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211

처서 處暑

입추 다음에 귀뚜라미의 등을 타고 온다는 처서가 왔다. 새벽녘, 거듭된 열대야에 속옷차림으로 누웠다가 한기에 놀라 잠을 깬다. 길 가세 일렬로 심은 배롱나무의 백일홍, 꽃잎은 거뭇거뭇 시들어 가고 이때다 하고 논에는 벌써 장벼가 패였다. 남도의 농부는 그래서 이를 쌀나무라 부른단다. 옛부터 칠뤌칠석 무렵, 선비는 책을 말리고, 농부는 곡식을 말리고, 부녀자는 옷을 말린다고 했다. 여름내 눅눅해진 물건 을 꺼내 바람을 쐬고 햇빛에 말리는 포쇄(曝曬)를 말한다. 그러므로 자연에 순응한 선인들의 지혜가 지극히 아름답다. 웬 일로, 귀뚜라미가 우짖는 단장(斷腸)의 노래를 아직 듣지 못했다. 생각이 가벼워 적막한 밤을 기다리지 않은 탓이다. 소금을 캐러 차마고도의 설산을 넘는 히말라얀 캐러반과, 저 야크의 목동들..

산문 2022.08.26

덕자, 내게로 오다

고기 이름은 지도(송도) 어판장에서 산 5키로짜리 병어다. 흔한 말로 칠산 앞바다에서 잡히는 덕자다. 누군가 이 보다 더 큰 놈은 경자(?)라 해서 웃음이 터졌다. 경자는 바로 곁에 선 교회 사모님 이름이었다. 광복절 날 , 임자도 대광해수욕장으로 수양회를 갔다가 귀로에 지도를 들러, 한 교인이 덜렁 10키로짜리 싱싱한 민어의 포를 떠 왔기로 인근 우산각에 20여 명이 둘러앉아 민어회의 황홀한 맛을 보며, 이구동성,민어는 여름이 제 철이라,회로 즐기려면 큰 놈이 좋제, 암 그라지라. 오늘, 살이 통통한 덕자의 옷을 벗기는 사람은 임자도가 고향인 김 권사님이다. 내장과 뼈 곁살은 지리국을 끓이고 뱃살 주변은 사시미로 만들었다. 아- 덕자여, 도대체 이건 또 무슨 별천지 바다의 맛이런가?

산문 2022.08.19

전라도 장터 백반

점점 사라져 가는 전라도 음식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 위해 왕곡면에서 무안군 일로읍을 향해 달려갔다. 왕곡 등대교회 주말 청소를 하러온 집사 두명과 함께였다. 가이드는 음식 매니어인 정영채 집사였다. 목적지는 일로읍 시장골목에 있다는 일로식당. 백반만 파는 식당을 택한 것은 해산물을 전혀 먹지 못한다는 불편한 인생, 나종삼 집사 때문이었다. 작은 접시에 담아낸 반찬의 가지 수만 20 개. 접시로 나뉘어져 종류대로 취사선택이 용이할 것이란 추측이 적중한 셈이다. 반찬 중 상전은 조기매운탕과 고등어 구이였지만 나 집사에겐 애외였다. 쟁반에 얹혀진 젓가락 옆 접시엔 간장에 숙성시킨 건은색 돌게 한 마리다. 일인 분 9천원 밥값에, 나 집사는 3천원 어치만 먹었지만 전혀 억울해 하지 않았다..

산문 2022.07.30

고양이 가족

고양이 가족이라는 제목이 스스로 낯설다. 이들 한 무리가 서로 가족인지, 저들이 내 가족인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6개월 전 쯤부터 아침 저녁으로 현관에 몰려와 밥 달라 울어대는 바람에 읍내 슈퍼에서 사료를 사 먹이기를 시작했다. 저들의 잠자리는 이웃의 폐가다. 처음엔 내요량으로 서로 무리지어 동네를 싸돌며 먹이사냥을 하거나 동냥질을 하겠거니 생각했다. 내 집 마당을 가로지르거나 한 뼘만한 채전밭에 출몰하는 것을 두고 저들의 일상적인 통행 쯤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밥을 주기 시작하면서 저들이 어느덧 내 일상속으로 스며들고 말았다. 어른 5-6마리,새끼 5-6마리 . 꽃을 사랑하는 아내는 이 놈들이 꽃무더기에 숨어들어 땅을 파헤치는 배설행위를 용납하지 못한다. 아이도 없는 집에 간혹 고함소리가 터지는 ..

산문 2022.07.14

발인예배 기도문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당신의 사랑하는 황경애 집사님의 모친 이순심 여사의 발인예배로 모여 머리 숙였습니다. 고인은 90여 년에 걸친 이 땅의 사명을 다하고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 지금 이 순간 함께했던 가족들의 곁을 떠나 다시 흙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유족들의 슬픔은 한도 끝도 없으나, 나를 믿고 순종하는 자 영원히 살리라 말씀하신 하나님을 따라, 고인이 가시는 그 길은 영원한 생명의 길이며, 환한 빛 가운데 만발한 아름다운 꽃길임을 저희들은 믿습니다. 천국에 가면 ,거룩하신 당신의 품안에서 그가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한 복도 충만케 하옵소서. 또한 바라옵기는, 남은 가족들의 가슴속에 어머니로서 핢머니로 늘 살아계셔서 생전처럼 돌보시며, 저들이 오직 하나..

