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른 봄 햇살이 좋아 점심식사를 끝내고 곧장 바닷가로 나갔다. 처음 발길을 뗀 곳은 송도 아랫길 공동어시장이었다. 새벽에 경매가 이루어진 장터에는 고등어 지꺼기와 스티로폼 어상자 조각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고 삿갓형으로 길게 세워진 경매장 지붕위에는 괭이갈매기 무리가 잔뜩 오수에 젖어 있다. 나처럼 바다새의 배도 포만하다. 방파제 너머로 남해여객선이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달려가고 있고 주전자섬에서 이송도(二松島)쪽으로 선수(船首)를 박은 러시아 어선 옆에는 통선(通船) 한 척이 마악 아스탕(Astern; 후진)으로 엔진을 쓰며 몸을 틀고 있었다.
며칠 째 불어오던 매서운 북서풍은 멈추었다. 명랑한 하늘은 냉정한 표정이고 고갈산 자락에 딱정조개처럼 박혀있는 촘촘한 집들의 풍경이 후지컬러 선전물처럼 산뜻하다. 습도가 멀리 달아난 대기는 내 몸무게처럼 가볍다. 자갈치 어시장 후편 매립지에 접어들자 또 무릎이 저려왔다. 몸속에서 물기가 사라지면서 시작된 관절염. 몇 년이나 더 나를 이 땅에 세워둘 것인가,작은 근심이 너울처럼 밀려왔다. 골다공증이 심해 몇 해 전에 무릎에 인공관절을 박았던 숙모님은 이제 앉은뱅이가 다 되었다. 자갈치와 충무동의 꼭지점인 안벽에 어깨동무하고 몰려있는 폐선들의 용골도 너울이 밀려올 때마다 삐꺽거렸다. 그 소리가 아프다 아프다 호소하는 팔순이 지난 숙모님을 닮았다. 그러므로, 내 나이가 마음속 교만을 끌어내어 폐유가 엉겨있는 안벽 밑으로 투기했다.
전경들이 지키던 초소가 허물어지고 양지바른 그 터에 노인이 머리를 깍고 앉았다. 불현듯 그 모습을 파스텔화로 그리거나 흑백필름에 담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다. 그 광경은 까마득한 내 유년의 앨범에 남아있는 몇 줌 안 되는 풍경들 중의 하나였다. 아직 면도질이 안된 여윈 볼과 턱에 쭈삣쭈삣 솟아난 성길고 허연 터럭도 영판이었다. 이발이 끝나면 무허가 이발소 주인은 가방에서 직사각형 거울을 꺼내 영화찍듯이 노인의 얼굴에 햇빛을 쏟아부을 것이다. 행복이발소의 대인요금은 일금 삼천원이었다.
2.
남향인 꼼장어구이집 뒷 담벼락에는 여인네들이 배를 딴 가자미를 발에다 널어 말리고 있었다. 그 옆으로 따뜻한 햇살을 머리에 둘러쓰고 장어주낙 낚시를 통에 감는 늙은이들이 대여섯 명 또아리를 틀고 앉았다. 150개가 감기는 낚시통 하나에 2,500원을 받는데 낚시 가지줄(branch line)에 일일이 새 낚시를 묶어 바구니를 한 바퀴 돌려 감는데 1시간 하고도 30분이 더 걸릴 상 싶었다. 늙어서 힘있는 일은 못하고 그래도 이거라도 하니 자식들한테 손은 안 벌려. 그래도 천 년 만 년 살겠능교. 가자미 배를 따던 아지매가 말참견을 했다. 우리 신랑은 힘이 장사였제. 시집가 첫 아 놓기 전까정은 뒷간에 가 제대로 앉지도 못했다 아이가. 우습다. 뜬금없이 누구 들어라고 남편 정력자랑인가. 60줄에 든 그 아지매는 삼십년 전에 낭군을 잃었다 했다. 배에 불이 나 숨도 못 쉬고 죽었는데 시체를 못가지 온다케서 후제 비행기 타고 댕기 왔다 아이가. 스페인령 라스팔마스 이웃 섬인 떼네리페의 한인 공동묘지에 다녀온 이야기인 듯싶다. 가자미는 라스팔마스에서 잡아온 뻬루다라는 납작한 가자미-일명 납세미-이다. 서해안에서 잡히는 서대류는 렝구아라 부른다. 아지매 이 가자미가 어데서 잡아온 건지 압니까. 몰라요. 아침에 서울수산에서 10상자 받아 온 기라요. 아지매 신랑이 묻힌 그 동네꺼 아인교. 아지매가 내 얼굴을 함 보고 ,허리를 펴더니 곧장 멀리 등대너머 남쪽바다 수평선에 눈을 묻었다. 그 모습이 참 하염없었다.
