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두에는 가는 빗방울이 뿌리고 있었다. 좀 전만해도 큰 비가 뿌린 듯 부두에 접안한 배들은 모두 물동이를 덮어 쓴 듯 후줄근한 모습이었다. 배를 처음 탄다는 죠세바(Josheba)는 키 165센티미터에 앞이마가 약간 벗겨진, 아담하고 야무지게 생긴 오십대 초반의 동양인 남자가 서슴없이 배 난간을 오르자 흰 이를 드러내며 웃더니 냉큼 모야줄을 풀었다. 방금 배에 오른 사내는 씨윌호(F/V She will)의 선장인 오상식(吳相植)이었다.
점심 때 블루(Blue)가 보여준 기상도에는 피지 동북방 해상에서 발생한 중심풍속 64노트인 큰 스톰이 그려져 있었다. 태풍의 진로는 바누아투 쪽인 남서방향이었고 오 선장이 찾아가려는 어장은 태풍의 진로와 정 반대인 남동쪽 175도 해역이었다.
오후 3시. 조금 늦은 출발이었다. 블루와 샌디 어미가 태풍이 지나간 뒤에 출항하라고 말렸지만 오 선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바누아투와 인접한 남서어장은 비싼 기름값 때문에 이제 어장의 경제성이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새해 들어 첫 항차부터 아예 수바(Suba)의 동쪽으로 어장을 옮겨보기로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좁은 수로를 나아가니 오른편 산호초 밭에 박(朴) 아무개가 얹어먹은 배가 볼썽사납게 누워 있었다. 선주가 부도를 내고 사라져 일 년이 지나도록 그냥 그렇게 방치되어 있었다. 큰 바다로 나서니 금방 해면이 거칠어졌고 배가 좌우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씨윌호는 13년 전 뉴지에서 건조된 120톤급 트롤어선을 참치 빙장선으로 개조한 배였는데 수바에서 롤링이 심하기로 소문난 배였다. 심한 롤링 탓에 모두가 머리를 내저어 일 년 넘게 부두에 묶여있던 배를 선주인 블루가 오 선장에게 끌고 온 것이 작년 이맘 때였다. 오 선장은 그때 가족들을 데리고 피지에 휴양 차 놀러와 있었다. 참치 독항선(獨航船) 선장 4년 만에 몸도 마음도 지쳐 가족들에게 이제 다시는 배를 타지 않겠노라 다짐까지 한 터였다.
그러나 피지의 빙장 참치선은 한 항차가 길어야 보름 안팎이었다. 노느니 염불한다고 경치 좋은 이곳에 와 살면서 배를 탄다면 가족들에게도 좋겠다 싶었다. 오 선장은 블루에게 석 달의 말미를 구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이삿짐을 쌌다. 피지생활에 회의적이던 장성한 두 딸들에겐 당분간 이곳에서 영어나 실컷 배우라 하고 그는 다시 배를 탔다.
롤링을 완화하기 위해 좌현에 스테블라이즈(stablizer)를 설치한 것도 순전히 오 선장의 아이디어였다. 다행히 씨윌호는 선주가 뉴질랜드인이고 현지합작투자법인의 배라서 피지의 경제수역내 입어허가를 가진 배였다. 중국이나 대만국적의 배들은 입어허가 순서에서 밀리기 일쑤여서 대부분 공해수역이나 피지인근 섬에 한시적 입어허가를 받아 조업을 하고 있었다.
포트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태풍의 진로와 같은 남서풍이었다.
처얼썩! 처얼썩! 철썩! 철썩! 쿵!
스테블라이저가 수면과 부딪히는 굉음이 머리를 흔들어 놓았다. 배가 좌우로 기울기를 네 번 한 끝에 수상비행기의 발처럼 생긴 스테블라이즈의 알루미늄 판이 수면과 충돌하면서 배의 요동을 진정시키는 것이었다.
어느새 바다에는 어두움이 깔리고 있었다. 목적지인 남위 20도의 남쪽 바다까지 밤새 달려가야 할 길이었다. 날이 밝아도 태풍의 영향권을 완전히 벗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오 선장은 일 항사인 안도(Yando)에게 조타석을 맡기면서 야간항해시 스타보드(starboard)에 견시(見視)당직을 세우라고 일렀다. 브릿지 중앙에 위치한 컴퓨터 해도에는 벌써 내일 아침에 쓸 투승코스가 그려져 있었다.
식사를 준비하는 일이 어쩌면 오 선장에겐 바다에서의 유일한 노동이었다. 쌀을 씻어 전기밥솥에 앉히고 냉장고를 열어 몇 가지 밑반찬을 꺼냈다. 김치, 오징어채뽂음, 절인 깻잎, 부추김치, 국이 없으면 아무래도 목이 마를 것 같아 인스턴트식 미역국 봉지도 꺼냈다. 도대체 양식은 물론이고 원주민들의 주식인 타로(Taro)나 까싸바(Cassava) 같은 음식조차 입에 댈 수 없는 그의 식성이 끼니때마다 그를 브릿지에 있는좁은 선장실과 상갑판을 넘나들며 운동을 하게 만들었다. 이윽고 밥이 끓었다. 다음엔 국이 끓었다. 작은 격자상 위에 먼저 키친타월을 깐 뒤 주섬주섬 반찬을 깔고 국그릇도 앉혔다. 오 선장은 격자상을 사타구니 사이에 가두고 등과 다리를 벽에 한껏 버팅기며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처얼썩! 처얼썩! 철썩! 철썩! 쿵!
느린 중중모리 가락을 타듯 흔들리는 배에 몸을 맡긴 채 오 선장은 익숙한 동작으로 밥과 반찬을 입으로 옮겨갔다.
남위21도, 동경 175도. 오전 6시부터 투승작업이 시작되었다. 배는 반경 150마일인 태풍의 왼쪽 가장자리에 살짝 걸쳐 있는 셈이었다. 어두움 속에서 혼불처럼 출몰하던 간밤의 백파(白波)가 아침까지 수면 위로 물보라를 흩날리고 있었다.
선미 상갑판의 슈터(shooter,투승기) 옆에는 레슬러처럼 몸이 비대한 아사바(Aesava)와 콧수염을 기른 갑판장 아사케(Aisake)가 연신 오징어와 정어리 새끼를 낚시에 끼우고 있었고 난장이처럼 키가 작달만한 인도네시아인 조리장 수토로(Sutoro)는 1층 부식창고에서 꺼낸 베이트(Bait: 미끼) 상자를 선미 상갑판으로 뚫린 좁은 통로를 통해 열심히 위로 올리고 있었다.
투승작업은 라디오 부이(radio buoy)가 달린 초기(初旗)를 꽂은 후로 만 6시간이 걸렸다. 물밑에 늘어뜨린 메인라인(Maine line:主繩)의 총연장은 약 45마일(72키로)에 달했다. 메인라인에 30미터 간격으로 스냅(snap)을 걸어 수직으로 늘어뜨린 브랜치 라인(Branch line:幹繩)의 각 35개마다 부이를 하나씩 달았으므로 부이 숫자만 모두 70개였다. 낚시가 달리는 브랜치 라인의 길이를 오 선장은 남들보다 조금 짧은 15미터로 하고 있었다. 브랜치 라인이 짧으면 양승(揚繩)작업이 수월하고 낚시에 물린 고기가 물속에서 이탈하는 경우가 적었다. 라디오 부이는 메인라인의 중간 중간에 하나씩 하여 2개, 메인라인의 끝부분에 이르러 종기(終旗)에 달아 바다에 던져졌다. 참치 독항선에 비해 배의 크기는 작았지만 어구의 규모는 대동소이했다.
배의 진로방향으로 던진 정투승(正投繩)이었으므로 배는 투승 후 3시간 동안 표박(漂迫)했다. 종기(終旗)를 걷어 올리기 전에 고기가 미끼를 물 시간을 주는 셈이었다. 오 선장은 되돔(Return back)방식보다 늘 정투승을 선호했다. 되돔방식은 원점회귀식 투승방식을 말하는데 종기를 투하한 후 바로 초기를 찾아 양승을 하므로 시간을 절약하는 잇점은 있으나, 광범위한 바다에서 일정방향으로 유영하는 표층어군을 포획하기 위해 주낙의 소해면적(消海面積)을 최대한 넓힌다는 점에서는 직선형으로 떨어뜨리는 정투승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생각했다.
양승작업은 오후 3시부터 시작되었다. 피지선원 6명이 우의를 입고 기우뚱거리는 뱃전에 붙어섰다. 배가 기우뚱거리고 선수가 파곡을 탈 때마다 파도가 선원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어쩌면 황천(荒天)조업이라 하겠지만 오 선장은 그저 덤덤했다. 그도 그럴 것이, 메인라인을 인양하는 양승기(Line hauler)가 예전에 쓰던 별도의 유압식 기계가 아니라 메인라인을 감는 윈치드럼(winch drum) 그 자체의 동력이므로 데크에서 선원들의 손이 그만큼 한가해져 파도가 덮쳐도 제 몸 하나 가누는 것이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맨 선두의 선원이 윈치드럼을 움직이는 양승보턴을 조작했고 그 뒤로 사각형 플라스틱 통을 끼고 선 자들은 브랜치 라인을 통에 사리는 팀이었고 나머지는 잡혀 올라온 고기를 처리하는 터미네이터들이었다.
175도 어장은 여전히 알바코(Albaco:날개다랑어)의 어장이었다. 빅 아이(Big eye:눈다랑어)나 옐로우 핀(Yellow fin tuna:황다랑어)을 기다리며 네 시간을 주목했지만 수평선으로 해가 떨어질 때까지 20키로 내외인 알바코만 스무 마리 올라왔을 뿐이었다.
수평선의 하늘을 물들였던 낙조가 거뭇거뭇 사라지자 사방 가득 어두움이 번지기 시작했다. 바다 위로 하늘이 마악 어둠의 셔트를 내리는 순간이었다. 어두움의 장막이 미처 드리워지기 전에 작업등이 켜졌다. 먼 바다에선 사방 주위가 온통 일렁이는 물 뿐이어서 낮에는 마치 둥근 호수에 갇힌 느낌이었는데 어두움이 짙게 번진 바다는 그야말로 창세기 천지창조의 기사처럼, 빛이 만들어지기 전의 혼돈을 연상케 했다. 또는 빛이 사라진 수 억 광년 먼 저 편의 우주에 떨어진 느낌이기도 했다. 별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각이었다. 수면 위로 낮게 불어오는 바람의 흔적 외엔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깜깜한 어두움이었다. 대양에서의 밤이 처음이 아니련만 어두움으로 인해 수평선이 완벽하게 지워지는 광경은 언제나 난생 처음인 듯 신비로웠다.
낙엽 같은 배 위에 몸을 맡긴 채 사방천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바다에 홀로 떠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순간 오 선장은 자기 자신이 물밑에서 노니는 물고기보다 못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극히 미약하여 한낱 티끌보다 못한 존재라는 인식과 함께 자신의 삶도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라 태양과 지구와 달과 별이 이루어 내는 엄밀한 우주적 질서 속의 일부일 것이란 자각이 뒤따랐다.
그때 선수의 좌측 수평선쪽으로 노란 불빛 하나가 방긋 떠올랐다. 오 선장은 그것이 출항 전 어장이동에 동반의사를 내비치던 자매선 씨구알호(F/V Sea gual)의 마스터 불빛인가 싶었다. 그러나 선수가 파곡의 골짜기로 기울자 둥글고 노란 불빛이 성큼 머리 위로 치솟았다. 먹구름을 헤치고 어느새 달이 떠올랐던 것이다. 달빛에 하늘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드러나는가 싶었는데 달이 구름 뒤로 숨자 천지는 다시 깜깜한 어두움이었다.
