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꽃섬과 브라자섬

알라스카김 2018. 6. 25. 12:32


 

6월6일 현충일. 자동차를 전남 보성군 조성면으로 움직였다. 고흥군 녹동항 인근의 꽃섬에 산다는 어느 시인을 만나러 가고 싶었던 것이다. 시인은 꽃섬의 전력을 책임지는 한전사업소 소장이기도 했는데 소설 南島의 작가 정형남 선생님이 언젠가 바다를 마당삼아 세월을 낚는 그를 자랑삼아 소개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손님이 있어 오후 2시가 넘어야 시간이 난다기에 , 나는 정형남 샘과 보성의 은자 두 명(김형진과 그의 친구), 나의 수행비서(?) C군 이렇게 다섯 명이 일행이 되어 먹거리를 장만코자 먼저  녹동항 어판장을 찾았다.   그리고 나서  곧장 달려간 곳이  익금 해수욕장이었다.



 익금해수욕장은 고흥군과 연육교로 이어지는 거금도(일명 금산)에 있었다. 은빛 모래가 뽀오얀 사장이 무려 2.5키로미터에 달했다. 이른 여름이라 누가 알몸이 되어 바닷물에 뛰어든다 한들 쉽사리 사람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사위가 고요했다. 대학시절 학교 실습선을 타고 홍도에 들렀다가 단체 알몸으로 수영했던 추억이 머리속에서 자꾸만 꿈틀거렸다. 정형남 샘은 이젠 당일치기 유람에 빠꼼이가 다 되셨다. 생선회에 끼어준 매운탕거리를 생각하며 미리 녹동 저자거리에서 가스불판에 양념에 라면까지 챙겨온 것이었다. 큰 바다를 본 자 웬만한 물고랑의 격류에는  눈도 깜작하지 않는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닌 것이, 샘의 나이가 벌써 올해 일흔 두 살이었다.




 익금해수욕장에서의 짧은 사행(巳行)을 마치고 꽃섬 시인을  찾아 녹동항의 선착장에 이르렀다. FRP로 만든 가벼운 보트다. 규정에는 3인 이상의 선객을 싣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바다가 낯선 C가 선뜻 배에 오르기를 주저했다. 꽃섬의 시인은 정원초과인데도 배에 시동을 걸었다. 그는 이웃 선착장으로 이동하더니 생각도 못한  갑오징어 횟감 한 상자를 배에 실었다. 자, 이제 선장과 통성명을 할 차례다. 일견 40 중반인 선 준규씨. 조상의 뿌리가  이곳  전라도였다. 아내는 인근 군 소재지 공무원이라 주말부부로 알콩달콩 산다고 했다. 강진에 유배와 살았던 다산(茶山) 정 약용 어른을 생각하면 지금,시인은 별천지인 꽃섬의  촌장인 셈이다.


  

  시인은 일행을 꽃섬의 지척에 놓인 브라자섬에 부렸다. 물이 더 빠지면 돌기한 바위섬 좌우로 브래지어 끈처럼 모래언덕이 드러난다고 해서 브라자섬이라 부른단다. 나는 이 조각섬의 명명자가 부디 시인이었기를 바랐다. 시인의 감성이 아니고서야 감히 누가 그런 발상을 했겠는가 말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시(詩文) 보다는 경(經)을 더 존숭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詩는 일반 백성들이  산천경개를 희롱하면서부터 풍류의 한 대목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봐야겠다.  브라자섬에 앉아 샘과 술잔을 기울이노니  나도 일행 모두 오늘은 시인이 된 기분이었다.




 잠시후 오를 꽃섬의 그늘에 배를 쉬고 바다의 미동에 몸을 맡긴다. 일행을 싣고 나르는 일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시인(캪에 뿔테 안경을 쓴 이)도 사주경계를 선객에게 맡긴 채  잠시 자리에 앉았다. 그에게 오늘 술잔을 권할 수 없어 안타깝다.  주야장천 막걸리와 더불어 신선의 경지에 오른 샘(밀짚모자를 쓴 이)은 고개를 숙인 채 지금 이 순간  ,꽃섬의 원주민인 최씨 할머니를 소재로 쓴 짧은 소설을  복기하시는 갑다. 배에 소주보다 무거운 막걸리를 많이 싣지 못한 것은 정원초과를 염려한 선장의 재량이었다. 그래서 잠시 샘이 무료해지신 것이리라.


 봄날은 가고 어느덧 초여름이었다.  수평선으로부터 밀려오는 부드러운 해풍이 귓가에서 꿈결처럼  남실거렸다.   


 꽃섬을 걸어서 한 바퀴  돌아 나오면서, 선생님은  꽃섬 촌장인 시인에게 지나가는 말로  창작집  '노루똥'에 실린 '고향집'의 흔적비를  최씨 할머니 짚앞에 세우면 어떻겠느냐고...어떻겠느냐고 ... 다만 그렇게  얘기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