의 제자로 불리는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이 걸린 초당에 이르렀다.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된 1801년에는 사의재(四宜齋)에 머물다 ,1808년 윤규로의 산장인 이 초당에 이르러 해배될 때까지 10년을 머문 곳이다. 초당의 좌우 두 채의(동암.서암) 건물은 다산과 제자들의 숙소였다고 전한다. 주막집 별채 토방에서 스스로 경계한 사의란 맑은 생각(思)과 엄숙한 용모(貌),과묵한 말씨(言),신중한 행동(動)이었다.
“사서(四書)로 나의 몸을 세우고 육경으로 나의 지식을 넓힌 뒤, 여러 가지 역사서로 고금의 변천에 달통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해 수기(修己)가 먼저고 치인(治人)은 그 다음인 것이다."
툇마루 아래 걸터앉아 잠시..., 제자들에게 학문의 순서로 선경후사(先經後史)를 이르시던 옛 어른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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