“동쪽으로 더 가야할 모양이군.”
혼자 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안도가 브릿지로 들어섰다. 안도는 인도네시아 출신으로 한국의 트롤어선을 3년간 탄 경험이 있어 한국말을 곧잘 알아들었다. 나이 스물일곱에 결혼하여 딸을 한 명 두고 있었다. 오 선장은 그의 월급을 미화 700불로 책정해 주었다. 안도가 집에 부쳐주는 돈은 한국 배를 탈 때보다 훨씬 더 많아진 셈이어서 그는 피지에서 3년만 더 배를 탈 생각이라고 했다. 목돈이 생기면 고향에 돌아가 식당을 차리든가 택시를 사 운전을 한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손목시계가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동안 올라온 부이 숫자가 모두 합쳐 30개였다. 양승작업은 통상 투승시간의 세 배가 걸렸으므로 익일 오전 9시가 넘어야 끝날 것이다.
2.
미명에 일어난 오 선장은 안도가 기록한 어획일지부터 훑어보았다. 알바코 67미, 옐로우 핀 4미, 빅 아이 6미 잡어포함 총 1톤. 빅 아이와 옐로우 핀은 그가 잠든 틈에 올라온 듯 했지만 씨알이 20킬로그램 전후의 잔챙이어서 실망스러웠다. 독항선 선장 시절에 누비고 다니던 적도 부근의 저위도(低緯度) 어장이 새삼 그립고 아쉬웠다. 저위도 어장은 고위도(高緯度)에 비해 수온이 낮아 고기의 기름기가 많으며 덩치가 평균 60~70킬로그램 이상 나가는 대형어가 많이 잡혔다.
빅 아이와 옐로우 핀은 그래도 갑판에 올라오면 크기와 상관없이 언제나 상전취급이었다. 왜냐면 횟감용 고기라 어혈(魚血)을 뽑는 것이 다른 고기와 비할 바가 못 될 정도로 민첩하고 신중했다. 갑판에 올려진 고기를 처리하는 곳에는 고기의 피부가 상하지 않도록 두툼한 모포가 깔려 있는데 먼저 고기가 그 곳에 놓여지면 처리원은 고기의 머리에서 등의 척추로 이어지는 숨골부분에 손잡이가 달린 쇠꼬챙이를 깊숙이 찔러 넣는다. 그 순간 퍼덕거리던 고기는 동작을 멈추고 동시에 쇠꼬챙이를 꽂았던 자리에서는 선홍색의 뜨거운 피가 분수처럼 솟아오른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처리원은 곧장 고기의 아가미와 창자를 제거한 뒤 해수로 고기의 몸속을 깨끗하게 세척해 낸다. 고기의 피가 자칫 척추를 통해 고기 살 속에 배이게 되면 상품가치를 잃게 되므로 피를 제거하는 일련의 작업공정은 언제나 이처럼 민첩하고도 신중하게 이루어졌다.
수평선으로 회색빛의 구름들이 비누거품처럼 엉겨있었으므로 솟아오르는 태양은 구름 뒤에서 붉은 빛만 토하고 있었다. 태풍의 권역에서 많이 벗어난 듯 해면은 어제보다는 많이 수굿해 보였으나 백파의 행렬은 여전했다.
검은 머리 제비갈매기 한 마리와 남방 흰 머리 갈매기 두 마리가 아침 식사를 위해 바다 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혼자서 또는 두엇이 이런 먼 바다까지 나와 먹이를 찾는 것이 신기했다. 저들의 보금자리는 대체 어디쯤일까. 잠시 그런 생각에 빠져 들었는데 바다새들은 어느새 종적을 감추고 없었다. 아마 물밑의 고기를 찾아 바다 속으로 곤두박질을 했을 테지. 제 아무리 낚시를 드리워도 결과가 신통치 않을 때는 눈이 밝은 바다새에게라도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오 선장은 컴퓨터 스크린에 다시 투승코스를 그리기 시작했다. 주변어장의 해도가 세밀하게 그려진 바탕화면 위로 커서가 움직이며 작업코스를 나타내었다. 투승코스는 곧 자동항법장치(自動航法裝置)로 연결되었다.
남위 19도53분, 동경 175도30분을 기점으로 275도 코스로 시작되는 되돔방식이었다. 오늘은 기어이 옐로우 핀과 빅 아이를 내 눈으로 보리라, 오 선장은 어린 아이처럼 들뜬 마음으로 다시 하루를 시작했다.
해수온도 28도. 양승이 시작된 오후 2시의 햇살은 따가웠다. 오 선장은 아예 상갑판 스타보드쪽에 세워둔 전선말이 나무통 위에 앉아 올라오는 낚시줄을 주시했다. 선장이 내려다보고 앉았으니 피지 선원들이 아연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되돔식 투승이었으므로 그리 오래지 않아 고기가 올라왔다.
첫 번째 손님은 남태평양에서 마이마이(Mahi Mahi)라고 부르는 만새기의 암컷이었다. 바다 속에서 건져 올려 질 때는 아름다운 녹청색 피부가 햇빛에 반사되어 고기 주위로 영롱한 무지개가 아롱거렸다. 육질이 부드러워 미국이나 하와이 등지로 수출되는 고기였다. 오 선장은 바다의 여왕 같이 아름다운 마이마이만 보면 언제나 기분이 좋아졌다.
아사케가 능숙한 솜씨로 배를 따고 알과 내장을 꺼냈다. 해수로 피를 씻어낸 어신(魚身)은 비닐로 싼 뒤 빙장칸으로 넣어졌다. 인도네시아인인 기관장 아셉(Asep)과 1기사 두디(Dudi)가 갑판 중앙에 놓인 제빙실을 에워싸고 돌며 제빙한 얼음조각을 빙장칸으로 살포하고 있었다. 선장이 상갑판에서 버티고 앉았으니 그들의 몸놀림이 여간 명랑하지 않았다. 아셉의 경우 피지에 올 때 월 미화 700불로 계약된 것을 6개월 만에 1,000불로 인상해준 터라 선장만 보면 늘 머리를 조아렸다. 나이 마흔 일곱에 식솔이 6명인 가장이었다.
두 번째 손님은 일본말로 ‘메까(mekajiki)’라 부르는 황새치(Sword fish)였다. 새치는 물 위를 새처럼 날아다닌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새치류에는 상업적으로 ‘마까(makajiki)’, 즉 청새치(Striped marlin)와 돛새치(Sailfish)가 대표적이다. 생긴 모습으로만 치면 아무래도 돛새치가 단연 새치류의 왕이라 할 수 있다. 돛처럼 곧게 일어선 등지느러미의 높이가 몸체의 두 배가 넘었으므로 이놈이 수면 위를 비상하는 광경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저마다 넋을 잃을 정도였다.
메까는 식욕이 왕성하여 미끼에 물린 어린 참치를 물고 있다가 함께 잡혀 올라오거나 함부로 칼솜씨를 뽐내다 부이줄에 주둥이가 걸려 올라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남태평양의 어부들은 앞뒤 안 가리는 저돌적인 사람을 메까 같은 놈이라 불렀다. 그러나 메까는 부부금슬이 유별하여 암수가 함께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수컷이 낚시에 걸리면 암컷이, 암컷이 낚시에 걸리면 수컷이 배 주위를 떠나지 않고 배회하는 것을 오 선장도 저위도 조업을 할 때 자주 목격하여 잘 알고 있었다.
처음 만난 메까는 몸무게가 50 킬로그램 남짓한 소형어였다. 고위도 수역이어서 아무래도 잔챙이 고기는 피할 수 없는 노릇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몸에 지방이 많아 마치 산란기에 접어든 바다표범의 암컷을 보는 느낌이었다. 메까도 큰 놈은 빅 아이보다 그 값이 더 나갔으므로 내장과 피를 제거한 후 빙장칸으로 넣어졌다. 마까와 돛새치는 엘로우 핀과 그 값이 어금버금이었다.
투승의 첫 번째 코스에서는 유난히 잡어가 많이 올라왔다. 마이마이가 세 마리나 연속적으로 올라왔고 마까 두 마리, 삼치류인 와후(Whaoo)가 또 올라 왔다. 모두 빙장칸으로 넣을 고기였다.
오 선장은 생수병을 들고 브릿지 밖으로 나왔다. 선수 쪽으로부터 부서진 파도의 포말이 날아와 냉큼 이마를 덮쳤다. 그때 스타보드 갑판에 일렬로 붙어 섰던 선원들의 대오가 갑자기 무너지며 저마다 ‘끼우! 끼우!’라고 외쳤다.
갑판장 아사케가 쇠칼이 달린 하커를 집어 들더니 뱃전으로 급히 머리를 숙였다. 갑판에 끌어 올려 진 것은 외양이 제비처럼 잘 생긴 청상어(Blue shark)였다. 몸 길이 1.5미터에 달하는 청상어는 등의 색깔이 연청색이다. 상어가 퍼득거리자 아사케가 원주민용 정글칼로 상어의 목을 내리쳤다. ‘단칼에 죽인다’라는 말이 꼭 들어맞는 장면이었다.
상어낚시는 브랜치 라인이 아닌 부이줄에만 달았다. 지느러미만 잘라 말려서 파는 상어는 선원들의 주된 부수입원이었다. 피지인들은 승선일당이 정해져 있어 어획고는 저들의 수입과는 무관했다. 다만 상어꼬리값의 배당액이 그들 월급의 절반에 이르렀다. 그래서 상어가 잡혀 올라오면 저마다 동작이 기민해지고 환호작약하게 되는 것이었다. 남태평양의 상어는 청상어 외에도 악질상어(Brown shark)와 백상어(Moro shark)가 있는데 지느러미 값으로 따지면 악질상어의 그것이 다른 것의 2배쯤 비쌌다.
어느덧 서녘 하늘이 황혼으로 물들고 있었다. 태양이 수평선 밑으로 완전히 잠기자 하늘은 태양의 잔영으로 온통 붉게 물들었다. 수평선쪽으로 가로로 길게 늘어선 구름들이 붉은 물감을 덮어쓴 채 갈기를 날리며 달리는 사자 같기도 하고 로마군대의 병거 같기도 하고 귀를 쫑긋 세운 토끼 같기도 했다.
피지 선원들은 저녁식사를 위해 교대를 하였으나 오 선장은 여전히 전선말이 나무통을 장악한 채 올라오는 낚시줄만 응시했다.
‘ㄷ’자형의 두 번째 코스에 접어들자 알바코와 함께 빅 아이와 옐로우 핀이 한 마리씩 섞여 올라왔다. 그러나 여전히 씨알이 작은 게 불만이었다. 횟감용 참치는 어종별로 가격이 다르고 같은 어종이라도 몸무게에 따라 가격이 상․중․하로 나뉘었다. 20킬로그램 언저리 싸이즈가 당연히 제일 단가가 낮았다. 한 시간 남짓 버티고 앉았다가 더 있어봐야 별 수 없다 싶어 그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했다. 오랜만에 남십자성(南十字星)을 찾아보려고 오 선장은 밤하늘을 우러러 고개를 남쪽으로 돌렸다. 은하의 강이 꼬리를 물고 한없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가까운 곳에서 반짝이는 별들은 마치 그에게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타이르는 선지자처럼 느껴졌다. 밤하늘에서 크고 작은 별들이 보석처럼 빛났다. 그 별들을 바다 위에서 지금 혼자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마침내 그는 그의 하나님을 찾아 마음속으로 감사했다. 우주를 탐구하는 일부 천체물리학자들이나 생물의 기원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자들이 언젠가는 신조차 그 존재유무를 증명해 보일 것이라고 장담을 한다지만, 이처럼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운 밤하늘의 광경을 보고 있을 때면 오 선장은 언제나 그 누군가에게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철새들이 극지방의 별 하나를 지표로 삼아 먼 여행을 떠나듯 그도, 그가 탄 이 작은 배도 오늘 밤만은 결코 외롭지 않으리라.
