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코스모폴리탄
(줄거리 요약)
경섭은 어느 날 모 일간신문을 읽다가 해외이민을 간 사람 중 현지적응에 성공한 사례를 든 ‘코스모폴리탄 차동한’ 이란 제하의 기사를 읽다가 경악을 금치 못한다. 차동한이란 인물은 수 년 전 그가 몸담았던 회사가 아르헨티나 경제수역에 단순입어를 하기위해 접촉했던 현지 브로커로서 이를 빌미로 회사 돈 2백만 불을 착복한 희대의 사기꾼이었던 것이다.
회사 일로 인도에 가있던 경섭은 본사로부터 알젠틴 단순입어허가가 떨어졌으며 이미 수십만 불이 아르헨티나로 송금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급히 귀국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한국에 돌아온 경섭은, 차동한의 구좌로 사전송금 된 돈에 대한 정부 공문서 양식의 야릇한 영수증을 보고 어딘지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정작 중요한 입어허가서는 사장이 혼자 품에 넣은 채 그때까지 아무에게도 공개되지 않고 있었다.
그 와중에 사장은 오징어채낚이 어선 총 7척에 대한 단순입어허가서를 빌미로 종합상사로부터 50억 원의 자금을 차용하는가 하면 당초 허가신청시 동반입어에 동의했던 동종 수산회사가 선박투입을 꺼리자 자체적으로 어선을 새로 구입하는 등 단순입어를 통한 오징어 사업에 올인을 하고 있었다. 그때 아르헨티나에 입어허가서의 대가로 지불된 금액은 이미 2백만 불에 달했다.
새해가 닥쳐 오징어 어기가 임박했으나 사장이 손에 쥐고 있다는 입어허가서는 여전히 비밀이었고 입어를 위한 구체적인 조건과 절차 등도 베일에 싸인 상태였다. 결국 경섭은 아르헨티나로 날아가 현지에서 교포를 상대로 섬유원단 수입업을 하고 있던 차동한을 찾아가 그가 만들었다는 단순입어허가서의 진위여부를 캐기 시작한다.
차동한을 압박하여 경섭이 받아낸 단순입어허가서란 알고 보니 아르헨티나 국적의 어업허가를 전제로 한 선박도입허가서였다. 이는 합작형태의 입어를 뜻하는 것이었고 한국 국적을 유지한 채 아르헨티나 정부에 입어료만 지불하는 단순입어허가서는 결코 아니었다.
아르헨티나 수산업법에 없는 단순입어허가를 만들어 내겠다며 차가 경섭의 사장을 농락한 배경에는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이었던 메넴의 비서실장과 차가 특별한 친분을 갖고 있다고 선전한 때문이었다. 차는 이를 이용하여 아르헨티나 수산업법에 없는 단순입어허가를 대통령령에 의한 특별법으로 만들어내겠다며 호언장담했던 것이다.
기 송금된 돈을 회수하기 위해서라도 경섭은 사장에게 하루바삐 알젠틴으로 오라고 촉구했으나 그의 사장이 알젠틴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무려 한 달 뒤였다. 경섭의 보고를 받고도 설마 했던 사장은 메넴의 비서실장이었던 꼬한이란 사람과 삼자대면한 자리에서 차가 그 동안 얘기했던 것이 모두 그가 혼자 꾸며낸 거짓말이었음을 확인하고 그동안 보물처럼 품에 안고 다녔던 허가서를 생각하며 사장은 비로소 차에게 분노의 화살을 겨누게 된다.
그러나 차가 돈을 모두 돌려주겠다, 또는 일부만 주고 나머지는 꼬한과 상의해본 연후에 답을 주겠다는 등 차일피일 시간을 끌다가 더 이상 상종하지 말자며 본색을 드러내자 경섭은 그를 알젠틴 법원에 민.형사건으로 고발할 결심을 하게 된다.
한편 경섭은 알젠틴에 도착한 사장이 호텔을 경섭과 따로 이용하는가 하면 차에 대한 법적대응이 시작된 후에도 차와 합의를 하겠다며 미국에 있는 차의 동업자인 헬렌 리라는 여자를 끌어들이는 등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을 계속하자 그의 사장에 대해서도 일말의 의구심을 갖게 된다.
경섭은 변호사를 선임한 뒤 일차로 차를 공문서위조 및 동 행사, 사기 등의 혐의로 고발하기로 작정하고 차의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그의 사장도 모르게 차의 사무실을 급습하게 되는데 마침 그날 차가 헬렌 리를 통해 미국으로 빼돌리려고 한 관련서류 일체를 압수하는데 성공한다. 바로 그날 경섭은 차와 헬렌 리라는 여자는 사장에게 사사로이 성매매를 알선한 자들이며 동시에 사기극의 공범임을 알게 된다.
그 당장 살려달라며 빌고 나올 것이라 예상했던 차가 공탁금을 낸 뒤 예비구속면제를 받고
지루한 법적공방에 나서자 사건은 다시 미궁에 빠져들었고, 이 틈을 타 차는 가증스럽게도 경섭의 사장에 대해 해외교포여자들과의 성추문 및 외화밀반출혐의를 들어 미국판 한국신문에 대서특필하는가 하면 동일 내용의 투서를 한국의 사정기관에도 뿌리는 등 반격을 가해 온다. 또한 차는 아르헨티나 법원으로부터 우루과이를 기지로 입출항하는 경섭 회사의 배에 대한 엠바고 결정을 얻어낸다. 차의 엠바고는 단순입어의 사기극이 진행되기 전 그와 만약을 위해 편의상 체결해 두었던 합작어로계약서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엔진고장으로 우루과이에 입항했던 트롤어선 한 척이 억류되는 바람에 차의 엠바고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경섭은 가슴을 치며 통탄하나 부득이 기지가 필요한 나머지 선박들을 케이프타운으로 회항시키는 고육지책을 강구한다. 그때까지 법정공방으로 차가 입은 불이익이라면 교포를 상대로 한 수입원단 장사를 못하게 된 것과 형사피의자로서 알젠틴에 발이 묶여 있다는 것뿐이었다.
한편 단순입어가 불발로 돌아가는 과정에 경섭과 그의 회사가 겪게 되는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단순입어를 전제로 출어시킨 기존선박들과 신규선박들의 입어조업 실패로 인한 선내불만은 차치하더라도 그로 인한 조업손실은 회사의 존립을 뒤흔들 만큼 심대한 것이었다. 또한 알젠틴에 머무르는 동안 경섭은 선원실종, 선원사망, 엔진고장 등 회사 소속 선박들의 끊임없는 사고에 대처하느라 동분서주한다.
형사고발 사건에 별다른 진전이 없자 경섭은 한국으로 돌아오고 그 사이 재무상태가 극도로 악화된 회사는 경섭도 모르는 사이 법정관리 절차를 밟게 된다.
그 후 차에 대한 형사기소가 결정되어 다시 아르헨티나로 날아간 경섭에게 차가 그의 변호사를 통해 합의를 제안해 온다. 경섭은 차가 자기의 잘못을 사과하고 용서를 빌지 않는 한 합의는 있을 수 없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한국에 돌아온 경섭은 법정관리를 이끌어낸 과정에서 드러난 사장의 부도덕함에 크게 실망하여 끝내 사표를 던지고 만다. 그가 사표를 쓰고 난 뒤 다시 차가 그의 변호사를 한국에 보내 합의를 종용하게 되고 사장의 부탁으로 그 자리에 경섭이 나타나자 차는 곧바로 합의를 철회한다.
그러나 사장은 경섭 대신 상무를 알젠틴까지 보내 결국 차와 합의를 하고 그에 대한 형사고발을 취하해 주고 만다. 그 뒤 합의과정에서 그의 사장이 차에게 오히려 삼십만 불을 더 지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경섭은 또 다시 경악을 금치 못한다. 사장의 그런 황당무계한 합의의 이면에는 차가 미국신문에 폭로했던 성추문 기사를 그의 집과 교회에 우편으로 보내겠다고 공갈을 친 때문이었다. 기독교인인 사장은 교회의 장로였던 것이다.
차로 인한 모멸감과 그에 대한 적개심으로 괴로워하며 한동안 몸살을 앓던 경섭은 결국 새로운 일터인 오호츠크의 바다를 향해 떠난다.
코스모폴리탄
1
경섭은 신문을 읽다가 웬 낯익은 사람의 인물사진을 발견했다. 인터뷰 기사였는데 제목이 ‘3차례 국적 바꾼 코스모폴리탄 차동한’이었다.
이민과 관련하여 사람들의 관심이 증폭되던 시점을 틈타 기획기사로 만든 모양이었다.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밴쿠버에서 만난 차동한씨(47)는 자신 있게 '이민을 오려면 캐나다를 택하라' 고 말했다. 그의 확신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미국-아르헨티나-캐나다. 15년 동안 세 차례나 국적을 바꾼 코스모폴리탄 차씨는 이렇게 3개국을 돌며 모두 살아본 탓에 캐나다가 지닌 장점을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81년 그는 국내에서 하던 섬유수출업을 정리하고 미국 LA로 이민을 떠났다. 가축사료를 취급하던 회사를 운영하던 중 88년 아르헨티나의 메넴 대통령의 초청을 받은 차씨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짐을 꾸렸다. 그곳에서 그는 섬유업에 손대 다시 큰돈을 벌었다. 괜찮은 수입을 단념하고 93년 그는 다시 캐나다의 앨버타주로 향했다. 우연히 관광차 캐나다로 왔다가 '아름답고 살기 좋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차 씨는 지난 해 밴쿠버의 가스타운 인근에 45만 달러를 들여 포켓볼을 할 수 있는 시설과 스탠드식 주점을 차렸다. 이곳에서는 라이브쇼도 한다.
캐나다 정부는 술을 파는 일에 규제가 심하다. 차 씨가 얻은 라이선스는 밴쿠버시가 허가한 8개 중의 하나. 그러나 곳곳을 옮겨다녀본 경험 탓에 '현지 공무원에게 접근할 루트를 잘 안다.’고 말했다.
차씨는 자신이 살아본 3개국을 이렇게 비교했다. 먼저 미국. '자유롭고 의외로 인종차별도 심하지 않다.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도 많다. 그러나 불안하다. 두 번째로 아르헨티나. '자녀교육에 문제가 많다. 정국도 유동적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인심이 매우 후한 편' 이 같은 설명과 함께 차씨는 캐나다를 '인종차별도 없고 편안하면서, 사람도 순수하고 환경도 좋다.'며 다시는 옮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돈을 벌려면 캐나다로 와선 안 된다'라는 충고를 잊지 않았다.
경섭은 기사를 읽고 나서 한 동안 혼자 가슴을 쥐어뜯었다. '아 세상이 참 개똥같구나!' 라는 탄식도 질러보고, ‘신문기자가 쓰는 인터뷰 기사는 진짜로 무책임하고 지랄 같은 것이야.' 라며 허공에다 대고 손가락을 꼬아 휘둘러보기도 하였다. 차동한. 그는 경섭에겐 이 세상에서 영구히 추방시키고 싶었던 희대의 사기꾼이었다.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초청을 받았다거나 그곳에서 섬유업을 해 큰돈을 벌었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였다. 그러므로 차가 코스모폴리탄으로 지명된 것이 너무 분하고 원통하여 그는 그 날 돼지국밥집에서 대낮부터 대취하고 말았다.
2
인도에서 트롤어선 608호의 철수를 위해 뉴델리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업무진척상황을 보고하느라 본사에 전화를 내었더니 전무가 나와 대뜸 하는 말이 이랬다.
"안 차장, 알젠틴 단순입어허가가 떨어졌어. 그쪽 일을 빨리 마무리 짓고 들어와. 나는 민들레호 수리 때문에 곧 라스팔마스로 나가야 해."
민들레호는 알젠틴 단순입어를 위해 최근에 구입한 선박으로 스페인 항구에서 채낚이 어선으로 개조하는 수리가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였다. 경섭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어 가슴이 두근거리기조차 했다.
"전무님, 입어허가서는 읽어 봤습니까? "
"입어허가서 사본은 사장이 품에 안고 안 보여 주네. 허가서 발급비용으로 척당 십만 불씩 벌써 송금도 되었어."
"그러면 알젠틴 수산청의 대금 청구서가 정식으로 날아왔습니까?"
"야! 그것은 자네가 들어와서 알아보면 되잖아. 빨리 들어오기나 해! "
팩하고 전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전무도 사장이 혼자 차·포 떼고 두는 장기에 부아가 잔뜩 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사장이 입어허가서를 품에 안고 보여주지 않는다? 이건 또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알젠틴 단순입어는 용선입어의 대안으로 89년부터 꿈꾸어온 사장의 숙원사업이었다. 오징어 채낚이 어선인 703호의 용선입어가 실패로 끝난 후 사장은 차동한이란 현지 교포에게 목을 매달고 지난 2년간 꾸준히 공을 들였고, 드디어 지금 그 입어허가서를 품에 넣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일에는 매사에 순서가 있고 앞뒤가 맞아 돌아가야 하는 법. 송금과정의 의혹은 말할 것도 없고 정작 제일 중요한 입어허가서가 그 때까지도 공개되지 않고 있었으니 아무리 월급쟁이 직원이라 해도 사장이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장님, 알젠틴 입어허가서를 좀 보여주시지요."
"안 차장, 자네도 그게 그리 궁금하나? 다 내가 생각이 있어서 그러니 어업허가장은 당분간 잊어버려."
전무도 팩스로 부쳐져온 입어허가서 사본을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차장인 그가 감히 그것을 보여 달라고 했으니 사장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그러나 경섭은 귀국한 바로 다음날 경리부장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그에게 보여준 종이쪽지가 머리에 떠올라 말을 이었다.
"송금 영수증 말인데요. 그게 좀 이상해서... "
"아-그거, 내가 그냥 약식으로라도 하나 만들어 보내 달라고 했어. 송금이 전액 완료되면 2 차로 총액에 대한 걸 정식으로 보내 준다고 했어."
그가 인도에서 돌아온 직후에 부친 돈까지 모두 합하면 2백만 불 가까운 돈이 이미 알젠틴으로 송금되었던 것인데 선박입어료는 척당 3십만 불로 7척에 해당하는 입어료만 당시 환율로 20억 원에 가까운 돈이었다.
포클랜드수역에 입어하는 채낚이 어선들이 3월부터 5월까지 고작 3개월 동안 조업을 하는 반면 알젠틴 수역은 어군만 형성된다면 주년조업도 가능하므로 만약 단순입어만 성사된다면 일약 돈방석에 올라앉는 프로젝트였다.
사장은 알젠틴 수역에서의 단순입어사업으로 신청된 7척의 채낚이 어선 중 타사선 3 척을 뺀 자사선 4척만으로도 일 년 만에 송금된 돈은 거뜬히 벌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마치 복권을 사다놓고 당첨되면 돈 쓸 걱정부터 하는 사람의 심정이었다. 그러나 사장의 결정은 너무나도 무모하게 느껴졌다. 일확천금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어디 목숨을 건 모험이 없어서야 되겠느냐.
사장실을 걸어 나오는 순간 경섭은 가슴을 짓누르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저도 모르게 낮은 한숨을 쉬고 말았다. 사장의 전력을 생각하면 그의 범상치 않은 결단에 일면 수긍이 가기도 하였다.
60년도 말 사병으로 월남에 파병되었다가 제대 후에도 월남에 남아 미군 PX에서 헐값으로 빼낸 전자제품을 들고 격전의 전장으로 헬리콥터를 타고 다니며 한국 귀환장병들을 상대로 보따리장사를 한 끝에 이십만 불이라는 거액을 벌었다는 얘기는 그의 고향에선 이미 작은 전설이었다.
그 뿐인가. 고향인 묵호로 돌아와 청년실업가의 꿈을 키우던 그가 자라면서 보고 배운 게 오징어잡이 배였는지 남들이 생각 못한 450톤급 원양 오징어채낚이 어선 세 척을 덜렁 계획조선으로 신조하여 80년도 초에 줄줄이 포클랜드 어장으로 출어시켰는데, 그 해 오징어만으로 20억 원을 벌어 들였으니 그 당시 수산업계의 사람들이 놀라지 않은 이가 없었다.
도대체 그만한 배가 부산을 출항하여 인도양을 거쳐 케이프타운을 돌아가는 45일간의 긴 항정을 소화해 낸다는 것은, 더구나 남위 50도의 거친 해역에서 수 개월간 조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백전노장 선장출신들이 군림하던 당시 수산업계로서도 위험천만의 발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과 대만의 시험조업 보고서를 입수한 D수산의 은밀한 출어계획을 알아낸 그가 사계의 우려를 비웃기나 하듯 출어를 감행한 결과 오징어의 황금어장을 개척한 공로자가 되어 일약 수산업계의 기린아로 우뚝 서게 된 것이었다.
포클랜드섬의 스탠리항으로부터 동쪽으로 약 1,200마일 떨어진 사우스조지아 섬 주위로 17세기에 침몰한 구라파 범선들의 잔해가 수두룩한 것을 알고 있는 선장출신 사장들은 아마도 서울 안 가본 박 서방처럼 십중팔구 그를 처음부터 얼간이로 비아냥거렸을 것이다.
오징어가 명태나 고등어처럼 대중어로서 폭발적인 수요가 일어난 것은 80년대 초 프로야구의 출범과 통행금지 폐쇄에 따른 유흥주점의 범람과 때를 같이했다. 그 당시 마른 오징어와 땅콩은 야구장이나 룸살롱의 단골메뉴였다. 남서대서양의 오징어 어장발견으로 일 년에 무려 60여 만 톤의 오징어가 국내에서 소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정작 우습고도 민망한 것은 그가 알젠틴 송금을 위한 자금을 구하러 어느 종합상사를 찾아 갔을 때의 일이었다. 금융실명제가 도입되기 전, 다시 말해 세상이 보다 투명해지기 전 일부 종합상사들은 외형 불리기와 돈놀이에 치중했다. 매출액 기준으로 재계서열이 매겨지고 여전히 관치금융이 만연했던 시절이었으니 내로라하는 종합상사들은 어떤 식으로든 외형을 늘려 싼 이자의 은행돈을 끌어대는데 급급했다.
종합상사의 수산부는 생산자의 어획물을 현금으로 인수하여 1차 판매업자에게 이자조로 마진을 붙여 넘기고 매출자료만 챙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때 이자는 전적으로 생산자의 부담이었다. 수출입대행도 다 이자놀이의 방편으로 성행하던 시절이었다. IMF 이후 기업의 구조조정 탓으로 저마다 수산부라는 간판을 걷어치웠지만 그 때는 원양선사들의 어획물을 미끼로 다들 돈놀이에 열심이었던 것이다. 더러 자체적으로 마진장사를 하는 직거래 형태도 있었지만 대부분 이자놀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장은 D상사의 수산담당 이사를 찾아 가 알젠틴 프로젝트를 설명하며 50억 원의 선수금을 요구했다. 입어허가서가 떨어졌다는 얘기를 했음은 물론이다. 빌려준 돈의 이자는 제쳐 놓고라도 오징어배 7척의 연간 수양고가 어림잡아도 200억 원이고 당시 이자율은 년 26프로였다. 구미가 당기는 거래였다. 그렇다고 돈을 빌려주는데 물속의 고기를 담보로 할 바보천지가 어디 있으랴. 그 이사라는 양반이 말했다.
"담보는 제공할 수 있겠지요? 사장님, 그런데 입어허가서를 좀 보여줄 수 있습니까? "
"아- 그럼요. 근데 이사님 이건 절대 비밀로 해 주셔야 합니다. "
그렇게 말한 뒤 사장은 품에서 입어허가서사본을 꺼내어 이사의 얼굴에 쑥 들이 밀었다가 재빨리 도로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이사님, 배 이름들 봤지요? "
"저...잠깐 읽어보면 안 될까요? "
"아- 내용은 서반아어로 돼 있어 읽어도 모릅니다. 또 알아서도 안 되고요. "
"...... ? "
D상사의 수산부 팀장이 바로 그 뒷날 경섭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안 차장님, 알젠틴 단순입어가 맞기는 맞는 겁니까? "
경섭인들 입어허가서 내용을 읽어 보기나 했나. 그렇다고 함부로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팀장님, 그 땜에 이번에 채낚이 어선을 새로 한 척 더 샀다 아닙니까. 그런 걸 어찌 속이겠습니까. 업계에 허가서 내용이 미리 누설되면 사업이라고 할 수가 없지요. "
다만 경섭은 차동한이 선장출신들이 버글버글한 원양수산업계의 특성을 간파하고 직원들에게조차 허가서 내용을 읽게 해서는 안 된다고 사장에게 신신당부를 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우려가 백번 일리 있는 생각이라고 해도 사장 자신은 외대 서반아어과 학생이라도 몰래 불러 품에 넣고 다니던 그 입어허가서를 한 번 읽어 보기라도 했어야 했다.
신년이 되어 조업시기가 임박해졌다. 단순입어의 세부조건이 곧 부칙으로 나온다고 해서 그에 맞춰 선박운항계획을 짜야 했으므로 운항책임자인 경섭은 날이 갈수록 마음만 고단했다. 라스팔마스에 간 전무가 돌아올 때를 기다려 그가 알젠틴행 비행기를 탄 것은 포클랜드수역 입어가 이미 개시된 3월 초순이었다.
註)
1.용선입어: 외국의 경제수역내 입어를 위해 현지인이 외국어선을 용선하여 어업을 행사하 는 형태로서 선박의 국적을 유지한 채 현지인의 사업체 명의로 어업허가를 득하 는 방법임.
2. 단순입어: 외국어선이 자국의 국적을 유지한 채 연안국의 어업허가를 득해 입어하는 형 태임. 이 경우 선주는 연안국 정부에 대해 입어료만 지불함.
3.
미국의 마이애미를 경유하여 알젠틴의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가는데 꼬박 36시간이 소요되었다. 상공에서 내려다본 아르헨티나의 국토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칠레와 경계를 이루는 서쪽의 안데스 산맥 바로 밑까지 산도 없고 깊은 구릉도 없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고 푸른 초원들 사이로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황토빛깔은 우루과이를 경계로 바다에 합수되는 ‘라 플라타’ 강의 지류들이었다.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았으니 시차적응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도착지 시간이 아침이면 무조건 기내에서 술을 마시고 잠을 청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삼 일 정도는 밤낮없이 몽롱하게 지내야만 했다. 회사의 명운이 걸렸다 해도 과언이 아닌 사업이었는지라 경섭은 기내에서도 평소 습관처럼 쉬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단순입어허가를 믿고 이미 포클랜드어장 입어권을 자진 반납한 조업선들은 공해에서 하루 5톤가량의 저조한 어획을 감내하며 본사로부터의 알젠틴 입어지시를 오매불망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자연 걱정과 의문이 여름장마철 먹구름처럼 꼬리를 물고 일어났던 것이다.
당초 채낚이 어선 세 척을 알젠틴 입어에 동참시키겠다고 약속했던 D수산은 단순입어에 대해 회의적이어서 입어료의 사전송금도 거절했는가 하면 교활하게도 종합상사로부터 큰돈을 빌려온 사장을 구워삶아 바다에 떠 있는 자기네 배 한 척을 경섭의 회사에 팔아넘기기까지 했다. 그 배 이름은 103-DS호 였다. 따라서 알젠틴 수역 밖의 공해에서 목이 타는 회사의 채낚이 어선들은 이미 5척으로 불어나 있었다.
공항에 나온 사람은 차동한의 처남인 유양춘이었다. 지난 해 합작입어사업을 검토하러 왔을 때 차가 공항에 직접 나와 그를 깍듯이 대하던 생각이 나서 경섭은 조금 의아했다.
"사장님은 임파선 수술로 지금 입원중인데 오늘 밤 퇴원 하실 겁니다. "
유는 그가 처음 알젠틴 땅을 밟았을 때 서반아어를 모르는 그를 시중드느라 고생을 많이 한 친구로 순진한 구석이 많아 호감을 갖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왠지 그의 눈치를 흘끔거리는 것 같아 마음이 찜찜했다. 차가 벌써부터 그를 멀리한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 나와 있는 회사의 공무감독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조 주임을 민들레호 기관부품과 함께 배에 태우려고 하는데, 103호에 태워야할지...? "
"배에 태우는 일은 좀 더 기다려 봅시다. 알젠틴 입어조건이 최종 결정되면 배들이 들어와 선박검사를 받아야할지 모르겠소. 그러면 이리 넘어와서 일을 봐야지 않겠소. "
"그럼, 조 주임을 여기 잔류시키고 나는 15일 귀국하겠습니다. "
우루과이의 수도인 몬테비데오는 어로계약이 2년인 한국 트롤어선들의 기지로 활용되고 있었다. 트롤어선들은 여름까지는 알젠틴 경제수역 외측 공해에서 오징어를 잡고 12월까지 포클랜드 주변 수역에서 가오리나 메루루사나 로리고 등을 어획하는데 90년도 초에 이미 15척 가량이 이곳 어장으로 몰려와 1-2월에는 몬테비데오 항에서 수리 및 어구보수 등을 하며 휴식기를 가졌다. 공무감독과 조 주임은 회사 소속 트롤선 2척의 수리 일로 파견되었다가 그 때까지 몬테비데오에 지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동한의 사무실로 들어서니 유양춘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가이 맞이했다. 작년에 보았던 미스 김이란 아가씨 외에도 단발머리의 눈이 큰 한국 처녀가 한 명 더 있었고 그 옆으로 경섭의 또래 쯤 되는 삼십대 후반의 처음 보는 남자도 짧은 눈인사를 건넸다. 그의 이름은 김국환이었다.
