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라스팔마스에서 귀국하여 기대를 가지고 시작한 북한과 수산물사업이 실패로 끝나므로 쓰라린 좌절을 겪었으며, 어느 날 우연히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생업을 전환하였다.
원양어선의 승선을 시작으로 35여년을 원양어업 분야에 매진하다가 전혀 생소한 업종에 뛰어들어 처음에는 어색하고 당혹스러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이제는 제법 익숙하여 나름대로 잘 적응하고 있다.
지금도 가끔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가는 꿈이 꾸어질 때면 아련한 바다에 대한 향수 때문에, 눈을 바로 뜨지 않고 어쩌면 현실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직도 강하게 내재되어 있음에 고소를 금치 못하곤 한다.
광주에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나 고향인 신안군 안좌면에 조부모님이 생존해 계셔서, 방학이면 찾아뵙기 위하여 형님과 함께 소주 한 되짜리 두병을 새끼로 하나로 묶은 것과 홍어 한 짝(큰 것은 반 짝)을 손에 들고 목포에서 흑산도를 가는 여객선을 승선하여 가끔은 거친 바다와 배 멀미를 체험하였다.
우리 집안 소유의 염전에서 소금을 만드는 것을 도왔으며, 집 뒤 터의 대밭에서 1년생 대나무를 골라서 낚싯대를 만들고 썰물 때에 드러난 갯벌에서 갯지렁이를 잡아 낚시질을 하였던 관계로 어려서부터 바다와는 친숙하여 어쩌면 수산대학도 거부감 없이 선택하였는지 모르겠다.
천측(天測)을 하기 위하여 육분의(六分儀 : 선박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하여 태양, 별, 달의 고도를 측정하는 항해기구)를 들고 상갑판에 서서 수평선을 응시하면서, 여름방학에 고향을 들릴 때면 뙤약볕에서 고된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마당에 깔린 방석위에 앉아 저녁식사를 한 후, 모기 불에 감자를 넣고서 익기를 기다리는 중에 하늘을 가리키며 저 별은 무슨 별하며 일러주시던 할아버지의 귀에 익은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아 은연중에 아련한 추억 속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2008. 01. 25
일등항해사로 뱃놈이 되다
1972년 2월 해군소위 임관 및 전역식장.
소위로 임관하는 후보생들은 정장을 하고, 옆에는 예비역으로 전역하는 후보생들이 근무복에 소위 계급장을 붙이고 도열해 있다. 나는 요행스럽게도 근무복을 입은 부류에 속하여 서 있는데 만감이 교차한다.
입학에서 졸업 시까지 4년 동안 학업과 병행하면서 받은 군사훈련..... 입학을 축하한답시고 막걸리를 몇 사발씩을 들이키게 한 후, 학교 앞 모래사장에서 팬티바람으로 선착순을 시키는가 싶더니, 3월이라 아직까지 차디 찬 학교 앞 바다에 아예 알몸으로 뛰어들어 목마싸움을 한 후, 모래사장에 피워 둔 모닥불에서 몸을 녹이고 이어서 계단교실에 모여 목에 막걸리가 차서 더 들어가지 않게 퍼 마시던 일이며, 1학년 때는 상남에서 해병대 훈련을 그리고 4학년 때는 진해에서 함상훈련을 하였던 과정이며, 매일 학교 정문을 통과하면서 복장 검열을 받으며 쪼그려 뛰기를 하는 일, 매년 12월이면 해군본부에서 실시하는 검열을 받기 위하여 용호만에 몰아치는 차가운 바닷바람 속에 차다 못해 아린 기운까지 시린 엠원(M-1)총의 개머리판을 오른쪽 손바닥에 움켜쥐고 어깨총으로 행진하던 것이며, 매주 토요일 과업이 끝난 후 선배들이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시키는 특별훈련 등등....
어쩌면 학업을 하기보다는 군사훈련을 받기 위하여 학교를 다닌 것 같은 엄한 군기가 졸업 후에도 선후배간의 돈독한 관계로 연결이 되어 다른 나라에서는 원양어업이 정상화되는데 수십 년이 걸리던 것을 우리나라는 단기간에 그들과 어깨를 같이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대학 2학년 연안실습을 할 때였다. 동해안에서 오징어 조업을 하는데 마침 태풍이 다가와 구룡포 내항으로 피항하여 정박하였다. 새벽에 브리지에서 급우와 함께 당직(12:00~04:00)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해저에 고정된 닻이 풍압에 견디다 못해 끌려서 선미가 방파제에 부딪치는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지도교수가 브리지에 올라오더니만 “기상 아니 비상”이라며 전 학생을 깨우라고 고함을 치더니만 쏜살같이 침실에 내려가 전 학생을 깨운다.
앵커를 감아올리기 위하여 양묘기(Windlass : 앵커를 감아올리는 기계)의 스위치를 넣었으나 작동이 되지 않아 수동으로 감아올리려고 하는데 이것도 제대로 작동되지 아니하자, 방법이 없어 부득이 학생들에게 앵커 체인을 손으로 붙잡고 구령에 맞추어 끌어올리기 시작하였다. 겨우 앵커를 끌어올린 후 다시 내려 해저에 고정시키고, 해안의 비트에 계선줄을 단단히 매고 나니 선박이 안정을 찾았다.
앵커의 끌림에 대하여는 학과시간에 배운 적은 있으나 경험이 전혀 없어 알 수가 없을 뿐만 아니고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여 기인된 것으로 학점이 우려되기도 하였으나 그래도 B학점을 수여한 것을 보면 교수님이 아량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학년 원양실습 때는 남지나해에서 참치조업 실습을 하는 도중, 태풍이 불어와 피항을 하는데 새벽녘에는 오른쪽으로 기울더니만 얼마동안 일어서지 못하기를 몇 차례, 사물함에서 온갖 물품이 쏟아지는 지라 대략 정리하고, 현창으로 밖을 내다보니 어렴풋이 보이는 바다가 온통 하얗게 넘실대는 것이 심상하지 않았는데, 다음 날 선내 분위기가 무척 무겁다.
통신장은 태풍 사라호 때 연근해 어선에 승선하였는데 이 때 죽을 고비를 넘긴 분으로, 위험한 어선을 피하여 실습선에 승선하였다. 그런데 금번에 선박이 오른쪽으로 기울 때 통신실까지 해수가 넘실대는 것을 보고 놀란 나머지 선장의 허가도 없이 SOS(Save Our Ship :조난신호)를 발하였던 것으로, 이것을 알 수 없는 우리는 다음날 미국 해군의 비행기가 우리 실습선을 몇 차례 선회하는 것을 보고 손을 흔들어 주었고, 이후 어로실습을 마치고 말레시아의 페낭항에 입항하였다.
그러나 가족에게서 보내진 편지를 받아보고 깜짝 놀라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는 통신장의 조난신호를 받고, 본선의 위급함을 해군 본부를 경유하여 미군에 협조를 요청(해군예비사관 후보생 45명이 승선하여 실습 중이었음)하였으며, 미국 해군에서는 이를 확인키 위하여 비행기를 띄워 하루에 몇 차례씩 선박 위를 선회하였던 것으로, 신문에 “부산 수산대학 실습선 백경호 조난”이라는 기사가 실린 것을 스크랩하여 보낸 기사를 보고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 그 때 회자는 담당 교수의 말씀인 “마스트만 제대로 서 있으면 선박은 안전하다” 였다.
이 때는 원양어업의 전성기에 들어선 시점으로 항해사가 부족하여 졸업 전에 거의 취업이 결정되었다. 북태평양과 라스팔마스의 대서양 트롤어업이 특히 각광을 받고 있을 때였으나, 나는 어선 갑종2등 항해사 자격증시험에 합격한 후 가능하면 선상생활을 짧게 하기 위하여 참치연승어업으로 진로를 결정하고 고등학교와 대학도 선배인 선장을 따라 일본의 시즈오카현의 야이즈항으로 선박을 인수하러 출국을 하였다.
조선소에 상가되어 있는 인수 선박에 승선하여 선박의 상태를 점검하고, 기관장과 갑판장이 제출한 수리 및 선용품 청구서 내역 등을 정리하여 선장에게 보고를 하여야 되는데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태반이다. 선박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거의 일본어에서 파생된 것을 시작으로 하여, 무슨 부품이 그렇게도 많은지 도저히 정상적으로 정리가 불가하여 선장에게 보고를 하니 처음에는 그렇다고 하면서 자신이 직접 정리를 한다. 부산에 입항하여서도 달라진 것이 없이 모든 것을 선장이 직접 작성하는 것을 보니 절로 존경심이 일어난다.
영도경찰서 뒤의 부두에 정박을 하고 본격적인 수리에 들어갔는데 가장 먼저 부딪치는 것이 부두의 건달들이었다. 돈이 되는 것이면 아무 것이나 가져가고, 심지어는 해저에 박혀있는 닻(앵커)까지도 수중에 잠수하여 떼어가는 형편이었으니 출항 시까지는 어떻게 하여서든지 공생하는 방안으로 수리 시에 선박에서 나오는 폐철을 전부 넘겨주기로 하고, 대신 선박에서 도난사고가 발생되지 않도록 협조하여 주기로 약속을 하였다.
수리를 마치고 남태평양의 사모아를 향하여 출항을 하였다. 육지의 목표물이 보이지 않을 때부터는 육분의(六分儀, Sextant : 선박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하여 태양, 달 그리고 별 등의 고도를 측정하는 항해기구)를 사용하여 태양이나 달 그리고 별들을 고도를 측정하며 이것을 선박에 비치된 214테이블(별자리 및 고도를 위치선으로 계산할 수 있게 만들어진 책)에서 찾고, 계산을 하여 위치를 산정한다. 원양실습을 통하여 위치를 산정한 경험은 있으나 막상 본선에 적용을 하려니 제대로 되지 않는다.
태양을 자주 쳐다보니 눈까지 아파오는가 하면, 일몰시간에는 수평선이 잘 보일 때에 별들의 고도를 측정하여야 하는데 늦어지다 보니 수평선에 어둠이 깔려 보이지 않아 고도를 제대로 측정할 수가 없으며 박명 시에는 반대로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태양이 밝게 비치다 보니 별들이 보이지 않아 측정이 되지 않는다.
더 한심스러운 것은 1시간 넘게 계산된 것을 위치기입용 해도(Plotting Sheet)에 옮기니 만나는 지점이 너무 광범위하여 선박의 위치를 알아 볼 수가 없는데도, 선장은 천측을 마치고 15여분 만에 정확한 선박위치가 표기된다.
밤, 낮으로 눈을 부비며 연습한 결과 2주가 넘어서자 어설픈데로 위치가 표기되기 시작하더니 차츰 숙달이 되어갔다. 이후 항차가 종료한 후 천측한 위치가 얼마나 정확한지 확인하기 위하여 입항하였을 때 천측을 하고 선박의 위치를 해도에 표시를 하였는데 거의 오차가 없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나 자신도 놀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사모아까지 항해를 하면서 어구를 정비하였으며, 모든 것이 처음으로 익숙하지 않아 손바닥이 갈라지기까지 고생을 하였으나 하나, 둘 익혀가는 재미도 있었다. 처음 승선한 선원에게 적도를 통과 할 무렵에는 바다에 붉은 선으로 표시가 되어있으니 잘 보라고 하니 몇 시간이고 망원경으로 쳐다보다가 지쳤는지 “아직도 멀었느냐”고 물어보아, 정색을 하고 “어떻게 당직을 섰는데 지나가는 것도 못 보았느냐”고 이야기하자 주위의 모든 사람이 웃는다.
출항 시부터 줄곧 배 멀미로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그저 누워만 있던 선원이 모처럼 브리지 옆에서 앉아 있다가 “웬 새가 바다에서 나와서 날더니만 바다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고 신기해하며 나를 쳐다본다. 고향이 광주로 배를 처음 승선하여 바다를 전혀 모르다 보니, 날치가 나는 것을 보고 신기하여 물어 본 것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배 멀미로 시달리더만 사모아를 출항하여서는 파도에 적응이 되었는지 정상적으로 조업에 임하게 되었다.
양승(줄을 감아올리는 작업)을 할 때에는 줄이 가볍게 올라올 수 있도록 조타기 리모콘을 사용하여 조타를 하는데, 이때 양승기(Line Hauler : 줄을 감아올리는 기계)에 올라오는 줄의 각도와 감아올리는 속도가 선속이나 조타각도와 맞지 않으면 줄이 터지게 된다.
이 경우에는 다시 줄을 잡기 위하여 부표를 걷어 올려야 하는데, 이럴 때마다 10여분이 소요되어 자주 줄이 터지게 되면 그만큼 조업이 지연되게 되어 어획에도 지장이 있으므로, 조타를 잘하는 것이 항해사의 가장 큰 업무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나는 전혀 경험이 없으므로 어느 정도 숙달될 때까지는 선장이 전적으로 조타를 할 수 밖에 없으며, 이때 옆에서 보고 익히는데 보기보다는 쉽지가 않다.
조타가 조금 숙달이 되자, 투승작업을 익히기로 하고 낚시에 꽁치를 꿰고 일정한 시간으로 던지는데 등줄기에 진땀이 흐른다. 이 때 만약 잘못되어 낚시에 손이나 옷이 걸리는 경우에는 줄과 함께 바다에 빠져 죽을 수 있으므로, 이 작업은 갑판장(갑판부 선원의 우두머리)이나 1갑원 등 숙달된 선원들만이 할 수 있으며 또한 낚시에 꽁치가 잘못 꿰어지면 수중에서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거나 양승 시에는 수중 마찰로 인하여 떨어져 나가 참치가 물지 않는 등 어획 성적과도 직결이 되므로 낚시가 정확하게 꽁치의 머리에서 꿰어 입으로 나와야 한다.
또한 시간이 있을 때에는 방한복을 입고 어창에 들어가 급냉실에서 냉동된 참치를 어창에 내려 쌓아올리는 것을 도왔다. 이는 제대로 쌓지 못할 경우 어창에 많이 적재할 수 없을 뿐만 아니고, 하역 시 고기가 서로 엇물려 올라오다 갑판에 떨어지면 위험하기 때문에 고기의 크기와 형태 등을 고려하여 적절하게 배치하여야 한다.
3개월여 조업을 하여 약150톤의 참치를 어획하고 사모아에 입항하여 하역을 마친 후,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하여 선장이 사관들과 함께 한국식당(Korean Restaurant)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식당에 뛰어드는가 싶더니 뒷문으로 쏜살같이 빠져나가자마자, 대만 선원들 7~8명이 손이 몽둥이며 칼을 들고 들어선다. 먼저 보였던 선원이 우리배의 선원인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뛰쳐나가 그들의 앞에 막아서는 순간 코리아 싸이떼(한국 나쁘다는 일본어) 하고서는 술병이 진열되어 있는 진열대에 가지고 온 것들을 던져 박살을 내고 홀연히 사라진다.
이 때 도망갔던 선원은 얼굴에 있는 마마자국으로 인하여 첫 인상이 고약하게 느껴졌던 모양으로, 상륙하기 위하여 본선 옆에 계선하고 있는 대만선박을 지나면서 대만선원들이 갑판위에서 마작을 하는 것을 보고 무어라 이야기를 하였는데, 평소에도 목소리가 큰 것을 모르는 그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렸는가 보다. 무언가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한 것으로 오해를 하여 화가 잔뜩 난 대만 선원들이 앙갚음을 하려고 그를 추적하여 이런 일이 발생하였던 것으로 내가 그 배를 방문하여 상세하게 설명을 하니 오해를 풀고 미안하게 되었다며 사과를 한다.
며칠 후 저녁식사를 하고 갑판장과 선원의 집(Crew's House)들려 맥주를 마신 후 배에 들어서는데 선미부근에서 고함소리가 들린다. 조기장(기관부선원의 우두머리)이 한손에는 칼을 다른 손에는 기관실에서 쓰이는 제일 큰 드라이버(Driver)를 들고 설치는 바람에 모든 선원들이 갑판으로 피하여 진정되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장에 가서 강제로 제압을 하여 손에 든 것을 빼앗자마자 선원들이 달려들어 무지막지하게 두들기는 것을 만류한 후 침대에 눕히고 나니, 어떻게 스쳤는지 모르겠으나 왼쪽 이마에서 피가 흐른다. 밤 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아침에 세수를 하기 위하여 나서는데 누군가 뒤에서 내 손목을 꽉 잡는다. 뒤돌아보니 온 몸에 성한 곳이 없이 두들겨 맞은 조기장이 잘못했다며 눈물을 흘리며 사과를 한다.
귀국을 시키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맞은 자국이며 눈물을 보니 약해진 것인지, 아니면 이렇게 하선하게 되면 이 후로는 원양어선을 탈 수 없다는 절박한 현실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선장에게 한번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고 보고를 한 후 계속 승선을 시켰는데 다행히 무사히 조업을 마칠 때까지 성실하게 주어진 업무에 충실하였다.
출어준비에 여념이 없는데, 본사로부터 북대서양의 카리브해 동부에 위치한 센트마틴항으로 기지를 옮기라는 지시가 있어 파나마로 향하여 출항을 하였다. 파나마 운하를 통과 후 카리브해에 들어서니 제법 거센 파도가 뱃전을 때리면서 우리의 출어를 반갑게 맞이한다.
파나마 운하는 장장 64km의 운하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두 호수의 표면수고(카툰호 : 25.9m, 미라폴로레스호 : 16m)의 차이가 있어 항해를 할 수 없으므로, 갑문식도크를 만들어 이곳에 물을 넣거나, 빼어내 배를 상하로 움직이게 하여 해수면과 같은 수위가 되면 배가 바다로 나가거나 호수로 갈 수 있게 되어있는데, 도선사(Pilot : 파이로트)가 승선하여 6시간여 동안 조선을 지시하면서 한국전에도 참석을 하였으며 김치와 라면 그리고 인삼을 좋아한다.
황다랑어(Yellow Fin Tuna) 및 날개다랑어(Albacore Tuna)를 주 어종으로 하여 이곳에서 2항차를 마치고 어획물을 하역 후 출어준비를 하며 브리지에서 당직을 서고 있는데 갑자기 선미 쪽에서 불이야 하는 소리가 들려 뛰어가 보니 선원 침실에서 불이 나 새카만 연기가 오르고 있다.
급 한데로 식당 옆에 비치된 소화기를 들고 불을 끄려고 시도를 하여보았으나 짙은 연기와 열기 때문에 눈을 뜨거나, 숨을 쉴 수가 없고 접근이 불가하여 약간 떨어진 통로에서 소화액을 최대한 뿌린 후 뛰쳐나왔다. 공기를 차단하여 불길을 잡기 위하여 선원침실로 연결된 모든 문을 닫고 공기창을 통하여 물을 주입시켜 보았으나 불길이 잡히지 않는다.
기관장은 혹시 기관실에 화재가 옮겨 공기탱크에 불이 붙으면 폭발할 위험이 있으므로 공기를 빼내었으며, 선원들은 어떻게 화재를 진압하여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누가 신고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이 때 마침 소방차가 도착하여 본선에 소화호스를 넘겨주므로 현창을 깨고 화재부위에 물을 뿌리니 다행히 불길이 잡혔다.
그간 시간이 있을 때면 가끔 비상훈련을 실시하였는데도 막상 화재가 발생하고 나니 불길을 잡는데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자신의 안전을 우선 생각하여 행동하는 선원들을 보니 한심스럽기도 하였으나 현실임에야 어쩌겠는가. 바다에서 조업을 하는 중에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던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으로 생각하며 피해상황을 점검하였다.
오른쪽에 위치한 선원침실은 전소되었으나 다행히 다른 피해는 없었으므로, 조선소가 있는 키라샤오에 입항하여 제반을 복구한 후, 그간 말로만 들었던 날개다랑어를 잡기 위하여 아조레스 어장으로 출항을 하였다. 이곳은 허리케인이 발생하면 통과하는 매우 해황이 거친 어장으로 파도가 높아 조업 중 몇 사람의 희생이 발생되기도 하나, 이 시기가 날개다랑어의 성어기로 많이 잡힐 뿐만 아니고 어가가 다른 어종보다 고가이므로 위험을 무릎 쓰고 조업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동안 계속된 황천으로 천측이 불가하여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고 추측 위치 만으로 조업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선장이 통신사가 수신한 기상도를 보면서 “저기압 발생 예상위치에 선박이 가까이 있으니 계속하여 기압이 떨어지면 낚시의 수를 줄이라”고 당시의 당직인 2등 항해사에게 지시하였으나, 바다가 너무 잔잔하여 그만 해동하여 준비된 베이트에 맞추어 평소보다 많이 투승을 하고 말았다.
선장이 잠에서 깨어난 후 확인하니 기압계가 980mb를 가리키고 있다. 기상의 전조가 아무래도 이상하였든지(저기압 중심의 경우 기압이 낮고, 바람이 없으므로 바다가 잔잔함)바로 양승을 하라고 지시하여 대기 시간이 없이 바로 양승을 개시하여 가능한 빠르게 낚시를 감아올리고 있는데, 저녁 무렵쯤이 되자 수평선이 보이지 않고 온 사방이 새카맣게 높은 벽을 두른 것 같더니만 우리를 삼킬 듯 다가서고 있다.
선장에게 긴급 보고를 하니 브리지에 올라 온 후, 너무 놀란 나머지 제대로 지시를 내리지 못한다. 우선 조업을 중단시키고 선원들을 침실로 들어가게 하자마자 파도가 배를 덮친다. 교과서에서 공부한데로 엔진은 전속을 하지 못하게 하고 또한 키는 전타를 하지 못하게 지시를 하고는 더 이상 침묵이다.
선박은 조정 능력을 이미 상실하고 삼각파도에 휩쓸리기 시작하였다. 파도 위에 올라서는가 싶으면 이미 파도는 없어지고 마치 비행기를 탄 것같이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나 그래도 공중에서 넘어지지 않고 바로 서있는 것만도 기적이요, 파도 속에 곤두박질하면 하늘은 보이지도 않고, 바로 선박을 삼킬 듯이 덮치는 파도는 무엇이나 부딪히는 데로 휩쓸고 지나가고(톱 브리지의 마그네틱 컴퍼스, 어구창 등) 영영 물 속에 잠길 것 같은데, 다시 위로 솟구치는가 하면 또 처박혀 깊은 심연 속에 빠져들고....
여름 방학이면 뙤약볕에서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와 저녁식사를 물린 후, 멍석위에 앉아 모깃불에 감자를 넣고 익기를 기다리는 중 하늘의 별을 가리키며 별자리 이름을 동요에 맞추어 부르던 할아버지의 다정한 음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윙윙 울어대는 안테나 울음 속으로 사라지고, 부모님과 형제들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르더니 백파 속에 갇히면서 영상을 지운다.
사랑한다는 말을 꺼내는데 그렇게 어려웠던 여자친구와 기장 해수욕장에서 가졌던 첫 키스의 달콤함이 온 몸을 감싸는가 싶더니, 파도의 정점까지 솟구쳤다가 바다 밑까지 닿을 것 같이 아스라이 떨어질 때에는 짜릿한 전율이 피부의 솜털까지 곤두서게 한다.
선원들은 모두 선실로 피난을 하고 승선 경험이 많은 기관장 및 갑판장이 브리지에 올라와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그간 수많은 태풍을 겪은 역전의 용사들이지만, 이렇게 태풍의 중심에 갇혀 보기는 처음들이라 그저 새파랗게 질린 체 입을 꼭 다물고 바다를 응시할 뿐이다.
전혀 파도의 방향이나 크기를 예상하지 못한 삼각파도의 산을 탈 때면 이것이 끝인가 하고 눈을 감고, 파도의 골에 쳐 박힐 때는 배가 부스러지지 않고 다시 하늘이 보기를 기원하면서 눈을 감고.....
이렇게 반복하기를 얼마동안 하였는지 모르겠으나, 문득 선박이 일정하게 요동하는 것을 감지하고 백파가 휘날리는 바다를 응시하니 여전히 파도는 여전히 높고 거칠기는 하나, 그래도 일정하게 골을 유지하는 것을 보니 태풍의 눈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안도의 숨을 쉬면서 선미로 바람과 풍랑을 받으며 피항을 하였다.
인근 조업선에서는 선원이 바다에 빠져 실종하였다고 하는가 하면, 선원이 부상을 입었는데 선내에서 치료가 불가하여 입항을 한다고 하니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그래도 다행스럽다. 그때만 해도 외국에 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고, 계약기간이 끝나면 집을 한 채 마련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30개월 동안 가족과 떨어지는 아픔을 감수하고 원양어선에 승선하였을 터인데, 파도에 낙엽처럼 흔들리면서 겨우겨우 넘어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모습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이렇게 고생을 할 바에는 다시는 배를 타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대다수는 뭍에서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 면서 승선을 하리라 본다.
오직 파도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린지 약 2일, 태풍에서 벗어난 것을 확인하고 어구에 채워둔 라디오부이(Radio Buoy : 전파발신 부표로 어구의 위치를 알기 위하여 일정한 간격으로 채워놓음)의 소리를 방향탐지기로 확인하고 선수를 고정한 후, 2등 항해사에게 당직을 인계하고 침실에 들었는데, 그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이틀간 꼬박 뜬 눈으로 새워 피곤이 극에 달하였는데도 잠이 오지 않는다.
결국은 파도에 토막 난 어구를 찾고, 건지는데 거의 하루를 소모하였으나 상당량의 어구를 분실하였고, 선원 중 몇 사람은 부상을 당하여 치료를 받는 것을 보며 새삼 자연 앞에 무력한 인간의 한계를 체험하였다.
항차수가 증가하면서 한국에서 가져온 부식이 부족하게 되었으나 워낙 기지가 먼 곳에 있기 때문에 보내어지는 것도 여의치 못하여 부득이 김치부터 통제를 하기 시작하였다. 냉장고에 장기 보관한 점도 있으나 얼마나 불량한 재료를 넣었는지 고춧가루의 붉은 색깔은 아예 띄지도 않고 허옇게 변색이 되었는데도 이 마저도 부족하니 항차가 끝날 무렵에는 반찬이 떨어져 밥에 물을 말아먹기까지 하였다.
70년대 초에는 어구의 국산화가 실현되는 단계에 접어들어 우선 참치선에서 사용하는 주승(主繩 : Main Line, 주낙을 펼치는 줄로서 낚시찌를 일정한 간격으로 부착하여 일정한 수면으로 띄움)과 간승(幹繩 : Branch Line, 주승에 일정한 간격으로 부착하고 반대편에는 낚시를 연결하는 줄)이 생산되어 시험용으로 각 선박에 제공이 되었는데 꼬임과 파단력(破斷力 : 줄이 절단되는 힘)이 일정하지 않아 조업에 지장이 많았다.
중부에서 조업 시에는 황다랑어가 수심이 얕은 곳에서 유영을 하는 관계로 줄을 띄워서 투승을 하여 그런대로 괜찮았으나, 북부에서 날개다랑어를 잡을 때에는 깊은 곳에서 유영을 하는 관계로 낚시를 깊게 투승을 하므로 주승과 간승의 간격이 좁고, 조류가 잘못 흐를 경우에는 서로 얽히게 되어 양승 시 서로 꼬여서 올라오기 때문에 위험할 뿐 아니라, 다음 투승을 하기 위하여 반드시 이것을 전부 풀어서 어구를 꾸며야 하기 때문에 더러는 투승이 끝날 때까지 정리를 하고 나면 겨우 2~3시간 정도 밖에 잠을 자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날개다랑어를 잡기 위하여 북부어장에서 조업을 하면, 날씨가 차고 거친 파도 때문에 갑판에 파랑이 날리므로 항상 우의를 머리까지 덮어 쓰는데, 이렇게 며칠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시달리다 보면 갑판위에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 줄을 손에 잡은 체, 그대로 잠깐이나마 잠이 드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매우 위험하여 잠을 �기 위하여 커피를 아주 진하게 타서 돌리고 있는데, 나이 많은 선원 한 사람이 한숨을 푹 쉬더니만 “부모님이 하루 밤만 그 짓을 안했더라면 내가 이 고생을 하지 않을 것인데” 하면서 자조한다.
순식간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으나 듣는 마음들이 씁쓸하다. 그는 파나마 입항 시 술집에서 여자와 즐긴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성기가 아프다며 죽는 시늉을 하여 항생제를 투입하였으나 잘 낫지도 않아 꽤나 고생을 하였던 선원으로 두 자식을 가진 어엿한 가장이었음에도 이런 이야기가 절로 나오는 것을 보니 무척이나 견디기 힘들었나보다. 그러나 조업을 마치고 입항을 하면 그렇게 성병으로 고생을 하였으면서도 제일 먼저 술집에 가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을 보면 여자 밝히기는 무척 밝혔나보다.
첫 선장
항차를 마치고 출어준비에 한창인데, 대리점에 들려 본사에 전화를 하고 귀선한 선장이 나를 부르더니 그간 수고가 많았다며 귀국을 하라고 한다. 대학 동기들 중 다른 어장에서 조업을 하였던 몇몇은 이미 선장으로 발령을 받았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막상 나에게 현실로 다가서니 기쁨보다도 걱정이 앞선다.
푸에르토리코와 동경을 경유하여 서울에 도착하니, 봄철이지만 아직까지 추위가 남아있어 통행인들이 모두 긴 옷을 입은 겨울복장이었는데, 나는 짧은 소매의 여름 복장에 얼굴도 새까맣게 타 있어 스치는 사람마다 쳐다본다.
어제 저녁 일본의 동경에 도착한 후, 호텔에서 식사를 하기 위하여 식당에 들어서는데 입구에서 웨이터가 양복을 입지 않았다고 출입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한국인이라 차별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여 화가 난 나머지 어떻게 해서든지 식사를 하여야겠으니 필요한 준비를 해주도록 요청하여 결국은 다른 사람의 옷을 입고 입장하여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식사를 한 후 나서면서 여행사에서 제공한 식사쿠폰을 내밀었더니, 이 식당은 쿠폰을 사용하는 곳이 아닌 고급식당이라며 식대를 지불할 것을 종용하여 한참 동안을 실랑이를 한 기억이 새롭다.
본사에 들리니 반갑게 맞으며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여 주었으나, 본선 선장에게는 지금 귀국을 시키면 내가 맡을 마땅한 선박이 없으므로 한 항차를 더 조업 후 보냈으면 한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빨리 보냈으니 부득이 교체선박이 나올 때까지 집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선장은 내가 한 항차를 더 승선할 경우 본인이야 편안하겠으나 아마도 다른 동기들보다 늦어질 것을 우려하였으며, 설사 우리 회사의 선박이 없더라도 다른 회사의 선박은 충분히 승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집에 들려 인사를 드린 후, 부산에서 학교에 다닐 때 하숙하던 곳에 숙소를 정하고, 이미 선장의 발령을 받고 대기 중인 동기들의 회사와 선박을 찾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업계의 동향을 파악하고 또한 어느 회사의 선박을 승선할 것인지 수소문을 하였다.
DW어업으로부터 사무실을 방문하여 달라는 전문이 있어 다음 날 들리니 반갑게 맞으며, 이력서를 보더니 선장으로 승선하기를 종용한다. 인도양에서 조업 중인 선박의 선장이 술을 너무 좋아하다보니 제대로 조업은 하지 않고, 술이 있는 선박마다 찾아다니며 마시다보니 어획실적이 부진하여 교체를 하기로 하였단다.
회사를 나와 여러 선배들에게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고 자문을 구하니 선박의 상태는 괜찮다고 하며, 선장이 열심을 다하면 조업에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승선을 수락하고 선박은 몸바사에서 인수하는 것으로 하여 다음 날부터 선원구성에 들어갔다.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임명을 받자마자 남포동과 광복동에 위치한 술집으로부터 먼저 축하한다는 전화가 걸려오는가 하면, 저녁에 나서니 아예 술값은 출항 전에 지불하라면서 서명만 하라고 한다. 출항 전에 전도금을 받으면 한꺼번에 지불하는 것과 뱃놈들은 외상값을 결코 떼어먹지 않음을 알았으리라. 항해사와 선장의 위상에 대한 차이가 실감이 되었으며 출국하면 다시 이곳을 찾기까지 30개월, 아니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단골로 정한 부천동에 있는 룸 사롱에서 가끔 통금시간이 되면 아예 문을 닫고 밤새도록 마시기도 하였다.
광복동에서 기관장, 통신국장과 저녁을 하고 술집을 찾고 있는데 우연히 고등학교 동기를 만났다. 해군사관학교를 같이 지원하였는데, 나는 신체검사에서 낙방을 하여 수산대학을 택하였고, 그는 중위로 고속정 정장을 하고 있었다. 그가 생도시절인 어느 토요일 오후, 나를 만나기 위하여 자취집을 들렸는데 문이 잠겨있어, 학교에 찾아왔는데 마침 선배들로부터 혹독하게 특별훈련을 받는 것을 보고 사관학교보다 더한다고 혀를 두른 적이 있었는데 그 후 처음으로 만났다.
룸 사롱에 들려 잔을 나누며 옛날이야기로 꽃을 피우다 헤어졌는데 “만약 네가 사관학교에 들어왔다면 나보다 더 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며 여운을 남긴다. 아마도 같이 입학을 하였다면 서로 의지가 많이 되었으리라. 군 시절 잠수함에 대하여 공부를 많이 하여 독일에 무관으로 있기도 하였고, 별 하나를 따고 전역을 하였으니 실제로는 나보다 더 잘하였던 것 같다.
1974년 추석 당일 케냐국의 몸바사에서 선박(DW61호)을 인수하기 위하여 인수선원(기관장 외 5명)을 인솔하고 비행기에 탑승을 하였다. 한 밤중에 나이로비에 도착하여 입국수속을 마친 후 밤새 자연동물원을 경유하여 몸바사에 정박 중인 본선에 승선하여 인수를 받고 보니, 그간 본사로부터 들은 것과는 다르게 선박의 상태가 좋지 않다. 본선을 상가하여 수리하기 위하여 아프리카의 동부 모잠비크 섬의 남동부에 위치한 포트루이스로 출항을 하였다.
전임 선장으로부터 자이로컴퍼스(Gyro compass : 자이로스코프의 원리를 응용한 것으로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팽이의 축이 지구의 자전에 의하여 항상 남북을 가리키도록 한 장치로, 철의 영향을 받아 오차가 생기기 쉬운 자기컴퍼스 대신 선박에서 사용한다)가 고장이라고 인수를 받아 아예 자동 항법 장치를 사용하지 못하고 마그네틱 컴퍼스(Magnetic compass : 자기컴퍼스)를 이용하여 수동으로 항해토록 하고, 항해사에게 당직을 맡기고 잠이 들었는데 선박의 움직임이 이상한 것 같아 잠에서 깨었다. 현창으로 밖을 내다보니, 선수와 부딪치는 파도의 방향이 일정하지 않고 태양의 위치가 이상하게 움직인다. 놀라서 브리지에 올라가보니 알코올 냄새가 가득하고, 반사경에 비치는 마그네틱 컴퍼스 각도가 일정하지 않고 제멋대로 움직인다.
톱 브리지에 올라가 확인하니 컴퍼스 용기가 지지대에서 떨어지면서, 손상을 입어 용기 안의 알코올이 모두 새어나와 이미 균형을 잃어 각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파도의 흔들림에 따라 제 멋대로 회전하고 있었는데, 경험이 없는 신출내기들이라 이것을 모르고 반사경에 비쳐지는 각도만 따라서 조타를 하고 있으니 선박은 제 자리에서 빙빙 돌고 있을 뿐이었다.
방향탐지기로 우선 목적항의 무선국에서 발신되는 음을 수신하여 방향을 고정시킨 후 파도의 각도를 보고 조선을 하도록 하였다. 다행히 아열대 지역으로 파도의 방향이 일정하여 항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나 포트루이스에 도착 시까지 제대로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하였으며, 이때까지도 아직까지 앞길에 비치는 고난의 서곡인 것을 알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기지장이 자동차를 운전 하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게 보여 운전면허도 없는 주제에 가끔 자동차 키를 넘겨받아 서투르게나마 운전을 하였으나, 밤이면 원주민의 피부색깔이 검어 잘 보이지 않아 애를 많이 먹었으며, 핸들이 오른쪽에 있어 나중에 국내에서 운전할 때에 적응하기에 고생이 많았었다.
포트루이스에서 상가수리를 마쳤으나 가장 중요한 항해장비가 현지의 기술부족으로 제대로 수리가 되지 않고, 어구도 부족하여 출항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기다리는 것도 언제까지라고 확답을 들을 수 없는 막연함이 계속되었다. 무작정 기다리는데 지쳐, 현지에 파견된 본사 직원에게 누구보다 현재의 실정을 잘 알고 있으니 조업에 지장이 없도록 조속한 시일 내에 제반을 조치하여 줄 것을 요청하고 출항을 하였다.
이 즈음 인도양 전역에 불어 닥친 불황으로 태평양으로 어장을 이동하는 선박이 속출하였고, 유가의 앙등에 어가의 하락 등으로 기지를 위주로 한 조업(참치 통조림용을 어획하는 것으로 주로 황다랑어 및 날개다랑어를 어획함)에서 독항선 조업(횟감용 참치를 어획하는 것으로 주로 눈다랑어를 어획하며, 무엇보다도 선도가 중요하고 어획물의 처리 및 급냉, 보냉하는 방법이 까다로움) 으로 전환을 하였다.
조업 중 수일에 걸쳐 고장 난 자이로컴퍼스를 점검 결과, 감도가 과민하게 조절되어 떨림 현상이 있었던 것으로 이를 조정하니 약간 소음이 있었으나 정상적으로 작동이 되어 이후로는 자동으로 조타가 되어 한결 수월하게 조업을 할 수 있었으며, 부족한 어구이지만 이를 보완하고자 조류의 흐름을 파악하고 주낙의 소해면적을 최대한으로 넓게 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노력을 한 결과 어획도 주위 선박보다는 떨어지지 않아 다행스러웠다.
하루라도 빠르게 본선용으로 탁송된 어구 및 주, 부식 등을 인수받아야 정상적인 조업이 되겠는데, 해당선박은 어느 정도 어획이 되는지 인도네시아 어장에서 꿈적도 하지 않아, 부득이 본선이 조업을 중단하고 며칠간 항해 하여 탁송된 물품을 인수받고 조업을 재개하였으나 어황이 신통하지 않았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현재의 불황을 타개할 방안이 없다고 판단되어 며칠을 고심하고 연구를 한 끝에 과거 일본 조업선들의 조업실적을 분석 한 결과, 태평양 서부에서 회유하는 눈다랑어가 봄철에는 산란을 하기 위하여 남지나해의 산호초 부근으로 이동하는 것을 포착하고 모험을 걸어보기로 하였다.
한국 어선으로서는 한번도 조업을 하지 않은 남지나해 조업을 하기 위하여 어구를 정비하고 말라카해협에 들어섰는데, 본사에서는 어장을 이탈하지 못하게 지시를 하는가 하면, 만약 본사 지시를 어기고 이동시에는 하선조치를 하겠다고 하는 협박성 전문까지 입전되었다. 그러나 다시 선수를 인도양으로 돌릴 수도 없어 “하나님만이 결과를 알 수 있다”는 전문을 발송하고 싱가폴을 통항하였다.
어로계약서에는 분명히 어장을 이동시에는 사전에 본사의 허가를 득하도록 명기가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안중에 두지 않고 강행을 한 것은, 첫 선장으로서 경험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감과 패기가 만만한 선장으로, 실패를 생각하는 두려움보다는 도전을 하여 이루겠다는 의식이 강하였으리라 생각한다.
싱가폴 해협을 밤새 통항하고 등대를 막 벗어나려고 하는데, 선내가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기관장이 헐레벌떡 브리지로 뛰어와 “큰일 났다 냉동기가 고장이 났다”고 하며, 선내에서 자체적으로는 수리가 불가하니 싱가폴에 입항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본사의 허가를 득하지 않고 남지나해로 선수를 돌려 조업을 강행하려는 마음으로 착잡하기 그지없는데 눈앞이 캄캄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창에 채워져 있는 어획물의 선도를 유지하는 것으로, 냉동기가 정상적으로 운전이 되지 않는다면 그간 애써 어획한 고기를 제 값에 판매할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여서든지 최단시간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야 하는데 난감하다.
먼저 현장을 확인하고자 기관장과 함께 냉동기실에 급히 들어가서 원인을 확인하니 자동개폐기의 코일이 3대가 전부 타버렸다. 자동개폐기는 전원을 연결시켜주면 자동으로 떨어지는 안전장치이므로 이것이 없다고 하여 운전을 못할 것으로 보이지 않아 동 장치를 제거하고 접점을 퓨즈로 직접 연결을 하여 운전을 해보라고 지시한 후 브리지에서 담배를 질근 씹으며 기다리고 있으니, 냉동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고 기관장이 올라와 정상적으로 운전이 된다고 한다.
한 숨을 돌리고, 남지나에서 조업에 들어가니 예상대로 씨알은 좋으나 어획량이 따르지 못한다. 초조한 가운데 며칠간 어장을 탐색하며 추적을 계속하니 제법 잡히기 시작한다. 어장이 상선들의 항로상에 위치하여 본선 주위를 통과하는 선박이 많아 충돌을 피하며 조업을 하느라 신경이 곤두세워지지만, 역시 산란기 전이라 기름기가 많은 눈다랑어가 매일 30~40 마리(50~60키로그람/미)정도씩 어획이 되어, 그간의 마음고생을 떨칠 수 있어 홀 가뿐 하였으며, 약 15일 조업 후 만선하여 귀국을 하였다.
이 어장에서 조업을 하고 있는데 조그마한 어선 한척이 접근하여 망원경으로 확인하니, 선명이 한글로 보이는 것이 무척 반갑다. 이곳까지 상어를 잡기 위하여 출항을 하였으며 만선하여 귀항 길에 들어섰는데 로란(Long Range Navigation : 2개 이상의 기지국에서 발신되는 음의 수신하여 위치를 내는 기기)의 고장으로 위치를 알 수 없으니 알려달라고 한다. 이 먼 곳까지 고기를 잡으러 오는데 로란 하나만 의지하여 조업을 하는 것이 대단하기보다는 무모하기까지 비추어진다. 위치를 기입한 용지와 함께 양주와 담배를 넘겨주고 소주를 선물로 받았다.
부산에 입항을 하니 수속을 마친 후 오후에 출항을 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모든 것이 완비되지 않은 상태로 출항을 한 관계로 겪지 않을 고생을 한 것과 마지막에는 어장 이동 문제로 야기된 엄청난 심적 갈등 등이 떠오른다. 선원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냥 얼굴만 쳐다본 후, 출항을 한다고 생각하니 올라오는 분을 참을 수가 없어 “배를 타지 않아도 좋으니 오늘은 출항을 하지 않고 내일하겠다 ” 하며 본선을 떠나니, 직원들이 붙잡고 설득한다. 그러나 내 뜻이 워낙 완고하여 굽히지 않는 것을 보고 다음 날로 출항을 연기하였다.
요코하마는 처음이라 잔뜩 긴장하여 입항한 후 부두에 접안을 하니, 크레인이 설치되어 있고 인부들이 하역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다. 남지나해에서 어획된 참치가 하역되자 육질과 씨알 좋은 것을 보고, 하역 전에 제출된 어장도에 기입된 어획량을 확인하더니만 만족스러워 한다. 남지나해에서 어획된 참치가 고가로 평가되어 동일시기에 하역한 타 선박보다 약500불/톤을 더 비싸게 판매 할 수 있었다.