수토로가 어린 참치 뱃살로 물회를 만들어 왔다. 초장과 파인애플 등 소스는 언제나 선장의 옵션이었으므로 썰은 야채 위에 참치 뱃살과 얼음만 띄운 채였다. 전기밥솥에서 밥이 끓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 때 라디오에서 오 선장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니콘호의 윤 선배였다.
“오 선장, 그 곳 어황은 어때?”
“이틀째 담구고 있는데 고기가 별롭니더. 형님네는 태풍 때문에 조업도 올케 못했 겠네예?”
“며칠 전만 해도 공해어장엔 사치떼가 극성이었어. 어제는 또 피항한다꼬 모조리 솔로몬제도로 올라갔다 아이가. 그런데 추가 입어허가선 소식은 아직 못 들었나?”
“예, 못 들었심니더. 형님 배는 작년에 하던 배고, 또 피지 국적선인데 와 그라꼬예?”
“개인 선주니깐 얕잡아 보고 그러겄지. 기름값이 올라 알바코도 하루 70마리 이상 못 잡으면 적자아이가. 빅 아이라도 구경할라몬 170도 동쪽으로 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추장 그놈들이 발목을 잡는 것 같애.”
1월도 하순에 접어들었으나 피지 경제수역내 입어허가가 떨어진 배는 수바를 기지로 하는 전체 200여 척의 연승어선 중 7척에 불과했다. 연례적으로 40~50척은 피지경제수역 허가가 발급되었으므로 피지 국적선인 유니콘호로선 영문도 모른 채 공해에서 기름만 낭비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윤 선배는 입어허가 지연이 추장들의 농간 때문이라고 원망을 하고 있었다.
피지에는 도회지를 벗어나면 곳곳에 빌리지(Village)라는 원주민 부락이 있어 부락마다 추장을 중심으로 공동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약 800여 개의 도서 중 사람이 사는 300여 개의 섬에는 라투(Ratu)라 부르는 추장이 있고, 그 중에서도 큰 섬을 지배하는 대추장이 12명 있어 국토개발이나 자원관리 등에 관한 국책사업에는 이들 대추장의 동의가 필수적이라고 했다.
입어허가야 피지수산청과 선박회사 간의 절차상의 문제겠지만 무슨 일만 잘 안 풀리면 윤 선배처럼 한국 선장들은 으례 추장을 씹어대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젠가 현지 수산회사의 배를 탔던 한국 선장이 부주의하여 남쪽바다의 어느 산호섬에 배를 얹힌 적이 있었는데 그나마 쓸 수 있는 항해장비와 어구 등을 들어내려다 그 섬의 주인인 추장의 반대로 배 물건에 손 하나 대지 못한 채 쫓겨난 일이 있었다.
“우리 섬에 들어 왔으니 이건 다 내꺼야!”
그 추장이 한국 선장의 등을 떠밀면서 던진 말이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3.
양승작업이 주로 밤에 이루어졌으므로 메인라인이 터지는 일이 잦았다. 1회 양승에 보통 3~4회는 메인라인이 터졌으며 어둠 속에서 부이를 찾아 헤매는 시간도 한 번에 30분 이상 걸렸다. 메인라인 드럼에 걸리는 주승(主繩)의 부하는 대략 35톤에 달했다. 주승으로 옛날에는 구로나와를 사용했는데 줄이 무거워 바다 속으로 150미터 이상 넣을 수가 없었다. 현재 사용하는 나일론 모노 필라멘트(Nylon mono filament)는 수심 400미터까지 담글 수가 있으니 물에 잠기는 그 부하의 정도를 짐작할 만 했다. 그래서 메인라인의 드럼, 또는 스풀(spool)이라 부르는 원통은 알루미늄과 주석을 합금한 특수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침로(針路)와 선속을 컨트롤하는 브릿지에서의 조타와 갑판의 라인블록(line block)에 붙어선 선원의 유압스위치 작동에 엇박자가 나면 부하가 가중되어 주승이 자주 끊어지곤 했다. 양승시간이 무려 18시간에 이르는 것은 이 같은 로스타임이 보태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전 한국 어선의 유압스위치는 언제나 노련한 갑판장이 도맡아 하곤 했다. 주승이 한 번 끊어지면 어황에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진 선장이 선내 마이크로 육두문자와 함께 고성을 내지르기 일쑤였고 언제나 부족한 수면으로 고단했던 선원들은 그 소리에 놀라 밀려오는 졸음을 떨쳐내며 죽기 살기로 흉흉한 바다를 응시했던 것이다.
오 선장은 나이가 들수록 선원들에게 관대해지려고 애썼다. 수산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실항사부터 시작했던 70년대 중반의 그 무지몽매했던 세월과 무참했던 노동을 반성한 것은 그의 나이 마흔이 넘어서였다. 늘 부족한 잠에 시달렸던 하급선원들은 시도 때도 없이 작업대에 선 채로 또는 갑판에 올라온 낚시줄을 사리다가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그 옛날 한국의 독항선에는 메인 라인을 감는 윈치드럼 자체가 없었다. 메인라인은 메인라인박스에 담았고 브랜치 라인은 브랜치 라인대로 따로 또 담았다. 3,500여 개의 낚시를 달았으니 브랜치 라인을 담는 그릇만 70개였다. 수면시간 부족은 많은 일손을 필요로 하는 투승과 양승작업의 수작업에 가까운 작업형태에 기인한 것이지만 애꿎은 선원들은 잠이 쏟아질 때마다 욕설과 몽둥이 세례를 피할 도리가 없었다.
오 선장이 타고 있는 씨윌호의 동력시스템, 즉 메인라인 드럼의 회전력으로 투승과 양승을 하는 방식은 미국에서 개발된 것으로 갑판에서의 작업효율을 크게 향상시켜 선원들의 수를 대폭 줄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씨윌호는 갑판원은 모두 8명이었고 모두 피지 현지인들이었다. 양승 때나 투승 때 조리장 수토로가 거들었고 기관부 당직으로 새로 승선한 죠세바가 빈 시간마다 가세했다. 예전 보합제식 조업이 아니었으므로 전 선원이 죽기 살기로 협동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동료의식으로 그들은 갑판의 일을 조금씩 거들었다.
신기한 것은 피지인들의 낙천적인 성격이었다. 그들은 양승작업 시간 내내 웃고 떠들어대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거나 파도가 덮쳐 몸을 가누지 못하는 황천조업에도 예외가 없었다. 이번 항차의 익살꾼은 29살의 노총각 죠세바였다. 그는 잘 다듬어진 몸매에 소년같이 맑은 눈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 나이에 벌써 딸, 아들을 둔 루부이와이(Luvuiwai)와 비교하면 하는 짓이 영판 철없는 개구쟁이였다. 루부이와이는 몇 개월 전 부두를 어슬렁거리다가 오 선장의 눈에 띄어 그 길로 어부가 된 친구였다. 집에 쉬러 간 현지인 갑판원 한 명이 출항시각이 되어도 도착하지 않자 마침 눈에 띈 그를 오 선장이 우격다짐으로 배에 태웠던 것이다.
피지선원들의 월 수입은 미화로 300불 정도인데 이 외에 매 항차 상어 지느러미 판값으로 미화 100불 이상을 덤으로 받고, 입항할 때마다 싱싱한 잡어고기를 한 포대씩 집으로 들고 갔다. 육상의 일반 사무직원의 초임이 미화 200불 정도였으니 선원이란 직업은 원주민들로서는 최고의 직업이었다.
이들은 자기네들끼리 선교사들이 가르쳐 준 찬송가를 합창하거나 아이들 같이 뜻 없는 잡담으로 시간의 무료함을 때우기 일쑤였는데, 죠세바가 탄 이후로 그들의 동선(動線)이 더 난삽해진 듯 했다. 그는 작업에 열중인 동료들 뒤로 살며시 다가가 버럭 고함을 지르거나 손가락을 모아 엉덩이 밑을 찔러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장난을 일삼았다. 희한한 것은 그런 그를 나무라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함께 킬킬거리며 장난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었다. 예전 한국 배였다면 누가 한 사람 다쳐도 크게 다칠 일이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친구와 가족’이라고 배웠다. 오 선장은 원숭이 새끼들처럼 서로 히히덕거리며 지루한 양승작업을 견뎌내는 그들이 오히려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자정이 될 때까지 빅 아이와 옐로우 핀의 어획은 기대 이하였다. 지난 항차까지 172도 어장에서 통조림용인 알바코를 타깃으로 조업을 했던 오 선장이 처음으로 175도 어장을 겨냥한 것은 횟감용 참치를 겨냥했던 것이다. 성어기인 4월과 9월 사이 172도 어장에서 알바코를 많게는 하루 최고 230 마리까지 잡은 기록이 있지만 알바코 어장은 이젠 그 용도가 끝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름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만큼 횟감용 참치조업이 아니면 앞으로는 결코 경제성을 맞출 수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횟감용 참치인 빅 아이나 옐로우 핀은 주로 적도 아래 위 5도 이내의 대서양과 태평양과 인도양을 거쳐 페루연안까지 분포하는 어종이고, 최고의 육질을 자랑하는 블루 핀(Blue fin)은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의 남쪽, 호주의 타스만해, 남아메리카의 사우스조지아섬 이남 등 파도가 거친 위도 45도 이상의 고위도에 주로 서식한다. 그래서 블루우 핀은 잡기가 어려워 먹기도 어려운 고가어종이었다.
한편 피지어장은 남위 20도의 고위도 어장이지만 수온이 적당하여 육질이 좋고, 또한 태평양의 십자로라 불릴 만큼 항공사정이 좋아 일찍이 빙장참치선 기지로 각광을 받아온 곳이었다. 문제는 산호초를 에워싼 연안 12일 마일 내 어업허가를 받는 일이 하늘의 별따기여서 그나마 경제수역 내 조업에 만족하는 실정인데 이제껏 그 누구도 피지의 경제수역내에서 고기의 행로를 전방위로 조사한 자가 없어 너도나도 최근 몇 년간 172도 어장의 알바코 어장만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독항식 원양어선들은 피지의 북쪽인 키리바시 어장을 주로 드나들지만 피지를 기지로 하는 어선들은 피지의 경제수역이 아니면 대부분 피지의 바로 위쪽인 투바루(Tuvalu)나 남서쪽인 바누아투(Vanuatu) 어장에 입어하며 드물게는 바누아투의 북서쪽에 위치한 솔로몬 군도(Solomon Is.) 어장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오 선장은 다시 동쪽으로의 적수(適水)를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태풍의 영향으로 바다가 들썩였다고는 하나 정투승과 되돔으로 두 번이나 훑은 바로는 이곳은 그리 만족할 어장이 아니었다. 횟감용 참치라 하더라도 씨알이 굵지 않으면 제 값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적수를 하고자 한다면 날짜변경선을 넘어가야만 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이 바다가 아니던가. 날짜변경선까지만 해도 꼬박 하루 반나절의 항해거리였다. 목표지점까지라면 이틀 이상의 항정이었다. 만약 그곳에서조차 잔챙이 고기만 올라온다면 그 다음은 어쩔 것인가. 오 선장은 잠시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보였다. 그가 새해의 첫 항차부터 수바의 동쪽 어장을 겨냥했던 것은 나름대로 몇 가지 말 못할 다급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수란 수온약층(水溫躍層)과 플랑크톤의 분포도를 탐색하여 대양회유를 하는 참치어군의 밀집도가 높은 어장을 찾는 일이다. 세상이 좋아 최근에는 수온약층과 플랑크톤의 분포도는 위성사진으로 매일 받아볼 수 있었다. 선장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수온과 수색(水色)을 읽고 어탐기록을 탐지하는 것뿐이었다. 굳이 오 선장에게 남다른 비결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가 믿는 하나님의 능력과 매일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그의 은혜를 믿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풍요한 어획을 위해 특별히 기도해 본 적은 없지만 언제나 매일 그는 투승을 할 때마다 오늘은 꼭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4.