그 무렵 차동한은 한국에서 섬유원단을 수입하여 알젠틴 시장에 팔고 있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옷가게는 유태인들이 독점하고 있었는데 캐주얼복이나 유아복 등 저가품들로 한국인들이 파고들어 시장을 잠식하는 바람에 유태인 상인들은 어느새 살롱 뷰티크 형태의 고급 정장 품목으로 밀려나 있었다. 차동한 회사의 직원이 늘어난 것은 당연해 보였으나 메넴 대통령의 연줄로 큰 사업을 하겠다고 이곳에 왔다는 그의 말을 생각하면 어딘가 석연찮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장실로 들어서니 말쑥한 양복차림의 차가 앉은 채로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 안 차장 , 오느라 고생 많았지요? "
작년에 만났을 때의 깍듯한 존댓말이 사라지고 마치 자신의 부하직원을 대하는 듯한 말투였다.
"목 수술을 했다고 들었는데 얼굴은 전보다 더 좋아 보이십니다. "
작년 9월 처음 만났을 때의 그의 인상은 입은 옷이나 얼굴에 오래된 홀아비의 궁색함이 많이 배어 있었다. 최근의 송금 말고도 그는 703호의 용선입어 뒤치다꺼리를 핑계로 적지 않은 돈을 사장으로부터 뜯어갔는지라 이래저래 그의 땟국을 쪽 뺀 모습이 경섭은 별로 탐탁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 하 하! 안 차장 입심은 여전하네요. 그건 그렇고 내가 안 차장 온다기에 얻어놓은 건데 이거 하나 피워 봐요. "
차의 말하는 폼에 여유와 거드름이 완연했다. 그가 책상위에 펼친 것은 향나무 케이스에 담긴 시거였다. 라벨을 보니 스페인에서 들여온 최고급품이었다. 이 작자가 처음부터 웬 호들갑인가 싶어 경섭은 더욱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침에 커피와 토스트로 간단히 속을 채운지라 시거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시거나 파이프에 담는 잎담배는 안주도 없이 위스키를 마시는 서양 사람들의 체질에 적합했다. 더군다나 기관지가 실하지 않은 그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성의는 고맙습니다만, 전 시거를 피우지 않습니다. 입어허가 건으로 시간이 급한데 우선 그 얘기부터 들었으면 합니다."
" 아-예... 관련부처와 이야기가 거의 완료된 상탭니다. 수산청 실무국장과 내일 미팅합니다. 미팅에서 입어 컨디션이 대강 나올 겁니다."
그 동안 줄곧 품어온 의문이 바로 입어컨디션이었다. 자국의 수산업법에 없는 단순입어허가가 대통령령으로든 특별법으로든 법적인 뒷받침이 되어 만들어졌다면 허가서상에 입어의 조건이 기존 관련법 어디에 따른다는 식으로 반드시 언급되어 있어야함이 마땅했다. 그런데 입어허가서가 나온 마당에 그 시행규칙이 따로 만들어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얘기였다. 이런 점을 사장이 간과하고 그놈의 허가서 사본을 품에 감춘 채 2백만 불에 가까운 돈을 성큼 송금했으니 꼬박 하루 반나절이나 비행기를 탄 그의 가슴이 벙어리 냉가슴이었거나 아니면 옥중의 춘향이 속곳이었다.
한편 아르헨티나의 정치사를 살펴보면 정부의 행정관행이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1946년에 탄생한 페론정권은 국가사회주의를 천명하고 포퓰리즘의 원조인 극단적인 노동자 보호정책을 펼쳤는데 이것이 두고두고 국가의 부를 탕진하는 원인이 되었다. 페론은 1955년 군부 쿠데타로 실권하나 1973년 다시 민정으로 재등장하고 이듬 해 그가 노환으로 죽자 부통령이었던 그의 부인이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등장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녀가 바로 오늘까지도 애창되는 ‘Don’t cry for me Argentina‘의 주인공인 ‘에비타 페론’이었다. 그러나 그녀도 1976년 3월의 쿠데타로 실각하였고, 1981년 대통령이 된 비올라 장군이 경제난국을 수습하지 못해 재임 9개월 만에 실각하자 그를 이은 갈띠엘라 장군은 이듬 해 말비나스(포클랜드)섬의 영유권을 놓고 영국과 전쟁을 벌여 불과 75일 만에 패전함으로써 알젠틴의 엉성한 국가 살림살이가 만천하에 알려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패전 후 군부가 물러나자 알폰신 라울이 이끄는 민간정부가 수립되었고 그 뒤를 이어 89년 페론당의 카롤로스 사울 메넴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는데, 메넴이 야당 국회의원 시절 미국의 유태계 거부들에게 정치자금을 구걸하러 다닐 때 어찌어찌 하여 차가 그의 비서를 만나 연줄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 메넴 덕에 한 밑천 잡겠다고 차는 알젠틴으로 이주해 왔다는 얘기였다.
이왕지사 내일이면 뚜껑이 열린다고 하니 하루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항간에는 블랑코 라는 수산국장이 4천만 불에 대만선박 60여 척을 입어시키는 계약을 대만 정부와 체결했다는 얘기도 떠돌고 있었다. 경섭은 알젠틴의 수산관계에 제일 정통할 것으로 생각되는 H기업 사무실을 방문하기 위해 차의 사무실을 나왔다. H기업은 80년도 초반, 이곳에 연육가공시설을 갖춘 대형트롤선을 이끌고 어업이민사업을 시도했던 남미어장의 선구자였다.
註 )
1.메루루사(Meriusa hubusi); 흑명태
2.로리고(loligo): 꼴뚜기
4.
H기업 사무소는 부둣가와 상업지구를 둘로 나누며 곧고 길게 뻗은 누에베 데 훌리오란 대로의 부둣가 노변에 있었다. 현지 소장은 한국에서도 면식이 있는 자였으나 경섭을 대하는 태도가 왠지 떨떠름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포클랜드 오징어 어장의 발견으로 그 당시 국내업계에선 너도 나도 오징어 조업에 목을 매다는 실정이었고, 몇 년 전부턴 아예 알젠틴 합작투자로 오징어 어선을 투입하는데 눈을 돌린 한국 원양어업회사 직원들이 장삼이사로 몰려와 법석을 떨던 때라 그의 방문이 결코 달가울 수 없었던 것이다.
4천만 불의 현지투자와 연계한 대만 어선들의 단순입어 소문을 확인하니, 자기도 어제 수산청장을 만났는데 그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라고 했다.
"수산업법이 작년 말 임시국회에서 상정되지 않아 올 가을 정기국회로 다시 미루어졌어요. 현지투자와 연계한 단순입어 가능성은 인정하더라도 수산업법이 개정되고 난 후의 얘기겠지요. "
수산업법이 개정되어 봐야 아는 얘기라니. 그러면 대통령 특별법이라는 것은 순전히 차동한이 지어낸 말이 아닌가. 무뚝뚝한 그의 응대가 부담스러워 경섭은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다음에 또 찾아뵙겠다고 하니, 그는 만나봐야 할 얘기도 없다며 퉁명스럽게 응대했다.
이래저래 기분이 울적해진 경섭은 하릴없이 부둣가로 발길을 옮겼다. 갤러리들이 모여 있는 플로리다 골목을 지나자 ‘산 마르틴’ 공원이 나왔다. 독립전쟁의 영웅인 ‘산 마르틴’ 장군이 말을 타고 있는 동상의 위용이 역동적이었다. 높은 실업률과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으로 허덕이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옛날 번성했던 시절의 유물들이 거리 곳곳에 즐비했다.
경섭은 공원의 벤치에 앉아 눈부신 햇살과 아름다운 공기에 몸을 내 맡기며 1965년 농업이민으로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딘 꼬레아노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농업이민단들은 그들이 경작할 땅과 기후와 영농법에 대한 무지로 이민 초기단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듬 해 뿔뿔이 흩어져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흘러 들어와 도시빈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후 그들이 어엿한 알젠틴 시민으로 정주하기까지 온갖 역경을 헤쳐 나온 꼬레아노들의 이민사는 눈물겨운 얘기였다.
초기 이민자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은 했으나 막상 정착할 곳이 마련되지 않아 한동안 이민선에 머무르며 이 부둣가를 서성거렸다고 했다.
-세대주들은 이민짐을 찾아야 한다고 아침만 먹으면 부지런히 세관으로 나갔고 할 일없는 아녀자들은 답답하고 무료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부둣가 풀밭에 나가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철없는 어린 것들은 어른들의 심정과는 상관없이 풀밭에서 뛰놀며 노래도 자주 불렀다. 아이들은 그 당시 모국에서 한참 유행하던 ‘빨간 마후라’ 라는 유행가를 곧잘 합창하곤 했다. 노래를 부르던 아이들은 신바람이 났지만 심사가 편치 않았던 나에게는 그저 공허한 메아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
출항이 임박한 이민선을 한시바삐 떠나야 했지만 정착할 곳이 정해지지 않아 끊임없이 불안하고 막막했던, 당시 이민단원의 한 사람이었던 어느 여인의 술회를 생각하며 경섭은 자신의 처지가 지금 그녀와 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기울어 경섭은 공원을 떠나며 또 다시 내일 일을 걱정했다. 입어허가서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자. 하루하루 차동한의 얼굴만 바라보며 그의 요설에 귀 기울일 시간이 없어.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이를 앙다물었다. 호텔로 돌아온 그는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차동한이 입어허가서를 그에게 보여주도록 연락을 취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호텔을 나온 경섭은 오늘은 알젠티노가 한 번 되어 보자며 길거리 카페에서 카푸치노를 한 잔 시켜 마셨다. 그 때 웬 늙은 영감이 다가와 구두를 닦겠느냐고 물었다.
"꾸안또 에스?"
"꾸아뜨로 밀, 세뇰!".
이곳의 3월은 초가을이었다. 하늘은 푸르고 태양은 눈부셨다. 지중해의 황금빛 햇살이 무색했다. 아침저녁으로 찬 기운이 돌았지만 낮이 되면 거리 곳곳이 아름다운 색깔로 알록져 화창한 기운이 넘쳐났다. 아름다운 공기라는 뜻의 도시 이름이 그래서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차동한의 집무실로 들어서니 웬 노신사가 앉아 있었다. 그 노인은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코한과 친분이 깊은 사이인데 지금은 차의 관청 일을 도와주는 로비스트라고 했다. 시거통은 어디로 치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차는 곧 수산청 국장과 입어 컨디션에 관한 담판을 지으러 갈 것이라고 했다. 경섭은 거두절미하고 입어허가서를 보여 달라고 했다.
"아니, 그건 이 사장이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말라고 한 서류예요."
그가 화들짝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며 손사래를 쳤다.
"그래요...? 차 사장님, 지금 나는 이 사장님의 대리인 자격으로 여기 와 있는 거예요. 본사에서 어제 팩스로 지시한 게 없어요? 그럼 지금 우리 사장님께 전화로 확인해 드릴까요? "
차가 입술을 삐쭉 내물며 한동안 언짢은 표정을 짓더니 마지못한 듯 서랍을 열어 서류를 꺼냈다. 그리고 난 뒤 차는 허둥거리며 노인을 데리고 사무실을 나갔다. 그의 방에 혼자 남게 된 경섭은 입어허가서를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몇 줄을 채 읽기도 전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충격이 왔다. 배 이름이 열거된 다음 줄에 국적을 바꾼다는 구절이 있었던 것이다. 서반아어로 된 글이지만 문형이나 주요단어들이 영어와 유사하여 어림잡아 그 뜻을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펄떡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경섭은 대뜸 누에베 데 훌리오 거리에 있는 윤 부장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윤 부장은 대학 일 년 선배였다. 그는 3년 전 H기업 직원으로 이곳에 파견되었다가 최근 S수산의 알젠틴 합작회사 지사장으로 몸을 옮긴 터였다. 한국의 어선을 알젠틴 국적으로 바꾸는 현물투자형태의 합작사업은 말이 합작이지 현지인은 명의만 빌려주는 월급쟁이에 불과했다. 경섭은 윤을 만나 다짜고짜 그들의 선박도입허가서 사본을 한 부 달라고 했다. 경섭의 출장목적을 번연히 알면서도 예의상 꼬치꼬치 일의 자초지종을 묻지 않았던 그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안 형, 허가 관계로 돈은 절대 미리 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일이 어째 잘 돼 가는 거요?"
그 말에 경섭은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차동한이 우기던 단순입어허가서라는 것이 합작회사의 선박도입허가서와 자구 하나 틀리지 않고 똑 같았던 것이다. 경섭은 순간 눈앞이 노래졌다. 공해에서 포클랜드 입어선들의 절반 이하도 못 미치는 어획을 감내하며 입어소식만 애타게 기다리는 자사 채낚이 어선들과 선원들의 얼굴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경섭은 물 한 컵을 부탁했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없이 호텔로 돌아와 대낮부터 잠을 청했다. 한국과 12시간의 시차가 있었으므로 이 판국에 그가 낮에 할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도대체 누굴 만나고 어디를 구경 다닐 그런 기분이 아니었다.
밤 열두 시가 가까워 전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인 양 푸에르토 마드린에서 103호의 선원이 실종되었다는 급한 전갈이었다. 밤 두 시가 넘어 사장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그때서야 경섭은 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사장님, 빨리 건너 오셔야겠습니다. 오늘 허가서를 읽어 보았는데 단순입어허가서가 아닙니다."
"안 차장, 금방 뭐라 그랬노. 그게 뭔 말이야? "
“합작회사 허가서와 똑같아요. 선박은 수입통관절차를 거치고 국적을 바꿔야하는 조건입 니다. 이 허가서대로라면 지금까지 차가 몽땅 거짓말을 했다 그 말입니다."
"하-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네. 내가 가도 4월 초나 돼야 하는데.... , 차 사장은 오늘 내일 컨디션이 따로 나온다면서? "
"글쎄,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오늘 웬 영감과 수산청 담당국장을 만나러 간다고 하더니만 오후에 물으니 면담이 연기되었다고 합디다. 제 생각엔 사장님이 빨리 와서 송금한 돈이라도 회수하든지 아니면 차 사장 은행구좌를 압류하든지 그게 급선무라 봅니다."
4월 초까지라면 차가 몬테비데오 은행에 입금된 돈을 남겨놓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사장은 D상사에서 차입한 돈에 대한 담보와 보증에 따른 서명 등의 일에 묶여 당장 움직일 수 없다는 얘기였다.
사장과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다시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103호 선장이었다. 환자선원이 생겨 입항했는데 내항에 묘박중 밤에 선원 한 명이 실종되었다는 것이었다. 기관원 정종구. 63년생. 카톨릭 신자. 이틀 전 사관으로부터 구타당한 사실을 우루과이 선원들이 이미 해경에 진술했다고 했다. 경섭은 마드린으로 내려갈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잠을 청했으나 잠은 끝내 오지 않았다.
註)
1. 꾸안또 에스?: Cuanto es?( How much?)
2. 꾸아뜨로 밀: Cuatro mil. (4천 아우스트랄, 아우스트랄은 알젠틴 화폐단위임.)
5.
실종사고의 경우 사망으로 확인이 되지 않을 경우 만 24시간이 경과한 후 실종여부를 판단하게 되는데 인근 주정부가 있는 라우손 소재 법원판사의 결정을 얻어야만 했다. 경섭은 선장에게 사고보고서를 작성하게 했다. 또한 법원에서 선·기장과 초사 및 동료 선원 등 최소한 네 명의 진술이 필요할 것이므로 말을 맞추어 놓으라고 전화상으로 미리 일러둔 터였다.
법원 일을 맡아줄 변호사는 선박대리점에서 주선해 주었다. 아침 일찍 방선하고자 했으나 해경의 저지로 그리스 국적의 운반선에서 잠시 대기해야 했다. 그 배는 한국의 오징어 합작어획물과 200해리 알젠틴 경제수역 외측에서 남북으로 오르내리며 공해조업을 하는 한국의 트롤어선 및 채낚이 어선들의 어획물을 실어 나르는 라비니아소속 냉동운반선이었다.
선장의 보고서와 지방신문에 난 선원 실종기사를 본사에 팩스로 전송한 후, 변호사와 라우손에 있는 판사를 면담한 뒤 출장재판을 요구했다. 판사를 모시고 우루과이 선원 네 명과 선장의 진술을 듣고 나니 어느덧 해가 기울었다. 우루과이 선원들이 1항사와 정종구의 불화를 언급하는 바람에 1항사의 추가진술을 위해 다음 날 라우손 법원을 한 번 더 다녀와야 했다. 우루과이 선원들은 비록 한국어선에 하급선원으로 승선했으나 자기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으며, 강력한 노조의 힘에 길들어져 있는데다, 육체적으로 왜소한 한국선원들에게 정신적으로도 꿀리지 않아 통솔하는데 애로가 많았다.
지친 몸으로 대리점으로 돌아오니 대리점 매니저가 물 담배인 마떼를 빨며 퇴근도 않고 그 때까지 경섭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 열 시가 되어야 저녁을 먹는 것이 이들의 습관이었다. 식사를 하고 대리점 사무실로 돌아오니 한국에서 두 차례나 전화가 왔다고 했다. 부산사무소로 전화를 하니 창원에 있다는 정종구의 가족들이 몰려와 난동을 부리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현재로선 그가 죽었다고 단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말 그대로 실종이었다. 바다 한 가운데라면 몰라도 내항에서 발생한 사고였으므로 시체가 나오지 않는다면 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인지 가족들도 그때까지 우는 사람이 없었다.
마드린 항구는 상업적 부두시설이 없었다. 소형선박들을 위한 계류장과 유류보급용 선석이 해안의 왼편에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었고, 오른쪽은 넓은 백사장으로 되어 있어 휴양시설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 외국 어선들은 만 입구 쪽의 묘박지에 떠 있었는데 해경에서 그가 익사했으리라 추정하고 삼 일째 내항을 샅샅이 수색했으나 끝내 사람의 형체를 찾을 수 없었다. 선미에 그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의 사물 중 선원수첩만 없어진 것이 확인되어 다들 그가 육지로 달아날 심산으로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었다고 짐작했다. 수영을 할 줄 안다면 이미 해안가로 헤엄을 쳐 달아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선원으로 배를 탄 작자가 하필이면 미국도 아닌 알젠틴에서 왜 육지로 달아날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미스터리였다.
나흘 만에 법원으로부터 선박억류해지명령이 떨어졌으나 배가 출항하기 직전에 느닷없이 선원 여섯 명이 배에서 뛰어 내렸다. 전날 선장이 선원들에게 알젠틴 입어에 따른 회사의 계획 등을 설명하고 분위기를 좀 달래 달라고 요구했으나 경섭은 머리가 혼란스러워 거절했던 것인데 결국 사단이 벌어진 것이었다. 양상에서 선주가 바뀐 배라서 선원들에게 애사심을 기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언제든 어획이 부진하여 돈이 되지 않으면 선원들은 조업거부에 돌입했다. 그런 지경에 배가 항구에라도 들어가면 하급선원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보따리부터 싸는 일이 다반사였다. 경섭은 피가 마르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무조건 다시 배에 태워야 한다고 경섭은 소리쳤다. 어둠에 묻힌 바다는 그의 그런 절박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뱃전을 찰랑이며 간지럼만 태우고 있었다. 다행히 대리점의 매니저는 눈치가 빨랐다. 해경대원들을 앞세워 무단하선자들을 부두에 억류 시킨 후 이민국에 통지해 경찰을 부르더니 그들을 강제로 승선시켰다.
3월부터 입어한다고 해놓고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 공해조업에 대한 보상책도 내놓지 않으니 하선하겠다는 것이 선원들의 주장이었다. 배를 보낸 후 대리점에 돌아오니 선장이 목이 타는 소리로 다시 경섭을 찾았다. 계류장에서 배를 뺄 때 기관사들이 작업을 거부하는 바람에 기관장이 직접 엔진의 시동을 걸었다고 했다.
"차장님, 어쩌면 좋겠습니까? "
시계가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선원들이 선내파업에 들어간 상황이라 선장이 어떻게든 선원들을 회유할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경섭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이었다.
"일단 공해어장으로 출발해. 알젠틴 입어가 무산되면 귀선만의 문제가 아니잖아. 본사와 의논해서 일주일 안으로 공해조업에 대한 보상책을 마련할 테니 선원들을 이해시켜. 일단 오늘 일을 본사에 타전하고. "
"차장님, 그럼 그 말씀을 믿고 어장으로 출발합니다. 약속하신 것 꼭 부탁합니다."
외항으로 나서며 선장이 마지막 보이스를 보내온 것은 새벽 세 시가 훨씬 지나서였다. 그 시간에 먼 바다에서는 대만선박 한 척이 영해를 침범했다가 해군함정에 나포되어 예인중 도주하다가 해군의 발포로 선원 1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고기에 대한 욕심이 영해침범을 유혹하고, 또 배가 붙들리면 최소한 1개월 이상 육지에 발이 묶이고 50만 불 가까운 벌금을 뜯길 판이니 어선들은 왕왕 목숨을 건 도주도 불사했던 것이다.
註)
라비니아 (Lavinia): ‘80년대에 남미포클랜드어장의 냉동오징어제품을 국내로 반입하는 운
송을 도맡았던 그리스의 냉동운반선사.
6.
마드린항 외곽지대의 해안가에 서식하는 바다사자는 알라스카산보다 몸의 색깔이 탁하고 윤기도 덜해 보였다. 알고 보니 피부가 검고 윤기가 도는 알라스카산은 바다사자의 한 부류인 물개였고 온난한 곳에 서식하는 이 무리는 털이 황갈색인 그야말로 바다사자였다. 해안가에는 '코모드라론'이라고 부르는 펭귄과 흡사한 바다새 무리도 여기 저기 눈에 띄었다. 북태평양의 고위도에만 서식한다고 알고 있었던 바다사자가 남아메리카 남부해안의 따뜻한 바다에도 살고 있는 것이 뜻밖이었다, 암놈보다 덩치가 크고 이마에 혹이 있는 수컷을 처음 먼발치에서 일별하곤 혹 바다코끼리인가 했으나 입 밖으로 드러난 긴 송곳니가 없었다. 바다사자들은 12월이면 건너편 해안으로 가 출산하고 3월이면 새끼들을 데리고 다시 이곳으로 온다고 했다.
비행기 출발시각까진 그래도 시간이 남아 경섭은 마드린의 해변을 거닐며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황금빛 태양은 눈부셨고 바다는 코발트색으로 찬란했다. 백사장에서 바캉스를 즐기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아름다웠다. 비키니차림의 금발여인들은 너도 나도 일류모델을 연상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토스트와 빵에 바를 ‘둘세 데 레체’와 코카콜라를 한 병 사들고 경섭은 아예 그들 쪽으로 바싹 다가가 파라솔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작정하고 눈으로 그들의 가슴이며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선글라스가 있었더라면 그는 아마도 해가 떨어질 때까지 그렇게 앉아 있었을 것이다.
마드린에는 사십대 후반의 한국인이 운동화와 옷가지 등을 파는 꽤 큰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한인교포가 모두 세 가구 살고 있었다. 옷가게 주인은 사업가로서의 수완이 뛰어나 놀랍게도 주정부를 통해 합작사업용 어선도입 쿼터를 이미 5척이나 확보하고 있었다. 이미 한국의 모 회사와 채낚이 어선 한 척을 계약했고 배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현재 선박검사 중이라고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에 도착하여 경섭은 또 다시 한 무리의 한국 사람들과 조우했다. 일부는 합작입어를 위해 몰려온 자들이었고 일부는 나포된 어선을 풀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고기를 남들보다 더 많이 잡을 수만 있다면, 선장들은 영해침범도 마다하지 않았고 또한 선주들은 선박의 국적을 바꾸는 일을 누워서 떡 먹는 일쯤으로 여겼다. 떼고기를 잡기 위해 지구의 끝이라도 달려 갈 만큼 한국의 원양어선들은 용감했다. 그래서 누구라 할 것 없이 그들은 바람 잘 날 없는 북대서양 뉴펀들랜드 어장이나 남빙양의 얼음바다까지 쫓아 다녔던 것이다. 깊은 바다 속의 고기를 잡아 올리는 일은 바다 사나이들에겐 언제나 노동 그 자체가 희열이기도 했다.
경섭은 호텔로 돌아와, 타사의 합작입어러시와 차동한이 주무르고 있는 단순입어의 허위성을 요약하고, 공해조업선들에 대한 보상대책을 시급히 마련할 것을 요청하는 기사를 작성하여 본사로 팩스를 보냈다. 7십만 불의 수취인으로 표시된 농목축수산부 차관은 2월 4일자로 사직했다는 소식도 덧붙였다. 밤이 되자 회사와 자신의 꼴이 우스워 경섭은 또 다시 마음이 울적해졌다. 할 수 없이 바에 내려가 혼자 맥주를 세 병이나 마셨다. 그리고 울어 봐야 아무도 달래 줄 사람 없는 텅 빈 집의 아이처럼, 이내 깊은 잠 속으로 숨어 버렸다.
