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출근을 하자마자 사장실에서 호출이 왔다. 찌푸린 얼굴로 사장이 K에게 내민 선박전문은 명태잡이 트롤어선인 TW603호 것이었다. 북태평양 알류산 열도의 작은 섬의 초(焦)밭에 배가 얹혔다는 급보였다. 명란철이 끝난 터라, 어획물의 전재때문에 떠났던 미국 자선(子船)들을 기다리느라 섬주변에서 표박(漂泊)을 하던 중 조류에 떠밀려 일어난 사고였다. 그것도 어둔 밤 불과 한 두 시간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먼바다에서의 선박사고는 인명피해가 없는 경우 대부분 보험으로 보상되어 선주로선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지만,조업중단으로 인한 사업손실과 당장 사후수습에따른 애로가 문제였다. 배사업을 시작한 후로 처음 당하는 일인지라 사장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북양사업 담당과장인 K 역시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러나 귀 동냥으로 들은 해난사고의 예를 떠올리며 그는 사장을 안심시켰다.
" 출장준비를 하겠습니다. 전손처리면 전화위복입니다. 우선 명태 선수금 변제나 신경쓰시지요."
4월 초라 앵커리지는 아직도 잔설의 흔적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봄이 오려면 5월 중순이 되어야 하므로, 구름이라도 끼는 날이면 눈발이 서걱서걱 발목을 낚아채는 을씨년스런 계절이었다.
숙소로 정한 호텔은 미국 자선(子船)을 구하러 출장을 올 때마다 그가 자주 애용하던 곳이었다. 예전에 에스키모 추장이 경영하던 것을 최근 L.A 에서 올라온 어느 한국교포가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연금으로 생존하는 노숙자 행색의 술취한 에스키모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나 다운타운에 위치하여 업무보기가 수월했고, 무엇보다 지배인이 교포 청년이어서 저녁에 시간이 빌 때면 함께 술잔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바퀴벌레가 방바닥을 횡단하는 것쯤은 값싼 숙박비로 위안을 삼았다.
오후 늦게 미국 대방사(미국 자선들을 엮어주는 합작어로사업의 파트너임)가 주선한 대책회의에 참석하였다. 수중작업회사의 대표는 K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 시간이 유감인지 그닥 유쾌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 외에도 입을 꾹 다문 PNI 보험회사측 검사관과 샌님처럼 생긴 작은 체구의 PNI 변호사 등이 배석해 있었다. 선주 대리인 자격으로 K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 여러분,이렇게 늦은 시간에 모이라 해서 죄송하며 또 참석해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선주측 대표로서 좌초된 선박의 구조를 정식으로 요청합니다. 선박구조에 대한 기술적 사항은 전적으로 여러분의 판단에 따르겠습니다. 현재 선박이 처한 정확한 상태를 파악하고 미국법률이 허용하는 제조건에 부합되는 최선의 방안을 강구해주시길 바랍니다. 다만 선박에 고립되어 있는 선원들의 안전한 구조를 최우선적으로 부탁드립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K는 일순 그가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대방사 직원으로부터 선주의 공식적인 요청과 사고수습주문이 있어야만 움직인다는 PNI 업무규정을 듣고서야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과연 그날 밤으로 검사관과 수중작업반 기술자들이 헬기로 자초된 선박으로 날아갔던 것이다. 그가 겪어본 미국인들의 사고와 행동은 언제나 합리적이며 또한 실리적이었다.
다음날 오후. 구조된 선원들이 패잔병들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K보다 6년 선배인 선장은 사고가 믿기지않는 듯 연신 쓴 웃음을 지으며 송구해 했고, 사고 당시 당직을 섰던 항해사들은 죽을 죄를 지은 사람들 처럼 낯을 들지 못했다. 선박사고는 해기사 면장을 가진 자들에겐 전과기록과도 같았다. 특히 당직사관들의 경우, 동료선원들로부터 일자리를 없앴다는 원망을 한몸에 받게 되니 그 심정이 오죽했으랴.
PNI 검사관은 바위 위에 얹힌 배를 끌어낼 수는 있으나 이미 선저 철판에 균열이 생겨 유창에서 기름이 새어 나오고 있고, 선체인양작업에 필요한 보조장비와 앵커리지 소재 조선소까지 선박을 예인하는 경비가 선가를 훨씬 상회하므로 선박구조는 현실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전손(Total Loss )을 목표로 하는 K의 입장에서는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박좌초 지점이 야생동물 보호구역이었고, 항공사진으로 볼 때,배에서 흘러나온 기름띠가 이미 1마일 가까이 형성되어 있었다. 행여 황천의 바람이 불면 섬으로 기름이 덮칠 뿐만 아니라, 드센 파도가 배를 움직여 금이 간 유창이 익은 고름처럼 터진다면 해상오염의 피해가 막심할 것이 자명했다. 알라스카의 해황을 감안 할 때 위험상황은 예측불허였다. K는 PNI 변호사와 함께 해경(Coast Guard)으로부터 선박폭파명령을 받아내기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천만다행으로 그가 도착한 이후로 날씨는 연일 쾌청하였고, 사고발생 후 닷새만에 드디어 해안경비대로부터 폭파작업의 승인이 떨어졌다.