남위 19도, 서경 177도. 침로 60. 적수 중에 날씨는 쾌청했다. 하얀 구름은 언제나 수평선 근처에 몰려 있었고 부드러운 바람은 늘 한 길로 불어왔다. 연청색의 하늘과 짙은 남색의 바다는 구름의 경계만 아니면 원래 한 통속이었을 것이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놀랍게도 어디서 날아왔는지 노란코 알바트로스 한 마리가 선수 쪽 창공에서 잠시 맴돌다 선미 쪽으로 사라져 갔다.
큰 딸의 결혼식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써든 크로스(Southern Cross) 호텔에서 성대히 치루었다. 신랑은 선주인 35살 노총각 블루였다. 한국의 늦가을에 해당하는 작년 5월의 일이었다.
출항하기 하루 전 날 블루가 오 선장의 식구를 초대해서 저녁을 산 적이 있었는데, 그 날 그 자리에서 영어를 곧잘 하는 큰 딸이 통역을 하게 된 것이 국제결혼의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신부 쪽 하객은 수바에서 남의 배를 타는 한국 선장들이 전부였다. 그 날 한국 선장들을 위해 특별히 피지 토종돼지를 한 마리 잡아 뷔페식 식당에서 소주와 함께 바베큐를 준비하기도 했다.
1990년을 전후로 한국인들이 하나 둘 피지에 드나들기 시작한 이래 지금은 대만, 중국 등 남의 배를 타는 한국인 선장만 60여 명에 이르고 있다. 그 중 환갑을 넘긴 선장만 해도 10여 명이 넘었다.
인생의 마지막 장을 피지에서 마무리하려고 작심하고 가족을 떠나온 낭만주의자들은 상륙만 하면 술집마다 진을 치고 있는 중국 여자들을 꿰차고 골프장이나 해변을 보란 듯이 쏘다녔다. 중국 여자들이 피지로 몰려든 것은 불과 몇 년 전이었다. 모두 중국 선원들을 따라 몰려든 철새들이지만 그들을 보노라면 술집 접대부들의 해외수출도 다 국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어떤 선배는 피지 원주민 처녀와 사랑에 빠져 여자 아이를 낳기도 했다. 당시 사십대 후반이었던 L선장은 자기 배 선원의 손에 이끌려 원주민 마을을 방문했다가 그만 원주민 처녀와 만리장성을 쌓았다고 했다. 그날 밤 한국인 선장을 맞이한 부락의 추장은 십중팔구 '카바'(한국의 막걸리처럼 생김. 신경흥분제로 축제나 잔치 등에 쓰임)라는 술로 한국인 선장을 후대했을 것이다. 장유유서의 원칙에 따라 밤새도록 마셔댄 술로 모두가 쓰러진 새벽녘, 물을 찾던 L선장에게 우연히 원주민 처녀가 다가왔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원시인들처럼 함께 몸을 섞었던 것이다. 이미 나이 열세 살에 접어든 그 혼혈 소녀는 지금도 행여 자기 아버지를 만날까 싶어 부두를 찾아와 서성거렸다. 피는 속일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부두에서 그 혼혈소녀를 만나는 한국 선장들은 저마다 제 조카딸을 대하듯 한 번씩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용돈을 쥐어주곤 했다.
육십대가 한국 원양어업의 이 세대라면 오십대는 삼 세대였다. 모두 다 한 때는 한국의 참치 독항선을 몰던 베테랑들이었지만 한국의 원양어업이 몰락하면서 모두 어쩔 수 없이 이곳까지 밀려온 자들이었다.
중국이나 대만 선주들이 원시적 어법인 연승(延繩) 어선에 굳이 한국 선장들은 태우는 이유는 단지 바다를 읽는 그들의 탁월한 감각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결혼한 딸이 아들을 낳자, 아내는 이때다 하고 둘째 딸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노란 머리의 귀여운 외손자 샌디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한국행을 작심한 아내의 고집을 오 선장은 꺾을 수가 없었다. 블루는 한국인 장모가 아이를 보듬거나 등에 업는 일을 아주 싫어했다. 서양식 육아법에 적응할 수 없었던 늙은 아내는 외손자고 뭐고 자연 사위집에 가는 발길이 뜸해지고 말았다. 영어공부에 싫증을 느낀 둘째가 언제부터인가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노래를 불렀다지만, 아내 또한 말동무 하나 없는 수바에 이래저래 정을 붙일 수 없었던 것이다.
아내가 없는 마당에 그가 이곳에서 고기를 찾아 눈물겹게 배를 탈 이유는 없었다. 단지 엉겹결에 선주가 사위가 되는 바람에 여태껏 씨윌호를 타고 있는 셈이었다.
작년의 경우 수바에서 고기를 제일 많이 잡았다는 오 선장이었다. 그러나 배를 네 척 가진 그의 사위는 본전장사였다고 했다. 적자를 보지 않았으니 다행이었지만 사위로부터 그 소리를 듣게 되자 선주인 사위로부터 그 동안 어획상여금으로 받은 돈이 공연히 부담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고기를 잘 잡아 주었기 망정이지 고기도 못 잡았다면 자격지심에 사위 볼 면목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 끝에 오 선장은 하루 빨리 배를 내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전에 사위를 위해 한 가지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수익성 높은 어장을 찾는 일이었다. 어가(魚價)는 묶여 있고 기름값만 해마다 올라가니 일반선주들의 고통이 말이 아니었다. 유류소모가 제일 적은 연승어선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하루 1킬로 이상 연료를 소모하는 노후선들은 머지않아 이곳 어장에서도 퇴출되는 날이 불을 보듯 뻔했다.
다음으로 오 선장의 마음을 급하게 하는 것은 자신의 노후생활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로 30여 년을 줄곧 바다에서 살다시피 한 그의 꿈은 뭍에서 터를 잡고 사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은 십 년 전에도 간절하여 한 번은 큰 맘 먹고 경상북도의 어느 한적한 시골에 몸을 부린 적이 있었다.
S산업의 독항선 선장을 마친 뒤 통장으로 받은 정산금을 몽땅 아내에게 맡기고도 따로 그의 수중에 남은 돈이 한 오천만 원 정도 되었다. 그 돈으로 상식은 경북 유천면 어느 골짜기에 1,400평짜리 사과밭을 샀다. 2층 계단식인 밭에는 7년 생 부사종 450여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사과밭을 사려고 계약을 하고 온 날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배는 안 탈라요. 당분간 나는 가까운 시골에서 농사나 지으며 내 용돈 내 벌어 쓸 테이, 당신은 통장에 있는 돈 헛되이 쓰지 말고 그 돈 이자나 잘 챙겨 아이들 공부나 시키고 있으소.”
옛날에 70여 세대가 살았다는 마을에 그가 보따리를 챙겨서 들어갔을 때는 달랑 9세대만 살고 있었다. 주민들의 본업은 논농사였고 짬날 때 하는 일이 청도반시나 사과나 대추농사였다. 동네에서 힘깨나 쓰는 남정네라야 네 명 뿐인 소박하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처음부터 집 지을 요량이 안 나 사과밭 한 귀퉁이에 컨테이너 박스를 갖다놓고 살았다. 부엉이 우는 소리와 개똥벌레 불빛이 흐드러지고 어느 집에서 라디오를 켜 놓으면 온 동네가 다 듣고야 마는 그런 밤을 수없이 보냈다. 그런 밤에 사과밭을 보고 오줌을 누노라면 달콤한 사과향내가 코를 찔러 기분이 정말 근사했다.
그러나, 가을에 사과수확을 해 판다고 고생을 한 생각을 하면 지금도 머리가 뜨거워진다. 첫 해 수확한 사과는 쓸만한 놈으로 150상자였다. 원래 논이었던 곳을 사과밭으로 바꾼 데라 그저 그러려니 했다. 시장에 나가보니 부사종 45개 들이 15키로 한 상자에 소비자 가격이 4만 원이었다. 혼자 생각에 시장에 들고 가면 아무리 못 받아도 이만 원은 받겠다 싶었다.
다음날 상식은 사과상자를 트럭에 주워 싣고 청과시장으로 달려갔다. 청과시장 도매상이 한 상자에 만 오천 원을 주겠다고 했다. 그는 이런 도둑놈들이 있나 싶어 흥정도 않고 선걸음에 그만 돌아서 나와 버렸다. 그 길로 부산의 동래시장 어귀로 차를 몰고 나왔다. 그런데 어느 한 곳 눅진하게 차를 대어 놓을 데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아파트 단지들을 돌며 목청을 높였다. 아무리 못 받아도 내 이만 원은 받고 말리라, 아파트 단지를 돌려면 미리 아파트 부녀회장과 입을 맞추든지 했어야 하는 일을 그가 알 턱이 없었다. 아파트 입구마다 경비들이 후다닥 달려와 마치 파리떼 쫓듯 밀어 내었다.
어느덧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처음엔 오늘 다 못 판다고 뭔 대수랴 싶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자신이 초라한 느낌이 들어 난감하고 창피했다.
“아침에 그물에서 턴 고기, 해 있을 때 못 팔면 말짱 헛 거여.”
그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평소에 입버릇처럼 외던 말이 귓전을 때렸다. 옳다 싶어 상식은 트럭을 몰고 냅다 영도로 달렸다. 영도에는 옛날 그의 선원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청학동의 어느 대단지 영세민 아파트를 찾아가 옛날 한 배를 탔던 선원들을 앞장세워 한 상자에 오천 원씩 받고 모두 떨이를 하고 말았다. 트럭이 모두 비자 상식은 그래도 자신이 마치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아 스스로 감격했다.
첫 해 겨울엔 사과나무 전지도 해보았고 이른 봄에는 가로수 심는 부역에 동원되어 일당으로 이만 원을 받기도 했다. 농사일에 조금만 이력이 붙으면 자신이 머지않아 마을 이장(里長)까지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첫 해의 참담한 실패를 그는 단지 경험부족에서 오는 실수라 여겼다. 좋은 일이 찾아올 때까지 매사 참고 기다리는 일에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은 일도 어느 때는 한정 없이 더디 찾아왔다.
들에 개나리가 피고 산허리에 진달래가 불게 물든 이듬해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시골농장에 한 번도 발걸음을 하지 않던 아내가 불쑥 찾아왔다. 웬 일인가 싶어 궁금해 하던 참인데 아내는 컨테이너 박스 안으로 들어설 생각도 않고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다짜고짜 새된 목소리로 넋두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이고, 경아 아부지. 우리는 인자 우찌 살것소. 당신이 아~들 공부시키라고 챙기준 돈 고리 처준다꼬 해서 가야시장 쌀장수한테 빌리줏다가… 아이고, 숙아 아부지 이 일을 우짜면 좋겄소. 그 망할 년놈들이 돈 빌려간 지 석 달도 안 되서 보따리 싸갖고 야밤도주를 했다 안카요. 내가 죽일 년이요. 아이고, 경아 아부지. 내가 죽일 년이요. 아이고, 숙아 아부지.”
