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나의 친구

알라스카김 2008. 9. 24. 13:39

하나님이 보시기에 제일 기쁜 자는 노아였다.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작정하고 택한 자였지만 홍수시대 이전에 살았던 인간 중에 가장 의롭고 완전한 자는 노아였다.그러므로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고 뜻한 바 인간의 온전한 삶은 노아가 실천했던 삶일 것이다.그러나 그 구체적인 발자취는 자세히 언급된 것이 없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가장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라는 의문을 가질 때마다 나는 자주 노아를 떠올린다.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너절하고 추하여 자책할 때마다 젊은시절에 만나 알게된 한 친구를 기억하게 된다.

내가 만 설흔 살 되던 해였다.그 때 나는 월급이 적고 보너스도 나오지 않는 원양어업회사를 관두고 어느 해운회사의 회계부서로 직장을 옮겼다. 그 회사는 원목을 실어 날으던 자사선 5척 외에 3국간 용선운항사업 등으로 일년에 외화로 벌어들이는 운항수입이 2억불에 달했다.매번 한달에 30여척의 새로운 용선계약이 이루어졌고 바다에 떠다니는 관리선박이 60여 척이 넘었다.전산으로 업무자동화가 이루어지기 전이었는지라 업무량이 엄청났다.더우기 사업본부제로 운영되는 종합상사여서 매달 각 사업부의 손익계산서가 작성되고 있었다.그러므로 회계부서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시간외 근무가 다반사였으며 손익마감일이 임박하면 철야근무도 불사해야만 했다.

나와 동갑내기인 상고출신의 그 친구는 그 회사 회계부서의 실무책임자였는데 영어실력이 짧아 영업부서에서 넘어오는 수많은 해외문서들을 분석한 후 회계적으로 분류하는 일에 고충이 많았다. 게다가 일요일이면 교회에 출석하느라 회사일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부서장이 그런 그를 용납할리 없었고 결국 나의 입사로 그는 실무책임자의 자리를 내게 뺏기고 말았다.나이 들어 뒤늦게 회개하고 지금은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그 부서장은 그 때 그 친구를 (하나님에게 미친)환자라고 지칭하며 직원들 앞에서 그를 조롱하기 일쑤였다.그 친구는 차츰 회사일에 흥미를 잃고 방황하는 눈치였다.그러자 그가 직접 뽑았던 고졸출신의 부서직원들은 자신의 선배를 감싸기 시작했고 그 친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저들끼리 담합하여 업무태만으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자연 일의 진척이 매끄럽지 못하자 부서장의 따가운 눈총이 나의 등뒤로 쏟아졌다.그런 갈등의 세월이 육 개월 가까이 지속되었다.

나는 용단을 내려야만 했다.부서장에게 딱 한 달만 더 시간을 달라고 했다.만약 한 달 안에 부서의 일을 장악하지 못할 경우 자진하여 사직서를 쓰겠노라고 했다.나는 우선 일요일 시간외 근무를 없애기로 마음먹었다. 업무효율을 높히기 위해 영업부서별,항차별(Voyage)로 회계원장을 분리시키는 등 업무개선을 단행했다.그리고 사회적응을 핑계삼아 오랫동안 발길을 끊었던 교회에 다시 나가기로 결심하고 그 친구가 다니던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그러자 친구가 내게 마음을 열고 다가왔다.표정이 밝아진 친구를 보자 부서직원들도 무언의 동맹을 해제하고 내게 순종했다.친구와 나는 경쟁과 시기의 관계를 청산하고 다정한 동반자로서 협력자로서 거듭났다.그 친구의 도움을 발판으로 나는 그 이듬 해 사장의 표창을 받았으며 그 다음 해엔 회장의 표창까지 받게 되었다.친구의 도움에 보답하고자 나는 상부에 상신하여 회계부서업무를 영업관리와 세무회계로 나누고 세무회계부서 책임자로 친구를 추천했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들이 흘러 갔다.일에 대한 성취감은 물론이려니와 시간외 수당이 넘쳐 과장이었던 나의 봉급은 부장의 월급과 맞먹었다.그러자 나는 자만하여 교만해지고 말았다.매일 저녁 직원들을 이끌고 술집을 전전하며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그러나 그 친구는 그런 나를 도외시하고 언제나 근검하고 신실한 신앙의 길을 걸었다.그는 세무회계과장으로 발령받던 해에 늦깍기 결혼을 했고 착실히 저축한 돈으로 잠실의 13평 아파트를 샀지만 나는 여전히 전셋방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이 여전히 많은 줄 알았고 그까짓 아파트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하나님은 그런 내게 재앙을 주었고 친구에겐 복을 주었다.86년 아시안 게임을 전후하여 평당 100만원 하던 13평 짜리 잠실주공 아파트가 8천만원으로 뛰어 올랐다.나는 전세금을 올려주지 못해 인천변두리로 집을 옮겨야 했고 그 친구는 저축한 돈을 조금 보태어 32평짜리 아파트로 집을 늘렸다.엎친데 덮친격으로 해운업의 장기불황으로 정부가 개입하여 해운회사통폐합이 이루어지는 바람에 내가 다니던 회사가 그만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그러자 사장은 따로 독립하여 조그만 회사를 차렸고 회계책임자로 내가 아닌 그 친구를 불러 들였다.왜 내가 아니고 그 친구란 말인가.나는 심한 자책감에 사로잡혀 오랫동안 인생의 쓴뿌리를 씹어야만 했었다.

세월이 흘러 흘러,그 친구는 번창한 그 회사의 중역으로 승진하였고 신급도 장로로 격상되었으며 지금은 그 회사의 자회사를 맡아 독립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구하라,그러면 얻을 것이요라는 말을 맹신하여 오로지 스스로 이루려고 했던 나는 여러모로 쓰러져 지금은 실패자의 인생을 살며 아직도 일요신자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하나님은 사람의 외양을 보지 않고 그 중심을 본다는 말씀을 껴안고 눈물로 회개하면서...

                                                                                                            2006.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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