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즐거움( '맥박' 정형남 장편소설)
새벽에 일어나, 며칠 전 찾아 뵌 어산재(語山齋) 정 형남 선생님의 소설 ‘맥박’을 읽는다. 노작가에 대한 예의와 기대감으로 나는 맑은 정신으로 소설을 읽고 싶었다.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지 어언 40년. 그간 삼 십여 편의 귀한 작품들을 남기셨다. 선생님은 작가의 글에서 자신의 화두라며 이렇게 운을 뗐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에 이르는 길이다.’
나는 명언이라 여기며, 그 길이 소설가의 길이어야 함을 새삼 깨달았다.
동학농민운동과 의병활동가였던 할아버지와 해방직후 좌익소탕과 동족상잔의 회오리 광풍 속에 무뢰배들에게 사기를 당해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아버지의 숨결을 그리는 도입부의 두 장은 역사의 압축인 만큼 처연하고 적확한 문장으로 나의 눈에 박차를 가했다. 지난 10여 년 지근에서 모시면서 읽었던 몇몇 작품들과는 판이한, 장중함과 박진감 넘치는 문체가 나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3대 후손인 문 사현의 성장기로 접어든 3장 ‘변신’도 자연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치밀한 서사가 돋보였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산속 동굴에 칩거하며 산신의 정기를 받아 무녀로 변신하는 어머니나, 사현의 성장과정 또한 군더더기 없는 서술로 박진감과 흥미를 더했다.
이후 사현의 부침을 그리며 ‘인간사 새옹지마’라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줄곧 숨막히는 이야기를 끌고가는 작가의 솜씨에 나는 결국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교훈이나 가르침을 앞세우는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고 감히 나는 말한다. 훌륭한 소설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이 스스로 그것을 알게 할 따름이다.
특히 읽는 내내 나를 즐겁게 한 것은 ‘발뒤꿈치로 방귀 누지르듯’ 같은 아름다운 우리말 표현이나 ‘고소금’ 같은 살가운 전라도 토속어들이다. 밑줄을 긋고 비망록에 옮긴 문장이나 단어들이 70여 개에 이른다. 문득 관촌수필을 쓴 이문구 선생의 충청도 방언사전이 생각났다. 누가 무엇이 그리 재미있더냐? 그리 물으면 구해서 직접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개인적인 소감이지만, ‘맥박’은 작가생활 40년을 기념하는 선생님의 수작(秀作)이 아닐 수 없다.
끝으로, 선생님의 식지 않는 창작열과 만수무강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