밤사이 본사로부터 아무런 지령도 날아오지 않았다. 거금 2백만 불이 날아갈 판이라 사장도 쉽사리 그의 보고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전무는 회사의 차입보증에 서명을 거부한 터라 이 판국에 실무 총책임자로서 왈가왈부하고 나설 입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섭은 다시 차와 대면했다. 그는 수산청 국장과의 면담이 아직 성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이 자꾸 좀 더 기다리라는 애기만 하고 있다고 했다. 경섭은 정부에 지급했다는 7십만 불의 영수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의 갑작스런 요구에 차가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차는 우물쭈물 서랍을 뒤지는 시늉을 하더니 얼굴을 바꿔 집에 따로 보관해 두었다고 둘러 댔다. 내일 볼 수 있겠느냐고 하니 그러마고 대답했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모른 체 하고 경섭은 다시 입어허가서의 의문점에 관해 차근차근 물어갔다.
"허가서가 합작사업의 선박도입허가서와 똑 같은데 이를 단순입어허가서라고 말하는 근거는 뭡니까? "
"아- 그건 따로 컨디션을 달 수 있다는 점이지요."
"그럼, 선박을 통관하고 국적을 바꿔야 한다는 구절은 또 뭡니까? "
"그것도 스페셜 컨디션으로 해결됩니다. 임시국적을 부여받는 방법인데 소련 선박들이 그렇게 해서 조업한 선례가 있어요."
그의 이마와 콧등에 송글송글 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좋습니다. 입어허가 신청서 상에는 지금 기다리고 있는 스페셜 컨디션 내용이 포함되어 있겠군요. 그 신청서를 좀 보여 주세요."
"그건 작년에 이 사장한테 사본을 보내 드렸어요. 원본은 수산청에 넣었고 저는 지금 가진 것이 없어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이 자가 언제까지 나를 핫바지로 만들려는 것일까? 한국에서 송금한 돈은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 은행의 그의 구좌에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범죄를 입증하지 못한다면 그의 구좌를 동결할 수도 없었다. 지금 내가 그의 멱살을 잡고 이 사기꾼 놈아 하고 화를 낸다면 그는 돌아서서 코를 싸잡고 쾌재를 부를 것이다. 그래 어디 나를 화나게만 해봐라. 그런 심보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은 참아야 한다. 경섭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 아직까지 수산청과 타결되지 않은 게 뭡니까? "
"어획물 취급규정, 알젠틴 선원 관계. 임시국적취득 방법 등이지요.다음 주 화요일 미팅 약속이 정해졌어요."
차는 또 일주일을 늦추었다. 그가 말하는 모든 것들은 허가서상에 허가 조건으로 병기되어 있어야 할 내용들이었다. 최근 섬유원단 두 컨테이너를 통관했다고 했는데 남의 쌈짓돈으로 제 장사밑천을 삼는 게 분명했다. 그래도 지금은 참자.
저녁 무렵 경섭은 한국교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까르보보가의 백구촌을 찾았다. ‘재아 천주교 성당’의 신부를 만나 정종구의 실종사고를 알리고 혹시 그가 출현하면 연락해 줄 것을 부탁했다. 작년에 자주 들렀던 음식점 ‘장원’ 주인에게도 똑같은 부탁을 했다.
백구촌이란 이름은 109번 버스 종점에서 유래했다. 66년도에 초기 이민자들이 정착한 곳은 126번 종점인 레띠로 판자촌과 150번 종점인 비쟈 쏠닷띠에, 109번 종점인 바리오 리바다비아였다고 했다. 주로 볼리비아에서 이민 온 빈민들을 위해 정부에서 도시 외곽에 지은 난민촌 같은 지역이었다. 80년, 알젠틴정부가 이 지역의 불량주택들을 헐고 연립 임대주택 단지를 지어 이주시킬 때 봉제 삯일을 하던 초기 이민자들은 바리오 리바다비아와 인접한 까르보보로 옮겨와 한인 집단을 이루었는데, 그들은 이곳을 여전히 백구촌이라 부르고 있었다.
라마루께 영농이민단으로 출발하여 일 년도 안 되어 뿔뿔이 흩어졌던 초기 이민자들이 도시빈민의 탈을 벗게 된 계기는 근 15년 동안 너도나도 요꼬, 편물, 봉제 삯일에 전념한 때문이었다. 그리고 80년대에 이르러 그들은 온세상가로 진입하여 하나씩 의류도매업과 의류 생산업자로 변신하였던 것이다.
백구촌에만 오면 경섭은 마치 자신이 한국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김치도 있고 불고기도 있고 설렁탕과 비빔밥도 있었다. 콩나물과 고추, 배추, 무를 파는 야채상이 있는가 하면 떡집도 있었다. 심지어 한국식 대중목욕탕까지 있었던 것이다.
설렁탕을 파는 ‘할머니집’에서 경섭은 통통하게 잘 익힌 수육에 소주를 기울이며 저녁을 먹었다. 차와의 전쟁이 언제쯤 끝날 것인지는 불투명했지만 설렁탕의 국물맛은 진하고 고소했다.
註)
둘세 데 레체( Dulce de leche); Sweet milk. 달콤한 우유.
7
사장이 당도할 4월 초순까지 빈둥거릴 일이 마뜩했다. 하루는 윤 부장을 앞세우고 경섭은 리아추엘라와 라 플라타 강의 합류점에 있는 옛날 번성했던 항구 도시이자 탱고의 발상지로 유명한 보카로 밤 나들이를 나갔다. 이곳은 보카 주니어스란 유명한 프로 축구팀의 연고지이기도 했는데 부두와 공업지구에 인접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갖가지 색으로 채색된 낡은 목조건물들이 늘어선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탱고 춤을 구경할 수 있다는 카페를 찾고 있었다. 미국 시애틀의 부둣가 건물들이 슬럼화로 낡고 칙칙한 모습을 띄고 있듯이 이곳도 화려했던 예전 모습의 흔적은 낡은 건물에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오래 전부터 이탈리아계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어 이곳의 레스토랑에 오면 독특한 이탈리아식 요리들을 맛볼 수가 있었다. 19세기 중반부터 무역항으로 번성했던 당시 이곳의 바나 카바레, 카페들은 보헤미안 풍의 노동자들과 뱃사람들로 붐볐고, 그들과 이곳의 유흥가를 무대로 세월을 보내던 불량배들에 의해 탱고 춤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작은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코디언처럼 생긴 반도네온의 쓸쓸하면서도 애잔한 집시풍 선율이 머리를 휘감았다. 마침 무대에는 검은색 정장차림의 키 큰 흑인 남자와 허벅지가 반쯤 드러난 분홍색 원피스를 걸친 여자가 탱고 춤을 추고 있었다. 흑인이 무용수라니 놀라운 일이었다. 백색인종을 고집한 아르헨티나에서 흑인을 보는 것이 처음이어서 신기했다. 그 옛날 스페인 정복자들은 흑인들이 눈에 띄기만 하면 죄 붙잡아 불알을 깠다고 했다. 그래서 흑인들은 전부 브라질로 도망갔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구경하는 아르헨티나식 탱고 춤에 경섭은 경악했다. 4분의 2박자의 스타카토로 끊어지는 리듬에 맞춰 댄서들은 어깨를 반듯이 한 자세로 목을 꼿꼿이 세운 채 얼굴을 좌우로 절도 있게 꺾는가 하면 서로의 체중을 잊은 듯 포옹한 채로 가볍고 은근하게 발을 끌며 슬로우 턴을 하는데, 둘이 한 몸인 듯 바라보는 것 자체로 가슴이 설레고 숨이 막혔다.
밝고 경쾌한 장조로 선율이 바뀌자 무용수들 못지않게 경섭의 몸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드디어 흑인 남자의 무릎이 여자의 허벅지 사이를 현란하게 들락날락거리면서 원형의 좁은 무대를 빠르게 회전하는 장면에서는 전율하는 쾌감을 느꼈다. 투우사를 사랑한 집시여인의 정열적인 플라맹고보다 더 짜릿한 뜨거움이 온 몸을 격류하며 지나갔다.
"19세기 중엽 쿠바의 무곡인 하바네라가 선원들을 통해 이곳에 상륙한 것이 탱고의 기원이라고 해요. 하바네라가 아프리카계통인 '칸돔베'의 영향을 받아 본래의 우아함이 없어지고 대신 강렬한 리듬감과 빠른 템포를 곁들인 밀롱가로 탄생했고 이것이 1900년 무렵 탱고로 거듭난 것이라고 해요. 탱고가 독자적인 문화로 확립된 것은 1930년대 무렵부터죠."
춤이 끝났음에도 격정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아 얼떨떨해 하고 있는 경섭에게 윤 부장이 탱고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영화에서 보던 사교춤과는 영 딴판인데요?"
"아- 그건 콘티넨탈 탱고라고 해요. 아르헨티나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탱고가 사교댄스나 살롱뮤직에 적합한 우아하고 세련된 형태로 작곡되고 춤도 거기에 맞춰 변형된 것이지요. 멜로디가 우아하고 가요적이어서 리듬이 부드러워요. 유럽식은 반도네온대신 아코디언으로 연주하지요. 여기 탱고는 다운타운의 불량배나 가우초들의 생활을 노래한 것이나 실연을 노래한 영탄조가 많아요. "
"그럼, 혹시 '라 쿰파르시타'라는 노래도 탱고곡인가요?"
"맞아요. 아르헨티나 탱고의 명곡으로 치죠. 우루과이 출신인 마토스 로드리게스가 1915년에 작곡한, 전곡이 단조로 된 노래인데 유명한 테너가수 티토 스키파가 이 노래를 즐겨 불렀어요. 우리 집에 그 사람 판이 있는데 언제 한번 같이 들읍시다."
윤 부장에게 탱고의 유래를 듣고 나니 경섭은 탱고 춤을 추고 싶은 생각이 꿀떡 같았다.
3월도 벌써 하순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쌀쌀하여 가을 기운이 완연해졌다.
103호는 4월 15일까지 정상조업을 하기로 선원들과 잠정합의 되었다고 했다. 끝내 하선을 하겠다고 고집하는 선원들은 본사에서 중국선원들로 교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공해조업의 어획량은 척당 하루 200-300개가 고작이었다. 한 팬에 20킬로그램으로 계산하여 4-6톤의 어획량에 불과했다. 포클랜드 입어선도 하루 500개 정도로 어획부진이 계속되었으나 뜻밖으로 공해상의 트롤선들만 15톤 수준으로 호조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이 때쯤이면 오징어의 크기도 굵어지고 어황도 본격적으로 호전되어 입어선의 경우 하루 40톤, 공해상이라도 평균 20톤이 보통이었다. 뒤늦게 새로 구입한 909호도 뉴질랜드에서 어장으로 막 출발했다는 소식이 닿았다.
경섭은 그가 출장을 나온 사이 사장이 배를 한 척 더 사들였다는 소식에 경악했다. 오징어 조업에 올인한 사장의 뱃심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느새 단순입어 프로젝트를 위해 신규로 증척된 채낚이 어선은 세 척이었다. 103호는 국내어업허가가 있는 배였지만 다른 두 척은 알젠틴 단순입어를 전제로 급구한 배여서 어업허가도 없는데다가 어장도착일자도 타 선박에 비해 늦어져 선원들에게 200-300톤의 조업보상톤수를 미리 책정해 둔 상태였다.
허가가 없는 두 척은 용도불명의 배라서 선가는 낮았지만 개조수리비와 어구, 출어경비들을 계산하면 척당 10억씩은 좋이 들어갔을 것이다. 무허가 조업선들은 단순입어가 무산되면 공해상 조업이라도 하겠지만 초기 투자금액이 고스란히 배에 묶이는데다가 조업자체도 결손이 뻔해 예상되는 경영수지 악화가 걱정이었다. 더 큰 고민은 그들의 어획물을 국내로 반입할 방법이었다. 어업허가 없으니 저들이 잡는 어획물은 불법어획물인 셈이었다.
이 모든 사태를 파악한 경섭에겐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다. 하루빨리 사장이 와서 차동한과 엉터리 허가서에 대한 담판을 짓고 우선 무허가 선박에 대한 법적인 타개책을 강구해야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장은 아직도 차동한의 거짓말에 미련을 두고 밤낮으로 차에게 전화를 걸어 닦달을 하는 모양이었다.
농목축수산부 차관에게 갖다 바쳤다는 7십만 불에 대한 영수증은 여전히 행방이 묘연했고 입어허가 수수료라는 140만 불의 용처에 관해서도 차는 계속 횡설수설로 일관했다. 어느 날은 늙은 로비스트와 대통령궁을 방문하러 간다고 호들갑을 떨었고, 또 다른 날은 공무원들에게 쥐어줄 돈을 찾으러 간다고 여직원을 대동하고 몬테비데오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의 하는 짓이 하도 가당치 않아 경섭은 작심하고 하루는 그를 붙들고 심문하듯 따졌다.
"7십만 불은 무슨 명목으로 지급했습니까? "
"허가 신청서에 척 당 10만 불씩 예치금으로 지급하게 되어 있습니다. 허가가 났으니 내라고 해서 준 거죠."
"신청서가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면 정부에 대한 공식적인 납부금일 텐데 그걸 장관한테 직접 갖다 주었다고요? 누구랑 가서 주었는데요?"
" 빌립뽀 수산청장하고 가서 주었어요."
" 단순입어인데 왜 예치금이 필요합니까?"
" 예치금은 자기들이 받을 로얄티 같은 것인데, 나중에 돈도 안 주고 배가 도망가면 안 되니깐 미리 요구하는 거죠."
"그러면, 일을 봐주는 고위 공직자들한테 지급하는 리베이트란 얘기 아닙니까, 그런 걸 그들이 영수증이라고 만들어줬다는 말인가요? "
"그건 이놈의 나라를 모르고 하시는 말이에요. 그리 행정이 밝으면 지금 이 나라가 이 꼴로 살겠습니까? "
차는 네가 몰라도 한참 모른다는 투로 말머리를 끌고 갈 참이었다. 또 다시 그의 입술 가장자리에 뽀글거리며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가 흥분하면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끄는 버릇이 있는지라 그는 재빨리 차의 말을 끊었다.
"그럼 140만 불은 어찌된 영문입니까? "
"아- 그건 꼬한에게 전달했어요. 입어허가서 받으러 가면서 건네주었어요. 지금은 스페셜 컨디션 문제로 애걸하는 입장이라 영수증 얘기를 아직 못하고 있어요."
차가 말한 꼬한은 한때 메넴 대통령의 비서실장이던 사람이었다.
"그 부분도 납득이 안가네요. 입어료가 정부구좌로 들어가야지 왜 꼬한에게 건너갔습니까? "
그 대목에서 차의 얼굴이 갑자기 벌겋게 달아올랐다.
경섭은 일 년 전 합작사업계약건으로 차를 만났을 때 일이 생각났다. 그는 이곳에 오기 전 미국에서 곡물 수출상을 한 경력을 자랑삼아 늘어놓더니, 당시 한국 수산회사들과 접촉하던 알젠틴 교포들을 열거하면서 침을 튀겨가며 그들을 싸잡아 매도하던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알젠틴 교포들 중에서 정부 관료들과 친하다고 떠벌리는 작자들 말이에요, 그거 모두 상종 못할 사기꾼들입니다. 태권도 실력으로 대통령 경호실에 근무했다는 타이거 전 알지요? 얼마 전 한국 가서 단순입어 내 준다고 몇 개 회사로 부터 뜯어 낸 돈이 백만 불 가까이 되는데 지금 미국 도망가고 없어요. 여기서 정부관리 운운하는 사람들은 절대 믿지 마세요. 허구한 날 쿠데타로 날이 새는데, 돈 그거 관리들에게 섣불리 주었다가 그 뒤 책임은 누가 지는데요. 난 그래서 여기 교포들은 안 만나요."
차가 사장의 저돌성과 우매함을 간파하고 둘만의 비밀로 은밀히 진행해온 이 사기극의 종말은 뻔했다. 그러나 그에게 이미 건너간 돈을 어떻게든 회수하여 회사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그의 따귀를 때리는 것은 나중 일이었다.
"이 사장이 오면 내가 다 오픈할 겁니다."
머리회전이 빠른 차가 상황을 얼버무리려고 불쑥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말했고, 경섭은 이쯤에서 바싹 조았던 동아줄을 슬그머니 풀어 주었다.
註)
칸돔베(Candombe):흑인들이 춤을 추면서 줄지어 거리를 걷는 가장행렬과 그 음악
8
사장이 당도한 것은 무려 한 달이 지난 4월 초순이었다. 사장은 무슨 영문인지 부둣가와 인접한 쉐라톤호텔에 방을 따로 잡았다. 차라리 조석으로 사장 시중을 안 들어도 되어 다행이다 싶었다. 차가 마중을 나간다고 해서 사장의 얼굴을 본 것은 다음날 차의 사무실에서였다. 사장은 벌써 차동한과 그간의 경위에 대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차 사장, 7십만 불이 있어야 허가서를 찾는다 해서 내가 돈을 부쳤지 않았소. 그 뒤 2월 언제인가 쏠라 사인이 있는 영수증을 보내줘서 내가 보니 허가서와 동일한 사인이라 당신을 백 퍼센트 믿고 또 이 차로 돈을 보냈는데 이게 뭐란 말이요."
"사장님, 내가 그 때 뭐라 그랬어요? 컨디션이 나온다, 기다려라 해서 한국에 그대로 전했고, 2월 십 며칠인가 미팅하러 가니 또 돈을 달라고 해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기브-압 하자 그랬지 않습니까? 그래 사장님이 여기까지 왔는데 어쩌나, 일은 마무리 시켜야지 해서 내 돈 2십만 불을 보태 3월 13일 이 차로 돈이 건너갔던 겁니다. "
자기 돈으로 2십만 불을 보태었다는 것은 한국에서 2차로 120만 불만 송금했기에 제 돈을 보탰다는 얘기였다. 그가 2십만 불의 현금을 선뜻 대납할 정도로 형편이 좋았느냐 하면 천만의 말씀인데도 그렇게 능청을 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컨디션이 허가서에 다 나와 있다 캐놓고 이건 어찌 된 거야? 대통령령으로 떨어진 허가고 쏠라가 사인한 허가서라 해서 내가 믿고 돈을 보냈고, 다른 회사가 개입되면 당신 커미션 정산이 번거로울 것 같아 내가 우리 배로 다 한다니깐, 당신이 뭐랬노? 좋습니다. 안 그랬나? "
차가 컨디션 운운하며 그만 포기하자고 공갈을 친 것은 1차로 7십만 불이 넘어간 뒤의 일이었다. 물론 처음 돈을 보내라 할 때는 입어조건이 허가서에 다 명시된다고 했을 것이다. 돈을 줘야 허가서를 찾을 수 있다니 돈을 보낼 수밖에 없었고, 그 다음에 컨디션 운운하며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라 하고 공갈을 쳤던 것이다. 사장으로 하여금 피 같은 생돈으로 배까지 세 척을 사게 해놓고 배 산 것은 제 잘못이 아니라고 차는 딱 잡아떼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이 사장님께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배를 사라고 언제 말 한 마디 했습니까? 그 쪽 자금사정을 알기나 합니까? 나중에 듣기로 배를 세 척 샀다 하기에 돈이 많아서 산 줄 알았죠. 내가 사장님께 무슨 원수가 졌다고 되지도 않을 일을 꾸며 이 고생을 한답니까? 나는 이게 뭡니까? 내 갈 길도 바쁜데... 매일 밤 사장님 전화를 받고 나면 골이 빠개질 것 같더라고요. "
이쯤 되면 영화배우가 따로 없지 싶었다. 경섭은 더 참지 못하고 울화통을 터뜨렸다.
"차 사장님, 이 나라 행정이 아무리 개판이라 해도 줬다는 돈에 대한 영수증은 있을 것 아닙니까? 쏠라 차관의 영수증도 팩스로 보낸 것은 정부공문서에 차관 사인이 된 거던데 그래 그 원본도 여태 안 보여 주고, 또 꼬한에게 준 돈도 그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 2월부터 지금까지 나온다는 그 컨디션을 어찌 믿으란 말입니까?"
"이 나라 일이라는 게 정확한 시점을 예측할 수 없다고 내가 누누이 애기했어요. 나도 일이 이리 꼬일 줄 알았으면 2년 반이란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을 겁니다. 위에서 지시가 내려갔고 실무자들이 관련규정들에 대한 협의가 끝나지 않았다고 하며 기다려라 하니 난들 어떻게 합니까? "
"그래도 그렇지요. 반 쪼가리 허가서를 내 주고 허가 수수료를 받는다는 것이 이치에나 닿는 말입니까? 미국에서 사업을 했다는 차 사장님이 이 친구들이 돈 가져오란다고 그렇게 앞뒤 안 재고 돈을 갖다 바칠 수가 있느냐고요?"
그의 말이 하도 교활한지라 부아가 터져 경섭은 이때다 하고 그만 속내를 드러내는 말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애들 말론 국적문제만 남았다고 해요. 딴 것은 다 협의가 끝났습니다. 만약 이것이 안 된다고 하면 한국에서 송금한 돈은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내 생각에는 언제 되어도 된다고 봅니다만 한국에서 그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느냐가 문젭니다. 내일이라도 일단 꼬한을 만나보고 어떻게 할 것인지 판단을 합시다."
그가 자기 입에서 송금한 돈을 돌려주겠다는 얘기를 하자 사장은 조금 안심이 되는 눈치였다. 또한 꼬한을 만나게 해 주겠다고 하니 그 순간 경섭도 갑자기 눈앞에 먹구름이 걷히는 기분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차는 무례하게도 내일 아침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휑하니 혼자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사장은 점심을 함께 한 뒤 자신이 묵는 호텔을 혼자 돌아갔다. 차의 말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마지막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장이 딱해 경섭은 그의 생각을 사장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어차피 내일이면 차의 거짓말을 입증할 수 있으리라 싶어 말을 삼갔다. 또 사장이 미국에 급히 전화할 일이 있다며 저녁은 혼자 먹겠다고 해서 경섭은 별 생각 없이 오후 내내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때가 되어 백구촌을 찾았다. 정종구가 출몰한 흔적은 아직 아무데도 없었다.
날이 밝기가 두렵기도 하고 잠 못 이루며 뒤척이는 밤도 괴로웠다. 내 돈이 남의 수중으로 들어간 이상, 그 돈을 생채기 하나 없이 받아 낸다는 것이 한국에서도 힘든 일인데 같은 한국 사람이라 해도 작정하고 남의 돈을 꿀떡 삼킨 자를 생소한 외국에서, 그것도 한국과 낮과 밤이 다른 알젠틴에서 어떻게 등을 칠 것인지 그 방법이 묘연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안 차장 애기를 듣고 보니 그 놈들한테 말려든 것 같아요. 어쨌든 꼬한에게 가서 함 따져 보자고요."
꼬한을 만나기로 한 다음날 사무실을 나서며 차는 마치 남의 일처럼 중얼거렸다. 오라, 이 자가 이제는 모든 책임을 알젠티노들에게 돌릴 심산이로구나. 하여튼 이런 작자를 믿고 사장이 돈을 성큼성큼 보냈다는 사실이 경섭으로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꼬한은 대통령 비서실장직을 관두고 차기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느라고 따로 선거 사무실을 차리고 있다고 했다. 온세상가쪽으로 걸어서 몇 발 안 되는 곳에 위치한 우중충한 대리석 건물의 이층 사무실로 들어서니 웬 늙은 여자가 타이프라이트를 치다 일어서며 그들 일행을 맞이했다.
"부에노스 디아스! 꼬모 에스타 ,세뇰 차 ?"
여자가 호들갑을 떨며 차에게 인사를 건넸다.
"무이 비엔. 그랴시아스. 에스타 독또르, 꼬한?"
여자가 안쪽의 크고 넓은 문을 열자, 안경을 낀 말끔한 양복차림의 노신사가 등이 긴 의자에서 일어나 이쪽을 향해 정중하게 목례를 보내 왔다. 그 정도 신분이면 양복 윗주머니에 행커치프를 꽂을 법도 했는데 옷차림은 그저 수수한 편이었다. 사장은 작년 방문 때 핑크하우스로 그를 만나러 갔다고 했지만 왠지 그와 초면인 듯 의례적인 인사만 건넬 뿐이어서 조금 의아했다. 잘 모르긴 해도 차가 폼으로 사장을 핑크하우스로 안내했겠지만 비서실장이 바쁘다는 핑계로 사람 대면도 안 시키고 사장을 도로 데리고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 사기를 치기 위해 이미 그 때부터 연막을 쳤으리라.
차가 꼬한이란 노신사에게 한국 파트너가 지금 허가서의 스페셜 컨디션이 안 나와 큰 문제가 생겼다. 그 땜에 당신의 애기를 듣고자 한다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경섭이 첨언했다.