그날 밤 늦게 회사에 낭보를 전한 후, K는 그동안 소원했던 선장과 마주앉아 위스키병을 깠다.
" 이제 배는 그만 타라는 운명인기라... "
진주가 고향인 선배는 말씨가 어눌했다. 동기들보다 선장 진급이 4-5 년이나 늦은 선배는
자기 신세를 원망하듯 이렇게 말했다.
" 타도 막차를 탔어. 회사에는 면목이 없지만 ,여게서 고만이라 생각하이 억울해..."
그 말을 끝으로 선장은 위스키를 연커푸 세 잔째 들이켰다.
1980년 5월, 맥너슨 법(Magnuson Law)이라하여 미국의 어장은 미국인으로 하여금 관리케 하자는, 어업분야의 미국화(Americanization)가 제창되었다. 그후 미국 상무성은 한국 ,일본,폴란드 등 외국 어선들의 직접조업쿼터를 해를 거듭할수록 제한하여왔고,대신 미국 어선들이 잡은 고기를 외국어선들이 가공만 하는 공동어로사업용 쿼터를 배정하여 외국어선의 경제수역내 입어를 한시적으로 허용하고 있었다.
경제수역 200해리 선포 직전 내 마음껏 고기를 잡던 시절의 선장들과 지금의 선장과는 수입면에서 격차가 컸다. 80년대 북양 명태트롤선의 보수는 기본급에 어상자(魚箱子) 수당만 추가했으므로 10년전의 보합제(步合制)와 비교할 때 선장의 경우 평균소득이 현저히 낮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선장이 늦게 된 것도 ,벌이가 시원찮은 것도 ,배가 이 지경이 된 것도 선배에겐 모두 억울한 일이었다.
지척에는 성인 바가 있어 코끼리나 치타같은 백인,흑인 여성들이 밤마다 스트립 쑈를 하고 있었다. 제 차례가 끝난 무희들이 홀을 누비고 다니며 단돈 5불이면 남자의 허벅지를 비집고 들어서서 궁둥이며 젖가슴을 흔들어 대었다. 몸에 손만 안 대면 밤새 10-20명의 여자를 불러도 시비할 사람이 없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침울한 선장을 앞에 두고 K는 잠시 망설였다.
(이 형편에 선장만 데리고 바에 간다면 선원들에게 맞아 죽겠지? )
그러나 한편, 정작 내일로 예정된 선원들에 대한 해경의 영해 침범에 대한 심문조사에 대처할 일이 더 큰 걱정이었다. 그리고 비몽사몽간에 날이 밝았다.
2.
이른 아침, 미해경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K는 조사받을 사람들을 각 파트별로 정하고,선원들을 호텔식당에 집합시켜 해경의 조사목적과 답변요령을 설명했다. 영해는 12 마일을 기준으로하나,미국어선들과의 공동어로활동은 영해 3 마일 밖으로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배가 왜 섬으로 접근했는지 그 이유를 조사하는 것이 해경의 목적이다. 만약 불법사유가 드러나면 벌금이나 인신구속은 물론이고 선박보험 구상에도 영향이 미칠 것이다.
선박의 좌초원인을 자체조사한 바, 사고발생 3시간 전의 좌표가 실제위치보다 잘못 측정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당직 항해사는 1시간 간격으로 배의 좌표를 측정하여 로그북에 기재하는데, 당시 배의 좌표가 영해 6마일 외측으로 플로팅(plotting)되는 바람에 일차적으로 항해사들이 방심하게 된 것이었다. 표박시엔, 특히 야간에는 수시로 선박의 좌우현을 견시하고, 또 레이다도 들여다보며 이동물체나 섬같은 지형지물을 살펴야 한다. 그러나 그날 밤 당직 항해사 2명은 브릿지안에서 저희들 결혼문제로 머리를 맞댄 채 2시간 가까이 잡담을 나누었다고 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선박이 좌초된 섬주위로 격한 조류가 소용돌이치고 있음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항해사들이 견시를 소홀히 하는 틈에 배는 조류를 타고 눈 깜작할 사이에 섬을 한바퀴 돌아 얼씨구나 하고 암초 위에 얹혀버린 것이었다. 선장은 자다가 침대가 우지끈 소리를 내서 일어나보니 눈앞에 시커먼 산이 우두커니 내려다보고 있더라고 했다.
미국이 어떤 나라인가? 당시까지만 해도 쏘련과 냉전 체제였는지라 알라스카해역에서의 방공감시체계가 어떠했겠는가? 쏘련의 캄챠카반도를 진입하는 바람에 영공침해죄로 폭파당한 KAL기 사고를 기억한다면 더욱 조심 했어야 할 일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로그북을 밑천으로 오리발을 내미는 것이 상수였다.
