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장마처럼 연일 내린다. 남태평양의 여름은 우기인 11월부터 4월이라고 들었다. 그러니 지금은 겨울이고 건기인 셈이다. 다들 이상기후라 한다. 바람을 동반한 비는 세찬 소나기로 퍼붓다가 잠시 그치는가 싶더니 다시 가는 비를 뿌리기를 거듭했다. 빗물은 대부분 다공성 현무암으로 흡수되어 도로변의 절벽이나 언덕엔 흘러내리는 토사를 볼 수 없었다.
미리 약속된 안내자인 양 고맙게도 李 사장이 오전 10시 경 호텔로 찾아왔다. 서 사모아까진 아무 일 없던 로밍서비스가 이곳에 오자 차단되었다. 출국할 때 피지,사모아라고만 말했는데 날짜변경선 탓인지 서비스권역에서 제외된 것이다. 가방무게를 염려하여 떠날 때 읽을 책도 가져오지 않았으므로 무료한 시간을 달리 때울 방법이 없었다. 자연 나는 李 사장에게 가이드겸 말동무 역할을 전적으로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피지의 吳 선장의 말이 이랬다.
"그 사람 할 일도 없을낀데 부담갖지 마시고 뎃꼬 다니세요. 난 전화만 한 번 한 사이지만 괜챦을 낍니더."
그땐 할 일이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무심코 들었는데, 李는 배도 출항시킨 지 2주일이 되었고, 이곳에서 늦게 얻은 조선족 아내도 1주일 전 7살 난 아들과 3살 된 딸을 데리고 5년 만에 친정나들이를 떠났다고 했다. 고향이 중국 훈춘인데 가족들 대부분이 한국으로 넘어 와 ,애들과 지금 한국에 있을거라고 했다. 생활비라도 벌겠다고 집을 빌려 시작한 잡화가게는 서른 한 살 먹은 베트남 아이에게 왼종일 맡겨둔다고 했다. 오래 전에 터를 잡은 한국인 외에도 중국,베트남,필리핀 등지에서 허드렛 일꾼으로 넘어온 사람들이 더러 있었던 것이다. 사진을 보여주는데,李의 아내는 결혼 전 기병수 사장의 식당에서 홀써빙을 했다는, 키가 훤출한 미인이었다.
하릴없이 파고파고항의 왼쪽 끝 모퉁이를 돌아 돈내고 입장한다는 2달러 비치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영희(81세)씨의 선박수리 공작소에 들러 1시간 가량 그의 인생담을 들었다. 원주민 여자와 결혼 해 세 자녀를 두었다는데, 언젠가 한국 신문에 성공한 해외교포의 일인으로 선정돠어 기사까지 났다는 말에 쉽게 수긍이 가는 훌륭한 어른이셨다.
제법 터가 넓은 부락에서 국립공원이라는 팻말을 보고 산속으로 올랐다가 볼 것이라곤 나무밖에 없어 혀를 차며 내려오던 중 갑자기 李가 '우로'라며 웬 나무를 가리켰다. 말로만 듣던 빵나무(사진 맨 위)였다. 생각난 김에 금요일(밤새도록 야시장이 열린다 함)로 미루었던 야채시장을 들렀다.
이 열매는 사과처럼 나뭇가지에 열린다. 싸구려 빵덩어리처럼 둥글고 큼지막 하다. 거칠고 두꺼운 껍잘을 지녔지만 (세번째 사진의 녹색과일) 익으면 노랗게 되면서 향이 나고 먹기좋게 변한다. 껍질을 깐 '우루'(빵나무 열매)를 불에 데운 돌 위에 바나나잎을 깔고 익혀 코코넛 크림을 발라 일요일 같은 날 교회에서 여럿이 함께 만들어 먹는다고 했다. 돌에 구운 것을 '우무'라 하고 삶은 것은 '사카'라 했다. 빵나무는 속살이 부드럽고 희고 씨았이 없는 탄수화물 덩어리로서 본디 기골이 장대한 원주민들을 모조리 뚱보로 만드는 주범이었다. 남태평양 원주민들의 속담에 ' 빵나무 두 그루만 있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말이 있다. 그들의 주식인 빵나무는 무럭무럭 자라 플라타너스의 키높이가 되고 1년 중 8개월 동안 열매를 공급해준다고 한다.
이들의 또 다른 주식인 구근식물로 토란맛을 내는 타로/카사마(사진 맨 하단)가 있다.
타로의 줄기와 잎 또한 한국의 토란과 흡사했다(사진 위 두번째). 좀 길쭉하게 생긴 구근을
'카사마'라 불렀는데 다른 지역에서 일컫는 토란의 일종인 '라비오카'와 어떻게 구분되는지 물어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얌'이라는 것은 한국의 '마'와 같은 종류로 뿌리가 아닌 줄기라고 했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 토속음식을 꼭 먹어보고 싶다고 내가 말하자 ,李는 일요일 원주민 교회에 가야할 것이라 대꾸했다.
아메리칸 사모아는 해안리조트 시설이 빈약하여 일년에 한 두번 찾는 크루즈선이 입항해도 당일치기 관광이 전부라고 했다. 때문에 토속음식을 파는 가게는 찾는 이가 적어 모두 문을 열었다 하면 닫기 일쑤라 했다.
'비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메리칸 사모아- 7 (교민들과의 짧은 추억) (0) | 2019.08.10 |
---|---|
아메리칸 사모아-4 ( Two Dollar Beach) (0) | 2019.08.06 |
아메리칸 사모아-2 (0) | 2019.08.03 |
아메리칸 사모아 -1 (0) | 2019.08.02 |
홍어와 가오리 (1) | 2017.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