"우리는 우리 선박이 한국 국적을 갖고 알젠틴 영해에서 조업할 수 있는 입어허가서를 요구했다. 미스터 차가 허가서가 나왔다 해서 정부에 지급해야 한다는 입어허가 수수료 등을 이미 모두 송금했는데 정작 허가서는 알젠틴 국기를 달아 조업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 부분에 대한 해명을 듣고 싶다."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하려다 보니 미스터 차가 만든 신청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허가서 한 장으로 만들기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우선 외국어선을 도입하는 조건의 국내 어업허가를 받은 후 국적 문제는 2차적으로 풀어보자고 어드바이스 했다. 국적 문제는 특별한 경우이므로 시간이 걸린다. 분명한 것은 지금 노력중에 있으며 그 해결시점에 대해서는 언제라고 분명하게 답할 수 없다.”
어드바이스 했다? 단순입어허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사전에 차가 사전에 인지했다는 중요한 단서를 꼬한이 말하고 있었다. 순간 차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고 사장의 얼굴은 창백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지난 2월부터 채낚이 어선 7척에 대한 단순입어 허가서라는 차의 얘기에 우리는 추가로 어선 세 척을 구입했고 막대한 자금을 들여 그 배들을 출항시켰다. 지금 자사 채낙이 어선 6척이 두 달 전부터 입어를 기다리며 공해에서 대기상태이고 선원들의 원망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국적문제가 언제 해결될지 조만간 구체적인 계획이 서지 않으면 우리 회사는 자금경색으로 도산할 수밖에 없는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 단순입어 조건에 대한 최종결정이 언제 나올 것인가 그게 당면한 최대현안이다. 당신 힘으로 이 어려움에 처한 우리를 어떻게 구해줄 수는 없겠는가? "
"그건 당신들 사정이지 내 문제는 아니오."
안타까운 나머지 혹시나 하고 해본 소리였지만 돌아온 대답은 마치 영화의 마지막 자막처럼 단호하고 냉정했다. 이제껏 차의 세 치 혀끝에 놀아난 것이 원통하고 절통했다. 대통령령에 의한 허가니, 수산청장이 아닌 농목축수산부 장관이 서명한 특별허가서니 하는 얘기를 했던 차의 간교함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사장은 눈앞이 노란 듯 꼬한의 사무실을 나오면서 다리를 휘청거렸다. 차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두어 걸음 뒤처진 채 말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이 사장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 또 자기는 어떻게 응수할 것인지를 곰곰 생각하는 듯싶었다. 곁눈으로 살피니 사장은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한 낯빛이었고 심지어 부들부들 몸까지 떠는 것이었다. 저러다 심장마비나 뇌경색이라도 오면 어쩌나 싶어 아직 점심시간이 이른데도 경섭은 서둘러 인근의 식당으로 사장을 안내했다. 우선 사장을 자리에 앉게 하고 경섭은 물 한 컵을 따라 사장에게 건넸다. 그러나 물 컵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사장은 고통스런 표정으로 차를 잠시 쏘아 보더니 울컥 피를 토하듯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내 손에 총이 있었다면 당신을 쏘았어!"
사장의 음울하면서도 비통한 일성에 차는 눈을 똥그랗게 뜨며 몸을 움츠렸다. 식당에서 그와 사장이 옥신각신 하는 것이 민망할 것 같아 경섭은 서둘러 빨리 되는 냉면을 주문했다.
먹는 둥 마는 둥 점심을 끝낸 후 사장이 묵고 있는 세라톤호텔에 세 사람은 다시 마주 앉았다.
"일 차로 송금된 공탁금은 곧바로 회수하여 돌려 드리겠습니다. 한국에서 송금한 돈은 책임지겠지만 배를 산 것은 절대 내 잘못이 아닙니다."
"차 사장님, 허가서만 나오면 다 끝난다고 해서 그 말만 믿고 배를 산 것 아닙니까. 애초에 잘못된 정보를 준데 대해선 당신이 책임을 져야지요."
경섭은 스스로 흥분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보다 더 험한 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차가 돈을 돌려주겠다는 얘기를 거듭하니 사장은 나름대로 험악한 분위기로 가면 좋을 게 없다 싶었는지 그런 그를 손짓으로 주저앉혔다.
"그 놈들 그 돈을 아직 안 쓰고 남겨 두었을 리는 만무하고..., 아무튼 상환문제는 오늘 밤에 좀 궁리를 해보고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허가관계는 금주 내로 방향을 다시 제시하겠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차는 돌아갔다. 언쟁을 하던 중 그가 엉뚱하게도 재작년 용선입어 파트너 인 알젠티노의 야료로 항구에 억류되었던 703호를 풀기 위해 아르헨티나에 왔던 전무가 자기에게 비자금을 좀 만들어 달라고 했다는 얘기를 꺼내어 사장의 허파를 뒤집어 놓기도 했다. 그의 좌충우돌하는 교활함에 경섭은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경섭은 혼자 차의 사무실을 찾았다. 차에게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상환계획을 내 놓으라고 다그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내일 꼬한을 만나 그의 말을 들어보고 대답하겠다는 말만 남긴 뒤 그는 또 휑하니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혼자 그의 방에 남게 된 경섭은 머쓱하여 한동안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그런 그가 보기에 딱했던지 단발머리 아가씨가 문을 열고 들어와 차를 마시겠냐고 물었다. 나이는 스무 살쯤 되어 보이고 네모진 작은 얼굴에 동그랗고 큰 눈을 가진 한국 처녀였다. 찻잔을 건네받으며 경섭은 단발머리 아가씨에게 목소리를 낮추어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저녁에 시간 좀 내줄 수 있어요? 내가 리온호텔에 묵고 있어요. 6시쯤 1층 카페에서 기다릴게요."
그녀가 살포시 웃으며 머리를 끄떡였다. 차의 사무실을 나온 경섭은 전자 제품을 파는 가게가 몰려 있는 플로리다 골목으로 가 담뱃갑 크기의 소형 녹음기를 한 대 구입했다. 차가 계속 횡설수설하고 있었으므로 상환계획에 대한 합의서를 작성하거나 아니면 후일을 대비해 그의 말을 녹취해 둘 생각이었다. 오후가 되자 호텔로 사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가 이 판국에 혼자 멀리 떨어진 호텔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했지만 경섭은 차동한의 말을 대강 전하고 사장에게 저녁에 리온호텔로 잠시 납시라는 부탁을 했다.
이순주. 그녀는 10년 전에 이민을 와 이곳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쳤다고 했다. 아버지가 한국에 있을 때 방송국 프로듀서였다는데 이곳 경기가 좋지 않자 하던 사업을 관두고 지금은 어머니와 함께 다시 한국에 가 산다고 했다. 사무실에서 그녀가 하는 일을 물으니 자금 경리 일은 미스 김이 하고 자기는 일반 행정서류 타이핑과 관공서 출입을 맡아 한다고 했다. 경섭은 마침내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쏠라 차관의 서명이 있는 7십만 불짜리 영수증을 팩스로 받은 적이 있는데 그거 혹시 본 적이 있어요?"
"아-그건 내가 타이프 친 거예요."
"그럼 농목축수산부 공문양식은...? "
"그런 것 우리 사장님이 많이 갖고 있어요."
그 때까지 옆에서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이 녀석이 나이 어린 처녀와 뭔 수작인가 하며 조용히 앉아 있던 사장이 갑자기 윗몸을 일으키며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으-잉? 그..그게 사실이가? "
미스 리도 차의 무도함을 이미 알고 있는 눈치여서, 경섭의 회사가 딱하다 싶어 이 자리에 나왔다는 말을 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배운 사람이어서 그런지 그녀도 사기꾼 같은 차의 망동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경섭은 당분간 그녀를 자신의 정보원으로 활용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도 그런 그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다. 뜻하지 않은 원군을 얻은 셈이었다. 경섭은 그녀를 보낸 뒤 사장을 모시고 베네주웰라가에 있는 일본식 식당을 찾았다. 일본인 사장이 나와 활어들은 모두 칠레와 페루 등지에서 공수하여 쓴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차의 고의적인 사기행각이 거듭 확인된 지라 드디어 사장은 패닉상태에 빠져든 상 싶었다. 경섭은 가급적 사장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맘먹었으나 회사가 처한 위급한 상황을 앞두고 만감이 교차하여 그냥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사장님, 금년 6월부터 들어올 것이라고 본 오징어 판매수입은 이제 틀린 것 아닙니까. 우선 배부터 다시 파는 걸 연구해야 합니다. 허가 없는 두 척은 이곳 합작을 계획하는 회사에 팔면 손이 수월할 겁니다. "
"우리가 합작을 하면 어때? "
"문제는 자금이지요. 그 두 척 밑으로 발생할 조업손실은 어쩌며, 합작한다면 올해 조업은 어차피 포기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사장이 침묵했다. 생선회가 나오자 경섭은 사케를 주문했다. 사장이 저지른 과오였지만 그걸 수습해야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쓰라려 그는 뜨거운 정종을 단숨에 마셔 버렸다. 사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사케를 다시 한 잔 더 시켰다.
“사장님, 제가 한 말씀 묻겠습니다. 이 회사를 2세에게 물려줄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
웬 뜬금없는 얘기냐는 듯 사장은 눈만 껌벅이며 그의 얼굴을 한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전 지금 회사를 관두고 싶은 심정입니다. 다들 합작사업 한다고 들어와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마주치는데 그들을 보기가 창피하고 괴로워서 미칠 것 같습니다. 사장님이 이 난관을 극복하고 회사를 회생시킬 각오가 서 있으시다면 저는 여기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차동한 저 놈을 요절낼 생각입니다."
말을 하는 동안 손 쓸 사이도 없이 뜨거운 눈물이 그의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 내렸다.
"안 차장, 고생 시켜서 미안해. 자네 말대로 그리 할 거야. 어쨌든 힘내서 마무리라도 잘 해 보자고."
경섭은 이때다 싶어 회사의 경영에 대해서도 전부터 벼르고 있던 말을 남김없이 다 쏟아부었다. 사장의 독선을, 회사 돈을 축내고 흠집만 냈지 정작 책임지는 일엔 열외인 중역들을 싸잡아 비난했다. 또한 참모경영을 활성화시켜 생산 및 선박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사장은 귀가 번쩍 뜨이는 표정으로 그의 얘기를 경청해 주었다. 그러나 그런 의기투합의 감격은 그 때 뿐이었다.
909호가 칠레의 최남단에 위치한 푼타 아레나스에 입항했다는 연락이 왔다. 칠레의 남단을 관통하는 마젤란 해협을 지나 일주일 뒤면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배의 입항에 맞춰 곧 우루과이로 넘어 가야할 경섭은 떡 줄 사람에게는 물어보지도 않은 채 차동한과의 담판이 그 전에 결말이 나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날 밤,잠자리에서 경섭은 악몽으로 진땀을 쏟았다. 그는 103호를 타고 있었다. 공해어장으로 가서 현장을 살핀 뒤 곧바로 다른 조업선 편으로 돌아올 참이었다. 내항을 벗어나니 곧장 큰 바다였다. 파도도 급하지 않고 바람도 느슨하였다. 갑판에 서서 항로를 응시하다 힐끔 뒤로 돌아보니 갑자기 기관실 상판이 물에 잠겨 있었다. 깜짝 놀라 브리지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선장! 배가 왜 이래? 발란스에 문제가 있나?"
선장이 그의 고함소리에 놀라 스타보드쪽 문을 열고 얼굴을 내미는 순간 이번에는 선수가 바다 밑으로 곤두박질을 치는 것이었다.
불길한 느낌을 뒤로 한 채 경섭은 아침 일찍 사장이 묵고 있는 호텔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녹음기의 성능은 양호했다. 테이프 한 개가 1시간용이어서 경섭은 택시 안에서 차의 답변을 유도할 질문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9
차가 호텔에 도착한 것은 오전 열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그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경섭은 화장실로 가 양복상의 안주머니에 넣어둔 녹음기의 키를 눌리고 나왔다. 미리 사장과 입을 맞춘 대로 작년부터 차가 단순입어를 득하기 위해 정부 관료들을 구워삶았다던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작년 8월인가, 왜 차 사장님 별장에서 정부 인사들과 파티를 연다고 했잖아요. 그 때 참석했던 사람이 누구 누구였나요? "
차는 공항근처에 실내 풀장과 넓은 잔디밭 정원을 갖춘 면적이 1헥타르인 집을 갖고 있었다. 일 년 전, 합작입어를 검토하기 위해 출장을 왔을 때 경섭은 차의 직원들과 함께 그 집 뜰에서 아사도를 구워먹고 논 적이 있었다. 그때 차는 그곳에 관료들을 초청하여 섹스파티를 연다고 자랑삼아 얘기했던 적이 있었다. 그 파티를 위해 미국 L·A에서 젊은 한국 여자들을 데려온답시고 비자취득용 인물사진들을 여러 장 꺼내 보여주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집의 내부 인테리어들을 살펴본 경섭은 차의 파티 운운 하는 얘기에 의구심이 들었다. 아무리 섹스파티라 해도 그런 누추한 곳에서 정부고위관리들이 옷을 함부로 벗을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언젠가 그도 모르게 사이에 차는 그 파티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었으며 정부 관리들로부터 이구동성 단순입어허가건에 협조할 것이라는 언질을 받았다는 내용의 서신을 사장에게 띄워 보냈던 것이다.
"부알데 부통령도 한 차례 왔다 갔고, 꺄발요 경제부장관, 농목축수산부 쏠라 차관....."
거짓말 하는 데엔 도통한 사람같이 차는 파티광경을 실감나게 늘어놓았다. 입가엔 또 다시 거품이 뽀글거리고 있었다.
부알데 부통령은 메넴 대통령의 손아래 동서와 함께 마약에 연루되었다는 정가 스캔들이 최근 신문에 터져 겨우 이름만 알 정도였다. 다음에는 꼬한을 통한 신청서 제출과정과 농목축수산부에 돈이 건네진 사연들로 질문을 이어갔다.
"정부의 공용 영수증이 아니라면 영수증을 다시 받아내겠습니다. 차관이 근거 없는 돈을 임의로 횡령한 것이라면 요절을 내서라도 찾아 낼 겁니다."
쏠라 차관은 이미 사직하고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이 아닌가. 이 대목에서 사장이 다시 한 번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꼬한의 이름과 쏠라 차관의 이름이 나왔고, 또 그들에게 뇌물까지 주었다는 얘기가 나왔으니 경섭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마지막으로 허가의 불분명한 조항에 대한 해결책과 허가의 추가 컨디션이 안 나올 경우 차의 상환계획 등을 물었다.
"5월 말까지는 해 내겠습니다. 한국 사정이 급하다면 일시적으로 알젠틴 국적으로 입어하고 나중에 컨디션이 나오면 국적을 환원 시킵시다. 입어료는 선박도입 관세로 충당하면 안 됩니까? 3-4십만 불은 당장이라도 환급해 드릴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일이 되는 것을 보아 내가 계획을 내 놓겠고요."
알젠틴 국적의 입어는 말도 안 된다. 이 달 안으로 컨디션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단순입어는 물 건너갔다고 봐야한다. 상환계획을 조만간 내놓으라. 그래서 서로 합의서를 작성하고 공증을 받아야겠다. 드디어 사장의 입에서도 고성이 터져 나왔다.
"5십만 불 정도라면 몰라도 나머지는 꼬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전체적인 상환계획을 내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장과 차 사이에 몇 차례 험악한 고성이 더 오갔다. 얼굴을 붉힌 채 씩씩거리던 차가, 내일부터 농장에 며칠 다녀올 것이며 상환문제는 내주 수요일 꼬한의 의견을 들어보고 확답을 주겠노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농장이라니? 언젠가 한번 그가 메넴 대통령의 고향에 있는 농장을 구입하여 개발할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지만 그러나 지금 그 말을 곧이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날 신문에 수산청장의 수산정책 방안이 발표되었다. 선박도입관세는 종전대로 환원되며 단순입어는 배제된다는 기사였다. 차의 거짓말은 점점 움직일 수 없는 기정사실로 굳어져 갔다.
그 무렵 바다에 떠있는 채낚이 어선들로부터 하루걸러 한 척씩 밤에 호텔로 전화가 걸려왔다. 공해어황은 하루 1,500개 정도로 호전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3호는 선원 9명이 작업을 거부하여 더는 어찌해 볼 방법이 없다고 했다. 문제된 선원들을 몬테비데오로 북상 중인 909호에 편승시키고 우선 909호 선원들을 차출하여 보충하라고 지시했다. 4월 중순인 그때까지 어획누계는 703호가 1,000여 톤인 반면 103호가 600톤, 민들레호는 400톤을 각각 기록하고 있었다. 5월 말까지 악을 써도 신규 도입선들은 적자가 불 보듯 했다. 더구나 909호는 알젠틴 입어를 전제로 뒤늦게 출어한 배라서 금년조업이 사실상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선장들도 선원들도 애가 타기는 경섭과 매한가지였다.
경섭은 아침 일찍 사장이 불러 쉐라톤호텔로 달려갔다. 고급호텔이라 그런지 얇게 썬 멜론에 치즈를 얹어먹는 맛이 특별했다. 호텔식당에서 경섭은 밤마다 호텔로 전화를 걸어오는 채낚이 선장들의 아우성에 대한 해법을 사장과 숙의했다. 조업보상톤수에 관해서는 각선 출어 일을 감안 공해조업선 10위권 평균치를 기준하여 부족 어획량을 보상하는 방안을 사장에게 내놓았다. 909호의 경우는 일단 1개월이라도 조업을 시키고 원매자가 나오는 걸 보아 사후대책을 세우자고 했다. 한편으론 달리 합작사업용으로 매각할 요량으로 서둘러 인수자를 알아보기로 했다.
방으로 돌아와 사장과 함께 경섭은 전날 녹음한 차동한의 말을 재생하여 들었다. 그의 말에 진실성이 없음을 들어 경섭은 사장에게 오늘 중 합의가 안 되면 법적인 조치를 강구하자고 제안했다.
다시 찾아간 차의 사무실은 문이 잠겨 있었다. 유양춘을 찾았으나 연락이 되지 않아 수입원단창고에 있는 김국환을 불러 사무실을 열어 달라고 부탁했다. 연락을 취한 뒤 1시간이 지나자 차와 유가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들의 표정을 살피니 전과 달리 얼굴에 찬바람이 일었다. 차가 경섭을 따로 불러 그의 방에 들어가니 유가 뒤따라 들어와 차의 곁에 앉았다. 차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시는 우리 사무실에 나타나지 말아요. 직원들의 분위기가 엉망입니다. 총으로 쏴 죽인다고 했는데 누구는 총이 없습니까? "
유가 이어서 말했다.
"당신들이 일방적으로 프로젝트를 중단시켜놓고 왜 돈을 요구합니까?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그동안 얽혀 있는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가 일시에 중단되어 우리가 상당히 곤란해집니다. 그동안 실컷 부려먹고 지금 와서 왜 우리를 난처한 입장에 빠뜨리느냐 이겁니다. 이제 서로 보지 맙시다. 계속 우리를 괴롭힌다면 알젠틴에 있을 동안 몸조심해야 할 겁니다."
실컷 우려먹었다는 말은 지난 2년간 선박들의 압류건 해지를 위해 중간에 심부름해 준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어디 그것이 공짜였단 말인가. 차가 다시 말을 받았다.
"우리는 연말에 직원에게 이윤배당을 하는 회삽니다. 정부를 상대로 사용된 로비자금을 내어 달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또 그런 돈을 상환할 능력이 어디 있다고 그럽니까? 우리 회사에 불리한 일을 자초한다면 우리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차의 막말이 끝나자 말자, 학생시절 유도를 했다는 유가 벌떡 일어나 경섭의 어깨를 잡아끌며 사무실을 당장 나가라고 소리쳤다. 그가 저항하자 유가 몸으로 그를 세차게 밀어부쳤다.
안에서 소란이 일자 사장이 뛰어들어 유를 떼어 놓았다. 합의서고 뭐고 모든 것이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결국 배를 내밀고 본색을 드러낸 셈이었다. 이제 그들과 마주앉아 타협할 희망은 사라졌다. 그들에게 서로 불행해지기 전에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註)
아사도(Aasado); beef steak
10
차가 태도를 돌변한 것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국내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면 그의 손으로 넘어간 돈을 찾는 일은 크게 염려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이 알젠틴이고 정국이 오랫동안 불안정했던 나라여서 앞일을 결코 장담할 수 없었다.
경섭은 909호의 입항일이 임박하여 알젠틴 일을 잠시 접고 몬테비데오로 넘어갔다. 사장은 우루과이의 한인교포회장인 조덕창 씨에게 변호사 선임 일을 전화로 부탁했다며 경섭이 돌아올 때까지 알젠틴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국내허가가 있는 103호의 원매자가 나와 매선조건이 오고가고 있었다.
몬테비데오에서의 일도 성가시고 피곤했다. 대리점에서는 밀린 경비를 제때 받지 못했다며 업무협조에 태만했다. 항공편으로 보내진 각종 선박부품들이 공항에서 잠을 자고 있었으며, 보충선원으로 보낼 중국선원들에 대한 신원보증조차 미루어 본사에서 항공티켓을 끊지 못하고 있었다. 신규도입 선박일로 행정 및 공무파트 공히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니 부산에서 출발하는 운반선편에 부친 탁송품들이 선박별로 제 각각이어서 SSB로 선단방송에 나갈 때마다 조업선들이 회사를 원망하는 소리가 귀를 찢는 듯 했다. 트롤선 3척을 포함해서 알젠틴 해역에 떠 있는 자사선이 모두 9척이었던 것이다.
909호의 경우 뉴질랜드에서 발진했으므로 낚시와 수중등까지 모두 국내탁송으로 보충해야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냉동기 모터와 기름여과장치의 소손으로 입항하자마자 수리공장의 신세를 져야 했는데 작년 겨울에 맡았던 수리비 체불을 이유로 공장에서 오더를 받지 않았다. 선용품과 주부식을 공급하는 회사들도 밀린 돈 얘기만 늘어놓으며 사람의 애간장을 태웠다.
그나마 밤이 되면 경섭은 자신이 겨우 살아 있는 듯 했다. 그 때까지 몬테비데오에 체류중이던 조 주임을 데리고 경섭은 밤마다 선창의 술집으로 마실을 나갔다. 바의 스탠드에 기대어 위스키를 낱잔으로 시켜 먹으며 브라질에서 넘어온 여자들의 둥글고 끈끈한 삼바 춤을 즐겨 구경했다. 3인조 멕시코 악단의 민속음악도 10불이면 곁에 다가와 애잔한 화음으로 그의 귀를 어루만지며 객고를 달래 주었다. 포르투칼계의 눈에 띄는 여자가 있어 장난삼아 화대를 물었더니 100불이라고 했다. 조 주임은 50불이고 말단 선원들은 20불이었다. 몬테비데오에는 일 년에 한 번 파시에 입항하는 트롤 선원들에겐 저마다 단골로 침대를 제공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트롤어선 선원들은 바다에서 운반선에 넘기는 어획물에 대한 전재수당을 입항 때마다 회사로부터 지급받았다. 그 돈으로 한 달에 천 불만 애인들의 생활비로 내 놓으면 그만이었다.
남미의 여자들에겐 한국선원들이 인기가 좋았다. 게으르고 술 먹고 놀기 좋아하는 현지남자들만 보다가 눈알이 또릿또릿하고 몸짓도 빠릿빠릿한 동양인을 만나면 누구나 호감을 갖고 응대했는데 먹고 살기가 팍팍한 여자들이라면 십중팔구 그들의 방문까지 수월하게 열어주는 것이었다. 알젠틴이나 우루과이나 국민들이 대부분 카톨릭 신자였다. 나라 법으로 낙태를 금지하였고 미혼녀라도 자식이 출생하면 육아보조금이 지급되었으므로 직업여성들이라고 해도 현지 거주민일 경우 아이 낳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한국계 혼혈아 수가 그때 벌써 50명에 이르렀다. 25개월 정도의 어로계약기간이 끝나면 현지에서 선원교체가 이루어졌는데, 공항에 전송하러 나온 여자들 중에 기관장 아저씨와 기관원인 조카의 애인들이 각각 갓난애를 안고 나와 눈물을 흘리더라는 얘기는 선원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술안주였다. 심지어는 이듬해 다시 선원수첩으로 들어와 아예 아버지로 살림을 도맡아 사는 사람들도 속출했다.
조 회장을 대동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온 것은 4월 하순이었다. 조 회장은 나이 탓으로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해수가 심하고 무릎이 성치 않아 경섭은 길을 걷다가 자주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경섭은 사장과 조 회장을 이끌고 윤 부장이 소개한 산 마틴가의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나이들이 지긋해 보이는 말끔한 옷차림의 노인들이 둘이 나와 상담료는 무료라며 얼마든지 물어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경섭의 얘기를 다 듣고 난 후 그들은 내일 중으로 법적조치 가능여부를 판단하여 알려 주겠노라 말했다.
믿거나 말거나 차 사장은 내일 중으로 몬테비데오에 있는 은행구좌의 잔고를 털어 한국에 송금해 주고 공적으로 쓴 돈에 대해선 영수증을 주겠노라고 했다. 열었다 하면 하는 거짓말이었다. 더구나 꼬한이 이번 일로 자신을 기피하기 때문에 농산물 수출사업도 불가능해졌고 원단장사도 크게 기대할 것이 못되니 가솔들을 이끌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얘기도 하더라고 사장이 전했다. 미국행이라. 아-미국으로 줄행랑을 놓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원수 같은 차에게 무슨 미련이 있어 사장은 여태 그를 만나며 또 그의 말에 마음을 두는 걸까?