"우옛든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려 죄송하며,우리는 군사기밀을 탐지할 목적도 ,섬에 올라가 바다사자를 때려잡을 생각도 , 섬에다 똥이나 오줌을 갈길 생각은 더더욱 없었노라고 말해야 돼. 복잡한 질문에는 무조건 나는 모른다야. 알았지?"
우스개 소리를 섞어가며 선원들에게 미리 그렇게 다짐을 해 두었다.
오전 열 시 경, 미해경 수사관 두 명과 여자 한명이 호텔에 도착했다.
두 팀으로 나눠 취조가 시작되었는데 수사관들은 선주 대리인은 나가고 통역관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초조해진 K는 복도를 서성이며 입에 줄담배를 물고 있었다. 그 때 호텔 지배인인 청년이 그에게 다가왔다.
" 통역관으로 따라온 저 여자는 내 친구 누님입니다. 미국에서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한 엘리뜨니 잘 처리해줄 겁니다. 너무 걱정마세요."
엘리뜨가 무슨 소용이람. K가 엘리뜨란 말에 시큰둥한 것은 나름 이유가 있었다. 다시 담배 한대를 꺼내 무는데 식당문이 열리며 수사관이 그를 지목하며 불렀다. 통역을 거들어 달라는 요청이었다.
K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식당으로 들어서니 엘리뜨라는 여자가 샐쭉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키가 160센티미터 쯤 되어 보이는, 가벼운 몸집에 이글거리는 커다란 눈을 가진 30대 초반의 여자였다. 통역이 순조롭지 않은 이윤즉, 이 엘리뜨가 해사용어에는 백지여서 수사관들이 진도를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수사관의 지시로 그는 여자 옆에 앉게되었다. 코끝으로 향수냄새가 물씬거려 옆으로 얼굴을 돌리니,그때서야 여자가 그에게 눈을 맞추며 방긋 미소를 지었다. 일견 상큼하고 품위있는 인사였다.
해사용어하면 한 가지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2년 전 그는 씨애틀에서 미국자선을 신조하는 합작회사 설립을 도모한 적이 있었는데 합작파트너, 조선소 사장 등과 신조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변호사 사무실에서 회동할 때 현지교포인 여자를 통역으로 대동했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선박의 장비나 기계류에 무지하여 미국인들이 지껄이는 말을 어린애 그림그리듯 해서 통역비만 날린 적이 있었다. 더우기 계약이면의 내용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해 후일 미국 파트너의 자금횡령을 묵인한 우를 범했던 것이다. 당시 그의 영어는 A학점을 받은 문장실력에도 불구하고 귀머거리에다 반 벙어리였다.
K의 왼쪽 맞은 편에 앉은 수사관은 몰몬교 선교사로 한국생활을 했는지 굴곡이 심한 억양으로 이랬습니까? 저랬습니까? 하며 선원들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선원들은 이따금 심문 당하는 피의자 신분도 잊은 채,그의 생뚱한 한국말에 어깨를 들썩이며 크게 웃곤 하였다.
해사용어가 뭐 그리 대수로운 것이냐 하겠지만, 예를들어 선박이 엔진을 끈 채 바다에서 장시간 떠 있을 때는 표박(漂泊:floating),닻을 내린상태를 묘박 (苗泊:anchoring)이라고 하고 선박의 우현을 스타보오드(starboard),좌현을 포트 사이드(port side) 라고하는데 ,이 엘리뜨가 표박이라는 난해한 한자어를 어떻게 통역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전문용어는 예비지식이 없으면 일반인들이 쉽게 응용할 수 없는 것들이다. 전문용어는 그렇다고 치자. 하급선원들이 많이 쓰는 일본식 용어,즉 초사(1항사)나 남방(1기원) 헷또(1갑원),데끼(deck)같은 말에는 더욱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하물며 알라스카의 주도인 앵커리지는 쿡 선장이 최초로 닻을 내린 곳이라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라 하지 않는가.
조사가 무려 세 시간 가까이 진행되었으나, 당초 우려와는 달리 혐의없음으로 일단락되었다. 엘리뜨는 존경인지 부러움인지 모호한 눈빛으로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해사통역은 사양해야겠어요. 그럼...한국에는 언제 돌아 가시나요? "
그는 그녀의 말을 의례적인 인사로 받아 넘겼다. 엘리뜨와의 만남은 그것으로 그만이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당장 그 날 중으로 선박의 폭파작업을 위한 팀을 짜야했고,선원들의 귀국 스케쥴을 잡는 등 머리 속이 복잡하였던 것이다.
3.
다음 날, 배의 구조파악을 위해 폭파작업반에 기관장을 포함시키기로 하고, 나머지 선원들은 선장 인솔하에 서울로 귀국시켰다. 수중작업 기술자들과 폭약전문가,보험회사 검사관들로 구성된 폭파팀들도 같은 날 해경의 쾌속정을 타고 알류산 열도로 떠났다. 그리고 나흘 뒤, PNI 변호사가 건네준 비디오를 통해 솟구치는 화염속에 공중분해되는 TW 603호의 최후를 목격했다.
