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겨울,며느리가 둘째를 가졌다는 얘기를 듣고 미구에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뭘로 지을까 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수 십년 전 내게 딸이 생기면 지어야겠다고 생각해둔 이름은 달속에 산다는 전설의 여인 '항아'였다. 이는 몇 몇 문학작품에서 등장하기도 했지만 그 이름에 무슨 신비로운 향기가 묻어나는 듯 하여 오랫동안 애착을 부린 이름이었다. 두번 째로 내 마음을 이끈 것은 '이슬' 이었고 ,'한별','슬기' 같은 것들이었다.
둘 뿐인 아들의 이름을 각각'한얼','한빛'으로 지은 터라 '한별'도 잠시 애착했던 이름이었다. '한'은 '큰'이란 관형어고 '얼'은 '정신'이란 뜻의 순 우리말이다. 결국 딸을 두지 못한 내가 '한얼'군의 딸에게 '한별'이란 이름을 전수하려고 하니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고심끝에 첫 손녀의 이름을 '사랑'이라고 지어 주었다.
그러나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둘째 손녀의 출산을 앞두고 또 다시 작명권을 행사하려니 몇 가지 망설임이 따랐다. 제 자식의 작명권을 모조리 아버지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할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오직 딸만 둘을 둔 사돈집 어른들은 외손의 작명권은 아예 자기들의 몫이 아니라며 체념하고 있겠지만 ,속으론 얼마나 서운 할 것인가 라는 제법 염치있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생각 끝에,둘째 손녀의 출산을 석 달 앞둔 시점에 아들 내외에게 양가 부모들과 삼촌, 이모를 망라하여 모두 작명권을 줄테니 후일 이를 투표에 부쳐 결정하자고 일렀던 것이다. 그 말에 제일 환호한 것은 물론 사돈집 어른들이었고 삼촌과 이모도 덩달아 즐거워 했다는 뒷말을 들었다.역시 어디에나 민주주의가 좋기는 했다.
지난 5월 29일,둘째 손녀가 예정보다 한달 앞서 태어나자 작명투표가 서둘러 이루졌는데 삼촌이 지었다는 '예음(예수님의 마음)'이가 제일 많은 표를 얻었고,특히 사돈집 어른들이 이를 적극 추천하더란 얘기였다. 작명투표를 선포할 때부터 '사랑'에 이어 자매의 이름을 '랑'자 돌림으로 가면 좋겠다 싶어 '자랑'을 생각했던 나의 복안이 아내의 입을 통해 아들 내외에게 들켜버렸고 , 그 즉시 아들 내외가 기겁을 하며 반발하더란 얘기를 듣게 되어 나는 그만 나의 생각을 접기로 맘먹고 투표결과만 기다렸는데 정작 '예음'이 당첨되자 선뜻 동의를 할 수가 없었다. 왜냐면 그 이름이 순수 우리말 이름이란 느낌이 들지 않은데다 끝의 '음'이 닫힌 자음이고 어감 또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투표에 나의 작명이 제출되지 않은고로 ,나는 뒤 늦게 '예수님의 자랑'이란 뜻의 '예랑'을 출품하여 '예음'과 결선투표를 하자며 반칙성 제안을 하였고,그 결과는 4:4 동률이었다. 아들 내외에게 작명의 뜻과 문자적 결함과 돌림자가 없을 경우 자매간의 이질감 등 부연설명을 하며 내가 지은 이름을 재차 강권하기에 이르렀는데, 아기의 출생신고가 급했던 아들이 '예음'을 뽑아 들고 동사무소로 달려가며 내게 전화를 했다.
"아버지,장인,장모가 하도 '예음'이란 이름이 좋다고 해서요...그 분들이 서운해 할까봐..."
나는 사돈의 귀한 투표권과 외손에 대한 저들의 소망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의 머리와 혀는 여전히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 그래도 그 분들이 서운해 할거란 생각은 옳지 않아. 작명이 어디 작명가의 체면을 봐주고 하는거야? 다만 네가 아버지이니 네가 좋다 싶은 이름으로 결정하려무나."
성격이 온순하기 그지없는 아들이,내가 이번에는 사돈에게 양보하는 줄 알고,아버지 고맙습니다 하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한 시간 뒤. 핸드폰이 울려 열어보니 아들의 문자 메시지가 떴다.
"아버지,'예랑'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순간 한꺼번에 여러 생각들이 머리에 떠올랐고, 결국에는 동사무소로 가는 동안 아들의 갈등과 고민이 또한 어떠했을까 란 생각에 도달했다. 그러자 아들에 대해 나는 참 못된 아버지란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래서 나는 혼자 이렇게 결심했다. 다음부터 아이의 작명권을 아예 그 부모에게 돌려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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