변호사 사무실을 다녀온 후 경섭은 소송준비를 위해 그간 차와 주고받은 모든 서류파일을 챙겨 금주 내로 누구라도 출장을 보내달라는 팩스를 본사에 보냈다. 은행에서는 2백만 불 상당의 사전송금에 대한 정산을 조르고 있다고 했다. 해외송금분에 대한 사후관리 시한은 6개월이었다. 커미션이든 정부에 공식적으로 지급되는 수수료든 납득할 수 있는 계약서나 청구서 또는 용도가 분명한 영수증 등이 있어야 사후관리를 받을 수 있었다.
경섭은 회사와 차 사이에 최근 2년간 진행되어온 사업적 경위와 송금에 따른 차의 송금요청내용 및 그 배경을 설명하는 경위서를 작성하였다. 글을 써나가며 줄곧 ‘육하원칙에 입각하여’라는 말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러다가 글이 잘 풀리지 않아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그때 불현듯 낮에 사장 방에서 본, 반 쯤 열린 서랍 안에 누워 있던 메모지가 머리에 떠올랐다. 서랍 앞에 서 있는 그를 발견한 사장이 재빨리 다가와 그 서랍을 닫았지만 경섭은 등을 돌리며 혼자 실소했다. 젊은 여자의 필체였고, 그의 눈에 잡힌 글은 "당신과의 만남을..." 이란 일곱 글자였다.
이튿날 변호사 사무실에 들렀더니, 늙은이들은 형사 및 민사소송 수수료로 총 3십만 불을 요구했다. 소송절차에 소요되는 비용은 별도이며 손해배상 청구금을 감안하면 그 정도는 받아야겠다는 말과 함께 소송 착수금으로 10만 불을 선불로 달라고 했다. 경섭은 도둑놈 소굴을 벗어나듯 변호사 사무실을 박차고 나왔다. 조 회장이 잘 안다는 밀레타리란 변호사와의 미팅을 오후에 갖기로 하고 경섭은 전 날 작성한 경위서를 들고 대사관을 찾았다.
상무담당인 김 영사에게 경위서를 보이니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서류에 대한 공관확인을 받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서류내용을 읽어봐야 한다고 했으므로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앞으로 소송 등이 진행되면 후속서류들에 대한 공관확인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도 차에게 그만한 돈이 지급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했다. 그가 오후에 차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었다기에 경섭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김 영사에게 중재를 부탁했다.
밀레타리란 변호사는 민사소송 전문이었다. 돈을 많이 못 버는지 사무실이 있는 골목은 한 길에서 세 블록이나 들어간 후미진 곳이었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성격이 소탈하고 성실해 보여 첫눈에 신뢰감이 들었다. 형사 건은 연방수사국 판사를 친구로 둔 켄트가 적임이라며 각각 3만 불씩 6만 불의 수수료를 먼저 일시불로 요구했다. 민사 건은 승소시 12프로를 보수금으로 주기로 약정했다. 수수료가 여전히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람이 정직해 보여 경섭은 일단 구두로 승낙했다. 차와 김 영사가 저녁에 만난다고 했으므로 수임계약체결은 그 결과를 보고 처리하기로 맘먹었다.
조 회장은 틈만 나면 무릎통증을 호소했다. 그의 무릎을 염려해서 이동시엔 매번 택시를 타야했기 때문에 택시비로 하루에만 3백 불이 소요되었다. 몸이 불편한 조 회장이 염려되어 경섭은 밤에 그와 동침했다. 잠들기 전, 노인은 틀니를 뽑아 깨끗이 씻어 침대 머리맡에 두었다. 노인을 위해 갓등을 껐으나 쉬이 잠이 들지 않았다. 바야흐로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경섭에겐 소송이 곧 전쟁이었다. 기동력이 없으면 적에게 쉬이 뒷덜미를 잡히리라. 다음날 아침 결국 경섭은 조 회장을 우루과이로 돌려보내기로 결심했다. 노인 스스로 여기저기 끌려 다니다시피 하는 일을 괴로워했거니와, 소송과 관련해 남미의 물정을 잘 아는 현자의 지혜를 구할 수 있으리란 당초의 기대도 무너져 그가 먼저 양해를 구했고 노인도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경섭은 이 전쟁이 피아간의 두뇌싸움이라 믿었다. 그가 돈을 떼먹겠다고 나온 데는 나름대로의 방편을 이미 세워 놓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김 영사는 중재를 부탁한 경섭에게 이렇게 말했다.
"완전히 국제 사기꾼에게 걸려들었더군요."
대사도 이참에 그에게 차동한을 멀리 하라는 주의를 내렸다고 했다. 그는 미국 영주권도 없어 일본이나 캐나다, 멕시코 등지에서 미국비자를 연장해 오는 처지인데 애당초 한국에서부터 부도를 내고 도망 온 자로 파악되었다는 얘기까지 덧붙였다. 그가 메넴 주변의 인사들을 만나는 것은 그를 도와주는 미국의 또 다른 실세가 있기 때문이란 뜻밖의 얘기도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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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섭은 미스 리를 시켜 차와 유의 법정주소와 회사 및 그들의 은행구좌에 대한 자료들을 뽑아내었다. 섬유원단을 쌓아둔 창고겸 사무실 주소도 알아냈다. 또한 그녀에게 공문서 위조에 관한 증인을 부탁하여 미리 승낙을 얻어 놓았다.
사장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개인 자격으로 위임장에 서명한 후, 영사공증을 받은 사고 경위서를 지참하고 L·A로 떠났다. 같은 날 소송에 필요한 관련서류들을 한 보따리 싸들고 한국에서 K 과장이 도착했다.
이튿날은 밀레타리 사무실로 가 변호사 위임과 보수에 대한 정식계약을 체결했다. 그 후 며칠 동안 경섭은 녹음테이프와 관련서류 등의 번역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한국어를 스페인어로 번역할 공인번역사는 두 살 난 아이가 딸린 젊은 이혼녀였다.
알젠틴의 법정에서는 모든 제출서류가 원본이어야 했다. 경섭은 변호사에게 차의 형사적 책임을 공문서 위조 및 동 행사, 사기로 몰아가 달라고 변호사에게 요구했다. 정부관리가 써주었다는 영수증의 원본이 나오지 않은 상황이라 차의 사무실과 가택에 대한 압수수색이 당장 필요한 일이었다. 압수수색은 인근의 15경찰대를 동원해야 하는데 경찰대 직할 담당판사와 연방판사 등의 순서로 서류를 보여 타당성 검토를 사전에 거쳐야 된다고 했다.
저녁에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사장은 아직 미국에 머무르고 있었다. 사장은 차가 다음 주에 합의안을 들고 오겠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이 대사의 얘기를 전해 주었다. 또한 헬렌 리라는 여자가 차를 설득하기 위해 다음 주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며 그녀가 경섭을 찾을 것이라고도 했다. 알고 보니 그녀가 바로 미국에 있다는 차동한의 후원자였다.
사장은 경위서를 들고 가다가 미국에 들러 그녀에게 읽어 보라고 주었다는데 그녀가 차의 비행을 알고는 노발대발했다며 소송을 잠시 보류하라고 말했다. 차가 그의 후원자인 헬렌 리와 상의 없이 저지른 단독범행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므로 헬렌 리와 차의 관계가 주종관계인지 동업관계인지 경섭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사장이 차동한보다 그녀를 먼저 안듯 했으나 사장과 그녀의 연결고리도 짐작이 되지 않았다.
저녁 늦은 시각에 내일이면 떠날 K 과장을 데리고 경섭은 호텔을 나왔다. 벌써 5월로 접어들어 바깥 날씨는 한기가 들 정도로 쌀쌀했다.
K에게 백구촌의 한국음식만 먹였으니 오늘은 아사도를 맛보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누에베 데 훌리오를 건너 바닷가 쪽으로 걸어가면 제법 큰 불고기 식당들이 많이 있었다. 양고기 종류는 통구이처럼 장작불위에 돌려가며 굽는가 하면 ,부위별로 자른 쇠고기는 장작불 위의 석쇠에서 기름을 흘려 내리며 굽는데 불 쏘이는 일을 잘해야 고기의 참맛을 즐길 수 있어 똑같은 아사도집이래도 불 반장에 따라 손님들의 기호가 다 달랐다.
소나 돼지를 잡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한국만큼 메뉴가 다양하게 개발된 나라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한국에 버금가는 민족이 라틴계였다. 소의 혓바닥이나 양물도 메뉴판에 버젓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 말이다. 생선 요리도 소금을 많이 쓰는 탓에 갯가에서 자란 경섭의 입맛에는 아주 잘 맞았다.
아사도의 별미는 미디움으로 익혀, 씹으면 구수한 육수가 이빨 사이로 빠져 입안을 감싸는 것인데 살사 끄리오쟈나 살사 치미추리에 찍어 먹으면 고기가 입에 쩍쩍 올라붙는다는 말이 정말로 실감났다. 영미식 스테이크와는 질감이 완전히 달랐다.
메인 딧시를 주문하기 전에 죠리소와 친출린과 하몽을 조금씩 시키고 술은 집포도주를 청했다. K는 경섭의 주문 실력에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알젠틴 출장이 두 번째인데다가 올해는 벌써 두 달째 체류하고 있는지라 어느덧 그의 혀는 라틴풍 미각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메인 디시는 비페 데 로모로 시켰다. 그런 경섭을 보며 K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야-차장님! 대단합니다. 서번아어도 많이 늘었지만 주문하는 실력도 미식가 뺨치는데요."
"야, 아직 멀었어. 그나저나 많이 먹어둬라. 2차로 또 힘쓸 데가 있으니."
포도주는 많이 마시면 뒤를 감쳤다. 시계가 밤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주당들의 하는 말로 바로 술시였다. 경섭은 황홀한 고기 맛에 정신을 빼놓고 있는 K를 일으켜 세웠다. 밤공기가 여전히 싸늘했다. 내일은 만사를 젖히고라도 두꺼운 옷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술은 노변카페에서도 가능했지만 경섭은 따뜻한 실내를 머리에 그리고 있었다.
5월의 광장에서 플로리다 골목을 거쳐 산 마틴 광장에 이르기까지 희미한 수은등이 드문드문 서서 길안내를 했다. 설풍에 날아갈듯 말을 지쳐 달리는 시베리아 벌판의 외로운 자는 독립군이었고 그는 단지 먼 이국의 밤거리를 맹목으로 걷는 철새보다 못한 이방인이었다.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갈 K를 생각하며 경섭은 지구의 반대편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들의 얼굴들이 자꾸만 머리에 떠올라 고기를 씹을 때부터 처량한 생각이 파도처럼 밀물했다. 그 동안 아이들에겐 그림엽서를 두 번 띄워 보냈고 12시간의 시차 관계로 또 고단한 일과로 아내에게 전화조차 자주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찔리기도 했다.
경섭은 낮에 전무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며 혼자 마음속으로 울었다. 남들은 합작사업을 준비하느라 너도 나도 신명이 나서 분주한데 나는, 우리는 이게 뭡니까. 아무리 월급쟁이라고는 하나 이러고도 전무니 차장이니 하며 대명천지 낯을 들고 살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어찌 하든지 매듭을 짓겠습니다만 돌아가는 즉시 사표를 쓰겠습니다. 살아갈 날이 창창하니 이번 일을 거울삼아 다시 용맹정진 하겠습니다.
“전무님이 누구랑 연합하여 103호를 인수해 볼 생각이 있는 것 같습디다."
잠깐 앉았다 가자며 산 마틴 광장의 벤치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무는 그에게 K가 문득 말을 걸어왔다. 종합상사로부터 50억 원을 빌려오는 과정에 사장이 중역이라고 전무에게 자서를 요청했지만 그가 거절했고, 더욱 일이 이 지경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그도 좌불안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루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 설 생각을 하는가 보다. 그래도 그건 경섭의 몫이어야 했다. 나이도 많고 이제껏 월급쟁이로 맴도는 늙은 선배를 그렇게 일어서게 해선 안 돼. 그 때는 다만 그렇게 생각했다.
차량이 많이 줄어든 길로 오토바이를 탄 젊은이들이 굉음을 울리며 질주했다. 도심을 향해 곧게 뻗은 산타페가를 거슬러 오르다가 두 사람은 리오밤바 골목에서 좀 깨끗해 보이는 어느 카페로 들어갔다. 한국으로 치면 단란주점 형태라고나 할까. 아름답고 세련된 젊은 여자들을 전속으로 두고 술을 파는데 손님에 따라 이 차도 따라 나가는 곳이었다. 노변카페에도 아가씨들이 프리랜스로 더러 죽치고 앉아 있었는데 손님이 원하면 합석하여 같이 술잔을 나누고 눈이 맞으면 이 차로 러브호텔로 가기도 하므로 그런 여자가 많을수록 주인으로서는 장사가 쏠쏠했다. 아가씨들은 십중팔구 비싼 과일쥬스를 시켜 마셨다.
군부독재 시절, 알젠틴에서는 수만 명의 반정부 민주인사들을 차떼기로 팜파스로 끌고 가 구덩이에 파묻기도 하였고 비행기로 실어 바다에 생매장하기도 했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특히 영국과의 말비나스(포클랜드) 전쟁이 끝난 후 남녀의 성비가 급격히 기울어지자 남자들의 어깨가 대단히 무거워졌다는 것이었다. 지금이나 그 때나 나라 경제도 넉넉하지 못 해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하였고 그래서 천지에 널린 과부 미혼녀들을 먹여 살리느라 남의 돈을 등쳐먹는 사기꾼들이 즐비하니 조심해야 된다고 윤 부장으로부터 사전에 단단히 교육을 받은 터였다.
지기지기는 섹스를 일컫는 속어로 만국공용어였고, 그때까지 화대는 국제시세로 구두 한 컬레 값이 정설이었다. 네 홉들이 조니워카 한 병 값으로 100불을 불렀다. 주위를 둘러보니 세뇨리타들의 면면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K를 위해 경섭은 브룩실즈를 닮은 늘씬하게 생긴 여자를 먼저 찍었다.
항우장사도 술에 취해 있다가 나라를 접고 죽었다. 그의 경험으로도 술을 먹고 싸움을 붙으면 백전백패였다. 김두한이나 시라소니처럼 동물적인 감각의 타고난 싸움꾼이 아닌 다음에야 객지에서 술을 먹고 함부로 호기를 부려서 될 일이 아니었다. 다만 전장에 나가기 전 이승에서 마지막일지도 모를 용사들의 사육제쯤으로 생각하자.
블론드 헤어인 브룩실즈는 하얀 피부에 긴 속눈썹을 지닌, 차마 눈을 뜨고 마주보기가 민망한 미인이었다. 아 이 땅 위에 얼마나 많은 꽃들이 제 이름만큼이나 제 각각 아름답게 피어 있는가. 그러나 경섭은 늘씬한 미녀들이 버거웠다. 다섯 살 아래인 K 과장이라면 감당할 수 있으리라. 술은 한 병만 마시자. 그리고 오늘 밤 나는 마누라 같은 여자를 품고 싶다. 수더분하고 부드럽고 내가 이끄는 대로 수월하게 자세를 바꿀 수 있는 여자를.
경섭은 남자 바텐더에게 영어가 통하는 여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 말에 스탠드 한 구석에서 안경을 끼고 장부 같은 것을 뒤적이고 있던 검은 머리의 여자가 경섭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바텐더 왈, 그녀는 손님 좌석에 앉는 여자가 아니라고 했다. 그녀의 눈빛이 영화 ‘록키’에서 주인공인 실베스터 스텔론의 마누라로 나오는 여배우를 연상케 했다. 술은 마시지 않아도 음료수는 마시겠지. 몸에 손은 대지 않으마. 나는 오늘 밤 함께 얘기를 나눌 여자가 필요해. 내일 전쟁터로 떠나거든. 그렇게 말을 해놓고 보니 이름도 모를 두려움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절망의 신이 그를 향해 손짓하며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가 맞닥뜨린 이 전쟁은 숨거나 달아날 곳이 없어 보였다.
경섭은 기어이 그녀를 옆에 앉혔고 한 시간 뒤에는 그녀가 그를 따라 기꺼이 조퇴했다.
러브호텔의 방은 침대와 욕실이 트인 열린 공간이었다. 그녀와 함께 발가벗고 나란히 서서 샤워를 하노라니 그의 몸은 갑자기 염치가 없어졌다. 그래서인지 부싯돌이 제 맘대로 불뚝 솟아올랐다. 몸의 물기를 닦기도 전에 그는 샤워기 밑에서 그녀를 포옹했다. 그녀의 입술에서 군용건빵 냄새가 묻어났다. 침착하자. 서두르면 안 돼. 그녀의 아랫배에서 떨리는 솜털의 미세한 움직임까지도 놓쳐서는 안 돼.
가벼운 잽으로 로프까지 밀고 가서 좌우 훅으로 옆구리를 가격하면 그녀의 팔이 내려올 거야. 그 때 롱 어퍼컷을 구사하는 거야. 잽을 서너 차례 터뜨린 후 그는 있는 힘을 다해 훅을 날렸다. 다급해진 그녀가 그의 엉덩이를 끌어안고 밀착했지만 그는 윗몸을 떼어내며 길고 힘차게 어퍼컷을 두 번 더 날렸다. 그의 기대대로 여자의 목이 뒤로 젖혀졌지만 신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글러브에 닿는 그녀의 속살은 밀도가 높은 스펀지였다. 아- 라운드가 길어지겠구나. 3라운드에 접어들자 그는 숨이 가빠져 왔다. 로드웍을 소홀히 한 것이 걱정되었다. 마지막 30초야. 결정타를 날려야 해. 그러나 높은 토스를 끊임없이 쏘아 올리는 배구의 센터처럼 그녀는 숨 돌릴 틈도 없이 그를 도약하게 만들었다. 숨이 차서 더 이상 견디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는 순간 그녀가 코너에서 빠져 나오는가 싶더니 오히려 그가 코너에 갇히고 말았고 그의 글러브 위로, 머리 위로 부드러우면서도 깊숙한 그녀의 스트레이트가 날아왔다. 그러나 그 고통은 뜻밖으로 달고 황홀했다. 머리가 어지럽더니 숨이 끊어질 듯한 고통이 이어졌다. 그는 의식을 놓치지 않으려고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 순간 그의 심연으로부터 뜨거운 고통의 덩어리가 급속하게 치밀어 올랐다. 결국 바다에 떨어져 익사하는 나비처럼 그는 3라운드를 몇 초 남기 않은 채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오랫동안 참았던 배설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듯 그가 흘린 피의 양은 엄청났다. 그녀와의 첫 게임은 그의 완패였다.
몸을 씻기 위해 침대를 떠나는 그녀를 쫓아가 그는 무릎을 꿇었다.
"당신은 내가 만난 상대 중에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선수임을 고백합니다. 당신과 한 번 더 싸우기를 청합니다. 내가 지쳐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당신과의 추억을 평생의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그 순간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났다. 다행히도 그녀의 눈동자에 갇힌 그의 알몸은 의연했다. 그의 진솔한 고백에 감동하였는지 물을 받던 그녀가 다시 침대를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당신 리치는 너무 길고 주먹은 또 너무 아파요. 하지만 오늘은 나도 지치고 싶어요. "
연이은 시합은 5라운드에 끝났고, 종장에는 더 이상 흘릴 피도 없었고 누구의 손이 올라 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의 조상은 가우초였고 그녀의 이름은 마르셀라였다.
두 사람은 온전히 서로의 몸에 의지하여 한밤을 보냈다. 처음부터 말이 통하는 여자를 구한 것은 이러 쿵 저러 쿵 객쩍은 말로 여자의 위안을 받을 심산이었지만 말이 무용함을 안 것은, 벗은 그녀의 몸매에 그가 단번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몸이 스스로 그녀에게 감격해 버린 것이었다. 무림의 고수나 검객들이 오로지 일합의 찰나에 승부를 걸듯 벗은 육체들에겐 말은 허망이며 소용없는 변주였다. 갈구한 것은 서로의 영혼이 아니라 몸 그 자체였다. 몸이 스스로 갈급했고 몸이 스스로 갈구하고 몸이 스스로 만끽했다.
註)(註)
1.살사 끄리오쟈 ( Salsa criolla ); 피망, 양파, 토마토 등을 잘게 썰어 소금과 식용유에 무친 소스.
2.살사 치미추리(Salsa chimichurri); 마늘, 미나리, 꽃박하, 후추 등을 소금과 식용유에 무친 맵고 강한 소스.
3.죠리소(Chorizo);소나 돼지창자로 만든 순대. 짭잘하고 담백한 맛이 맥주나 와인 안주로 제격임.
4. 친출린( Chinchulin); 소의 小腸구이.
5. 하몽(Jamon); 소금에 절인 돼지의 뒷다리 고기 ,십자군 원정때나 콜럼부스의 신대륙항해 시 육류섭취를 위해 고안된 요리, 돼지훈제 제품(Panceta ahumada-돼지뱃살 부위)과 구분됨.
6. 집포도주(vino de casa): 텁텁한 맛이 나는 적포도주.
7. 비페 데 로모(Bife de lomo); 연한 고기, 특히 1 년 미만인 100킬로그램 전후의 송아지(temera) 고기.
8. 팜파스(Pampas): 드넓은 초원 또는 소를 키우는 목초지
9.가우초(Gaucho):원주민 출신의 카우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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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떠나는 K편에 실종자 정종구에 대한 서류를 챙겨 보냈다. 지방법원의 사망선고문과 해경의 수사기록과 신문에 낸 실종공고 기사 등이었다. 보험금은 3천만 원 정도였으나 가족과는 5천만 원에 합의를 봤다고 했다. 그가 가고 나니 경섭은 다시 혼자였다.
며칠 사이 한국의 수산회사 사람들이 오징어 합작사업 건으로 또 여러 명 나타났다. 저녁에 백구촌의 식당에 가면 한국의 수산회사에서 출장 온 사람들이 진을 치고 앉아 있었다. 그들과 명함을 주고받으며 경섭은 언제나 부끄러웠다. 그래서 장원 근처의 은혜탕을 찾아가 밥 때가 지날 때까지 뜨거운 물속에 누워 있기도 했다.
거듭되는 음산한 날씨를 견디다 못해 하루는 산타페 골목에 있는 옷가게에서 겨울용 콤비와 바지를 두 벌 샀다. 금액을 물으니 마쏘메노 140만 아우스트랄(미화 150불상당)이라고 했다. 마쏘메노라는 말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언제나 어리둥절했다. 한국의 재래시장에서처럼 에누리를 시도했지만 정찰제라서 안된다고 했다. 그래도 늘 마쏘메노가 붙었다. 알젠티노들은 팜파스의 농장을 사고 팔 때면 경비행기를 타고 높은 상공에 올라가 지적도를 펼쳐놓고 손가락으로 경계를 그렸으며 농장의 소가 몇 마리냐고 물으면 언제나 마쏘메노 몇 마리라고 답한다고 했다. 마쏘메노는 드넓은 평원에서 저들끼리 붙어먹는 자연 번식률과 암소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송아지나 낼 모레 자연사할 늙은 소나 도둑맞을 소까지 감안한다는 뜻이었다. 어쨌든 추위를 더니 외롭다는 생각이 한결 덜했다.
어느덧 5월도 중순이었다. 경섭은 형사담당 변호사인 켄트와 법원을 찾아가 판사를 만났다. 수색영장발부에 대해 판사는 긍정적이었다. 이튿날은 밀레타리에게 번역을 마친 관련서류 원본 일체를 넘겼다. D-데이에 대한 행운을 빌자며 밀레타리와 서로 손을 마주 잡고 하이 파이브를 나누었다. 바로 그날 저녁, 경섭은 자기를 헬렌 리라고 밝힌 여자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아담한 체구에 교양과 부티가 적절히 섞인 사십 대 후반의 여자였다. 시내 대로변의 커피숍에서 만나 4시간 가까이 계속된 그녀와의 대화를 요약하면 이러했다.
나는 차의 섬유원단 사업을 위해 백만 불 가까운 신용장을 열어 준 사람이다. 그가 내게 지급한 돈은 이제껏 이십만 불 뿐이다. 당분간 그의 신상에 변고가 일어나면 나도 큰일이다. 이 일이 끝나면 그와 거래를 끊을 참이다. 그러니 당신이 준비 중인 소송을 잠시 보류해 달라. 나는 다음 월요일 L·A 로 돌아간다. 6월 1일이 딸 졸업식 날이다. 그 다음 날 통역을 데리고 다시 와 이곳에 상주하며 차와 정산을 끝내도록 하겠다. 내 일이 끝나는 대로 당신과 연합하여 차를 때려잡자. 내겐 꼬한이란 막강한 후원자가 있다. 그를 움직이면 차도 꼼짝 못한다. 내가 L·A로 돌아가는 즉시 나의 계획을 알려 주겠다. 14일 L·A 시간 12시에 우리 집으로 전화를 해 달라. 꼭 전화해 달라.