서양인들은 배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한다. 배를 지칭할 때 여성대명사(She)를 쓰는데, 깊고 넓은 바다에서 격한 풍랑을 겪어본 뱃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타고 있는 배를 어머니의 품같이 생각한다. 뱃사람들이 육지에 오래 머물게 되면 배로 다시 돌아가지 못해 습관적으로 안절부절하는 이유 중 하나도 그 때문이다. 또한 선장이, 또는 함장이 침몰하는 배와 함께 최후를 마감하는 것도 배를 하나의 생명체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출장임무가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므로 K는 내심 흡족한 기분이 들었고,유류오염( oil pollution )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선박의 폭파작업을 결심해준 해경대장에게 감사패까지 전달한 직후라 술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때 호텔방의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름아닌 엘리뜨였다.
"선생님.저...김혜숙이예요. 오늘 통역비로 3,000불을 받았거든요. 혼자 쓰기에 너무 많은 돈이라서,제가 한 턱 낼려구요."
"아...그래요? 오늘은 제가 시간이 안 될 것같은데...."
이튿날 기관장을 귀국시켜야 했으므로 그날 밤 기관장을 데리고 성인 바에라도 가볼까 궁리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엘리뜨는 망설임도 없이 그의 말을 끊었다.
"좋아요. 그럼 내일은 토요일이니깐 바쁘지 않겠네요? 내일 오전 10 시에 호텔로 갈께요.그럼 내일 봐요."
배를 잃은 기관장은 그날 밤 술에 취해 꺼이꺼이 울었다. 그렇게 울다가도 백인 여자가 궁둥이를 살레살레 흔들어 댈 때는 '과장님! 야들 데리고 함 잡시다.'라며 객기를 부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만 내일 그녀와 만날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기관장을 시중드느라 지친 나머지 그는 늦잠을 잤다. 남해사람인 열살 연상의 아저씨가 아랫도리 힘은 어찌 그리 좋은지, 탱크와도 같은 그 여자를 대체 어떤 기술로 넘어뜨렸으며, 끝내는 폴승을 거두었는지 그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200불을 달라기에 기관장에게 물었다.
"기관장! 긴 밤으로 자신있소? "
그러자 기관장은 황토밭에서 갓 캐어낸 고구마같은 얼굴을 들이대며 넉살을 떨었다.
" 에이, 과장님도. 라스팔마스에서는 하룻밤에 두 명도 잡아먹었심더."
작취미성,속이 쓰려서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어 한 모금 마시고 있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 어이쿠! 지금 시간이 몇 시야? 기관장 출국준비도 그렇고... )
어제 엘리뜨가 정한 약속도 생각나 허겁지겁 수화기를 들었다.
" 과장님,일-났심니꺼? 통역하던 여자 분하고 밑에 있심더."
황망중에 프론트로 내려오니 연분홍빛 투피스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시간을 보니 오전 10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기관장은 새벽에 일어났는지 호텔식당에서 혼자 아메리칸 식사까지 마친 뒤였다.
( 어... 이게 뭐야? )
엘리뜨가 타고온 차에 난데없는 50대 후반의 그레이 가이(gray guy)가 운전석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토요일이라 남편과 함께 나왔다며 K에게 그레이 가이를 소개했다. 그녀의 그런 행동거지가 너무 천연스러워 오히려 그가 당황스러웠다. 설마 미혼이겠느냐, 일을 구실로 만난 젊은 남자와 재미삼아 데이트나 한번 하자는 뜻이려니... 그런 생각에 그는 어젯밤까지도 가슴이 설레었고, 만일을 위해 몸이라도 정갈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기관장만 놀아라',기관장이 '혼자 하면 우짭니까? 그라면 나도 안 할랍니더.' 그렇게 미련을 떨었어도 , 손사래를 치며 '아니다. 나는 괜찮다.' 그랬던 것이다.
그레이 가이의 차로 공항에 기관장을 전송하고 돌아오는 중에도 K는 그녀가 여우같다는 생각이 들어 은근히 부아가 났다. 운전석에 앉은 그레이 가이가 그에게 호의를 보이느라 어줍잖게 몇 번 말을 건네왔지만 떨떠럼한 기분은 여전했다.
" 김 선생님, 글래시아(glacier)를 구경해보셨어요? 아니라면 그곳을 오늘 제가 구경시켜드릴까 하는데요."
7년 전 한미공동사업 사무요원으로 미국 땅을 처음 밟았고, 그 때 알라스카에 떠있는 회사 공모선에 승선하기 위해 잠시 들른 곳이 앵커리지였다. 그후로도 미국 자선들을 구하는 일로 몇 차례 방문했었지만 매번 과업에 쫓겨 한가로운 관광은 엄두를 낼 수 없었으므로 글래시아 구경이란 말에 귀가 솔깃하였다.