3.
충무동에서 자갈치로 접어드는 부둣길에는 사람이 걸터앉는 나무의자가 대여섯 개 있고 그늘이 지라고 나무로 얼기설기 지붕을 얹었다. 그곳에 엉덩이를 깔고 앉으면 등대 사이로 빠져나가는 수로(水路)가 빤히 보인다. 내 옆에 나이든 할머니와 어린 손녀가 나란히 앉아서 바다 위를 선회하는 갈매기를 바라보고 있다. 부리가 빨간 어린 새들이 날개에 힘을 올리느라 그러는지 안벽에 기대선 배위를 원을 그리며 낮게 낮게 날고 있다. 그러다가 가끔씩 수면 위로 발을 적시기도 하였다.
수변공간은 한적하지도 상쾌하지도 않았다. 화물차들이 연신 붕붕거리며 지나가고 공터에서 윷을 노는 무리들의 웅성거림이 신경을 건드려 앉아 있기가 거북했다. 무릎 아래로 고데구리라 부르는 소형 어선들이 길게 줄을 지어 묶여있다. 정부에서 조업을 전면 금지시키는 한편 면허를 몰수하고 감척을 종용하므로 영세선주들은 긴 한숨을 쉬었고 , 다대포에서는 활어를 받아 생계를 이어가던 다라이 장사꾼 아지매들이 덩달아 죽게 생겼다고 또 울상이었다. 조업금지령은 불법어로이므로 당연해 보이고 보상감척은 자원관리를 위한 고육지책이지만 지금에 와서 어민들의 원망을 사는 정부도 세월을 돌려놓고 보면 행정상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연안어장은 어업으로 먹고사는 토착어민들의 몫인데 진작부터 적법한 어업으로 계도하여 양성화시킨 후 허가척수와 자원관리를 병행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아무러나 긴 휴식에 들어간 배는 태평하다.
윷놀이 판에서 함성이 터졌다. 윷판을 중심으로 둘러섰던 커다란 원이 무너지며 배당금을 받아 쥔 사내들이 파안대소하며 마악 돌아서고 있었다. 말을 세 마리 쓰는 데 한쪽이 모와 윷을 연속으로 터뜨리며 상대방의 말을 잡고 역전한 모양이다. 행색이 말끔한 늙은이도 있고 장바닥을 무대로 살아가는 젊은 논다니들도 섞였다. 나는 대형트롤어선이 접안해 있는 부산시 수협 경매장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註) 고데구리 배 : 일제시대 때부터 사용되어온 연안의 소형 저인망 어선을 일컫는 말이다. 어선의 규모는 4-5톤급으로 그물을 소물게 쓰고 그물바닥에는 체인을 달기까지 해 치어나 조개류를 포함하여 바닷속을 싹쓸이 하므로 연안어장의 자원을 고갈시키는 원흉으로 지목되어 왔다. 정부의 허울뿐인 단속으로 최근까지 수십 년 동안 연안 어민들의 주된 생계수단이었다. 일본말 그대로 여전히 고데구리 어업이라 통칭하지만 어업허가 대상이 아니며,선주들은 어선원부상 작업선이나 유어(遊漁) 등의 면허를 득한 후 어로순시선과 숨바꼭질을 하며 불법조업을 해왔던 것이다.
4.
인성 107호. 대형기선저인망(139톤). 7 이란 숫자는 럭키 세븐의 뜻으로 한국사람도 오래전부터 애용하던 숫자다. 다만 인성(仁成)이니 달성(達成)이니 하는 조어(造語)는 배하고 어울리지 않는다. 미국에서 본 어선들의 이름은 대부분 ' Wild Mary' 나 ' Captain Joe'같은 사람 이름이나 'Sun Flower' 같이 동식물의 이름들이어서 배를 접할 때마다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바다와 배는 다 여성명사다. 그러므로 배의 이름도 당연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워야 한다.
" 에- 지금부터 인성107호 오징어 경매를 시작하겠심다. 보다시피 생물입니다. 여기 내놓은 것은 견본입니다만 어창 밑에 것은 이보다 때깔이 더 좋심다. 모두 천 삼백 갭니다. 천 삼백 개."