파나마 기지에서 나래를 펴다
결과가 예상보다 좋다보니 어장을 이동하면 곧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던 소용돌이가 잠잠하여 졌고, 집에 들려 귀국 인사를 하여야 하는데 첫 항차 이래저래 고생이 많았는지 체중이 5키로 이상 빠진지라 일주일간 회복을 하고 고향에 들렸다. 다시 부산에 돌아와 출항 준비에 여념이 없는데, 본사에서 서부 태평양(기지 : 파나마, 어장 : 멕시코 및 코스타리카 서해안)으로 출항하여 돛새치(Sail Fish)를 잡으라고 한다. 국내에서는 처음 시도되는 조업으로 아무런 자료가 없어, 우선 급 한데로 일본의 자료를 분석한 후, 여기에 적합하게 어구를 개조하고 또한 베이트도 고등어로 바꾸는 등 출항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일본에서 중고선을 도입할 시점에서부터 선박을 운용에 필요한 제반 비용에 대하여, 상호 한도를 정한 후 고기를 판매 시 공제하는 조건으로 자금을 일본의 상사로부터 차입하고 있는데, 이렇게 불황이 장기화 되면 부득이 한도를 초과하게 되고 결국은 일본 상사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으므로 향후 회사의 경영상태가 불안스럽기도 하나, 첫 선장으로 그것도 겨우 1항차를 마친 풋내기로서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출항을 하였으며, 하와이의 호노루루항에서 유류를 공급받은 후 코스타리카 서해안에 도착하여 조업을 개시하였다.
호노루루에는 술집이 100여개 있었는데, 대부분이 한국의 교포들이 운영을 하고 있었다. 국제결혼을 하였으나 현지에서 적응을 하지 못하여, 이혼을 한 후 자구책으로 영업을 하고 있는 곳으로, 무엇보다 말이 통한다는 반가움에 들린 선원들에게 바가지요금을 청구하여 실랑이가 있기도 하였으며, 더러는 선원들을 꼬아 하선을 유도하기도 하여 조심스러운 곳이기도 하였다.
거의 육척장신에 육박하는 건장한 선원이 와이키키 해변을 걷고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인이 접근하더니 따라오라고 하여 영문도 모르는 체 호텔의 방에 들어섰다고 한다. 샤워실을 가리켜 샤워를 하고나니 침대로 유인되어 운우의 정을 나누고 방을 나서는데 수고했다며 30불까지 주었다고 하니 다른 선원들이 한잔을 사라고 득달이다.
그러나 제법 잘 생긴 통신국장이 들린 곳은 아마도 호모들의 술집이었던 것 같다. 가볍게 맥주를 한잔 마시고 있는데 웬 남자가 접근하여 치근대더니만 칼을 옆구리에 대고 강제로 유인하여 나쁜 짓을 저질렀던 것 같았다.
기관장, 통신국장과 함께 시내를 돌아본 후 귀선하면서 편의점에서 맥주와 안주를 사서 공원의 벤치에 앉아 마시려는 순간 경찰오토바이가 다가서는가 싶더니 공원에서 술을 마실 수 없다고 한다. 그저 놀라서 주섬주섬 챙겨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공원의 게시판에도 술을 금한다는 공고가 붙어있었다.
참치선의 경우 통상 새벽에 조업이 개시되어(4시경) 9시까지 주낙을 바다에 던지며(투승이라고 하며 연승길이 약 130키로미터, 낚시수 약 3,000개), 11시경 던져진 주낙을 건져 올리게 되는데(양승이라고 함), 이튿날 새벽(2시경)에 조업이 종료되며, 이때 선장은 적절한 지점으로 어장을 이동하면서, 조업 개시 전에 조업일지에 침로 및 낚시수를 결정하여 기록하여 지시하고, 투승이 되는 것을 확인 후에는 취침한 후, 양승이 시작되기 전에 일어나 제반을 확인하고 양승을 시작할 때 진두지휘를 한다.
그러나 나는 투승을 하는 것에서 조업의 성패가 결정된다고 생각으로 이것을 가장 중요시 하여, 투승 전부터 투승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브리지에서 어군탐지기 및 수온계를 감시하고 해황의 변화를 주시하여 필요시에는 사전에 결정된 침로를 바꾸기도 하며, 만약 사치(고래의 일종으로 머리가 좋으며 참치를 무척 좋아하여 군을 이루어 사냥을 하는가 하면, 낚시에 걸려있는 참치의 경우에는 낚시가 걸려있는 걸린 부위를 제외하고 먹는다)가 출연될 시에는 조업을 하여도 잡히지 않으므로 투승을 중단하는 등으로 조업을 하였다.
특히 돛새치(Sail-Fish)의 경우 연안에서 회유를 하는 어종으로 어군탐지기를 이용하여 좋아하는 수심 및 수온을 찾기 위하여 노력한 결과, 적은 낚시를 사용하고서도 타선보다 월등하게 많은 어획을 올리게 되었으며, 일본에서도 어획보고에 무척 놀라 본선이 입항 통보를 할 때면 가끔 만선 입항을 하는 것이 아니고 사고로 입항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이를 확인하는 전문이 입전되기도 하였다.
이 어장은 갈라파고스와 함께 거북의 산란지로 유명한 곳으로 잘못 투승이 될 경우에는 수십 마리의 거북이 낚시에 걸려 올라오는데 무게가 무거울 뿐 만 아니고, 선박의 진행방향과 역으로 날개지느러미를 움직이므로 갑판에 올리는데 너무 힘들어 조업에 지장이 많았다. 처음에는 우리의 관습대로 쌀을 먹여 보내기도 하였으나 너무 많이 올라오므로 나중에는 아예 낚시를 잘라 버리기도 하였다.
연안에는 꼬리상어가 많아 거북이와 함께 혼획이 되었는데, 이 또한 처리가 만만하지 않았다. 특히 꼬리부분이 낚시에 걸릴 경우는 비늘까지 역으로 되어, 큰 저항으로 인하여 이를 갑판에 올리는데 선원들이 고생을 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힘이 부족하여 끌리기 까지 하여 안전에까지 위협을 하기도 하였다.
상기 두 가지는 어군탐지기에 찍힌 형상을 분석하여 알게 되면서부터는, 이런 곳을 피하여 투승을 함으로서 어느 정도 해결을 하게 되었다.
나이는 가장 적었으나(당시 27세), 워낙 어획실적이 월등하다보니(통상 1항차가 40일 정도 소요되었으나 본선은 30일 정도 소요됨) 일본에서 파견된 주재원도 이를 인정하고 본선에 대하여는 모범선이라며 타선에 비하여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 같았고, 선원들은 양승작업이 빠르게 끝나므로(통상 새벽 2시경에 끝나나 본선은 밤 10시경에 종료함) 충분한 수면을 취할 수 있었고, 양승을 마치고 어장을 이동시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에는 선박을 양상에 정선시켜두므로 이 시간에는 불을 켜고 오징어를 잡아 이것을 요리하여 먹기도 하는 등으로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어서 모두 건강하며 선내 분위기도 아주 좋았다.
파나마는 입, 출항하는 선박이 많아 이웃의 중남미 국가에서 많은 여인네들이 모여들어 요염한 자태를 뽐내는 곳으로, 우리 몽고족과는 다르게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히프의 곡선이 아래로 쳐지지 않고, 위로 받치고 있어 키가 작은데도 무척 날씬하며, 낙천적인가 하면 인구비율도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적어 남자들에게 호의적인 곳이기도 하다.
항구에 입항하면 어느 곳이나 있기 마련인 술집과 여자와 춤.....입항 첫날은 외출을 하지 않고 회사에 보고할 제반 서류를 정리한 후 다음날 몇 사람을 불러 지난밤의 무용담을 들으면 신기하기도 하다. 제대로 언어가 통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술집에 들려 마시고, 여자와 가격을 상담하고, 즐기고 오는지 모르겠으나 재미있기 그지없다.
좁은 공간에서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지루함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가끔은 다툼도 있고, 이를 해결할 돌파구를 찾지 못하여 아무래도 거칠어지게 마련인데 이렇게 하루 외박을 하고 배에 돌아오면 언제 그랬느냐 싶게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바뀐다.
조업 중 손바닥에 박혀있는 굳은살로 여자의 부드러운 곳을 애무하는데 따른 고통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는지 이러한 경험이 있는 여자는 선원들이 들어서면 먼저 손바닥을 만져보고 거칠게 느껴지면 피하기까지 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사관들의 손바닥은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선원들보다는 언어가 통하고 또한 후하게 접대비를 지급하는데 따른 것이었으리라.
선장들은 조금 비싸지만 선원들이 들리지 않는 술집에 들려 무희들의 춤을 구경하며 여인들과 함께한다. 그러나 춤을 배운 사람이 거의 없어 그저 마셔대기가 일쑤이고, 마음에 드는 무희가 있으면 하룻밤을 함께 하기위하여 그들의 일과가 끝나는 새벽4시까지 독한 위스키를 마시게 되는데, 보통 한사람이 1병 이상을 마시므로 이 때문에 접대가 극진하다. 다른 외국인의 경우 춤을 추고 한, 두 잔의 위스키로 분위기를 돋우는 것이 전부인데 반해 우리의 경우는 그저 죽기 살기로 마시니 얼마나 고마운 손님인지 짐작이 간다.
4항차를 만선하여 입항하는 도중, 선단의 조업선 선장들이 선원들의 생계비 외 기타 필요한 요구사항을 정리하여, 본선이 입항하여 본사에 건의하기로 하고 이것을 준비하기 위하여 바다에서 정해진 지점에 모여 협의를 하기로 하였다.
선단 선박 중 가장 크고 시설이 좋으며, 동기인 DW-63호에서 만나기로 하고 건너가 식사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항해사로부터 본선에서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며 망원경을 건네주어 확인하니 조난신호 기가 게양되어 있으며, 전 선원들이 우현에 모여 바다 속을 들여다보는 것이 심상하지 않다. 순간적으로 누군가 바다에 빠진 것으로 생각하고 뛰어들어 헤엄쳐 가려고 하니 선장이 뒤에서 껴안으며 흥분하지 말고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만 본선에 줄을 던져 연결한 구명대(Life Jacket)를 걸치게 한다.
바다에 뛰어들어 정신없이 헤엄을 친 후, 본선에 건너가 확인하니 입항 준비를 위하여 페인팅을 하고자 외판의 녹을 그라인더(Grinder)로 제거하던 선원이 갑자기 물에 빠지더니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명뗏목(Life Raft)를 타고 DW-63호에 건너가기 전에 작업을 하는 것을 보고, 갑판장에게 위험하니 입항하여 하라고 지시까지 하였는데 이를 칭찬으로 받아드리고 계속하였나 보다.
전 선단이 집결하여 사흘 밤, 낮을 수색하였으나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하여 결국은 합동으로 유령제를 지내고 파나마로 입항하였다. 젊은 나이에 무척이나 일도 잘하고 무엇보다도 수영도 잘하였는데..... 아마도 그라인더가 감전이 되어 어떻게 손도 써 볼 사이도 없이 수중에 추락하여 실종이 되었나 보다.
파나마에 입항하여 대사관에 들려 사고보고서를 제출하고 원본은 본사로 송부하였다. 이 때 ****선단의 조업실적이 부진하여 독려하기 위하여 현지에 출장을 온 사장님을 만났는데, 처음 대면임을 불구하고 돈이 없으면 사업을 하지 말 것이지 무리하게 하다보니 선원들의 어려움을 도외시하게 되고, 이를 해결하고자 모인 것이 결과적으로 인명사고까지 발생되었다고 퍼부었는데, 아무래도 너무 심하게 불평한 것 같아 다음날 호텔에 들려 사과를 하였다. 이 후 육상근무를 하면서 시미즈 출장 중에 다른 회사로 전직을 하여 대표를 맡고 있는 그분을 뵈었는데, 이 때의 이야기를 나누며 더욱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본사에서는 그간 조업이 정상화되었는데도 어가가 좋지 않아 경영수지가 개선되지 않아 고심을 거듭하다가, 스페인의 라스팔마스에 어업기지가 있는 대서양으로 어장을 옮기는 것으로 결정을 하였으며, 이와 결부하여 어구를 조정하고 또한 베이트도 바꾸는 등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그래도 선원의 실종에 대한 아픔이 조금씩 잊어져 가는 것 같았다.
입항하면 선내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선원들이 도망가는 경우가 있다. 선장이 많은 낚시를 바다에 던져 넣으면 고기가 많이 잡힌다는 단순한 논리로 조업을 하다보니 조업의 강도가 세어져 잠까지 제대로 잘 수 없는데다가, 조업실적까지 좋지 않다보면 계약을 마친다고 하더라도 별로 찾을 돈이 없는 것을 알고, 선장에게 하선을 요청하나 한사람을 귀국시킬 경우에는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파급효과는 물론 부족한 일손을 메우기 위하여 다시 보충 선원을 한국에서 보내는 경비도 만만하지 않아 “중간 하선할 경우 귀국항공비는 본인이 부담하여야 한다”고 하여 회유를 하기도 하지만, 출항 바로 직전에 하선하여 대사관을 찾아가 하소연을 하면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선원이 고국소식도 궁금하고, 김치를 먹고 싶었는지 본선에 들려, 미국 참치건착선에 승선 중인데 고기를 많이 잡아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는가 하면, 말도 되지 않는 조업방법에 대하여 자랑을 늘어놓고 있어 앞으로 오지 말라고 하여 보냈다. 이를 곧이듣고 잘못 하선할 경우 돈을 버는 것은 고사하고 노력봉사만 하고 빈털터리로 귀국하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대서양에서 1항차를 마치고 라스팔마스에 입항을 하여 하역을 마쳤는가 싶었는데 기지장이 나를 브리지에서 찾는다고 하여 가서보니, 선원들이 톱으로 토막을 낸 것 같은 잡어를 하역하고 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갑판장을 불러 물어보니 다른 선박에서도 조업 중 어획되는 잡어를 별도로 처리하여 입항 시 선원들의 용돈으로 사용한다하여 우리도 조금 만들었다며, 사전에 허가를 득하지 못하여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인다.
기가 막혀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아 화를 삭이고 있으니, 기지장이 이번 항차는 문제를 삼지 않겠으나 차기항차에는 급냉실 한 칸의 용량(약 5톤)에 한하여 잡어를 허용하되 더 이상의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하여 사건이 확대되는 않도록 조치하였다.
참치선의 경우 조업 중에 상어가 혼획이 되는데, 상어지느러미 수프가 인기리에 판매되므로, 몸체는 버리고 지느러미만을 잘라내어 햇볕에 말려 항구에 입항하면 비싸게 판매를 한다. 낚시에 걸려오는 상어는 먼저 움직이지 못하게 칼로써 허리뼈를 자르고 지느러미를 제거하고 몸통은 바다에 버리는데, 이때 죽은 것으로 오인하여 가볍게 다루다가는 이빨에 물려 큰 상처를 입기도 한다. 비록 허리는 두 동강이 났지만 자율신경이 아직 살아있어 눈앞에 어린거리는 것은 일단 물게 되는데 이빨이 안쪽으로만 굽어있어 바로 뺄 경우 상처가 커지므로 이빨의 양 옆의 뼈를 완전하게 제거하여야 한다.
한 항차에 약1톤의 지느러미가 생산되는데 판매대금은 관례상 선장이하 전 선원이 균등하게 분배를 하나, 가끔은 선장이 욕심을 부려 선원들의 원성을 사는 경우도 있다. 구매는 거의 마피아 조직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잘못 손을 댄 경우에는 하루아침에 사람이 사라지기도 하는 엄청난 이권이 개입되어 있는 사업으로, 선장의 경우 자신들에게 판매하는 조건으로 예상 판매대금의 일부를 전도금 명목으로 선급받기도 하는데 매우 위험이 수반되므로 조심하여야 한다.
특히 인도양에서 조업을 마치고 싱가폴을 통항하는 경우에는 말라카해협에 들어서자 말자, 특공대(?)2~3명이 스피드보트를 타고 본선에 접근하여, 승선한 한 후 선장과 항해사 그리고 기관장에게 줄기차게 가격을 흥정한다. 상어지느러미는 워낙 고가이므로 잘 마르면 무게가 줄어들지 않도록 어창에 보관을 한다. 판매 시 문제가 되는 것은 무게를 많이 나가게 하기 위하여 지느러미에 뼈를 붙이거나, 덜 말리거나, 말린 지느러미에 해수를 뿌리는 것으로 이런저런 이유로 거의 반나절을 실랑이하다가 싱가폴에 접근하여서야 결정을 하고 바로 달러화로 지불하며, 이때 선장에게는 구매자로부터 특별히 계산된 금액이 전달되기도 한다.
회사가 경영이 어려워 제 때에 급여나 기타 수당이 지급되지 않는 경우가 있고 또한 어획고를 올려 회사로부터 성과급을 수령하기보다는 현지에서 고기를 비합법적으로 판매하여 올리는 수익이 많으므로 가끔은 선원들이 선장이나 기지장 몰래 밤늦은 시간에 어획물을 판매하는 선박이 있다고 한다.
어떤 기지장은 새벽에 하역을 한다는 보고를 받고, 급히 자동차를 타고 집을 나서는데 갑자기 트럭이 달려들어 교통사고를 당하였는가 하면, 부두에서 차에서 내리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차가 돌진하여 다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는 부두에 관계된 모든 이권(선박을 통한 마약 운반, 어획물, 상어꼬리 등)에 마피아가 관련이 되어있어,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에 대하여는 어떠한 방법을 동원하여서든지 제거하기 위하여 서슴없이 행하는 것으로, 이것을 잘 알고 있는 기지장은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도 선장이나 선원들이 술집에서 과음하여 실수를 하거나, 몸을 가누지 못하고 정신없이 헤매고 있을 때에는 그들의 차에 태워 배에까지 데려다 주기도 하는 친절함도 있어 고마움을 느낄 때도 있다.
어획고는 무난히 달성할 것 같으나, 수양고가 예상보다 작아 마지막 항차를 날개다랑어(Albacore : 알바코)를 어획하고자 아조레스(Azores Ids.) 군도를 향하여 출항을 하였다. 출항하여 이틀째 아침을 맞았는데 갑자기 기관이 정지 되며, 제법 거친 파도에 선박이 나뒹굴기 시작한다. 주기의 터빈에서 고장이 발생하여 더 이상 운전이 어렵단다.
라스팔마스에 귀항하여 수리를 할 수밖에 없으나 그렇다고 일본의 터빈 제작사에 터빈을 발주한 후 도착 시까지 약 3개월이 소요되는데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다고 판단되어, 다소 엔진에 무리가 따르더라도 터빈을 떼어낸 체 운전을 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그러나 이 상태로는 파도가 높은 곳에서 조업은 어렵다고 판단되어 적도 부근의 어장으로 이동을 하기로 하고 침로를 남쪽으로 향하였다.
이튿날 세면을 하기 위하여 나서는데 누가 뒤에서 갑자기 내 손을 붙잡아 돌아보니 선원이 눈물을 글썽이며 “선장님 잘 결정하셨습니다. 만약 알바코를 잡으려고 거친 어장에서 조업을 하였더라면 우리는 죽었을 것이다”라고 한다. 평소에 과묵하기로 소문 난 선원인데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겁이 났었는가 보다.
그간 잔잔한 어장에서만 조업을 하였는데 이번 마지막 항차는 소문만 듣던 거친 파도에 조업을 한다고 생각하니 아마도 오금이 저렸으리라 생각하고 웃고 말았으나, 역시 돈보다는 안전을 택한 것이 그래도 잘했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황다랑어의 어획시기도 아닌데 어떻게 조업을 할까 고민스럽다. 기 결정을 한 만큼 처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어느 정도 참치가 잘 잡히면 매일 어황정보를 교신하는 일지에 거짓으로 위치 및 어획량을 표기하기도 한다. 이는 각 선박에서 매일 통보되는 정보를 위치기입도(Plotting Sheet)에 기입하고 분석을 하는데, 정확하게 통보될 경우 인근 조업선에서 접근하여 조업을 하는 관계로 상대적으로 본선이 피해를 입기 때문이고, 부자지간에도 거짓말을 한다고 하니 얼마나 중요한지 짐작이 된다.
무사히 조업을 마치고 기지인 라스팔마스로 귀항을 하니, 내가 1등 항해사로 승선했을 때 2등 항해사로 2년여를 함께하며, 무척이나 고생을 많이 하였던 이가 후임선장으로 임명되어 반갑게 맞이한다.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승선한터라 나이도 어리고, 모든 것이 생소한 가운데서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솔선수범하여 해결을 하는 능력이 있어, 기지선을 승선하기 보다는 독항선을 택하였으리라 생각하였는데 의외다. 아마도 독항선 선장을 하려해도 경험이 없어 어렵고, 다시 독항선의 항해사로 승선하기가 싫어서 선택하였으리라 생각은 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개운하지 않다.
두 번째 선장과 결혼
다음 승선할 선박을 결정하고 출항 시까지 부산의 하숙집에서 머물기로 하였다. 조업 중에는 장시간 동안 항상 서서 리모콘으로 조타를 하는 관계로 피가 다리에 모아져 혈관이 팽창되어 있어, 아침에 일어나면 종아리가 퉁퉁 부어오르는가 하면 선상 생활에서는 운동량의 절대부족으로 다리에 힘이 없어 장시간 걷기도 힘이 들어, 매일 수산대학의 교정을 걸으면서 하체의 힘을 기르는 한편 귀국한지 2개월 만에 30개월 동안 승선하였던 선박의 정산을 하기 위하여 상경하여 본사에서 제반 서류를 며칠간 검토하여 보았으나 적자로 찾을 것이 없다.
짧은 기간도 아닌데 선원들과 함께 고생한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이러자고 선원이 수장되었고,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인고한 결과가 이렇게 참담하게 나타나다 보니 누구보다도 선원들을 대하기가 민망하여지고 또한 꽃 같은 나이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바다에 꿈을 파묻어 버린 나 자신이 서글퍼진다.
본사에서는 타선에 비하여 어획 실적이 워낙 뛰어나 선단장으로 승선할 것을 종용하며 조건을 제시하였으나, 모든 것이 사탕발림으로만 들릴 뿐 진실성이 의심되어 보합제(짓가림제 : 생계비를 매달 지급하고 어획실적에 따라 성과급을 지급하는 계약형태)에 의한 계약보다는, 승낙하지 못할 조건으로 기본급(급료)에 충실한 조건을 요구하여 우회적으로 거절을 하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 기간 중 군 복무를 마치랴,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아 휴학을 하는 등으로 이제야 졸업반에 있는 친구를 다방에서 만나 그간의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1학년 때 사정상 해양훈련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필수과목인 관계로 이수하지 않으면 졸업을 할 수 없으므로, 늦었지만 3학년 때 남해에서 실시하는 해양훈련에 참석하기 위하여 여수에 들린 적이 있었다. 이 때 친구의 집에 들려 여동생으로부터 라면을 대접받았으며, 슬쩍 보았는데도 예뻤던 것 같은 기억이 있어 “여동생은 시집을 갔느냐”고 물으니 “아직” 이라고 하여 “나에게 달라”고 기대 반으로 이야기를 하였는데 며칠 후 광주에서 한번 보았으면 한다고 한다.
선을 보는 것이 처음이라 어색하기 그지없는데, 역시 장모님과 처남의 얼굴을 닮아 예쁘고, 날씬한 몸매에 빈틈없이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었으며, 둘이서 학창시절 추억이 어린 금남로를 걷고 마로니에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헤어졌는데 다행히 밉게 보이지는 않았는지 결혼하여도 좋다는 승낙이 떨어졌다.
이때부터 부산에서 광주를 오가며 데이트를 하였는데, 촉박한 출항 일정 때문에 고향에 계신 나의 부모님과 형제들에게는 별도의 시간을 만들지 못하여 인사를 드리지도 못한 상태였으며, 그렇다고 미룰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 결혼을 약속하고 출항 전일에 약혼의 표시로 성경 및 반지를 교환하였다.
장모님은 서울에서 입학시험을 볼 때 처음 뵈었었다. 나는 해군예비사관 후보생(NROTC로 선박을 승선하는 어업학과와 기관학과 학생만 해당되며, 육군은 2년이나 해군은 4년임)을 지원하였던 관계로, 시험을 마치고 다음 날 대방동에 있는 해군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신체검사 후 처남과 함께 막걸리를 한잔하고 전차도 타지 않고 걸어서 해군병원에서 처남의 인척집이 있는 장춘동까지 걸었는데, 이 때 마침 장모님이 이곳에 머무르고 계셔서 인사를 드렸다.
졸업을 앞에 두었는데도 학교 모자를 쓰고 교복에 워커를 신은 모습이 조금 특이하여 기억을 하셨던 것 같았다. 학교에 다닐 때는 당신의 자식을 보기 위하여 가끔 부산의 하숙집에 들리셨는데, 이때 나는 자취를 하면서도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가는 도중에, 아들이 있는 하숙집에 들려서 인사를 드리고 학교에 가자며 자식을 깨우는 것을 보고, 건강하고 부지런하니 아마도 딸을 어렵게 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딸의 결혼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었다고 가끔 말씀을 하셨다.
선박은 약간 노후화 되었으나, 독항선의 승선 경력이 없는 점과 노력한 만큼 성과가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중견 수산업체인 OY수산에 승선을 결정(OY81호)하여 어로계약을 체결하고, 인도양으로 출어준비에 부산하고 있는 중 갑자기 본사로부터 돛 새치(Sail Fish)를 어획하러 가면 어떻겠느냐고 한다. 새로운 어장을 개척하고 향후 전망을 고려하여 이미 일본과는 판매조건까지 협의가 되었다고 하니 달리 거부할 명분도 없었고 또한 내가 돛 새치를 잡은 실적에 대하여 익히 알고서 권하는 것이었고 어장에 대한 자신감도 있어 쾌히 수락하였다.
출항 후 송도 방파제를 통과한 후 프로펠러에서 이상음의 소리가 들리고, 선속이 제대로 나가지 않아 기관장에게 확인을 하여보니 확실한 원인을 찾지 못하였으며, 아무래도 프로펠러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하여, 이 상황을 본사에 보고를 하니 외항에 정박을 하고 날이 밝으면 확인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다시 회항하여 외항에 묘박을 한 후, 아침에 잠수를 하여 확인을 하니 프로펠러 한 쪽에 금이 가고 얇아져 있는 것이 발견되어 상세한 것은 상가하여 확인키로 하였다. 과적된 상태로는 상가를 할 수 없으므로, 조선소에 접안하여 선박의 중량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선적되어있는 연료유를 바지선에 이송키로 하였다. 그러나 이송을 한 후 이송량을 확인하니 선적량과 전혀 수량이 맞지 않는다. 하와이의 연료유 가격이 국내보다 저렴하고 또한 하와이까지 항해에 소비된 연료유를 보충함으로서 조업률을 높이기 위하여, 하와이까지 필요한 연료유를 선적하였는데 부족하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만약 이대로 출항 하였더라면 항해 도중에 연료유가 부족하여 하와이까지 항해가 불가하였으리라 생각하니 어안이 없다.
사안이 워낙 중요하여, 내 방으로 기관장을 불러 닦달하였더니, 아니나 다를까 기름회사의 사장이 얼마 되지도 않는 돈으로 기관장을 매수하였으며, 유류를 선적할 때 적당히 눈감아 주었다고 하는데 너무 많이 빼돌렸다. 기관장이 유류 선적이 완료된 후 실제 선적량을 확인하였고, 이것을 항해소요 일수에 대비하여 계산하여 보니 아무래도 문제가 될 것 같아, 출항 시 엔진과 프로펠러를 연결시켜주는 클러치를 조작하여 소음이 발생하게 하였던 것으로, 드럼으로 선적된 윤활유도 확인하니 절반 정도까지 비어있는 것이 태반이다.
상기 사실을 지사장에게 상세하게 보고를 하고 철저히 규명을 하려고 하였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연관되어 있는데다, 조용하게 끝내기를 바라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어 부족한 것을 모두 채워주는 것으로 하여 일단락을 짓고 출항을 하였다.
하와이에서 보급을 받고 출항하여 어장에서 조업을 하려고 베이트를 해동하여 보니 선도가 좋지 않아 복부가 터져있는 것이 많았고, 양승시에는 낚시에 붙어있는 것이 드물어 어획이 좋지 못하였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잡힌 상어나 잡어류를 베이트의 크기로 절단하여 사용하기도 하여 어느 정도 어획은 올릴 수 있었으나 장기적으로 보아, 좋은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되어 어장을 태평양 동부로 이동을 하면서, 한국 조업선으로부터 베이트를 차용하여 사용함으로서 정상적인 조업을 하게 되었으며 잔여조업은 눈다랑어를 어획 후 만선하여 귀항을 하였다.
일본에 어획물을 판매 후, 부산에서 수리 및 출어준비를 하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출항 전에 결혼까지 준비하려니 어떻게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겠다. 그간 불황에다 어가도 좋지 못하여 예상보다 많이 벌지 못한 점도 있으나, 출항 전 받은 전도금이며 중간정산금과 생계비 등 그간 부모님께 드린 것은 동생들을 공부시키고 생활을 하였던 관계로 저축된 것이 거의 없으리라 생각하여, 부모님께는 결혼비용에 대하여 일체의 언급을 하지 않고 회사에 정산 시 공제키로 하고 가불을 신청하였으며, 이것으로 처가가 있는 광주에 전셋집을 얻고, 남은 돈으로는 결혼 준비를 하였다.
이때 어머님께서 신혼집에 들려보시고는 섭섭해 하는 눈치였다. 아마도 가재도구며 기타 혼수품이 거의 없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아 “시간이 없어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았으나 부산에 이사를 하면서 마련을 할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주례 목사님은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의 주례는 할 수 없으나 우리가 처한 특수한 정황을 참작하여 결혼 후 열심히 교회에 다니기로 한 약속을 믿고 주례를 하였으며, 익일에는 고향에 들려 인사를 드린 후, 신혼여행을 생략하고 부산에서 머물면서 출항준비를 하였다.
신혼의 단꿈이 무엇인지 느낄 사이도 없이 결혼 후 일주일 만에 출항을 하려니 아내에게 너무나 미안스럽기 그지없으나, 새롭게 펼쳐지는 우리의 인생을 위하여 서로가 감내하기로 하고 뱃고동 소리를 뒤로 한 체 선수를 태평양으로 향하였다. 만선 후 귀항 시까지 무엇보다도 변화가 있었다면 큰애를 임신한 것과 부산으로 이사를 한 것이었다.
부산이 처음이고 아는 사람도 없어 내가 부산에 있을 때면 머무르는 하숙집 아주머니의 소개로 가까운 곳에 이사를 하였는데 출입구가 부엌에 있어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단칸방이었다. 아내는 그간 혼자 지내느라 운동량이 부족하여 체중이 과다하게 늘어 임신중독증으로 고생을 하는 것이 역역하였다. 다음 날 일본에 어획물을 판매코자 출항을 하였으며, 하역을 마치고 다시 부산에 입항을 하던 그날이 바로 그 날이 병원에서 큰 애가 태어난 날이었다.
며칠을 지난 후, 주거공간이 좁고 산후조리에도 불편하여 단독주택의 2층으로 이사를 하였으며 이때 집의 구조에 맞추어 가재도구를 마련하였다.
세 번째 선장
한참 수리 및 선원구성에 몰두하고 있는데 지사장으로부터 긴급 호출이 있었다. 유능하여 업계에서 잘 알려지고 대학 선배고 동향이기도 하여 존경을 하는 분으로, 만나자마자 만면에 웃음을 띠고 “이 선장 오늘 모가지를 쳤다고 한다” 영문을 몰라 일순 당혹스러워하는 나를 보고, “신조선을 2척 건조하게 되었는데 그 중 한척을 맡으라고 한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다른 1척은 나이는 어리지만 OY수산에서 선장을 하면서 특출한 어획실적을 거양하여, 업계에서 제법 알려진 선장으로 회장의 추천이 있었으나, 나의 경우는 그에 비하면 독항선을 승선하여 내세울 만한 실적이 없었으나 누구보다도 나의 실정을 잘 알고 있는 지사장이 적극적으로 추천하여 임명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저 감사할 뿐이고, 선박의 건조를 시작하고 준공 시까지 아내와 같이 하며 큰 애를 돌 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음이 무엇보다도 다행스럽게 생각하였으나, 한 편으로는 처음 대하는 신조선의 건조과정의 감독과 향후 펼쳐질 다른 선장들과의 보이지 않은 어획실적의 경쟁에 대한 불안감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기지선인 OY8호는 매각을 하기 위하여 감천항의 외항에 닻을 내리고 정박 중에 있었으며 도난을 방지하기 위하여 전문적으로 경비를 하고 있는 관리업자에게 위탁하고 있었으나, 이때 공교롭게 태풍 어빙호가 부산을 관통하게 되어있어 선박의 안전을 위하여 타 선박에 승선하기 위하여 대기 중인 선장, 기관장을 승선시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고 있었다. 나는 염려가 되어 아침부터 태풍의 추이를 관망하면서, 부두에서 직원들과 함께 본선을 주시하고 있는데 주위에 있는 선박들이 거대한 파도에 밀려 방파제에 부딪쳐 깨뜨려지거나, 닻이 견디다 못해 끌리거나 뽑혀지면서 전복을 하는가 하면, 선원들은 구정조끼를 입고 바다에 뛰어들어 필사의 탈출을 하는 등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오후 늦을 무렵까지 잘 견디던 본선이 파도에 떠밀리더니 순식간에 전복이 되어 한쪽으로 기운다. 구명조끼를 입은 선원들이 난간에 한 줄로 기대있는 것이 보이는가 싶더니만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는지 모두가 바다에 뛰어들었다. 다행이 밀물이라 선원들은 감천화력발전소가 있는 방파제의 해안으로 떠밀려 생명을 구할 수 있었으나, 당직을 섰던 관리인 중 1명은 불행스럽게도 유명을 달리하였다.
이 기간 중에 OY81호의 정산을 하였으며, 정산금 으로 조그마한 아파트지만 생애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하였다. 비록 엘리베이터가 없고 취사와 난방으로 연탄을 사용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그저 감격스러울 뿐이었고, 주위에서도 짧은 기간동안에 나타난 우리의 변화를 보며 부러워하였다.
당초에는 본선(OY201호)이 OY202호보다 1개월여 빠르게 건조를 하여, 진수를 한 후 조선소의 벽안에 계류를 시켜서 제반 항해 및 어로 장비와 어창의 냉동코일을 부착하는 등 한창 건조의 막바지에 공사에 이르렀는데, 마침 불어 닫힌 태풍 어빙호로 인하여 외판에 손상을 입게 되었으며, 이를 다시 상가하여 수리하고 보니, 우연스럽게도 같은 날 부산을 출항하였으며 일본의 시미즈항에서 각 기기의 점검과 베이트 외 선용품을 선적하고, 싱가폴을 경유하여 인도양 어장으로 향하였다.
처음 승선시에는 선박의 위치를 알기 위하여 천측을 하여야 했으나, 이후 NNSS(Navy Navigation Satellite System , 해군위성항법장치 : 위성의 숫자가 적어 관측의 소요시간이 많이 걸리고, 정확도 면에서 떨어짐), 그리고 GPS(Global Positioning System : 범지구위치결정시스템)까지 등장하다보니 너무나 편리하게 되었다.
어로장비 또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칼라어군탐지기는 물론 Sonar 장치를 하여 수평으로까지 어군을 탐색하게 되었으며, 자동으로 투승 및 양승을 하는 Line Ace 가 개발되어 선원들의 안전을 도모함은 물론이고 지정한 시간에 정확하게 투승을 하게 됨으로 어획효과를 높이게 되었다.
또한 주기관도 브리지에서 원격으로 조절이 가능하게 되어 브리지의 지시에 따라 수동으로 조작하는 수고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기관실에는 별도의 당직실이 설치되어 계기판만 들여다보면 운전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는가 하면, 정수기가 설치되어 물 부족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냉온 시스템을 갖춘 냉반방기까지 설치되어 주거환경이 개선된 것을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이때부터 유가가 상승하여, 이를 타개하는 방안으로 유조선을 보내어 양상에서 급유를 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만선하면 일본에 입항하여 판매를 하기 때문에 이에 소요되는 항해일수 및 경비를 줄이고 조업률을 높이기 위하여, 냉동운반선을 어장에 보내어 어획물을 전재하고 다시 조업하여 만선 후 귀항하는 것으로 조업형태가 바뀌게 되었다. 이에 따라 두 선박이 2개월여를 조업하고 세이셀의 마헤항에 입항하여 운반선에 어획물을 전재하였는데, 다행스럽게 본선의 전재량이 OY202호보다 약 20톤 많았고 또한 가격이 가장 비싼 눈다랑어의 중신규격(40키로 이상/미)비율이 높아 전 선원들의 사기가 높았으며 또한 이곳에 출장을 온 부산 지사장의 체면을 세워준 것 같아 다행스러웠다.
출항 후 다시 조업이 재개되면서, 본선이 OY202호보다 월등하게 앞선 어획으로 조금 씩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지나쳤나보다. 약간 어황이 주춤하여 번민을 하는 중에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선박들의 권유도 있어, 좋은 씨알의 눈다랑어를 잡고자 인도네시아의 남부인 쟈바 어장으로 이동을 하였는데 어획이 신통하지 못하였다.
이 사이 중부 어장에서는 어황이 회복되었으며, 이 상태로 가면 OY202호보다 어획이 떨어지지 않나 하는 조바심에 위험을 감수하기로 하고, 인도네시아의 영해인 200마일 밖에서의 조업을 포기하고 100마일까지 접근하여 조업을 시작하였다.
육지에 가까우므로 예상대로 어획은 되고 있으나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경비정 때문에 얼마나 긴장을 하였는지 밥맛이 없어 먹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변까지 제대로 나오지 않는데 OY202호는 만선을 하고 귀항을 한다는 소식이다. 초조하게 생각하여 더 이상 조업을 무리하게 강행하다가 최악의 경우가 올 수도 있다고 스스로 자위를 하며, 조금 늦더라도 안전을 위하여 다시 200마일 밖에서 조업을 마치고 귀항하니 OY202호보다 10일이 늦었다.
이 어장에서 **수산의 선박을 승선하고 있는 대학 5년 선배를 알게 되었다. 사람 좋고, 박식하고 매우 유능한 선장인데 고기와는 인연이 없는지 어획실적이 신통하지 않아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상봉하여 본선의 어구사용 방법 및 주낙심도 등을 설명하고 그대로 조업장소를 양도하고 본선은 이웃한 곳에서 조업을 하였는데도 잘 잡히지 않고 우리 어획량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2~3일 계속 같이 조업을 하는데도 역시 어획실적이 따르지 않자 인연이 없는 어장이라고 현장을 떠나는 것을 보니 안타깝기 그지없으나 나로서도 더 이상 도울 방안이 없었다.
매일 SSB로 교신을 하며 구수한 음성을 들었으며 후일 귀국하여서는 육상근무를 하였는데 후배가 윗사람으로 있어 어려움이 많았던 것 같았다. 내가 육상근무를 하면서부터는 가끔 만나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우리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기도 하는 등으로 돈독한 친분을 가졌다.
그러나 육상근무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배를 타는가 싶었는데 역시 어획실적이 좋지 않아 중도에 하선을 하였으며, 어느 날 청천벽력과 같은 부고의 소식을 들었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는 관계없이 오랜 승선생활에도 불구하고 따르지 못한 제반이 아마도 그를 그렇게 슬프게 하여 세상을 떠나게 하였는가 보다.
부산에 입항을 하니 환영 인파 속에 전혀 예상을 하지 않은 일가친척들이 눈에 띤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무언가 조금은 무거운 분위기를 감지하였으나 다음날 일본으로 출항 시까지 언급을 하지 않고, 출항 후 같이 승선 중인 삼촌을 내 방으로 불러 위스키 한잔을 권한 후 이야기를 들어보니 망설인 끝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단다. 회사에서도 알고 있었으나 혹시 소식을 들으면 조업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아, 나에게는 통보를 하지 말도록 아내가 극구 만류하여 금 항차가 종료될 때까지 보류를 시키고 있었다고 한다.
이래서 뱃놈을 상놈이라 했던가.....조부님은 4학년 원양실습 중에 세상을 떠나셨고, 아버님께서는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나를 찾았다는데.....조업 중 웬 기차가 새카만 연기를 품으며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을 두 번이나 꾸는 등 너무나 꿈자리가 뒤숭숭하여 하루 조업을 마친 후 조용히 삼촌을 불러서 꿈 이야기를 하니 한참 망설이다가 상을 당한 꿈같은데 하시면서 무슨 별일이야 있겠느냐고 하였으나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하루를 쉰 적이 있는데, 돌이켜보니 바로 그날이 아버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었다. 입항 후 산소에 들려 무릎을 꿇으니 생전에 그저 잘못한 것만 떠오른다.
그래도 호남에서 제일가는 영재들이 모였다는 광주서중과 제일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어 큰 기대를 하였을 터인데도, 어느 날 부모님과 상의도 없이 수산 대학으로 진로를 결정하였을 때, 아마도 실망감이 무척 크셨겠지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수락을 하셨으며, 합격이 되자 입학금을 마련하신 후 이제는 너도 대학생이다 하시면서 막걸리를 따라주시던 것에서부터, 승선 중에는 전도금 및 중간 정산금과 매월 송금되는 생계비로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시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배를 타면서 고생하는 나를 생각할 때면 제대로 쓰시지도 못하시면서 가슴이 메어지는 아픔이 있었을 것이며, 결혼 후에는 나의 독립된 생활로 인하여 더 이상 도와 드리지 못하여 아마도 동생들의 결혼이며 당신의 노후 생활 등으로 번민하셨을 당신의 모습을 그리며 한없이 울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경찰공무원을 그만 두시고 나서 하시는 일마다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은 우리 형제들만 광주에 남겨두고 어머님과 고향으로 귀거래사를 하신 후 받는 정신적인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였고, 약주를 드시고 때로는 만취된 상태에서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할아버지 댁에 들려 안부를 드리시는 모습을 보며 제발 만취하여서는 인사를 드리지 않았으면 하는 원망을 하였던 것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일어서지 못하게 한다.
신조선이라 크게 수리할 것이 없어 15일 만에 부산을 출항을 하였다. 선원들이 안전조업과 무사대어를 빌고 또한 이번에는 OY202호를 따라 잡아야 한다면서 갑판에서 고사를 드리는 모습에서 비장함까지 느껴진다. 이번 항차도 역시 전 항차와 같이 세이셀의 마해항에서 어획물을 운반선에 전재를 하고 출항을 하였다.
부산 출항 시에 누룩을 별도로 구매하였으며, 조업 중에 식사를 하고 남는 밥을 모아 이것을 누룩에 섞어 기관실의 환기창에 메달아 놓으면, 파도가 있을 때라도 흔들림이 크지 않아 하루가 지나면 잘 익은 막걸리가 된다. 조업 중에는 위험하여 통상 술을 금기시하는데, 나는 조업이 끝나면 한 사발씩 마시는 것을 허용하였다.
어느 날 아침 투승을 하려고 보니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침실을 비롯하며 갑판창고 및 어구창 등 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보이지 않아 모든 선원이 함께 찾았는데 얼마를 마셨는지 세상모르고 브리지 위 갑판에서 자고 있다. 준비된 조업을 중단시키고 침대에 누워있으니, 당사자가 문밖에서 무릎을 꿇고 다시는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하루를 쉬었고, 1, 2항해사 및 갑판장은 책임을 물어 선원들 앞에서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제재를 가하였으며, 이후에는 이러한 사례가 재발되지 않았다.
만선까지 약 100여 톤의 남았을 즈음에 OY202호보다 어획량이 약20여 톤 떨어져 있어 고심하던 중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머리를 박박 밀고, 예정에도 없는 양상급유를 하여 유창에 기름을 가득 채웠으며, 급냉실에 있는 고기는 모두 어창에 적재를 하고 또한 이 시간을 활용하여 주기관의 흡입변을 바꾸는 작업을 하였는데 예상보다 늦어졌다.
참치선 선장의 경우 누구나 사치를 싫어하지만, 나는 사치가 출연하는 곳이면 항상 참치가 많으므로 이를 이용하기 위하여 조류와 풍향을 검토하고, 또한 이웃한 선박의 어황통보를 분석하여 예상 이동경로를 추정한 후 기능하면 가까이서 조업을 하여 좋은 성과를 거양하였다. 무참하게 먹여치워 빈 낚시에 아가미만 달려올 때는 허탈하기도 하였으나, 어느 한곳이라도 지나친 경우에는 이를 충분히 만회하고도 남을 어획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짜릿한 만족감도 있었다.