경섭은 그 전날 김 영사를 만난 일이 기억났다. 김 영사는 차가 자기 변호사가 합의해 주지 말라고 한다며 대사에게 합의서를 들고 오겠다는 말을 번복했다는 사실을 들려주었다. 한술 더 떠 차는 대사관 직원들이 교포들에게 공공연히 돈을 달라고 손을 벌린다는 악담을 대사에게 흘려 대사가 김 영사에게 호통을 쳤다고 했다. 초등학생 아이들을 두었을 경우 외국인 전용 사립학교 교육비를 대자면 해외공관 근무수당으론 힘이 부치는 일이기도 했다. 술자리를 두어 번 가진 적이 있지만 나는 그 친구에게 밥이나 돈을 받아먹은 적이 한 번도 없다고요. 나도 잘 압니다. 아무튼 그 사람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코미디 같은 얘기를 서로 주고받았던 것이다.
헬렌 리는 결국 자기 돈을 되찾을 때까지 소송을 보류해달라는 이야기만 하고 있었고 그녀가 차를 설득하여 이 사장의 돈을 찾아 주겠다는 언급은 한 마디도 없었다. 특히 이상한 점은 자신이 L·A로 돌아간 뒤 전화를 해 달라는 말이었다. 그것도 L·A 시간 낮 12시에.
차동한은 진작부터 만날 때마다 금액의 고하를 떠나 돈을 갚겠다고 말해왔다. 그리고 마지막엔 대사관에다가 합의서를 들고 오겠다고 연막을 피우다가 그의 변호사 얘기를 핑계로 합의를 번복하였다. 정작 그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궁금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미국으로 도망치기 위해, 섬유원단을 다 팔아 치울 때까지 시간을 벌자는 속셈임이 분명했다.
헬렌 리도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차는 그렇다 치더라도 금방이라도 돈을 받아주겠다고 사장에게 호언했다던 이 여자는 또 왜 이러는 것일까. 물론 자기 돈이 먼저겠지만 경섭 자신이 확인한 바로는 차가 한국으로부터 들여온 섬유원단이 기껏해야 세 컨테이너가 전부인데 차가 빌려 쓴 신용장 금액이 벌써 백만 불이라고 둘러댔던 것이다.
"우리가 여사님의 말대로 기다렸다가, 나중에 차가 여사님의 빚을 다 갚고 남은 돈이 한 푼도 없다고 하면 그 땐 어쩔 겁니까? 여사님이 그 부분을 개런티해 줄 수 있습니까? "
"아-이, 안 차장, 그러니까 내가 돌아간 다음에 전화하라잖아요."
미소를 띤 여자의 표정이 지극했다. 경섭은 두 사람이 나이만 서로 근사했어도 그러자 하고 홀딱 넘어가고 싶었다.
"사장님께 보고 드리겠습니다. 여사님 말대로 두 분끼리 다 된 얘기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저 개인적으론 차동한 그 놈은 갈아 먹어도 시원찮습니다. 여사님도 제 심정 이해하시겠죠?"
그의 당돌한 적개심에 그녀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그는 그런 그녀를 외면한 채 주문서를 들고 일어나 곧장 계산대로 향했다.
밤늦은 시각에 경섭은 한국의 사장을 찾았다. 도대체 왜 그가 차나 헬렌 리라는 여자의 말에 그토록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므로 만약을 위해 사장에겐 D-데이를 알리지 않았다. 헬렌 리의 얘기에 사장은 다소 의외라는 반응이었으나 여전히 그녀를 믿는 것은 철석같았다. 전무도 수화기에 나타나 우루과이 조 회장을 동원해 한 번 더 차와 중재를 시켜보라고 격려했다. 그도 2년 전 두 달 가까이 알젠틴에 발이 묶여 본 경험이 있어 차의 사람 됨됨이나 이따금 외등이 켜지지 않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춥고 음습한 뒷골목들을 익히 기억하고 있을 법한데 그처럼 맹꽁이 같은 소리만 계속하고 있었다.
경섭을 혼란케 한 것은 그들의 믿음이었다. 그들의 믿음을 깨뜨리기 위해 그는 전화기를 붙잡고 삼십 분 가까이 자신의 생각을 토로했다.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 끝내 개전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믿음은 수학이나 과학에 근거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종교나 철학에 기인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유는 자명했다. 바다에 떠다니는 배는 생물이었다. 그러므로 전쟁의 와중에 자칫 일이 잘못되어 배가 육지로 끌려가 붙들리는 일은 그들에겐 결코 고려할 수 없는 사항이었다.
거듭된 그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사장은 여전히 차와의 전쟁을 꺼리고 망설였다. 돌아오는 월요일이 정작 D-데이였지만, 사장은 헬렌 리의 작전을 한 번 믿어보자는 얘기만 하고 있었다. 결국 이 전쟁은 전적으로 나의 몫이구나. 나는 최전방의 용사고 적은 벌써 진격의 나팔을 불며 전선을 뭉개고 달려오고 있지 않는가. 경섭은 스스로 화가 났다. 이 전쟁이 나의 생애에 끝나든 말든 나는 결행하리라. 갑자기 마르셀라가 생각났다. 그런 그의 결의를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이 전쟁을 치르기 전에 그 치열한 몸의 사육제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치루고 싶었다. 아직 출근 전일거야. 경섭은 양복 윗주머니를 뒤져 수첩을 꺼낸 뒤 그녀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한 동안 신호가 울린 뒤 수화기에서 웬 노파의 음성이 들려왔다.
"올- 라? "
“부에나스 따르데스! 마르셀라, 뽈-파볼! "
"에스뻬레메 운 모멘또."
노파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경섭은 그만 전화를 끊고 말았다. 그 잠깐 사이 그의 마음이 바뀐 것이다. 그녀를 찾는 자신이 마치 아파서 징징 울고 싶은 아이와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생살을 찢어 발리고 어깨에 박힌 화살촉을 후벼 파 내는 지경에도 입을 다문 채 태연자약 바둑을 두었다던 촉나라의 관우가 생각났다. 엄살을 떨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드릴 형편은 더욱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D-데이를 하루 앞두고 이순주를 불러내 저녁을 함께 했다. 그녀는 웬 더꺼머리 한국 청년을 대동하고 나왔는데 서로 사귀는 사이라고 했다. 이순주는 토요일 사무실에서 들었던 헬렌 리와 차동한의 얘기를 전했다. 이 사장이 자기를 계속 물고 늘어진다면 바다에 떠 있는 배들을 마약소지혐의를 씌워 몽땅 잡아들일 것이라고 차가 큰소리 떵떵 치더라고 했다. 헬렌 리는 그러한 차에게 이 사장을 편드는 말은 일언반구도 없었다고 했다. 그녀의 미국행 비행기 시간은 월요일 오후 7시라고 말했다. 그것은 전날 그녀가 말한 스케쥴과 일치했다. 사족으로 같은 사무실의 미스 김은 이미 홀아비인 차동한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어 돈하고 관계된 일에는 늘 함께 붙어 다닌다고도 했다.
식당은 리온호텔 근처로 잡았다. 테이블보의 색깔이 모두 아이시 블루여서 이채로웠다. 경섭은 앳된 두 연인을 위해 아사도에 곁들여 치즈와 케찹을 뿌린 만두요리를 시켰다. 내일이면 이순주도 차의 직원으로서 마지막일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그녀가 증인으로서 차의 사기행각을 입증하는데 결정적이고도 유일한 인물이었으므로 그에겐 그녀가 소중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를 통해 차와 헬렌 리와의 연결고리를 더 읽어 내는 일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창밖의 건물 사이로 스며든 어둠이 유난히 무겁고 차갑게 느껴졌다.
註)
1. 마쏘메노(maso meno) ; more or less
2. 올-라!(hola) ; hello
3. 뽈-파볼(por favor); please
4. 부에나스 따르데스( Buenas tardes !) ; Good afternoon!
5. 에스뻬레메 운 모멘또(Esperme un momento); Wait a minute
13
월요일 오전 10시. 밀레타리와 동행하여 법원으로 향했다. 15지구 경찰대를 관할하는 순회판사의 압수수색 영장을 받기 위해서였다. 15지구대에 도착하니 정오가 가까웠다. 경찰서에서 출동할 팀을 짜는데 무려 세 시간이 걸렸다. 차의 별장은 15지구대의 관할이 아니어서 세리토에 있는 차의 사무실과 온세상가에 인근한 원단창고만 수색대상으로 잡혀 있었다. 차가 왕왕 중요한 문서는 별장의 철제금고에 보관한다던 말이 생각나 자칫 헛걸음이 되지나 않을까 자꾸 조바심이 났다. 세리토의 사무실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4시였다. 총을 휴대한 경찰 두 명과 사복차림의 형사 한 명이 앞장을 서고 경섭과 밀레타리가 그 뒤를 따랐다.
사무실로 그들이 들이닥치자 차의 직원들이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스 김과 유양춘은 생전 이런 일은 처음인 듯 혼비백산하여 벽쪽으로 물러섰다. 이순주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살며시 다가서더니 경섭에게 차의 집무실을 턱으로 가리켰다. 서둘러 경찰 한 명과 형사가 사무실 서랍을 뒤지며 서류를 꺼내 일일이 경섭의 얼굴에 들이밀었지만 사무실에서 나오는 서류들은 모두가 낯설고 무용한 것들이었다. 그 때마다 경섭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한편 다른 경찰 한 명이 차의 방문을 군화발로 걷어차고 있었다. 차가 경찰이 들이닥치는 걸 알고 재빨리 문을 안쪽에서 잠갔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문이 부서지며 방이 열렸다. 놀랍게도 방안에 헬렌 리가 있었다. 형사가 방안으로 뛰어 들더니 헬렌 리가 등지고 있던 트렁크를 주목했다. 트렁크는 모두 세 개였다. 그 때 경섭은 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았다. 혹시 저 가방 안에...? 일말의 기대감에 가슴이 뛰었다. 그 때 여자가 여권을 흔들며 발악하듯 영어로 소리쳤다.
"나는 미국시민권자야. 이 짐은 내꺼야. 너희들은 손 댈 수 없어. 변호사를 부를 거야. 기다려! 기다리란 말이야!"
그러나 형사는 막무가내였다. 경찰이 달려들어 그녀를 끌어내자 형사가 경찰의 캘빈총을 건네받아 가방의 주둥이를 개머리판으로 부수더니 닭의 가랑이를 찢듯 가방을 열어 젖혔다. 아니나 다를까 가방에서 쏟아진 것은 경섭이 노렸던 바로 그 물건들이었다. 헬렌 리가 미국으로 가져갈 가방 안에서, 한국에서 보낸 입어허가 관련 팩스파일과 정부관공서 문서양식과 여러 가지 프로젝트 기안서와 드디어 쏠라 장관이 서명했다는 조잡한 영수증까지 콸콸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경섭은 형사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 광경을 목도한 밀레타리도 좋아서 연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당황한 차가 어디론가 황급히 전화를 걸었다. 그의 말로 대통령 고문변호사라는 작자에게 이 사태를 알리는 모양이었다. 곧이어 형사가 차와 헬렌 리의 신원을 확인하고 압류물건에 대한 확인과 서명을 받았다.
옷을 깡그리 벗긴 포로처럼 이미 수치심이 사라진 차와 여자가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여자가 먼저 얼굴을 붉혔다.
"흥, 당신 이 사장에게 말해, 웃기지 말라고. 출장 나와 과부들 밑구멍이나 파는 주제에..."
다음엔 차가 입에 거품을 물었다.
"야, 안 차장 ! 우릴 먼저 쳤으니깐 당신도 몸조심해야 할 거야. 너희 사장도 두고 보자고 말해. 내가 입을 열면 그 새낀 한국서 사업 못해. 이거 공갈 아니랑께."
경섭은 발악을 하는 그들의 눈을 결코 피하지 않았다. 그들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그는 속에서 부글거리며 솟아오르는 욕을 한 입 가득 물고 있었다. 그 순간 쉐라톤호텔의 서랍속에 누워 있던 메모지가 문득 머리를 스쳐갔다. 그들의 악다구니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경섭은 이것이 끝인지 시작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모레노 거리에 있는 수입원단 가게는 형식적인 수색에 거쳤다. 차가 해외로 빼돌리려 한 증거서류들이 헬렌 리의 가방에서 모조리 쏟아져 나온 터라 형사는 가게 안을 한 번 쓰-윽 휘둘러보더니 책상 위에 놓인 컴퓨터를 열어 상품수발부나 판매내역, 부가세 신고사항 등의 자료만 디스켓에 옮겨 담았다. 세리토에서 따라온 유양춘이 적의가 가득한 눈길로 줄곧 경섭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아예 유의 눈길을 무시했다. 마침 차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이곳 동정을 물어보는 것 같았다.
호텔로 돌아온 경섭은 사장에게 그날의 경과를 보고했다. 헬렌 리의 이중플레이에 대해 사장도 경악했다. 가능하면 그녀도 이 건에 공범으로 연루시키겠다고 경섭은 그의 의견을 개진했다. 사장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D-데이의 독자적인 결행과, 일거에 그들의 아킬레스근을 도려낸 그의 습격에 사장은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헬렌 리와 차가 사장님에 대해 뭔가 터뜨릴 게 있는지 그 지경에서도 큰 소리 뻥뻥 칩디다. 뭔지는 몰라도 미리 대비하셔야 할 겁니다."
"허 허 허, 있기는 뭐가 있어. 때려죽일 년놈들! 그래 앞으로 어찌될 것 같아? "
"밀레타리 얘기론 차가 내일이라도 당장 살려 달라고 빌고 나올 거래요. 그 쪽 변호사가 나타나 명함을 주고 갔는데 협상의 여운을 얼핏 흘리더라고 하더군요. 압수수색의 성공으로 이젠 형사범의 요건이 갖춰졌으므로 판사의 예비구속 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민사로 이행할거라 하는데 시간이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야말로 시간이 문제였다. 정치 테러범이나 흉악한 강도 살인범이 아닌 다음에야 남의 나라에 온 외국인들끼리 금전적인 일에 얽힌 이 사건이 과연 얼마나 알젠틴 판·검사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 수 있을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같이 죽는 거야. 너의 사장 그놈 섹스 스캔들을 폭로하겠어."
입에 거품을 문 차의 얘기가 목젖까지 올라 왔지만 경섭은 사장에게 대고 차마 그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미스 리로부터 전화가 왔다. 세리토 사무실은 어제부로 문을 걸어 잠갔고 그래서 지금 집에 있다는 얘기였다. D-데이를 결심할 때부터 경섭은 그녀의 새로운 일자리를 염려했었다. 오후에 연락하마고 하고 서둘러 임팔라호텔로 숙소를 옮겼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차의 보복을 피하고 그에게 자신의 소재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바로 어젯밤이었다. 10시 경 방의 전화가 울렸는데 수화기를 들자 아무런 기척도 없더니 저 편에서 덜컥 전화를 끊는 것이었다. 교환을 통하므로 상대는 그를 지목하고 전화를 걸었음이 분명했다. 그 순간 그의 등에서 돋아난 소름이 허리춤까지 타고 내렸던 것이다. 경섭은 앞으로는 밤거리를 혼자 걷는 일조차 조심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밀레타리 사무실에서 형사담당 변호사인 켄트를 만났다. 그에게 헬렌 리와 유양춘을 공범으로 추가할 것을 부탁했다. 형사소추건의 경우 첫 공판은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면 2개월이 걸린다고 했다. 예비구속과 체포명령은 동시에 이루어지므로 오늘 중 경찰이 법원에 신청서를 내도록 손을 쓰겠노라고 했다. 차가 바다에 떠 있는 조업선들을 끌어 오겠다고 허언을 한 것이 생각나 만약을 대비하여 작년에 차와 체결해 두었던 합작계약을 파기한다는 내용증명을 띄어줄 것을 켄트에게 요구했다. 곁에 있던 밀레타리가 경섭의 그 말에 파안대소했다.
"미스터 김은 나이에 비해 너무 걱정이 많은 사람이야. 차가 사기로 꼼짝없이 얽히게 된 마당에 그게 무슨 소용이람."
켄트도 그럴 필요가 없다고 단언했다. 합작계약건은 밀레타리에게 소송을 의뢰할 때부터 그가 지적한 사항이었다. 사장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그가 다짐하듯 말한 적이 있었다. 만약 이 일이 그 건으로 뒤엉키는 날에는 밀레타리 당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저녁에 경섭은 미스 리를 불러 할머니 설렁탕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미리 와 있던 윤 부장에게 미스 리를 소개시켰다. 사람 좋은 표정으로 윤 부장이 내일 사무실에서 정식으로 인터뷰를 하자고 해서 셋은 간단히 식사만 하고 헤어졌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미스 리가 김국환 씨가 그를 만나고 싶다며 호텔이름을 묻더란 말을 전했다. 그녀가 그와 접선할 연결고리라는 것이 그들에게 간파된 것에 그는 놀랐다. 내가 전화해줄 것이라고 말해. 호텔 이름은 비밀로 하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헤드라이트가 걷어내는 어둠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흉흉한 파도처럼 자꾸만 마음에 부대꼈다.
호텔로 돌아 왔으나 방이 낯설어 잠을 쉬이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방을 나와 국회의사당이 있는 방향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었다. 얼굴에 부딪히는 밤공기가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호텔이 접한 길모퉁이의 모자점 앞에서 잠시 진열장 유리 너머의 모자들을 구경했다. 갈색의 중절모가 눈에 띄었는데 짧은 털이 보풀거리는 펠트의 질감이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갑자기 모자를 쓰고 싶어졌다. 머리가 으스스해지면 머리로 올라가는 혈관이 수축되고 그래서 기분이 침울해진다. 아마 머리가 시리면 스탈린처럼 유머가 사라지고 코와 광대뼈 사이로 깊은 주름이 생길거야. 모자 값으로 100 불을 치렀다. 모자를 머리에 얹으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그는 모자를 쓴 채 두 블록을 더 걸었다. 자신이 마치 알젠티노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어젯밤 걸려온 괴전화가 갑자기 생각나 그는 황급히 발길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 두 홉들이 브랜디와 꽁까스를 한 병씩 샀다. 방에 돌아와 꿀꺽거리며 브랜디를 반 병 이상 마신 뒤 안주삼아 꽁까스를 한 입 가득 들이켰다. 곧 몸이 더워졌고 술의 힘을 빌어 그는 죽은 듯이 잠들었다.
註)
1. 꽁까스(con-gas agua): 천연탄산수 ,맹물인 생수는 sin-gas 라 함. 식당에 가면 웨이터 가 의례히 씬까스? 꽁까스? 라고 묻는다
2. 펠트(felt) ; 양털 毛反毛 등의 섬유를 원료로 수증기,열 ,압력 등의 작용으로 서로 엉기 게 하고, 그 축용성을 이용해 천과 같이 만든 것.그래서 중절모(중산모자)를 a soft hat,또 는 a felt hat라고 함. 당구대에 까는 천도 펠트의 일종임.
3. 헤트(hat) : crown 과 brim(테)이 있는 모자. 테가 없는 것은 캡(cap)이라 함.
14
미스 리를 호텔로 불렀다. 윤 부장의 사무실로 데려 갈 생각이었으나 그보다 먼저 김국환의 소재를 물어볼 요량이었다. 이편에서 모레네 가게로 전화를 걸기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전히 유양춘과 함께 기거하던 아파트에 있었다. 이순주를 윤 부장 사무실까지 데려다 준 뒤 점심 무렵 김국환을 팬아메리카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자리에 앉자말자 그는 지난 월요일 차 사장에게 사표를 내고 그날 이후로 아파트에 죽치고 있었다며 그가 묻지도 않은 얘기를 했다. 월요일이면 D-데이였고 경찰들과 함께 차의 사무실로 들이닥친 시각이 오후 네 시였다. 그러고 보니 그 날 세리토 사무실이나 모레네 가게에서 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다. 그런데 왜 그가 뜬금없이 그날 아침에 사표를 썼다는 것일까?
"갑자기 사표는 왜...?"
"원단이 생각 외로 잘 안 팔리고 돈도 안 되니 차 사장이 나에게 사사건건 신경질을 부립디다. 한 달 전부턴 아예 일을 시키지도 않더니 얼마 전엔 서울에서 자기 동서란 사람을 불러와 떡하니 원단 판매를 맡기지 뭡니까. 그래 옛날 생각이 나데요. 한국에서 부도내고 미국으로 도망칠 땐데 그 때 그가 준 어음 때문에 나는 집을 날렸어요. 막판엔 동업자로 연루되어 내 돈도 많이 들어갔던 거죠. "
"그래 날 만나자는 일은 뭔데요? "
"‘79년부터 지금까지 차 사장 행적을 훤히 꿰뚫고 있어요. 그 양반 헬렌 리와 미국서 3년이나 동거까지 했어요. 미국에서의 저지른 차의 범죄기록을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나를 여기 오라고 부를 땐 마지막으로 한 밑천 잡아보자는 얘기였는데 그 양반 하는 짓을 보니 제 버릇 개 못준다 싶어요. 차를 때려잡는데 나도 뭔가 도울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솔직히 그에게 복수하고 싶다 그 말입니다. "
김국환의 나이는 경섭과 또래였다. 그와 차의 인연이 십 년도 넘었다는 얘기인데 차를 여전히 그 양반이라 지칭하는 것을 보니 진정 그가 복수를 위해 칼을 가는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주겠다는 얘긴가요? 또 그 대가는? "
"미국에서의 전과기록을 갖다 주겠어요. 그 양반 마약을 취급하다 걸린 적이 있거든요. 대가는 뭐...미국 왔다 갔다 하는 활동비나, 구체적인 효과가 나올 땐 그 때 좀 생각해 주면 돼요. "
미국의 전과기록이 알젠틴 법정에서 과연 어떤 효력을 발휘할까. 도대체 그의 복수를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경섭은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김 씨가 조급한 지 사정조로 말했다.
"내일이면 아파트를 비워줘야 해요. 그래서 부탁드리는데 제가 안 차장님 호텔로 옮기면 안 될까요? "
갑작스런 그의 얘기가 황당하여 경섭은 그의 얼굴을 살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표를 냈다고 하니 차에게 그간의 임금이나 귀국여비를 받아 한국으로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까짓 아파트 비우는 일이야 크게 원수진 사이도 아닌데 며칠 뭉개면 될 터이고. 그런데 갑자기 나랑 동숙하자는 말의 숨은 뜻은 무엇일까? 알젠틴에서 계속 죽치며 뭔가 먹고 살 일거리라도 찾자는 심산인가? 아니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읽기 위해 차가 꾸민 계략인가? 나에겐 천행의 쾌거였지만, 헬렌 리가 가방을 수습하여 도망가는 것을 급습한 일을 두고 그것이 사전에 은밀히 진행된 나의 정보수집이었다고 판단한 차가, 그를 앞잡이로 내세워 이제부터 역으로 나의 행보를 손바닥에 올려놓겠다는 뜻은 아닐까?
"김 형, 그쪽 생각이나 처지는 이해가 갑니다만 굳이 내가 묵는 호텔로 옮긴다는 말은 무슨 말인지 납득이 안돼요. 차 사장하고 일이 그리 되었으면 사무적으로 또 금전적으로 서둘러 차 사장간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먼저라고 봐요. 차의 전과기록은 법원의 참고자료가 될 수는 있겠지만 법원에 제출할 문건이 되는지는 변호사 얘기를 들어봐야 하겠고......"
김국환은 경솔하게 자기 속내를 보이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얼굴을 붉혔다.
"하도 내가 분해서......그 양반 죽는 꼴을 옆에서 구경이라도 했으면 싶어서요. 그런데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데요? "
"그것도 변호사 소관이라 지금으로선 알 수 없어요. 아무튼 귀국하기 전에 함 더 만납시다. 차의 전과기록이 쓸모가 있다면 김 형이 미국에 들러 그 일을 볼 수 있다, 그 얘기였죠? "
"그럼요. 그럼 앞으로 연락은...? "
"미스 리에게 연락처를 남기면 제가 전화를 드릴게요."
김국환을 돌려보내고 경섭은 걸어서 호텔로 돌아왔다. 차종한과 마찬가지로 김국환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3월 초순 알젠틴에 막 도착했을 때 경섭은 한 며칠 그의 숙소에서 유양춘과 더불어 저녁 늦게까지 화투를 치며 논 적이 있었다. 있을 건 다 있는, 점에 1불짜리 고스톱이었다. 우연히 그가 쓰리고를 성공시켰는데 점수가 20점. 그때 김국환은 멍박에 피박이었다. 따블이 세 곱이었으므로 160불을 게워내야 할 판인데 그가 느닷없이 멍박은 족보에 없는 거라고 우겼다. 멍박이 왜 없어요? 내가 서울서도 쳐 보고 부산에서도 쳐 봤어요. 멍박은 전국적으로 다 있는 건데 왜 없어요? 우리 동네엔 멍박 그런 것 없어요. 당신 동네가 어딘데요? 충청도유, 충청도. 화가 난 그가 유양춘을 끌어들였다. 멍박이 처음 터진데다 김국환이 목숨을 걸고 우겨대는 판이니 유양춘도 즉답을 피하며 우물쭈물 했다. 나이 사십 줄에 고스톱깨나 쳤다는 작자가 멍박은 처음 들어 봤다며 오리발을 내미니 머리에서 김이 날 수밖에. 그 날 이후 경섭은 그들의 숙소에 발길을 끊었다. 그리고 그 날부터 그는 김을 잡놈으로 치부했던 것이다.