얼음에 재어온 선어鮮魚를 생물生物이라고 우겼다. 선주측에서 나온 50대 남자가 개회사를 할 때 나는 재빨리 딸랑종(鐘)을 든 경매사 뒤로 가 섰다. 중매인들의 손놀림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뒤따라 경매사가 노래를 불렀다.
" 허-어-이---- 삼 만---- 삼만 양처이---삼만 오쳐-이-- "
경매사들은 폐활량이 크야 쓴다. 길게 목청을 뽑으며 중매인들의 손놀림을 읽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양천(兩千)은 이천(二千)을 이른다. 일(一)과 이(二)를 구분하기 위해 경매에서 이(二)는 양(兩)이라 쓴다. 경매사를 마주하고 도립한 중매인들의 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나 싱겁게도 불과 10 여 초만에 경매가 끝났다.
" 삼만 구처이---삼만 구처이---삼만 구처언---,칠십 오번."
경매사는 최고가를 세 번 복창한 후 낙찰을 알리는 뜻으로 중매인의 번호를 호명했다. 오늘도 나는 중매인들의 손을 다 읽지 못했다. 공동어시장에서의 의무상장제도가 없어지면서부터 개별수협을 통해 어디서나 선상경매가 이루어진다. 22키로 들이 나무상자 하나에 삼만구천 원이면 높은 값이다. 상자로 천 삼백 개면 약 30톤, 딱 하루 작업량이다. 어장을 오가며 이틀 . 어탐일수 하루를 보태 나흘만에 오천만원을 올렸다면 남는 장사다. 요즘도 채낚이 어선들을 앞세워 그물을 끄는지 궁금하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밤에 채낚이 어선들이 집어등(集魚燈)을 밝혀 오징어를 모아주면 트롤 어선이 그 길로 그물을 끄는 협동어로가 성행했었다. 당연히 트롤선주가 채낚이 선주에게 불 값을 따로 주었다. 그런데 이것이 허가사항 위반이라며 해양수산부에서 금지시켰다나 어쨌다나.
어창에서 고기를 상자로 담아 올리는 선원들의 표정이 화-안하다. 오늘밤은 막걸리든 소주든 혀끝이 달겠구나. 아-그러나 저들의 객고를 풀어줄 여자는 어디서 살꼬.
듣자하니 포클랜드 어장에서는 12월부터 오징어가 풍어를 이룬다고 했다. 어체는 작으나 1월 초순까지만 해도 하루 처리량(일일 동결능력: 40-60 톤)을 넘는다 했다. 배들을 일찍 출항시킨 원양선주들은 희망에 들떠 있고 작년의 불황으로 몸져 누었던 선주들은 어황소식에 정신이 번쩍 들어 뒤늦게 출항을 서둘렀다 했다. 그러나 부산서 남서대서양까지 항해일수만 근 45일. 뒤에 간 자는 최소 300톤 이상의 어획기회를 놓쳤고 앞서 간자는 벌써 4억 가까운 수양고를 올린 셈이다. 빠르면 2월에 부산에 운반선이 닿는다 했다. 연안 오징어는 동해안을 중심으로 6월에서 이듬해 2월까지 잡히고 포클랜드 어장은 12월에서 5월까지 형성되므로 년중 오징어 양륙의 순환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셈인데 평년보다 두 달 앞서 원양산이 들어오면 연안산의 가격이 내림세로 갈 것이다. 그나저나 지금의 어황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작년의 원양오징어 채낚이 사업은 참혹했다. 마치 오징어가 바다에서 모조리 종적을 감춰버린 듯 했다. 혹자는 자원이 고갈되어 이젠 씨가 말랐다 했고 혹자는 이상기온의 영향으로 수온이 바뀌어서 그렇다 했다. 척당 평균 1,500톤을 어획하던 평년에 비해 작년 경우 200-300톤에 그쳤으니 척당 조업손실이 10억 원을 넘었고 연륜이 짧은 선주들은 배를 내놓고 이름을 거두었다. 연안의 오징어도 어황이 좋지 않아 오징어 값은 년중 천장이었다. 그러나 한편, 작년 내내 근해선망에서는 고등어를 산더미로 잡아 올려 부산의 냉동창고들을 가득 메웠는데 이상한 것은 값이 떨어지지 않은 점이다. 알고 보니, 내수경기의 부진으로 여타 어종의 거래는 죽을 쑨 반면 고등어는 대중성이 강해 돈 있는 작자들이 양륙되는 쪽쪽 사재기를 한 때문이었다는데 하마하마 하다가 년말까지 호황이 지속되자 새해 들어 행방을 감춘 상인들이 하나 둘 생겼다고 들었다.