또한 어군탐지기에서 발신되는 주파수가 고주파이므로 이를 사용하면 사치의 발신음과 같아 사치를 모은다는 생각하여 아예 사용을 하지 않는 선장이 많았는데, 나는 어군탐지기에서 발, 수신되는 각도가 협소하고 수중으로 직각으로 발사되므로 전혀 영향이 없다는 생각으로 거의 24시간을 작동시켰는데 해황의 제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어 어획에 많은 도움이 되었었다.
특히 수온약층과 플랑크톤의 시간에 따른 변화를 감지하여 투승과 양승 시에는 이에 따른 수심을 기록하여 이에 따라 낚시의 심도를 조절하였고, 참치가 기록에 나타날 때에는 이곳을 집중적으로 투승하여 좋은 어획을 하기도 하였다.
이미 투승하기에 적당한 시간이 지나 항해사가 혹시 오늘은 조업을 하지 않나하고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으나, 개의치 않고, 당초 조업을 하기로 작정하였던 지점인 세이셀 수역의 경계 북부인 적도 및 동경 55도까지 항해를 한 후, 아침 10시부터 투승을 하고 있는데 어탐에 고기가 찍히는가 싶더니만 선수에 돌고래 떼가 보였다.
투승에 적당한 시간대를 넘긴 조업인지라 아예 마음을 비우고 조업을 빨리 마치고 어장을 이동하고자 낚시수를 줄이라고 지시한 후 곧 바로 양승을 시작하였다. 아무래도 사치가 붙어 오늘 조업은 재미없겠다는 생각에 1항사에게 당직을 맡기고 침실에 누워 온갖 생각으로 뒤치다꺼리고 있는데, 급냉실 문을 여닫는 소리가 자주 들려 브리지에 확인을 하니 씨알이 좋은 고기가 계속 올라 온 다고 한다.
급히 브리지에 올라가 보니 갑판에 미처 처리하지 못한 고기들로 가득하고, 일손이 부족한데도 모두가 신명이 나서 지르는 고함소리가 요란스럽다. 항해사에게 갑판에 내려가 선원들을 도와주라고 한 후 대신 조타기의 리모콘과 마이크 폰을 손에 잡고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니 꿀맛이다.
이날 어획한 고기가 약10여 톤으로 모두가 기쁨에 들떠 피곤한 줄도 모르고 움직이는 손길이 분주하다. 대어를 축하하여 내가 직접 전 선원들에게 위스키에 한잔씩 돌리니 전 선원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이튿날도 기대를 하면서 조업을 하였는데 2/3쯤 양승하니 이미 10여 톤이 넘는 어획으로 더 이상 냉동이 불가하여 조업을 중단하였고, 남은 것은 익일 투승을 종료 후 다시 양승을 하기를 번복하면서 7일 동안 잡은 고기가 자그마치 약 80여 톤이라 그저 놀랍고 즐거울 뿐이다.
8일 째에도 약 3톤의 어획이 있었으나, 고기가 세이셀 경제수역에 거의 근접한 곳까지 이동을 하고 있어 호사다마(好事多摩)라고 욕심을 과하게 부리다가 만약 경비정에 나포라도 된다면 그간의 모든 노고가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어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선박은 매일 사용되는 연료유 및 베이트 량보다 많게 어획된 관계로 이미 최대중량을 초과하여, 갑판에 조그마한 파도도 갑판을 넘실거릴 지경에 이르렀다.
그간 어황을 교신할 때 조업위치에 대하여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으나 이 때만은 통신국장에게 외부와 일체 교신을 못하게 하였으며, 만약 교신할 경우에는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하였고, 나도 아예 SSB의 교신에 응하지 않고 보니 타선 선장들은 나름대로 어획이 되고 있다고는 생각하였으나 이렇게 많은 어획을 올리고 있는지에 대하여는 꿈에도 생각을 못하였으리라 생각하였다.
선원들은 잡힌 고기를 힘들이지 않고도 갑판에 올릴 수 있어 수월하게 조업을 하고 있으나, 선박을 조선할 때면 평상시와 다르게 아주 둔하게 움직이는 느낌이 좋지 않아 파도가 높아지면 위험할 같고, 또한 만선까지의 잔여 어획량도 얼마 남지 않아, 스리랑카 남부수역으로 어장을 이동하며 마무리 조업을 하기로 결정을 하고 선수를 동쪽으로 하여 4일간 항해를 하였다. 지금도 옛날 선장들을 만나면 그 때의 어획하였던 일을 회자로 이야기를 하기도 하며, 이 후로도 그 기록이 깨어지지 않고 있다.
어장 이동을 하면서 그간의 실정에 대하여 타 선장들에게 이야기를 하며 감사와 미안함을 전하였더니 조금 얄밉기는 하지만 축하한다고 한다.
본사에서는 그간 185톤의 어획보고를 한 선박에서 갑자기 입항예정일이 입전되니 어안이 없었는지 혹시 무슨 사고가 있어서 입항하는 것이 아니냐는 전문이 입전되었다. 조금 더 어획을 하여 초 만선으로 입항 할 수도 있으나, 크리스마스시기에 어가가 좋은 점을 감안하여 입항을 예정하는 선박이 예상 외로 많아, 며칠 조업 후 귀항하겠다고 보고를 하였더니 그간의 노고를 축하한다는 내용과 함께 입항 수속에 필요한 제반사항에 대하여 통보가 있었다.
귀항 시에는 통상 싱가폴에 입항하여 연료유와 부식
등의 보급을 받고 하루 정도 휴식을 취하는데, 본선은 연료유가 충분하고 또한 하루라도 빨리 입항하여 좋은 어가에 판매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싱가폴에 입항하지 않고 그대로 통항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이에 따라 필요한 부식이 공급될 수 있도록 대리점에 수배를 하였으며 싱가폴을 통항 중 항로상에서 통선으로 보급을 받은 후 부산으로 직항하였다.
본사에서 재 승선을 종용하였으며, 본인도 혼쾌히 수락한 후 부산을 출항하여 일본의 시미즈항에서 하역을 하는데 역시 마지막에 대량으로 어획 한 고기의 선도가 약간 떨어지게 나타나 검품을 한 담당자로부터 직접 나에게 문의가 있었다. 어획일지를 보여주며 선도를 유지하기 위한 급냉실의 운용방법 등을 상세하게 설명을 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해한다. 본사에서 출장한 직원은 일시에 다획을 하지 않았다고 우겼으나 고기의 크기나 상태로 보아 아무래도 의심이 되어 직접 나에게 문의를 하였는데, 이를 솔직하게 설명을 하여 주어 고맙다고 한다.
“사람은 가끔 필요에 따라 거짓을 말할지라도 죽은 고기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뜻을 그때까지는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참치를 배우기 위하여 일본에서 3개월여 연수를 받고 또한 판매를 하기 위하여 출장 중에 양육을 입회하고 이를 가공하고 판매하는 과정을 보면서 저절로 익히게 되었다. 이 후 원양 업계에 몸을 담으면서 이때 하역 및 판매를 입회한 담당자와 절친하게 지나게 된 동기가 되었으며 가끔 그때의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
300톤 어획에 132만 불, 당시로는 역대 최고의 어획고를 올렸으나 한창 어획이 좋을 때에 재 승선을 포기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입항하여 큰 애를 지켜보면서이다. 출산 후 약 8개월을 지켜보다가 계약을 마치고 나니, 3살 박이로 훌쩍 자랐는데 그간 아내가 혼자서 그저 애지중지하며 키우다보니 너무 사랑이 지나쳤나보다. 하는 행동마다 눈에 거슬리고 이대로 방관하였다가는 교육시키는 시기를 놓쳐 천방지축 제멋대로인 버릇없는 아이가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내는 남들같이 연애를 한 결혼도 아니고 신혼 기간도 없이 외롭게 지내면서도 내가 하선할 것을 대비하여,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며, 절약에 절약을 거듭하면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시댁 쪽에서는 이를 이해하고 협조하기보다는 결혼 전까지는 전적으로 도움을 받던 것이 결혼 후에는 우리 생활 때문에 많이 도와드리지 못하여 섭섭해 하는 부분이 있어 마음속으로 고민이 많은 것 같아 부부가 함께 하면서 풀어가기 위함과, 이번 항차의 성적이 좋으므로 정산을 끝내고 원양회사에 입사를 한다면 향후 우리 가족이 그렇게 어려운 생활이 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 미련이 남지만 승선을 포기하였다.
육상근무 시작과 몰디브
후임 선장에게 인계를 마치고 어느 날 ,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2년 후배가 근무하는 SJ산업의 부산사무소에 들려 이야기 도중 “배를 더 탈 것인가”를 묻더니 “만약 육상근무를 하겠다면 본사에 근무할 직원을 구하고 있으니 이력서를 제출하라”고 하여 조치 후 며칠을 기다리니 서류전형이 통과되었으니 12월 21일 면접을 보았으면 한다는 연락이 있어 상경을 하여 부서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최종적으로 사장과 면담을 하니 반갑게 맞이하며 몇 가지를 묻더니만 “선배가 과장으로 있으니 부득이 과장대리로 근무를 하였으면 하는데 이해를 해 달라” 와 “사람이 없고 밀린 일이 많으니 내일부터 당장 출근하였으면 한다”고 한다.
설사 근무가 확정이 되더라도 다음 해 1월 1일부터 일거라고 생각하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 상태라 당혹스럽기도 하였으나 그렇다고 내 입장을 주장할 형편이 되지 못하여, 임시로나마 거주할 곳과 필요한 일용품을 구하기 위하여 하루의 빌미를 얻었다.
검찰청에 근무를 하는 중 광주에 파견 근무를 하면서 우연히 처갓집에서 하숙을 하였던 인연이 남달라 장모님을 누나로 극진하게 모시던(의남매를 맺었음) 분이 화곡동에서 살고 계셨는데, 찾아뵙고 그간의 일을 상세하게 설명을 드리니, 서울의 생활이 익숙하여질 때까지 그곳에 머무르라고 하여 거처를 정한 것이 아직까지 화곡동을 벗어나지 못하는 동기가 되었다.
처음 시작한 근무는 버스는 탈 줄을 몰라, 택시를 탔으며 출근 시에는 서대문까지 합승을 하면 천원만 지불하면 되는데 사정을 모르니 택시메타기에 나타난 데로 지불을 하는가 하면, 담배 값이 얼마인 줄 몰라 만원을 지불하고 잔돈을 받는 것이며, 퇴근 시 직원들이 한잔 하자고 하면 얼마나 필요한지를 몰라 최소한 십 만원은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등등...
약 십여 년 동안을 뱃사람으로 지낸 세월은 이 세상의 돌아가는 물정을 전혀 모르는 외계인으로 변화를 시켰으며, 그렇다고 일일이 하나하나 물어보면서 생활하는 것은 쑥스럽고, 촌놈티를 내는 것 같아 그냥 만 원 권을 주고, 지불되는 거스름돈을 세어보면 얼마인가를 알아보는 것으로 가격을 확인하다보니, 퇴근 후 집에 돌아올 때쯤이면 주머니에는 항상 동전이 가득하였다.
회사에서 전화를 할 때면, 배에서는 소음이 많아 작은 소리는 상대방이 잘 이해하지 못하므로 항상 큰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습관이 몸에 베어있어 시끄럽기 그지없고, 저절로 터져 나오는 사투리는 물론 가끔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욕설로 곤혹스럽기도 하였다. 모든 것이 처음 대하는 일들이라 긴장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재미있고 흥미도 있어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업무에 집중하였다.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를 할 때도 회사에 사정을 이야기 하면 휴가를 주는데도 이를 모르고 그저 일에만 열중하는 사회 초년생 이었으며 아내는 이때 둘째 애를 임신하였고, 혼자서 이삿짐을 꾸미느라 무척 힘이 들었을 텐데도 서울 생활에의 기대와, 가족이 함께 한다는 즐거움에 내색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하느라 무리하여 몸살에 감기까지 걸렸으나, 태아에 지장이 있을 것을 우려하여 약을 먹지도 않고 버티는 것을 보니 미안함을 넘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1월말에 81년도의 업무실적에 대한 평가와 신년 업무계획을 발표하는데 나는 처음이고 아는 것도 없어 듣기만 하고 있었다. 거의 마무리가 되었을 즈음에 묵묵히 듣기만 하는 나에게 전무로부터 입사 후 느낀 소감을 이야기하라고 하고 또한 사장까지 몇 차례 권유가 있어 선상 생활을 하면서 느낀 소감으로 “우리 선단의 선박은 정부의 계획조선 사업으로 건조된 신조선으로 이루어져 있는 만큼 경쟁력은 뛰어나지만 배만 좋으면 무엇하느냐? 나 같으면 SJ선단 참치어선을 승선하지 않겠다”고 폭탄 선언을 하였다.
일순 회의장에는 긴장감에 싸여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의 입술에서 또 무슨 말이 나오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OY선박에 승선하면서 조업 중 SJ선장들 간 SSB에서 들은 것과, 직접 만나서 들은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보고하면서, 현재의 어로계약으로는 아무리 열심히 조업하여 좋은 실적을 올리더라도 이에 따른 성과급은 실적은 낮은 선장들과 거의 차이가 없으며, 또한 계약도 타 선사보다 떨어지므로 선장들은 만나면 회사를 비방하기만 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아 결과적으로는 타 선단보다 어획실적이 떨어지고 좋은 선장이 모이지 않으므로 좋은 실적을 기대하기 어렵고,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계약을 변경하는 방법뿐이라고 이야기를 하였다.
한참 침묵이 흐른 후 사장은 그간 업무보고는 현장을 도외시한 계획과 그저 숫자를 열거한 형식적인 것이었다고 질책을 한 후, 다음 주까지 전혀 새롭고 획기적인 어로계약을 작성하여 보고하라는 엄명이 있어, 계약을 담당하는 부서원과 함께 며칠 간 뜬 눈을 세우고서 “ 많이 잡은 선박은 많이 준다(Much Catch, Much Pay)”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계약기간 중 잡은 어획량을 조업기간에 비례하여 산출하여, 많이 잡으면 그만큼 비례하여 상여금이 증가하는 어로 계약(안)을 작성하여 보고하였으며, 당장 시행하라는 지시를 받아 전 선박에 어로계약의 변경 취지를 설명하고 내용을 통보하였다.
이에 따라 새로운 계약을 적용을 시키고 보니, 전 선단에 예전과 같이 적당히 조업하는 형태를 탈피한 전혀 새로운 바람이 분다. 조업기간을 단축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본사에 운반선에 어획물의 전재를 요청하여 어장에서 일본까지 어획물 판매를 하기 위하여 소요되는 항해일수를 조업일수로 전환시켜 어획을 최대화하는가 하면, 가끔 바다에서 선장끼리 상봉하여 회포를 푸는 것도 없이, 하루도 조업을 쉬지 않으려고 하는 등 당장 파급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계약을 마치고 정산 시에는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예상보다 더 많이 지급되는 성과급에 만족을 하여 재 승선을 하는 선원들도 많다. 돈이 되기 시작하니 국내에서 내 노라 하는 선장들이 승선을 하기 모여들어 저절로 경쟁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타 회사보다 많은 성과급을 지급하지만 동일한 조업기간 중에 타 회사 선박보다 월등하게 많이 잡은 어획량은 성과급을 지급하고도 남음이 있어, 상대적으로 회사는 더 많은 이익이 발생하므로 이것이 SJ산업을 발전시키는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1982년 4월 어느 날 꽤 포근한 날이라 점심을 마치고, 회사의 옥상에서 직원들과 탁구를 치고 있는데 무선국으로부터 긴급 연락이라고 하여 확인 결과 제37OR호가 만선 후 귀국하는 도중에 몰디브 당국에 나포되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어황이 좋지 않는데다 어가 또한 떨어지고 있어 경영상태가 좋지 않는데 이런 일이 발생하고 나니 전 직원에게 긴장감이 돈다. 우선 긴급으로 회의를 열어 현지로 전무이사 및 나를 파견키로 하였으며 외무부 및 수산청 그리고 원양어업협회에 보고를 하고 조기에 본선이 석방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하였다
스리랑카를 경유 시 몰디브 영사 업무를 겸임하고 있는 한국대사관에 들려 그간의 실정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한 후, 몰디브의 수도인 말레를 향하여 비행기에 탑승한지 약 3시간 후, 착륙준비를 위하여 선회하는데 창밖으로 산호초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섬들이 눈에 띈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샤워기를 트니 해수가 제대로 정수가 되지 않았는지 시궁창 냄새가 고약하며 눈을 들어 밖을 보니 외항에 정박 중인 본선이 눈에 들어와 착잡한 마음이었다. 법무부에 들려 선장을 면회 요청 후 만났더니 다행히 건강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으며, 조업 종료 후 국제항로인 1.5도 해협을 통과 중 몰디브 해군에 의하여 나포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북한의 무관들이 이곳에 파견되어 군인과 경찰들의 훈련을 시키고 있어 혹시나 그들이 통신 내용을 들으면 본선의 석방에 문제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전화와 텔렉스를 보낼 때는 반드시 암호를 사용하였으며 어떻게 하여서든지 본 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외무부 및 스리랑카에 주재하는 회교 국가의 외교채널을 총동원하였으나 아무런 성과가 나타나지 않아 무척이나 어려웠다.
1차, 2차에 걸친 재판 결과 어선의 경우 몰디브 해역을 통과하기 전에는 24시간 이전에 반드시 당국의 사전 허가를 득하여야 하는데, 이것을 위반하였으므로 선장을 비롯한 전 선원들은 각 섬에 유배에 처하여졌으며, 선박은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가격인 미화 250만 불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이는 몇 년 전 **원양의 선박이 나포되었을 때에도 확인된 사항으로, 이미 유엔(UN)의 IMO(국제해사위원회)에 각 섬을 연결한 기점을 기준하여 200마일이 자국의 영토임을 선포하였으나, 동 사실이 원양어업을 하는 각 선사에는 통지가 되지 않아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여 이렇게 사고가 발생된 것으로 우리 국가의 행정력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벌금이 부과되었으나 납부하지 않은 관계로 본선은 몰디브 정부에 귀속이 되어 선명까지 바꾸었다. 그간은 본선의 기관장 및 냉동사를 승선시켜 어획된 고기의 선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냉동기를 운전하게 하였으나, 이제는 아예 이들도 하선을 시켜 다른 선원들과 같이 유배를 보내고, 자국의 기술자들이 승선시켜 운전을 하면서 본선의 어획물을 일본에 판매하고자 견적을 의뢰하였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에 따라 본선의 반환은 뒤로 미루고, 우리의 참치 수입상인 일본의 미쓰비시에 부탁을 하여, 몰디브와 판매 어가를 협상 중인 마루베니에 어가를 최대한 낮추기로 하되, 미쓰비시에서 마루베니에 신용장을 개설하여 구매하는 형식으로 진행하여 우리의 손실을 최소화하기로 결정하였으며, 모든 것이 확정이 되자 어획물의 검품을 위하여 미쓰비시에서 두 사람을 파견하였다.
파견된 두 사람은 우리 회사의 담당자들로 나와는 절친한 사이로 같은 호텔에 머물렀으나 검품이 끝날 때까지 낮에는 전혀 모른 체 하였고, 밤이 되면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을 끓여 함께 먹으며 앞으로 전개될 일에 대하여 협의를 하였다. 검품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 날에는 처음으로 시간을 내어 이웃한 섬을 관광하였다.
섬 전체가 하나의 모텔로 이루어져 있으며, 관광객들이 전부 발가벗은 상태로 해수욕을 즐기는 것을 보고, 우리가 민망하여 팬티만 입고 옷과 구두는 양손에 들고 섬을 한바퀴 돌았던 기억이 새롭다.
어느 날 스리랑카 대사가 현지를 방문하였다. 외무부장관의 친서를 이곳 외무부에 전달하기 위한 것으로 외교문서상 좀처럼 표현하지 않는 강력한 문구라며 읽어주는데 “만약 본선이 석방되지 않으면 양국관계가 친구사이가 향기롭지 못할 것(-----Unfrangrant Friendship Between Two Countries)”이라는 내용으로 아마도 건국 이래 이렇게 전쟁을 불사할 것 같은 공문을 보내는 것은 처음이라며 우리가 대단하단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장이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티케이의 대부인 분과 사돈관계이고 전 외무부장관과도 인척이고 보니 본선 석방을 위한 외교적 노력이 남달랐으리라.
도저히 더 이상 본선의 반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으므로 전무는 귀국하고, 나 혼자 남아 업무를 처리하기로 하였다. 당시에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유럽에서는 휴양지로 꽤나 알려진 곳이라 비행기를 전세 내어 관광을 오는 사람도 많았으며, 즐겁게 휴가를 보내는 군상 속에서 외톨박이인 나는 선원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매일 법무부를 찾아가 면회를 요청하였으나, 각 섬에 2~3명씩 유배되어 있는 관계로 면회가 불가하였으며 단지 잘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본사의 지시가 있을 경우, 스리랑카에 가서 석방을 할 수 있다는 관계인을 만나 업무를 협의하기도 하였다. 만나보면 말로는 몰디브의 대통령이나 고위층에 압력을 가하여 석방을 시키겠다고는 하나, 하는 행동거지를 보면 전혀 신빙성이 없는 위인들로써 위기에 처한 현실을 이용하여 어떻게 하여서든지 돈을 벌어보겠다는 사람들이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동분서주 하는 중에 선장, 기관장을 제외한 선원들은 석방한다고 하는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아무런 성과도 없이 귀국을 하려니 무안스럽기 그지없으나 그래도 우선 선원들이라도 귀국을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스럽다. 석방된 선원들이 말레에 모여지는데도 이틀이 걸렸으며, 무엇보다는 건강을 염려하였으나 생각보다는 잘 적응하였는지 약간씩 초췌하여 보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픈 사람 없이 밝은 얼굴들이다.
유배된 섬에서는 아마도 촌장들의 집에 거주를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정부에서 이야기도 있었겠지만 외국인들이라 나름대로 불편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여 응대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하여 파견된 지 60여일, 하루도 긴장을 풀지 못하고 마음 졸이며 보낸 시간들이었으나 무엇 하나 뚜렷한 성과 없이, 더우기 선장과 기관장을 남겨두고 귀국을 하려니 마음이 착잡하다.
회사의 성장과 실무의 애환
이렇게 어려운데 더하여 계열사인 **금고는 당시 장 영자의 어음사기 관계로 연일 고객들의 인출이 이어져 이를 해결하느라 모두가 눈, 코 뜰 사이가 없는데도 사장은 참치독항선을 구매하고자 분주하다. 그러나 전 임원들의 반대가 워낙 심하여 고심을 하다가 최종적으로 나에게까지 의견을 묻는다.
당시에는 몰디브 나포 건으로 후유증이 남아있었고 참치어업이 어획이 좋지 않는데다 유가상승, 어가하락 등으로 불황이라 조업을 포기한 회사가 많았으므로 선가도 비싸지 않을 때라 단기적으로는 괜찮겠으나 장기적으로는 선박노후화에 따른 문제가 있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일본의 경우 년 간 약350,000톤 정도의 횟감용 참치가 소비되고 있으므로, 현재와 같이 조업척수가 줄어들면 수입물량이 감소되어 언젠가는 어가가 상승하리라는 생각이었다.
모두 반대하는데 그래도 한 사람이라도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하더니 적극적으로 검토하여 아주 저렴한 가격에 3척을 매입하였고, 출항 후 9개월 만에 만선을 하여 귀항 후 정산을 하니 그간 소요된 모든 경비를 차감하고도 이익이 발생하였으며, 이 것이 향후 선박의 척수를 증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참치독항선의 경우, 투자 금액(약250만불/척)에 비하여 자금 회전율 좋지 않고 매출액도 많지 않아 대기업에서 관심은 가지고 있으나 선뜻 나서지 못하는 업종이나, SJ산업의 경우 보유 선박의 척수가 많다보니 그러한 약점을 보완하여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으며, 경영이 어려워 다른 회사에서는 감선을 하는데도 이를 반전하는 기회로 생각하고 증선을 하였으며, 다시 호황으로 회복이 될 때에는 이를 충분히 만회시키는 사장의 독특한 경영 방식과 절대 모르는 사업은 타 업체보다 앞에 서서 모험을 하지 않는 안전주의를 추구함으로 세간의 우려를 씻고, 이제는 세계에서 우뚝 서는 회사로 발돋움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참치 연승어업의 경우 수출산업으로서 정부로부터 저금리로 수협을 통한 금융지원도 있으나, 일본으로부터도 국내보다 싼 금리로 차입을 하여 운영자금으로 사용함으로서 실질적인 자금 부담이 없는 장점이 있어 누구나 쉽게 생각하고 사업을 시작하고 있으나, 출어를 하기까지 수리비, 연료유, 어구, 주부식비를 시작으로 일시에 자금이 많이 소요되는데다 어획물이 수출로 이루어지기까지의 일반관리비가 만만하지 않다. 일본에서 자금이 차입된 경우에는 어획된 참치 전량을 일본의 자금을 대여해준 상사를 통하여 수출할 수밖에 없는 취약점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어획량을 비롯하여 어가 및 연료유, 환률 등 선주가 통제할 수 있는 요인이 하나도 없는 사업으로 그만큼 위험부담이 큰 사업이다.
일본에 판매된 어가를 10 여 년 전과 비교하여 보면 그렇게 많이 상승된 것이 없이 유지되고 있으나, 그 기간 동안 어획량이 증가하거나 일본 화폐가치의 상승, 연료유 가격의 하락 등 주로 외적인 요인에 의하여 국내 원양 업체에게 유리하게 작용된 것이 많아, 어려운 가운데도 성장을 거듭하였으나, 이제는 각국에서 자국 수역보호의 강화에 따른 입어료 앙등과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는 유가, 달러화 약세에 따른 원화의 강세, 선박의 노후화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되어 있다.
참치의 시장이 일본에 국한되어있고 또한 대만, 중국 등 후발 국가에서 참치어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여 선박척수가 증가하고 있어, 참치의 공급과잉에 따른 어가의 하락을 이대로 방치하고만 있을 수 없어, 이에 대한 대안으로 국내의 시장을 개척할 필요성을 느껴 DW원양, SJ산업 등을 필두로 자본금을 투자하여 **참치라는 회사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국내의 횟감용 참치시장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참치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으나 횟감용 참치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여 업종의 다변화를 통하여 경영을 정상화시키려고 일환으로 소량이지만 참치 통조림을 판매하였으며, 이것이 대기업에서 직접 국내시장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으니 아이러니하다.
형식상의 명목은 참치회의 판매 및 홍보를 하기 위하여 **참치를 설립하였는데, 지주사의 동의도 없이 통조림 사업을 시작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국민소득의 향상과 더불어 국내 요식업계의 동향 변화 및 적극적인 홍보의 영향으로 이제는 소비자들에게 어느 정도 참치에 대한 인식이 빠르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참치의 국내시장 판매도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여, 참치업계의 양 거두인 SJ산업과 DW산업이 유진참치에 참치의 공급을 중단하고, 본격적으로 뛰어든 결과 2년여 만에 300여개의 직영점과 대리점을 개설되었으며 이에 고무되어 지중해에서 어획하는 참 다랑어를 중심으로 고급 어종의 참치 판매점도 급속하게 증가되게 되었다.
그러나 횟감용으로 주로 판매되는 눈다랑어의 경우 다른 어종보다 고가이므로 맛은 좋으나, 단가가 비싼 40키로그램(중신규격이라 불림)이상의 판매보다는, 가격이 저렴한 25키로그램 중심으로 보급이 되기 시작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중소 원양선사에서는 잡어와 일본에서는 식중독으로 인하여 70년대부터 판매가 금지된 기름치(Oil Fish : 백마구로로 둔갑되어 잘못 판매되고 있으며 기름기가 많아 즐겨 먹으나, 과다하게 먹을 경우 설사 및 식중독을 일으킬 수 있음)를 위주로 한 저급품을 전문적으로 판매(\15,000~17,000/인)를 하는 등 참치가 일반 대중에게도 친숙하게 접하게 하였다.
처음의 일본 출장은 전무나 상무의 출장 시에 참치 판매업무 관계를 보좌하면서 어가를 결정하는 방법을 배우고 또한 선박의 제반 업무를 수행하였으나, 일본어를 전혀 알지 못하여 애로사항이 많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본어 학원에 등록을 하였으나 제대로 공부가 되지 않아 조그마한 손가방에 책자를 넣고 버스로 출, 퇴근 시 매일 익히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참치 전진기지인 시미즈에 위치한 **냉장(주)에서 3개월의 참치연수기간 중에는 아예 텔레비전 채널을 NHK교육 방송에 고정을 시키고 시간이 나는 데로 들었으며, 이웃한 시즈오까 어시장에서 열리는 참치의 경매를 보고 배우기 위하여 운전을 자청한 **냉장의 신입사원과 함께 매일 새벽 오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경매 전에 진열되어 있는 수십 마리 참치의 색깔, 기름기, 선도 등을 보고 각 마리 별로 예상 가격을 매긴 후 낙찰된 가격과 비교하여 의견을 교환하는 것과 업무시간에 직원들과 나누는 여러 가지 이야기 등이 일본어를 익히는데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단순하게 언어만 익히는 것보다는 일본의 역사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판단되어 대망, 후 대망과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책을 구입하여 읽었던 것도 일본을 아는데 조금 보탬이 되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연수기간 중에 직원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하여 이즈에 있는 온천으로 1박2일의 사원 여행이 있었는데 나도 참석을 하였다. 버스의 뒷좌석에는 안주거리가 비치되어 있고, 제일 뒷좌석에는 아이스박스에 각종 술이 얼음에 채워져 있는데 승차하자마자 권하고 마시기 시작하더니만 도착 시에는 거의 취한 상태다. 모두가 가운을 걸치고 한자리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도중 취흥이 일자 가라오케를 시작하는가 싶더니, 한 직원이 여직원들이 배석한 것도 개의치 않고 발가벗고 전 좌석을 돌며 좌충우돌하는 것을 보고 박장대소한다.
나는 직원들의 성화로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는 노래인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른 후에, 가장 술이 센 직원과 일본 술(정종)로 술 시합을 벌리게 되었다. 이것도 시합이라고 서로 지기 싫어 얼마를 마셨는지 모르겠으나 다음 날 아침 일어나니 온 몸이 무겁고, 머리가 쑤시는데 나와 대작을 하였던 직원은 일어나지도 못하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퍼 마시기는 마셨는가 보다.
직원들이 직접 배에 승선은 하지 않으나 험하고, 거친 바다에도 굴하지 않고 가장 멋진 바다의 귀족인 참치를 잡은 뱃사람들과 매일 호흡을 같이하고 있으며, 경매에 붙여지는 어가도 들쑥날쑥 하는 것과 하역부터 냉장고에 입고 그리고 판매에 이르기까지 다른 회사원보다 힘이 들고 어렵지만 사나이가 한번 해볼만한 직장이라며 자기들도 자칭 “바다의 사나이”라고 하는 것이 실감이 된다.
OR**호가 하역을 하기 위하여 시미즈항에 입항하자마자, 해상보안청 직원이 본선에 승선하여 항해일지 및 선수부분에 약간 긁힌 자국이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부산으로 귀항 시에 시모노세키 인근에 있는 우베항에 입항하여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이는 시모노세키 해협을 통과 후 항해 도중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과 접촉사고가 있었는데 본선이 그대로 도망을 하여, 피해 어선에서 본선의 선명을 개략적으로 확인하여 사고보고를 하였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입항 시 기름유출이나 선원들의 음주 사고 등으로 인하여 1년이면 3~4차례 해상보안청에서 몇 시간 더러는 2~3일씩 지루하게 조사를 받고, 마지막에는 회사를 대표하여 향후 이런 사고가 재발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서를 제출하고 있어 사전 교육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이제는 출장하여 사고를 처리하여야 한다니 조금 한심스럽기도 하다.
본선이 우베항에 입항하여 선장과 당직 항해사가 해상보안청에 출두하였다. 처음에는 사고로 인하여 어떤 불이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아예 모르는 사실이라고 발뺌을 하였으나, 어선과 본선에 묻어있는 페인트의 성분을 분석하면 어차피 결과가 나올 것이며 어선에서 해상보안청에 신고 된 선명이 거의 맞는 점 등과 만약 끝까지 부인을 하면 결과가 나올 때까지 출항을 할 수 없음을 설명하여, 항해사가 당직 중 무언가 접촉되는 것 같았으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항해를 계속하였다라고 진술을 한 후 출항을 하였다.
이 때 업무상 뿐 만 아니고 개인적으로도 돈독한 관계가 있는 **냉장의 한국담당자가 후쿠오카에 지사장으로 발령이 나서 근무 중이었음으로 사고수습을 한 후, 그 곳에 들렸더니 한국 사람으로는 나를 찾는 사람이 처음이라며 반갑게 맞이한다. 저녁을 하고 가라오케로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으며, 의기투합하여 새벽까지 술을 마신 후 다음 날 귀국을 하였다.
참치를 판매하면서 느꼈던 것으로, 상담 시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데는 외국어의 구사 능력이 아니고 얼마나 진솔하게 대하며 자기 상품의 가치를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예 일본어를 모를 때는 영어로 이야기를 하면서 가장 중요한 가격은 노트에 쓰면서 서로 이해를 구하면 되었으나, 조금씩 일본어가 구사되면서부터는 가격도 가격이지만 일본어로 상담을 하는 자체가 엄청나게 신경을 쓰이게 한다.
그래도 일본어가 아직까지 서투르다고 상대방이 인정할 때까지만 해도, 상담내용이 나에게 불리할 경우(시장 상황 및 고기가 좋지 않다, 재고가 많다 등)에는 잘 모르겠다고 발뺌을 하면, 상대방은 어떻게 하여서든지 나를 설득시키기 위하여 보다 상세하게 설명을 하여주므로 이야기를 한번 더 들으면서 생각할 여유도 가질 수 있으나, 어느 정도 익숙하여 지면 상대방은 나를 위하여 그런 기회를 주지 않는 반면 나는 우리말이 아닌 상대방 언어로 설득을 시켜야 하므로 어쩌면 신경이 곤두서 더 피곤한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어가가 내리고 환율이 좋지 않아 판매를 보류하고 제반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이 때에는 자금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판매예상액의 일부를 먼저 수령하게 되는데, 어가가 결정되기까지의 창고료와 이자 등 이에 수반되는 비용도 만만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는 수입업자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하여 도움을 청하면 다른 회사의 판매되고 있는 가격과는 별도로 힘이 닿는 데까지 협조하여 주기도 하였다.
1986년 6월 6일 현충일로 공휴일이라, 지인들과 함께 *** 컨트리 크럽에서 골프를 치고 88올림픽도로를 자동차로 달리는데 졸음이 온다. 새벽골프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였고 차를 시내에 주차시키고 일행의 차를 타고 가서 다소 방심하고, 운동이 끝나고 목욕을 한 후 간단하게 맥주를 한 잔 마신 것이 원인 인 것 같다. 집에서는 처갓집 식구들과 점심식사를 함께 하기로 약속이 되어 빨리 가야하는데..... 허벅지를 꼬집어보고, 창문을 열고 노래를 불러보지만 눈꺼풀이 감기는데 쉴 곳도 마땅하지 않다.
주민등록번호 하는 소리에 491***-166****하며 눈을 떴는데, 천정에서 강한 빛이 비춘다. 주위를 들러보니 하얀 가운을 걸친 의사와 간호원들이 나를 쳐다보며 정신이 돌아왔느냐고 묻는다. 생각을 더듬어보니 앞서가는 트럭을 추월한 것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이후로는 필름이 끊겼다.
대학 동기 중 한 사람이 자동차 충돌 사고로 인하여 식물인간으로 몇 년 동안 지내고 있는 생각이 퍼뜩 떠올라 놀라서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을 보니 온몸이 피투성이다. 걱정을 하면서 팔, 다리를 움직여보니 정상적이며 목 뒷부분에 몇 바늘을 꿰맨 자국 외에는 특별하게 아픈 곳은 없는 것아 다행스러웠다.
우선 처남을 전화로 불러 가벼운 교통사고가 발생하여 병원에 입원 중이니 들리라고 하고는, 혹시나 염려되어 MRI 촬영까지 끝내고 보니 이상이 없다고 하며 퇴원을 종용한다, 사고현장을 다녀 온 처남이 정말로 괜찮은 것이냐고 수차에 걸쳐 질문하는 뜻을 몰랐으나, 다음날 자동차 정비공장에 들려보니 핸들이 반쯤 구부러져 있고, 오른쪽 앞바퀴 부분은 절반이 날아가고 없는 것이며, 정비공장에서는 “자동차 상태를 보니 누군가 죽었거나 중상을 입었을 것”이라 하니 짐작이 가고 남음이 있다.
퇴원 후,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데, 9시 저녁뉴스 시간이 끝난 후 수도권소식에서 나의 사고처리 때문에 약1시간여 동안 교통이 마비되고 운전자는 중상이라는 내용으로 나의 신상 명세가 나왔다며 여기저기에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한다. 어떤 친구는 방송을 듣고 깜짝 놀라 병원에 들려보니, 퇴원하였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고 아직도 진정되지 않는 목소리로 확인을 한다.
일본에서 연수 중 토요일과 일요일 그리고 공휴일이면 딱히 갈 곳이 없고 또한 방의 청소 때문에 얼마 정도는 밖에 나가 있어야 하므로 이 시간을 이용하여 운동 삼아 자전거로 약 4키로 떨어져 있는 골프연습장까지 가서 골프채를 휘둘렀던 것이 재미가 있어 귀국하여서도 가끔 골프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를 초래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고, 그래도 목숨을 부지한 것은 물론이고 부상이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업종의 다변화를 통하여 단일 업종이 가지고 있는 취약성을 보완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을 때, 마침 DH원양이 남빙양에 출어를 하는 등 무리한 사업 투자로 인하여 자금이 부족하여 더 이상 북태평양의 트롤사업을 할 수 없게 되자, 이를 근저당한 은행에서 자금을 회수하기 위하여 경매에 내 놓은 선박 2척을 예상 시가보다 높은 가격으로 낙찰을 하여 본격적으로 북태평양 사업에 뛰어들어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국내의 수산시장에 접하게 되었다.
한편 DW산업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참치선망어업(헬리콥터, 어군탐지기 또는 마스트 위에 설치된 망통에 올라가 망원경 등을 이용하여 참치 떼를 확인 후, 그물로 둘러싸 어획하는 어업으로 가장 적극적으로 참치를 어획하는 어법임)을 시도하여 성공적으로 사업이 영유되면서 조업척수를 증가하기 시작하자, 타 원양 업체에서도 검토를 하기 시작하였으며 통조림 사업도 성공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그간 어획물의 전량을 태국에 판매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국내에 참치통조림 공장을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통조림을 국내에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미국의 경우 환경 단체들로부터 참치선망선이 조업 시 돌고래도 함께 포획되고 성어가 아닌 치어까지 어획이 되는 문제 등으로 동부태평양 어장에서의 조업금지 및 참치자원의 감소와 각 연안국들의 자국내 수산자원의 보호에 따른 입어료 인상과 경비강화 등으로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되어 선박을 매매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미국의 산디아고에서 건조 중이던 참치선망선 2척이 진수를 마쳤으나, 선주가 채산성이 없다고 판단되어 더 이상 건조를 중단하고 조선소에 계류된 상태에서 매입자를 찾고 있어 싼 가격(350만 불/척 : 당시 가격으로는 싼 가격이 아니었으나 이후 국내 및 대만에서 참치선망어업이 본격화되면서 선가가 급상승하였음)으로 구매를 하였으며, 정상적으로 조업이 이루어지자 추가로 3척(최종선박은 선령이 10년을 넘은 중고선인데도 800만 불에 매입함)을 구매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DW산업 및 SJ산업은 국내의 통조림 사업에 경쟁적으로 나서게 되었으며, 텔레비전 및 각종 언론매체를 통한 홍보효과는 결과적으로는 소비자들에게 많은 흥미를 유발시켰으며, 레저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폭발적인 소비를 촉진시키게 되었다. SJ산업의 경우 후발업체로서 더 많은 노력을 한 결과 시장 점유율이 한 때 35퍼센트까지 상승하였으나, 회사에 노동조합이 결성되면서 몇 개월간 계속된 파업 및 태업으로 인하여 판매조직이 무너지면서 20퍼센트까지 하락하였으며, 더 이상 시장의 회복이 어려워졌다. 그렇다고 공장의 생산량을 줄일 수 없어,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식품과 제휴하여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 : 주문자 상표부착 생산)으로 생산하여 공급하게 됨으로서 공장의 가동률은 높일 수 있었으나, 자사 상품의 브랜드를 소비자에게 인식 시키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노사협의회에 의하여 매년 선원들의 임금에 조정이 되었으나 원양수산노동조합이 만들어지면서 단체협약에 의하여 조정이 되었으며, 선박이 출항 시에는 선원들의 어로계약 내용을 항만청에 제출하여 확인을 받아야 하며, 단체협약 내용보다 하회할 경우에는 출항증이 발급이 되지 않게 되었다.
어획실적이 나쁠 경우에는 생계비 외 수당을 한 푼도 받지 못하였던 점을 보완하여 무사히 계약을 마치면 실적에 관계없이 매월 일정한 보장금을 지급하는 것까지 포함된 단체협약으로 어느 정도 선원들의 기본적인 권리는 보장이 되는 반면, 경영수지와는 무관하게 매년 과도한 임금상승으로 인한 경영압박을 견디다 못한 선주들은 이를 해결할 방안으로 외국 선원을 승선시키게 되었다.
처음에는 3명에서 시작한 것이 몇 년이 지나자 간부선원들을 제외하고는 전 선원이 외국인으로 대체되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에서도 회사의 고육지책을 이해하고 협조하는 방안으로 외국선원에 대한 조합비를 선주가 대신 납부되도록 합의를 하여 이를 묵인하게 되었다.
또한 회사의 경영수지와는 무관하게 계약기간 중에 일정한 어획량만 달성되면 지급되는 성과급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각 선박별로 손익분기점을 산출하여 이를 상회할 경우에 성과급을 지급하는 것으로 계약을 수정하였으며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급격한 경제성장에 따른 육상 근로자 임금의 앙등으로 인하여 선상 근로자들과의 임금격차가 갈수록 작아지다보니 차츰 승선을 기피하게 되었으며 수산대학에서도 어업학과는 가장 비인기 학과로 전락하게 되었다. 열악한 근로조건에서도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하여 과감하게 자신을 바다에 내어 던지며 젊음을 불태웠던 열정은 원양어업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성장을 이루었으나 이제는 제반 환경여건의 변화에 따라 점차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어 격세지감을 느낀다.
참치 독항선 한척이 일본에 하역을 하기 위하여 부산을 출항을 하였으나 기관 상태가 좋지 않아 시모노세키(下關)에 입항하여 점검을 하고 있었다. 이 때 공교롭게 페리선이 부두에 접안을 하다가 부주의로 인하여 본선을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하였으며, 손상을 입은 외판으로 어창에 해수가 유입되었다. 무엇보다도 어획물의 선도가 걱정이 되어 신속히 수중용접을 하고 시미즈항으로 출항을 하였는데 붕고(Bunggo)수도를 벗어나자 선박이 한쪽으로 기운다고 하더니만 복원력을 상실하고 결국은 침몰하고 말았다.
선원들은 근접한 곳을 항해하던 상선에 의하여 구조되었으며, 선체 및 어획물에 대하여는 보험에 가입이 되어 있으므로 보험금을 수령함으로써 처리가 되었다. 원인을 분석한 결과 수중용접이 끝날 때까지 예상보다 많이 유입된 해수가 적재된 참치를 해동시켰으며, 선체가 기울 때 해동된 참치가 중량을 이기지 못하고 죽과 같이 뭉기어져 한쪽으로 쏠림 현상이 발생되었으며, 이것이 복원력을 상실시키게 되었다고 한다.