이재(理財)엔 그래도 자기보다 나을 것이라 믿고 중형 아파트 한 채 값을 고스란히 아내에게 맡겼던 그의 단순함을 후회한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처음엔 생활비가 급해 잠시 원양참치회사의 육상직원 노릇도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목돈을 벌려면 배를 타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참치독항선을 타고 나갔다가 그 길로 먼 바다를 꼬박 4년이나 떠돌았던 것이다.
5.
쾌청한 날씨에도 습관처럼 하늘엔 언제나 먹구름 몇 장이 드문드문 박혀 있었다. 여우가 오줌을 누듯 바다에 찔끔찔끔 비를 뿌리고 사라지는 스코올의 장본인들이었다. 지나가는 바다 위로 낮게 줄지어 비상하는 것은 날치떼였다. 그 날치떼를 쫓아 수면가까이로 마이마이떼가 날쌘 몸짓으로 유영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지만 오늘따라 넓은 바다 위에 움직이는 것이라곤 날치떼 뿐이었다. 마이마이에 쫓긴 덩치 큰 날치가 간혹 도약이 지나쳐 배 위로 뛰어드는 경우가 있었는데 피지 선원들은 이게 웬 떡이냐 하며 그때마다 날치를 통째로 구워 먹었다.
동경 177도 남쪽으로 바토아(Vatoa) 섬이 보이고 그 주변으로 작은 해산(海山)들이 마치 기계충 먹은 버짐처럼 동그랗게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172도 어장에서도 해산 근처에서 조업을 하다 메인라인을 몽땅 잃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전속항해로 달려가고 있으나 왠지 굼뜨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오 선장은 기관장 아셉을 브릿지로 불러 올렸다. 배의 속력이 종전의 8노트에서 7노트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유 노우 엔진 프라블럼?”
“노, 써!”
“캄 앤 룩! 풀 스피드 세븐 노트, 낫 에잇 노트. 왓츠 프라블럼?”
“노 프라블럼!”
“ 유, 체크 노즐팁 앤 인젝션 펌프 앤… 아더, 아더! 안다스탠드?”
“예써!”
알았다고 하고 돌아서는 아셉이지만 오 선장은 웬지 맘이 찜찜했다. 제대로 된 기관장이라면 감속원인에 대한 자체적인 분석방법을 열거하고 그 요인들을 점검한 후 곧 조치하겠다는 대답을 해야 마땅했다. 뭐가 문제냐고 물었으나 기계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대답이었다. 스피드가 떨어졌다면 엔진회전수가 떨어진 것이고 이는 폭발행정에 이상이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인젝션 펌프를 교체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하려다가 괜한 선무당 같은 짓일까 싶어 참기로 했다. 윗머리가 훌쩍 벗겨진 마흔 일곱 살의 아셉이 브릿지를 나서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 선장은 마치 자신이 싸구려 옷을 껴입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175도 어장에서 꼬박 10시간을 달린 셈이었다. 수평선으로 다시 어두움이 내리고 있었다. 바다는 이번 항차 들어 처음으로 평안한 모습을 보였다. 바다의 색깔도 원근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적으로 짙은 남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대만선단 22호의 박 선장이 라디오에서 찾았다. 박 선장은 대구 사람으로 오 선장과는 나이가 같았다.
“갑장, 어디로 가고 있능교?”
“한 번도 안 가본 동쪽으로 갑니다. 그곳 어황은 어떻소?”
“밑에는 사치 때문에 계속 죽을 쑤고 있답니다. 우리는 죽으나 사나 알바코니께. 어제 일등 한 배가 57마리, 나는 52마리 잡아 이등 했수다. 172도만 넘어가도 고기가 천질텐데. 어디나 금들을 주욱 그어 놓고 막응께. 아이고… 이러다 올해는 집에 생활비도 못 부쳐 주겠오.”
“죽는 소리 하지 말고 힘내요. 박 선장 당신 생활비 우짜고 하는데… 선장협회 사무실에서 포커만 안 쳐도 생활비 걱정은 안 하겠네. 차라리 목숨 걸고 따기나 하든지.”
“또 사람 염장지르는 소리 하네. 알았어. 내 우는 소리 다신 안할께. 그건 그렇고 아침 방송에 6호 할배가 나와 갖고 죽겠다는 소리만 하데.”
“연세가 올해 육십 아홉 아이요. 황천에다가 불황에다가 욕볼낍니다. 그래도 육지에서는 팔팔하다던데?”
“그 할배, 지난번엔 스물 아홉 살 먹은 캐디를 하나 태우고 다닙디다. 나를 보더니 자기 하고 놀자고 입항을 좀 맞춰 들어와 달라카데. 나는 골프에는 재주가 없으니 언제 오 선장이 한 번 모시지요.”
“한가한 소리 그만 합시다. 그런데 누가 키리바시 어장으로 적수를 한다고 합니까?”
“우리 선단장 최 선장님이요. 독항선들이 키리바시 어장에 몰려 동서를 왕래하며 어탐중이라 합디다. 12도 중부어장에선 빅아이, 알바코 합쳐서 하루 2톤씩은 잡는다 합디다. 여기는 고기가 통 없으이 시범적으로 키리바시 입어허가라도 받을끼라고 올라가고 있어요.”
최 선장은 구룡포 수고를 나와 나이 환갑을 넘긴 업계의 고참 선장이었다. 어린 시절 서당을 다닌 덕분으로 한시와 한문에 능해 그의 어로일지는 언제나 한문일색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가 피지와 인연을 맺은 것은 90년대 초반으로 그 무렵이면 한국 원양업계에서 마당발이라는 사람들 몇이 피지에 투자법인을 세우고 참치어선을 투입하려고 모색하던 때였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모험적인 투자가 유야무야 되고난 후 대만 국적선들이 피지를 기지로 몰려들었는데 그때 대만선주의 눈에 띈 사람이 최 선장이었다. 출중한 한문 실력과 의젓하고 중후한 인품에 반해 대만선주는 단번에 그를 선단의 총 어로장으로 임명하는 파격을 베풀었고 나아가 20여 척에 이르는 자신의 선단에 태울 한국인 선장의 임명권을 그에게 일임하였던 것이다. 그 세월이 벌써 십 년을 훨씬 넘어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었다.
대만선단이 불황을 견디는 비결은 어구나 베이트의 공동구매를 통한 철저한 원가관리에 있다. 또한 유가급등의 한파를 견뎌내며 그들이 인내하는 이면에는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의 경제력이다. 그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것은 곧 현실로 도래할 중국의 거대한 참치시장이다. 언젠가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최 선배가 들려준 얘기가 그랬다. 오 선장은 최 선배의 그 말이 중국 인구를 염두에 둔 일리 있는 전망이라고는 생각했다.
과학이 더 발달하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해능력이 더 높아지는 날이 온다면 배도 어부도 필요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업이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바다에서 어선들이 어느 날 갑자기 죄 사라지고 그래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던 수산물이 식탁에 당장 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패배주의자들의 상상이었다.
70년대 1차 오일쇼크 때는 통조림용으로 알바코와 옐로우핀만 잡던 기지선(基地船)들이 흑자생존을 위해 횟감용 빅 아이를 잡는 독항선으로 대거 전환함으로써 돌파구를 찾았는가 하면, 인도양이 불황일 땐 어군을 찾아 태평양으로, 또는 심지어 허리케인의 길목인 저 대서양의 아조레스(Azores) 어장까지 대양을 떠돌았던 눈물겨운 시절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오 선장은 불황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황금어장을 찾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적수를 떠올릴 때마다 상식은 잊지 못하는 선장이 한 사람 있었다. 그 사람은 70년대 말 그가 1항사 시절에 모셨던 이(李) 선장이었다. 전남 무안 출신으로 부산 수대를 졸업한, 그때 그의 나이 갓 서른 살인 초임 선장이었다. 인도양 어장이었는데 불황이 길어져 조업일수 100여 일에 어창은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李) 선장은 갑자기 상식에게 낚시를 걷고 싱가포르 쪽으로 뱃머리를 돌리라고 명령했다. 회사에는 말라카 해협으로 적수중이라고 전보를 보냈다. 전보를 받은 회사는 무슨 미친 짓을 하느냐며 당장 회황할 것을 지시했다. 회사 데스크의 생각으론 상선들의 주요항로이고 크고 작은 해적들이 출몰하는 말라카 해협에 누가 주낙을 깔겠느냐는 것이었고, 말라카 해협 부근의 남지나해에서 어느 누가 참치를 잡았다는 기록은 그때까지 전무했기 때문이다. 또한 적수의 관건은 어장을 옮겼을 때 보란듯이 대어를 하느냐는 것인데 그렇지 못할 경우 비싼 기름만 축내기 일쑤였다.
이(李) 선장은 회사의 지시를 어긴 채 말라카 해협을 지나 싱카포르 인근의 산호초 부근 어장에 낚시를 깔았다. 신기한 것은 도착하던 날로부터 60킬로그램짜리 빅 아이를 하루 40~50미씩 낚아 올렸던 것이다. 배는 보름 만에 만선을 하였고 만선 일주일 만에 부산을 거쳐 일본의 시미즈항에 입항했다. 양륙된 고기도 육질이 워낙 뛰어나 타 선박보다 톤당 500불을 더 받는 진기록을 남겼다. 그 누구도 예상 못한 전대미문의 기록이었다. 그때 상식의 눈에 비친 이(李) 선장은 한 마디로 초인(超人)이었다. 상식은 그때 난생 처음으로 바다와 진검승부를 하는 바다 사나이를 보았던 것이다.
이듬해 회사의 신조선을 맡게 된 이(李) 선장이 상식에게 그의 배를 맡기면서 선물로 낡은 노트 한 권을 건네주었다. 어느 일본인 선장이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 놓은 어로일지였다. 그 노트의 어느 한 귀퉁이에 빨간 밑줄이 그어진 글귀가 상식의 눈을 사로잡았다.
‘남태평양의 서부해역에 회유하는 눈다랑어는 봄철이면 산란을 위해 남지나해의 산호초로 이동하는 것이 발견됨’
오 선장은 선주에게 시집을 간 그의 큰 딸의 미래를 생각해 볼 때마다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위인 블루를 생각하면 조금 안심이 되는 구석이 있었다. 그는 삼십이 넘도록 자립을 하기 전에는 결혼을 하지 않겠노라 고집을 피우던 친구였다. 지금은 뉴질랜드에서 정원관리로 노후를 소일하는 그의 아버지가 그런 아들을 믿고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 불과 삼년 전이었다. 블루는 성실하고 꼼꼼하며 또한 검소한 친구였다. 무엇보다 블루는 합리적인 경영마인드를 갖고 있었다. 그가 처음 씨윌호에 롤링제어판인 스테블라이즈를 만들자고 했을 때 블루가 두 말 없이 동의한 것은 선주로선 긴요하고도 중요한 결정이었다. 딸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사위를 위해서라도 오 선장은 꼭 좋은 어장을 찾고 싶었다.