혹자는 매미태풍의 영향으로 근해 어장의 생물학적 환경이 바뀐 탓이라고 했지만, 글쎄 바다 속의 일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리가 자랑하는 바다에 대한 지식은 아직도 태산의 티끌이다. 예수의 손짓을 따라 그물을 드리워 만선(滿船)의 기적을 누렸던 베드로의 믿음이 차라리 더 유용할지 모른다. 동남아시아의 해변을 쓸어버린 쓰나미의 재앙을 보고도, 우리가 그래도 지구의 주인이라 , 바다와 산의 뭇짐승들과 새와 물고기들을 다 사람의 몫이라 이르겠는가.
5.
부산시 수협 공판장에는 모두가 국산이다. 갈치. 도미.아구.고등어와 방어.삼치.문어와낙지.전갱어.까치복. 방어진에서 잡았다는 대포오징어까지. 이른 아침 경매가 끝난 자리에서 아지매들이 4열 횡대로 좌판을 깔고 장사를 하고 있다. 죽어서 얼음 위에 누워 있는 자도 있고 얼린 상자에서 녹혀져 누운 자도 있다. 물칸에서 바로 건져져 아침부터 물에 젖은 채 누운 자는 머리가 빠알간 돌문어다. 죽어서 누운 그 영혼들에 대한 예로 나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비늘과 아가미 틈새에서 고기들마다 제가 살던 바다냄새를 풍겼다. 동해바다의 냄새는 미역맛처럼 신선하고 미끈거렸다. 남해바다의 냄새는 청각처럼 싱그러웠으며 서해의 그것은 뻘처럼 텁텁하고 천일염처럼 짰다.
처녀의 속살같이 우유빛이 감도는 탐스런 문어의 다리가 데려가 삶아 먹으쇼,라며 나의 식욕을 부추겼다.
어느 일요일 정오 무렵이었다. 남항동에서부터 영도다리를 넘어 자갈치시장 어물전에 다다르자 문어를 담은 다라이를 머리에 이고 선 어머니가 입술을 오무려 휘-이 휘-이 휘파람을 불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향인 거제도에서 문어단지를 털어 고데구리배로 신새벽에 올라오신 길이었다. 정오의 햇살이 등을 기대고 선 어물전 맞은편 적산가옥 이층으로 어머니가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까지 나는 저자바닥에 엎드린 다리가 없는 걸인을 넋나간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문어를 중매인에게 넘긴 돈이 한 몇 천원이었지 싶다. 형제들 간에 하던 양조업이 부도로 막을 내리자 내 어릴적 멸칫배 망쟁이(어로장漁撈長)였다는 아버지는 고향으로 내려가 주복(호망壺網의 사투리)과 문어단지로 여생을 마련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진학이나 학비에는 영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용두산 자락의 부산기술고등학교에서 통신을 배우던 년년생인 바로 밑의 동생은 그 해에 학업을 포기하고 고모부가 차린 거제도의 굴양식장에서 품을 팔았고 고등학교에 두 해나 늦게 들어간 나는 영도의 먼 친척집에 얹혀사는 자폐증 환자같이 말수가 적은 이상한 학생이었다. 그 어머니도 일흔 여덟의 나이로 돌아가신지 어언 5년이 지났다. .
註) 호망(壺網) : 승망繩網의 일종. 길그물과 포위망및 각진 곳에 부착한 원추형 자루그물로 구성됨. 보통 정치망을 부설할 수 없는 조류가 강한 장소나 수질이 탁한 만灣내에 부설하여 연안성 어족을 어획하는 어구임.
6.
수협 경매장 옆에는 자갈치 시장건물을 신축하느라 공사가 한창이었다. 지상 5층인 조감도에는 건물지붕이 갈매기의 날개형상으로 디자인되어 한껏 멋을 부렸다. 물이 질퍽거리는 장바닥에 좌판을 놓고 아지매들이 좁게 쪼그리고 앉았다. 새 건물이 완공되면 그 땐 노변의 좌판들이 좀 사라지려나. 그나저나 저 아지매들은 국제시장 세명약국의 단골들이다. 무릎이 쑤시고 아프면 그 약 사 먹어야제. 하-아 ,만신에 다 그 약국 것 사 묵제. 아지매요, 그게 다 마약이요 마약. 옆에서 젊은 여자가 면박을 준다. 그녀는 친정엄마로부터 자리물림한 지 한 십 년은 된 상 싶었다.
