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아메리칸 사모아-5 ( 동원산업의 Starkist 공장)

알라스카김 2019. 8. 7. 16:00

 

 

 

 

 

 

 

 

 오늘은 파고파고 항에 자리잡은 Starkist 공장을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이곳에 부임한

한국인 책임자와 약속을 잡아준 사람은 직전 한인회 회장을 맡았던 박현정(57세)씨였다.

 

 체류 3일째,여전히 하늘은 비구름이 감돌고 사방으로 비가 추적거리고 있었다. 가는 길에 

관광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파투' 섬과 그 옆에 형제처럼 붙어선  '푸티'섬 언저리의 손바닥만한 모래밭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가족 들을 목격했다.

  해안도로에 차를 세운 채 옷입은 채로  가족끼리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모습이 천연스럽기만 했다. 미국 경찰이 치안을 맡았다면 수영금자구역이란 팻말이 당연했을 터인데,지금은 사법.입법.행정이 모두 사모안들에 의한 자치형태로 바뀌어서 그저 그러려니 싶었다.

 

 Tafuna 지역에서 서북방향으로 더 돌아가면 스노클링도 가능한 몇 군데 상업적 리조트해변이 있을 법 한데,동쪽으로는 2달러 비치만 언급되고 있어 관광크루즈선이 닿아도 겉만 보고 간다는 말이 과연 실감이 갔다.

 빗줄기가 굵지 않은 틈을 타 파고파고 항내에 묶여있는 북한 상선(3국적 용선화물선)을 찍을 수 있었다. 공장입구에 닿자마자 소나기가 쏟아졌다.

 

 해안가 좁은 면적에 지었던  건물이라 2층 사무실의 구조가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올 1월에 새로 부임했다는 김중복 현지 소장은 나이 50에 가까운, 한국에서 공채 3기로 입사한 이사급 직책의 인물이었다. 말투가 조용하고 신중하고 또한 다정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1년간 객지생활을 함께했던  전 동원산업 소속 '공 ㅇㅇ'씨를 아느냐니깐 그제서야 김 소장은 내게 동족을 만난듯 반가운 얼굴이 되었다. 공 선배는 내겐 특별한 추억을 함께 한 아주 그리운 사람이었다. 김 소장의 말에 의하면 그는 현재 동원식품 협력업체의 부사장으로 재직중이라고 한다.

 오늘은 식품위생관련 검사관이 나와 공장내부 견학이 어렵다는 얘기를 꺼내길래 궁금한 사항 몇 가지만 물어보고 싶었다. 

 공장을 방문한 나의 주된 목적은 60년대의 공장이나 부두전경 사진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사휴의였다. 옛날 사진이라곤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딸이 다녀간 사진 말고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고 했다.

 

 Starkist란 상호로 투나통조림  사업을 시작한 것은 1942년 이었지만, 내 기억엔 아메리칸 사모아에 공장을 차린 것은 1960년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지남2호의 침몰사건이 발생한 1963년까지만 해도 투나 수매는 Van Camp가 독점했었다. 동원산업 김 재철 회장이 참치선 선장일 때 Starkist 공장에 참치를 납품했다고 하니 ,지남호 사건 직후였지 싶다. 그런 그가 이 공장을 인수한 것이니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한국에서 파견알라스카김된 현지직원들에게 60년 전 역사를 얘기하는 것은 실례일 것 같아 말을 아꼈다.      

 
 이제 Van Camp란 회사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몇 년전 대만계열 회사로 넘어갔다가 이도 적자경영으로
폐업하여 건물 껍데기만 Starkist 에서 창고로  임차해 쓰고 있었다.
 
 하루 원료 처리능력을 물으니 450톤 가량이라고 한다.
옛날과 달리 조업선이 많이 줄어 료확보에 애로가 없느냐니깐
미국 건착선들로 부터 skip jack(가다랑어)을 받아 염려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총 수매량의 75%가 가다랑어고 albaco는 25%에 불과하다고 했다.
나의 옆 자리에 앉았던 李도 알고보니 이 회사와 납품계약을 체결한 선주였다.
이제 용무가 끝난 셈이다.조업선들의 접안도크를 둘러본 뒤 직원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소나기는 아직 그치지 않고 있었다.
 

 통로에도,건물밖에도 비를 맞고 있는 원주민들로 가득하다. 3교대로 일하는 원주민종업원 수가 2천 명이라니  교대시간이면 이 거리가  늘 만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