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마친 후 마당에 나섰다
어둠이 내려앉은 것도 아랑곳없이 바람을 쐬고 싶었다
3월 초부터 연일 비가 찔끔거렸고 봄이 봄이 아닌 듯 낮에도 으실으실 추웠다
그러나 지금 남쪽바다로부터 불어오는 것은 어제의 매운 서풍이 아니다
그때 마당의 화분에 놓여있는 수 십 가지 꽃들이 옹알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유화(雪流花:일명 조팝나무)는 하얀 바람꽃을 가지마다 빼곡이 껴안고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온 세계가 노파의 병상처럼 침울하여 식욕조차 사라진, 불경기를 핑계로,구질구질한 날씨를 핑계로
나는 눈도 귀도 닫고 시간의 경계도 무너뜨린 채 속으로 죽겠다,죽겠다 하며 오랫동안 몸살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어둠속에서 흙을 밀치고 일어서는 수선화와 함박꽃의 새순들이
좁쌀을 튀겨놓은 듯한 저 설유화의 앙상한 몸들이 내게 말했다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어. 이 봄에 또 다시 한 생애 열심히 아름답게 살아갈거야.
그 순간 옛 사람의 경구가 머리에 떠올랐다
疾風知勁草(세찬 바람이 불면 어떤 풀이 곧은 풀인지 알 수 있다)
어느새 나는 어깨에 무겁게 내려앉았던 수심을 훌훌 털어버리고
설유화처럼 앙상하게 드러난 나의 가지를 직시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처럼 자연(自然)이며 또한 섬광 같은 은혜로 다가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