배가 불러 탱글탱글한 가덕대구가 눈에 들어 왔다. 체장이 어림잡아 60센티는 되고 체중은 5키로가 넉넉하지 싶다. 알이든 곤이든 배를 갈라내고 듬성듬성 무를 썰어 넣어 끓여 먹으면 신선이 따로 없겠다. 아지매, 그 대구 한 마리에 얼만교? 오만 원이라요. 올해는 가덕이나 진해만으로 산란철에 몰려온 대구가 또한 풍어였다. 귀하면 한 마리에 십오만 원까지 나갔던 고기다. 가덕대구 인자 끝물이라예. 사 가이소. 맞은 편 좌판의 고만고만한 원양산 냉동대구는 삼만 원을 불렀다.
활어活魚부 다음에 어패류 조합 ,선어鮮魚부 건어乾魚부로 구분된 조립식 가 건물로 들어섰다. 신선도를 돋보이려고 대낮에도 불을 켠 백열등이 눈부시다. 여기저기서 호객소리로 야단법석이다. 물칸을 채운 활어는 팔 할이 양식산이었다. 어른 팔뚝 굵기만한 숭어가 물을 채운 다라이 안에서 펄떡거렸다. 봄 숭어 가을 전어라켔제. 벌써 잡아대는구나. 건어부 끝자락에 꼼장어 껍질을 벗기는 가게가 서넛 보였다. 포장마차용으로 장만하는 꼼장어는 미국의 보스톤 언저리 대서양에서 교포들이 잡아 공급하였는데 그러나 오늘은 칼질하는 손놀림이 한가하다. 수입산도 꼼장어가 자원고갈로 작년부터 물량이 격감하였고 그래서 서울서는 꼼장어 체인점을 개업했던 이들이 다 문을 닫았다 들었다. 국산도 한일어업협정 이후로 어장이 축소되어 예전에 생물 1키로에 팔천 원 하던것이 만 팔천 원으로 금값이 되고 말았다.
어물전 옆에는 국유지위에 지은 가건물이 또 한 채 붙어 있다. 예전에 길가를 점령했던 고래고기.꼼장어구이 난전을 수용하기 위해 어패류조합에서 지은 것이다. 그 자리에 영도影島 대평동大平洞을 잇는 도선道船이 여태까지 영업을 하고 있었다. 마치 영도에 볼 일이 있는 사람처럼 나는 도선장으로 걸어 들어가 좁은 수로의 바다와 마주했다.
7.
물빛은 검푸르고 기름처럼 뻑뻑한 느낌을 자아냈다. 해가 이미 중천에서 서쪽으로 비껴간 탓이리라. 도선은 영도의 선착장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대평동에서 전차종점쪽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항구극장이 있었고 그 뒷골목 자리에 술도가인 큰집이 있었다. 꼬두밥으로 막걸리를 담던 시절이었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입학한 지 한 달도 채 안되어 나는 어머니의 손에 잡혀 부산으로 이주했었다. 1960년 3월 ,햇살이 따뜻한 봄날이었다. 거제나 남해 등지로 다니던 여객선들의 부두가 바로 지금의 도선장 자리였다. 시골아이의 눈에 잡힌 도회지의 풍경은 참으로 눈부셨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부두에서 나는 혼이 달아난 듯 했고 영문도 없이 밀려드는 두려움에 어머니의 치마자락을 힘껏 부여잡은 기억이 생생하다. 엿판에 놓여 있던 뽀오얀 엿가락과 고소하면서도 왠지 역겨운 고래고기 냄새는 어린 나에게 너무 낯설고 생경했다.
재작년 가을, 서울에서 사촌형제들이 남녀로 떼지어 놀러왔었다. 옛 가문의 영광과 부산의 명물을 기리기 위해 근 삼십 년 만에 어렵사리 짬을 낸 단체여행이었다. 나는 그 때 추억여행의 출발점을 자갈치 도선장으로 삼았다. 빛바랜 영도다리와 바쁘게 오가는 통선通船들과 줄지어 늘어선 어선들과 어지러이 선회하는 갈매기들을 배경으로 짜고 비린 바다냄새를 함께 섞은 사진을 제일 먼저 찍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옛 술도가 자리를 더듬었다. 나는 형제들에게 도선을 타고 가 옛날 술도가 자리까지 탐방하고 오라한 뒤 , 시간도 때울 겸 혼자서 꼼장어 한 접시와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사촌들은 그 때 다들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스물 미만의 학생들이었고 환갑을 넘긴 누님만이 재수 좋아 부잣집 처녀로 서울로 시집을 갔던 시절이었다.