남태평양인 마이크로네시아 수역에서 조업 중인 참치 선망선에서 좌초되었다는 긴급 보고가 있었다. 전문 내용을 확인하니 밤에 어장이동을 하는 중에 산호초에 좌초가 되었으며 이 산호초는 해도에 표시되어있지 않다고 한다. 통상 항해 시에는 어군탐지기를 작동하는데 아마도 당직을 철저하게 서지 않은 것으로 보아지며, 자력으로는 빠져나올 수가 없으므로 구조를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우선 인근에 있는 나라의 구조회사에 연락하여 예인선을 보내어 이초(離礁)를 시도하였으나 본선의 선체가 커서 불가하다고 한다. 일본의 구조전문회사인 NIPPON SALVAGE에 요청을 하여 파견한 결과 예상보다 빠르고, 쉽게 구조를 하였으며 본선은 예인선으로 예인되어 싱가폴에서 상가하여 수리 후 출항을 하였다.
그러나 2주 후에 청구된 구조금액이 물경 일백이십오만($1,250,000)불로 상상을 초월한다. 이에 따라 청구된 금액의 타당성을 협의하기 위하여 해당 보험사 및 구조회사의 부장과 내가 배석하여 회의를 가졌다. 보유 선박이 많고 또한 사고가 적어 선단 보험료를 할인받고 있는데 만약 상기 금액으로 결정이 된다면 다음 해부터는 선단보험료가 할인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고 추가로 할증이 될 것 같아 계산을 하여보니 최대한 팔십오만 불($850,000)이하로 협의가 되어야 만 하였다. 계산된 근거를 물으니 “구조료는 성공하지 못하면 받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선박의 가치를 일천이백오십만 불($12,500,000)로 추정하였으며, 구조료는 이것의 10분의 1로 하였단다.
영어로 몇 시간 회의를 하였으나 일백만 불($1,000,000)이하로는 낮출 수 없다고 버티며 그 이상은 본사의 허가가 있어야 하므로 불가하다고 한다. 언제까지 시간을 끌 수 없다고 판단되어 지금부터 서로가 허심탄회하게 일본어로 이야기를 하자며 일본의 경우 담당자도 최소한의 한도를 가지고 협상을 하는데, 부장이 출장하여서 결정을 하지 못하고 회사를 핑계로 피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다시 한번 회사의 처한 입장을 설명하고 부탁을 하니 퍽 난처해하면서 일단 본사에 보고하고 결과를 통보하겠다고 한다. 폐회를 하면서 다시 한번 보험사 직원들에게도 부탁을 하였는데 다행스럽게 다음 날 우리의 요구대로 팔십오만 불($850,000)로 하겠다고 연락을 받았다. 아마도 보유척수가 많으나 사고가 거의 없어 보험사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기획실장(상무이사)이 저녁을 같이 하자면서 부서의 이동을 넌지시 권한다. 실무를 맡는 부서장에서 수산관계의 기획 및 계약과 은행, 수출입 업무 등을 총괄하는 수산관리부장을 맡았으면 한다고 한다.
밤새 뒤치락거리며 고민한 끝에 중역이 되는 과정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수락을 통보하였으며, 이 때부터 약 3개월간 퇴근 후에 무역실무를 비롯하여 은행에 관련된 공부를 밤늦게까지 하느라 피곤하였으나 알아가는 재미는 이것을 상쇄하고 남았다.
그러나 수산사업 본부장이상의 결재가 필요한 서류는 반드시 수산관리부장의 의견이 첨부되어야 하는 규정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조금이라도 반대의견이 제시되면 “아는 사람이 더 한다”고 하며 담당이사에게까지 불평을 하는가 하면,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하여 가끔은 불편하기도 하였으나 이를 해소시키기 위하여 부단히 신경을 썼다.
그간 참치독항선 부장, 수산관리부장 등으로 근무를 하다가 참치선망선 부장으로 인사발령으로 받고 제일 먼저 염두에 둔 것은 방만한 어로 경비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것이었다.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는 경쟁업체로부터 선장을 인선할 수밖에 없으므로 약간의 무리가 따르더라도 어로계약이나 어구 및 선용품의 선정에 이르기까지 선장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여 이행하다보니, 경비에 대한 통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것이 일상화되다보니 선원들까지도 당연시 되어 다른 업종의 선원들보다 임금이나 근로조건에서 월등한 대우를 받고 있는데도 더욱 많은 요구를 하고, 이것이 성사되지 않으면 아무 때나 하선을 하는 등으로 조업에 차질이 초래되므로, 이의 폐단을 알고 있으면서도 회사에서는 감내하고 있으나 이것이 마치 선장이나 선원들의 능력인 것으로 착각을 하여 이에 따르는 부작용이 많았다.
계약 기간이 종료되면 부산에 입항하여 수리 및 출어준비를 한다. 이 기간동안에 정산이 이루어지고 출항 전에 정산금이 지급되는(타 업종의 경우 약 3개월이 소요됨) 등 타 업종에서는 볼 수 없는 혜택을 누리고 있는 선박 중 한 척에서, 위성통신장치를 이용하여 통화한 금액이 통상 월평균 40~50만원 정도 청구되던 것이 입항 1개월 전에는 250만원이 되었다. 청구 내역을 세부적으로 확인하니 거의가 선장이 개인적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사용료가 1개월 후불로 청구되는 만큼 아직 청구되지 않는 금액이 얼마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고 더 이상 묵과할 수가 없다고 판단되어, 청구되지 않은 금액을 250만원으로 추정하여 2개월분을 정산금에서 공제하기로 결정하고 선장에게 설명을 하고 협조를 구하였더니 승낙을 하였다.
그러나 다음 날 부산의 전무로부터 나를 찾는 전화가 있어 전화기를 들자마자, 네가 무엇인데 네 멋대로 정산을 하여 내일 출항을 하는 선장이 못 타겠다고 하느냐며 이에 대한 책임을 지라며 나의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는가 싶더니 선원과 담당 직원으로부터도 볼멘소리로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나더러 책임을 지고 방법을 찾으라고 한다.
사안이 중대하고 또한 이에 따르는 책임도 막중하다고 판단되어 사장에게 직접 상세하게 보고를 하고, 동 건은 정산 시 상호 합의까지 한 사안이며 만약 이대로 적당하게 물러설 경우 사 선단에 미치는 영향은 물론 향후 경비의 효율적인 관리가 불가한 점과 이제는 어느 정도 검증되고, 유능한 선장들이 배출되어 후임 선장의 인선에 어려움이 없음을 고려하여 결정하였으면 한다고 보고를 하였다.
한참을 생각하더니만 선장의 교체에 따라 출항이 지연되더라도 이 기회에 명확하게 경비에 대한 통제를 본사에서 할 수 있는 안을 마련하라고 지시를 한다. 동 사실을 부산의 담당자에게 이야기를 하여 결국은 선장을 교체하였으며 하루 늦은 다음 날 출항을 하였다.
이 후 그 선장이 잘못을 사과하고 승선을 희망하였으나 사 선단은 물론 타 선사의 선박도 그에 대한 좋지 않는 소문으로 인하여 승선하지 못하게 되였다. 정상적으로 조업만 한다면 최소 천만 원/월, 이상의 고수익이 보장되는 선장임에도 이렇게 작은 것에 집착하다가 결과적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소탐대실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으나 어차피 과도기에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이 후 이것이 경비의 상한선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참치선망선 부장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태국에 수출한 참치 약 1,000톤이 선도가 나빠서 구매를 할 수 없다는 통보를 접수하고 운반선사의 사장과 서울에 주재하는 C. ITOH 수산 담당자와 함께 방콕에 들려 C.ITOH태국 주재원을 대동하고 운반선이 정박하고 있는 송크라에 출장을 하였다.
참치통조림 공장을 방문하여 본선에서 하역하여 냉장고의 팰릿(Pallet : 지게차로 하역할 때 편리하게 하기위하여 만든 틀)에 보관되어 있는 참치의 상태 및 공장 측에서 제출된 공정결과표를 확인하고 공장 측의 의견을 들으니 공정결과표에 나타난 것과 같이 선도가 나빠 원료로 부적합하여 사료로 밖에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운반선에 들려 냉동일지 및 어창의 온도, 그리고 어창에 보관되어 있는 참치를 무작위로 선별하여 선도를 확인하였는데도 특별한 이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횟감용 참치에 대하여는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으나, 통조림원료용 참치에 대하여는 항해사로 승선 시 사모아에서 통조림공장을 방문한 기억 밖에 없는 문외한이라 이 분야에 다년간 종사하여 경험이 많은 C. ITOH 직원들의 의견을 참조하여 판매를 어떻게 하여야 할지를 결정하여야 하는데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밤늦게까지 협의한 결과 선도에 이상은 없는 것 같으며, 최근 어획량이 급증하여 가격이 급락하는데 따르는 일종의 마케팅클레임(Marketing Claim : 시장가격 변동에 의한 손해보전)인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국내에 반입하는 것으로 결정하였으며, 운반선사에는 금 항차에 한하여 국내까지의 운반비를 통상의 절반 가격으로 하기로 하고 본사에 보고를 하니 다른 대안이 없었는지 이를 승낙하였다.
귀국하여 한참 후에 들으니 내가 전혀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결정한 사항이라 무척 우려하였다고 한다. 다행히 공장에서 가공 결과 선도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하여 이 문제가 일단락이 되었으며, 이 때의 경험이 보다 심도 있게 통조림 원료에 대하여 공부를 하는 계기가 되어 제반 업무를 추진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르헨티나 어장 진출
어느 날 갑자기 사장이 수산사업본부의 간부회의를 소집한다. 몇 해 동안을 검토만 하였던 아르헨티나 어장의 오징어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을 하겠다고 한다. 이에 따라 적임자를 현지에 파견하여 제반을 확인 후 결정을 하겠다면서, 그 동안 동 사업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사업계획을 제출 한 바 있는 나에게 전권을 위임하겠으니 무조건 성사를 시키라고 한다.
실무 부서장이 출장할 경우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아무래도 실무위주의 수산 관계만을 생각하여 업무를 추진하기 쉬우므로 문제가 발생될 수 있다며, 수산관리부장을 하면서 기획과 자금 기타 은행 관계 등의 업무를 하였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여 성사시켰으면 한다는 부언이 있었으나 스페인어는 전혀 모름은 물론이고 아는 사람도 없어 걱정부터 앞선다.
출장 전까지 우선 먼저 최근에 아르헨티나에 진출한 수산업체를 방문하여 자문을 얻은 후, 양 정부간 합의로 수산이민정책을 추진하여 선박 및 선원들을 보냈으나 근본적으로 상이한 수산관계법 및 근로조건 등으로 초창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으며, 이제는 이것을 극복하고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수산사업을 하고 있는 **기업을 방문하였더니 현재는 제법 잘 운영되는 것으로 보이나, 실질적으로는 매우 어렵다는 조언을 한다.
우선 한국의 원양선사와 합작사업을 가장 활발하게 진행시키고 있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회사에 텔렉스를 보내 의사를 타진하고 나의 출장일정을 통보한 후 출국 수속을 하려는데 까다롭기 그지없다. 비자를 신청하는데 호적초본의 번역 공증이 필요한가 하면 대사관에서 면접 등이 이루어진 후에 비자를 취득하고 비행기를 탔다.
미국에 비자를 신청할 시간이 없어 그대로 출국을 하였는데 L.A 도착 시부터 감시원이 화장실까지 동행하더니만 마이아미 행 비행기를 탑승하니 여권을 승무원에게 인계시킨다. 마이아미에서는 부에노스아이레스 행 비행기에 탑승 시까지 역시 여자 감시원이 동행을 하기에 “나는 도망을 가지 않는다, 아르헨티나에 업무 차 출장을 가니 너무 염려하지 말라”하니 웃으면서 “누구나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는 틈만 나면 도망을 간다”면서 자신의 업무를 이해해 달란다. 본인에게 주어진 업무를 철저하게 수행하는데 대하여 찬사를 보내고 탑승 전 여권을 인수하였다. 공항에 내려 입국 수속이 끝나고 출구에 나서니 일본인이 운영하는 회사 직원이 반갑게 맞이한다.
호텔에 가는 도중 일본어로 수산업 제반에 관하여 상세히 물으니 어떻게 일본어를 배웠느냐며 깜짝 놀란다. 국내에서 사전에 조사한 바와 같이 외국 어선은 아르헨티나 수역 내에서는 단독으로 입어하여 조업을 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합작회사를 설립하여야 하며, 합작회사를 설립 시에는 국내법 상 외국인의 경우 아르헨티나 측이 50퍼센트 이상의 지분을 소유하여야 된다고 하며, 지금까지 이곳에 진출한 한국 수산업체의 경우 49퍼센트의 지분으로 자기 회사(51퍼센트)와 합작회사를 설립하였다고 한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나 이 경우 선박은 물론이고 운영 자금까지 국내에서 전액을 투자를 하는데 이에 따르는 조건은 불리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하여 출국 전부터 관심이 없던 사안이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지분에 의하여 선박까지 빼앗길 수 있는 위험이 있으므로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판단되어 오늘은 피곤하니 검토 후 연락을 주겠다하고 헤어진 후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약25시간에 걸친 장시간 비행이었고 시차가 있고, 전혀 반대의 기후에 무척이나 피곤한데도 어떻게 실마리를 풀어야 할 것인지의 생각에 잠이 오지 않는다.
이튿날 **기업 지사에 인사차 들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침 대학 후배가 근무하고 있어 거두절미하고 협조를 요청하였더니, **기업의 초창기 멤버로 수년 전 은퇴하고 현재는 비디오사업을 하고 있는 분을 소개해 주었다. 회사를 찾아갔더니 반갑게 맞아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 서울상대를 졸업하였다고 하여 우리 회사의 사장도 동창이니 잘 부탁한다며 협조를 구하였다.
직원들에게 매주 한번씩 삼국지를 강연하는 독특한 분으로 이곳에 대한 사업에 대하여 아무리 잘 설명을 하여도 본사에서 이해를 못하면 향후 사업에 어려움이 수반되므로 관심이 있다면 누구보다도 사장이 직접 이곳을 방문하여 제반을 확인한 후 결정하였으면 한다고 수차에 걸쳐 너무나 간곡히 주장하므로, 사장에게 사업을 하지 않아도 좋으니 일단 한번 현지에 출장을 와서 그간 국내에서 듣고, 느낀 것과 현지 사정을 종합하여 사업의 방향을 결정하였으면 한다고 수차 요청하여 결국은 사장이 직접 출장을 하였다.
아르헨티나 중부에 위치한 네코치아라는 어업 전진기지가 있는 곳은 비행기로 방문하고, 여기서부터는 자동차를 렌트하여 귀임하기로 하여 출발을 하였다. 네코치아에서 항만 시설을 돌아본 후, 자동차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향하면서 도중에 어업전진 기지로서 적합한 항구를 견학하는 것으로 계획하고 달리기 시작하였다. 끝없이 펼쳐지는 대평원(팜파스: Pampas)은 달려도, 달려도 막힘이 없다. 가끔 보이는 마을 주위에 보이는 나무를 보고 산(Mountain)이라 한다하니 그야말로 어안이 없어 열린 입이 닫히지 않는다.
어쩌다 마주치는 대형 트레일러(곡물이나 소를 운반)가 반가울 지경으로, 지평에 펼쳐지는 밀밭이며 목장은 자동차의 속도까지를 삼킨 체 한 없이 전개되는가 하면, 길 가에는 독사에 물려 죽은 소가 버려져 있을 정도이니 상상이 어렵다. 식량 자원 중 밀의 경우는 가격이 하락되면 추수를 하지 않고 밭을 뒤엎은 후 다음 해 농사를 하는 정도로 세계의 밀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이렇게 자원이 풍부하니 구태여 바다로까지 눈을 돌릴 필요가 없어 아직까지도 무한한 수산자원이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되니 부럽기만 하고 옛 날의 부귀영화가 현실로 들어 선 느낌이다.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여서는 소의 경매시장을 둘러보고(당시 황소 한마리가 $250 - 약 이십만 원에 경매가 되고 있었음), 목장으로 향하였다. 우리 일행을 위하여 전날에 소 한 마리를 잡아, 각 부분별로 분리한 후 창으로 꽂아 모닥불 주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서 아침부터 점심시간까지 익히고 있는 목장에 도착하였다.
직접 농장 주인이 반갑게 맞으며 부위별로 썰어서 서비스를 하는데, 포도주와 곁들인 맛이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수산업 진출 이후의 사업을 구상하기 위하여 목장과 통조림 공장의 견학을 요청한 것으로 특히 소꼬리 와 우족 등은 국내에서는 인기가 있고 고가이나, 현지에서는 먹지 않아 원료의 구입이 용이하고, 가격이 아주 저렴하며 가공공장도 가동하지 않고 있는 곳이 많아 이를 보완한다면 충분히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관심을 가지고 몇 군데 공장도 견학을 하였다.
이 기간 중 **원양에서 출장 나온 대학 후배를 만났으며, 성과가 없는 출장업무에 무척 초조해하고 있어 가끔 만나서 한 잔의 술로 달래다가, 아예 호텔의 한 방에서 함께하여 출장비도 아끼고 또한 틈틈이 바둑을 두기도 하였다.
아르헨티나 수역은 수산업법상 단순히 입어료만 지불하고서는 입어가 불가능함에도 대통령 측근과 잘 통하므로 이에 따르는 로비자금과 입어료만 지급하면 된다는 교포의 말을 믿고 수차에 걸쳐 거의 이백만 불($2,000,000)을 지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전혀 진전이 되지 않아 지불된 금액을 회수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불가하여 법정에 사기로 고발하였다고 하며 상대방도 이에 맞서 맞고소를 하였다고 한다.
이는 현지법인에 잘못 투자할 경우 투자금액은 물론이고 현지인보다 주식의 지분이 적음으로 인하여 선박까지 빼앗길 수 있으므로, 보다 안전한 투자방안을 모색하면서 발생된 것으로 사전에 현지의 관계법을 확인하지 않고 추진한 결과라고 보아진다.
동 수역에서 워낙 오징어가 많이 잡히므로 원양어업체들이 입어를 위하여 안달하는 것을 알고 있는 교포들이 더러는 회사를 방문하여 당시의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과 명함을 보여주며 대통령 측근들과 매우 친밀하니 오징어 조업을 위한 어업권을 취득하게 하여 주겠다고 하였으나 도저히 신빙성이 없어 거절한 적이 있었는데 사장의 욕심이 너무 지나치지 않았나보다.
귀국 후 오징어 선박2척을 투입하기로 하여 수리(개조 수리비 약 $120만/척)를 시작하였다. 합작법인 관계는 해외투자 정책이 바뀌어 외국인의 경우도 100퍼센트 자기 지분을 소유할 수 있음을 확인하고, 자본금은 $100,000로 하고 현지 사장에게 10퍼센트의 공로주를 주었다.
이 후 본선들이 아르헨티나에 도착하여 본격적으로 조업이 시작되자, 본사로서는 현지법인에 투자된 금액을 일차로 회수하기 위하여 어획되어 국내에 반입되는 오징어의 가격을 법인의 자금 상태를 보아가며 최소 가격으로 조정을 하는데 반하여, 현지법인에서는 어떻게 하여서든지 판매가격을 높게 받아 자금의 운영을 어렵지 않고 하고 또한 발생되는 이익금으로 현지에 재투자 하는 것을 원하고 있어, 현지법인의 사장과 가끔 마찰이 있었으며 심지어 본사를 방문하였는데도 만나기를 회피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특히 급격한 인플레이션에 따른 환율의 변동이 심하고 외환관리가 까다롭고 외환의 입, 출금이 자유롭지 못하여,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웃한 우루과이에 별도의 은행을 개설하여 운영(Black Money)하는 등 우리의 일반적인 무역관행으로는 조금 납득이 어려운 부분도 있었으나, 우선은 어획량이 많고 향후 수반될 수 있는 사업의 기대로 모든 것을 덮어나갈 수 있었다.
사직과 두 번째 도전
사장의 호출이 있어 들어가니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를 하며 우리 선박의 선용품 구매를 이 사람을 통하여 하였으면 한다고 한다. 그러나 소개를 받은 사장이 선박에 대하여는 전혀 문외한이라 하므로 아무리 사장의 부탁이지만 만약에 잘못될 경우에는 이에 수반되는 문제점이 많은 점을 들어 다른 것으로 도왔으면 한다고 의견을 제시하고 나왔으나, 마음 한 구석에는 석연하지 않는 생각이 있어 총무부에 확인하니 사장의 매제라고 한다. 한 때는 미국에서 사업을 잘 하였는데 실패하고 이제 새로운 사업을 물색하고 있다고 한다.
선박이 괌에 입항하여 출장을 하였는데, 이때도 사장과 동행을 하여 부탁을 하여 역시 사안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이해를 구하였으나 흐름은 어쩔 수 없어 선박을 기존 거래처와 나누어 무리가 없는 범위에서부터 구매를 시작하였다. ****호가 계약을 마칠 무렵에 주기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보고가 있어 괌에 입항하였을 때 메이커에 점검을 의뢰하였더니, 금 항차에 교체를 하여야 한다고 한다.
주문을 하더라도 납기가 30일 이상 소요되며 만약 주문이 늦어지면 항송하여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조기에 주문을 하여 선박으로 운송하는 것이 경비를 절감하는 방법이다.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기존의 거래처에 주문하는 것이 좋겠다는 담당자의 보고를 받고, 그대로 시행하라고 지시한 후 사후 결재를 받기 위하여 사장에게 보고를 하였더니 “너희들끼리 다 짜고 하느냐? 그렇게 부탁을 하였는데도 부스러기 같은 것이나 윤 사장에게 주문을 하느냐” 면서 당장 담당자의 사직서를 받아오라고 한다. 기존 거래처 사장이 나의 고등학교 후배로서 이것 때문에 더욱 오해가 유발되어졌다고 보아지나 실질적으로는 처음 참치건착선을 시작하기 위하여 미국에서 선박을 구매할 때부터 지금까지 이에 따르는 수리 기타 제반 업무를 가장 가까이서 함께 하여 누구보다도 성실한 사람임을 사장도 잘 알고 있으나 이번에는 많이 섭섭하였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요즈음 선박의 척수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증가한데다, 중역회의나 사장단 회의에 참석 할 때면 입에 담지 못할 소리를 함부로 하는 것도 듣기가 민망하여 앞길에 대하여 고민 중에 있었는데, 사장의 친구이며 창립 멤버인 경리부장도 도저히 견디기 어려워 그만 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며 기획실장도 동조를 한다.
며칠을 번민하다가 시말서를 작성하여 사장에게 제출하니 왜 나의 책임이냐며 다시 담당자의 사직서를 받아오라고 성화다. 설사 이렇게 하여 무마가 되더라도 향후 사장과 출신지역이 다른데서 오는 진급의 한계성과 업계의 제반에 대하여 아내에게 상세하게 이야기를 하고 내가 조용히 물러나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결정한 후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입사 후 한번도 지각하지 않고 누구보다도 일찍 회사에 출근하여 선박으로부터 입전된 수십 통의 전문을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의 업무를 시작하여, 연휴 때면 혹시 발생될 수 있는 선박의 사고를 대비하기 위하여 고향과 선산을 한 번도 찾지 않을 만큼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였다고 하나 그래도 물러날 때가 된 것에 대한 온갖 회한이 따른다. 장래에 대하여 아무런 결정을 한 것도 없어 무거운 마음이나, 그래도 마음 한편으로는 홀가분한 생각이 따름은 아직까지는 새로운 변화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음이라고 본다.
사직할 무렵에 양상급유를 하는 회사에서 참치독항선을 2척 구매하였는데, 사업상 장기간 동안 원양 업체와 긴밀한 접촉을 하고 있어 선박의 운영에 대하여는 대략적으로 알 수 있으나 실질적인 업무는 모르므로, 아무래도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며 나에게 대표를 맡았으면 한다는 제의가 있어 승낙을 한 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어느 정도 투자를 하였으면 한다는 의견의 제시가 있어 이를 거절을 하였다. 동업자 중 한 사람은 고등학교 후배로 아무래도 나에 대한 부담도 조금은 있었으리라 생각하지만 무엇보다도 세 사람이 함께 동업을 하면서 겪게 될 제반을 감안하여 아예 잊어버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하고 매일 산행과 시간이 나는 데로 골프를 하고 또한 그간 바빠서 만나지 못한 친구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였다.
3개월이 지날 무렵에 연근해 어업을 하면서 3척의 참치독항선을 하고 있는 회사로부터 면담 요청이 있어, **** 호텔에서 사장을 만나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이사로 근무하기로 하고 다음 날 출근을 하였다.
본사에는 회장과 사장 그리고 아들이 집무를 하고 있었으며, 회장은 처음 일본에서 선박을 구매하여 부산으로 회항할 때에, 동사 소속 선박의 선용품을 구매하였는데 이것을 관세를 절약하기 위하여 세관에 신고를 하지 않았던 것이 발각이 되어, 이 과정에서 심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또한 몇 개월 동안 구속이 된 관계로 건강이 좋지 않아 치료하는 중이었고 이에 따라 부인인 시장이 부득이 회사에 출근을 하면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대략적으로 업무를 파악 후, 대외적으로 실추되어 있는 이미지를 개선하고자 아들과 동행하여 일본의 수입 상사인 **물산을 방문하니 예상대로 찬바람이 분다. 업무추진에 일관성이 없어 믿지를 못하겠으며 무엇보다도 국제적인 감각이 전혀 없어 도저히 힘이 들어 못하겠으니 그간 빌려준 대여금이 회수되면 계약을 종료하고 싶다고 하며 또한 어획물의 구매업자인 ***산업에 들렸더니 역시나 같은 답변이라 같이 동행한 사장의 아들도 매우 곤혹스러워 하였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내가 근무를 하게 되었으며, 지금까지 나타난 문제점을 참조하여 정상적으로 운영을 하겠으니 협조를 하여 달라고 부탁을 하고 귀국하였으며, 여러 가지 답답한 마음을 정리하고자 5일간 금식을 하면서 회사근무를 하니 모두가 놀란 표정들이다.
그간 부산에서 제반 업무를 하였던 관계로 선박의 수리나 선원의 구성 등 실무에 관한 업무에 대하여는 정상적으로 처리가 되었으나, 해외에 관계된 업무와 특히 외환 업무에 대하여는 담당자들이 전혀 알지 못하여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 국적선인 DJ301호에 대하여는 정리를 하였으나, 제3국적선 2척에 대하여는 아예 서류가 보이지 않으니 정리할 방법이 없어 물어보았으나 대답이 신통하지 않다. 이를 처리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외환관리법으로 문제가 발생되리라 생각하는데 협조를 할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알면서도 이를 간과하고 적당하게 넘길 사안은 아니므로 해결할 방법을 찾았으나 묘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어느 날 퇴근 시 아들을 불러 저녁식사를 하면서 “아무래도 이번에는 사장님인 어머니가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고생을 하여야 할 것 같다. 외화를 사용하면 당연히 주거래 은행에 신고하여야 하는데, 지금과 같이 모든 것을 감추고 회장님 혼자서 고민하고 있다고 하여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므로 가능하면 빠른 방법으로 본 건이 원만하게 처리를 한 후 정상적으로 관리를 하였으면 한다.” 하고 이야기를 하였다.
어떻게 이야기를 하였는지 모르겠으나 며칠 후 회장이 부산에 출장을 다녀오면서 양 손에 큰 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와서 나에게 건넨다. 보따리를 열어보니 몇 년 동안 해외에서 발생된 경비 내역 및 증빙서류와 미불금 명세서 등으로 가득하다.
이것을 확인하고 정리를 하는데 무려 2개월 반여가 소요되었으며, 은행에 신고까지 마친 후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니 무척 안도하면서, 저녁에 한잔을 하면서 이렇게까지 된 사유를 이야기한다. 원양어업이 호황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시작하였는데 워낙 생소하고 근본적으로 연안어업과 운영방법이 달라서, 원양 선사에 근무하는 유능하다는 사람을 스카우트하여 모든 업무를 맡겼다고 한다.
그러나 업무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대표인 사장이 관세법 위반으로 몰렸었고 이 때 그렇게 믿고 맡겼던 직원들 중 누구 한 사람도 자기가 업무처리를 잘못하였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 결국은 대표이사인 자기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구속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후로는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 미국에 유학 중이던 아들을 휴학하게 하고 함께 업무를 처리를 하였는데 어려움이 많았다면서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며 만취할 때까지 기분 좋게 함께 마셨다. 이튿날부터 싱가폴에서 발생된 미수금의 내용을 상세하게 검토하여 과다하게 청구된 금액을 조정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해외에서 발생된 경비를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근무 전에 예상은 하였으나, 원양어선을 연근해 어선과 같은 감각으로 운용을 하는 관계로 이를 상세하게 이해시키는데 어려움은 있었으나, 무엇보다도 나도 모르게 대기업에서 몸에 베어있는 업무처리 방법(전결규정에 의하여 일정한 범위 안에서는 자기의 책임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것)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문제는 사장에게 보고하지 않고 처리하곤 하였는데, 이것이 사장이나 회장을 무시하고 내가 멋대로 처리하는 것으로 오해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세 번째 도전과 라스팔마스와 가나....
그간 회사가 어려워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큰아들이 휴학을 하고 부모를 돕고 있었으나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다시 학업을 계속하는 것을 검토하기 시작할 무렵, **음료의 기획실에 근무한 적이 있던 처남으로부터 **음료의 대리점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의가 있어 현장을 답사한 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그간 9개월여 동안 몸담았던 DJ실업에 사표를 제출하고 전혀 생소한 유통업계에 뛰어들었다.
총무와 경리 그리고 판매원 9명으로 구성되어, 월평균 매출이 7,000만원 정도로 어느 정도 열심을 한다면 급여생활을 하는 것보다 좋겠다고 판단되었으나 예상하지 못한 일이 많아 운영이 쉽지가 않다. 상당히 큰 유통업체에서 특별판매를 한다고 요청이 있어 평소보다 2배 이상을 납품을 하였는데 하루아침에 문을 닫는가 하면, 마감일까지 판매원으로부터 입금이 되지 않더라도 본사의 마감일은 지키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여야 하며, 판매실적이 좋지 않거나 계속하여 마감을 지키지 못하는 판매원의 경우에는 특별관리를 하여야 하며 최악의 경우에는 퇴직을 하게하고, 신원을 보증한 보증인에게 미납금을 대납하게 하는 등으로 본사와 계약한 수수료에서 부담하여야 부분이 예상 외로 많았다.
구정을 앞두고 판매를 독촉하고 있던 어느 날, 한 판매원으로부터 우리의 구역에 인접한 이웃한 마트에서 구매 요청이 있는데(오렌지주스 약150상자로 봉고 1트럭분) 그 쪽을 담당하는 판매원이 퇴근을 한 후에 납품을 하면 문제가 없겠다고 하여 몇 번 망설이다가 판매실적에 �기고 있기도 하여 밤늦게 납품을 하였다.
그러나 공교롭게 그 지역 담당자가 퇴근 후 밤늦게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가 하역하는 것을 목격하고 다음 날 그 지역 대리점 사장에게 보고를 하여, 나에게 강력한 항의가 있어 백배사과를 하고 “기 납품된 것은 그 판매원의 실적으로 올리도록 하면 어떻겠느냐”고 의견을 제시하였으나 “무조건 전량을 회수하지 않으면 문제를 삼겠다”고 하여 마트에 상세한 설명을 하고 납품된 것을 전량 회수하였다.
판매 실적에 걱정이 되었는지, 어느 날 총무가 오렌지주스 300상자를 안양에 있는 친지에게 부가세를 차감한 가격으로 판매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문의가 있었다. 이럴 경우 본사에서 받는 수수료를 계산하면 적게나마 적자가 발생되고 무엇보다도 가격의 파괴에 따른 문제점이 있어 결정이 쉽지는 않으나, 한편으로는 타 대리점과 대비하여 실적이 좋지 않을 경우 본사의 담당자로부터의 질책과 매월 본사에서 열리는 대리점 판매실적회의의 공개석상에서 거론되는 것이 싫어 총무가 퇴근 시 직접 납품토록 하였으며, 인도 시 반드시 현금으로 결재토록 하였다.
총무가 다른 곳에서 일을 하겠다고 하며 사의를 표하여 후임 총무를 인선하지 않고 힘이 들지만 내가 직접 배송 및 빈병을 수거하여 경영을 개선키로 하였다. 어느 날 슈퍼마켓의 지하창고에 입고를 시키고자 페트병 2상자를 등에 메고 계단을 내리다가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마에 상처가 나고 온 얼굴이 피투성이다. 다행히 다른 곳은 다친 곳이 없는 것 같고 화장실에서 얼굴을 닦고 거울을 들여다보니 상처 난 부위에서 계속 피가 흐르며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내 사업이랍시고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수익은 따르지 않고, 명절 때마다 많은 판매를 하기 위하여 지급되는 판촉물은 명목만 좋을 뿐 결과적으로는 일정 부분은 대리점에서 경비를 부담하여야 하여야 한다.
판매실적은 년 중 최고를 나타내나 허울 만 좋을 뿐 이것저것 다 제외하고 나면 특별한 몇 군데의 대리점을 제외하면 평소와 수익은 크게 다름이 없고, 몸은 지쳐 한없이 무거운 반면 본사만 실적이 올라가는 어처구니없는 영업 구조로 되어 있으며, 지금까지 영업 실적을 보면 적자는 계속 누적되어 가고 있으나 이를 해결할 묘수도 보이지 않아 언제까지 이렇게 지속을 하여야 할지 무척이나 고민스럽기 그지없다.
가끔 사무실에 위로 겸 인사차 방문하는 원양 업체의 사람들이 뜸하여 질 무렵, 또 다시 나에게 라스팔마스에서 근무를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왔다. 평소부터 잘 알고 있고 수차에 걸쳐 같이 근무하였으면 좋겠다고 하였던 ****회사의 부사장으로부터 이제는 회사가 많이 성장하였고 이를 전문적으로 관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내가 가장 적임자이니 같이 근무를 하자면서 앞으로의 경영방침과 근무조건을 제시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음료 대리점을 경영하면서 많은 번민을 하고 있을 때이므로 이를 수락하고, 담당자에게 교체하여 줄 것을 수차에 요청하였으나 추석 대목에 잘못되면 판매에 지장이 있다며 불가하다고 한다.
이런 상태로 본사의 처분에 맡길 경우 아무래도 추석 이후에야 후임자가 인선되리라 판단되어, 어느 날 사무실은 열었으나 출고를 중지하고 후임자가 올 때까지 판매를 하지 않겠다고 담당자에게 통보한 후 이틀이 지나니, 판매원들도 동요가 있기 시작하였고 이에 위기를 느낀 담당자가 상부에 보고를 하였는지 담당부장이 사무실에 들려 나의 의지가 확고함을 확인 후 얼마 되지 않아 후임자를 보내어 인수, 인계가 이루어졌다.
라스팔마스의 춘몽
1995년 11월 1일, 모든 것을 정리하고 라스팔마스 행 비행기에 몸을 실고 떠나가는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으며, 앞으로 내 앞에 펼쳐질 미지의 세상에 대한 생각으로 긴장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공항에 도착하니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오는 특유의 건조하고 더운 기운이 온 몸을 감싼다. 이제 다시 시작하며 적응하여야 곳으로 심호흡을 하고 트랩을 내린 후 제반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서니 부사장이 반갑게 맞이한다.
부사장은 내가 선장으로 승선을 할 때 라스팔마스에서 처음으로 만났으며, 이 때 그는 선박에 부식을 납품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사관들의 회식 때는 서비스차원에서 차량의 편의제공은 물론 식대까지 지불을 하여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나는 차량을 제공하고 안내해 주는 것으로 만족하며 식대는 내가 지불을 하였는데 이것이 고마웠던지 출항 전에 집으로 초대하여 융숭하게 식사대접을 하기도 하여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냈었다.
그의 친형인 사장은 전문대학에서 학생회장을 하였던 재원으로 참치선에서 항해사를 마쳤으나 선장으로 발령을 받지 못하자 수산물 유통업에 뛰어들었으며, 어느 정도 기반이 이루어지면서 동생과 함께 원양어업을 시작하였는데 이제는 20척의 선박을 거느리는 기업체로 성장을 하였다.
몇 년 전부터 부산의 지사장을 통하거나, 일본에서 부사장을 만날 때마다 함께 근무하였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있었으나, 동일 업종에서 월급을 받을 바에는 가지 않겠다는 고집을 접고, 이렇게 결정하기까지에는 주위에서는 반대도 있었으나 그래도 두 여식들의 장래를 보아서도 유학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과 함께, 부족하지만 그간 나의 능력을 믿고 기다려준 성의가 고마워 나선 길이었다.
우선 임시로 호텔에 여장을 풀고 곧장 회사에 인사 차 들리니 사장이 조선소에 갔다고 하여 현장에 들려, 한창 수리를 하고 있는 참치 선망선에서 작업복을 입고서 감독을 하고 있는 사장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가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도대체 “내가 어떤 사람인데 여러 번 초대하여도 응하지 않는지를 알고 싶으니 만나자”는 전화가 있어 ** 호텔에서 처음 인사를 하였는데, 이때의 특유한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변화가 없다.
이야기하는 도중 일을 하려면 자동차가 당장 필요하다면서 어딘가에 연락을 취하니 얼마가 지나지 않아서 중고차이지만 BMW730이 부두에 도착을 하였고 마음에 들 줄 모르겠다며 나에게 자동차 키를 넘겨준다.
회사에 출근을 하여 우선 회사의 경영 상태를 알기 위하여 자금의 흐름을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컴퓨터에 입력된 매출과 경비내역 그리고 일반관리비를 분석하니 전년도에 약250만 불의 적자가 발생되었으며 이를 세부적으로 분석한 결과 예상외로 미불금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동 결과를 중역회의 석상에서 보고를 하니 조금 놀란 눈치들이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한다. 아마도 미불금에 대한 인식이 나하고 달랐던 것으로 보아지며, 수리를 많이 하였으므로 선박의 가치가 그것을 상쇄시키고도 남는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 회의를 마무리하였다.
토요일에는 사장이 초청하여 골프를 하였는데, 거의가 한국인들로 여자분 들이 많아 낯이 설었으나, 처음인 곳에서 그래도 스코어도 나쁘지 않았고 또한 특유의 장타를 날렸는가보다. 이튿날 공항에서 사람을 만나니 벌써 어제 내가 골프를 친 것에 대하여 소문이 났는지 무척 장타라면서 이야기를 꺼낸다.
좁은 교민사회라 처음 부임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겠으나 너무 쉽게 나의 일상에 대하여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되어, 다음 주 토요일에 골프회동을 한 후로는 교회를 가야한다고 하며 아예 골프를 하지 않고, 이것을 대신하여 시내에 있는 테니스클럽에 가입하여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거의 매일 테니스를 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경영방법에 당혹스럽다. 어선의 경우 무엇보다도 조업을 최우선으로 하여 제반 운항계획을 수립하고, 이에 부합되게 어획물을 운반선에 전재하거나, 양육과 보급을 이행함으로서 어획량이 제고될 수 있도록 하고 이에 따르는 자금계획을 세우고 집행하는데 반하여, 이곳에서는 먼저 자금계획을 수립한 후 이에 수반되는 부족한 금액은 어획물의 판매로 맞추다보니, 조업이 자금계획과 맞물려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계약이 종료되면 2개월 내에 정산을 하고 해당금액을 1개월 내에 지급하여야 하는데, 계산만 되어있지 1년 이상 지급이 유예되고 있는가하면 어떤 선장의 경우 분할로 지급이 되고 있다보니, 다른 회사의 계약보다 좋은데도 유능한 선장은 재 승선을 포기하고 다른 회사의 선박에 승선하므로, 결과적으로는 전체적으로 어획실적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도 이를 개선하지 않고 있다.
또한 판매의 경우도 어획되지 않는 고기를 운반선에 전재가 된 것처럼 서류를 작성하여 구매업자에게 송금을 하게 하는가 하면, 필요한 수산물을 구매하기 위하여 계약서를 작성 한 후 해당 금액을 은행에서 송금된 것처럼 허위로 서류(Bank Swift)를 작성하여 팩스로 보내어, 이를 믿고 수산물을 보내게 하는 등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편법적인 경영 방식과 자수성가한 기업인에게 볼 수 있는 독선적인 운영방식에 적응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회사의 사무실에 SSB(Single Side Band : 단측파대 송수신기)를 설치하여 조업선들과 24시간 교신을 하여 조업상황을 확인하는데, 어느 날 모로코 경비정에 의하여 *****호가 카사블랑카로 나포되고 있다고 한다. 트롤선의 경우 모로코 및 모리타니나의 국경부근에서 경비정의 동태를 주시하며 조업을 하는데, 경비정들도 워낙 경험이 많아 가끔은 전혀 예측이 불가하게 접근하여 총을 쏘며 나포를 하는 관계로 가끔은 이러한 불상사가 발생되게 된다.
즉시 현지에 직원을 파견하였으며 다행히 해군사령관과 사장이 친분관계가 있어 며칠 후 $300,000의 벌금을 지불하고 해결이 되었으나, 어획물 및 그물 등은 압수를 당하였다. 모로코의 경우 문어의 산란기를 전후하여 약 3개월간 금어기를 설정하여 자원을 감독하는 관계로 어획량이 많아, 이 시기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월경조업을 하는 경우가 많아 가끔 나포되기도 한다.
부사장을 일본에서 만났을 당시, 시미즈에 소재하고 한국의 원양 어선에 기관부품과 선용품을 납품하는 회사를 소개하여 주었는데, 기존의 납품업체보다 가격이 저렴하여 이 회사와 거래를 하였다. 처음에는 현금 결제를 조건으로 납품을 시작하였으며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 후에는 신용장(Letter Of Credit)을 개설하였고, 차츰 신용이 쌓이고 거래금액이 증가하면서 선적 후 90일 지불조건으로 변경하여 납품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불이 제 때에 이루어지지 않아 미불금이 증가되기 시작하자 현지 실정을 파악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장이 서울의 대리점 사장을 대동하고 현지를 방문하였으며, 개인적으로도 15년 이상을 친하게 지내는 사이라 그간 손을 놓은 골프를 함께하였다.
미불금이 70만 불을 넘어섰으며, 이중 약20만 불 가량은 동업을 하고 있는 현지인에게 운반선 및 투나선 3척을 인계시킬 때 부채도 함께 넘겼으니 그 회사에서 받으라고 하고, 거기서는 인수 전에 발생된 것이므로 모르겠다고 하며 서로 책임을 전가하여 곤혹스러워하기도 하였으나, 최종적으로 발생한 미불금 전액에 대하여 매월 일정액씩 지불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귀국하기 전날에는 저녁 식사에 초대하여 회사의 실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이 후 거래는 선 송금하는 조건으로 변경토록 제안을 하였으며, 가장 확실하게 미수금을 받는 방법으로 현재 거의 수리가 끝나서 출항을 준비하고 있는 선박에 채권을 강제집행 하라고 하였으나 다른 거래처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못하겠다고 한다.
이 기간 중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중국 교포선원들의 급여가 1년 이상 지급되지 않고 있어 생활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연이 선원들에게 전하여 지는 것으로 어떤 가족은 출국 시 차입한 금액 및 이자를 갚지 못하여 아내가 집을 나갔다는 것과 심지어 자살까지 하였다는 애가 끊는 내용이었다.
미수금과 이러한 제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중국의 북경에 본사를 둔 회사에서 재중 동포로서 북경대학을 졸업한 직원을 현지에 파견하였으나, 사무실에 들려도 사장이 만나주지 않을 경우도 있고, 만나도 돈이 없어 지불을 못한다는 데야 도리가 없어 발만 동동 굴릴 따름이다.
무엇보다도 최우선하여 지급되어야 선원 가족들이 생활을 하고 빌린 돈도 갚아야 하는 그야말로 생계를 위한 급여임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으면 못준다는 그릇된 사고방식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러나 법률적으로 본사는 아일랜드에 있고 라스팔마스는 지사의 역할만을 담당하게 하는 다국적 기업으로 설립되어 이곳의 법으로서도 어떠한 조치를 취할 수 없는 회사이므로 그저 선처를 바랄 수밖에 다른 대안이 없다.