수바의 동쪽으로 가는 바닷길은 순탄했다. 작렬하는 태양아래 쪽빛 하늘과 에메랄드빛 산호바다가 서로 경주하듯 눈부시게 반짝였다. 수평선에는 아침저녁으로 언제나 희고 둥근 구름꽃이 피어올랐다. 수바의 동쪽으로 가면 무슨 좋은 일이 꼭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배는 이미 날짜변경선을 넘어 바투아 섬들을 아래에 두고 82도 코스로 계속 동진중이었다. 목적지인 서경 177도 선까지는 140여 마일의 항정(航程)이었다. 앞으로 꼬박 20시간을 더 달려야 할 거리였다. 서경 177도 40분의 오른쪽은 바로 통가왕국이었다. 가는 길에 드문드문 눈에 띄이는 해산만 일곱 개였다. 산호초는 수심이 불과 3~4미터 안팍인데 반해 해산은 대개 10~20미터 아래 불끈 솟아 있었다.
6.
아침 다섯 시 이십 분. 바다에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동쪽에 이를수록 일출시각이 조금씩 빨라졌다. 솟아오르는 붉은 태양을 보며 드디어 수바의 동쪽 끝에 닿은 느낌이었다. 하늘은 맑았으나 해면으로 부는 바람은 3노트 정도의 남실바람이었다. 하늘의 절반은 언제나 엷은 구름으로 채워져 있었다. 포트 쪽 수평선 위로는 마치 바다가 피워 올리는 꽃봉우리인 양 새털구름들이 작은 빙산처럼 융기해 있었고 스타보드 쪽으로는 활짝 핀 꽃구름이 수면 위로 둥실 떠올라 양떼구름의 긴 행렬에 이어져 있었다. 구름은 바다가 피우는 꽃이었다.
투승은 이른 새벽에 시작되어 오전 9시가 조금 넘어 끝이 났다. 남위 19도 32분, 서경 177도 35분 지점에서 초기를 꽂고 북서방향인 320도코스로 26마일, 280도 코스로 26마일씩 그은 정투승이었다. 정오가 되자 스코올이 내리면서 바람이 일어났다. 저녁까지 수평선에 자욱한 안개비로 묻어있던 하늘이 밤이 되자 갑자기 폭우를 쏟아 부었다. 바람은 어느새 풍력계급 5인 흔들바람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덩달아 바다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침 한국선단방송에서 피지의 북동쪽 섬인 바누아 레부(Vanua levu) 위쪽에 큰 저기압이 또 하나 발생했다고 들었지만 오 선장은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배가 저기압의 영향권에 들것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양승한 지 열 시간째인 자정까지 올라 온 고기는 빅 아이 25미, 옐로우 핀 4미, 알바코 30미였다. 빅 아이의 씨알은 대부분 30키로 언저리였으나 열로우 핀에 비해 어획률이 높아 어획고는 평작 이상은 되리라 싶었다. 침실로 들어가며 오 선장은 은근히 마음이 바빠졌다.
바다가 요동을 치고 있었으므로 잠자리가 편치 않았다. 수바의 동쪽 끝에서 처음 내린 낚시였는지라 오늘은 밤을 꼬박 새우고도 싶었지만 바다생활이란 육지처럼 일희일비해서는 견디지 못하는 법이었다. 바다가 제 아무리 흉흉해도 자자고 맘먹고 눈을 붙이면 언제나 오 분 안에 잠이 들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그는 생각만큼 오래 잠들 수가 없었다. 상갑판 브릿지 천장 위로 누가 올라갔는지 둔중한 작업화 끄는 소리에 오 선장은 그만 잠을 깼다.
천장에서는 아사바가 탐조등을 바다로 이리저리 쏘아대고 있었다. 아무리 급한 일이라 하더라도 붉은 곰처럼 덩치가 큰 아사바는 절대 브릿지 천장에 올려 보내지 말라고 갑판장인 아세키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는데도 그 모양이었다. 선수 갑판에는 비옷을 입은 피지 선원 두 명이 마치 아프리카의 미어캣처럼 핸드레일에 손을 붙이고 서서 탐조등이 밀어내는 어둠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선수가 앞으로 기울 때마다 그들의 머리 위로 백파의 포말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배는 전후좌우로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저녁보다 다소 약해진 빗줄기는 바람따라 오락가락하며 시야를 가렸다.
배가 좌우로 크게 기우뚱거리다가 쿵! 하며 스테블라이지가 바다와 크게 부딪히는 충격음이 떨어졌다. 그때 브랜치 라인을 사리느라 스타보드 쪽에 서 있던 리바이(Livai)가 갑자기 왼편으로 몸이 쏠리더니 라인블록 지지대로 세워둔 철 기둥에 뒷머리를 부딪히며 쿠당탕 쓰러졌다. 아세끼가 급히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뒷머리와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리바이는 잠시 혼수상태에 빠진 듯 몸이 축 늘어진 상태로 눈을 뜨지 못했다. 오 선장은 일단 선미 침실로 급히 옮기라고 소리쳤다.
라디오 부이의 위치는 1마일 안쪽 포트방향이었다. 굳이 램프가 번쩍이는 라디오 부이가 아니라 하더라도 각 부이마다 형광테이프를 붙였기 때문에 어두움 속에서 부이를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오늘처럼 비바람이 불고 백파가 흐드러지게 일어서는 바다에서는 빨간 등이 깜박이는 라디오 부이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무려 반 시간을 헤맨 끝에 라디오 부이를 찾았다. 메인라인을 다시 제 순서대로 연결시키고 난 뒤 오 선장은 리바이가 누워 있는 침실을 찾았다. 환자 곁을 지키던 사토로가 뒷머리가 열 바늘쯤 찢어지고 출혈이 조금 있었다고 했다. 출혈이 있었으니 우선 급한 변을 면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목뼈를 다치지 않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철기둥에 머리를 부딪힌 충격 때문인지 리바이는 머리가 계속 지끈거리며 아프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이마에 손을 대니 열이 꽤 높았다. 안도에게 해열제 주사를 놓게 하고 수면제를 먹여 잠들게 했다. 브릿지로 돌아오며 오 선장은 혼자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메인라인이 끊기는 사고는 그러고도 밤새 두 번이나 더 발생했다. 브릿지 천장에서 탐조등을 잡는 일은 아사바 대신 몸집이 작은 사토로로 교체되었다. 아사바가 용을 쓰고 난 뒤 그 당장 브릿지 천장으로부터 조타실과 해도실로 찔끔찔끔 빗물이 새기 시작했던 것이다.
작야(昨夜)의 어황은 보잘 것 없었다. 새벽녘에 올라온 것은 죄다 몸집이 고만고만한 알바코 일색이었다.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새벽에 올라 온 메까였다. 몸무게가 80키로짜리였다. 어쩌면 다른 고기도 메까처럼 체중이 좀 나갈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한국선단방송에서는 너도 나도 로사리나(Rosalina)호를 찾아 야단이었다. 벌써 이틀째 로사리나호가 선단방송에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로사리나호는 선주가 러시아 인이었다. 엊그제 혼자서 피지의 북쪽인 투바루(Tuvalu) 어장으로 올라갔다고 했다. 선장은 경북 포항 사람 김대원(金大元)이었다. 삼십 중반에 배를 내려 중국식당, 노래주점, 동네 수퍼마켓, 목욕탕 주인 등 안 해본 직업이 없을 정도로 육지에 뿌리를 내리려고 무던히 애를 썼던 친구였다. 배운 기술이 고기잡는 일인 사람에게 육지생활이 결코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대구출신 박 선장과 나이들이 비슷해서 상륙을 하면 유독 셋이 동무하여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적수거나 또는 지정한 해역으로의 입어거나 다 자기 나름대로의 요량이 있어 움직이는 어장이동이겠지만 이곳의 여름철인 11월부터 2월 사이에 매년 서너 개의 큰 스톰이 발생하는 것을 감안하면 이 시기에 위도 10도 부근 어장으로의 단독출어는 자칫 위험할 수도 있었다.
22호 박 선장이 제 일처럼 계속 걱정을 늘어놓았다. 걱정이 되기는 오 선장도 마찬가지였다.
“김 선장 그 사람, 무슨 간이 그리 크노? 배도 그리 잘 나가지도 않으면서… 거기서 태풍 만났다고 살리달라쿠몬 누가 올라갈끼라고. 내 말이 틀맀소?”
“그럼요. 거-까정 누가 올라가것소. 러시아 기관장 하고 선주가 고기 못 잡는다고 자꾸 눈치를 해쌓는다 카더마는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는답시고 내친 걸음일 텐데… 그래도 선주한테는 연락이 안 갔을까요?”
“몰라, 그 사람 성질에 택도 없을끼구만. 오늘 아침 당번선이 함 알아보겠다고 하기는 합디다. 아이고, 별일 없어야 할낀데…”
교신을 끝낸 뒤 오 선장은 컴퓨터를 켜고 회사로부터 온 메일을 뒤져 보았다.
열대성저기압 ‘지니(GENE)’. 현 위치 17.4 S 178.2E, 중심기압 990 헥토파스칼, 중심풍속 30~40노트. 남서방향으로 시속 12노트의 속도로 이동중.
중심기압 990헥토파스칼이라면 큰 놈이었다. 남쪽 반경 80마일 범위로 풍속 30노트의 바람이 불고 있으며 향후 18시간 후면 바람의 방향이 북서방향으로 바뀔 것이란 멘트가 첨부되어 있었다. 태풍의 발원지는 14도 수역이었고 로사리노호의 위치는 위도 10도 해역이었다. 태풍의 영향권으로 치면 씨윌호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였다.
본사하고는 통신두절 상태였다. 블루를 찾는 오 선장의 목소리를 듣고 씨구알호의 선장 찰리가 뛰어들었다,
“미스터 오! 안뇽하십니까?”
“오~ 우 찰리! 굳 모닝? 웨얼 아 유?”
찰리의 할아버지는 영국인이었다. 19세기 후반 피지의 군주이던 타콤바우는 서양의 무역업자들로부터 무기를 사들이면서 빚을 지기 시작해 결국 미국에 대한 3만 4천 달러를 갚지 못해 영국에게 피지를 사달라며 식민지를 자청한 아이러니한 역사가 있었다. 찰리는 오 선장이 일차로 훑었던 175도 어장에서 알바코로 짐을 채우고 있었다. 알바코 어획량이 예상 외로 풍성한지 삼사일 후면 냉동칸의 짐이 다 찰 것 같다고 했다. 씨윌호보다 일주일 전에 출항했던 씨구알호는 처음엔 172도 어장으로 갔다가 삼일 전에 씨윌호를 찾아 175도 어장으로 옮겨왔다고 했다. 그곳도 바다가 일렁이는 것은 매일반이었다. 비도 오락가락한다고 했다. 저기압의 골은 동서로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는 셈이었다. 메일에서 읽은 내일 정오 경 태풍의 위치가 남위 19도, 동경 175도 선상이었으므로 오 선장은 찰리에게 동쪽으로 더 이동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양승완료 시점에 거둔 초기는 270도 코스로 6마일이나 서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오 선장은 조류를 감안하여 전날보다 5마일 더 동쪽으로 이동한 뒤 140도 코스로 투승을 시작했다. 남쪽으로 내리뻗은 라우그룹(Lau group)에 속한 작은 섬들이 인접하여 가로 세로 마음 놓고 금을 긋기엔 좁은 어장이었다. 바다가 여전히 거칠었지만 오후부터는 틀림없이 잠잠해 질 것이라 믿었다. 오 선장의 낙천적인 성격은 그가 믿는 하나님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태생적이었다. 배가 흔들리는 것을 알고 애써 조심한다고 해도 꼭 물을 엎지르거나 물건을 떨어뜨려 낭패를 보기 일쑤였다. 그래서 차라리 그런 생각을 안 하고 움직일 때가 많았다.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삶의 활력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어쨌든 유익했다. 저기압일 땐 낚시수를 최대한 줄여라 라는 원칙도 그래서 이번엔 처음부터 아예 무시했던 것이다.