술을 반도 비우기 전에 사촌들이 돌아왔다. 나이 많은 누님이 상륙을 막았다 했다. 그 집이 여태 그대로 남아 있지도 않은데 공연히 마음만 아플 짓을 뭘라고 할끼고. 마루로 된 술도가 이층의 건조장에서 꼬두밥을 주워 먹던 추억이 아련한 형제들은 그래도 아쉬움이 진한 얼굴이었다. 오빠, 근데 그냥 배에만 앉았다 오는데 왜 돈을 받어요? 요금소는 대평동에만 있었으므로 상륙을 않고 그냥 돌아오면 돈을 안 내어도 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옷 잘 입은 일행이 여섯 명이나 되었으니 선장이 고이얀 사람들하며 불끈해서 조타실에서 내려왔을 것이다. 도선값은 편도에 버스요금과 같았다.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좋은 고래고기. 육이오로 피난온 서울사람들을 깍쟁이라 여긴 고향 촌사람들이 지었거나 부산사람들이 지었거나 아무튼 어린 시절 동요처럼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형제들은 하나 둘 내가 앉은 코너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오빠 우리도 뭣 좀 먹어요. 행님 고래고기도 시켜 주이소. 여동생들의 말투에는 부산억양이 사라지고 없었다.그래도 여섯 살 아래인 장손은 안태고향의 근본을 잊지 않은 듯하여 다행이었다. 어젯밤 해운대의 콘도에서 날밤을 새었는데도 일상으로부터 벗어난 여유로움과 싱그런 바다냄새가 그들의 식욕을 부추기는가 싶었다. 좋다 , 오늘은 먹거리여행으로 행선지를 잡자꾸나. 여기선 꼼장어와 고래고기다. 남포동으로 넘어가 할매집 회국수와 18번 완당국을 먹고 국제시장에서 고갈비(고등어 구이)로 마무리 한다. 각자 알아서 먹어라, 알것제? 와- 오빠 ,진짜 그것 먹고 싶었어요. 호호호 하하하...
註) 고갈비집: 70년대 국제시장골목에 흔하던 고갈비 술집은 옷가게등에 밀려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겨우 찾아낸 곳이 구 미화당백화점 뒷골목(로얄호텔과 통함)의 허름한 가게였는데 늙은 할머니와 손자라는 젊은이가 옛맛을 살려 고갈비를 연탄불에 구워내고 있었다. 고갈비에 대한 향수를 못잊는 단골들로 장사는 제법 쏠쏠한 듯했다.
8.
도선장을 빠져 나오는데 유리벽 안으로 수북히 쌓아올린 고래고기 무더기가 눈길을 끌어 당겼다. 성급하게도 입안에 침이 고였다. 아직 시간이 일러. 그래도 여까지 왔는데 조금 맛이나 볼까. 건어물가게가 밀집한 상회商會골목 입구로 발을 끌다가 나는 못내 돌아서고 말았다. 가건물 초입의 눈이 동그란 아지매가 벌떡 일어서며 나를 영접했다. 멀리 갈 것도 없어. 안쪽의 늙은 여자 둘이 나를 향해 엉덩이를 일으켰지만 나는 눈이 동그란 여자에게로 다가가 납죽 앉았다. 한 접시 얼만교? 삼만 원, 오만 원 합니더. 나 혼잔데 삼만 원도 부담되요, 절반짜리로 하나 맹글어 주소. 안 됩니더. 400그람에 십만 원, 1키로는 삼십만 원에 떼 옵니더. 소고기보다 비싼기라요. 아지매와 나는 결국 이만 원짜리로 합의가 되었다. 야실야실 썰어 낸 살점이 열 점이 조금 넘었다.
작년 6월엔가 울산에 근무하는 친구 덕에 장생포로 가 제대로 된 고래고기 요리를 먹은 걸 생각하면, 이것은 턱없이 비싸기만 하고 맛도 시원챦다. 그러나 나는 자갈치에만 오면 고래고기에 대한 특별한 향수를 떨칠 수가 없었다. 부산에 첫 발을 내 디딜 때 맞닥뜨렸던 그 생경하고도 신비스럽기까지 하던 냄새. 그리고 이송도 방파제 근처에 살며 남항초등학교를 다닐 때 큰 길로 나서는 골목에서 아침저녁으로 맡았던 묵직하고도 자욱한 그 고래고기 냄새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아지매, 여기 있는 고래고기 종류가 몇 개나 되는교. 밍크 하고 수염고래 ,돌고래 종류인 곤노 . 덩치큰 나가스...그래예. 나가스를 우리말로 뭐라는지 퍼뜩 알 길이 없다. 설마하니 대왕고래는 아닐테다. 나가스라...나가스. 아지메 나가스가 참고래 아인교? 그건 잘 모르겠고 암튼 덩치가 큰기라 하데예. 해방된 지 오십 년이 지났건만 구석구석 일제시대의 잔흔이 남았으니 딱한 일이다.