산문 2022.06.09

6월의 기도

존귀하신 하나님 아버지, 살아계셔서 언제나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그 은혜에 감사하며 오늘도 주님을 만나러 나아와 엎드렸습니다. 저희들이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드리는 찬양과 영광을 홀로 무궁세세토록 받아주시옵소서. 주님, 지난 한 주간도 주님 뜻대로 온전히 살지 못했음믈 고백합니다. 이웃에 대해서나 나 자신에게도 주님이 가르치신 그 사랑을 열심히 베풀지 못했습니다. 이는 우리들의 미련한 성격이나 못난 버릇이나, 보잘것없는 자존심이거나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는 이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저희들의 죄를 이 시간 회개하오니 예수님의 십자가보혈로 깨끗이 씻어 주시고, 부디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옵소서.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거룩한 주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의 뭇 생물들..

산문 2022.06.05

해룡성(海龍城)과 풍류산방

나의 소설(아버지의 바다. 2021.11 출간) 출판 기념회를 열겠노라 풍류당에서 순천으로 나를 불렀다. 코로나 방역으로 차일피일 하다, 6개월 만에 갖는 모임인 셈이다. 찾아간 곳은 순천시 오금동의 한옥 고택. 사진 정면은 고택의 사랑채다. 풍류당의 고문이신 정형남 선생님이 초서로 쓴 '風類山房' 이란 현판이 걸렸다. 일찍 모인 사람들끼리 먼저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 김칠선 회장은 사시사철 캡을 머리에 얹고 다니고, 송은일 교수는 일년 사이 백발이 더 무성해졌다. 송교수가 대뜸 고택산방의 자리가 자궁(子宮) 터란다. 자궁은 포란형과 유사한 비유로 들린다. 그는 이미 문화.역사나 풍수지리에도 일가견을 갖춘 풍류객이었다. 밝게 웃는 선준규 시인의 왼쪽에 앉은 문창원씨는 영락없는 청렴강인한 조선시대 선비의 ..

산문 2022.05.26

소설 '아버지의 바다' 독후감

다음은, 부산에서 종합건축사 사무실을 운영하며 신문 등 여러 지면에 에세이를 기고하고 있는 수필가 이종민씨의 글이다. 고등학교 선후배의 인연으로 귀한 글을 써준 성의에 감사하며 내 블로그에 싣는다. 1. 2022년 소설 ‘아버지의 바다’ 작가는 책 표지에 당당하게 해양소설임을 밝혀 놓았다. 해양문학은 부산 문단을 중심으로 이미 하나의 장르를 이루고 있다. 해양문학을 향한 소설가의 의지가 그 가운데에 있다. 책의 표지에 하늘과 별, 배의 선두와 머~언 육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미지는 고독과 용기와 희망을 함축한다. 남십자성인지 북두칠성인지? 특별히 빛나는 그것들은 삶의 가이드이며, 귀향의 염원이란 것을 책은 이야기하리라. 별은 책 표지를 돌아 책의 뒷면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스스로 빛나는 별이 되기..

산문 2022.04.12

藏春亭 , 봄을 감추다.

무과에 급제 후, 부사 府使를 지낸 고흥 류씨 충정공이 벼슬을 접고 향리를 찾아, 江上의 구릉에 건립한 정자다(1561년). 장춘이란 이름은 사시장절 봄만 같아란 희망을 뜻한다. 제 201호 전남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2002년도다. 그 옛날에도 뒤안 울에는 저처럼 붉은 동백과 매화꽃이 우쭐대었을 터. 동남향으로 넓은 들을 거느리고, 우측으로는 영산강이 굽이 굽이 흐르는 江岸에서, 유유자적 내노라 하는 문인학자들과 이곳에서 교류했다. 나주 다시면 죽산리. 우측에 보이는 언덕은 영산강 제방이고 그 위로 나주-목포를 잇는 2차선 강변도로가 최근 개통했다. 그 옛날 목포에서 출발한 들물을 타고 장춘정을 찾는 귀한 손님들을 실은 나룻배가 저 마당 앞으로 미끄러지듯, 다가오면 충정공은 버선발로 축담을 뛰어 내..

산문 2022.04.05

나주 금안동(쌍계정)-4

노안면 금안동의 명물은 아무래도 쌍계정이라 말하고 싶다. 일명 사성강학소(四性講學所)로 불리우는 쌍계정의 현판은 한석봉의 필체라 한다. 사성이란 나주 정씨,하동 정씨,풍산 홍씨, 서흥 김씨 를 말함인데 이들 문중에서 쌍계정에 모여 대동계를 운영했다고 한다. 금안동 동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51점의 소장문서는 鄕約 등, 조선시대 나주목의 역사와 부락의 전통문화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쌍계정의 앞 뒤로 암수 한 그루씩 늙은 푸조나무(물푸레나무,팽나무 등과 구분이 안된다)가 400년도 지난 무상한 세월을 힘차게 버티고 섰다. 신숙주(1417-75) 선생의 생가터에 옛 건물은 흔적도 없고 지금은 집주인도 떠나버린 허접한 폐가만 방치되어 있다. 조선초 왜어,몽골어,여진어 까지 섭렵했던 언어학자이자 훈민정음해례..

산문 2022.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