해가 바로 서자 저 멀리 수평선에는 군데군데 검버섯처럼 구름기둥이 피어나 마치 참치가 하늘을 향해 드러누운 형상을 하고 있었다. 구름기둥의 아래는 검고 위는 희었는데 구름기둥처럼 보이는 그 검은 휘장은 실은 바다 위로 쏟아지는 소나기였다. 태평양의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들은 언제나 수증기를 잔뜩 머금고 있어 마치 미친 여자가 오줌을 누듯 아무데서나 스코올을 뿌려대는 것이었다. 바람이 바다가 낳은 아들이라면 구름은 천상 바다의 딸이었다. 바람이 바다의 속을 들쑤시는 망나니라면 구름은 언제나 그 바다를 위로하는 눈물이었다. 남위 20도에 이르러 투승작업이 완료될 무렵 바다위로 구름의 눈물이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7.
양승작업은 오후 3시부터 시작되었다. 태풍의 진로와는 500마일 이상 떨어진 곳이었다. 밤새 씨윌호가 올라가고 태풍이 내려온다 해도 좁혀지는 간격은 고작 60마일 상간이었다. 하늘에선 비바람이 함께 몰려다니며 바다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풍력계급은 어제와 비슷하거나 조금 약한 듯 했다. 비가 오는 것은 참을 수 있다지만 파도가 3~4미터씩 일어서는 것은 조금 예상밖이었다. 파도가 쉬이 자지 않는다면… 야간작업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무겁기도 하였다.
첫 번째 걸려 올라온 놈은 이빨이 하이에나처럼 강력한 바라쿠다(Barraouta)였다. 피지 선원들이 부식용으로 모으는 고기였다. 두 번째는 기름치(Oil fish)였다. 기름치는 한국에서 간혹 ‘백마구로’라 하여 안주로 내놓곤 하지만 기름기가 많아 일본에선 고기취급도 않는 어종이었다. 이어서 올라온 것은 몸 색깔이 짙은 분홍색인 빠카빠카(Pakapaka)였다. 돔종류가 잡힌다는 것은 평균 수심 2,000미터의 어장인데도 해저 200미터 근처 어딘가에 솟아오른 해산이 있다는 얘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빠카빠카에 이어 올라온 것은, 한국선원들이 곧잘 ‘김지미’라 부르던 황홀한 색깔의 오파(Opah:Moon fish)였다. 한국선원들이 ‘핸드백’이라 부르던 썬피쉬(Slender sunfish)와 함께 이들은 육질이 담백하여 일본 사람들이 알아주는 어종이었다. 양승을 시작한 지 두 시간 동안 올라온 것은 잡어 일색이었다. 마이마이가 세 마리, 청상어와 악질상어가 합쳐서 네 마리, 삼치류인 와후가 세 마리 각각 잡혀 올라왔다. 무엇보다 오 선장을 고무시킨 것은 빠카빠카와 오파였다. 수바의 동쪽에서 그 귀한 고기들을 보았으니 틀림없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란 예감을 그는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바다에는 다시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양승코스가 바람과 맞서는 지경이라 어쩔 수 없이 배가 자꾸 위로 솟구쳤다. 그럴 때마다 선원들은 하얀 물보라를 덮어 쓰곤 했다. 메인라인을 따라 배의 방향을 가늠하기가 자연 힘들어졌다. 선수 스타보드에서 유압스위치를 조정하던 아세리(Aeseri)도 양승보턴을 자주 껐다켰다 했다. 아세리는 피지인답지 않게 몸이 날렵하게 빠진데다가 눈이 복서처럼 매섭게 생겨 갑판원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유압스위치를 맡고 있었다.
날씨가 거칠어 자꾸만 배가 전후좌우로 들썩거렸으므로 오 선장은 사토로를 불러 망고와 바나나를 썰어오게 했다. 밥상을 사타구니로 껴안고 우주인처럼 하는 식사도 오늘은 글렀다 싶었다. 저녁을 먹고 올라온 안도에게 조타기를 맡기고 짐짓 물러나 오 선장은 데크에서 작업중인 선원들의 동작을 예의주시했다. 리바이는 머리가 아프다며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더 이상 선원들이 다쳐서는 안 될 일이었다.
저녁시간에 잠시 올라온 것은 알바코 다섯 마리였는데 덩치들이 모두 40킬로그램 이상인 대형어였다. 이 또한 오 선장은 좋은 징조라 여겼다.
바람을 거스르는 선수의 움직임을 유심히 지켜보던 오 선장은 태풍의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씨구알호에게 알려줬던 오늘 정오의 위치가 틀림없다면 태풍의 머리는 지금쯤 솔로몬 군도 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저 바람과 파도도 몇 시간 후면 잠잠해질 것이라 예상했다.
바로 그때였다. 배가 포트 쪽으로 한번 심하게 기울었고 동시에 아세리인지 누군지 짧고 급한 비명을 내질렀다. 비명의 연유를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배가 다시 스타보드 쪽으로 넘어지자 선수 쪽에서 솟구친 파도가 이때다 하고 배를 오른쪽으로 성큼 밀어붙였다. 곧이어 선미 쪽에서 우당탕탕 하고 스크류에 무엇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고 배가 두어 번 몸을 앞뒤로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선미쪽에서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불과 3~4초 만에 일어난 소동이었다. 그 소동으로 스크류와 샤후트에 과부하가 걸렸는지 일순 엔진이 멈추었다.
사태를 파악해 보니, 배가 왼쪽으로 기울 때 메인라인이 끊어졌고 배가 다시 오른쪽으로 급히 쏠리자 메인라인이 물밑에서 뱃전으로 들어붙으면서 스크류에 감긴 것이었다. 선미에서 들려왔던 엄청난 굉음은 메인라인과 부이가 스크류에 감겨들면서 그 마찰력에 의해 부이가 터지는 소리였다.
벗겨진 앞머리가 땀으로 흥건히 젖은 아셉이 숨을 헐떡거리며 브릿지로 들어섰다. 아무래도 메인라인이 스턴튜브와 스크류 사이를 감아 샤후트를 식혀주는 해수통로를 막은 것 같다는 얘기였다. 까짓 스크류에 감긴 줄이라면 당장 엔진을 돌리는 데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스턴튜브를 낚시줄이 틀어막았다면 엔진을 가동시킬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찝찝했지만 기관장의 말을 믿기로 했다.
어느새 배는 머리가 틀어져 이젠 파도를 옆구리로 받고 있었다. 큰 파도가 아닌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남서방향으로 돌아가는 바람이었으므로 이대로 배가 계속 밀린다면 십중팔구 라우그룹의 작은 섬들에 얹히고 말리라. 배의 위치는 서쪽의 섬들로부터 겨우 40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대로 표류를 한다면 조류와 파도를 감안할 때 여덟 시간 안에 산호초에 얹힌다는 계산이 나왔다. 배를 기동시키려면 무엇보다도 스턴튜브를 감고 있는 메인라인을 제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비바람이 몰아치고 파도가 일렁이는 이 어두운 바다에 누구를 물 밑으로 내려 보낸단 말인가. 오 선장의 이마에선 연신 진땀이 배어났다. 나이만 젊었다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오 선장은 연커푸 짧은 한숨을 토했다. 스크류에 감긴 줄을 풀려고 젊은 항해사 시절 머구리 옷을 입고 바다에 뛰어들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머구리 옷을 입을 정도면 그래도 바다가 어느 정도 잔잔해야 했다. 배가 전후좌우로 요동치는 상황에 머구리 옷을 입혀 물 위와 물밑에서 서로 호흡을 맞춘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선 바다가 좀 가라앉아야만 했다.
오 선장은 파도에 배를 맡긴 채 바다가 잠잠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 시간이 세 시간일지 다섯 시간일지는 알 수가 없었다. 먼저 씨구알호의 찰리를 불러 배의 상태와 그의 계획을 대강 알리는 한편 아사케를 불러 선미와 선수에 각 한 명씩, 좌우현에 각 한 명씩 워치를 세우게 했다. 깜깜한 밤바다의 상황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씨구알호는 그 시각 남쪽으로 피항중이었다. 날짜변경선 부근이었다.
표류하는 배에서 바다가 숨을 죽일 때까지 대책 없이 기다린다는 것은 오 선장으로선 처음 겪는 일이었다. 한 무리의 생각들이 밀물하는 파도처럼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밀려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사위인 블루와, 방긋 웃는 얼굴의 귀여운 외손자 샌디와 큰 딸의 모습이 한꺼번에 눈앞에 어른거리기도 했고 한국에 돌아간 아내의 얼굴도 어른거렸다. 또한 젊은 시절 인도양 어장에서 태풍의 중심에 갇혀 나흘 동안 파도와 싸우다 겨우 살아난 일이며 돛새치를 잡으러 간 카리브해에서 돌풍을 만나 거의 죽을 뻔 했던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뱅뱅 맴돌기도 했다.
결국 오 선장은 그가 혼자 마음속으로 믿는 하나님을 찾았다. 기도라곤 평생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그가 뜬금없이 기도를 생각해낸 것은 바다가 안겨준 불의의 재앙 앞에 두려워하거나 절망에 사로잡혀 우물쭈물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바다에 나와서 아버지께 이런 소리는 처음 합니다. 이번에 한 번만 저를 도와주십시요. 선주인 사위가 잘 되었으면 해서 이번에 제가 욕심을 좀 부렸습니다. 용서하십시요. 다만 선장으로서 제 소임을 다하게 해주십시요, 이 바다에서 죽든 살든 그 일은 아버지 뜻에 맡기겠습니다.”
시계가 새벽 두시를 가리켰다. 표류한지 네 시간이 지난 셈이었다. 예상한대로 바람과 파도가 아까보다는 조금 수그러든 느낌이었다. 그 사이 배는 벌써 서쪽으로 20마일 가량 밀려나 있었다. 파도가 뱃전에 부딪힐 때마다 배가 들썩거렸지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오 선장은 피지 선원들을 갑판에 불러 모았다. 머리 위로 여전히 가는 비가 뿌리고 있었다. 이미 배의 상태를 알고 있는 선원들은 선장이 지시할 사항도 이해하고 있다는 눈치였다.
“산소탱크를 등에 지거나 잠수복을 입지는 않는다. 선미에 탐조등을 비출 것이다. 허리에 생명줄을 걸고 와이어 커터기와 칼만 옆구리에 차고 물속에 들어간다. 일단 스턴튜브를 감고 있는 줄을 먼저 제거해야 된다. 작업은 한 명씩 교대로 한다. 만약 위험한 경우가 닥치면 지체없이 생명줄을 흔들어라. 자- 누가 먼저 들어가겠느냐?”
선장의 말이 그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개구쟁이 죠세바가 성큼 손을 들고 한 걸음 나섰다. 다음으로 나선 자는 죠세바와 동갑내기인 루부이와이였다. 과연 용맹한 전사인 선조들의 후예다웠다.
몸이 가벼운 사토로가 브릿지 지붕에서 서치라이트를 조작했다. 강렬한 불빛이 마치 시커먼 바다를 한 웅큼 뜯어낸 듯 했다. 만약을 위해 기관장인 아셉과 두디가 대형 손전등을 들고 뱃전에서 바다를 비췄다. 드디어 죠세바와 루부이와이가 허리에 연장을 찬 뒤 몸에 얇은 피이로프(P.E rope)를 감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배에서 생명줄을 잡고 있는 자는 갑판장 아사케와 덩치가 큰 아사바였다. 자멱질을 해서 먼저 물속으로 들어간 자는 죠세바였다. 시간이 2분 정도 흐르자 죠세바가 머리를 솟구치며 물 위로 떠올랐다. 루부이와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멱질을 했다. 죠세바가 전하는 얘기는 감긴 줄의 두께가 약 5~6센티미터 정도이나 감긴 부위의 간격이 좁아 작업이 용이하지 않다는 얘기였다.