" 알라스카의 빙하지대를 관광하는 유람선이 따로 있어요. 해안가를 더듬어가며 풍광을 즐기는데 주로 여름이 관광 씨즌이라 지금은 배가 운항하지 않아요. 하지만 북쪽으로 1시간 정도 차로 달리면 빙하를 볼 수 있어요."
위스키 온더락(wisky on the rock)의 쓰는 얼음의 원조가 빙하였다. 일본의 남빙양 시험조업선들은 크릴새우 어기가 끝나면 빙하에서 떨어져나온 빙괴(氷塊)들을 그물로 자국까지 끌고 와 술집에 비싼값으로 판다고 했다. 차 안에서 바라보는 빙하의 그림은 밋밋하고 단조로워 빙하의 숲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지 못할 바엔 차라리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빙하지대가 더 장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뜨의 남편은 석유회사에 근무하는 기술자로 선조가 독일계였다. 우리 말로 법없이도 살 ,너무 유순하여 맥이 빠질 정도로 말 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빙하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근사한 식당에서 달팽이 요리로 점심을 먹을 때도 남자는 자기 마누라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헐거운 미소만 지었을 뿐, 한국말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는 아예 끼어들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미국에 건너왔다는 그녀는 짧은 어휘력에도 불구하고 마치 봄날 동산의 꾀꼬리처럼 말이 많았다. 한국의 상황이며,다니는 회사는 어떻느냐,취미는 뭐냐,아내가 몇 살이며 얼마나 예쁘냐는 둥 마치 어느 벙어리 집안의 말 잘하는 딸인 양 쉴새없이 주절거렸던 것이다.
그녀의 명랑 호들갑에 지쳐가던 중, 마침 지나치는 길가에 오두막처럼 생긴 카페 스타일의 술집이 보이길래 K는 그레이 가이에게 잠시 쉬어가자고 청하였다.
카페의 입구로 들어가는 담벼락에는 수 백장의 명함들이 붙어있었다. 모두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것이었다. 실내는 바텐더를 중심으로 스탠드가 둘러져있고 바텐더의 머리위로는 통나무로 지붕을 받힌 삿갓형의 공간이 있었는데,공간을 가로질러 쳐 놓은 줄에 여자들의 팬티,브래지어가 가득 걸려있었다. 기념으로 여자손님들이 즉석에서 벗어던진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믿고 K는,마침 곁에 앉았던,오클라호마에서 왔다는, 금발에 붉은 얼굴이 매력적인 어느 중년부인의 브래지어를 벗기고 말았다. 별난 경험이었지만 미국 땅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엘리뜨와의 데이트가 너무 무미건조하여 무슨 재미난 일이 없나 하던 차에,엉뚱하게도 금발여인의 속옷을 벗기는 해프닝으로 홀안의 손님들을 박장대소케 함으로써 그는 오늘 그녀의 초대에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 아-저들은 오늘 밤 어떤 사랑을 함께 나눌까...?)
호텔에 그를 내려주고 떠나는 그레이 가이의 차를 눈으로 배웅하면서,K는 잠시 엉뚱한 생각에 젖어들었다.
PNI로부터 보험종결보고서가 나오는대로 그는 한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리고 아무일 없이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곧장 돌아가리라 믿었다.
4.
거리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4월의 비는 봄이 오고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에도 생동감이 넘쳤다. 바야흐로 낮은 점점 길어지고,백야의 시간도 그만큼 짧아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머문 시간도 어느덧 3주 째 접어들고 있었다. 특별한 일도없이 보험사로부터 사건종결보고서만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대방사와 호텔을 오가며 지내는 시간이 차츰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대방사의 접수부 안내원인 바바라(Babara)는 독신이었다. 그래서 그가 심심할 때면 곧잘 말을 걸곤 했다. 그녀도 그게 영 싫지는 않았는지 어느덧 저편에서 그에게 먼저 농담을 건네올 정도였다. 한번은 그녀에게 미국여자들에게 연애를 걸려면 어떤말로 접근하는 것이 좋으냐고 물었더니,'우드 유 메이크 미 브랜즈 아웃?(Would you make me brains out?)' 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남자 직원에게 확인 차 물었더니 갑자기 정색을 하며, 여자들에게 뺨맞을 소리라며 행여 취중이라도 그 말은 절대 하지말라고 했다.
과연 미국에서는 여자에게 말이나 행동으로 색정을 도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1970년대 후반에 처음 접한 미국의 외국인 어업자 관리규제법에는 외국어선에 파견된 미국의 수산관(절반이 젊은 여자들이었다)에 대한 성희롱(sexual harassment)은 엄벌에 처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이때문에 육지로 끌려가 벌금물고 신세망친 한국선장들이 실제로 더러 있었다. 일견 여자의 말이나 행동이 설혹 내게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보이는 것이라 생각되어도 ,그 생각만으로 무리하게 작업에 돌입했다가는 경을 치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오후에는 원양어업협회에서 파견나와있는 김 소장과 공군부대에 있는 골프장에서 티샷 연습이나 해볼까 궁리중이었다. 그때 바바라가 누가 나를 찾는다며 전화를 받으라고 했다.