고래는 이빨고래아목과 수염고래아목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이빨이 있어 정어리,오징어 등 물고기를 먹이로 하나 후자는 이빨대신 수염판이 있어 플랑크톤이나 새우류 등 작은 갑각류를 섭취한다. 이빨고래류는 돌고래류와 향고래(말향고래,향유고래: 허만멜빌이 쓴 소설 '白鯨=Moby Dick'의 주인공),범고래 (바다표범 등을 잡아먹으므로 킬러고래라고도 함) 등 70여 종이 있고 ,수염고래류에는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큰 동물인 휜긴수염고래( 대왕고래.英 Blue Whale ,日시로나가스쿠지라.체장 33미터 체중 120톤-180톤. 100-120년을 산다.),참고래( Fin Whale/나가스쿠지라. 대왕고래 다음으로 크나 체형이 날씬하다. 대략 25미터 길이에 75톤의 무게가 나감.수염고래류 중 복부의 주름이 제일 많다. 100년 정도 산다),보리고래,브라이드 고래,밍크고래,귀신고래(Gray Whale/고쿠라지라. 풀고래와 함께 회색고래라 불림),피리소리같이 아름답고도 특이한 울음소리를 내는 흑등고래 등 10여 종이 있다.
고래는 덩치나 색깔로도 그 종류를 구분하나 그것은 고래가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다.망루에 올라간 노련한 고래잡이 어부는 고래의 울음소리나 물뿜이의 모양을 보는 순간 육감적으로 고래의 종류를 읽어낸다고 한다. 항온동물인 고래의 물뿜이는 몸속에서 배출되는 더운 공기가 차거운 물과 부딪혀 생긴 수증기,즉 콧김과 분기공 주변의 물이 함께 치솟아 오르며 생기는 현상이다. 이빨고래는 분기공이 머리 왼쪽 앞부분에 하나만 있고 수염고래는 머리위 중앙에 대칭으로 두개가 있어 물뿜이의 모양이 확연하게 다르다. 향고래의 경우 물을 왼쪽 앞으로 비스듬하게 뿜는다. 대왕고래는 수직방향으로 10미터 가량 치솟고,참고래는 4-6미터의 높고 길쭉하게 뒤집힌 원추형이며 보리고래의 경우엔 3미터 정도의 높이로 후방으로 약간 기울어진 모양이다.
물뿜이와 함께 기억해야할 고래의 신비한 행동에는 Spy Hopping 이란 곡예가 있다. 우리나라 연안의 포경어부들에게 포착된 풀고래의 경우 상반신을 물위에 수직으로 곧추세운 채 사방을 둘러보는 몸짓을 보였다는데, 이는 회유경로 중에 있는 갑岬에서 육지의 위치를 알아내어 회유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알려져 있다. 포경선에서 어로장은 포장이라 부른다. 그는 고래의 행동을 포착하는 즉시 고래의 다음 행동과 유영방향 등을 읽어내어 배의 동선動線을 결정하며 작살총을 제 때에 정확히 발사하는 임무를 갖는다. 고래를 발견했다 해도 즉시 재빠른 대응을 하지 못하면 그 고래를 놓치기 일쑤였다. 돌고래 등은 3분마다 한 번씩 호흡을 한다. 돌고래의 최장 잠수시간은 8분을 넘지 못한다. 반면 향고래의 경우 최대 잠수능력이 120분에 이르고 해저 3,000미터까지 내려간다고 한다.
고래는 백악기 말엽 또는 신생대(5천-6천만 년전)에 출현한 동물인데 바다의 조상은 약 2백만 년전 동물화석에 나타나 있다고 한다. 왜 그가 바다로 갔는지 알 길은 없으나 고래는 우리에게도 오래 전부터 친숙한 동물이었다. 울산의 반구대암각화는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에 그려진 것이라 하는데 별주부전이나 심청가는 고래에서 상상력을 빌려온 것으로 짐작된다. 인어공주의 전설도 모티브는 공기로 숨을 쉬는 고래에 착안하지 않았나 싶다. 1970년대에 지어져 국민가요가 된 송창식의 '고래사냥'이란 노래는, 그 당시 암울했던 시대상을 돌이켜볼 때 ,가사의 상징성과 함께 젊은이들에겐 속이 뻥하고 뚫리는 카타르시스의 효과가 있었다.