며칠 뒤 변호사 사무실에 들렀다. 밀레타리가 차동한이 오만 불을 예치시키고 예비구속면제를 신청했다고 전했다. 덧붙여 알젠틴은 살인범도 돈만 내면 불구속 재판이 가능한 나라라고 말했다. 걱정했던 대로 돈과 시간의 싸움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답답한 나머지 가슴이 울혈했다. 그런 그의 조바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밀레타리는 데세아도로 일주일간 출장을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한국의 채낚이 어선이 한 척이 경제수역 침범으로 나포되었고 그 일을 풀려고 조덕창씨와 동행한다는 얘기였다. 집에서 몸이나 건사해야 할 노인이 한국 어선들이 나포될 때마다 원행을 불사하니 딱한 노릇이었지만 이 곳 물정에 어두운 한국 선주들은 일만 터졌다 하면 맨 먼저 우루과이에 있는 조 회장을 찾았다. 김국환에게 들은 얘기를 하니 밀레타리는 차의 전과가 마약소지죄라면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일축했다.
경섭은 무심코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았다. 아- 집을 떠난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구나. 어느새 오징어 어기도 끝나가는구나. 날짜를 짚어가던 그의 입에서 그런 탄식이 저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D-데이에 몰두하느라 한 동안 어장의 상황은 귀담아 들을 여가도 없었다. 최근 출장 나온 사람들의 애기론 4월 말부터 종합상사들이 오징어 매집에 손을 떼는 바람에 5천 톤급 라비니아 운반선 6척이 짐을 부리지 못해 부산에서 발이 묶여 있으며, 한 상자에 삼만 오천 원 하던 오징어 값이 이만 원으로 곤두박질 쳤다고도 했다.
채낚이 어선들은 5월 말쯤 자기 뱃짐을 채워 부산으로 뱃머리를 돌릴 것이고 트롤어선들은 잡어조업을 위해 포클랜드 섬 주변으로 남하하리라. 예비구속 면제신청건의 결말을 보려면 또 일주일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구속과 심문, 기소의 단계까지 또 얼마의 시간이 더 걸릴 것인가. 변호사 사무실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칠흑의 밤바다를 헤쳐 가는 작은 배처럼 다시 의기소침 하였다.
임팔라호텔에도 정체불명의 괴전화가 걸려왔다. 총기를 든 무장강도들이 주택가에 출몰하기 일쑤인 밤이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괴전화를 받은 그날 오후, 경섭은 숙소를 그란도라호텔로 다시 옮겼다.
사장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걸어 차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는지 어쨌는지 물어보았다. 그리고 공연한 짓을 한 것은 아닌지 후회 섞인 얘기를 늘어놓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경섭은 화가 났다. 그로선 평생 한번 만져보기도 어려운 돈을 꿀꺽 삼킨 차가 돈을 돌려주기는커녕 법적인 증거를 없애려고 잔머리를 굴린 판에 더 이상 무슨 수가 있단 말인가. 또한 한국의 외환관리법은 어떻게 돌파한다는 말인가.
호텔에 짐을 부린 후, 경섭은 빠소 거리의 낡은 건물 3층에 있는 ‘천사 이발관’을 찾았다. 오십대 후반의 주인은 그저 용돈벌이나 하는 셈으로 이발소를 차려 놓고 있는 듯 했다. 유리벽 위에는 한국의 시골 이발소를 연상케 하는 목가적인 싸구려 유화그림이 걸려있고, 잡지에서 오려낸 수영복 차림의 젊은 세뇨리타 사진들도 두어 개 벽면에 비스듬히 붙어 있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덥수룩하게 길렀던 수염도 밀었다. 고르지 못한 식사와 불면으로 볼이 약간 패인 얼굴을 바라보다가 경섭은 문득 유리벽 안에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과 마주쳤다.
"이 먼 데까지 와서 뭐 하고 있노? "
그날 저녁 그는 백구촌에서 교포정화위원회 간부들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유양춘이 원단을 팔려고 온세상가를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도 차와 마찬가지로 예비구속 대상이었는데 원단재고를 털어내려고 안달인 모양이었다. 언젠가 이순주는 그와 차가 10여 회에 걸쳐 칠레를 다녀왔다는 애기를 한 적이 있었다. 알젠틴을 벗어나려고 이주할 곳을 여기저기 탐문한 것이리라. 그러나 예비구속을 신청한 이상, 즉 형사범으로서 혐의가 받아들여진 이상 그들이 구속면제를 받더라도 이젠 독 안의 쥐였다. 법원은 불구속 상태의 행동범위를 한정시킬 뿐만 아니라, 24시간 이상 거주지를 벗어날 수 없으며, 또한 국외여행을 제한하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비원에 도착하니 식당주인인 L씨가 먼발치에서 알아보고 쫒아 나와 커튼이 드리워진 내실로 그를 안내했다.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면면은 전 교민체육회장, 현 정화위원장, 정화심의위원, 전 교민회장 등이었다. 모두 60대의 연만한 분들이었다. L씨가 경섭이 겪은 저간의 사정과 그들을 초청한 취지를 미리 설명한 듯 그들의 얼굴은 심심한데 마침 잘되었다는 듯 저마다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물고 있었다. 음식을 주문한 후 경섭은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차동한 얘기는 들어서 대충 아시겠지만, 그를 족쳐서 돈을 받아낼 방법은 없을까요? "
"법원에 기소된 사건에 대해 함부로 주먹을 쓴다거나 위협을 가하는 것은 역으로 우리가 고발당할 여지가 있습니다. "
정화심의위원이라는 자가 먼저 물꼬를 텄다. 이어서 교민회장이라는 사람이 결론처럼 말했다.
"정화위원회의 취지를 살려 행동지침을 갖자면 상공인회, 교민회, 교민언론, 대한체육회 등 재아단체들의 수장들과 협의를 거쳐야 할 것이요. 단체장들의 연명으로 그에게 합의를 종용하고, 불응할 경우 어떠한 불이익도 감수해야할 것이라는 경고를 하는 정도 아니겠어요?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음식이 나오는가 싶었는데 전 교민체육회장이란 자가 기발한 생각이 난 것처럼 상체를 내 앞으로 기울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
"교포신문이나 광고물에 큼지막하게 그의 악행을 쓰는 겁니다. 이곳에서 교민들 상대로 장사를 아예 못하도록 하는 거지요. 그러면 복잡하게 여러 사람들 안 끼고도 될 거요. 광고비만 좀 들이면 돼요. 안 그래요? "
그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그러나 차가 역광고를 싣는다면 그 또한 승부가 없는 게임 아닌가. 일행들에겐 결국 아무런 부탁도 할 수 없었다. 헤어질 무렵 L씨에게 타이거 전을 수배해 달라고 부탁한 후 경섭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은밀하게. 쥐도 새도 모르게. 경섭은 차속에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그렇게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며 가없이 펼쳐진 도시외곽의 팜파스를 머리에 떠올렸다. 그러자 갑자기 술을 마시고 싶어졌다. 또한 마르셀라가 보고 싶었다. 그는 싼타페 거리와 리오밤바 골목의 교차점에서 택시를 세웠다
마르셀라는 원시이며 자연이었다. 그녀의 벗은 몸은 여전히 일말의 부끄러움이나 주저함이 없었다.
경섭은 욕조에 몸을 잠그고 눈을 감은 채 낮에 보았던 중년의 아버지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늘 55세의 중년이었다.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아버지의 얼굴을 닮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다만 술을 좋아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습관처럼 머리를 점령하는 성애의 갈증을 두고 그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피의 색깔이려니 짐작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천사이발관의 유리벽 안에서 면도를 끝마친 그의 얼굴 위에 불쑥 아버지의 얼굴이 오버랩 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 그는 아버지를 극도로 미워했다. 그의 무책임한 음주를, 아내와 자식들 앞에 쏟아내는 여과 없는 주정을 몸서리치며 증오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는 비로소 한 개체로서의 인간으로 직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곳에서 그것도 16년 만에 그의 얼굴에 나타난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순간 경섭은 울컥 울음이 터질 듯한 괴이한 슬픔에 사로잡혔다. 천생 그는 그 아버지의 아들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으며 그때서야 그가 사무치게 그리웠던 것이다.
"세뇰 안! 내가 재미난 얘기 하나 해 줄까요? "
어느새 욕조에 들어온 마르셀라가 그의 겨드랑이 사이로 발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목장에서 소를 치던 한 농부 얘기인데요. 하도 부지불식간에 소를 도둑맞는 일이 많아서 목장 울타리에 이렇게 써 붙였대요. 고기는 가져가도 가죽은 두고 가시오, 라고 말이에요. "
그가 무슨 뜻인지 몰라 잠시 뜸을 들이자 그녀가 따분한 표정이 되더니 와락 그에게 몸을 기울이며 입술을 훔쳤다. 그의 몸은 곧 쏜살같이 팽팽해졌고 망설임 없이 그녀의 깊은 곳에 가 닿았다. 그녀의 손길은 사과열매를 권하는 이브와도 같았다. 그녀의 깊은 곳에서 그의 본능은 둥지속의 새처럼 아늑하였다. 몸이 서로 낯설지 않았으므로 오래된 연인들처럼 나란히 손을 잡고 좁은 오솔길을 걷듯 몸들은 저들끼리 은밀하게 속삭이며 소중하게 또 넉넉하게 서로를 탐했다. 그녀의 질도는 찰랑이는 시냇물로 흥건했으며 달뜬 그의 남성은 하동처럼 자맥질을 거듭했다.
몸을 몸에게 맡겨둔 채 경섭은 ‘말 데 쁠라타’로 가는 길에서 본 광활하고도 기나긴 푸른 초장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 곳의 어디쯤이어야 할 것이야. 눈을 가린 그 놈을 인적 없는 허허벌판에 꿇어앉힌 뒤 멱을 따듯 목에 칼을 들이대고 말할 것이야. 여기서 까마귀밥이 될래, 먹은 돈을 게워놓고 벽에 똥칠하도록 살래? 여기서 여우 밥이 될래, 자식들 등에 업힐 때까지 호강하며 살래? 마르셀라의 부드러운 몸 아래에 누워 있던 그는 그 순간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허공에다 대고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註)
1. 소와 소가죽의 우화; 알젠틴에서 미국 등지로 수출되는 육우(肉牛)값은 소 몸무게를 달아 1킬로그램에 미화 1불 남짓이었는데 반해 소 한 마리를 통째로 벗긴, 털을 제거하지 않은 원피 한 벌 값이 조금 과장하여 미화로 100불이었다.
2. 말 데 쁠라타 (Mal de Plata );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남쪽에 위치한 어항을 겸한 항구도시. 해안가의 유럽풍 건물과 조경이 수려함.
15
5월도 어느덧 하순이었다. 차와 유의 예비구속면제가 법원에서 받아들여졌다고 했다. 더욱 그를 우울하게 한 것은 L·A판 한국 신문에 T수산의 외화유출과 사장의 비리폭로 기사가 게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기사의 내용은 해외입어를 빙자하여 외화를 빼돌린 돈을 선주가 미국과 남미 등지에서 엽색행각으로 탕진했다는 내용이었다. 교활한 차가 미국의 한국 신문에 사장의 파렴치한 엽색행각을 폭로해버린 것이었다.
경섭은 이 사장에게 기사내용을 알려야 하는가를 놓고 잠시 고민했다. 엉뚱하게도 차는 헬렌 리와 더불어 사장에게 성매매를 알선한 장본인들이었다. 사장이 쉐라톤호텔에 혼자 투숙한 것도 L·A에서 달려온 한국여자 때문이었음을 알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차에게 거금을 사기당한 판에 여자와 일주일이나 침대에서 뒹굴며 놀았던 사장을 경섭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차를 형사범으로 엮은 뒤 첫 공판이 이루어질 때까지 알젠틴에서 죽치고 기다리는 일은 이제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압수수색이 성공을 거두자 차가 스스로 돈을 내어놓고 살려달라며 먼저 합의를 해올 줄 알았다는 게 당초 변호사들의 생각이었다. 차가 공탁금을 걸어놓고 그의 운명을 재판에 맡긴 이상 이제 답답한 것은 오히려 이 편이었다. 오직 한 가지 희망이라면 차가 형사피의자로서 신분의 제약을 받고 있으므로 재판이 끝날 때까지 알젠틴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 년이고 이 년이고 먹고 살 돈을 이미 챙긴 그 자가 아쉬울 것은 별로 없어보였다.
아침부터 호텔로 전화가 걸려왔다. 처음에는 차가 사주한 괴전화인가 싶었으나 수화기에서 바람소리가 심하게 일어 배에서 걸려온 전화임을 직감했다.
“차장님- 608호 박 선장입니다. 지금 타사 선박에 예인되어 몬테비데오로 긴급입항중입니다. 오-버.”
“예인이라니? 무슨 일인가?”
“엔진베드가 깨어져서 자력운전이 불가능합니다. 세 시간 정도 파도밭에 배를 띄어놓고 자체 수리를 해보려고 했습니다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파도에 배가 쓸려 침몰될 지경이라 할 수 없이 인근에 있던 타사선의 도움을 받아 지금 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버.”
“선원사고는 없는가? 몬테 입항예정일이 언젠가? 오-버.”
“선원들은 무사합니다. 포클랜드 외곽 공해에서 지금 출발했으니 사흘쯤 걸리겠지요.”
경섭은 이쪽 일을 대강 정리해 놓고 한국으로 돌아갈 참이었다. 그러나 허리가 부러진 트롤어선 608호의 사태를 수습하려면 또 다시 우루과이로 날아 가야할 형편이었다.
포클랜드섬 주변에 떠있던 채낚이 어선들의 오징어 어기가 끝나갈 무렵이었지만 해황은 이미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남서대서양의 어장은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은 호수 같았다. 오징어 어기가 시작되는 12월부터 1월까지는 한 여름이고 바다가 거의 무풍이어서 해무가 끼는 날이 빈번했다. 가을이 시작되는 2월부터 북서풍이나 남서풍이 불기 시작하여 5월 하순이면 북태평양의 겨울을 방불케 하는 강한 바람이 연일 불었다. 남위 50도의 호수 같은 바다도 바람을 타기 시작하면 삽시간에 높은 산이 되고 가파른 절벽이 되었다. 선수의 어창에 고기를 가득 채운 배가 자칫 그런 바람에 발목을 잡히기라도 하면 파곡에 머리가 깊이 빠진 채 세찬 파도를 온몸으로 받아 졸지에 브리지의 유리창이 박살이 나는 봉변을 당하기 일쑤였다. 브리지의 항해계기가 바닷물에 젖어 모조리 훼손된 배거나 엔진베드에 균열이 나서 엔진을 쓸 수 없게 된 배나 둘 다 남의 구조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해황이었다.
알젠틴 경제수역의 가장자리인 대륙사면을 타고 종주하던 트롤선들이 파도밭을 불사하고 포클랜드섬 주변 공해로 내려가는 일은 오징어가 뜸해지는 5월 이후부터 메루루사나 홍메기나 홍어 가오리 등 잡어를 잡기 위해서였다.
608호는 작년 겨울에 인도양에서 남서대서양으로 어장을 옮긴 트롤어선이었다. 선령이 30년 가까이 되는 노후선이지만 설마 엔진베드가 주저앉으리라곤 아무도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인도양은 불과 수심 3백 미터의 어장이었지만 남서대서양 어장의 수심은 그 두 배나 깊었다. 굳이 원인을 찾자면 그만큼 엔진에 부하가 많이 걸린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선장이나 선원들은 시골 한촌의 농번기에 소가 병이 들어 갑자기 죽는 바람에 망연자실한 농부나 다름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같은 트롤선인 607호로부터 또 다시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최 선장 무슨 일이요? ”
“차장님, 수고많습니더. 갑판원 이천수. 38세. 양망중 데릭 윈치의 조작실수로 와이어 후크에 왼쪽 귀 상부의 머리를 타격당했으며 두피가 함몰되어 선내에서 응급처치한 후 현재 인근항구로 긴급입항중이나 환자는 사고발생 8시간 만에 선내에서 절명했습니다. 오-버.”
“어느 항구로 접근 중인가?”
“마드린항입니다. 내일 08시 30분 입항예정입니다. 오-버.”
608호가 입항할 몬테비데오에는 다른 사람을 보내기로 하고 경섭은 서둘러 마드린 인근의 뜨렐류행 비행기를 찾아 공항으로 내달렸다.
배가 마드린 외항에 닿아 묘박을 하는 사이 경섭은 대리점을 통해 장의사와 의사를 수배하는 한편 해경에 연락하여 사망사고의 입회를 부탁했다. 오전 10시 경 해경이 끌고 온 선외기를 타고 경섭은 배로 달려갔다. 선장의 사고보고서에는 사고 후 일 회 더 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선장은 처음에는 경미한 타박상으로 알고 그랬다고 했으나 하급선원들은 선장이 어획고에 눈이 멀어 바다에서 지체하다가 아까운 목숨을 잃게 했다며 격분해 있었다.
와이어 후크는 무거운 쇠뭉치나 다름없었다. 쇠줄의 장력을 한껏 받은 쇠뭉치가 안전모를 뚫고 머리를 강타했으면 그 즉시 숨을 거두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급히 뱃머리를 돌렸어야만 했다. 선장의 미련한 짓을 유족들이 알면 큰일이었다. 경섭은 선장에게 사고보고서를 고치도록 명했다. 선장 사고보고서, 선원 진술서, 유품목록이 차례로 작성된 후 해경과 동행한 의사가 사망사실을 확인하고 나자 장의사가 입관을 서둘렀다.
어창에서 들것에 실려 나온 이천수의 얼굴은 오랜 고통에 시달린 사람답지 않게 맑고 깨끗했다. 시신을 하선시키기 전에 경섭의 집례로 갑판에서 간단한 위령제를 가졌다. 수의랍시고 하얀 천을 덮은 주검 앞에 사과 몇 조각과 밥과 나물이 차려졌다.
바다에 나와서 죽었지만 사나운 바다가 그를 사지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므로 이천수의 죽음 앞에 통곡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바다 위에서 어로작업중인 선원들에겐 애면글면 정을 나눌 틈이 용납되지 않았다. 틈이 나면 누구라 할 것 없이 모자라는 잠부터 챙기기 일쑤였다. 바다에서의 안전사고란 그들에게 있어 날아가는 갈매기가 얼굴에 똥을 갈기고 가는 일처럼 다소 께름칙한 일일 뿐이었다. 그때 선미의 슬립웨이로 올라온 바다사자 한 마리가 그물더미 위에 앉아서 큰 눈을 껌벅거리며 뱃사람들의 위령제를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대리점에서 선장은 부산사무소로 몰려온 유족들과 육성으로 슬픔을 나눈 뒤 배로 돌아갔다. 경섭은 갑판에서 서성거리던 하급선원들이 염려되어 쇠고기 몇 근과 알젠틴산 백포도주를 한 상자 사서 선장 편에 실어주었다.
16
차의 구속이 면제되었으므로 남은 일은 두 가지 뿐이었다. 변호사에게 윤활유를 치면서 가급적 단시간에 이 사건의 종지부를 찍거나 아니면 그의 옷을 물리적으로 송두리째 벗기는 일이었다. 타이거 전의 행방이 묘연하여, 대신 무식한 일을 맡아줄만한 사람을 찾다가 재아 체육회 일에 관여하고 있는 태권도 사범출신인 50대의 김씨를 만났다. 90년대에 접어들자 메넴 정부가 철도. 항공 등 정부산하 부실 공기업들을 해외에 매각하는 워크아웃이 진행되었는데, 해외자본이 들어오면서 실업자들이 더욱 증가되었고, 먹고 사는 일이 수월치 않아 도처에 강도나 좀도둑이 만연한 사회분위기였다. 웬만한 아파트들은 이중으로 자물쇠를 걸어 잠갔고, 조금 고급스런 아파트는 입구에 경비가 서고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출입문이 열리는 도어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문제없어요. 권총은 장난감이고... 기관총을 가진 아이들도 구할 수 있어요. 두 명만 부르면 돼요."
김씨의 대답은 간단했다. 최근엔 달러를 현금으로 많이 지니고 있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강도들이 자주 출몰하여 한인촌에도 자율방범대를 구성하여 밤마다 순찰을 도는 실정이라고 했다.
"얼마를 받아내야 하는데요? "
"뜯긴 돈은 모두 이백만 불 쯤 돼요. 아마 지금 그 놈 수중에 백오십만 불은 갖고 있을 겁니다. 보수는 얼마로...? "
"아이들 오천씩 하고... ,이만 불은 주셔야 됩니다."
"착수금으로 오천, 잔액은 차가 우리구좌로 입금한 후 결재하겠습니다. "
"좋아요. 날짜가 정해지면 이틀 전에 만납시다. "
"혹시 차가 나중에 오리발을 내고 반격할 가능성은 ...? "
"하 하 하! 여기 애들이 어떤지 아는 사람은 그런 짓 못해요. 일이 끝날 때까지 식구들을 인질로 잡아두면 돼요."
운동선수 출신이라 말끝이 시원시원했다. 그날 밤 본사에 전화를 내었다. 전무는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 어업허가도 없는 909호를 인수하여 회사를 떠났다는 얘기였다. 사장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본사 일이 여러 가지로 꼬여 그에게 빨리 들어와야겠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이틀 뒤, 다시 사장의 재가를 청했으나 그는 여전히 결심을 못하고 우물쭈물하였다. 성공보수로 지급할 이 만 불이란 돈도 돈이었지만 이미 변호사들에게 지급된 육만 불에 미련이 더 많았다. 아니 그보다 회사의 자금사정이 하루하루 피를 말리는 국면이라 냉정심을 잃고 있는 듯하였다. 그도 아니면 작년에 교회 장로로 피택된 그의 신앙심이 조폭들이나 할 법한 일을 저어하는 것이리라. 우리에겐 시간이 돈입니다 .잘 생각하십시오. 전화를 끊고 나서 이 삼 일 더 기다렸으나 본사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한편으로 차는 한시바삐 알젠틴을 떠나고 싶어 안달인 상 싶었다. 제 딴에는 법원의 자물쇠도 돈이면 풀 방도가 있으리란 생각이었는지, 십 오만 불에 취득했다던 그의 별장을 대사관의 무관으로 나와 있는 모 장군에게 칠십만 불에 살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는 얘기를 김 영사가 전해주었던 것이다. 일이 되어가는 모양을 보니 검찰의 기소조차 한두 달 만에 끝날 일이 아니었다.
결국 경섭은 차를 요절낼 계획을 접고 귀국준비를 서둘렀다. 밀레타리로부터 15경찰대의 수사기록과 검찰고발장 등을 구해 이혼녀인 공인번역사를 찾았다. 외국환관리법에 의거한 해외송금에 대한 사후관리용 자료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경섭은 일주일 가까이 번역일로 이혼녀의 집을 들락거렸다. 스무 아홉 살 먹은 젊은 여인이 혼자 지키는 집을 아무 스스럼없이 드나든 것은 그의 향수병이 너무 깊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다섯 살 코흘리개로 이민을 와 줄곧 알젠틴에서 살았다고 했다. 때문에 그녀의 옆에서 기록된 사건의 전말과 맥을 짚어주며 적절한 용어의 취사선택과 교정을 도와 한시바삐 번역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집 가까운 골목에서 끼오스코를 지키던 그녀의 모친이 점심을 핑계로 낮에 한 번씩 집에 들렀으나 일에 몰두하고 있는 남녀를 보고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그런 경섭에게 그녀의 모친은 지극정성 미역을 넣은 소고기국을 끓여 주기도 하였다.
번역이 끝나자마자 경섭은 귀국 날짜를 잡았다. 출국 하루 전 날, 그는 이혼녀를 대동하고 보카로 쇼핑을 나갔다. 길거리에서 아마추어 작가들이 그린 집시풍의 유화 두 점과 마치 마르셀라 아버지인 듯싶은 가우초의 인물화 한 점을 샀다. 싸구려 골동품가게에서는 유럽에서 건너온 듯한 청동상들이 탐이 났으나 눈요기로 만족했다. 일주일간의 노역으로 두 사람은 서로 친밀했다. 어느 가게를 나오다가 천진한 마음이 끌었는지, 심심해진 몸이 그랬는지 그녀가 얼핏 그의 손을 잡았지만 그 손을 마주 잡고 함께 힘을 줄 마음의 여유가 그에겐 없었다. 부모와 달리 키가 늘씬하고 얼굴색이 고운 그녀는 농염한 처녀의 자태였다. 사정이 허락했다면 더도 말고 꼭 한 번 반지를 끼워주고 싶은 여자였지만 그는 차라리 여동생으로 삼고 싶은 그런 생각이 더 간절했다. 집에서 오매불망 그를 기다릴 아내와 자식들의 얼굴이 눈에 밟혀 경섭은 끝끝내 이방인의 객고를 물리치고 말았다.
6월의 중순이었다. 그는 곧 다시 오마, 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났다. 습기가 묻은 음산하고 냉랭한 초겨울의 날씨였다.
註)
끼오스코(Kiosco): 한국의 구멍가게
17
오랜 만에 돌아온 한국의 서울, 회사 사무실로 출근을 했으나 그의 마음은 여전히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붙들려 있는 것 같았다. 그 도시 한 구석의 어느 음침한 안가에서 그를 조롱하며 웃고 있을 차동한의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편 회사는 쪼들리는 자금사정으로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전무가 자리를 뜬 후라 선박운항의 총책임은 자연 경섭의 몫이었다. 그러므로 사표를 쓰고 말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한편 기울어져 가는 회사의 운명을 곁에서 바라보는 그의 심정은 쓸쓸하고 민망했다. 그러나 유키라는 식당에서 사장 면전에 쏟아낸 눈물이 생각나 그때마다 마음을 모질게 다잡았다.
