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7/28)이면 떠나야 했다. 마지막 행선지로 한국선원들이 묻힌 묘역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호텔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 제 4묘역이었다. 땅이 넓은 섬의 서쪽 Tafuna 지역에 1,2,4 묘역이 흩어져 있었고 제 3 묘역은 Starkist 공장과 마주한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한국원양어업협회의 사모아 주재원이 떠나고, 한국 선원들의 휴식처였던 코리아 하우스가 철거된 후론 한인회에서 일 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묘역관리를 한다고 했다. 호텔을 출발하면서 李가 막걸리 4통을 차에 실었다.
남태평양에 흩어져 사는 폴리네시안들은 죽으면 반드시 고향집 마당에 가 묻히기를 소망한다. 그래야 죽은 영혼에 악령이 깃들지 않는다는 미신때문이다. 땅의 대부분은 추장들 몫이고 정부청사용 공공부지 외 개인 소유토지는 지금도 극히 드물다고 한다. 그러므로 한국선원 묘지는 고향에 가지못하는 주검들을 딱하게 여긴 추장들이 무상으로 빌려준 땅이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제4묘역은 Ottoville 마을에 있었다. 묘지 일부가 비어 있었다. 4묘역애는 대략 8기가 잔존했고 1기가 이장되었을 것이라고 했다(묘가 없이 돌비석만 누워 있는 사진). 최근 한국정부의 이장지원사업으로 유해가 한국으로 옮겨져 갔다는 것이다. 시행 첫 해 4기가 이듬해부턴 한 해 1기씩 모두 6기가 한국으로 옮겨져 갔다. 이 터는 천주교 공동묘지라 했다. 사모아에서 오래 산 우영희씨 가족(삼촌 ,동생 아내 등)들도 여기에 함께 묻혀있었다.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집 마당에 묘를 쓰는데 한국인들은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 기 쓰는데 터값으로 현재 5-6천불이 지불된다고 했디.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Futiga 마을에 있는 제 1묘역이었다. 最古의 무덤은 1966년 사망자로 확인되았다. 모두 29기가 모셔져 있었는데,처음 만들어진 곳이라 그런지 고려원양,수산개발공사 소속 선명이 눈에 많이 띄었다. 사망자의 이름과 생몰연대가 적힌 돌비석이 死者와 함께 누워있었다. 누워있는 돌비석의 모습이 이채로웠지만, 돌비석이 누운 자의 얼굴인 양 오히려 내 눈엔 그것이 더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제 2묘역은 서쪽으로 조금 벗어난 Vailotai 마을 해변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언덕 아래에는 부서지는 파도의 모양이 거칠고도 세찼다. 잠든 자들에겐 파도소리 이상 안락한 노래가 없을 것이다 .이곳엔 모두 25기가 묻혔는데, 最古 사망년도가 1972년 10월이었다. 李가 손에 든 것은 다름아닌 막걸리 통이었다. 바다를 향해 누워 잠든 자들이 벌떡 일어나 저마다 목젖을 울리며 막걸리를 삼킬 듯 하다. 아-- 죽어서 억울하고,먼 이국땅에 묻혀 외로운, 늙고 목 마른 영혼들이여.
이어서 찾아간 곳은 서쪽 해안길을 따라 5분 거리인 李의 가게집이었다. 李가 주인잡 마당에 서있는 파파야 나무에서 열매를 하나 따와 반쪽을 내어 내게 맛보라며 건넸다. 몇 년전만 해도 한 달에 십만불 상당의 매상을 올렸고 약 2만불의 순익을 올렸다고 한다. 운영경비 1만불을 제하고도 생활비 쓰는데 걱정이 없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동네마다 가게가 많이 생겨 절반 수준이라고 한다. 그가 배사업에 뛰어든 주된 이유였다.
오후에 Satala 마을의 언덕에 있는 제3묘역을 찾았다.
다른 묘역과 달리 1978년 한국원양어업협회에서 주관하여 만든 위령탑이 우뚝 서서 바다를 바라본다. 위령탑은 바다에서 침몰하여 수장된 3척의 순직 영령들을 위해 세워진 것이었다.' 지남2호 선장 강정준 외 선원 22명'란 비문을 읽자마자 울컥 목이 메이고 눈물이 북받쳤다. 내가 이 섬을 찾은 바로 그 제목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박목월 시인이 지은 헌사를 읽어 본다.
바다로 뻗으려는 겨레의 꿈을 안고 오대양을 누비며 새 어장을 개척하고
겨레의 풍요한 내일을 위하여 헌신하던 꽃다운 젊은이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허망함이여,
그들은 따끝 망망대해의 푸른 파도속에 자취없이 사라져 갔지만
우리는 결코 그들을 잊지않을 것이다.
줄기차게 전진하는 조국근대화와
겨레의 번영속에
그들의 숭고한 얼과 의지는 살아있으며
수산한국의 무궁한 발전속에 그들은 영원히 숨쉬고 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의 영을 위로하기 위하여
원양어업의 뱃길이 자주오가는 이역의 태양과 성좌 아래
정성을 모아 이 탑을 세우노니.
위대한 개척자의 영이여
보람찬 겨레의 핏줄이여
이곳에 편히 깃드소서. 1978년 9월 30일
육지에 묻혀 잠든 묘는 모두 95기 (그중 6기가 이미 헌국으로 옮겨짐)였고,
지남2호 (1963년 침몰 ,23명)
ATUE호 ( 1965년침몰,23명)
남해 255호(1969년 좌초,8명)등으로 바다에 묻힌자 54명이었는 바,그들의 영령들이 여태 이곳 아메리컨 사모아의 하늘과 바다위를 맴돌고 있는 것이다.
1978년이라면 원양참치어업의 최전성기로 원양어업이 한국의 외화벌이를 주도하던 시절이었다.
이들의 희생과 공로가 파독 광부나 간호사들 보다 더 위대하고 숭고했음을 인정하고 이제는 산업약군들에 대한 추모사업을 국가적으로 펼쳐야 할 것 아니냐고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부산에서 이루어진 2018년 원양어업 60주년을 기념하는 공간에서, 부산일보에 인터뷰 기사로 실린 문인리(79세)씨가 그 사람이다.
그는 지남2호 침몰사고시 유일하게 살아남은 2명 중 한 사람이다. 당시 그는 선원들의 구조를 위해 20마일 저 편의 섬을 향해 헤엄을 쳤던 지원자 4명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모르고 있었던 해상 드라머였다. 밤새도록 무려 15시간을 헤엄쳐 갔던 그의 인간승리를 소재로, 이제 돌아가면 광복 한국의 역사적 관점에서 소설로 한번 꾸며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