루부이와이가 나오고 죠세바가 다시 들어갔다. 마침 그때 좌우에서 밀려온 파도의 산이 서로 겹쳐지면서 벌떡 일어서더니 선미를 세차게 두드렸다. 그 등쌀에 배가 한 발이나 앞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물 밑의 죠세바는 기척이 없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아사케가 잡고 있던 생명줄에 무슨 신호를 느꼈는지 한 번 몸을 움칠거리더니 루부이와이에게 물밑으로 빨리 들어가 보라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 순간 불길한 느낌이 모두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사케와 거의 동시에 오 선장도 루부이와이에게 급히 물속으로 들어가라고 외쳤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모습을 나타낸 루부이와이의 품에 사지가 축 늘어진 죠세바가 안겨 있었다.
배로 끌어 올려진 죠세바의 몸은 여기저기 깊은 상처가 나 있었고 그 상처마다 검붉은 피가 가득 고여 있었다. 파도가 선미를 때릴 때 스크류 쪽으로 몸이 딸려 들어가 스크류의 날카로운 날에 사정없이 부딪힌 모양이었다. 아사바가 배에 올라온 죠세바를 냉큼 들쳐 업더니 선수 쪽의 넓은 곳으로 내달렸다. 스크류에 몸이 부딪힌 뒤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몸이 물속으로 가라앉자 이를 감지한 아사케가 생명줄을 다그친 것은 그로부터 불과 10여초 만의 일이었고 리부이와이가 물속으로 뛰어들어 흐느적거리는 죠세바를 껴안고 나온 시간이 그로부터 또 20초 상간이었다.
힘이 센 아사바가 죠세바의 가슴을 눌러대며 인공호흡을 시키기 시작했다. 얼굴과 가슴과 팔과 다리의 상처에서 배어나온 피로 죠세바의 사지는 마치 죽은 자의 몰골이었다. 검고 기름졌던 얼굴은 쟂빛으로 창백했고 입술도 이미 검푸른 색깔을 띄고 있었다. 죠세바와 아사바를 둘러싸고 선원들이 모두 원을 그리고 둘러섰다. 어느새 리부이와이도 동료들 뒤로 다가와 눈물을 글썽이며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하던 죠세바의 젊음을 생각하며 오 선장은 애써 아사바의 인공호흡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었다. 죽으면 안돼. 장가도 안 간 놈이 죽으면 안돼. 오 선장은 바짝바짝 혀가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죠세바가 죽으면 그 잘못은 전적으로 선장인 자신의 책임이었다. 저기압의 영향권을 무시하고 무리한 조업을 자초한 결과였으므로 선원들의 원망은 물론이려니와 평생 따라다닐 총각귀신의 원망을 생각하면 그로선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아사바의 손이 죠세바의 가슴을 짓누를 때마다 둘러선 동료들은 죠세바의 이름을 짧게 연호하며 아사바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초조한 시간이 흘러갔다. 오 선장에겐 그 짧은 시간이 마치 아득한 영원처럼 느껴졌다. 아사바의 시커먼 이마에서 땀방울이 송긍송글 맺혀 불빛에 반사되었다. 마침 그때 죠세바의 상처에서 시나브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시고 있는 것이 오 선장의 눈에 들어왔다. 피가 흐른다는 것은 심장이 뛰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 살았다. 살았어!"
오 선장의 비명에 가까운 고함소리를 알아들은 자는 안도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 순간 아사바의 기합에 가슴을 짓눌린 죠세바가 울컥 바닷물을 토하더니 고개를 들어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켰다. 잠시 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가 정신이 돌아왔는지 곧장 흰 이를 들러내며 특유의 개구쟁이 웃음을 지어보였다.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이 살아났으니 그보다 더한 경사가 없었다. 모두들 죠세바의 목을 껴안으며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뺨까지 흘러내린 눈물을 감추느라 바다를 향해 몸을 돌리고 있던 오 선장도 그 순간 그의 하나님을 찾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드렸다.
오 선장은 일단 죠세바의 찢어지고 헤어진 몸의 상처를 응급처치케 하고 대타로 몸이 날렵한 아세리를 투입했다. 파도가 부서질 때면 가급적 잠수를 미루었다. 두 시간 가까이 수중작업은 그렇게 느리면서도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수평선으로부터 어느새 미명이 움트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네 시였다. 해가 뜨려면 아직 한 시간 반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동안 루부이와이와 아세리는 스크류에 감긴 줄도 대부분 제거하고 있었다. 비바람이 부는 날씨였지만 수온이 25도 이상 유지된 것이 작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시각, 배는 라우그룹의 라케바(Lakeba) 섬으로부터 불과 8마일 떨어진 지점에 놓여 있었다.
8.
해가 수면 위로 완전히 떠오른 뒤에야 수중작업이 마무리 되었다. 바다도 이미 숨을 완전히 죽인 뒤였다. 3마일 가까이 바짝 다가선 라케바섬의 깍아지른 절벽을 보자 오 선장은 공연히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곧장 엔진을 걸고 라디오 부이의 위치를 찾아 배를 움직였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메인라인을 건져 올리니 달려 있는 낚시가 절반도 채 안 되었다. 그러나 오 선장을 놀라게 한 것은 드문드문 낚시에 걸려 올라오는 고기가 죄다 빅 아이였고 씨알도 모두 40~50 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상품(上品)이었던 것이다. 살이 쪄 탱글탱글한 모습의 덩치 큰 참치가 갑판에서 퍼덕거리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오 선장은 행복했다. 분실한 어구를 찾아 양승을 마치는데 꼬박 하루가 소요되었다. 어획된 빅 아이만 모두 40미였다. 하루 밤과 하루 낮을 뜬 눈으로 지샜지만 어획량에 고무된 오 선장은 정작 자신이 어제 저녁부터 꼬박 세 끼를 굶고 있는 줄도 몰랐다. 빅 아이 큰 놈 한 마리가 알바코 20마리 값을 하는 판에 오 선장이 배고픔을 느낄 시간이 어디 있었겠는가. 투승은 다음 날 아침에 할 요량으로 오 선장은 일부 선원들에게 휴식을 취하게 하는 한편 아사케를 시켜 어구를 보충하도록 했다.
밤 9시 경, 난데없이 수바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사위인 블루였다. 수바는 그저께 몰아닥친 폭풍우로 수도와 전기가 끊겨 이틀간 사람들이 큰 고생을 했다고 했다. 전기가 들어오자마자 사무실로 나와 전화를 한다고 했다. 오 선장은 간밤의 선박사고는 생략한 채 어획고만 간단히 알려 주었다. 블루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그때 같은 채널을 열어놓고 있던 찰리가 씨윌호의 어황을 듣고선 중간에 대뜸 끼어들며 내일 아침까지 씨윌호 쪽으로 올라가겠다며 조바심을 부렸다.
다음 날 아침 한국선단 방송시간에 오 선장은 로사리나호의 안부부터 물었다. 모두의 걱정과는 달리 로사리나호는 무사했다. 어황방송이 끝나자마자 로사리나호로부터 김 선장의 명랑한 목소리가 뛰쳐나왔다.
“어이 오 선장, 잘 있었소? 나는 이번 참에 진짜로 골로 가는 줄 알았어. 태풍이 14도에서 생깄다는데 10도 위로는 뭣 땜시 바람이 부노 그 말이다, 번개가 때려서 전기 스파크가 일어나더니 선등이 다 나가고… 배는 까불어쌋제, 파도밭에서 발전기 살린다고 사흘간 고생한 거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하다 아이가. 구사일생이란 말은 딱 나한테 쓰는 말인기라. ”
“우쨌든 무사해서 다행이오. 살아 있으이 정말 다행이오. 이틀이고 사흘이고 통신이 두절된 기 다 그 때문이었구먼요.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배가 우찌된 줄 알고 22호 박 선장하고 얼마나 걱정을 했다고요. 그래 저기압이 지나간 뒤 어황은 좀 어떻소?”
“태풍이 한 번 바다를 뒤집어 놓았으니 고기는 몽땅 새 고기 아이겄나. 빅 아이 하고 옐로우 핀이 조금 비치는 기 감이 괜찮아.”
“그럼 하루 빨리 대어만선(大漁滿船)하시고 수바에서 만납시다.”
밤새 전속으로 달려왔는지 씨구알호가 남쪽 30마일 아래에서 투승코스를 의논해 왔다. 좁은 어장이었으므로 조류에 어구가 서로 얽히지 않게 각자 여유를 두고 코스를 그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씨윌호는 코스가 서로 겹치지 않게 아예 17도선까지 올라가 되돔방식으로 투승을 개시했다.
다음날 아침 어황교신을 해 보니 두 배 모두 빅 아이 위주의 대어였다. 빅 아이 40미, 옐로우 핀 20미, 알바코 30미… 하는 식이었다. 하루 2.5톤 이상인 어획량이었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동일한 비율의 어획이 계속되었다. 어장이동 후 삼일 만에 씨구알호가 귀항을 한다고 했다. 출항한 지 보름이 넘어 주부식과 기름이 부족한 때문이었다. 오 선장은 빙장칸에 차 있는 그의 수출판 고기들을 씨구알호 편에 전재하기로 했다. 빙장칸의 고기는 14일 이상 시간이 지나면 상품가치가 떨어지므로 가능한 빠른 시간 안에 양륙시키는 것이 판매에 유리했다. 다행히 씨구알호는 알바코 위주의 조업을 했는지라 빙장칸의 스페이스가 넉넉했다. 굵은 로프에 부이를 달아 먼저 바다에 띄우고 빙장칸에서 건져 올린 고기를 비닐옷을 한 겹 더 입힌 뒤 로프에 한 마리씩 차례차례 매달아 바다로 던졌다. 그 모습이 마치 수의를 입힌 주검들 같았다. 씨구알호에 환자인 리바이와 죠세바도 편승시켰다.
씨구알호는 귀항길에 17도 이북의 어장을 어탐기로 찍어보겠다며 선수를 북으로 돌렸다. 오 선장도 오늘은 좀 더 북쪽으로 투승을 해 볼 요량으로 씨구알호가 사라진 방향으로 선수를 틀었다.
남서풍의 산들바람은 한결 같았다. 이물 쪽의 수평선이 하늘을 밀어내며 앞장을 서면 배와 함께 달아나는 하늘의 간격만큼 고물 쪽의 수평선이 곧장 뒤따라 왔다. 한번은 흰 머리와 갈색의 날개를 가진 이름 모를 바다새 한 마리가 씨윌호를 앞질러 멀리 수평선 쪽으로 사라져갔다. 오 선장은 처음 보는 그 새를 두고 혼자 속으로 길조라고 둘러대었다.
수평선이 어둠속으로 묻히며 다시 밤이 찾아왔다. 별들이 보석처럼 빛나는 여름밤이었다. 은하수의 강이 흐르는 남쪽 하늘 위로 남십자성을 이루는 네 개의 별이 선명했다. 대항해 시대의 항로처럼 바람은 곧 별빛 찬란한 길로 불어 갈 것이다. 내 눈과 내 마음이 선하다면, 내가 바라고 꿈꾸는 것이 모두에게 다 좋은 일이라면 오늘밤 별빛 찬란한 우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도 결코 부끄러운 일은 아니리라.
오 선장은 내일도 자신에게 무슨 좋은 일이 꼭 일어날 것만 같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