L·A의 교포신문에 터트렸던 기사는 그 곳에 있는 이름 모를 사장의 연인들에게 보란 듯 알리는 차와 헬렌 리의 저열한 보복일 뿐이라고 웃어 넘겼지만 그 후속으로 터진 사건은 그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차가 한국에 사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내무부 치안국, 대검중수부, 국세청 등에 띄운 동일 내용의 진정서로 말미암아 외화밀반출 혐의로 소환된 사장을 변호하느라 경섭은 한 동안 동분서주했다. 대검중수부 조사실에서 만난 깐깐한 수사관의 유도심문에는 사장도 오줌이 지리는 모습이었으나 일의 경위를 찬찬히 설명해 나가는 경섭의 논리에 수사관은 결국 두 시간 만에 혐의 없음의 구두점을 찍고 파일을 덮었다. 이 모든 변설을 뒷받침한 것은 이혼녀가 꼼꼼하게 풀어쓴 형사소송에 관한 1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번역물이었다. 외국환 은행과 한국은행의 닦달을 면한 것도 역시 동일한 번역물이었다.
서슬 퍼런 당국의 소환을 아무 탈 없이 종결한 다음 날 사장은 그에게 부장승진이라는 훈장을 달아 주었다. 좋은 시절이었다면 고급스런 술집을 찾아가 밤새도록 자축파티라도 가질 일이었지만 백척간두에 놓인 회사의 처지를 생각하노라니 서글픔만 자욱하게 가슴을 적셨다. 부장이 아닌 이사승진이었다 해도 그 쓸쓸함과 민망함은 동격이었을 것이었다.
한국에 들어왔다며 김국환이 두어 번 회사를 찾아와 아는 체를 했지만, 그는 알젠틴에서 약속했던 차의 범죄기록은 까마득한 옛 일로 잊어먹은 듯 했고 그냥 심심해서 들렀다는 두서없는 말의 행간엔 차가 도발한 일련의 보복에 따른 회사의 대응과 그 결과에 대한 탐색의 목적이 도사리고 있었다. 경섭은 시치미를 떼고 오히려 그의 입을 통해 차가 장차 또 무슨 계략을 꾸밀 것인지 역으로 염탐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는 이곳 형편을 염탐하러 온 차의 단순한 첩자에 불과했다.
습습한 장마철이 지나고 여름의 강렬했던 뙤약볕도 차츰 스러지고 있었다. 어장에서 돌아온 채낚이 어선들의 선원들은 회사의 쪼들리는 살림은 아랑곳없이 그들의 부족한 임금에 대한 불만으로 연일 부산사무소를 점령하여 농성을 벌였다. 단순입어를 위해 증척했던 배들은 우여곡절 끝에 10월이 되어서야 모두 매각처분 되었지만 선박의 매각손실금만 10억 원 가량 발생되었는가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조업손실은 무려 50억 원이 넘었다.
국내 오징어 어가의 하락도 채산성 악화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D상사로부터 차용한 50억 원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아 금융비용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시시각각 도래하는 어음의 결제는 부득불 제 이 금융권에서 자사어음을 할인하여 충당해 나가는 식이었다.
회사의 재무사정을 보면 회사회생의 가능성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일 같아 보였다. 300억에 달하는 제 일 금융권의 부채는 부채비율로만 따지면 200프로에 불과했지만 지급이자가 년 40억 원에 달했으므로 획기적인 재무구조의 개선 없이는 내년 봄까지 무사하게 회사를 끌어간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이러구러 곤혹스런 시간들이 하루하루 흘러갔다. 가로수의 은행잎들이 노랗게 물들어 가는 9월의 어느 늦은 밤이었다. 어설피 잠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그 무렵 경섭은 밤에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에 노이로제가 되어 있었다. 608호의 사고로 몬테비데오에 파견되었던 K 과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크랑크 케이스를 뜻하는 엔진베드가 깨졌다면 사람으로 치면 허리가 부러진 셈인데 수리를 하잔다 해도 배의 뚜껑을 열고 엔진을 몽땅 들어내야 하는 그야말로 큰 공사였다. 조업 중에 엔진을 스톱시켰으니 비싼 그물은 부득불 와프를 끊어 물속에 버려야만 했다. 인근의 한국 조업선이 도와 황천에 그나마 인명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수리계획을 잡는다 해도 어로계약의 중단이 불가피했으므로 선원들은 어창의 고기를 풀고 나서 전부 귀국을 시켜야만 했다. 타사선박의 조난구조에 대한 조업보상, 선원귀국 및 정산금 확보 등의 일로 분주한 가운데 경섭은 K를 귀국시키는 일은 한 동안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수리요원이 도착할 때까지 배를 지키고 있으라 한 것이 벌써 한 달도 더 된 일이었다.
"주무시는데 깨운 거 아닙니까? 하- 내 참! "
"뭐야, 또? 용건부터 말해봐!"
"608호를 수리조선소 안벽으로 옮기려고 항만청 일을 보다가 알았는데요.... 차 사장이 우리 배들에 대해 법원의 엠바고명령을 받아 놨더라고요. "
"뭐...뭐라구? 아니 알젠틴이라면 몰라도 우루과인데 왜..? "
"우루과이와 알젠틴은 형제국이라 법률공조협정이 있고 그 효력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경섭은 가슴이 터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어기가 끝나면 부산으로 회항하는 채낚이선들과 달리 트롤선들은 12월이면 철망을 하고 모두 몬테비데오로 회항할 예정이었으므로 당장 바다에 떠있는 두 척의 철망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철망에 대비해 몬테비데오로 탁송한 선박부품과 선용품들의 처리도 문제였다. 일단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을 수리기지로 잡자. 포클랜드섬을 기준으로 본다면 거기가 거기야. 몬테비데오에 찜해 놓은 선원들의 애인들이 좀 불쌍하지만, 설마 그 일로 집단하선을 하는 일은 없겠지. 그렇게 결정을 내린 뒤 경섭은 철망에 따른 준비를 하나씩 진행시켜 나갔다. 채낚이 어선들은 향후에도 특별한 사고가 없는 한 어장에서 항구로 입항할 일이 없고 또 설사 그런 일이 있더라도 영국령인 포클랜드의 스탠리 항을 이용하면 그만이었다.
"그럼 608호는 우짜노? "
사장은 민첩한 그의 조치에 만족했으나 허리를 다쳐 몸져누운 608호가 또한 걱정이었다.
"어업허가만 따로 떼어 팝시다. 나이도 있고 지금 수리를 한다 해도 내년 오징어 어기는 못
맞추는 거 아닙니까? 수리비를 들이느니 선체는 정 안되면 나중에 스크랩시키는 게 좋겠습니다. 차동한과의 싸움은 어차피 시간이 문젠데, 이왕 억류된 배니 당분간 잊어버리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면 시간도 벌고 또 현금이 아쉬운 판에 그게 제일 상책이라 생각됩니다."
사장은 눈을 감고 잠시 손익을 따져보는 눈치였다. 몇 년 전 그 배를 살 때 23억 원을 지불했는데 그 중 허가권으로 10억 원을 계산했다 . 지금 그 배를 포기하면 단순계산으로 13억 원의 손실을 보게 된다. 고철 값은 톤당 100불씩 계산하므로 무시해도 좋을 금액이었다. 그래도 13억이 어디고. 사장은 그런 생각에 한 동안 입맛 쓴 표정을 짓더니 갈급한 현금에 생각이 미쳤는지 마지못해 그렇게 하자는 승낙이 떨어졌다. 그러나 어업허가권이라도 제 값을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최근의 국내 어가하락으로 수익성이 떨어져 그도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에 젖은 채 사장실을 나서는 그의 뒤통수에다 대고 사장이 고함을 꽥하고 질렀다.
"근데, 안 부장은 알젠틴에 석 달이나 가 있으면서 차동한이 그리 할 때까지 뭘 했어? "
"글쎄 말입니다."
차동한이 회사 배들을, 그것도 6척이나 억류신청을 한 것은 손해보전을 위함인데 그가 손해를 본 것이 있다면 무엇이며, 손해청구금액이 얼마이며, 또 공탁금으로 그가 법원에 얼마를 걸었는지 등을 조사하기 위해 K 과장을 급히 알젠틴으로 보냈지만 아직 그 영문을 모르고 있었다.
그 무렵 사장은 무엇이든 맘에 안 드는 일이 생기면 짜증부터 내었고 또 그 화풀이를 부장승진을 시킨 그에게 퍼붓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월급쟁이도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 책임이 막중했고 스트레스도 심한 법이었다. 심약한 경리부장이 자금압박에 시달리던 나머지, 출근길에 오버브리지 교각을 자충하여 병원신세를 지다가 결국 사표를 쓴 일이 있었다. 그래서 경섭은 사장의 독설을 언제나 그런 식으로 피해갔다.
차동한은 이미 발급된 선박도입허가서와 그와 체결했던 합작계약서를 근거로 단돈 십만 불에 엠바고를 걸었다는 K 과장의 보고였다. 억장이 무너진 그가 다시 알젠틴행 비행기를 탄 것은 그 해 11월 하순이었다.
註 )
엠바고(embargo): 선박의 출항을 금하고 항구에 억류시키는 법적 조치.
18
밀레타리는 차의 엠바고에 대해 할 말을 잊은 듯 했다. 아무리 세상이 어수선하고 법질서가 어지러운 나라라 해도 이럴 수는 없다는 거였다. 애당초 경섭이 우려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예방차원에서 합작계약의 무효선언을 하자고 그들 앞에서 주장했던 것인데 밀레타리도 켄트도 당시에 그런 그를 애늙은이로 치부하며 덮어버린 것이었다. 그가 그 일을 상기시키자 밀레타리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며 펄쩍 뛰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 당시 함께 배석했던 사장도 그 일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그러나 변호사들에겐 언제나 자신들과 상관없는 오로지 고객의 또 다른 사건이었고 그가 혀를 물고 당장 그들 앞에서 자진한다 해도 그것은 다만 경섭의 문제일 뿐이었다. 소송의뢰인을 위해 창조적으로 일하는 변호사는 청교도 정신이 살아있는 미국영화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경섭은 밀레타리와 함께 15경찰대의 고발장 사본을 들고 엠바고를 결정한 판사를 찾았다. 답답해서 생각해낸 항의방문이었으나 결과는 불을 보듯 했다. 맞고소라는 게 어느 나라든 가능한 일인데다가 공탁금을 낼 돈이 수중에 넉넉한 차가 그 교활한 머리로 그런 짓을 하리란 것은 불문가지였다.
"검찰에 이첩된 사건의 당사자임을 알려줘 감사합니다. 아시다시피 피의자의 혐의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피의자가 주장하는 손해청구와 그 예비적 단계인 엠바고는 법적인 하자가 없습니다.”
판사의 말에 밀레타리가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는 것으로 상황은 끝이었다. 그에게 이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지라고 악을 쓰는 것이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람. 믿는 것은 오직 시간일 뿐이야. 608호가 불행 중 다행으로 더 큰 희생을 막아준 셈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의 끝이 언제일지 그것이 문제였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을 지나는 기분이었다. 차는 608호가 이미 그의 그물에 걸려든 것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배들도 올 데 갈 데 없이 제 발로 그 그물에 곧 들어 올 것이라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12월이었다. 알젠틴의 절기는 다시 여름의 꼭지였다. 켄트가 찾는다고 해서 밀레타리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켄트가 조만간 검찰의 기소결정이 내려질 것이라 말했다. 덧붙여 그는 이순주가 지난 달 증인진술을 마쳤다고 했다. 공문서 위조부분은 쏠라 명의의 영수증을 이순주가 직접 타이핑한 것임을 진술한 사실에 근거한 것인데 이 사실을 판사가 인정할 경우 차에 대한 처벌이 무거울 것이라고 켄트는 예단했다.
며칠 뒤 켄트와 기소결정문을 찾으러 법원에 들렀다가 그는 우연히 차의 변호사와 조우했다. 짐작으론 켄트를 통해 그의 입국소식을 들었고 그날 우연을 가장해 그에게 접근한 듯싶었다. 중키에 곱상하게 생긴 얼굴이었는데 영어가 유창했다. 알베르토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그가 몸을 낮춰 경섭의 귀에다 얼굴을 들이밀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미스터 안, 알젠틴의 법률을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만, 이런 싸움은 피차 시간 낭비예요. 서로 타협점을 찾는 게 현명합니다."
"우리는 차동한 그 놈과 타협할 게 없어요. 그가 집어삼킨 돈만 내어 놓으면 그만이에요. 당신은 그 놈이 고객이니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놈을 지옥에 빠뜨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내가 그러더라고 이 말을 꼭 전해주세요. 그놈은 아주 악랄하고 야비하고 저질이며 쓰레기 같은 놈입니다.”
말을 하고 나니 경섭은 차를 정말 자근자근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만큼 화가 났다. 짐짓 그가 중재안을 끄집어내려고 말을 꺼냈는지 아니면 이편에서 합의하자고 먼저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드는지 알아보려는 심사였는지 몰라도 알베르토는 경섭의 그 말에 슬금슬금 뒤로 몇 발 물러서더니 등을 돌려 잰걸음으로 복도 맞은 편 건물로 사라져 갔다.
기소가 되었으니 곧 재판이 시작될 것이고 또 얼마가 걸릴지 모르지만 재판결과가 나올 때까지 차는 이 땅을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그는 고립된 성에 갇혀 있고 그 성을 이편에서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다만 그 포위망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느냐가 관건이었다. 알베르토의 접근에 다소 고무된 것은 사실이었으나 안타까운 것은 굳게 닫힌 여리고성이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양각 나팔을 불며 그 성 주위를 맴돌았던 여호수아의 군사들이 경섭에겐 전무했던 것이다.
경섭은 이순주를 불러 증인출석에 대한 보답으로 미화 천 불을 지급했다. 마르셀라는 딴 곳으로 이사를 했는지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녀에게 주려고 기내에서 샤넬향수를 한 통 샀지만 소용이 없게 되자 그 하찮은 물건도 경섭에겐 마음에 무거운 짐이었다.
다음으로 그는 608호가 붙들려 있는 우루과이로 넘어가야 했다. 우루과이로 행장을 꾸리기 전에 그는 이혼녀와 그녀의 부모를 모시고 까잘로 거리에 있는 브라질식 로스구이 식당에서 저녁을 대접했다. 가난하지만 선량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늙은 부모는 색다른 요리에 그저 황송한 표정이었고 이혼녀는 왠지 모르게 경섭에게 화가 잔뜩 난 표정이었다.
남녀 간의 일은 언제나 묘한 감정이 개입되는 법이었다. 고기를 씹을 때도 샐러드를 집을 때도 그녀는 그의 얼굴을 자꾸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 경섭은 이혼녀에게 우루과이를 다녀와서 다시 연락하마고 했고 그녀의 부모가 한 눈을 파는 사이 그녀에게 슬며시 샤넬향수병을 건넸다.
저녁이면 눈부신 태양은 언제나 안데스고원 너머로 얼굴을 묻었고 일모의 잔광만 드넓은 하늘을 분홍빛으로 혼곤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런 노을을 바라볼 때마다 경섭은 어쩌면 당분간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찾을 일이 없을 것이란 쓸쓸한 예감이 자꾸만 머리를 휘감았다. 이혼녀에게 한 말이 잠시 마음에 걸렸으나 그에게 당장 절실한 문제는 차동한과 치루고 있는 전쟁의 끝이었으며 또한 그가 몸담고 있는 직장의 암울한 미래였다.
몬테비데오에서 608호의 관리인으로 처져있던 K 과장을 케이프타운으로 회항시킨 트롤선들의 현장감독으로 파견했다. 선박대리점에는 회사의 사정을 설명한 후 체불된 경비는 매월 얼마씩 분할로 갚는다는 각서를 써주고 경섭은 페루를 경유하여 귀국했다.
페루는 한 해 전부터 대형오징어 어장이 개척되어 한국과 일본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페루어장은 한국의 모 업체가 자비로 3년 전 소형 어선을 한 척 투입하여 자원과 그 경제성을 시험해 왔던 것인데 체중이 40킬로그램에 달하는 살이 두껍고 거대한 몸집을 가진 이 오징어는 조미가공용으로 상품성이 인정되어 91년부터 한국과 일본선단이 페루어장에 진출했던 것이다. 모두들 일년생인 오징어가 어떻게 단기간에 그런 엄청난 몸집을 만들까라는 의문을 가졌다. 다만 페루의 연안에는 적도의 더운 난류가 북태평양의 한류와 합수되어 소용돌이 해류가 발생하는데 플랑크톤이 풍부하여 먹이사슬이 잘 형성되므로 오징어의 생장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었다.
후지모리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라 한국의 민간업체가 정식으로 어획쿼터를 신청하자 일본의 오징어업계가 달려들어 쿼터배정에 우선권을 뺏어갔고 덩달아 쿼터수수료도 입찰경쟁으로 결정되어 원가부담이 생각 외로 늘어났다. 그러나 페루어장은 5월에 끝나는 포클랜드 어기와 연계하여 채낚이 어선들의 주년조업을 가능케 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9
해가 바뀌었다. 세월은 바람에 쓸려가는 서녘하늘의 새털구름처럼 무상했다. 그 사이 거래처마다 외상값 독촉의 발길이 빈번했고 알젠틴사업에 거금을 빌려준 D상사는 담보로 설정된 사장의 개인 부동산의 소유권을 모조리 빼앗아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해벽두부터 사장은 새로운 프로젝트의 사업계획서를 경섭에게 요구했는데 북양에 출어한 대형트롤 공모선을 중심으로 한 명란수출사업이 그것이었다. 500톤의 명란을 생산하면 그 수출대금만 5백만 불이었다. 그 사업계획을 근거로 사장은 용케도 일본의 종합상사로부터 신용장을 하나 얻더니, 그 해 3월 은행으로부터 그 신용장을 담보로 한 30억 신용대출을 성사시켰다.
은행들은 저마다 높은 수신고로 돈들이 넘쳐났고 증권투자나 스왑 같은 환투기 사업에도 열을 올릴 때였다. 특히 D은행은 공격적인 경영으로 단기간에 부상한 지방은행이었다. 당시엔 외국으로부터 이자가 싼 돈을 빌려와 기업대출로 돈을 벌려는 제 이 금융권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은행 중역을 구워삶아 만들어 낸 기상천외한 대출이었다.
30억 원의 긴급수혈로 빠듯하던 현금결제에 숨통이 트인 것은 천만다행이었지만 명란수출은 결코 이행되지 않았다. 그 해 6월, 난데없이 신문에 T수산이 법원에 재산보전신청을 냈다는 기사가 터졌다. 그리고 동년 9월, 법원으로부터 법정관리신청이 받아들여졌다. 법정 관리인으로는 공인중개사인 사장의 처남이 선정되었다. 법정관리제도의 사회적 역기능이 비판을 받기 시작한 것이 불과 이 년 전의 일이었는데, 사장은 본점주소가 묵호인 점을 이용하여 강원도의 지방 판사를 또 다시 구워삶았던 것이다.
사양산업의 전조가 이미 두드러지기 시작한 동종업계의 사람들은 더러 그런 사장을 두고 경영의 귀재라며 찬사를 보냈지만 날이 갈수록 경섭에겐 그런 사장이 차와 대동소이한 사기꾼일 뿐이라는 생각이 짙어갔다.
알젠틴에서의 소송은 법정출석은 없이 서류재판만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차의 변호사측에서 이런저런 이유를 대어 계속 재판을 연기시킨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그 지겨운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경섭은 기어이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말았다.
한 달 전이었다. 알젠틴 용선입어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회사를 떠났던 전직 수산부장이 복직을 위해 사장실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을 알아챈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가 사표를 쓰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법정관리를 준비하면서도 사장이 수산부장인 그에게 철저히 함구한 것에 대한 배신감이었다.
알젠틴에서 맺은 사장과의 도원결의가 다소 마음에 걸렸으나 그가 살고자 했던 인생은 이런 너절하고 부도덕한 것이 아니라는 자각이 매순간 경섭을 압도했던 것이다. 그는 사장의 단순한 하수인에 불과했으며 회사의 미래를 책임질 동량은 결코 아니었다. 법정관리라는 사장의 도박은 동종업계의 선례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원양어업이 사양산업으로 기우는 전조는 이미 여러 방면으로 감지되고 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는 경섭에게 사장은 그의 손을 잡고 늘어졌다.
“안 부장, 지금 일어서면 우짜노? 나를 좀 더 도와 줘야지. 알젠틴건도 안 부장이 끝을 내야 안 되나."
"사장님, 법정관리도 계획대로 되었고 상무님도 들어왔으니 이제 제가 없어도 안 되겠습니까? 차동한은 아마 곧 합의하자 연락이 올 겁니다. 엠바고를 했지만 별무신통이니 지금쯤 본인도 애가 탈겁니다. 꼭 제 도움이 필요하면 그 때 불러 주십시오."
그가 회사를 떠난 것은 10월이었고 차로부터 기별이 온 것은 그로부터 두 달 후인 12월이었다. 사장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롯데호텔로 나가니 차의 변호사인 알베르토가 앉아 있었다.
경섭의 눈치를 살피던 알베르토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차는 이제 서로 소모적인 싸움은 그만 두자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형사소송을 취하하면 선박에 대한 엠바고를 풀겠다는 뜻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동의하신다면 사장님의 대리인이 알젠틴으로 와서 함께 서류를 작성하자고 합니다."
"여보세요, 변호사 양반. 차가 취한 엠바고가 정당한 거라고 생각합니까? 우리 돈을 사기쳐 꿀꺽한 놈이 그 놈이에요. 다 우리 돈으로 변호사 사고, 법원에 구속면제 공탁금 내고 ,선박억류 공탁금 내고 한 겁니다. 합의라고요? 일의 순서를 말하자면 이래요. 그가 먼저 우리에게 끼친 금전손실에 대해 사과해야 해요. 그리고 도둑질해 간 우리 돈에서 현재까지 쓰고 남은 돈을 다 내 놓고 소송을 취하해 주십사 요청하는 거라고요. 당신 변호사 맞긴 맞아요?"
경섭의 목소리는 여전히 격앙되어 있었다. 사장은 그런 그의 말에 백번 수긍하는 눈치였으나 모처럼 찾아온 기회가 무산될까봐 조바심이 나는 듯 그의 발언을 제지하였다. 그러나 저러나 알베르토는 더 이상 그들의 요구조건을 내세울 명분이 없는지라 차의 의견을 물어 내일 다시 연락을 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음 날, 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안 부장, 차가 그러는데 안 부장이 오면 합의고 뭐고 못하겠다는군. 아무래도 김 상무를 보내야 할까 봐."
경섭은 기가 차서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합의에 급급한 그의 의중이 과연 무엇일까, 그 점이 무진장 궁금했으나 그는 퇴직 후 여기저기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느라 그만 그 일을 잊어버렸다.
20
러시아로 가기 위해, 오호츠크의 그 넓고 차가운 바다를 만나기 위해 밤낮으로 설레며 출국준비를 서두르던 어느 날이었다. 뜻밖으로 K 과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형님, 차동한과 합의가 끝났습니다. 김 상무가 돌아와서 형님 험담을 많이 하데요. 괜히 소송을 벌려 사업 망치고 돈만 날리게 한 장본인이 형님이라고요. 그런데 이번에 또 삽 십만 불을 뜯겼어요."
그 말에 경섭은 또 다시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의, 싸워서 이긴 자의 몫인 게야. 젠장 빌어먹을!
그 날, 화가 난 나머지 꼭지가 돈 그는 K를 불러 일의 자초지종을 알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결과는 새벽까지의 폭음에 인사불성의 대취였다. 그리고 며칠이 또 지났다. 난데없이 김국환으로부터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집에서 놀고 있는지 다른 직장을 구했는지 궁금해서 물어물어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오라, 이놈이 나의 동정을 다 읽고 있었구나. 말을 하는 모양이 어쩐지 수상했다. 혹시나 싶어 경섭은 차동한이 무슨 재주로 삼십만 불을 또 뜯어 갔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이 사장이 교회 장로 아닙니까. 교회랑 집에 있는 사모님한테 신문을 보내겠다고 했지요. L·A에서 찍은 그 신문 말입니다. "
그 순간 경섭은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가슴이 터져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지금 계신 데가 어디에요? 얼굴이나 한번 봅시다."
"후 후 후! 또 연락드릴게요. 그럼..."
그 순간 경섭은 그가 살아있다는 것이 참을 수 없도록 부끄러웠다. 차동한을 팜파스의 벌판으로 끌고 가 요절을 내지 못한 것이 다시금 후회막급이었다.
그런 모멸감으로 진저리치는 날이 거듭되었다. 차라리 죽고 싶었고 땅속으로 숨어 버리고 싶었다. 그런 자괴감에 쩔쩔매다가 경섭은 마침내 막막한 오호츠크의 바다로 떠났다. 그것으로 차종한과의 악몽 같은 인연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