엘리뜨였다. 그 무렵 그는 하루빨리 집에 돌아갈 생각 뿐이었으므로 그녀와의 일은 까많게 잊고 있었다.
" 김 선생님, 제가 저녁을 사드리고 싶어요. 오늘은 저 혼자예요."
거리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식당을 찾아 캡틴 쿡(Captain Cook) 호텔을 지나 바다가 보이는 식당으로 가는 길에,정장을 차려입은 젊은 남녀의 무리와 마주쳤다. 호텔에서 곧 결혼식이라도 있는 듯, 질척이는 비를 피해 허둥대면서도,모두들 생명이 넘쳐 죽겠다는듯 웃고 떠들어대는 모습이 싱그러워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엘리뜨는 초록색 원피스에 검은 자켓을 걸치고 나왔다. 색상의 조화가 아름다워 오늘따라 그녀의 얼굴이 유난히 돋보였다. 이글거리는 검은 눈동자도 눈부셨다. 두 사람은 흡연석으로 자리를 잡은 뒤, 삶은 대게(king crab)와 가자미 튀김과 캘리포니아산 백포도주를 주문했다. 그는 모처럼 마주앉은 그녀의 얼굴을 음미하듯 살폈다.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얼굴이란 생각이 들었다.
(재클린 오나시스? 아! 맞아.가수 나미를 닮았어. )
남편은 송유관 수리관계로 남쪽으로 출장을 갔다고 했다. 남편의 눈치를 보느라 지난번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그녀의 목소리며 얼굴을 새삼 느긋하게 즐기며, 그는 열심히 게살을 씹었다. 극동 러시아 여자들은 게살을 남자의 정력보신식의 으뜸으로 쳤다.
그에게 와인을 따라주던 그녀가 뜬금없는 얘기를 꺼냈다.
"앵커리지에 살면서 이제껏 제가 만난 한국 남자들 중 김 선생님이 제일 멋있어요."
K는 순간 부끄럽고 민망했다. 어느 시인은 '나를 키운건 팔할이 바람이었다'고 고백했건만,엘리뜨는 마치 팔할이 치즈와 버터로 비벼진듯한 느낌이었다. 왜냐면 한국 여자들의 그 흔한 내숭은 흔적도 없고 언제나 확신에 찬 자신의 인지력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말했기 때문이다. 농경사회 정착민들의 정서와는 전혀 다른, 마치 수렵유목민족의 기질을 물려받은 종족처럼, 느낌 그대로 표현하고 기분내키는대로 행동하는 한 마디로 자유분방한 미국인이었다
"그래서요?"
얼떨결에 내뱉은 자신의 말에 K는 스스로 무안해서 얼굴을 붉혔다. 엘리뜨는 그의 그런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입가에 가득 웃음을 지었다.
"호 호 호, 김선생님,오늘 우리 춤추러 가요."
틈을 주지않고 던지는 그녀의 당돌한 제안에 그는 다시 망연했다.
혼란스런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그는 와인을 한잔 가득 따른 후 단숨에 들이켰다.
그녀가 차로 데려간 곳은 춤추는 홀이 있는 스텐드 스타일의 작은 바였다. 실내에는 경쾌한 컨트리 송이 흐르고 있었고, 플로우에는 흐릿한 조명아래 남녀 한 쌍이 다정스럽게 왈츠를 추고 있었다. 그녀는 핑크레이디를 주문했고,그는 스카치 온더락을 시켰다.
포도주에 이미 얼굴이 발개진 그녀는 칵테일 한잔에 눈동자가 약간 풀린 듯 했으나,그는 위스키를 두 잔째 마셨음에도 오히려 머리가 말똥말똥해졌다. 엘리뜨가 이번에는 화이트 레이디를 주문했다.
( 저렇게 마시다가 나중에 차는 어떻게 몬다지? )
무념스레 위스키잔의 얼음이 줄어드는 모양을 지켜보던 그를,그녀가 갑자기 흔들어 깨웠다.
"선생님! 춤추러 나가요,예?"
불식간에 엘리뜨가 그의 손을 끌어당겼으므로 그는 엉거주춤 일어났다. 음악은 슬로락에서 리듬 앤 블루우스로 바뀌고 있었다. 춤으로 말하자면, 그는 취하지않으면 거의 절대로 스텝을 밟지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엉거주춤 궁둥이를 뺀 채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빙글 빙글 돌기만 하는데,엘리뜨는 자꾸만 자신의 몸을 그에게 들이대었다. 순간 순간 부딪혀 오는 그녀의 몸은 소녀처럼 가냘프고 솜털처럼 부드러웠다. 한 10여 분을 그렇게 실랑이를 치다가 두 사람은 자리로 돌아왔고, 서로 말없이 술만 한 잔씩 더 시켰다.
K의 술잔이 비자,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는 막무가내 저 먼저 냉큼 일어나 계산을 하더니 바의 문을 열고 나갔다.
5.
초저녁과는 달리 하늘은 사방에 는개를 뿌리고 있었다.