불신이 깊어지면서 몇 년 후에는 이를 견디다 못한 중국의 교포 선원들이 밀린 생계비를 지급하라는 피켓을 들고 시청 앞에서 시위를 하여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였는가 하면, 최종적으로는 부도로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이 매우 무거웠다.
누가 나를 찾는다고 하여 만나보니 매우 반가운 얼굴이다. 내가 OY201호 선장일 때 2등 항해사로 승선하였으며, 이제는 DW산업의 선장으로 지중해에서 어획한 참다랑어(Blue Fin Tuna, 혼마구로)를 운반선에 전재하기 위하여 입항하였는데 이곳에 근무한다는 소식을 듣고 인사차 들렸다면서 참치의 맛있는 부위만 선별하여 처리한 것을 가득 담은 상자를 선물로 가져왔다.
저녁 식사에 초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데 내가 가장 고약한 선장이었다고 하며 웃는다. 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나 책과는 담을 쌓고 그저 뱃놈의 호연지기를 기른다며 술을 마셔대던 일상이 나를 만나서 일주일에 한번씩 독후감을 제출하라고 하니(나중에는 한달에 한번으로 변경함) 읽지 않을 수도 없고, 막상 적어보려니 부족한 실력에 너무 힘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하고 승선한 2년 동안 일생 중 가장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하며 너무 고마웠다고 하니 다행스러웠다.
부산 출항 전에 중고책방에 들려 거의 손수레 한대 분의 책을 구매하였으며, 항해사들의 경우 업무량이 많아 시간이 나면 거의 취침하거나 무협지를 읽는 것이 고작이라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시간이 나더라도 갑판에 나가서 선원들과 함께하지 못하게 하고 대신 책을 읽되 반드시 독후감을 제출하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읽어보아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없을 정도로 한심스러웠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나름대로 정리된 문장을 접하게 되어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하였는데 역시 기억에 남았는가 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장이 유능하여 다른 선박보다 어획이 좋고, 선내 분위기도 최고라는 기지장의 이야기를 들으니 잘하고 있는 것에 고마웠고, 흐뭇하였다.
50대 이상의 회원이 매일 아침에 1시간여씩 테니스를 한 후 회사에 출근을 하였으며, 토요일 오후에는 2~3시간 정도 테니스를 친 후, 도미노를 하면서 서로가 친목을 도모하였다. 또한 분기에 1회씩은 교민들의 테니스대회를 개최되었으며 시합이 끝난 후로는 회원들의 전 가족이 함께하는 불고기 파티를 열어 정담을 나누며 향수를 달래었다.
봄과 가을에는 테니스클럽에 가입한 회원 간에 한, 서 친목 테니스대회를 개최하였으며, 봄에는 스페인 동호인들이 가을에는 한인 동호인들이 음식을 장만하여 초대하는 형식으로 운영을 하였다. 스페인 동호회 회원들은 음식을 들면서 기타를 켜고 노래하면서 춤을 추는 등 매우 재미있게 즐기는 반면, 우리들은 노래나 춤에 대하여는 무뢰한들이라 모두 어깨동무를 하며, 흘러간 옛 노래를 합창하면서 보조를 맞추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1학년과 중학교 1학년 과정을 마치고 스페인의 영국인 학교에 입학을 할 때, 큰 애는 그래도 어려서부터 독서를 많이 하였고 또한 언어계통에 남다른 재질이 있는 것 같아 작은 애보다는 걱정을 조금 밖에 하지 않았는데, 나의 생각과는 반대로 학교 측에서는 큰 애를 걱정하였으며, 그래도 국내에서의 성적(성적증명서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공증을 득하여 제출하였음)이 특출하여 이에 대한 기대감으로 입학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영어가 제대로 되지 않아 1개월 동안은 자매를 교실에 들여보내지 않고 학교 수업이 마칠 때까지 선생님 한 분에게 전담하게 하여 개인 영어교습을 시키며, 가끔씩은 학과수업을 참석하게 하여 적응을 시킨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9월)되기 전에 큰애로부터 좋은 대학에 입학을 하려면 고등학교 성적이 좋아야 하는데 이번 학년의 성적이 좋지 않으므로 아무래도 유급을 하여 다시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귓전에 흘린 체 영어가 익숙하여 지면 저절로 모든 것이 해결 될 텐데 유급을 하면서까지 할 필요가 있겠느냐며 진급을 시켰다.
회사에서 근무에 한참인데 아내로부터 연락이 있었고 큰애 문제로 상의를 하였으면 한다는 목소리가 심상하지 않게 느껴진다. 퇴근 후 가족들이 모여 회의를 하였는데 아무래도 유급을 하였으면 한다는 건으로 교장선생님도 권유를 하였다고 한다.
한참 심사숙고 후 인생은 생각보다는 긴 여정이므로 1년 늦은 것에 대하여 본인이 감수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유급을 하는 것에 대하여 허락한다고 하여, 다시 9학년이 되었다.
중간시험이 끝난 어느 날 학교로부터 학부모의 출석을 바란다는 연락을 받고 내심 긴장을 하고 학교를 방문을 하니 담임선생이 각과 담당 선생을 만나고 오란다.
학과점수, 학습태도, 수학능력 등 기타 학교에서 학생의 학습능력에 대한 제반에 대하여 평가를 한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을 하고 또한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유익한 시간으로 마지막에는 교장 선생을 만나 최종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아무래도 전 학과를 A학점을 따기 위하여 유급을 한 것 같다며 기분 좋게 웃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영어 선생을 제외하고는 “희망이 없는 학생(Hopeless Girl)”이라고 하며 걱정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미국식 영어를 공부하였으며 수업에 들어가서는 수업 내용을 듣고 이해를 할 수 없으니, 그저 영어를 공부할 수밖에 없어 다른 과목 수업에도 영어만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이야기 한 것으로, 유급을 한 어느 날부터 듣고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자 이 후로는 저절로 학습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후로는 학년 대표로 인선되어 학교의 운영에까지 참여를 하였고, 졸업 시에는 졸업생 대표로 인사를 하는 등 그런대로 적응을 하여서 마음을 놓게 되었다.
하루는 퇴근을 하니 큰 애가 책상에 앉아 울고 있다. 숙제가 “기업의 실태 및 미래”에 대한 것으로 회사를 방문하여 조사를 하여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것으로 이제 영어는 그런대로 적응이 되는가 싶은데, 스페인어는 아직까지 공부할 시간이 없어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스페인 회사를 방문하여 조사를 하여야 좋을지 몰라 고민을 하였으나,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데다 마감시간은 며칠 남지 않아 답답한 나머지 흐느끼고 있다고 한다.
마침 내가 근무하고 있는 회사에서 2년 전 한국에 있는 컨설턴트 회사에 의뢰하여 회사의 경영상태를 분석하고 문제점을 발췌하여 이를 해결하는 방안 등에 대하여 제출된 자료가 생각나, 큰 애를 데리고 회사로 가서 보여주며 설명을 하여주니 희색이 돌아온다. 자료를 참조하고 부두와 선박의 사진을 찍는 등으로 며칠간을 부산하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논문이 잘 되었다며 칭찬을 들었다고 하니 다행스러웠지만 마음 한 구석에 남는 아픔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작은 애도 이러한 일이 종종 일어나곤 하였으나 큰 애보다는 나름대로 요령껏 잘 적응을 하는 것 같았으며 가끔은 국내에 있는 기업체로 연락을 하여 필요한 자료를 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내와 가장 다른 것은 개인적인 과제도 있지만 학우끼리 공동으로 제출하는 과제가 많은 것과 오후 3시면 학교수업이 종료되고 이 후로는 자율적으로 맡겨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방과 후에는 자기가 희망하는 것에 따라 책을 읽거나 취미 생활과 운동을 하고 친구를 사귀는 등 가정과 함께 자연스럽게 공유되는 교육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테니스 클럽에서는 매 분기별로 유소년(18세 미만)의 시합이 개최되고 이 결과에 따라 순위가 발표되는데, 결승전을 제외하고는 심판이 없다. 서로 판정에 대하여 의견이 충돌될 때는 서로 협의에 의하되 결론이 나지 않으면 그 점수는 무효로 하고 다시 시작한다. 아마도 이러한 것이 우리와는 다른 학교 제도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이나, 어린 나이지만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시합을 이끌어가는 것을 보면 대견스러워 보인다.
계획대로 조업이 되지 않아 이에 따르는 자금부담이 커지고 있어,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을 하고자 가장 주력 업종인 참치선망어선 및 가다랑어(가쓰오) 채낚이 어선들의 조업을 독려하고자 가나국의 테마에 출장을 하였다.
우연의 일치이겠으나 내가 선박에 승선하고 있는 1개월여 동안 어획실적이 좋았으며, 선단 간 협조도 잘 이루어져 제반 선박 운영이 잘 되가는 것을 보자 본사에서는 계속 승선하기를 희망하여 매일 SSB로 나를 호출하여 설득을 하였으나, 나는 이미 회사를 그만두기로 작정을 하고 있을 때라 통신이 되지 않는다는 핑계로 테마에 입항하는 선박에 승선하고 귀항을 하였다.
거의 모든 일이 테마 기지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본사에서 출장을 하지 않는데 입항을 하니 선박담당 차장이 부두에서 반갑게 맞는다. 기지장 집에서 저녁을 한 후에는 그간 바다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면서 한잔을 사겠단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으리라 생각은 하면서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전혀 예상 밖의 제안을 하였다. 회사의 자금 사정이 너무 좋지 않아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중에 그간 정기적으로 수리를 하지 않아 수리비만도 200만 불 이상 예상되는 ****호(참치건착선)를 침몰시켜 보험금으로 회사를 회생시키는 방안을 검토하여 사장에게 제의를 하였는데, 나의 의견을 들어본 후 결정하고자 한다고 한다.
이미 회사를 그만두기로 한 사람이 어느 선까지 업무를 하여야 하는지 고민스럽기 그지없다. 한참 후에 그렇게 하여서라도 회사를 회생시킬 수 있다면 협력하겠다고 결정을 하고 보험관계며 기타 필요한 서류에 대하여 문제가 없는지 확인을 하였다.
선장은 내가, 기관장은 차장이 설득하기로 하고 수락이 되면 구체적인 방안을 수립하기로 하였다. 선장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제안에 처음에는 무척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으나, 신변 및 이에 따르는 보상 등을 검토한 후에 동조를 하게 되었으며 나는 선장에게 무엇보다도 선원들의 인명에는 절대 문제가 없도록 사전에 철저히 준비를 하게 하였으며, 만약에 있을 검사관들의 선박검사를 하지 못하도록 침몰시키는 지점의 수심을 200미터 이상이 되는 곳을 찾도록 해도를 보면서 검토를 하였다.
이에 따라 보다 신빙성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자 본선이 인접국인 코트디부아르국의 아비장에 입항하여 조선소에 상가하여 수리하는 것을 준비하였고, 테마를 출항 후 선박을 상가하는데 과부하가 걸리지 않도록 그물 외 제반 것을 우리 회사 소속선인 운반선을 만나 전재하는 것으로 하였으며, 이때 기관장은 본선을 침몰시킨다는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출항을 하였으며, 나는 인근에 조업 중인 다른 선박에 옮겨 타고 추이를 지켜보기로 하였다.
다음 날 오전 10:00 경 두 선박이 만나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침실에 들어가 담배를 물고 초조함을 달래고 있는데, 선장으로부터 ****호에서 기관실에 물이 들어온다고 보고를 하더니만,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급하게 선장이 와서 배가 침몰한다고 한다.
브리지에 급히 올라가 보니 SSB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긴급하게 돌아간다. 본선과 약 30마일로 2시간여를 항해하면 사고 지점에 도착하리라 예상되어 급히 현장으로 항해를 하도록 지시를 하고 SSB를 들으니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는 것 같아 안심이나 이 후 본 건을 어떻게 수습을 하여야 할지에 대하여 하나, 둘 정리하여 본다. 만약에 하나라도 착오가 일어난다면 이는 회사는 물론 관계인들은 추락의 나락에 떨어질 것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추슬러 본다.
사고 현장에 도착하여보니 이미 본선은 침몰되어 보이지 않고 선박에서 유출된 다른 부유물도 거의 없다. 운반선에 옮겨 탄 후, 본선의 선원들이 모두 무사하게 전선하였는지를 확인하고 상세 상황을 본사에 보고를 한 후 본선을 테마로 향하게 하였다.
귀항 중 선장 및 기관장에게는 육하원칙에 의거하여 상세하게 사고보고서를 작성하게 하였으며, 사고 당시 기관실에서 근무 중이던 현지인 기관사 및 전 선원들에게는 당시 상황에 대한 진술서를 작성토록 하였고, 특히 보았던 사실 그대로 진술하지 않을 경우에는 이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는 것과 분실된 개인 소지품에 대하여는 변상 조치하겠다고 하였다. 선장 및 기관장의 사고보고서는 선박에서 본사에 팩스(Fax)로 송부하여 검토한 후 다시 수신하여 수정하는 등 하자가 없도록 몇 번이고 수정한 후 영어로 번역하여 보험사에 제출하게 하였으며, 본선은 익일 오후에 가나에 입항하였다.
입항한지 이틀 후 스페인으로부터 본 사고의 조사하기 위하여 검사관에 파견되었으며, 다음 날부터 선장, 기관장을 비롯한 전 선원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모든 내용은 영어로 작성되었으며 이를 통역 시 혹시나 잘못될 경우에는 보험처리가 불가하므로 조금이라도 이상한 답변이 나올 때면 2, 3차 확인을 하고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을 경우에는 답변 내용과 다르게 내가 임의로 답변을 하는 등 5일 동안 통역을 하고 나니 그야 말로 기진맥진이다. SJ산업에 근무할 때 보험의 처리를 하였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으나, 이것 때문에 통역 시 하나, 하나에 신경을 쓰면서 하루에 7~8시간씩 고문 아닌 고문을 당하고 있는 것을 옆방에서 지켜보던 기지장도 무척 긴장하였던지 함부로 말을 건네지 못한다.
1차 검사를 끝냈으나, 본선이 침몰했던 시간이 그렇게 짧은 것에 대하여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하며, 아무리 컴퓨터에 자료를 입력하여 시뮬레이션을 해보았으나 그렇게 큰 선박이 약1시간 만에 침몰을 할 수가 없다며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현지에서의 조사를 마쳤으므로 일단 스페인에 귀임하여 다시 상세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며, 이때 선장과 기관장은 2차 조사를 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협조를 부탁한다.
나중에 기관장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통상 기관실 하부에 위치하여 선박에 사용되는 해수를 빨아들이는 킹스턴 밸브를 깨뜨리면 수압에 의하여 유입된 해수가 기관실부터 침수시키기 시작하는데, 본선은 이에 더하여 어창에 해수를 유입시키는 관(직경 : 300미리)을 파괴시키므로 이 관을 통하여서도 해수가 다량 유입되어, 예상보다 빠르게 침몰한 것 같다고 한다.
보험사에서는 라스팔마스까지 선장과 기관장을 불러서 시작한 2차 조사에서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물증은 없으나 아무래도 고의적인 것 같다고 하며 보험금 지급을 유예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이를 조기에 수습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우리가 어획한 고기를 매입하는 *****회사의 모기업인 하인즈그룹이 보험사의 대주주임을 확인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에 간곡하게 협조를 요청하여 사고 발생 3개월여 만에 보험금($350만)을 수령하게 되었다.
라스팔마스에 귀임하기 위하여 네덜란드의 스킬폴 공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입국 수속을 하는 중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확인할 것이 있다며 별도로 사무실로 안내를 한 후 리턴 티켓(한국이나 기타 목적지까지의 비행기표)이 없어서 입국을 허가 할 수 없다고 한다.
한국인의 경우에는 3개월간 무비자로 EU에 입국이 허가되는데 이해가 되지 않으며, 나는 검사관으로 라스팔마스에서는 선박을 검사 후 한국에 귀국 예정이며 가족이 한국에 있으므로 절대 이곳에 머무르지 않겠다고 통사정을 했으나 아프리카에서 입국한 한국인은 특별하게 관리를 한다며 허가되지 않아, 라스팔마스에서 한국까지 비행기표를 발급하려고 카드를 내밀었으나 무어가 잘못되었는지 결재가 떨어지지 않는다.
부득이 본사에 전화를 하여 현지의 사정을 보고하여, 본사에서 이곳으로 비행기표를 보내주기로 하였으나(PTA : Prepaid Ticket Service, 항공권 타 지역 송부) 당일에는 불가하고 3일 후에야 가능하다고 한다. 동 내용을 출입국직원에게 설명을 하니 한참을 망설인 끝에 허락을 한다. EU의 경우 어느 회원국이라도 처음 도착지에서 입국이 허가되면 이 후로는 별도의 입국 수속이 없이 자유자재로 통행이 가능하므로 이 점을 우려한 것이 아니었나 싶었고, 나는 덕분에 모처럼 예정에 없는 휴가를 가질 수 있어 여유 있게 관광을 할 수 있었다.
사직서를 제출한 후, 수산담당 부장에게는 보험금이 수령되면 그 중 일부라도 참치선망선의 수리를 하게하여 호황기에 들어섰을 때 어획이 제대로 될 수 있도록 대비함이 좋겠다고 당부를 하고, 사장에게는 노동 및 거주허가의 발급에 협조를 부탁하였다. 다행히 노동 및 거주허가(영주권)는 퇴사 후 얼마 되지 않아 발급이 되어 불법거주자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영주권이 발급되어 수령하는 날 너무 기뻐 축하파티를 열었다. 학생들이 단체로 본토로 여행을 가더라도 함께하지 못한 것에서부터 그간 회사에 근무하면서 이웃한 공장에 경찰이 들어섰다고 하면 명색이 회사의 중역이라는 자가 재빠르게 도망을 하던 일이며, 운전 중 다른 차가 내 차를 부딪쳤는데도 잘못을 따지지 못하고 그저 웃을 밖에 없는 일 등등... 무엇보다도 신분이 보장되지 않는데서 오는 불안감에서 해방된다는 기쁨에 마음껏 먹고 마셨다.
그러나 유효기간(첫해는 1년)이 거의 만료되어 가는 시점이라 변호사를 통하여 기간 연장을 하려고 보니 국민연금과 의료보험 공단에 신고가 되어있지 않아 이 상태로는 불가하다고 한다.
이것은 회사에 근무하는 한국인들에게 거주 및 노동허가가 발급되면 이에 따라 보험료를 납부하여야 하는데 이 비용이 만만하지 않아, 매년 직원들에게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경영주는 이를 무시하고 지금까지 이것을 미끼로 보다 쉽게 직원들을 고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대학 후배의 회사에 고용이 된 것으로 하여 3개월분의 보험료를 납부하고 동분서주한 결과 기간 연장이 허가되었으며, 이에 따라 가족들도 영주권을 신청하여 발급이 되었으며 대학을 진학하는데 지장이 없게 되었다.
회사에서는 수령한 보험금으로 남빙양에서 잡고 있는 메로(비막치어)가 호황을 누린다는 소문을 듣고, 메로 사업에 뛰어들기로 확정하고, 메로의 어획 쿼터도 확보하지 않는 상태에서 선령이 30여년이 되고, 선박의 크기도 메로를 잡기에는 작은 250톤급 참치선을 120만 불 이상의 경비를 들여 개조하기 시작하였으나 정녕 황천(慌天)조업에 대비한 기관의 정비는 제대로 하지 않아, 출항 후에는 기관 고장으로 정상적인 조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데다 잡은 고기도 쿼터가 없어 제 값에 판매를 할 수가 없어(어획 쿼터가 없는 고기는 정상적으로 수출이 불가하므로 다른 선박에 할당된 쿼터를 사용할 수밖에 없음) 고심을 하는데다, 한 척은 조업 중 침몰을 하였다고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퇴사 후 참치선망어선들이 어획이 본격적인 좋아지는 봄에 들어서자 제법 어획실적이 좋아졌다는 소식이 들리는가 싶더니, 장기간 정기적인 수리를 하지 않은 관계로 어장에서 많은 고기를 확인하고도, 기계 고장으로 정상적인 조업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자사선 운반선에 약 1,000톤의 참치를 전재시켜 태국의 방콕으로 수출을 하였는데, 방콕에 입항하여 하역을 한 결과 선도가 나빠서 전량 원료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운반선도 냉동기를 제대로 수리가 되지 않는 체 장시간 운전(약 25일)을 함으로서 선도를 유지할 수가 없어, 하역을 한 결과 선도가 나빠 통조림 원료로서 판매가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르는 폐기처분 비용까지 추가 부담하게 되었다.
이러한 총체적인 난국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회사는 도산하게 되었으며, 사장은 라스팔마스에서 사업을 더 할 수가 없으므로, 가나의 기지에서 운영하고 있는 가다랑어(Skip Jack : 가쓰오)채낚이 선박을 관리하고 있다고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고, 근무기간 동안 보다 적극적이고 확실하게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근무를 한지 25개월여 만에 회사를 그만두었으며, 이 무렵에 재서선주협회에서 실무를 맡아서 책임지고 협회를 운영할 사람을 구인하고 있어 이에 응하여 부회장으로 근무를 하게 되였다. 이 때 새우트롤어업을 하는 회사에서는 선박에 필요한 어구 및 선용품을 개별적으로 국내에서 구매하고 있었는데, 만약 적당량의 물량을 확보하여 일괄적으로 구매를 한다면 가격과 운임 등에서 많이 절약될 것 같아 어업위원회를 개최하여 취지를 설명하였더니 동의를 하였다. 그러나 정녕 추진을 하려고 세부사항에 들어가니 협조가 되지 않아 실패하였다.
이는 전임 선주협회장이 협회의 발전을 위하여 적립하였던 기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하여 카지노 출입에 사용을 하였으며, 최종적으로는 전액 인출하여 칠레로 도망을 한 사례가 있어, 취지는 좋았으나 한번 쓰라린 경험을 한 것으로 인하여 회사들의 관심을 보이지 않아 더 이상 추진이 불가하였다.
전환점에 서다
앙골라 수역에 단독으로 입어를 하여 좋은 어획실적을 올려서 벌어드리는 이익이 많아 지중해에서 참다랑어(Blue Fin Tuna, 혼마구로)의 수매사업과 국내에서는 호텔업 등 업종의 다변화에 성공한 ****회사를 지켜보며, 모두가 이곳 황금어장에 군침을 흘리고 있으나 선뜩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국내의 경우 해양수산부에서는 신 어장개발에 대한 기득권을 인정하여 일정기간은 타 선사에 추가로 어업허가를 발급시켜 주지 않고 있으며, 설사 입어가 된다고 하더라도 투여 척수가 적을 경우에는 어획물(물량)이 많지 않아 단독으로 운반선을 수배할 수 없어 아무래도 기존 회사의 운항계획에 맞추어야 하는데, 어느 회사라도 자사의 선박운항의 기밀에 관한 것이나 이익에 반하는 행위에 협조를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하므로 운반선에 어획물 전재 및 보급과 수리 등에 문제가 많아 이를 선결하지 않고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된 것으로 보아진다.
이 때 **수산에서 트롤선 1척을 이곳에 투입하여 조업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곳에 파견되어 근무하고 있는 기지장의 전화번호를 수소문하여 입어관계를 문의 후 협조를 간곡하게 요청하니 망설인 끝에 만약 방문을 한다면 협조를 하겠다고 하여 기대를 안고 방문길에 나섰다.
입국장에 들어서니 아직까지 건물 곳곳에 탄흔이 남아있다. 정부군은 바다의 유전을, 반군은 산악지대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장악하고 있어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서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외국으로부터 전쟁 물자를 수입하고, 젊은이들은 끊임없이 내전으로 내몰려 희생이 되고 있어 전쟁고아들이 많아 이를 수용하는 시설이 수도인 루안다 외각에 별도로 있고, 이곳에 한국에서 목사가 파견되어 돌보고 있는 곳도 있으며, 밤이면 가끔 들리는 총성이 긴장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며칠 후 기지장 및 사진관을 운영하는 사장 그리고 몇몇 교포들의 가족과 함께 루안다 시외의 계곡으로 소풍을 나갔으며, 모처럼 불고기와 김치 등 한국음식을 배 터지게 먹고 즐겁게 교제를 나누며 그간의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돌아오는 길에 초소에서 검문을 당하였다. 공교롭게 내가 여권을 소지하지 않아 이런저런 질문으로 시간이 지체되자 사진관을 운영하는 사장이 명함을 건네며 “내일 사진을 찍으러 오라”하니 그냥 통과시킨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달아난다 하여 기겁을 하고 도망한 것은 옛날이야기로 사진 찍기를 너무 좋아하여, 이제는 인화기를 24시간 운전하여도 수요를 충당하기 힘들 정도로 바쁜 덕분에 돈도 많이 벌었다고 한다. 그러나 외화의 송금이 너무 까다로워 현지화를 암 거래상을 통하여 미화로 바꾸어 집에 보관하는데, 이것 때문에 도적들의 표적이 되기도 하여 매우 조심한단다. 가끔은 한국의 현지회사에서 필요한 금액을 자기들의 현지화로 지불하게 하고 해당금액은 국내에서 수령하는 방법을 동원하기도 한다며 내가 이곳에 진출하면 잘 부탁한다고 한다.
가발사업을 하기 위하여 아프리카의 오지까지 진출하여 성공적으로 사업을 하는 교포가 있는가 하면, 한국의 문구류의 품질이 좋아 고가인 것을 감안하여 IMF 때는 부도난 문구도매상의 문구류를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통째로 구매 후, 컨테이너로 수입하고 판매하여 막대한 부를 이룬 교포도 있어 수산업 밖에 모르는 나에게는 그들의 사업수단이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기지장이 수산청 직원을 통하여 트롤선 2척의 입어허가 취득이 가능한 회사를 소개하여 주어 가장 빠른 방법으로 입어를 시키기로 합의를 한 후, 관련된 제반 서류를 지참하여 이것을 라스팔마스에 귀임하여 몇몇 회사와 협의를 하였으나 반신반의 하며 믿지를 못하여 더 이상 입어를 추진을 하지 못하였다.
이는 설사 입어가 되더라도 현지에서 기존 업자로부터의 협조를 얻지 못하여 정상적인 조업이 되지 않을 것을 염려하였던 것이 아닌가 싶으며 이 후에는 어떻게 수산청에 로비가 되었는지 선령이 10년 이하가 아니면 외국어선의 입어가 불가하게 입법이 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그 때가 마지막 기회였다고 보아진다.
해양수산부에서는 우리 어선들이 조업하는 외국의 연안국 수역의 어족 자원을 보호하여 지속적인 조업을 영유하고 또한 출어회사 간의 과잉경쟁 의한 입어조건의 악화 등을 고려하여 각 해역별로 업종별로 조업척수를 제한하고, 만약 어장을 이동시에는 소속된 수역의 어업위원회의 동의를 득하는 등의 방법으로 사실상 신규로 국적을 취득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에 따라 재외국민의 경우 제3국적으로 조업을 할 수 밖에 없으므로, 이곳 대서양 어장에서 가장 수익이 높은 조기 외 국내 판매가 가능한 어종을 어획하지 못하고(국적선이 아니므로 국내에 반입 할 경우 특별히 국내업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마련된 높은 조정 관세-수입가격의 60퍼센트, 때문에 수지를 맞출 수가 없음) 전량 유럽이나 아프리카에 수출이 가능한 어종만을 어획하여야 하므로, 이에 따른 어장의 선택의 어려움과 더불어 수익성이 많이 떨어졌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한 결과 정부의 수산 정책에 따라 폐업을 할 수 밖에 없는 업종(북태평양 오징어 유자망, 새우 트롤선 등으로 국제 협약에서 조업금지나 감선이 불가피한 업종)을 정부에서는 사업주에 대한 보상 차원으로 해당 어업권을 타 업종으로 전용이 가능하도록 내부적으로 규정을 하였는데, 이를 이곳에서는 알고 있는 선주가 없었고 설사 알고 있더라도 이를 추진하는 방법을 모르므로, 그간 내가 국내에서 체험하여 경험을 바탕으로 제반 절차를 대리하여 주는 것을 검토한 후 시행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부식을 선박에 공급하면서 돈을 벌어 원양어업을 하고 있는 회사의 사장에게 설명을 하였더니 반신반의 하면서도 며칠 후 국적취득의 요청이 있었다. 이에 따라 국내에 출장하여 해양수산부에 들려 문제가 없는 것을 재확인하고 수리남의 새우트롤선 2척의 어업권을 구매하여 국적을 취득하는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트롤선의 선원으로 이곳에 왔으나 계약이 종료 후에는 귀국하지 않고 일본인이 선식 및 선용품을 취급하는 회사에 취업하여 경험을 쌓은 후 독립하여 회사를 설립하였다. 무엇보다도 친형이 수산대학을 졸업한 관계로 동문 출신 기지장들이 많이 도와주어 이제는 성공적으로 사업을 하고 있으며 동생들까지 초빙하여 동업을 하고 있었다.
부산에 회사를 설립하고 선명을 결정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는 것을 다른 선사에서도 확인하고 서로 다투어 같은 방법으로 어업권을 찾다보니 가격이 2배까지 급등하게 되었다. 해당 선박 2척이 국적을 취득하였으나 선주가 국내에서 발생되는 각종 업무에 대하여 모르는 부분이 많아, 나에게 지속적인 도움을 요청하여 이 후에도 경영에 대하여 자문을 하여 주면서 받은 사례비로 기본적인 생활을 하면서 국내의 지인들을 통하여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였다.
이곳에서 같이 근무한 직원이 회사를 그만두고 수산물 중개업을 시작하였는데 영문학과 출신에다 스페인어도 잘하고, 대인관계도 원만하여 단시간에 크게 성장을 하여 주위의 부러움을 받고 있었다. 어느 날 그와 호텔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마침 이때 국내의 친구로부터 인도네시아산 한치를 EU에 수출할 수 있으면 한다고 하는 전화가 걸려 와서 서로를 소개시켜 주었다.
친구는 거래가 원만하게 성사된 것을 감사하는 마음에서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는데도 얼마를 수수료 명목으로 보냈고, 이곳 업자도 덕분에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하며 나에게 촌지를 주었다. 이후에는 나와는 무관하게 두 사람이 추가로 직접거래를 하였는데 아마도 예전 물건보다 못한 것이 수입되었는지 판매가 불가하다며 불평이 있는가 싶더니 수입상으로부터 크레임(Claim, 손해배상)이 걸렸으니 나에게 해결을 하여 달라고 한다.
내가 나설 입장이 아니었으나 무언가 원만한 해결책을 찾아주고자 중재를 하여 보았지만 서로 입장이 너무 상이하여 불가하였다. 이 후 시간이 나면 만나자고 하여 “당신이 처음부터 개입하여 수수료까지 받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해결해 주지 않아 섭섭하다”고 하며 “가만있지 않겠다”고 협박을 하기도 하였다. 답답한 마음에서였겠으나 잘되고, 잘 나갈 때는 얼마 되지 않은 촌지로 생색을 내는 것이 고작이더니 어려워지니까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거래인데도 무조건 해결하라고 악다구니를 치고 있으니 그저 한심스러울 뿐이다.
어떻게 나의 전화번호를 알았는지 모르겠으나 어느 날 기억에 남아있는 목소리가 들린다. 라스팔마스에서 사업을 접고 귀국을 하였는데 마누라와 이혼을 하였으며, 두 아들은 그곳에 남겨두고 왔는데 너무 어려우므로 도와달라는 소리를 들으니 씁쓸하다. 주위의 이야기를 들으니 수산물의 판매에만 전념하다보니 부득이 잘 팔리지 않은 것까지 구매를 하였으며, 결국 이것이 재고로 많이 남게 되어 자금을 압박하여 결국은 도산하였다고 한다.
북한 수산업의 허상과 아픔
다른 회사 선박의 국적을 추가로 변경하기 위하여 국내에 일시 귀국하였으며 시간이 있는 데로 지인들을 만나 수산업계의 동향을 파악하고 새로운 사업을 물색하던 어느 날, 고향 선배이며 10여년 이상을 절친하게 지냈던 분이 오랫동안 근무를 하였던 OY수산을 그만두고, 그간 원양 선사들과 쌓아온 돈독한 친분관계를 활용하여 외국선원을 관리하고 있는 회사(외국 선원을 국내 원양 선사의 선박에 승선을 알선하는 사업)에 들렸다.
지난날의 여러 가지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 때 우연히 OY수산에서 근무를 같이한 후배 선장이 이곳에 들려 대북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홍콩에 회사를 설립하여 북한과 생수 및 영상 판매사업을 국내에서 대행하고 있는 사람을 잘 알고 있는데, 북한의 업자가 수산물도 국내에 판매를 하고 싶다고 수차에 걸쳐 요청을 하였는데도 본인들은 수산물에 대하여 전혀 문외한이므로 함께 동업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며칠 후 별도로 만나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사업에 전망이 있다고 생각이 되어, 직접 본인들을 만나 구체적인 사업계획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북한에서 판매하기를 요청하는 수산물의 품목과 가격 등을 국내의 판매 가격과 대비하여 상세히 검토한 결과 충분히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이 되었다.
그간 국내에서 북한 사업을 대행하였던 사람(고문으로 취임함)과 있는 홍콩의 사장은 고등학교 동기이자 매제지간이며,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출자를 결정한 사람은 고문과 고등학교와 대학 선후배 사이로 친목회 회원이며, 나와는 고향이 같고 그의 중학교 친구들이 나와 고등학교 동기생이 있어 이 후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이를 중재한 사람(이사로 취임함)도 선상생활을 접은 후로는 수산물 판매를 하고 있어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으므로 상호 충분하게 의견을 교환한 후,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가 자본금 1억으로 회사를 설립하고 각각 50퍼센트씩 출자하기로 하고 회사명과 지분을 결정하고(나와 친구가 자금을 출자를 하고 다른 사람은 공로주를 주었음) 공동대표 체제로 사업을 시작하였다.
한국 선박은 북한에 직접 입항할 수가 없으므로, 동해항에서 북한의 수산물을 수입하고 있는 선사와 차기 1항차를 용선하기로 계약하고 계약금을 지불하였으며, 본선이 동해를 출항을 할 때 차기항차 북한에서 수산물을 선적 시에 필요한 고기상자와 요청한 물품을 선적하여 보내는 한편, 지속적인 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이사를 중국의 대련에 출장시켜 중국국적을 소유한 냉동운반선의 용선을 추진하였다.
북한으로부터 계약된 수산물의 생산에 필요하다며 소요자금의 절반을 선 송금하여 줄 것을 요청하여 홍콩을 경유하여 해당 금액을 송금하였다. 한편 우리와 계약한 운반선은 동해항을 출항하여 북한에서 일본에 수출용으로 대합조개를 선적하였으며, 동해항에서 제반 서류를 작성한 후 일본의 시마네항으로 출항을 하게 되었는데 이틀 후 방송을 들으니 마약 밀수협의로 일본의 세관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조개를 선적할 때는 마대포대에 20키로 씩 넣어 포장을 하는데, 이때 조개 밑에 마약을 넣어 포장을 한 것이 하역 시 발각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본선이 억류되므로 우리는 계약금과 고기상자의 비용 등을 고스란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보다 일정이 늦어졌으나, 중국으로부터 용선한 냉동운반선(참치선을 개조한 선박)을 동해항에 입항시켰다. 수산물 운송에 필요한 물품을 선적하고, 선장 및 기관장에게 수산물의 검품과 선적, 운반 도중 조치사항 등을 철저하게 교육시킨 후 북한의 원산항으로 출항을 시켰다.
그러나 입항 후 일주일이 넘도록 오늘, 내일하면서 선적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작정 대기시킬 수도 없어 부득이 빈 배(空船)로 출항을 시키고 동해항에 입항하여 대기를 하는 중, 다시 수산물이 준비되었다는 연락을 홍콩의 대방사로부터 받고 출항 하였으나 역시 첫 항차와 같이 선적이 되지 않아 입, 출항 경비 및 유류비용과 용선료 만 날리고 동해항에 재 입항하였다.
기존의 북한 업체와의 관계 개선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홍콩의 업자와 협의하여 이번에는 북한의 무역업자를 바꾸어 흥남으로 출항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미 자본금은 바닥이 들어난 상태였으나, 추진하고 있는 사업을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어떠한 판단도 섣불리 할 수없어 우선 소용 경비를 차입금으로 대체를 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전복 등 활어를 운반하기 위하여 운반선에 수조를 설치하였으며 이에 따른 소요 비용도 추가로 부담하였다.
이번에는 제반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기대를 하고 본선의 입항을 기다렸다. 그러나 활 전복은 규격이 미달되어 상품성이 없는 것으로 100kg 밖에 선적되지 않았으며, 활 털게는 요청한 수량보다 너무 많이 선적이 되었다. 입하량이 많아 일시에 판매를 하면 시장의 가격이 하락하기 때문에 수차에 걸쳐 당부를 하였는데도 통제가 불능이다.
또한 수입 절차를 밟기 위하여 보세장치장의 수조에 넣으니 어찌된 영문인지 전부 거꾸로 뒤 짚어진다. 아마도 운송도중 지나치게 선도에 신경을 쓴 나머지 냉동기를 돌려서 털게가 동상을 입은 것 같았으며, 도저히 활어로서 판매가 불가하다고 판단되어 선도가 나빠지지 않도록 얼음을 채워 넣은 후, 다음날 서울의 수산시장에 선어로 판매키로 결정하고 나니 온몸에 힘이 빠진다. 밤샘작업에도 워낙 손해가 크다보니 피곤함도 느끼지 못하고 핸들을 잡고 대관령을 넘어오는 마음에 한이 서린다. 어떻게 하여서든지 조속히 정상화가 되지 않으면 모두가 힘들어지는데 이것을 해결할 방안이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북한의 수출업자와 직접거래는 물론 통신도 할 수없는데다 본선이 북한에 입항하여 수산물을 선적할 때도 이에 대한 정보를 전혀 알 수가 없으며, 본선이 동해항에 입항하여 검역을 마친 후, 세관에서 통관소속을 하기 바로 전에 선장으로부터 선적서류를 받을 때에야 겨우 알 수 있는 형편이니 그저 답답할 뿐이다.
다른 업자들은 어려운 와중에도 나름대로 정상적으로 운영이 되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는 당초 계획대로 전혀 이행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홍콩의 업자가 수산물을 시작하기 전에, 북한과 사업을 하면서 이에 대한 일처리가 매끄럽지 않게 처리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무언가 상환하지 않은 부채가 있는 것 같아 걱정이 앞서나, 그렇다고 북한에 직접 가서 확인할 수도 없고 참으로 암담하였다.
다음 항차에는 규격별로 선별이 되지 않고, 더하여 냉동상태가 좋지 않은 수산물이 선적되어 도저히 판매가 불가하였으며 이의 처리를 위한 폐기비용까지 추가로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홍콩의 업체는 이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고 지속적인 사업을 위하여, 수산물 구매를 위한 자금만을 요청하는가 하면 지금까지 투자한 정도의 적은 자금으로 사업을 하려 했느냐는 말도 흘러나와 더 이상 도저히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만 사업을 종료하자니 그간 투자된 금액 및 시간이 아깝기만 하고 이 사업을 위하여 은행에 대출을 하였기 때문에 전세 기간이 만료된 세입자는 나가겠다고 아우성이나 담보금액이 많아 새로운 세입자는 없어 사면초가라 더 이상 견디기가 어려워 싼 값에라도 집을 정리하기로 결정하였으나 감히 아내에게는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다.
80평 대지, 연건평 100평의 3층 건물을 신축하기 위하여 아내는 1년여 간 주택세미나와 각종 자재 전시장 등에 참석하여 공부를 하였고, 자재는 을지로 자재상에서 직접 구매를 하는 등 그야말로 땀과 열정이 베어있는 보금자리를 매각을 하니 남는 금액이 2,000만원으로, 다른 곳에 거처를 옮기는 것도 마땅하지 않아 와신상담하는 마음으로 2층의 한칸 방으로 전세를 들었다.
대합조개가 선적되어 하역을 하는데 본선에 고기상자를 납품하는 업체에서 다음 날 대금을 틀림없이 지급하겠다고 하여 동 사항에 대한 확인서를 쓰게 한 후, 살아있는 수산물의 경우 판매 전에 대금을 받아야 하는 불문율을 깨뜨리고 판매를 하였다. 그러나 다음 날 양식업자로부터 컨테이너에 보내어진 조개를 양식장에 뿌리기 위하여 확인하니 전부 폐사하였다며 송금을 하지 않는다.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지만 하는 행위가 너무 괘씸하여 끝까지 받아내기 위하여 3차례에 걸친 내용증명을 발송하였으며, 재판까지 청구하였으나 배심원들이 “활어의 경우 인수 전에 대금을 지급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거래” 라는 관행보다도 조개가 폐사된 부분을 부각시켜 일방적으로 우리의 양보를 권유하는 중재안을 내놓는 것이 황당하고, 타당하지 않아 더 이상 시간과 출장비용을 낭비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사기로 경찰에 고발하였으며 소환을 받고서야 모든 것이 불리하다고 생각하였는지 대금을 지불하였다.
미얀마 사업과 원양어업으로 회귀
이렇게 사업이 지지부진하고 있는 중에 일본의 지인으로부터 한국으로부터 수출된 세라믹불판이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며 생산이 가능한가에 대하여 문의가 있어, 이를 인천의 남동공단에 들려 생산업체에 들려 상담한 결과 경쟁업체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생산하겠다고 한다. 이에 따라 매월 20피트 컨테이너 2대분씩을 수출을 하기 시작하였다. 모처럼 회사에 훈훈하고, 화기애애한 바람이 부는가했더니 이를 추진한 회사의 고문이 자신의 공로를 내세워 나와 동업자가 소유한 지분을 양도하여 달라고 한다.
수산사업을 시작 할 때 홍콩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추진하기 위하여 공로주를 무상으로 주었으며, 정상적으로 사업이 이행이 되지 않아 그간의 출혈이 막대한데도, 이것은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몰염치한 사람으로 비추어지나 만약 요구대로 하지 않으면 회사를 별도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하니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나 다른 대책이 없어 무상으로 주식을 양도하여 그를 최대주주로 만들어 주었다.
이 후로는 회사에서 전횡을 하기 시작한다. 컨테이너 1대분을 수출하면 약 1,000여만 원의 이익이 발생하므로 일반관리비를 제외한 이익금을 어느 정도 적립해 나가면서 외부로부터 차입한 금액을 상환시키려 하였으나, 우리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하고 일반관리비를 제외하고는 발생되는 이익금의 거의 전액을 개인이 인출하고 있으나 이를 억제시킬 방법이 없었으며, 나에게는 항상 벌레 씹은 것 같은 얼굴로 대하는 것이 매우 못마땅하였다.
그러나 시작한지 3개월 만에 국내의 세라믹불판을 수출업자가 자사의 제품과 유사한 것이 일본에서 판매되는 것을 알고, 특허를 득한 제품을 허가 없이 만들어 수출한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생산 공장을 방문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만약 문제가 된다면 그간 발생된 이익금의 일정액을 반환함은 물론이고, 법적인 책임을 져야하는 법인의 대표(주식을 인계할 때 법인의 대표도 바꿀 것을 요청하였으나 본인이 신용불량자이므로 그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변경하지 못하였음)인 동업자가 더 이상 수출하는 것에 난색을 표하는가 하면, 생산업자도 혹시나 불똥이 튀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여 제대로 생산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일본으로부터 똑 같은 제품이 중국으로부터 수입되는데 우리 가격의 절반 수준이라 하여 결국은 수출을 포기하게 되었고, 이 후로 가끔 주문이 있을 때에 한정하여 수출하였으나 수량은 미미하였다.