차에 시동을 걸면서 엘리뜨가 다시 입을 열었다.
"김선생님,오늘 컨디션이 안좋은가 봐요? 비가 와서 그럴꺼예요."
제 맘대로 남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하는 것이 귀엽기도하고 한편으론 얄밉기도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낭패스런 기분이어서 그는 그만 호텔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차는 다시 엉뚱한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 며칠 전에 아파트에서 독립가옥으로 이사를 했거든요. 제가 살던 아파트를 구경시켜드릴께요."
( 전에 살았던 아파트를 왜? )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갈수록 태산이었다. 그녀가 천상 미국인처럼 행세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문제는 오늘 행사의 주도권을 그녀에게 몽땅 뺏기고 만 그의 처지가 우습게 된 데 있었다.
미국의 시골동네 아파트는 빌라형태여서 대략 10세대 정도의 건물이 다반사인데,그녀가 지하차고 문을 자동보턴으로 열고 들어선 곳은 그보다도 더 작은 규모였다. 그녀가 키를 따고 들어선 30평 규모의 실내는 이삿짐을 치운 뒤라 을씨년스러웠다.
(이 여자가 지금 서부영화를 찍으러 왔는가? 여기가 건초더미가 쌓인 마굿간인 냥 한번 뒹굴어 보자는 것인가?)
생각의 꼬리를 물고 '원초적 본능'이란 미국 영화가 머리에 떠올랐다. 살인도구인 얼음 송곳(ice pick )의 비밀을 모르는 채, 살인 용의자인 캐서린의 알몸에 몰입하는 형사 닉크의 숨가쁜 뒷태가 눈에 어른거렸다. 재미로 만든 영화였지만, 이성이나 동성간의 즉물적 욕망은 원초적 본능이어서 짜장 망설임이나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그들의 정서였다. 더욱 쌍방 합의에 의한 것은 십계명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그 와중에도 엘리뜨는 개구장이 소녀처럼 아파트의 이구석 저구석을 기웃거리고만 있었다.
(뭔 두고온 물건을 찾는걸까? 아니면 도대체 날더러 뭘 어쩌라는 말인가? )
하필이면 섹슈얼 헤러스먼트( sexual harassment )조항까지 머리를 맴돌며 이마에 진땀이 솟았다. 이것이 영화라면 감독이 필요했다. 만약 그녀가 한 마디 달콤한 얘기로라도 암시를 주었다면 그도 그까짓 것 하고 용심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 그녀가 다시 깡총 문밖으로 달아났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그의 꼴은 차라리 반려견이나 다름없었다.
(이젠 그만 호텔로 데려다 달라고 말해야겠다. 정말 이건 아니야. )
그는 이미 그녀의 정서를 따라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정서적 불안이 생물학적 바이오리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 지는 불문가지 아닌가. 어정쩡하게 뒤따르던 그를 향해 그녀가 다시 요상한 말을 던졌다.
"김선생님은 제가 싫으신가 봐요?"
( 그래, 이제는 싫다. )
말은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또 다시 엉뚱한 말을 하고 있었다.
" 싫다 좋다 할 게 뭐 있습니까? 나는 아파트에 뭘 찾으러 왔나 싶었지요."
그러자 그녀가 피시식 웃으며 말했다.
" 사실 오늘 김선생님과 저녁만 먹고 헤어지기가 왠지 싫었어요. 이런 기분... 처음이거든요."
알다가도 모를 것이 마음의 행로였다. 그녀의 그 한 마디에 K는 다시 가슴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뜨거워지는 것이 아닌가.
" 그럼,저희 집에서 커피나 한 잔 마시고 가세요."
그녀는 은연중에 그의 결단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 또한 이 바보같은 상황에서 한시바삐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 그러자. 이런 찝찝한 기분으로 호텔에 그냥 간다면 잠이 쉬이 오겠는가. 남편이 없는 집에 외간 남자를 끌어들이기가 뭣해서 이 여자가 아마 비어있는 아파트를 생각했을꺼야. 그녀가 어떻게 이 불장난을 마무리하는지 두고 보자.)
" 그럽시다. 나도 그게 좋겠어요,"
자정이 가까워 지고 있었다. 언제 비가 멎었는지 휘부욤한 하늘에는 시나브로 까만 어둠의 장막이 내리앉고 있었다.
6.
그녀의 집은 하역부두를 지나 다운타운에서 북서쪽으로 꺽어지는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다. 키큰 전나무 숲속에 통나무로 지은 아담한 이층집이었다. 겨울밤이면 순록들이 먹이를 찾아 집주위를 어슬렁거린다고 했다. 그가 미국땅을 처음 밟았을 때 알라스카주 상원의원을 지냈다는 어느 노인의 통나무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었다. 밖에는 아이 주먹만한 눈이 소리없이 쌓여가고, 집주인과 벽난로에 둘러앉아 여름철에 장만해둔 훈제연어고기를 안주삼아 술잔을 기울이던 추억이 그녀의 집을 보자 문득 생각났다. 일층은 응접실과 주방으로 꾸며졌고 침실은 이층이었다.
집안에는 하얀 털복숭이 고양이 한마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자켓을 벗고 주방으로 다가가 스토브에 물을 끓일 준비를 마친 뒤, 카셋트를 들고 나왔다. 음악이 흘러 나오자 그녀는 주방에서 등을 돌린 채 노래를 따라 불렀다.
I bless the day I found you 당신을 만난 것을 감사해요
I want to stay around you 당신곁에 머무르고 싶어요
and so I beg you, 부탁해요,당신곁에 있게 해줘요
Let it be me
................
No matter what the price is, 설혹 그 댓가가 무엇일지라도
I'll make the sacifices, 당신께 나를 영원히 바칠거예요
through each tomorrow, 당신곁에 있게 해줘요
Let it be me.
그녀가 커피를 내어올 때 그는 위스키를 달라고 했다. 누군가 영화와 현실의 차이는 음악때문이라고 했던가. 아니나 다를까, 음악을 배경으로 그녀의 흥얼거리는 노래소리에 귀기울이는 동안 K는 스스로 영화를 찍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노래 가사처럼 지금 그녀는 이 순간 자신을 그에게 송두리째 바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 노래가사처럼 그녀의 심정이 그렇다면....엘리뜨가 샤론 스톤이면 나는 마이클 더글러스가 되는거야.)
그는 그녀의 등뒤로 다가가 힘껏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일순 그녀가 흠칫 몸을 움츠렸지만 ,이내 그녀의 몸은 마른 낙엽처럼 활활 타올랐다. 그의 몸도 언제 그랬냐는 듯 뜨거운 불길에 휩싸였다. 그가 입술로 그녀의 귀와 볼을 어루만지자 여자의 몸이 활처럼 뒤로 휘어졌다. 뒤이어 몸을 세운 그녀가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입술을 내밀었다. 마치 깊은 바다속으로 가라앉는 배처럼 두 사람은 눈을 감은 채 서로의 입술을 뜨겁게 탐했다.
마침내 타오르는 불꽃에 갇힌 그의 부싯돌이 비상구를 찾아 절규하기 시작했다. 눈을 뜬 K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소파를 찾았다. 그녀의 몸은 작은 새처럼 가벼웠다. 치마자락을 걷어 올리자 불빛에 드러난 그녀의 하반신이 우유빛으로 눈부셨다. 그녀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다급하게 그의 바지를 풀어 내렸다. 물 만난 고기처럼 그의 부싯돌이 그녀의 몸안으로 들어서자, 그녀의 하복부가 물씬 함께 딸려오는 느낌이 뒤따랐다. 곧이어 그녀의 입에서 격한 비명이 연속적으로 터져나왔다.
가쁜 숨을 몰아 쉬던 K가 그녀의 앞섶을 손으로 휘저었다. 마치 산의 정상에 오르기위해 안간힘을 쏟는 클라이머처럼 손을 뻗어 그녀의 가슴을 더듬었다. 아- 그녀의 가슴이란 ! 그 순간 등에 얼음송곳이 박히는 듯한 충격이 그를 사로잡았다. 정상을 향해 발돋움을 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홀더(holder)의 융기. 영혼과 육체의 이 모순. 딱하게도 그때서야 말고그레이 가이의 얼굴이 불쑥 눈앞을 가로막았다.
( 그레이 가이에게 그녀는,그녀에게 있어 그레이 가이는 과연 어떤 종류의 기쁨일까? )
알타리 무우를 씹은 듯 씁쓰레한 감정이 밀물하더니 감당할 수 없는 수치심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이건 아니야! 그녀에겐 한 순간의 일탈일지 몰라도 나는 아니야! 몸이 부추기는대로 달려가다간 결국 부끄러운 기억만 남게 될거야. 집까지 따라온 것은 정말 바보같은 짓이었어.)
그는 머리를 두어 번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엘리뜨의 몸위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의 생각에 동조하듯 잇따라 그의 부싯돌마저 푸르릉 하고 꺼졌다. 모든 것이 한 순간이었다.
갑작스런 몸의 정적에 화들짝 놀라 눈을 뜬 그녀가 한 동안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일어서는 그의 등 뒤를 향해 미친 듯이 소리쳤다.
" 지저스 크라이스트(Jesus Christ )!"
실내에는 싸이먼 커펑클스의 '4월의 여인( April lady)'이란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비행기가 알라스카의 빙하지대를 횡단하자 엘리뜨와 함께 찍은 영화 '원 나잇 스탠드(One night stand)'의 마지막 장면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K는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그녀가 미국인의 흉내를 내며 살아가는 것이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정녕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북극항로로 기수를 돌린 비행기가 알류산 열도의 상공에 이르자 K는 사라진 TW-603호의 흔적을 찾기라도 하듯 고개를 뺀 채 바다가 구름아래로 숨을 때까지 줄곧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끝.
2007.6 해양문화재단 간행 "바다(23호)"지에 초고를 발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