수산물의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는 반면 세라믹 불판 수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부터 상대적으로 나의 입지가 어려워 고심을 하고 있었다. 사업이 이렇게 어려워진 것을 모르고, 그저 나만 믿고 학비며 생활비는 걱정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을 스페인에 있는 가족을 생각하며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북한 사업을 주선하였고 너보다 먼저 회사를 그만둔 이사가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기 위하여 미얀마에 출장을 하였는데 꽃게를 수입하면 괜찮을 것 같으니 함께 동업을 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이사를 대표로 하여 **회사를 설립(주식 지분은 동일하게 함)하고 이를 추진하려고 하니 자금이 필요하였으나 더 이상 투지할 여력이 없었으므로 이를 해결하고자 대표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내 친구에게 사업을 제안을 하였는지, 친구가 나에게 상세한 문의가 있었고, 며칠 후에는 2,000만원을 투자하기로 하였으며 또한 현지에서 상품의 구매 및 품질관리에 필요하다며 학교 후배를 데리고 와 소개를 시켜준다.
낯이 익은 것 같아 확인하니 DJ실업에서 사직하기 전에 계약기간이 만료 예정인 선박의 교체 선장으로 인사 발령을 하였던 사람으로 새삼 주어진 인연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수산부장으로 임명을 하였다. 처음 사업의 시작으로 자금에 어려움이 있음을 알고 회사가 정상화되면 변제하는 조건으로 2,000만원을 내 놓는다. 아마도 대표와 사전에 이야기가 있었다고 보아진다.
대표와 수산부장이 미얀마에 출장을 하여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당초 예상과는 다르게 꽃게가 제대로 구매되지 않는가 싶더니, 이런 저런 변명에 더하여 나더러 외국어가 유창하고 경험이 많으므로 현지에 출장하여 다른 종목과 연관하여 사업을 추진하는 방안을 모색하여 주었으면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약 1개월간 구매한 수량이 턱없이 부족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찾지 못하여 대표가 우선 귀국을 하였으며 자세하게 실정을 이야기를 하는데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내가 현지에 출장하여 확인키로 하였다.
입국장에 들어서니 혹시나 필요할 것 같아 소지한 팩스기를 압수한다. 이유를 물으니 통신관계 기기는 당국의 허가가 없으면 반입이 불가하다고 하는 것이 아무래도 외국으로 자국의 군사독재의 현황이 알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인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의무적으로 일정 금액을 공항에서 환전을 하여야 한다. 이는 기준 환율이 음성적으로 거래되는 환율과 차이가 너무 심하여 모두가 정상적인 환전을 기피하므로 강제적으로 시행하고 있다고 보아진다.
시내에 들어서니 온통 사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국교가 불교이며 헌법으로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있으나 내부적으로는 사원으로부터 반경 얼마인가에는 다른 종교의 건물을 세울 수 없다고 하니 실질적으로는 다른 종교는 존립하기 어렵겠고, 텔레비전을 보니 하루 종일 최고 통치자가 사원을 방문하여 희사하는 것과 무언가 정책을 발표하는 것 등으로 재미가 없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그간 말로만 들었던 도리안이라는 과일을 맛보았다. 처음에는 구린내 같기도 하고 여자의 월경 때마다 발생되는 냄새 같기도 하여 선뜩 입에 넣기에 거북하였으나 차츰 그 맛에 반하여 매일 몇 차례씩 먹었으나 질리지 않아 식사를 대용하기도 하였다.
당초 영국에서 이곳을 점령하였을 때 유순한 인도인과는 다르게 성질이 거칠어 이를 해결하고자 인도인을 강제 이주를 시켰다고 하는데 이 민족이 카친족으로 영어를 쓰고 있으며, 기독교인이 많으나 저소득층의 주류를 있다고 한다. 우리가 머무르는 집의 요리사와 잡일을 보는 처녀가 이 출신으로 내가 함께 영어로 찬송가를 부르니 깜짝 놀라며 즐거워한다.
우선 현지의 제반 동향을 파악하고자 수산업을 하고 있는 대학후배 및 다른 업종에서 사업을 하는 한국 사람을 만나 ,사업상 발생되는 여러 문제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개략을 파악한 후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갔다. 수산물에서는 이곳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새우가 최우선하여 처리되며 이 과정에서 꽃게가 부산물로 잡히는데 수량이 많지 않아 지역에 위치한 냉장고에서 단독적으로 처리할 수 없으므로 수집된 새우는 대형 아이스박스에 얼음을 채워 유일한 운송수단인 버스 편으로 이곳의 수도인 양군으로 보내어진다.
그러나 더운 날씨에 어획된 후 24시간여를 지나서 도착되는 관계로 더러는 선별과정에서 선도가 좋지 않아 상품가치가 없어 버려지는 수량이 많아 현지 수매인과 수량 및 가격 때문에 마찰이 있는 것은 차제하고 가장 중요시되는 선도가 보장이 될 수 없으므로 근본적으로 사업이 성사될 수 없다고 판단되었다.
이곳에서 신 어장을 개척하고자 선장으로 입국하였으나 제대로 추진되지 않아 승선을 포기하고 눌러 앉아 수산물 유통업을 하고 있는 대학 후배가 있어 신용장을 개설하고 동 사업을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원료의 구매를 하기 위하여 돈이 필요하다며 선불을 요구하는 관계로, 만약의 경우에는 또 투자금액이 회수되지 않을 것 같아 더 이상 추진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귀국을 하였다.
이 때 국내에서 참치머리가 횟감용으로 비싸게 팔리는 것을 착안하여 일본으로부터 참치머리를 수입하였으나 선도가 좋지 못하여 번번이 손해를 보는 업자를 이사의 소개로 만났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와 함께 일본에 출장하여 생산 공장을 견학하고 담당자 및 사장을 만나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니, 깜짝 놀라며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면서 진지하게 검토 후에 국내에 출장을 하면 검품을 하여 이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한다.
그간 이 사업을 중개한 업자는 업계에서 꽤나 이름이 알려져 있으며, 나와 같은 회사에 오랫동안 근무를 하여 잘 아는 분으로“자기가 아니면 공장의 사장이나 담당자를 만날 수 없다” 며 큰소리를 쳤으나, 정녕 손해가 발생되니 아무런 조치를 취하여 주지 않고 변명만으로 일관을 하였는데 직접 만나 처음 주문한 내용부터 그간의 진행상황을 듣고 보니 일본 측에서의 과실보다는 중개업자의 과실에 기인된 것이 많음이 판명되었다.
당초 계약 시 어종 및 크기 등을 명확하게 주문을 하지 않았으며, 국내에서는 횟감용으로 판매가 되고 있으나 일본에서는 사료용으로 처리되므로 이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소홀하게 다루었던 점이 가장 큰 문제로 이것을 재삼 당부하고 정문을 나서는데 한숨을 푹 쉬면서 “ 그렇게 믿고 존경하였던 선배인데 어떻게 이렇게 처리할 수가 있느냐, 그간 1억5천만 원 적자를 보았다”고 한다.
이후 국내에 반입된 상품은 선도는 물론 어종과 크기에 전혀 문제가 없어 좋은 가격에 판매가 되었으나, 다음 물량에 대한 주문이 없어 궁금해 하던 중 일본의 업자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아직 잔금이 송금되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된 것인가 하고 묻는다. 영문을 몰라 지금까지 진행된 과정을 물으니, 혼자서 일본에 출장을 와서 참치머리 사업을 하기 위하여 별도의 회사를 만들었으며, 이곳을 통하여 수입하는 것으로 나와 협의가 되었다고 하였단다. 이름까지 첫 두 글자가 같고 나를 형님으로 모신다고 하니 의심을 하지 않고 믿고, 전과 같이 물건을 보냈는데 어찌된 것이냐고 되물으니 더 이상 할말이 없다.
이 사업을 통하여 발생된 이익금을 적립하여 사업자금을 조성하기로 약속을 하였는데 짧은 일본어 실력에 더하여 나와 일본의 파트너 관계를 너무 경시하고 혼자서 과욕을 부렸나보다. 결국은 일본과 한국의 수입업자도 이것을 알고 이후로는 그를 완전히 배제하고 나를 통하여 업무를 추진하게 되었으니 무엇이든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으리라”는 말씀이 이 경우이리라.
수량이 예상보다 많지 않아 2개월에 한번 씩 밖에 수입을 할 수 없었으나 이익률이 높아 어느 정도 손실을 만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수산물검사소의 검사가 갈수록 까다로워지면서 1년 후에는 사업을 중지하였다. 그는 가끔 잊어버릴만하면 전화를 하고 있으나 실현가능한 것은 별로 없는 사업에 관한 것들뿐이라 점점 관심 밖으로 멀어지고 있다.
내가 고문으로 있었던 회사로부터 사업을 직접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어 북한 사업에 대한 미련을 접고 부산으로 내려가 새로운 마음으로 나의 전공분야인 수산사업에 매진하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은 적은 보수지만 이 회사의 고문으로 재임하면서 국내의 제반업무를 주관하여 처리를 하였으며, 이제는 어느 정도 정상화 되었으므로 손을 떼기로 합의를 한지도 얼마 되지 않아 의아하여 어떻게 된 것인지 현지에 확인을 하였다.
사장이 라스팔마스에서 내가 근무하였던 회사의 선박에 부식을 공급하였으나 대금의 지불이 늦어지고 액수가 커지고 있어 이를 해결하느라 선주와 만나 새벽까지 협의를 하면서 식사와 더불어 반주를 하고 헤어져 귀가를 하는 도중에 교통사고로 사망을 하였다고 한다.
사후 유족들은 여러 가지로 회사의 운영 방안을 모색하였으며, 처음에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친족 중 한 사람을 대표로 하여 운영하는 것도 검토하였으나 수산관계는 전혀 문외한이라 본인이 고사를 하여, 차선책으로 회사의 운영 상황과 라스팔마스의 동향도 가장 잘 알고 있는 내가 적임자라고 판단하였으니 그간 협조하여 준 것같이 잘 부탁한다는 미망인으로부터 간곡한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인의 친형이 나와 대학 동기로서 나를 잘 알고 있는 그의 조언이 가장 크게 미망인의 마음을 움직였으리라 생각된다.
마침 수산물유통을 하고 있는 대학 동기와 라스팔마스의 선박을 관리하고 있는 후배가 부산 송도에 조그마한 아파트를 임대하여 기거하고 있어 나도 함께하기로 하고 본격적인 부산생활이 시작되었다. 날이 좋을 때면 대마도까지 한 눈에 들어오는 탁 트인 시야며 푸르른 바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시민공원이 있어 거의 매일 아침이면 약1시간 반 정도 운동을 하였으며, 서울에 가지 않을 경우는 금정산을 산행하며 아픈 마음을 다스리고 새로운 사업에 대하여 구상을 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산 문어 EU에 수출과 무너진 꿈
아무래도 여자 혼자서 라스팔마스에서 수산업 및 부식을 판매하는 사업을 함께 꾸려나가기에 어려움이 많아 수산업을 그만 접었으면 좋겠다는 의사가 가끔 있었고 또한 현지에서 선박의 구매의사를 가지고 있는 회사가 있어 상호 원만하게 매매가 이루어지도록 주선하여 주고, 부산에서는 이에 따르는 제반 업무(어업허가 및 선박등기, 세무와 관련업체 채무 관계 등)를 마무리하고 14개월여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마포 사무소에 들려 그간의 일을 설명하고 수산물 및 선박의 중개 업무를 하는데 별도의 사무실 마련을 할 경제적인 여건이 되지 않으므로 경비 절약을 위하여 사무실을 공동으로 사용하기로 하고 이에 따르는 비용은 공동으로 부담하기로 하였다.
주택을 구입할 형편이 못되어 연립주택을 전세로 마련하였으며, 비록 북한과의 수산사업은 실패로 끝났으나 이것이 계기가 되어 북한산 문어를 중국의 단동을 경유하여 부산에 수입하여 재 포장 후 이태리 및 스페인에 수출하는 무역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아이러니하지만 그래도 다행스러웠고 더불어 중고선박의 매매도 알선하게 되었다. 많은 수익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기적으로 수출이 가능하여 스페인에 거주하고 있는 가족의 생활비와 학비 등을 보내고 은행에서 차입한 금액의 이자를 지급하는 것은 무리가 없었다.
또한 이 때 쌓아진 신뢰를 바탕으로 가끔은 수출용으로 부적합한 문어가 있을 경우 외상으로 보내어지기도 하였으며, 이것을 부산에 있는 가공공장에 판매 후 경비와 수수료를 공제하고 잔액을 송금하기도 하였으나, 판매한 어가에 대하여 공장 측과 어떤 거래가 있을 것으로 의심을 하기도 하여 제반을 설명하고 설득시키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북한산 문어 외 수산물의 확보 및 검품을 위하여 12월 말에 인천에서 페리를 타고 중국의 요녕성에 있는 단동에 들렸다. 출국장에는 보따리 장사(일명 : 따이공)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으며 원만한 출국수속을 하기위하여 이를 정리하느라 우리 같은 여행객들도 똑같이 짐짝 취급을 하는데 이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불쾌하기까지 하다. 밤새 항해하여 이튿날 항내에 들어서니 사방이 온통 눈으로 덮여있고, 부두에는 바다의 얼음을 제거하고서야 접안이 되는가 하면, 뼈 속까지 스며드는 찬 기운이 온 몸을 감싸는 것이 마음까지 얼어붙게 한다.
입국 수속이 끝나자 호텔에 체크인(Check In)을 한 후, 바로 냉장창고에 들려 도루묵을 검품하였으나 크기가 작고 암, 수구별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상품성이 없다. 점심을 하기 위하여 식당에 들리니 뜨거운 차에 독한 중국술이 나와 우선 차를 한잔하고 술을 드니 얼었던 몸이 녹는다. 이렇게 날씨가 추우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독한 술을 즐기는가 보다.
우리를 안내한 사람은 키가 약간 작고, 통통하며 얼굴이 둥글고 예쁘게 생긴 40대 초반의 교포인 중년여인으로 압록강 다리의 가까이서 다방을 하고 있어 차를 마실 겸 들리니 군데군데 “김 정일 뱃지”를 가슴에 붙인 북한 사람들이 눈에 뜨인다. 이에 따라 북한 정보에 빠르고 가끔은 평양까지 관광객을 안내하기도 하여 북한의 수산물을 취급하는 관계인도 잘 알고 있으며, 한국에서 우리와 동행한 사람과 내연관계가 있어 아파트를 살 때와 다방을 개업할 때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북한에서 직접 운영하는 옥류관에 들리니 여자 안내원들이 그간 방송에서만 듣던 목소리로 영접을 하고 식사 도중 노래로 흥을 돋구어준다. 이야기하는 중에 “김 정일 동무”라는 소리가 나오자 정색을 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항의를 한다. 경애하는 수령에게는 동지라고 호칭을 하는데 이럴 수가 있느냐기에, 내가 소지하고 있는 스페인 영주권을 비춰주며 외국에서 살고 있어 잘 몰라서 그랬다고 사과를 하니 풀어진다.
밤에 압록강 너머 신의주를 바라보니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아예 불빛이 없는 캄캄한 암흑천지라 북한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으며, 이튿날은 보트를 타고 바로 북한 땅에 접근하기까지 하였으나 주민들은 생동감이 없이 보였다. 중국과 북한을 연결하는 압록강철교는 6. 25때 절단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것이 을씨년스럽게 보인다.
저녁 식사 후 가라오케에 들리니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으로 한국과 시설이 다름이 없다. 여자 종업원은 언어의 소통에 문제가 없도록 중국이나 몽골 등의 교포들이 많으며, 그간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들려서 불렀는지, 모르는 노래가 없고 영업이 끝나면 2차까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는가 하면 마음이 들면 호텔에서 아예 아가씨 집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한다.
나는 이 후 출장부터는 비싼 호텔에 머무르지 않고 민박을 택하여 교포들의 집에서 기거를 하여 식사도 함께 해결하였다. 특별히 먹고 싶은 것이 있어서 요청을 하면 안 주인이 직접 시장에 가서 좋은 것을 값싸게 사서 요리를 하여 한상에서 함께 먹을 수가 있어 아주 저렴하게 맛있는 것을 많이 먹을 수 있었다. 각 사업장에 들릴 때마다 고위층에 여자들이 많아 놀랐으며, 남녀차별이 없이 열악한 조건에서도 함께 근무하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였다.
큰 애가 고등학교를 졸업을 한 후, 대학의 진학을 앞두고 가족이 스페인에서 다시 한국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으며, 이 때는 이미 주택을 매각한 것은 알고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서러움에 며칠을 울면서 보내는 아내와 자식들을 대하기 민망하여 고개를 들지 못하는 와중에 작은애는 고3에 편입하여 대학입시를 준비하고, 큰 애는 사회학계통으로는 국제적으로 꽤 알려진 영국의 ***대학교의 국제정치학과에 입학이 허락되어 훌쩍 떠나게 되었다.
모두가 어려워하며 힘들어하는 가운데서도 생활하는 거주 공간이 너무 좁아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조그마한 빌라를 구입하고 이사를 하였다. 스페인에서 이사를 할 때 이곳에서 가져간 가재도구를 버리지 않고 그대로 컨테이너로 실어 가져온 관계로 지하에 있는 방을 채우고도 남아 계단에 쌓아놓았으며, 거실은 손님이 오면 움직이기에 불편할 정도로 주거공간이 비좁아 조금 무리하더라도 집을 옮기기로 결정을 하였다.
작은 애는 대학 입학 후 아르바이트로 자신의 용돈을 마련하는가 하면, 공부도 열심히 하여 전 학년 동안 장학금을 받았고, 학교 영자신문 편집장을 하는 등 나름대로 처해진 현실에서 탈피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기특하였고, 큰 애는 충족되지 못한 학자금으로 인하여 어려움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겠으나 그래도 잘 감내하며 학년에 누락 없이 졸업을 하게 되어 너무나 대견스러웠으나 한편으로는 아빠 노릇을 다하지 못하여 민망하기 그지없다. 비록 제반 여건이 좋지 않았으나 졸업을 축하하고, 그간 수고한 아내와 막내를 위로시켜 주기 위하여 비행기표와 여행경비를 마련하여 영국으로 출국을 시켰다.
이태리에 수출할 북한산 문어가 중국의 단동을 경유하여, 부산의 창고에 입고되었을 때 선도는 나쁘지 않았으나 냉동 시 물을 많이 입혔는지 수율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걱정이 되었다. 아마도 군인들이 문어를 채취하다보니 예상대로 잡히지 않을 경우에는 중량을 채우기 위하여 물을 먹이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자금이 부족하여 다른 회사의 신용장을 사용하는 처지이고, 수출을 조건으로 세관에 신고하여 관세를 지불하지 않고 국내에 반입된 물건이므로 국내에 판매할 형편도 못되어, 눈을 감고 수출을 위한 수속을 한 후 전량을 수출하였다.
상품의 이태리 도착을 확인하고 며칠이 지나니 역시 예상한데로 수입상으로부터 클레임(Claim : 하자발생)의 통보가 접수되었다. 대북사업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금, 다시 발생된 사고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할지 막막하였으며, 이와 연관하여 다른 수산물의 수출까지 불가능하게 되어 참으로 암담하였다.
고시원에서 꿈을
그간 생활비며 학비가 부족할 때마다 은행권에서 차용한 금액의 이자도 수출이 막혀 더 이상 지불할 형편이 되지 못하여 넋을 놓고 있을 때, 귀국한 큰 애도 취업이 순조롭지 못하여 기본적인 생활 자체의 유지가 어렵게 되자 아내는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생활전선에 나서 새벽부터 청소일이며 건강보조식품의 판매로 살림을 맡다시피 하였다. 상당기간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대책도 없는 것 같이 보였는지 아내는 짜증을 내기 시작하였고 애들과 함께 나의 무능함을 탓하기도 하는 현실에 감내하기 어려워 결국은 옷가지 몇 개를 챙기고 말로만 듣던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연이은 사업의 실패에 따른 아픔이 다시 재연되었으며, 무엇보다도 가장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므로 가족들에까지 왕따를 당하는가 싶으니 내 처지가 너무 한심하여 죽음에 이르는 생각까지 여러 번 하였으나 그렇다고 널려있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마지막 순간까지 무능하였던 아빠로서 비추어지는 것이 너무 싫었다. 그러나 가장 가슴에 저미는 아픔은 어머니에 앞서서 먼저 이 세상을 떠나는 불효를 저지를 수 없는 것과 신앙이 그래도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외부로부터 일체의 연락을 두절하고 오직 사업에만 몰두하였으나 따르지 못한 자금으로 인하여 사업을 추진하는데 어려움이 가중되었으며, 무엇보다도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이웃과 친지들을 시작으로 30여 년 간 끈끈하게 연결된 동창들과 친구와의 멀어짐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한, 두 주간도 아니고 장기간 경조사는 물론이고, 10여년 이상 주일이면 한번도 거르지 않았던 교회의 예배와 찬양대, 차량안내 등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으니 아마도 이에 대한 온갖 억측된 소문 때문에 아내와 가족들이 받는 스트레스도 상상을 초월했으리라 생각된다.
이 기간 중에 누구보다도 처남의 고충이 많았다. 고등학교와 대학까지 동기에다 나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사랑하는 여동생의 중매를 하였으며, 잘 살아가는가 싶었는데 어느 날 회사를 그만두는가 하면, 스페인으로 훌쩍 떠났다가, 다시 홀로 귀국하여서는 사업을 하더니 집까지 날리고 이제는 고시원의 생활로 전전하면서도 자식들의 장래를 걱정하며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고, 먼저 사업을 시작하여 실패를 맛본 경험자로서 어쩌면 서로가 위로를 받기위하여 가끔은 함께하여 많이 울었으며, 명절인데도 고시원에서 혼자 지내는 내가 보기에 안타까웠는지 설날에는 집으로 초대하여 울적한 마음을 달래주기도 하였다.
이런 생활을 어렴풋이 짐작한 어머니와 형제들은 도박이나 바람을 피워 재산을 날린 것도 아니고 본인이나 가족을 위하여 잘 되고자 하였던 사업이 잘못되었다고, 자식들까지 아버지를 냉대할 수 있느냐고 보통 불만을 가진 것이 아니나, 워낙 사안이 중대하고 또한 당장 해결 방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여 발만 동동 구를 따름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내 탓이고 잘못된 것이지 누구를 탓할 만한 것이 아님에 심기일전하여 다시 재기를 위한 기틀을 마련하고자 주택관리사 시험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는 정함이 있는 목표를 통하여 나를 다시 한번 채찍질하면서 나태하고 무능화되는 것을 이기기 위한 방편으로도 필요한 것이었다.
이렇게 상황이 급전하여 어렵게 되니, 나를 믿고 은행에 보증을 한 친척이 푸념과 넋두리를 나에게 하는 것에 한정하지 않고 아내, 애들에게까지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퍼부어대어 진저리를 치게 하였으며, 금융권에서의 채무에 대한 재촉 등으로 이를 감내하느라 가족들이 오죽하겠느냐 싶으니 한시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다행스럽게 그간 활어운반선의 구매를 검토 중이던 업자가 일본으로부터 구매를 확정하게 되어, 함께 일본에 출장하여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본선을 인수받은 후에는 본선에 승선하여 부산에 입항하기까지 제반 수속을 완료하고 받은 중개수수료로 우선 부채의 일부를 정산하게 되었다
어쩌면 주위의 환경이 모든 여건을 만들어 가는 것인가 보다. 이상하리만큼 내가 나락에 떨어져 있을 때면 주위에 그런 사람이 많이 모여들고, 힘차게 전진할 때면 속이야 어찌하던 겉모습이라도 그런 사람이 함께한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인가.....그렇지만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그들과 함께 막걸리라도 한잔 기울이면 아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좋고, 그들을 위한 기도를 할 때는 더욱 간절함이 배어나오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선박매매업과 작은 채워짐
활어 운반선을 구매하는 업자는 트럭 섬에 이미 양식장을 만들었으며, 처음 이 사업을 시작할 때 국내에서 마땅한 활어운반선을 구하지 못하여 중국의 활어운반선으로 국내에서 돌돔의 치어를 운반하여 양식을 한 결과 예상대로 성장속도가 빠르고, 육질과 맛이 좋고 무엇보다도 국내에 비하여 사료비 및 관리비가 절약되어 전망이 매우 밝아, 이를 계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대형 활어운반선이 필요하였던 것으로, 성어가 되면 국내 시장에 공급은 물론 일본에 수출하기 위하여 본선을 구매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봄부터 가을까지는 수온이 따뜻하여 성장을 하나, 겨울에는 수온이 낮은 관계로 성장을 하지 못하고 사료 외 관리비 비용 만 가중되므로, 이의 대처방안으로 항상 적정한 수온을 유지하는 아열대 기후에 플랑크톤이 풍부하여 사료 값이 절감되고 또한 인건비가 저렴한 이점이 있어 수산전문가(대학교수 및 수산진흥원)의 자문을 구하여 트럭 섬에 양식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선박을 인수하고 보니 선박에 대하여 문외한이라 수산관계에 종사하고 있는 지인들을 통하여 이 사업에 적당한 사람을 수소문하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부산에 있는 대학 후배로부터 내가 선박의 운용에서부터 판매까지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가장 적임자라는 추천이 있어, 다시 이 회사와 인연이 되었으며 많지 않는 보수지만 사업이 성공할 경우 인센티브를 적용하기로 하고, 고문이라는 직책으로 업무를 이행키로 하였다.
이에 따라 국내의 판매망을 구축하기 위하여 가락동시장의 **수산과 협의를 하는가 하면, 국내시장이 좁고 또한 판매가격의 안정화를 꾀하기 위하여 사장을 수행하여 일본의 가고시마 어시장을 방문하여 돌돔 판매의 전문가와 상담을 추진하는 등 제법 적극적으로 사업 을 추진하면서, 우선 한시름을 놓고 다른 업무도 가벼운 마음으로 겸업을 할 수가 있었다.
양식업 관계 및 본선의 국적을 취득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이 트럭 섬에 출장을 하였는데 어느 날 사망하였다는 비보가 들렸다. 양식장에 가기 위하여 보트를 탔는데 물에 떨어질 때 운이 없게도 고속으로 회전하는 프로펠러에 등 부분의 옷이 감기면서 프로펠러가 머리를 때려 뇌진탕으로 인하여 운명을 한 것으로 외국어도 능통한 매우 유능한 직원이었고, 선박 인수 시에는 일본에 같이 출장도 하였고 이 후로는 거의 매일 통화를 하여 친분도 돈독하게 쌓아가는 중이었는데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사장이 직접 현지에 출장하여 시신을 수습을 한 후, 인천공항에서 유족들에게 인계를 하였으며, 일산의 **병원에서 장례식을 마치고, 벽제화장터에서 화장 후 납골당에 안치하기까지 나는 옆에서 지켜보며 슬픔을 같이 하였다.
활어운반선의 운용도 미국의 테러방지에 동조한 각 국간의 안전문제 강화로 선박을 전면적으로 개조하지 않으면 국내는 물론이고 외국의 항구에도 입, 출항이 불가하여 동해에서 장기간 체재하면서 수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박의 국적이 잘 알려지지 않는 국가(Micronesia, Truck)인데다, 선박의 제반 검사 및 증서의 발급을 받기 위하여 검사관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도, 검사관이 한 사람 뿐이라 무엇 하나 요청하여도 제 때에 회신이 없어 이를 확인하는데 만도 며칠씩이 소요되었다.
검사관이 부족하여 애당국가의 선박검사에도 손이 모자라서 본선의 검사를 위한 출장 계획도 제대로 수립할 수 없는 지경이므로 향후 원활한 업무추진이 불가하다고 판단되어, 마이크로네시아의 국적을 포기하고 부산에 대리점이 있어 제반 업무추진이 원활하고 선적의 국적을 취득하는 비용이 다른 나라보다 저렴한 캄보디아로 국적을 변경키로 하였다.
이에 따라 동해에 머무르는 시간이 장기화되면서 그간 미루어오던 가족과의 만남을 언제까지 미루어 둘 수가 없어, 큰 애를 통하여 가족을 동해로 초빙을 하였는데 선뜻 응하여 오랜만에 함께하며 모두가 좋아하는 각종 회를 먹으며 그간 나누지 못하였던 이야기로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금융권의 부채가 아직까지 해결이 되지 않아 신용불량자로 낙인이 찍히고 이로 인하여 가족에까지 전화를 통한 독촉으로 인하여 스트레스를 주고 있는 한심한 아빠지만, 그래도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동기를 만들어 보고자 마련한 것으로 원인이야 어떠하든지 서로에게 너무나 힘든 여정을 언젠가는 정리하여야 한다는 마음에서 가족들도 호응이 있었으리라.
이로부터 얼마 후 누구보다도 두 여식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다시 귀가를 하였으나 가끔 채권사로부터 나를 찾는 전화며, 주민등록은 마포 사무실로 되어있어 거기에 쌓이는 각종 독촉장들로 여러 사람들에게 심려를 주고 있는 것이 미안스럽기 그지없다. 언젠가는 다시 재기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생각으로 감내하고 있으나 견디기가 쉽지 않다.
장모님이 세상을 떠났다.
부산에 입항하였을 때 장모님이 집에 들리셨는데 이때 마침 항해사가 거의 60kgs이 나가는 눈다랑어 한 마리를 집에 가져와서 해동을 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워낙 회를 좋아하시는 분이라 현관에 앉으시자마자 도마를 놓고 즉석에서 맛있는 부위를 골라 썰어 드렸으며, 그간 못 나눈 이야기를 오순도순 나누면서 한참을 맛있게 드시더니 갑자기 복통을 일으킨다. 아마도 완전하게 해동이 되지 않아 남아있는 찬 기운이 위를 자극시켜 일어난 것으로 보아졌으며, 급히 등에 업고 비 오는 길을 따라 병원까지 뛰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간 오랫동안 잔병치레로 거동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식들을 위하여 하루도 거르지 않는 새벽기도에 더하여, 임종하시기 얼마 전에는 자식들이 가까이 있는 서울의 병원에 입원하여 마지막으로 자식들에게 효도를 하게하여 사후에 조금이나마 섭섭함을 덜게까지 하시게 하셨던 당신에게 평소에 해드리지 못한 불효에 더하여 사업의 실패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한 죄스러움에 목포까지 혼자서 운구를 하면서 통곡하며 많이 울었다.
병원의 입구에서 2층까지 늘어선 조화며 끊임없는 문상객들과 이어지는 장례예배에 곁들여 홍어회를 위시하여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 등....북적거리는 가운데 오랜 병 수발에는 효자가 없다는데 고생 많았다며 위로하는 말이 공허하게 들린다.
처음 당신을 뵈었을 때부터 딸의 결혼을 위하여 홀연히 부산에 들려 나의 마음을 확인하던 일, 태어난 큰 애가 딸인 것을 보고 나를 위로하던 일, 광주에서 오산리, 한얼산기도원까지 동행을 하면서 나누던 정겹던 이야기, 용돈이 생기면 당신이 쓰기보다는 자식들의 이름으로 교회에 아낌없이 헌금을 바치면서 자식들이 잘되기 만을 기도하신 일, 워낙 생선을 좋아하셔서 조기 한 상자라도 보내드리면 당신이 드시기보다는 사위 자랑을 하며 이웃에게 나누어 주시던 따스함 .... 떠나시기 며칠 전에는 나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딸을 잘 부탁한다는 것까지 당신 자신보다도 자식들을 위하여 희생된 삶이었기에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치어의 성장이 예상보다 늦어, 본선을 다른 업주에게 용선을 주었으며 용선주가 본선을 일본의 북해도에 위치한 하코다테에 입항시킨 후 활 가리비 약30톤을 선적한 후 출항을 하려고 하니 항만안전관리국(Port Security Control : 항만에서 선박의 안전에 관한 사항을 점검)에서 본선을 방문하여 안전에 관한 것을 확인한 결과 몇 가지 지적이 되었으며 이를 시정하지 않으면 출항을 불허하겠단다.
그러나 항구 내에서의 오염된 해수가 어창 내에 유입될 경우 가리비가 폐사할 수가 있고(활 가리비의 선적이 완료되면 출항 후 항내에서 벗어난 즉시 순환펌프를 작동시켜 선박 외부로부터의 신선한 해수를 어창에 유입시키고 또한 오염된 해수는 밖으로 유출을 시켜 가리비의 호흡이 원활하게 하여야 함), 만약 출항 시간이 지체될 경우 활 가리비의 폐사가 우려되어, 직접 항만안전관리국에 수차에 걸쳐 전화를 하여 사정을 하고 대리점에는 방법을 찾아내라는 등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국내 입항 시 지적된 사항에 대하여 수리하겠다는 선주의 각서에 조선소에서 이를 확인을 득한 것을 팩스로 송부한 후, 가까스로 허가를 득하여 다음날 아침에 출항을 하였다.
이틀 후 본선이 동해항에 입항하여 하역한 후, 보세 장치장의 수조에 이동을 하여 검역을 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으나 폐사된 것이 많이 눈에 띄는 것이 걱정이 앞선다. 폐사된 가리비를 수조에서 수시로 제거하며 안정되기를 기다렸으나, 계속하여 폐사량이 증가하여 더 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고 한다. 조개의 경우 폐사를 하면서 뿜어나는 독이 이웃한 조개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제는 거의 전량 폐사 직전으로 상품성이 없어 판매가 불가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용선주로서는 이번 항차를 위하여 선박의 용선료, 가리비 구입대금, 항만 입, 출항비용, 유류비 등으로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였는데 이러한 결과가 초래되고 보니 이에 대한 책임이 선주에게 있다며 선주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그러나 용선 이후에는 선박운용에 대하여 모든 것이 용선주의 책임이지 선주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본인들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하여서든지 손해를 최소화해보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에 그저 송구스러울 뿐이다.
이후 상세한 원인을 검토한 결과 본선이 출항을 한 후, 해수의 유입 및 유출 밸브를 개방하면 자동적으로 외부 해수가 어창으로 유입되고 어창의 해수는 외부로 유출하게 되는데, 아마도 활 가리비를 담은 플라스틱 바구니가 서로 이웃하면서 일종의 벽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어창 내 해수의 흐름을 방해하여 해수가 유입되는 곳에서 멀리 위치한 조개의 경우 외부의 해수가 그곳까지 미치지 못하여, 산소 부족으로 인하여 폐사가 된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본선이 동해항에 입항 후에 다른 용선주를 찾지 못하여 체선이 장기화할 것으로 예상되고 또한 나름대로 경험도 축적된 것으로 판단하여 고문직도 그만 두기로 하였다. 선장으로부터 충무에서 돌돔의 치어 30만 마리를 선적하고 출항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항을 기원하는 전화를 한 후 잊고 지내던 어느 날, 트럭 섬에 입항하여 양식장에까지 이송이 무난히 끝났는가 싶었는데, 며칠 후 병이 발생되어 치어가 전부 죽는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선장이 하선하여 귀국을 하였다고 한다.
내가 사직을 하면서 회사에 선박을 알고 있는 직원이 없어 그만큼 자신의 업무가 과중하게 된 만큼 선장이 월급을 인상시켜달라고 요청을 하였는데 이것이 조금 정도를 지나친 처사로 비추어진데다, 이것을 빌미로 출항 전 치어를 선적하는데 협조를 제대로 하지 않아 선주가 화가 잔뜩 나 있었으며, 치어까지 죽고 보니 본선의 정상적인 운항도 어렵다고 생각하여 당분간 트럭 섬에 체선시키는 방안으로 결정을 하였으니 선장이 필요 없었으리라 본다.
시간이 지난 후 확인된 결과 수온이 높은 곳에 너무 많은 치어를 입실하였으며, 그물도 급히 제작한 관계로 미생물의 부착을 방지하는 방부처리를 하지 않았으며, 조류가 거의 없는 관계로 치어가 먹고 남은 사료가 해수 중에 흐르지 않고 그물에 부착되어 부패되므로 녹조류(파래)의 발생이 급속도로 진전되어 그물코를 막으므로 산소부족으로 인하여 폐사를 한 것이었다.
이것은 출항 전 돌돔의 권위자인 어느 대학교수의 소개로 초빙한 전문가가 현지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수온, 조류 속도, 조석간만의 차이 등)그간 국내에서 경험한 기술을 그대로 적용시켜 처리하므로 나타난 결과로서, 너무 허망하게 그간 키워왔던 모든 꿈과 희망을 버리고 사업을 정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선박도 매매하기로 결정하고 항만사용료가 저렴한 현지에 정박을 시켰으나, 이 경우 설사 구매자가 나타나더라도 현지에 가서 본선을 검선하기 어렵다고 판단되었는지 나에게 어려운 부탁이 있다며 본선을 국내로 회항시켜줄 수 없느냐고 요청을 하였다. 그간의 정황을 고려하면 전혀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그렇게 자랑하였던 현지의 사정을 눈으로 확인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또한 수산 관계의 일이라 현지의 상황을 보고나면 향후 사업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되어 수락하였다.
괌을 경유하여 현지에 도착하여, 회사에서 운영하고 있는 모텔에 머물면서 확인을 하니 예상보다 규모가 크며, 여기에서 사업을 중단한다고 하니 그간 투자된 시간이며 자본이 너무 아깝다. 무언가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방안이 찾아진다면 하는 아쉬움을 뒤로한 체, 본선에 승선하여 8일간을 항해하여 진해에 입항시킨 후 업무를 마감하였다.
이 후 본선은 중국에서 양식업을 하면서 한국에 활어를 수출하는 업자가 매입하였으며, 중국 선주의 요청으로 다시 한번 본선에 승선하여 중국의 광주까지 항해를 하게 되었다. 항해도중 선박의 제반과 어창의 해수 펌프 운용 방법 등을 직접 설명을 하거나 운전을 하여 보였다. 광동성에 위치한 광주항에 입항하기 위하여 진입하는 도중 항로 양 옆에 늘어서서 끝없이 펼쳐지는 양식장은 그 크기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입항하니 선주가 반갑게 맞으며 황천항해에 수고하였다며 출국 시까지 융숭하게 대접을 하여 주었다. 아침 식사 때에 식당에서 찜통위에 내어 놓는 다양한 만두가 퍽이나 이색적이었으며 맛도 좋았다.
**수산은 사장이 금융업계에 근무를 하던 중 “장 영자 금융사건”이 있었을 때 옷을 벗게 되었으며, 전혀 생소한 노량진 시장에 뛰어들어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여 수산물 유통업으로 성공한 후 남빙양의 메로 사업에 진출하였으며, 2척의 선박 중 1척이 노후화되어 이를 교체하기 위한 선박을 물색하여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일본에 의뢰를 하였다.
마침 적당한 선박이 있어 계약을 체결하고 선가를 송금한 후 인수선원들과 함께 일본의 오이타에 도착하여 선박을 인수받고 출항준비에 여념이 없는데, 항만안전관리국(PSC : Port Security Center) 직원이 본선에 승선하여 각종 서류를 검토하더니만 미비한 사항을 보완하지 않으면 출항을 시킬 수가 없다고 한다.
해상오염방지에 대한 보험, 해기사 자격증 및 각종 선박의 안전설비에 검사증 등 .... 사전에 일본의 중개업자로부터 전혀 언급이 없었던 사항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다. 최근 부쩍 강화된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전례에 비추어 안일하게 대처한 것이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대안이 없으므로 한국에서 검사관을 현지에 파견하여 제반 서류를 완비하고 안전설비를 갖추는 등 약3주간의 시간과 경비를 소요하고 출항을 하게 되었다.
이 후 출항 지연에 따라 발생된 경비에 대한 부담 및 출항의 지연에 따른 조업손실에 대한 배상청구 등으로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나에 대한 중개수수료를 지급하지 못하겠다고 버티었으나, 1개월이 지난 후에 지불되어 이것으로 남은 사채를 정리하고 또한 손상된 치아를 치료하게 되었다.
이 때 북한 사업을 할 때 동업자가 노량진수산물시장에서 사장까지 하고 은퇴한 친구와 중국으로부터 활 낙지를 수입하여 판매하는 것을 검토한다고 하여 극구 만류를 하였다. 이는 직접 판매를 할 수 있는 판매망이 있으면 문제가 없으나, 위탁판매를 할 경우 생물의 특성상 언젠가는 곤경에 처할 수 있는 점 때문이었다.
그는 동업을 하지 않았으나, 계속 사업을 검토한 그의 친구들 중 한사람이 중국에 거처를 정하고 생산에 직접 관여를 함으로서 본격적으로 사업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약간의 시행착오가 있는 듯 하였으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를 극복하고 손해를 만회한다고 하여 다행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언젠가부터 결재가 늦어지더니만, 한번은 선도에 문제가 있다고 하며 아예 대금의 지급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법정에 고발을 하여 대금을 회수한다고 하지만 이것 또한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 같고, 무엇보다도 수십 년간 쌓아온 친구들의 우정에 틈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첫 출근
2005년 11월 18일
재건축조합 사무실에서 조합장과 총무를 면담한 후 첫 출근이다.
며칠 전 내가 본사에 제출한 이력서와는 다르게 아파트 관리소장의 직책에 걸맞게 대폭 손질된 이력서를 지참하고, 사장과 함께 염창동에 위치한 **아파트의 조합사무실에 들려 조합장을 위시한 조합원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경험이 많고 또한 유능하여 이 아파트의 관리소장으로 추천하였다고 소개가 되었는데 오늘부터는 혼자서 무엇인가를 시작하여야 한다는 부담감에 긴장이 된다.
아직까지 한번도 아파트에서 생활을 해본 적이 없는데다, 더욱이 신축 아파트이므로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하여야 되는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어야 하는지 난감하다. 20일 전 본사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직원들과 인사를 나눈 후, 공동주택의 관리에 관한 법령 외 필요한 자료는 사본을 수취하여 몇 번은 읽은 적은 있으나 어떻게 적용하여야 되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두커니 책상에 앉아있을 수가 없어, 생각 끝에 우선 총괄적인 업무를 파악하기 위하여 아파트의 설계 도면부터 검토하기로 하였다.
아파트 관리를 하기 위하여 먼저 전체의 구조 및 설비 등을 파악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제법 신중하게 들여다보면서 필요한 사항을 나름대로 열심히 메모를 하는 모습이 그래도 경험 많은 소장으로 비추어지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조금은 위안이 되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 일일이 물어보면서 일을 할 수도 없어 답답하기 그지없다.
조합장으로부터 그간 재건축조합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의 과정을 브리핑 받은 후, 먼저 관리비예치금(선수관리비) 통장을 인수받았고 또한 첫 출근이라고 조합 임원들과 인사를 나눈 후, 중국집에 가서 요리에 소주까지 접대를 받고 보니 황송하기 그지없으나, 무엇보다도 무경험자로 들통이 나지 않도록 “침묵은 금”이라는 명제를 붙들고 가능하면 듣기만 하고 실수가 발생되지 않도록 말을 아끼면서 노심초사하는 마음에, 어떻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하루가 지났다.
다음 날 우선 경비원(2명) 및 미화원을 인선하고 업무를 개시하였다. 그간 본사에서 배부하여 준 “입주 준비사항”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읽어 거의 외우다시피 사항들이나 막상 현장에 적용하려니 낯 설기만하다. 업무에 도움을 받고자, 본사에서 관리하고 있는 아파트 중 이웃에 있고, 경험이 많은 ** 아파트의 관리소장을 찾아가 청소용품 구매처 및 품목과 용도, 정화조와 소방시설 등에 대하여 상세 설명을 듣고 이를 토대로 하나, 둘 정리해 나가기로 하였고, 사무용품도 팩스(전화 겸용)를 제외한 것은 가능한 이사할 때에 폐기하는 것 중 쓸만한 것으로 대체하여 경비를 줄이는 방향으로 하였다.
아파트 전체의 구조 및 장비와 각종 기계를 파악하는 데는 OY수산에서 신조선의 선장으로 발령을 받은 후, 매일 설계도를 보면서 본선의 건조부터 준공까지 모든 과정을 감독하였던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선박에 설치된 각종 기계의 운전과 출항 후 선원들에게 실시한 소화, 방수 훈련의 효과가 이곳 현장에서 나타나니 그래도 다행스럽다.
별도로 관리사무소가 없어 조합사무실 한편에서 업무를 시작하였다. 사무실은 지하주차장 입구에 위치하고 시공사의 사무실과 복도로 인접되어 있어 입주에 따르는 업무 및 하자보수 관계에 대한 협의가 편리하기는 하나, 특별한 하자가 아니면 차일피일 미루며 보수를 이행하지 않아 가끔씩은 입주자로부터 고성이 오가는가 하면, 아예 문을 잠그고 다른 사업장에 출근하기도 하여 방문객이나 입주자들로부터 불평이 대단하다.
이의 해결을 위하여 현관문의 열쇄를 관리사무소에 맡기게 하여 방문객이 사무실에 오면 신분을 확인 후 열쇄를 넘겨주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으며, 입주 전에 아파트 계약 잔금 및 관리비예치금의 납부를 확인하고, 입주자카드를 작성하고 건물 및 세대 하자를 파악하고 정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만 하다.
첫 달의 관리비는 관리비예치금에서 대체를 하였으며, 다음 달 관리비를 부과할 때에는 사용하는 전기의 계산의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한전에서 부과된 금액을 총 사용량으로 나누어 평균 단가를 구한 후 세대별 및 공용요금으로 구분하여 부과를 하였다. 얼마가 지난 후 전기요금 부과에 대하여 한전의 전기요금 계산서를 확인하여 보니, 부과된 금액은 잘못된 것으로 아파트의 경우 주택용 저압으로 하며 사용량에 따라 누진율을 적용하여 부과되는 것을 알고서는 실소를 금할 수밖에 없었다.
이 후 부과자료의 전산화를 통하여 이러한 실수가 재발되지 않게 되었으며, 이 때에 공용요금을 절약하기 위하여 주차장에 사용되는 형광등의 수량을 1/3로 줄였으며 현관 계단 및 출입구에는 자동 감지기를 설치하여 사용 시에만 전등이 켜지게 하였고, 계단 등은 야간에만 작동되도록 조절을 하였다.
이런 와중에 본격적으로 겨울에 접어들자 기온의 급강하로 인하여 수도관 및 보일러가 얼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입주되지 않는 세대는 모든 관내의 물을 빼내었다. 이와 결부하여 베란다에 사시가 되어있지 않는 세대가 인테리어 공사를 할 때에는 수돗물을 공급하여야 하는데, 이 경우 동파의 위험이 있으므로 공사를 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부득이 공사를 강행할 경우에는 동파가 되더라도 시공사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확인서를 작성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인테리어 공사 시 보일러를 운전할 수밖에 없었으며, 입주 전 장기간 운전 할 경우 도시가스 요금이 많이 부과되므로, 이를 시공사에서 부담하여야 한다고 불만들이 많았다.
상세한 것을 확인하고자 대형 아파트 시공사의 직원에게 문의를 하니, 보일러의 경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통상적으로 입주 전에 시운전을 하지 않으며 또한 입주 세대별로 사용량이 다르므로 이를 일괄적으로 처리를 할 수 없고 만약 입주 후에 보일러를 운전하여 문제가 있으면 하자로 처리를 하므로 도시가스 요금은 입주자가 부담하여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입주자들에게 설명을 하고 납득을 시키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많았다.
베란다 사시를 일괄적으로 주문하여 시공할 경우 수량이 많아 저렴한 가격에 시공을 할 수 있으므로 조합의 임원들이 직접 공장을 방문하고 또한 가격도 타 업체보다 저렴하게 하는 등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업자를 선정하고 계약을 하였으나, 약속한 날짜에 시공이 되지 않아 이사 일정을 변경하는가 하면, 주문한 유리의 두께대로 시공이 되지 않는 등으로 매일 조합사무실에서 고성이 오가며 싸우는가 싶더니만 우선 입주가 예정되어 있는 세대부터 시공을 하기로 합의를 하였는데도 잘 이행되지 않는다.
이 와중에도 조합의 임원(조합장, 총무, 감사)은 당초 납품 계약 시 조합원들보다 저렴하게 특별한 가격으로 결정하였는데도 이 가격을 낮추는데 여념이 없으며, 어떤 인테리어 업자는 보일러의 운전을 제대로 하지 않아 보일러 및 수도관이 얼어붙어 이를 녹이느라 수선스럽기 그지없다.
제반 업무가 계획대로 이행되는 것이 쉽지는 않겠으나, 업자를 선정할 때 회사의 신뢰성을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가격만 대비하여 결정 할 경우 이에 따르는 위험성도 더 크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사례가 아니었나 싶다.
재건축조합과 입주자대표회의
해를 넘기고 유난히도 추운 일요일, 교회에서 찬양연습을 하는데 핸드폰이 울린다(관리소장을 시작한 이후 24시간 꺼본 적이 없음). ***호에서 뒤 베란다에 물이 넘쳐흐르니 조치를 하여 달라는 것으로, 사안이 중대하여 연습을 중단하고 급히 현장에 도착하여 우선 원인부터 확인하였다.
아래층이 아직까지 입주가 되지 않아 오랫동안 비워져 있는 상태에서 연일 추위가 계속되다보니, 위층에서 사용한 오수가 아래층의 오수관을 통과할 때 찬 공기에 조금씩 얼어붙다가 어느 시점에서는 관 전체가 얼어붙어 상부 층에서 세탁을 한 허드레 물이 오수관을 통과할 수 없어 베란다에 넘쳐 나온 것으로 판단되었다.
우선 해당 동에 세탁기를 돌리지 않도록 방송을 한 후,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어붙이고 배수관 내부에 얼어있는 얼음을 제거하려고 배수관의 이음매 부분을 돌려보지만 얼어붙어 꿈적도 하지 않는다. 시공사의 담당자에게 연락을 취하였으나 거주지가 멀어 도착 시까지 무작정 기다릴 수없다고 판단되어, 아파트 가까운 곳에서 설비를 하는 기술자를 불러 우선 베란다의 물을 퍼낸 후, 오수관 이음매 부분을 열고서, 뜨거운 증기를 사용하여 얼음을 녹이니 정상적으로 물이 흐른다.
이 북새통에도 정작 당사자인 주인은 소파에 앉은 체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연신 피워대며 아파트를 잘못 만들었느니, 사후관리(After Service)가 좋지 않다는 등 타령만 하고 있다. 일본에서 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할 때 재일 교포를 만나 결혼을 하였다고 하며, 대화 도중 가끔 “아노”라는 일본말이 튀어나오곤 하여 “아노아줌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기르는 개를 자식같이 아끼고 사랑하여 이웃에서 개 이름을 부르지 않고 개새끼라고 하는 것을 듣고는 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욕을 하느냐고 입에 거품을 물고 싸움을 한 적도 있었다.
담당자가 도착하여 현장을 확인한 후 시공사는 전혀 책임이 없으며, 사전에 동파 조치를 취하지 않은 관리소장의 잘못이라고 일관되게 몰아붙이는가 하면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다가 돌아가고, 입주한 당사자와 조합장은 자기들과는 무관하게 발생된 일이므로 수리비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하여 결국은 내가 경비를 부담할 수밖에 없는 일이 발생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감기까지 들려 고생만 하였다.
어느 날 조합사무실로 7~8명의 부녀자들이 몰려 들어와 연세가 80세인 조합장에게 삿대질을 하며 입에 담지 못할 소리를 하며 달려들며, 층별 분담금을 해결하라고 악다구니를 쓰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으나 내가 나설 자리도 아니고 하여 끝나기를 기다려 물어보니, 조합원들이 입주할 호수를 제비뽑기 전에 저층의 경우 고층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산가치가 떨어지므로 이를 보전시켜 주기위한 방안으로, 저층에 당첨이 된 세대에 대하여 고층에 당첨된 세대가 일정액을 층별로 차등을 하여 지불하기로 총회에서 결정을 하였는데 아직까지 납부를 하지 않았고, 일부 조합원은 지불을 아예 거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연립주택을 재건축하기 위하여 조합을 결성하였으나 조합원들의 갈등으로 인하여 추진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10여년 이상을 싸운 결과 의견이 다른 조합원 간에 쌓인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는데다, 어떤 조합원은 서로 법정에 고발하여 아직까지 재판을 진행 중인 것도 있다고 하니, 향후 처리가 순탄하지 않을 것 같아 이를 바라보는 심정이 착잡하다.
전임 조합장과 임원들이 재건축을 하기 위하여 조합원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시공사를 우선 선정하고, 이를 추진하기 위하여 시공사에게 조합의 결성을 반대하는 4채를 매입토록 하고 또한 사후 조합원들의 동의를 구하기 위하여 설계도면을 설계사에 의뢰하였다.
그러나 이를 반대한 조합원들이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임원들과 협의된 시공사와 수의계약을 인정할 수 없으므로 입찰로 시공사를 결정하기로 하여, 입찰로 시공사를 변경(당초 시공사는 건축비용으로 2,000~3,000만원/세대를 요청하였으나, 입찰로 결정된 시공사는 건축비용의 추가부담이 없을 뿐만 아니고 500만원/세대를 이사비용으로 지원을 한다하여 낙찰됨)하는 과정에서 다시 새로운 조합장과 임원이 선출되었으며, 이에 따라 전임 임원들로부터 설계를 위임받은 설계회사로부터 손해배상 청구가 있었으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데, 설계회사는 기다리다 못해 등기 이전되지 않는 세대를 무작위로 선택하여 가처분을 하였으나 이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소유권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법무사가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이전을 하였으며, 은행에서도 담보대출을 할 때도 이것이 확인되지 않았는데, 한참이 지난 후 입주세대가 등기부등본에서 발견하고 동 사실을 조합장에게 통보하여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였으나 제대로 후속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아 만약에 발생할 수 있는 본인의 손해를 막기 위하여 본인이 분양받은 집에 가처분되어 있는 금액을 그때까지 분양되지 않은 세대에 가처분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분양받은 당사자가 은행에서 대출을 하여 잔금을 치르려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확인이 되었으며, 이 건이 해결되기 전에는 입주를 할 수가 없어 시공사 및 조합장에게 수차에 걸쳐 요구하였다.
얼마동안 서로 책임 공방이 있었으나, 시공사의 설계사무소에서 절반, 나머지는 조합장 및 법무사(가처분이 된 것을 확인하지 않고 등기를 한 과실 책임)가 부담하기로 하고 해결을 하였다.
2/3이상 입주를 하여 입주자대표회의 구성을 위한 공고를 하였다. 그러나 참여 인원이 적어 수차에 걸쳐 모임을 가지고 먼저 라인대표를 선출하였고, 다시 라인대표들이 모여 회장을 선출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입주자 대표회의는 조합원 3인, 일반 입주자 3인으로 구성되어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반장을 2사람 선임(통장의 요청에 의하여 라인대표 중 2인을 선출함)하여 통장에게 통보를 하였다.
그러나 구성원 중 조합원 측 라인대표 3사람(감사는 전임 총무)은 현 조합의 임원들을 반대하는 사람으로 구성이 되어, 그간 사사건건 조합의 의견에 트집을 잡고 조합장이 거의 아버지 또래인데도 아예 모든 것을 무시하고 삿대질을 하며 달려들던 사람들이라 향후 많은 어려움을 예상하였다.
이후 이 조합원들이 입주자 대표회의 회장에게 조합장 및 임원들에 대하여 얼마나 좋지 않는 이야기를 많이 하였는지 조합의 이야기만 나오면 회장은 얼굴에 핏대를 세우며 나쁜 사람들이라며 몰아세우는가 싶더니, 임원들의 첫 모임에서 관리소장의 해임을 결정하고 회장이 본사에 본인의 거취에 대하여 언급을 하였다.
조합원이 라인대표가 된 이후로 그간 재건축의 과정을 모두 알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단점에 대하여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나를 대하기가 어려워 아마도 교체를 건의하였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명목상은 “관리소장이 조합과 너무 친하여 중간에서 처신하기 어려운 것 같고, 대표회의가 구성되었는데도 아직까지 아파트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른다”는 것으로, 무척이나 황당하여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었으나 여기까지 오는 과정을 생각하며 당분간 입장표명은 보류키로 하였다.
아파트 통합과 주민갈등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으로부터 현재 근무 중인 경비원 중 1명이 조합원이고 임원이므로 자격이 없으므로 해임시키라는 통보가 있어 다른 아파트로 이동 근무를 시키고, 후임자를 인선하였다. 관리규약도 고치고 또한 현재 아파트 옆에 건설 중인 18세대의 통합을 위한 준비 등으로 제법 바빠진 상황에 더하여 사임 압력으로 심신이 피곤하나 그렇다고 잘못한 것도 없이 여기에서 물러설 수 없다고 판단되어 본사에 제반을 보고한 후, 일단 회장에게 전화로 사과를 하고 향후에는 입주자대표회의 만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다고 천명하니, 며칠 후 다음 대표회의에 참석하여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입주자대표회의에 참석하여 유감을 표명하였으며, 대표자회의가 구성된 후 조합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관리사무소를 사무실 용도가 아니고 지하에 위치한 MDF실(Main Distributing Frame : 주 배전반실)로 이전하였으나, 그간 약 3개월간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한 정을 일시에 끊고 돌아서라는 것은 사실상 불가하며 향후 조합과도 협조할 사항이 있으므로 관계유지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또한 반장 선임 건도 통장의 요청에 의하여 협조한 사항이었으며, 단지 문제가 된 것은 사전에 통장이나 나와 상의를 하지 않고 조합의 총무가 임의적으로 인선한 후, 개별적으로 통장에게 통보하여 발생된 것이다. 또한 반장은 정부의 행정조직에 관한 사항으로 본인이 개입할 사안도 아니며, 단지 통장에게 협조한 것을 빌미로 대표회의를 무시한다는 언급을 한 것은 본인도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고 신상발언을 한 후 회의장에서 빠져 나왔다. 어떻게 협의가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다음 날 회장으로부터 그간의 모든 일은 잊어버리고 남은 계약기간 동안 잘 해 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다시 힘을 얻어 그간 미루어왔던 계단청소를 시작하였다. 입주 전 시공사에서 청소를 하였으나 그간 내부 인테리어 공사며 이삿짐 등으로 인하여 쌓인 먼지에 외부에서 주문하여 먹은 후 밖에 내놓은 그릇에서 흘린 국물 등으로 인하여 지저분해진 계단과 엘리베이터 입구, 현관을 미화원, 경비원과 함께 3일간 닦고, 문지르다 보니 온몸이 피곤한데도 깨끗하여진 계단을 보고 수고하였다는 입주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래도 위안이 된다.
부족한 인원으로 인하여 관리소장까지 나서서 청소를 하는 것을 보며 모처럼 회장으로부터 모두 수고를 하여 고맙다는 이야기에 더하여 식사라도 함께하라는 전화를 받으니 한결 가벼워진 마음이다. 문득 어느 날 아침 미화원이 조금 흥분한 얼굴로 관리사무소를 찾아 와서 어느 분이 청소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하자, 아마도 무슨 변명을 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났었던지 “월급은 누가 주는데 청소하는 주제에....” 라고 이야기를 들었다고 이럴 수가 있느냐는 자조 섞인 이야기가 떠오른다. 앞으로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으면 바람을 기대하면서...
관리비부과에 따른 제반업무에 더하여 경리부분도 기업회계에 준하는 사항들을 필요로 하는 관계로 전산회사에 요청을 한 결과 추가비용을 지불하여야 한다고 하여, 전산 관리회사를 변경하고 본격적인 전산화에 따른 회계업무를 시작하였다. 대표회의 회의시마다 토의 안건에 부과하여 회계보고를 하고, 경비절감을 위하여 조금 번거롭기는 하지만 전기요금을 단일요금제로 하였으며(종합계약의 경우 세대별 사용량을 한전에 통보하면 한전에서 직접 고지서를 발급하나 부과기준이 저압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많이 사용하는 세대는 2~3만 원 이상/월, 많이 부과되나, 단일계약의 경우에는 부과기준이 고압으로 하여 계산되므로 많이 사용하는 세대는 그만큼 적게 부담하며, 관리비 고지서에 부과됨), 그간 경비절감을 위하여 취하였던 조치의 절감효과가 수치적으로 나타나니, 이 후에는 특별한 간섭이 없이 평온한 날이 지속되었다.
아파트 바로 옆에 동일 시공사에서 공사 중인 18세대의 아파트 조합장이 연립주택 수준에서 벗어나 자산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우리 아파트와의 통합을 추진하였으며, 이것 또한 우리 아파트도 100세대를 초과하면 역시 가치가 상승할 수 있다는 생각과 관리비를 절감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어,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한 후 대표회의에서 통과를 하여 공동관리(201동, 202동으로 칭함)를 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그간 경비실로 사용하던 곳으로 관리사무소를 이전하였으며 경비실은 202동에서 전액 지원으로 만들어 아파트 입구에 설치한 컨테이너로 사무실로 이전을 한 후 2개아파트의 통합과 사무실 이전 등을 축하하기 위하여, 떡과 과일을 준비하여 입주자들을 초대하였다.
그러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세대(특히 조합의 임원)는 참석을 하지 않았으며, 지나치면서도 아예 외면을 하고 만다. 어디서나 반대는 있기 마련이지만 게시판 및 아파트 홈페이지에 분명히 “202동(이웃 동)에서 경비실을 제공하고 각종 기계설비 이전에 따르는 경비는 절반씩 부담한다”고 되어있으나, 이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몇몇 사람은 주민들의 전체 동의를 구하지 않고 회장이 멋대로 소요경비를 지급하였다, 젊은이가 회장이 되더니만 어른도 모르고 인사도 하지 않는다, 너무 건방지다.... 등등으로 직접 당사자들에게서는 하지 않고, 나만 만나면 불만을 토로하다가 그것도 부족한지 가끔은 사무소까지 찾아와 큰소리를 치기도 한다.
어느 날 202동에서 201동과 경계된 담장을 허무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공사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으나 별도로 공고를 하지 않고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일명 아노아주머니가 입에 거품을 물고, 누가 공사를 지시하였으며 왜 방송을 하지 않았는지에 대하여 항의를 하는가 싶더니, 혼자서는 역부족으로 여겼는지 몇몇 세대의 아주머니 부대를 동원하여 202동에 가서는 공사를 중지 시켰다.
그날 저녁 몇몇 주부들이 어린이 놀이터 옆 공원에 모여 202동과 연결통로를 주민들의 의사를 들어보지도 않고 만드는데 대하여 울분을 토하는가 싶더니 마지막으로는 회장 및 대표회의를 성토한다. 장시간 논의 끝에 부녀회를 만들어 대표회의에 대항하기로 결정하고 다음날 부녀회 결성에 관하여 공고토록 요청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강서구청의 주택과에 찾아가 허물어진 담이 원상복귀 되도록 진정을 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통로의 연결을 반대 서명을 시작하더니 60여 세대의 동의를 득하여 구청의 건축과에 진정을 하였다. 구청 담당자가 현장을 확인하러 와서 사전에 주민들의 2/3이상 동의가 없이 진행이 되었고, 원만한 합의에 의하여 추진이 되지 않으면 법적으로 위반이므로 행정처분을 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민원으로 접수될 경우에는 구청장에게 처리 결과까지 보고를 하여야 하므로 보다 원만한 처리를 하기 위하여 진정 건으로 처리하였다는 부연 설명이 있었다.
드디어 부녀회가 구성되자 처음으로 관리사무소에 요청한 내용은 1.파지를 정리하여 판매하는 것과 광고비의 수익을 부녀회에 입금 시킬 것 2. 상인들이 아파트 내에서 장사를 할 때 협조를 하여 줄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부녀회의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원칙적으로 동의를 하며, 이 후에는 경비원이나 미화원들이 근무시간 중 재활용 및 파지의 분리를 하지 않고 본업에만 충실하도록 하였으면 좋겠다는 것과 수익사업에 대한 자금집행은 대표회의의 결정에 따르므로 본인이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고 하니,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을 그만두도록 끝까지 투쟁할 것이니 관리소장도 어느 편을 따를 것인지 결정하라고 압력을 넣는다.
이후 부녀회장이 입주자대표회의 회장과 만나 협의한 결과 연결 통로 건에 대하여는 우선 공사를 중단하기로 하되 부녀회장은 반대서명을 받은 명단을 넘겨주기로 하고, 광고비 외 수익 건에 대하여는 부녀회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를 검토를 하겠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명단을 넘겨주기로 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임시대표회의를 소집하여 아예 부녀회를 인정하지 않기로 하고, 통로 건에 대하여는 분양자들에게 별도의 의견을 수렴하기로 결정하여 202동과의 통합취지 및 통로개설의 당위성 등에 대하여 안내문과 의견서를 작성하여 분양자에게 보내고 회장 및 임원들이 입주세대를 설득시키는 방향으로 하였으나 찬성이 2/3를 넘지 않아 더 이상 공사를 강행하지 못하였다.
202동에서는 당초 통합 시 통로를 내어주기로 한 합의사항이 지켜지지 않는다고 조합장에게 항의와 더불어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는 내용증명서를 보냈는가 하면, 조합장은 당초 통합 시 합의내용 및 대표회의에서 조속히 추진하기로 확답을 받아 계약을 하고 통로가 제작되어 있으나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이 주민의 동의를 얻는데 실패하여 지연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하고, 회장은 법적인 사항에 대하여는 조합장이 사전에 문제점이 없는지 확인하여 추진키로 하였는데 이를 간과하고 진행을 하였다고 불평이다.
이는 본 건의 추진을 하기 위하여 입주자 대표회의를 소집하였을 때, 나도 참석하여 주민들의 자산에 관계된 부분이므로 사전에 주민들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였으나 참석한 회장 및 임원들은 입주자들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고, 관리비 절감과 경비실 확보가 되며 무엇보다도 통합하면 100세대 이상 되므로 당연히 자산의 가치가 높아지는데 누가 반대하겠느냐며, 주민의 동의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화기애애하게 결론을 내리고 진행을 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그간 입주자대표회의 구성원에 대하여 내재된 불만이 폭발하여 아파트 주민 간에 불화를 조성하게 되었고, 대표회의 위상에 상처를 입었고, 202동에서는 통합을 위하여 필요한 경비를 각출하고 원만하게 진행된 이후에 기대되는 자산가치의 상승의 꿈이 무너지게 되었다.
어느 날 202동에서 세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여 확인한 결과, 전신주의 변압기가 소손된 것 같아 한전에 연락을 취하여 변압기를 교환하여 복구를 하였는데도 수돗물이 공급되지 않아 확인하니, 지하에 설치된 급수용 부스터 펌프가 작동되지 않는다. 시공사에 에이에스(After Service)를 신청하였더니 기술자가 현장을 확인한 후, 순간적으로 과전류가 흐르면서 제어판의 제반 기기를 소손시킨 것으로 무상으로는 수리를 할 수 없다고 한다.
사안이 중요하고 복구가 화급한 관계로 우선 자체 경비로 수리를 하기로 하고 추후 한국 전력공사에 청구를 하기로 하였으며, 다음날 아침에야 정상적으로 복구가 되었다. 이 후 한국 전력공사에 사고보고서와 함께 비용을 청구를 하였으나, 아파트 자체에서 순간적으로 과도한 전기를 사용한데서 발생된 사고이므로 지불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아파트와 비교하여 제반 시설이 완비되지 않아 시공사 및 조합장에게 불만이 있던 것이 한꺼번에 분출되어 연일 회의와 성토다. 18세대이지만 명색이 아파트인데 비상 발전기가 없어 단전될 시 엘리베이터의 사용도 되지 않고 또한 방송시설이 되어있지 않아 비상시에도 이를 주민에게 알릴 방법이 없고, 컴퓨터용 초고속 케이블도 연결이 되지 않고 등등....
건축법상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 건설된 것으로 5층 이상이면 아파트라 칭하나, 20세대 미만이므로 적용되는 기준이 일반적인 아파트와는 상이한데도, 이런 관계법규를 잘 알지 못하여 타 아파트와 동일하게 건축될 것으로 생각한 것이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마음은 이해가 되나 이를 주민들에게 설득시키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다.
그간 아파트의 건물 및 세대의 하자를 해결하기 위하여 시공사에 6차례에 걸쳐 내용증명을 송부하고 또한 주무부서인 강서구청과 보증보험증권을 발행한 대한주택보증보험을 통하여 압력을 행사한 결과, 하자보수에 대하여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오가게 되었으며 담당자가 전 세대를 방문하여 하자개소를 확인하고 목록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공사에서 자발적으로 이행하였다기보다는 분양을 받고 입주를 확정한 세대에 가처분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시공사를 분양사기로 고발하겠다는 것과 일반분양자들의 토지분에 대하여 전 시공사(재건축을 시공하기 위하여 4세대를 구매한 회사)가 저당권을 행사하였던 것을 구청 건축과에서는 알고 있으면서도 준공을 허락한 사실이 알려져, 이의 해결을 위하여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강서구청 건축과에 항의를 한 결과, 결국은 외부압력에 의하여 무릎을 꿇게 된 것으로 보아지며 이런 하자보수 문제 때문에도 중, 소 업체보다는 보다 성실하게 이를 이행하는 대형업체의 아파트 가격이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판단된다.
어느덧 근무를 한지 10개월째에 접어들면서 조금 한가한가 싶었는데 본사로부터 상가빌딩의 관리에 대하여 이야기가 있었으며, 현 아파트의 재계약이 가능하다면 급여가 좋으니 옮기는 것도 검토해보라는 권유가 있어 장시간 숙고한 끝에 다시 도전을 하기로 하고 계약기간이 남았으나 대표회의 회장에게 의사를 타진하였다.
이는 202동과 통합 시 경비원이나 미화원들의 업무가 많아 이에 대한 처우개선을 요구하였을 때, 임금을 동결하는 대신에 명절에 특별히 생각하여 주겠으며, 무엇보다도 재계약시 최우선적으로 선정을 하겠다는 약속도 있어 협조를 요청하였던 것인데, 첫마디가 소장이 그만두면 관리회사를 바꾸겠다는 것과 먼저 사의를 표명한데 따라 자신의 운신이 자유스러워 졌다는 논리로 비약되었다.
개인도 중요하지만 현재에 이르기까지 본사의 배려가 많았고 내 개인의 거취문제 때문에 회사에 누를 끼칠 수 없다고 판단되어 근무처의 이동을 재고하고 계속 근무를 하겠다고 요청하였으나, 회장은 이미 본인이 잘 알고 있는 다른 용역업체와 계약을 마치고 인계, 인수 준비를 하고 있어서 번복이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아파트의 관리업체가 변경된데 따른 인수, 인계 서류를 준비를 하는 중에 그간 미분양으로 비워 있었던 세대(아파트를 시공하기 전에 동 아파트의 재건축을 하기 위하여 4세대를 구매한 시공사 소유 세대)가 계약이 되었는지 부동산 업자가 드나드는가 싶더니, 어느 날 입주예정자가 내부 수리를 위하여 인테리어 업자가 방문하겠으니 협조를 부탁한다는 요청이 있어, 이것을 시공사에 확인한 결과 “원칙적으로는 현관문의 키를 넘겨줄 수 없으나, 수리를 위한 것이므로 문제가 없다”고 하여 동 건을 조합장에게도 통보를 하였다.
상기 건은 전 조합의 임원들이 상기 4세대의 소유자가 재건축을 반대하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끌어드린 회사로, 4세대를 시가보다 고가로 매입하게 하고 이것을 빌미로 시공사로 지정하였으나 조합원들의 반대로 결국은 아파트를 시공하지 못하게 되자, 이에 대한 손해배상을 후임 조합장 및 임원들에게 청구(17억원)하여 재판에 계류 중에 있었다.
조합에서도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4세대의 토지에 가처분을 한 것으로, 아무래도 입주 시 문제가 발생되리라 예상되어 계약자에게 “등기를 확인하여 보았느냐”고 문의를 하였던 것으로, 처음에는 이해를 못하였으나 나중에 등기부를 떼어보니 토지에 가처분이 된 것이 확인되었다.
이미 계약금은 지불하였고, 인테리어 공사를 마쳤으며, 살던 집도 다른 사람에게 계약이 된 상태라 만약 원만하게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물질적인 손해가 너무 많이 예상되어 발을 동동 구르며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무척 안타깝기 그지없다. 부동산 중개업자도 내막을 알고서 중개를 하였음에도 막상 일이 크게 확대되고 보니 해결책을 내 놓지 못한다.
이의 해결을 위하여 입주예정자들이 조합장 및 은행 그리고 시공사를 찾아 방안을 모색하였으나 뚜렷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근저당 설정된 것이 해결되지 않아 중도금을 지불하지 못하겠다며, 처음부터 이러한 사실을 계약자에게 통보하지 않는 것은 사기행위로 계약위반이라는 등등으로 여기저기 자문을 구하였으나 뾰쪽한 대안을 찾지 못하였다.
이사 날짜가 임박하자 입주는 하지 않더라도 먼저 살던 집에서 가구는 옮겨야 하므로 부득이 이삿짐을 꾸려 아파트에 도착하니, 이것을 회사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소유주의 허가 없이 입주할 시 불법 가택침입으로 고발하겠다는 으름장이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데 다시 법적인 문제가 발생시에는 더욱 실마디가 꼬여들 것 같아 경비가 추가되더라도 감수하기로 하고, 다시 이삿짐을 이삿짐센터에 맡기고 추이를 지켜보자는 것으로 하였다.
이 후 어떻게 협의가 되었는지 계약자의 입주가 허락되고 이삿짐이 도착하니 이번에는 시공사에서 나에게 “현관문 열쇄를 넘기면 안 된다”고 한다. 소유 회사에서는 사장까지 아파트에 나와 토지는 가처분이 되어있으나, 건물은 문제가 없으며 소유자가 입주하겠다는데 방해하면 이에 따르는 문제는 시공사 및 소장이 책임을 지라고 아우성이다.
이를 시공사에 통보하고 회신을 기다렸으나 감감 무소식이다. 언제까지 기다릴 수가 없으므로 실질적으로 법적으로는 하자가 없다는 판단 하에 관리비예치금을 수령하고, 만약 문제가 발생시에는 나에게는 책임이 없도록 하기 위한 방안으로 “관리소장이 열쇄를 넘겨주지 않아 부득이 회사에서 현관문의 열쇄뭉치를 파괴하고 들어갔다”는 조건으로 열쇄를 넘겨주었다.
마지막 출근 시까지 상기 건이 원만하게 해결이 되지 않았으나, 그간 입주자들을 만나면 “중도금을 지불하기 전에 알려주어 손해를 줄일 수 있었다고 고마워하며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추석을 지나고 그만 둘 때까지 한 사람도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는 것을 보니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는 다른가 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어렵게 마련한 집이 자기 의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외부의 여건에 의하여 매우 힘들어지는 제반 여건을 보며, 보다 철저한 사전 준비의 필요성도 있겠으나 기업의 사회에 대한 책임과 무도덕한 의식에 더욱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금년 봄 춘천에서 수산물가공을 하는 친구로부터 몇 가지 제품을 선보이며, 판매를 부탁하여 이를 아내가 교인들과 이웃한 친지들에게 보여주었더니 호응이 나쁘지 않고, 수익도 괜찮을 것 같아 본격적인 판매를 검토한 결과, 집에 가깝고 또한 아파트(500여 세대) 입구에 위치한 곳에 냉동 수산물과 젓갈 그리고 건강보조식품을 판매하는 가게를 시작하였고, 수산물 관계는 아내가 생소하므로 품질이 좋고 저렴한 구매를 위하여 부산의 업자나 강동시장, 노량진 시장의 지인들을 만나 협조를 요청하거나 새벽이면 직접 찾아 구매하기도 하였으며 퇴근하면 곧 바로 가게로 출근하여 임무를 교대하는 소위 “투 잡스(Two Jobs)”를 시작하였다.
적은 금액도 좋으니 수입이 일정하고 안정적인 직장으로 아파트 관리소장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주위의 권유가 있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어느 날 신축중인 아파트에서 야간 당직을 약2개월 경험한 후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접고 택한 관리소장....
무엇보다도 30여년 이상을 종사한 업종에서 전혀 다른 업종으로 전환하면서 받고 있는 스트레스를 떨쳐버리고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입주자나 대표회의의 임원들로부터 자존심이 상하거나, 마음에 상처받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아직까지 아련하게 떠오르는 옛 꿈의 향수를 가족의 염원 속에 파묻고, 마음을 다스린 지 벌써 1년여...
참으로 많이 변하여 있는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곤 한다. 원양어선 선장으로 3대양을 누비던 기질이며, 입사할 때 18척의 원양어선을 58척까지 증선 되기까지의 과정과 스페인의 라스팔마스에서 근무 중 기업 환경이 너무나 상이하여 뜻이 관철되지 않은 때도 많은 고민은 하였으나 그래도 과감하게 사표를 제출하고 다른 사업을 구상하였던 그런 자신만만하던 자신감은 대북사업의 실패를 통하여 무참하게 깨뜨려졌고, 그간 나를 지탱하던 자존심마저 접게 하였으며, 지인들의 각종 경조사까지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경제적, 정신적으로 시달리면서 이렇게 변화된 삶으로 나타나는가 보다.
사채는 정리가 되었으나 금융권의 부채(약5,000만원)는 이자까지 눈 덩이처럼 더하여 언제까지 이 상태로 방치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가족들까지 정신적으로 시달림을 받는 것이 좋지 않아, 언젠가는 상담을 한번 해보려니 하였으나 아직까지는 남의 일어거니 하고 무심코 보아 넘겼던 개인회생에 관하여 상담을 하고자 인터넷에서 법률사무소를 찾아 문의를 하였다.
절차는 차이가 있으나 결과는 같으며 개인회생을 할 경우 5년간을 상환하고 나면 나이도 60을 훌쩍 넘기게 되어 노후에 대한 대책이 없으므로 개인회생보다는 파산 및 면책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여 그대로 수용을 하였으나, 마음 한 구석에는 내 자신에 대하여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빚 독촉에 시달리는 가족을 대하는 민망함에서 벗어나고, 이것을 계기로 내 자신이 다시 한번 재도약을 하기 위하여 취한 부득이한 방안이었다고 자위하기로 하고 제반 서류를 준비하여 송부한 후 수수료를 송금하고 귀추를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빌딩 관리소장 두 손 들다
아파트의 인계를 끝내고 남부지방법원 정문 앞에 위치한 ***빌딩에 첫 출근을 하였는데, 인수서류도 없이 달랑 관리비통장만 내미는 것을 보니 어안이 없다. 그러나 같은 회사에서 관리하는 곳이니만큼 무어라 불만을 표출한들 치부만 들어나리라 생각되어 간단히 일상에 관한 것을 인수 후 관리단에 들려 인사를 하고 업무에 들어갔다.
관리단의 지시에 의하여 전임소장이 관리단 회의를 보름 후(11/15)에 소집한다는 우편물을 발송하였는데, 가장 중요한 협의 안건은 그간 무료로 주차장을 이용하였으나 최근 사용 차량의 증가로 외부 방문차량은 물론이고, 입주한 회사들의 차량까지도 더 이상 주차가 불가하여 자주 마찰이 발생되고 있어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유료화를 시키는 것이었으나 이러한 사례가 거의 없어 고심을 하였다.
당초 주차장의 대수를 산정할 때의 기준을 검토한 결과 분양면적을 기준하여 산정되었으므로 이를 근거로 분양면적과 비례하여 입주회사에 해당되는 주차대수를 산정하기로 하였다.
이를 관리단 회의에 보고를 한 결과 (1) 해당주차대수는 무료로 하되 과, 부족분에 대하여는 관리비에서 정산 (2) 추가 주차 \60,000/월/대를 부과 (3)외부차량의 주차비는 \1,000/30분으로 한다. (4)입주한 회사에서 주차권을 구매할 경우 \500/시간으로 하기로 한다. (5)해당 주차면적을 사용하지 않는 부분은 관리비에서 차감하기로 한다. (6)엘리베이터를 홀, 짝수 층으로 구분하여 12/1일부터 시행하기로 하였다. 이는 모든 이용자가 양쪽의 엘리베이터의 스위치를 누른 후 먼저 도착하는 것을 사용하기 때문에, 한 대는 쓸데없이 정지한 후 문이 열리고 닫히고 출발하므로 비효율적이고 또한 에너지 절감의 차원에서 검토한 사안이었다.
아마도 사용하지 않는 면적에 대하여 관리비에서 차감을 하는 방안은 국내에서는 아마 처음 시도한 것이 아닌가 싶고, 이는 법을 다루는 분들이 대다수이므로 형평성에 맞지 않을 경우 이에 대한 불만을 예상하여 이의 세부 작업을 한 후 통보를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항의가 빗발을 쳤으며 인내를 가지고 상세하게 정황을 설명하여 양해를 구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하자 정상을 찾기 시작하였으며, 1개월 후 관리비 부과 시에는 거의 거부감이 없이 수용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이미 인계가 끝난 업무이기는 하나, 내가 근무하였던 아파트의 후임 관리소장으로부터 거의 매일 회계 관계를 비롯한 제반에 대하여 문의전화가 있었다. 관리소장이 무슨 잘못이 있느냐는 생각과 하루 빨리 정상을 찾아 관계인들로부터 시달림을 덜 받게 하기 위하여, 관리비부과 전에 아파트를 방문하여 세부적인 사항에 대하여 설명을 하였더니 이후로는 잠잠한 것이 정상적으로 잘 운영이 되고 있는가 보다.
그러나 엘리베이터의 홀, 짝수 운영에 대하여 재산권 침해니,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니, 당장 해제하지 않으면 관리비를 납부하지 않겠다며, 처음부터 완강하게 반대하던 법무사가 소재한 층에 공교롭게도 도둑이 들었다. 큰 피해는 아니지만 파손된 부위를 복귀하여주고, 여러 차례에 걸쳐 잘못되었다는 사과를 하였으나 “홀, 짝수 운행을 반대한 후 발생되었다는 것은 무언가 석연치 않다”고 의심의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어느 날은 나를 사무실로 불러 “시정이 되지 않으면 관리비 납부를 거부하겠다”하여, 관리소장을 그만 두라고 한다.
관리소장은 단지 관리단의 운영 방침에 따라 빌딩을 관리할 따름이니 직접 관리단에 가서 항의를 하라고 그간 수차에 걸쳐 설명을 하였는데도 틈만 나면 못살게 구는 것 같아 매우 불쾌하여 상기된 얼굴로 사무실로 내려오니, 마침 기관실과 설비 담당 기사가 있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하여 사실을 이야기를 하였더니 나보다 더 흥분한다.
기관실 담당기사가 동 건을 경비원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그 옆을 지나가던 법무사의 부인이 듣고 익일 관리단의 총무를 찾아가 항의를 하고, 이 사실을 확인하고자 관리사무소에 총무와 함께 들렸다. 이유야 어떻게 되었든 간에 문제가 일어난데 대하여 먼저 책임자로서 잘못된 것을 사과하고, 당사자를 불러 사실을 규명하여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을 하였으며, 더불어 부임 후 그간 약 2개월간에 걸친 업무상 진행과정을 상세히 설명을 하고, 관리단에서 결정하여 진행되고 있는 사항을 관리소장이 한 것처럼 오해를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이해와 협조를 구한 결과 수긍을 하고 돌아갔다.
다음날 시말서를 받고(내용에 욕을 한 것을 삽입하기도 어려워 그냥 발생한 사건이라 표기함), 이를 관리단에 보고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는가 싶었는데, 부인이 관리사무소에 찾아와 욕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하여 상호 대면을 시켜주었다. 예로부터 상감에게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욕을 했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나쁜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닌데 잘못들은 것 같다고 결론이 났다.
경비원과 이야기 하면서 “우리가 돈이 없어 이런 곳에서 일을 하다보니 참으로 황당한 일을 당한다. 이런 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 놈이 잘못이다” 라고 하는 등 여러가지 불만 섞인 내용 중 “놈” 자가 들어간 것이 크게 부각되어 들렸던 것으로, 이 일이 있기 전에도 두, 세 차례 경비원과 주차원들에게 고압적으로 위세를 부리다가 모욕을 당했을 때에는 그냥 넘어가더니만, 이번에는 시말서에 사과까지 하라도 하니 이럴 수가 있느냐는 항의도 하였다고 한다. 꽤나 순발력 있는 답변이었다고 보아진다. 아무래도 심한 욕을 한 것은 같은데 증거가 없으니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는가 보다.
우여곡절 끝에 조용한가 싶었는데, 관리비 납부내역을 확인하여 보니 지난달 것은 아예 납부하지 않았고, 당월 분은 어떻게 계산하였는지 모르겠으나 관리소장의 월급을 계산하여 공제 후 납부(9,000원 공제)하였다고 한다. 어처구니가 없으나 딱히 대처할 방안도 없어 언젠가는 해결되리라 믿고 기다리기로 하였다.
기온이 떨어지자 난방기를 가동시킨 후 각 방의 온도가 점검하여보니 너무 높은 것 같아 이를 조절하고자 컴퓨터로 설정온도를 낮추었는데도 실내 온도가 떨어지지 않으며 어떤 사무실은 창문을 열어 놓기까지 한다. 며칠간 컴퓨터와 씨름을 하였으나 조절이 되지 않아 시공사에 연락하여 점검한 결과, 처음 시공 시부터 측관(By-Pass)이 열린 상태로 운전이 되었던 것으로(닫혀있는 상태로 운전을 하여야 함), 온수가 온도를 제어하는 관을 통과하면 저항이 발생하므로, 항상 열려있어 저항이 없는 측관을 바로 통과함으로서 온도가 제어되지 않고 뜨거운 물이 그대로 라디에이터에 공급되므로 더울 수밖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 이를 수리하여 운전하였다.
이후로는 설정된 온도대로 작동이 되어 쾌적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가스사용료가 약 30퍼센트 가량 절약(약250만원/월)이 되는데도, 가끔 “찬바람이 나는 것은 관리소장이 잘못 운전하는 것”으로 문제가 있다고 순찰 중인 기사들을 붙잡고 이야기를 하곤 하므로 이후로는 아예 접근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
며칠간 이것저것 트집 잡아 관리소장을 비난하는 것을 보다 못한 아주머니께서 “다른 사람들은 좋다고 하는데 당신만 왜 그러느냐”고 역정을 낸다는 것을 들으니 조금은 위안이 되고, 이 후로는 제풀에 지쳤는지 조용하다.
그러나 후일에 순찰 중인 기사를 불러 자신만이 아니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관리소장을 싫어하고 있으니 총회 시 교체를 하겠으며 아울러 관리회사도 바꾸도록 하겠다고 언급을 하였다고 하여 실소를 금하지 못하였다.
가능하면 좋게 해결되었으면 하는 생각에 고심을 거듭하다가 관리단의 회장에게 동 사실을 상세히 보고하여 직접 만나서 설득을 하도록 부탁하여 대면을 하였는데 워낙 막무가내 식으로 나서는 데는 뾰쪽한 대안이 없었는지 중도에 대화를 포기하고 나서며 그냥 엘리베이터의 홀, 짝수 운행을 폐지하였으면 좋겠단다. 그간 모든 것을 감수하고 여기까지 왔으며, 찬성하였던 분들은 어찌하라고.....
서울 지방법원으로부터 파산선고를 받은 후, 약 1개월 만에 면책 결정이 나고 보니 심적으로 가벼워진 감은 있으나, 그래도 마음 한 가운데 잠재하고 있는 자책감은 어쩔 수 없는 것 같고, 더하여 이를 잊기 위하여 육체까지 운동으로 고단하게 하여 잠을 청하였던 것이 요즈음은 너무 지속되는 잠 부족으로 인하여 매우 피곤하고 또한 아내도 투자비용에 비하여 소득이 따르지 못하고 있는데다 가게 운영에 지친 것 같아 가게를 정리하기로 하였다.
그간 가게에서 적자는 발생하지 않았으니 그래도 다행스럽기는 한데 그래도 섭섭하기도 하다. 이곳을 통하여 이웃간에 좋은 만남도 있었으나 물건을 팔기 위하여 겪는 어려움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하여 아내가 겪지 않아도 될 많은 고생을 하는 것을 보면 그저 미안할 뿐이다.
예상보다 시일이 지체되었으나, 우리 빌딩의 홈페이지 작업을 마무리하고 일단 회장단에 보고를 하였다. 운용에 다소 어려움이 있더라도 성심성의껏 진행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믿고 다음달 관리비 부과 시 고지서를 통하여 홍보키로 하였다. 계단 통로의 천정에 부착된 등이 낮에도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하면 저절로 켜져서 확인한 결과 센서가 낮에도 작동되게 되어있어 밤에만 작동되도록 조정을 하였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으나, 선장으로 승선할 때 날이 밝았는데도 불이 켜져 있으면 항해사들에게 정신상태가 해이되었다고 나무라던 기억이 새롭다. 이제는 거의 건물과 인물에 대한 검증이 끝나고 차츰 안정을 찾아가고 있으나 금년1월부터 시행하여야 할 최저임금제를 좀 더 세부적으로 검토하여야 되는데 걱정이다. 아무래도 인건비 상승에 따르는 부담을 전적으로 입주자들에게 부담하는 것도 만만하지 않을 것 같아 대안을 찾아야 되겠는데 현재로서는 감원의 방법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모두가 형편이 어려워 나선 발걸음들인데.....
입주자들이 대다수 변호사 및 법무사들인 관계로,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관리에 따르는 제도적인 측면에 관한 사항은 잘 지키리라 예상은 하였으나 기대에 어긋나는 일이 많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주차료 관계로 총 132세대로 구분하여 분양을 하였으나 주차장은 81대분이므로 근본적으로 부족하게 되어있어, 평상시에도 제대로 주차하기가 어렵고 지하 2,3층은 사우나 시설의 공사를 하는 중으로 사업이 개시될 경우,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도 필요한 조치인데도 관리단 및 관리소장에게 불만을 표시한다.
이전에 발급된 정기 주차증을 찢어버렸고 해당 차량은 주차를 하지 않는다하여, 관리비에서 해당금액을 차감하였는데 버젓이 차량에 붙이고 출입하는 변호사, 월정주차료를 납부하지 않고 달이 지난 주차증을 교환하지 않고 주차장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주차요원이 지적하며 협조를 요청하면 아침부터 기분이 나쁘다고 역정을 부리는 사무장 등등....
대다수 입주회사들도 그간 무료로 이용하다가 유료화가 된데 대하여 불만도 있지만, 그래도 전보다 주차하기가 수월하여졌다고 하며 협조를 하여 주는 것에 대하여는 고맙게 생각한다. 그렇다고 협조를 하지 않는다고 입주자와 싸울 수도 없고 하여 주차요원에게 끈질기게 인고하면서 협조를 요청토록 당부를 하곤 하면서 새삼 느끼는 것이 있다. 이런 분들은 제발 정치에 뛰어들지 않았으면.....
전임 관리소장으로부터 미화원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들었으나 이를 대승적으로 풀어가기 위하여 작년 말 직원회의 석상에서 상호 잘 지내도록 간곡히 부탁을 하였다. 나이 드신 아주머니가 지난 주 오전에 청소를 하는 중 갑자기 몸이 이상하다고 하여 병원에 들려 검진 결과 혈압에 의한 것으로 조기에 조치를 취하여 건강에 큰 이상 없이 5일 만에 퇴원하였다. 입원을 하면서 아무래도 장기간 치료를 하여야 할 것 같으니 다른 사람을 구하였으면 한다고 하였으나 퇴원하여 결과를 보고 결정을 하자고 하여 그 기간동안 아르바이트로 대체를 하였다.
그러나 출근한 다음날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싸움을 하게 되었으며, 언쟁 중에 폭발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수차에 걸쳐 만류하여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관리단에 올라가 상대를 비방하는 것을 시작으로, 듣기에 민망한 사적인 것에까지 들쳐 내게 되어 결과적으로 두 사람이 그만두게 되었다.
얼마 전에 관리단에는 최근 두 사람의 관계가 좋아져서 다행이라고 보고까지 하였는데.... 그렇지 않아도 최저임금제 시행으로 인하여 신경이 곤두세워져 있는데 이런 일이 발생되고 보니 시간이 남아서 자기 일들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간섭을 하는 것으로 보아지므로 총무는 이야기에 거론 된 해당 직원의 해고를 종용한다. 어차피 직원의 급여에 대하여 재조정을 검토하여야 할 시점이나 공교롭게도 앞당겨진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다.
새로 근무를 시작한 미화원은 빌딩을 청소한 경험은 없으나, 아파트는 청소 경험이 많아 채용을 하였으나 청소에 대하여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니 역시 만만하지 않는가 보다. 익숙하여 지면 괜찮으리라 생각하였으나 개선되지 않을 것을 보니 그간 익숙하여진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지는 것은 아닌가 보다.
현관이나 각층의 화장실 청소를 하는데 가장 애로가 많은 것 같으며, 특히 여자화장실에는 변기에 버려지는 것이 많고 심지어 생리대까지 버려 배수구가 막히는가 하면 필요 이상의 화장지를 쓰고 바닥에 버려지는 일이 많아 가끔 불평을 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지하실에 위치한 노래방은 당초에는 실내에 화장실이 있었으나 방을 늘이기 위하여 이것을 철거한 관계로 공동화장실을 사용하는데 새벽에 영업이 끝나면 그대로 퇴근하기 때문에, 아침에 출근하여 보면 너무나 지저분하여 그간 수차에 걸쳐 퇴근 시 청소를 하여 줄 것을 요청을 하였는데도 마이동풍으로, 가끔 손님들이 구토를 한 것까지 치워야하는 고역이 따른다.
그간 명절이면 직원들의 떡값을 주기위하여 관리단은 입주회사에 안내문을 보내어 찬조금을 받아 금일봉을 전달하였으나 금년에는 아예 안내문을 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주었으며, 관리단에서도 그간 수익 사업이 없어서 부득이 취한 조치였으나 금년에는 주차료 수익에서 지불하겠다고 하니 다행스럽다.
관리비를 납부하고 이에 더하여 추가의 지불이 있을 경우 이에 따르는 부담이 있을 뿐 만 아니고, 직원들도 협조를 한 회사와 하지 않는 회사를 구분하여 서비스를 차별화 할 수 있으므로 이를 해소하는 차원에서도 잘 진행되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
어느 날 출근을 하자마자 전화벨이 울려 수화기를 들어보니 여직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도움을 요청한다. 회사에 출근하여 환기를 위하여 창문을 여니, 창틀이 곧장 곤두박질을 하려고 하여 간신히 붙잡아 두었다고 한다. 시설기사와 함께 급히 가서보니 창틀을 붙잡아 주는 조인트 부분의 연결 볼트가 빠져서 창틀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여 이탈된 것으로, 우선 움직이지 않게 고정을 한 후 다른 사무실의 제반 상태도 함께 점검한 후 수리를 하기로 하였다. 건축한지 3년도 되지 않는 건물에서 이런 일이 두 번째 발생된 것으로 만약 지상으로 떨어질 경우 인명의 피해가 우려되는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당초 설치할 때 어떻게 이렇게 조잡하게 하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봄을 맞이하고 또한 빌딩 관리단 회의를 앞두고 있어 다가오는 토요일에는 현관 및 복도의 대청소를 하기로 하였으며, 정면 옆 도로변에 불법으로 주차하는 차량이 많아 영업에 지장이 많다고 항의도 있고 하여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화분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방문객들이 주차할 곳이 없어 부득이 주차하는 경우보다는 빌딩 내 입주자들이 대부분으로 습관상 주차하는 것 같아 아쉬움이 있다. 주차비를 절약하려는 것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구청 도로교통과에 연락하여 주차단속을 하라고 할 수도 없어 궁여지책으로 마련하려니 또 무슨 항의가 있을련지 ....
그간 검토는 여러 번 하였으나 주저하고, 망설이던 보험가입(라이프 의료비보험)을 하였다. 국민연금은 가입되어 있으나 지불하지 않고 있으며, 아직까지 노후에 대한 준비도 되어있지 않는 상태에서 만약에 발병이라도 된다면 가족에게 커다란 짐이 될 것 같아, 매월 약60,000원의 보험료를 지불하기로 계약을 하였다.
2개월 전 의자에서 일어서다가 느낀 허리의 통증 때문에 운동을 하지 않아 3키로 정도 불어난 체중이 거북하게 느껴지는데다가, 세월의 흐름도 마음을 약하게 하는가 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중에도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신념으로 지속적으로 운동(조깅 및 등산 등)을 게을리 하지 않는 덕분에 병원 신세 한번 지지 않고 60여회 이상 헌혈을 하는 건강을 유지하고 있으나, 이제는 현실적으로 타협이 되어가는 것이 어쩔 수 없는가 보다.
본의 아니게 기러기 아빠가 되었고, 사업이 바닥에서 허덕거리고 있을 때 학비며 생활비 등을 마련하느라 노심초사하며 동분서주 하는 중에도 새벽이나 밤 시간대에 거의 매일 빠뜨리지 않고, 서울에서는 까치산과 **중학교 운동장을, 부산에서는 송도해수욕장을 경유하여 감천의 시민공원에 이르는 길을 뛰고, 걸으며 내 자신을 채찍질 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던 그 때는 무척이나 어렵고, 힘에 겨웠으나 지나고 보니 좋은 추억으로 회상이 된다.
비 내리던 어느 날 운동을 마치고 귀가하던 길에 길섶에 핀 이름도 모르는 잡초의 꽃망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문득 내 자신을 비추어 보았었다. 오가는 사람에게 짓밟히고 누구 하나 관심을 가지지 않는데도 때가 이르매 아름답게 피어나는 생명력의 경이가 새삼 마음을 뭉클하게 하였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고 설사 기회가 주어진다 하여도 건강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이 때 잡초같이 일어서기 위하여도 내 스스로를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하여 나름대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였었다.
큰애가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직후에는 너무나 변화되어 있는 우리 집안의 현실에 무척이나 심리적 갈등을 겪는 것 같았으나, 이제는 나에 대한 기대치를 포기하고 나름대로 적응하려고 무척 애를 쓰는 것 같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학비를 보냈지만 부족한 생활비로 인하여 제대로 식사를 못하거나, 거르는 일도 많아 이로 인한 아토피성 피부로 장시간 고생을 하였으며, 회식을 할 때면 본인도 모르게 폭식을 하는 것으로 아마도 본능적으로 기회가 있을 때면 배고픈 것을 생각하여 많이 먹은 습관이 아직도 몸에 베어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제는 날씬한 몸매를 위하여 저녁 늦게는 음식을 먹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새삼 안쓰럽다.
가끔 입주회사들로부터 청소가 예전보다 못하다는 불만의 소리가 들리며, 관리단에서도 이것저것 지적하여 시정을 촉구하기도 하여, 최단 시일 내에 개선키로 약속을 하고 직접 현장에서 지시를 하곤 하는데 좀처럼 시정이 되지 않는다. 그러던 중 자주 입에 오르고 있는 한 사람이 부인병으로 수술 및 요양을 하는데 약 1개월 정도 예상되어 그 기간 동안 청소를 대체할 사람을 구하였으면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으나 차체에 교체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모두 나름대로는 어려운 사정이 있고 또한 고용이 확정된 사람을 쉽게 그만두게 할 수도 없는지라 가능하면 조금씩 개선을 하면서 적응시키려 하였는데, 청소가 제대로 되지 않는데다 급여 및 근로시간 등 근로조건에 대한 불만서린 이야기를 가끔 하다보니 직원들 간의 유대관계도 어렵게 하는 것 같아 새로운 사람으로 교체를 하였다.
작년에 입사한 시설담당 기사가 개인적으로 만나기를 희망하여 퇴근 후 저녁을 같이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지인을 통하여 인접한 곳에 위치한 신축 빌딩의 관리소장의 제의가 들어왔다고 하며 흥미는 있으나 전혀 경험이 없으므로 어떻게 하여야 할지 모르겠으니 도와달라며 조언을 구한다고 한다. 쾌히 수락하고 관리에 필요한 사항에 대하여는 직접 현장을 방문한 후 상세하게 가르쳐 주기로 하였다.
여름이 오기까지는 냉방기를 운전하지 않으므로 경비절감 및 감시직(경비 및 주차 등 종일 근무자)의 최저임금제 시행을 앞두고 이를 개선하는 방안의 일환으로 후임자를 인선하지 않고 당분간 현 체제로 운영하기로 하고 이를 관리단에 보고하였더니 대환영이다.
관리단 운영위원회 회의를 앞두고 감사를 하는 중이라 긴장을 하고 있는데, 매일 총무에게 결재시마다 나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 같지 않아 마음이 불편하던 차에 회장까지 불러 무언가 숙의를 하는 것이 심상하지 않다. 경리, 주차 담당자들을 개별적으로 호출하여 무언가 지시를 하는 것을 보니 궁금하기도 하나 그렇다고 물어보기도 무엇하여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어느 날 결재 중 남편인 전임 회장으로부터 “왜 관리비를 받고서 입금을 하지 않았느냐”고 추궁을 하며, 매달 관리비 마감 후 전표에 표기된 관리비미수금 항목을 지적한다.
기업회계인 복식부기에서는 자산의 상태를 표시하기 위하여, 관리비의 마감일이 경과하면 입금되지 않는 관리비 금액을 확인한 후 이를 관리비미수금으로 표기하고 이 후에 관리비가 입금이 되면 관리비수입이 아닌 관리비미수금으로 입금을 하여 정리를 하고, 납부가 지연된데 대하여 연체료를 부과하고 있는데, 이것을 경리에게 물어보아도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여 더욱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던 것이었다.
“매월 발생된 관리비미수금의 합계가 일천 삼백만원이며 현재 미수금이 팔십오 만원”이라고 장부를 보며 상세히 설명을 하고 돌아서고 나니 온 몸에 힘이 빠진다. 의심이 일어난 즉시 확인을 하였다면 그간 서로 마음고생이라도 없었을 것을..... 이제부터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 단식부기 및 수납 장부를 만들어 편안하게 근무를 하기로 하였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인가보다
전기안전검사(2년에 1회)를 받아야 하는데 평일에 수검을 하면 업무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아 토요일 오후(13:00)에 실시하고 퇴근을 하였는데, 기사로부터 무언가 타는 냄새가 있어 확인하여 보니 CCTV(Closed Circuit TV : 폐회로 TV)의 모니터가 꺼져 있다고 연락이 왔다. 설치 회사에 연락하여 조치를 취하도록 하였으나 복구가 되지 않아, 월요일에 점검을 하여보니 어디가 고장이 났는지 알 수 없으니 사무실에 가져가서 확인을 하여보아야 된다기에 수락을 하였다.
전원부, CPU(Centural Processing Unit : 중앙처리장치), 주기판(Main Board)의 고장으로 560,000원의 견적이 나와 관리단에 보고를 하니 소장이 사전에 아무런 보고를 하지 않고 보냈으니 책임을 지라고 한다.
본사 사장이 관리단에 들렸다고 하여 좋지 않는 예감이 들었는데 역시 예상대로 총무가 본사에 전화를 걸어 사장을 호출한 것으로, 관리소장이 일은 잘하는데 뜻이 맞지 않으니 전임 소장이나 또는 다른 사람으로 교체를 요구하였단다. 계약의 갱신을 목전에 두고 있어 만약 잘못 될 경우 재계약에 어려움도 예상되어 두말없이 수락을 하였다.
CCTV건으로 트집을 잡았으나 그보다도 경리 상 문제로 인하여 야기된 여러 상황이 향후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이 되었고 또한 기 관리소장을 할 바에는 주택관리사 자격을 취득하는 것이 좋으리라는 생각이 있어 학원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고자 하는 생각도 있어 당장 내일부터라도 인수, 인계를 하였으면 한다고 하였더니, 본사에서는 소장이 업무상 잘못한 것도 없는데 월말까지는 근무하라고 한다.
후임 소장에게 제반 업무와 함께 인계를 하고, 본사에 들려서 빌딩의 인수, 인계서를 넘기고 나니, 본사에서 관리하고 있는 빌딩의 관리소장이 현재의 급료에서 소정의 퇴직금을 공제하여 적립하였다가 이를 퇴직할 때 지급하여 주겠다고 하였으나, 이를 수용하지 않고 퇴직금을 별도로 지급할 것을 요구하고 있어 부득이 관리소장을 교체할 수밖에 없으므로 다음날 인수를 받으라고 한다.
쉬는 시간이 없이 배려하여 주는 것에 매우 고맙게 생각하여 이튿날 방문하여 보니 낮에는 소장이, 밤에는 경비원이 근무를 하고, 청소는 아르바이트 형식(아침에 약 1시간 30분 정도하고 퇴근)으로 하고 있는 조그마한 빌딩으로, 관리에는 어려움이 없으리라 생각이 되나 자동차를 주차기를 이용하여 주차장에 입, 출고하여야 하는 업무로 근무 시간에는 자리를 뜰 수가 없으며, 토요일에도 쉴 틈 없이 근무를 하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으나 일단 한번 부딪쳐보기로 하고 업무를 인수받았다.
두 번째 빌딩 관리소장은 혼자서 춤을...
명목상 CCTV건으로 인하여 퇴직을 하였고 또한 인수, 인계까지 끝났는데도 수리비를 가지고 본사를 득달하는 모양세가 좋지 않아 수리비에 대하여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하였더니, 이것을 그대로 반영하여 급여일인데도 아예 급료를 지급하지 않는다.
두어 달 쉬었던 것으로 치부하면 그만이겠으나 잘못 작동하여 고장을 낸 것도 아닌데 끝까지 관리회사의 약점을 잡고 흔들고 있는 총무의 사고방식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도대체 관리소장은 어디까지 관리를 하여야 되는지 모르겠으나, 그간 잘못된 관리를 정상화시켜 절감한 비용이나 주차장의 유료화에 따른 어려움을 해결하는 등 열심히 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
빌딩 청소의 상태가 좋지 않아 이를 개선하고자 하여도 적은 급료 때문에 쉽지가 않다. 미화원이 우리 빌딩의 청소가 끝나면 다른 빌딩의 청소하기 때문에 시간을 별도로 할애하기가 어려우므로 이에 대한 개선방법을 모색한 결과, 이웃한 빌딩의 관리소장과 협의하여 두 빌딩을 한 사람의 미화원이 청소하기로 하고 오전 중에는 근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기로 하였다.
우리 빌딩과 같이 규모가 작은 곳은 매월 40만원 정도를 급료로 지급하는데 이 금액으로는 큰 빌딩과 같이 8시간의 근무를 요구할 수 없으므로, 아침 일찍 출근하여 약2시간 정도 청소를 하고 퇴근을 하며 개인에 따라서는 다른 빌딩의 청소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따라 관리소장이 틈틈이 청소를 대신하게 되는데 이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방안을 검토하였던 것인데 미화원이 예상외로 기꺼이 호응을 하여 이에 부합되는 미화원을 구하였으며, 또한 계약이 만료되는 입주회사 들의 현황을 파악하여 부동산 중개업소에 사무실 임대를 의뢰하였다.
본사와 통화 중에 처음 관리소장을 하였던 아파트에 변압기가 폭파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고 한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퇴근 후 아파트를 방문하여 현장을 확인하고 관리소장으로부터 상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제 물탱크를 청소를 위탁받은 업자가 현장에 도착하여, 물탱크 청소를 준비하려고 물탱크의 각종 밸브를 조작한 후, 청소하기에 적당량으로 수위가 조절이 될 때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있으므로 현장을 떠났다고 한다.
이 때 조작이 잘못된 것을 몰랐던 것으로, 시간이 지나자 물이 물탱크를 넘쳐 소방 펌프실을 채우고, 지하 주차장을 지나 주배전반 및 비상 발전기까지 흘러 넘쳐 옥외 전압기까지 소손되는 사고가 발생되었다고 한다. 탱크에서 물이 넘칠 때 경비실에 설치되어 있는 감시반의 고가수조에서 경보음이 발생되었으나 공교롭게도 관리소장, 경비원과 미화원은 계단을 청소하는 중이라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고 한다.
소방서에 연락하여 출동한 소방차에서 우선 지하실에 가득차있는 물을 제거하였으며, 한전에서는 긴급으로 별도의 전신주를 세워 아파트에 전기를 공급하고, 구청의 협조로 청수 보급차로부터 수돗물을 보급 받아 각 세대에 수돗물을 공급하였다고 한다. 통상 물탱크 청소를 할 경우에는 상하수도 요금을 절약하기 위하여 전 날부터 탱크 내에 수돗물의 공급을 중단시켜 보관되어 있는 수돗물을 사용하고, 당일에는 사용하고 남은 물도 그대로 배출하여 버리지 아니하고 이 물을 사용하여 계단이나 지하 주차장 등의 청소를 한다.
아무리 경험이 없는 사람이 조작을 하였다고 하지만 최소한 잠깐만이라도 주의를 기울였다면 이러한 일이 발생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손해가 발생된 부분이 많아 이를 복구하는데 비용이 만만하지 않을 것으로 보아지며 또한 복구까지의 불편에 따른 주민들의 민원의 제기 등.... 해결할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닌데 아무튼 관리소장에게 책임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금년까지는 주택관리사 시험 전형이 바꾸지 않으나 내년도에는 범위가 넓어질 것으로 예고되고 있어 이에 따른 대비를 하고자 하고 있는데, 마침 인근에서 아파트의 관리소장이었던 분이 방문하여 자신이 쓰고 있는 동영상강의를 보라고 한다. 강의 비용은 지불하였으나 현재 제반 일이 너무 바빠서 아무래도 시험을 준비할 시간이 없으니 대신 공부하여 꼭 합격하란다.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여, 다음주에는 인터넷을 설치하여 근무 시간 중 틈틈이 시간을 내어 공부를 할 생각이다.
그간 자주 피곤하다고 하던 아내가 지난 주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갑상선에 조그마한 혹이 있어 배양한 결과 악성으로 수술을 하여야 한단다. 그간 너무나 많은 고생을 시켜 이에 따른 스트레스에서 기인되었다고 생각하니 그저 미안하기만 하고 무어라 위로의 말을 하여야 좋을지 모르겠다. 다행히 다른 곳에 전이되거나 시간의 화급을 요하지 않고 수술하면 된다고 하니 안심은 되나, 두 아이를 제왕절개로 낳았으며, 또한 자궁에 물 혹이 생겨 3차례에 걸친 수술로 인한 후유증으로 인한 극도의 불안감을 참느라 인내하는 아내에게 고개를 숙일 뿐이다.
동영상 강의를 통하여, 그간 주택관리사 시험에 너무 안이하게 대하였던 마음을 추스르며 매일 3~4시간 씩 씨름하다보니 실무와 직접 연관된 사항 들이라 흥미가 있을 뿐만 아니고 시간을 효과적으로 보내는 아주 유익한 시간이 주어졌다는 생각에 최선을 다하기로 하였다. 우선 3~4월의 동영상 강의를 중심으로 집중하여 전 과목(5과목 : 민법총칙, 회계원리, 시설개론, 주택관리법규, 주택관리실무)을 마친 후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것으로 하고, 전 과목을 반복 학습을 통하여 익히는 방향으로 결정하고 공부를 시작하다보니 조금 피곤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할 목표가 설정되어서인지 피곤하지가 않다.
7층의 주거 공간을 사무실로 개조하여 임대를 하려고 검토를 하였으나, 옥탑에 변전실이 위치한 관계로 거의 모든 벽이 이 무게를 견디게 하기 위하여 내력벽으로 구성되어 있어, 사무실 용도에 맞게 개조가 어려울 뿐만 아니고 이를 위하여 일부의 내력벽을 제거할 경우 건물의 안전성에도 문제가 야기 될 수가 있어, 다시 원점으로 돌려서 도배 및 장판을 새로 깔아 깨끗이 단장하여 주택으로 임대키로 하였다.
소방서에서 방화 관계로 고시원의 구조물에 대한 시정 명령이 있어 이에 부합되게 개조를 위한 공사를 하였다. 당초는 옥상으로 대피계단을 설치하려 하였으나 개조에 따른 경비가 과대하여, 상세히 확인 결과 각 방의 출입문을 방화벽으로 개조하면 된다고 하여 석고판을 부착하였으며 각 계단 및 통로에 깔려있는 카펫은 화재발생시 유독가스를 발생시키므로 제거하였다.
아내가 갑상선암을 수술 받았다. 내시경을 통한 수술로 그냥 제거하는 것보다는 시간이 더 걸린다고 생각은 하였으나 4시간, 5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초조하기 그지없다. 혹시나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때 이곳에 입원 전부터 제반 편익을 준 간호사가 들어가서 확인하고 나와서는 수술시 출혈이 있어 이를 지혈시키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고 하며 결과는 양호하다고 한다. 7시간 만에 회복이 되어 입원실로 옮기는데 긴장이 풀어져서 인지 온 몸에서 기운이 빠진다.
회복이 순조롭게 되어 일주일 만에 퇴원하여 집에서 요양을 하고 있는데, 하루는 먹은 것이 체한 것 같다고 하여, 한약방에 들려 한방치료를 받았는데도 호전되지 않아 다시 입원을 하고 검진을 하니 췌장의 수치가 높은 것이 아무래도 췌장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췌장에 이물질이 있어 이를 제거하기 위하여 내시경을 이용한 시술을 하여야 한다더니, 조금 더 확실하게 확인 및 가능하면 약물로 치료를 하는 방안도 검토를 하겠다며 MRI 촬영을 하겠단다. 무엇보다도 암이 아닌 것이 다행이나 이런 저런 지나친 걱정에서 발병이 된 것 같아 심히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이 후 특별한 이상을 찾지 못하였고 또한 췌장의 수치가 떨어지는 것을 확인 후 10여일 만에 퇴원을 하려니 무언가 개운하지 않으며, 아내는 10여일을 금식한 관계로 수척하여 지고 온 몸에 힘이 없어 안쓰럽기 그지없다.
작은 애가 모 유명 신문사의 기자인 관계로 의료담당 기자의 도움을 받아 췌장암에 가장 권위가 있다는 서울**병원의 담당의사와 진료를 예약하고, 이때 의사에게 MRI(Magnetic Resonance Imaging : 핵자기 공명장치) 촬영된 것을 CD(Compact Disc)에 복사하여 의사에게 제출하고 검진을 받았다. 췌장에서 연결되는 관이 반듯하여야 하는데, 구부러져 있는 선천적인 기형으로(1,000명에 1~2사람이 있음) 수술로 고칠 수도 있으나 후유증이 있을 수 있으므로, 스트레스나 음식물에 주의를 하면서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좋으리라는 소견이 나와 그래도 원인이 명확히 밝혀져 다행스러웠으며, 어느 정도 회복이 되는 것을 보아 매일 운동을 통하여 건강을 찾기로 하였다.
그간 수차에 걸쳐 건물의 관리가 적자라며 야간 근무자를 없이 관리하는 것을 검토하자고 하더니, 결국은 7월부터 주간에만 근무를 하는 형태로 바꾸기로 하고 CCTV를 설치하였다. 고시원 및 2세대의 가정이 입주하여 있고 또한 새벽까지 영업을 하는 호프집과 24시간 영업을 하는 스포츠 마사지 등 안전 상으로 조금 불안한 개소도 있으나 건물주가 수익이 맞지 않는다고 하여 요청하는데, 다른 대안이 없어 이행키로 하고 첫날 시작하여 보니 여기저기서 불만의 소리가 들린다.
무엇보다도 전 소유자는 처음부터 건물을 매각 시까지 몇 년 동안 야간 근무를 시켜왔으나 이를 언급한 적이 없었으며, 또한 금년도 각 입주사와 재계약시는 임대료를 인상(10~15퍼센트)하였으면서도, 수익이 맞지 않는다고 구실로 근무한지 1개월이 조금 넘은 사람을 그만두게 할 수 있느냐고 큰 소리가 나오는가 싶더니만, 마지막으로는 **구에서 정치를 하는 사람이 현실을 무시하고 너무 자기 이익만 생각한다고 까지 비약을 하며 다음에는 투표를 하지 않겠다고 까지 한다.
1층의 분식집은 몇 개월 전부터 부동산은 물론이고 벼룩시장 등 광고를 내어 얼마라도 권리금을 찾고자 하였으나, 계약기간 종료시기가 다가오는데도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아예 권리금을 포기하고, 가게의 냉장고를 비롯한 모든 자재를 헐값으로 매각한 후, 가게를 원상복귀 시키고 미련 없이 떠났으나 현재까지 찾아보는 사람이 없다.
**구에서 불우 이웃(독거노인, 생활보호대상자 등)을 돕기 위하여 마련한 식당이 크고, 깨끗하고, 위생적이며, 가격이 저렴하고(\3,000), 뷔페식 식단으로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제법 먹을만 하다보니 인근의 회사원 및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아 많은 사람이 자주 찾는 것이 다른 식당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이는 결과적으로 가격을 높일 수가 없으며, 색다른 메뉴를 개발하기에는 주위 여건이 맞지 않아 근심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계속 오르기만 하는 유류가격에 환율의 하락과 주식시장의 침체 등으로 이에 따른 불안감이 전반적으로 소비자들의 심리를 자극하여 소비가 위축된 것이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된다.
장마철이라 내리는 빗물을 이용하여 그간 청소가 되어있지 않은 옥상을 청소하였으며, 이와 함께 몇 년 동안 고시원(5, 6층)에서는 베란다의 문을 열면 냄새가 지독하다며 아예 문을 개방하지 않아 그곳이 비둘기들의 안식처가 되어있어 그간 쌓여진 오물을 정리하니 100여 키로 그람에 이르고, 여기에서 떨어져 하층 베란다에 쌓인 것까지 정리를 하고보니 온 몸에 냄새가 베어있어 고약하기 그지없다.
아무래도 근본적으로 비둘기가 서식하지 못하도록 대책을 마련하여야 될 것 같아, 영등포 시장에서 그물을 구매하여 베란다에 틈이 없도록 설치를 하였다. 처음에는 보금자리에 대한 귀소 본능으로 그 주위를 떠나지 않고 맴맴 돌며 들어가 보려고 시도를 하더니만, 시도 때도 없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대나 큰 소리로 방해를 하다보니 어느 날부터는 아예 포기를 하였는지 얼씬거리지도 않는다. 무엇보다도 베란다 아래에 오물이 떨어지지 않아 바닥이 깨끗하여 좋고, 찾는 손님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아 다행스럽다.
야간근무자에게 업무를 인계하고 오후 6시에 퇴근하면 되는 업무가 이제는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퇴근을 하므로 신경이 쓰이는 것이 많으나, 그래도 근무에 대하여 사사건건 간섭하여 여러 가지 주문을 하는 것이 없고, 또한 시간을 내어 공부를 할 수 있는 직장도 흔하지 않는 만큼 맡은 바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며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혼자서 근무하는 관계로 국경일과 공휴일 그리고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쉬는 시간이 없어 이제는 거의 모든 경조사에 참석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형편인데, 대학 동기의 아들이 결혼을 한다고 청첩장을 보내고 꼭 참석하여 달라는 메일까지 접수하였으나 도저히 불가하여 전화를 하였더니, 친구의 자녀 결혼식에 참석 못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으며 더 이상 친구도 아니라고 한다.
그간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초등, 중 고등학교는 물론이고 대학까지 같은 학과를 수학한 친구가 동기회 및 학우회 총무를 맡고 있었는데, 미얀마 사업 중에 발생된 문제로 인하여 동기간에 사이가 매우 이상하게 되었다.
본인은 그래도 제반 실정을 잘 파악하고 있어, 당시 대표에게 현금보관증을 받았으며, 매달 얼마씩 나누어 갚기로 약속을 하였는데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아 고민하고 있는 중에도 감내(勘耐)를 하고 있으나, 그의 부인은 동기 및 친구들에게 나를 보고 투자를 하였는데 책임을 지지 않는다며 나쁘게 이야기를 하여 무척 곤혹스러운 입장이 되었으나, 무어라 변명하기도 어렵고 하여 아예 관련된 모임에는 참석을 하지 않고 있는데 이런 일까지 겹쳐 무척 마음이 아프다.
지하1층의 스포츠 마사지를 하는 곳에서 물이 넘쳐 화장실에 가득하다는 통보를 받고, 급히 현장에 들리니 오수가 빠지지 않아 넘쳐나는 것을 보고, 지하의 오수펌프를 작동여부를 확인하니 고장인 것 같아 우선 넘쳐서 고여 있는 오수를 제거하고자 지하 펌프실 하부에 위치한 오수관의 밸브를 여는 순간 온갖 오수가 냄새와 함께 쏟아진다.
이 경우 통상적으로는 자동적으로 오수 집수정의 펌프실로 흘러 자동적으로 밖으로 배출하여지게 되어있는데, 설계가 잘못되었는지 집수정으로 연결되는 중간 부위가 높아 자연적으로 흘러들어가지 아니하고 일정 수위까지는 고이게 되어있으므로 직접 손으로 퍼 올리는 수밖에 없어 한 참 곤혹을 치른 후, 펌프를 확인하여 보니 너무 오래 사용하여 케이스가 닮아서 떨어져 나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어 신품으로 교체를 한 후 정상운전을 하였다.
의복과 몸에 베인 역한 냄새가 무척 신경이 쓰였으나, 집에서 가까운 직장인지라 자전거로 출, 퇴근을 하고 있어 타인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는 것 같아 그래도 다행스럽다. 이것은 오, 폐수 전용 펌프로 오물을 함께 옥외에 배출시키는 기능을 가진 논 프라그펌프가 설치되어 있지 않고 가격이 저렴한 펌프로 항상 물속에 잠겨있는 잠수 펌프가 설치되어 있어 펌프의 흡입구가 무엇인가에 막힐 때마다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주택관리사 시험 3주전부터는 새벽 3시경 출근하여, 저녁까지 나름대로는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여 기대를 가지고 시험에 임했는데 웬걸 너무 예상 밖으로 어렵게 출제가 되어 과정이야 어찌 하였던 간에 무척이나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전혀 보지도 듣지도 못한 범위에서 출제가 되어, 시험을 대비하기 위하여 학원에서 공부하였던 곳을 중심으로 진정서를 관계 기관에 보내고, 재시험을 보게 하여 주라고 아우성들이나 이를 해결할 방법이 있을 것 같지 않고, 이제는 어떻게 차기 시험에 대비하여야 되는지 암울하다.
고시시험도 아니고 그렇다고 난이도를 조절한답시고 이런 식으로 출제가 된다면 법이나 건축을 전공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공부를 하여야 하는지 모르겠으며, 우선은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당분간은 맡은 일에나 충실하기로 하니 조금 마음이 가벼워진다.
미화원이 보험회사에 출근하여야 한다고 하여 오전 10시까지 근무를 하여야 함에도 출근에 지장이 없도록 청소가 끝나면 조기에 근무를 마칠 수 있도록 협조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복도의 계단에 설치된 신주가 녹이 슬어 닦으라고 하였더니, 도저히 시간이 없어 닦을 수가 없으니 다른 사람을 구하라고 하며 이웃한 빌딩만 청소를 하겠다고 한다. 이웃한 빌딩은 리모델링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무래도 청소하기가 수월하므로 택한 방법이겠으나 섭섭하기도 하여 이웃한 빌딩의 관리소장에게 이야기를 하였더니 그곳도 그만 두게 하겠단다.
오전 10시까지 근무하는 조건으로 새로운 사람을 인선하고 나니, 인사조차 하지 않고 훌쩍 떠나버린다. 우리 빌딩만으로는 수익이 작은 것 같아 오전 4시간 근무하는 것을 조건으로 이웃한 빌딩을 추가시켜 주었으며, 보험회사에 출근하는 관계로 2~3시간여 동안 청소를 마치고 퇴근하면 나머지 마무리 업무는 조금 수고스럽지만 시간이 있을 때마다 직접 나서서 도와주고 있었는데 어안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주어진 현실임에야 어찌 하겠는가, 향후는 아예 계약한대로, 원칙대로 근무시간을 고수시키기로 하였다.
오늘은 건물 1층 베란다 위에 쌓여있는 담배꽁초, 화장지 및 정원의 쓰레기를 치우고 있는데 여자들의 생리대까지 버려진 것을 보니 어쩐지 꺼림칙하다. 5, 6층이 고시원으로 사용되고 있어 이유야 여하든 가정에서 사랑의 둥지를 틀지 못하고 좁은 공간에서 생계를 연명하는 가장들이 있는가 하면, 전문학교에서 수학을 위하여 기숙하고 있는 학생들이 있는데 자신도 모르게 절제되지 못한 생활이 몸에 베어있어 아무 곳이나 담배꽁초를 버리는 것은 예사고 술병이나 라면 봉지 등을 엘리베이터, 계단이나 구석진 곳, 우편함에 넣어두는가 하면 과음으로 이곳, 저곳에 토하여진 것을 청소하다보면 암울한 생각이 든다.
오후 3시경 큰애로부터 전화가 와서 시간이 있으면 아빠를 만나고 싶다고 하여 쾌히 승낙하고 나니 온갖 상념이 꼬리를 문다. 어려운 중에도 최악의 터널을 지나 나름대로 내 사업의 길을 찾아가고 있을 때였으나, 가족은 수입이 일정하지 않고 하는 일이 시원하게 보이지 않았는지 내가 사업가 스타일이 아니라면서 극구 만류하여 택하게 된 길이 이제는 다른 길을 생각하지 않고 여생의 마지막 직장으로 생각하고 매진하기까지 모든 꿈을 접는 아픔의 과정들이 눈에 선하다.
오랜만에 부녀가 마주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으로 많이 울었다. 그간 표현하지 않아 감추어진 나의 내면의 마음속까지 읽을 수 있을 만큼 잘 성장하여 준 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가정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마음부터 긴장을 하고, 의견의 충돌 없이 무사히 잘 마쳐지기를 조마조마하게 마음 졸이는 것에서부터, 내가 집을 나가서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받은 마음의 상처들과 조그마하지만 그래도 귀중하게 여기며 감사한 조건들을 찾고 있는 것 등....나에게 너무 죄송하다는 하며 눈물이 눈망울을 글썽거릴 때, 함께 가슴으로 울었으며, 성경에 나오는 탕자와 아버지의 비유처럼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며 해말갛게 웃으며 보내고 나니, 나도 부척 늙어버린 것 같다.
지난달부터 이웃한 빌딩의 사장이 미화원에게 지급되는 급료가 많다며, 아르바이트로 청소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관리소장에게 스트레스를 주는가 싶더니만 오늘 아침에는 아예 청소를 관리소장보고 하라고 하였단다. 잔뜩 부어오른 얼굴로 나에게 와서 하소연을 하는가 싶더니 도저히 더 이상 못하겠다고 한다.
연세가 73세로 군에서 17년여를 보내고 제대를 한 후에는 계속하여 관리소장을 하였던 분으로 군인 생활이 몸에 배어 아침7시에 출근을 하여 퇴근 시까지 부지런하게 맡은 일을 하셨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도 많이 들었는데 아쉽고, 섭섭하여 석별의 잔을 나누는 마음이 편하지 않다. 경비원과 거의 같은 급여(900,000원)이지만 그래도 일하는 즐거움에서 보람을 찾는 것 같아 보기에 좋았었는데 이제 그런 재미마저도 없어졌으니 쉽게 늙지나 않을까 걱정이 된다.
100인 이상 사업장은 토요일을 휴무로 하고 있으나 우리 빌딩은 불가피하여 출근을 하고 있는데, 어제 3층의 입주회사로부터 페인트칠을 하여 주었으면 하는 요청이 있었다. 입주 예정일보다 일주일 빠르게 입주를 함으로서 페인트칠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입주를 하였는데, 화요일 협력업체에 대한 실사가 있다고 하므로 아무래도 마음이 쓰이는가 보다.
가능하면 깨끗한 인상을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혼자서 약 4시간에 걸쳐 페인트를 칠하고 나니 온 몸이 피곤하고 다시 허리가 아파온다. 허리에 통증이 있어 약 3주간 한의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아 많이 좋아져서 조심을 하고 있는데 걱정이 된다.
12월 3일 엘리베이터 정기검사를 앞두고, 매월 엘리베이터의 안전검사를 대행하고 있는 업자로부터 케이블의 교체를 하여야 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어차피 검사 시 지적되어 교체를 하면 이에 따르는 추가 경비가 지급되어야 하므로 사전에 교체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본사 및 관리인에게 보고를 다시 하였다. 그러나 이에 따르는 금액이 적지 않으므로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한다. 본사에서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추진 할 경우 괜히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차라리 검사결과를 보아 업무를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있어 이것을 수용하고 사전조치를 취하지 않기로 하였다.
어느 날 아침 사무실의 직원들이 출근을 거의 마무리 할 무렵에 갑자기 수신기반에서 화재발생 경보가 요란하게 울려 표시판의 위치를 확인하고 3층으로 뛰어올라가서 아무리 둘러보아도 화재가 발생된 흔적이 없다. 우선 경보음이 나지 않게 조작을 한 후 다시 올라가 세밀하게 조사를 하여 보았으나 원인을 알 수가 없어 시스템을 복귀하였더니 정상으로 작동된다.
다음 날도 거의 같은 시간에 또 화재경보가 울려 확인하니 어제와 같이 표시판에 3층으로 나타난다. 302호는 난방을 하기 위하여 기름보일러를 사용하는데 처음 시동을 하면 연소실에 고여 있는 기름이 일시에 연소를 일으키며, 이때 발열량이 많아 감지기를 작동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여 8시 30분에 수신기반의 주, 지구경종 스위치를 눌러놓아 소리가 나지 않게 하고 지켜보고 있는데, 9시에 역시 화재발생 표시와 함께 3층의 표시가 나타난다. 이로써 경보음의 발생원인을 확실하게 확인하였으며 출근시간 동안에는 경보음으로 입주회사 직원들이 놀라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가끔 엘리베이터를 이용 시 비상통화 벨을 누르는 사람이 있다. 작동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기보다는 그냥 장난삼아 누르는 경우가 거의 태반으로 한 밤중에 전화가 걸려와 놀라게 하기도 한다. 야간 당직이 없으므로 밤새 벨소리가 시끄럽게 울어대도 이를 중지시킬 방안이 없어 퇴근 시에는 아예 인터폰의 송화기를 내려놓으니 그래도 관리실에서는 울리지 않아 조금 조용하여졌다.
맺는말
보통보다는 약간 유별나게 선택한 삶의 여정이었기에 다소 힘들고, 어려움도 있었으나 그래도 대학을 졸업과 함께 예비역 소위로 전역되어 곧 바로 선박에 승선함으로서 남보다 빠르게 항해사와 선장이 되었으며, 또한 당시는 취업이 쉽지는 않았는데 원양어업이 호황일 때라 취업 걱정을 한번도 해보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 승선 및 취업을 할 수 있었으며, 입사하여서는 승선한 경험을 토대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여정이었기에 후회는 없다.
누군가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모든 물을 수용한다고 하였으나, 나는 이에 더하여 유입되는 모든 불순물들을 정화시키고도 남음이 있는 넉넉함도 있다고 본다. 처음 선장이 되었을 때는 무엇이든지 하면 될 것 같아 그저 패기를 앞세워 선박을 운항을 함으로 더러는 위험한 지경에 처한 적도 있으나, 승선 경험이 쌓이고 차츰 자연(바다)의 순리를 깨닫게 되면서부터는 바다에 순응하는 방법을 체득하게 되고, 육감으로 살아 숨쉬는 생동감이 느껴지면서부터 선박의 안전은 물론 어획도 좋아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작은 것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을 잃어버리고, 주위의 환경에 지배된 통상적인 삶이었기에 아픔도 많았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두 딸에게는 주위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작은 것에서도 기쁨과 즐거움을 찾고 이것을 이웃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까지 내가 어려울 때마다 힘이 되어주고 자녀들에게 친구가 되어준 아내와, 북한과 수산물사업의 동업자로서 많은 것을 잃었지만, 희로애락을 같이하면서 친구가 된 박 성웅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가능하면 실명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며, 사실을 여과하지 않고 표현하려고 하였으나 이것 또한 내 앎의 한계성 때문에 쉽지 않았다. 원양어업에 종사한 분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들이 많아 부담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으며 만약 기업 이미지에 손상이 되었다면 이 지면을 통하여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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