고래기름을 이용한 양초공업의 발달로 18-20세기에 걸쳐 미국.노르웨이.러시아 등 포경국가들의 대량포획으로 자원이 격감되자 IWC(국제포경위원회)의 결의로 1986년부터 상업적 포경이 전면 금지되었는데 고래고기를 즐기는 일본은 자원조사를 핑계로 그 동안 공공연하게 포경을 해 왔다. 최근엔 우리나라 동해안에도 수십 마리의 귀신고래가 다시 출몰하여 고래의 자원이 예전처럼 회복된 징조로 보고 , 금년 5월 울산에서 개최되는 제57차 국제포경위원회에서는 우리나라도 포경어업 재개를 주장할 채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장생포에서 포경선이 자취를 감춘 이후 그간 그물에 우연히 걸려드는 고래고기로 식도락가들의 입맛을 지탱해온 사정을 감안하면 고래고기를 싼값에 원 없이 먹게 될 그 날이 그리 머지않았다.
아지매가 썰어 놓은 고기는 뱃살, 지느러미, 맨 속살, 껍질과 지방과 속살이 붙은 삼겹살로 네 종류였다. 뱃살은 나가스 고기라 하는데 구수한 맛이 덜했다. 자칫 입만 버릴 것 같아 젓갈 국물에 양파와 고추를 잘게 썰어 넣은 양념을 살짝 찍은 후 입에 넣고 천천히 오물거렸다. 침을 많이 섞었는데도 여전히 찰지고 부드러운 맛이 떨어졌다. 삼겹살을 씹으면 고래의 지방층은 입에 씹히는 촉감이 부드럽고 배처럼 사각사각 하면서도 구수한 기름이 입안을 감도는 맛이 일품인데 아무래도 장생포에서 먹었던 우내의 맛에 비하면 싱겁고 맹맹하기만 했다.
막찍기는 생고기를 썰어서 양념에 바로 찍어 먹는 요리고, 우내는 목살과 가슴살을 얼려 얇게 썰어낸 고긴데 핑크색이 난다. 또 오베기라 함은 꼬리부분의 하얀 속살과 까만 껍질이 붙은 고긴데 약간 데쳐서 나오므로 씹는 맛이 쫄깃쫄깃하다. 육회는 쇠고기와 마찬가지로 붉은 살코기에 배즙을 갈아 넣어 먹기가 부드럽고 수육은 소금을 넣고 한 소끔 삶아서 내놓는 고긴데 맛이 구수하고 입에 씹히는 맛이 또한 별미였다. 울산 현대중공업에 다니는 친구가 오래 전부터 이 맛을 보여주겠노라 여러 번 나를 청했는데 차일피일 택일을 하지 못하다가 , 우연찮게 울산의 아람마트에 삭힌 홍어를 납품하러 간 길에 그를 만나 장생포에서 그나마 아직 대를 이어 옥호를 지키는 유명한 집에 가 고래고기 모듬요리로 갖가지 맛을 보았던 것이다.
영도의 먼 친척집에 의탁하여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시대와이샤스 간판이 붙은 광복동 번화가의 건물 6층에 살던 3학년 같은 반 짝지가 해가 어스름한 어느 일요일 저녁 영도다리를 넘어 나를 만나러 온 적이 있었다. 대평동 선박수리 철공소 골목 근처에서 고래고기 불고기를 안주로 둘이서 소주를 두 병인가 세 병인가 나눠 먹은 후 광복동 야시장 구경을 한다고 영도다리를 건너 왔는데, 술에 체했는지 맛잇는 고래고기에 체했는지, 아- 그 때 충무동을 향해 다리난간을 부여잡고 고귀한 고래고기를 죄다 토해 버렸던 기억이 생각난다고 했더니 아지매가 허리를 꺾으며 웃었다. 부끄러움도 없이 허-야 하고 웃는 아지매를 자세히 보니 3학년 같은 반 그 짝지가 부산 내려올 때마다 단골로 데리고 가던 길거리 난장의 바로 그 예쁜 아지매였다. 아지매 집이 까치고개 넘어 대티터널 근처 아인교? 예 그래예. 그걸 우째 아는데예? 아- 서울 사는 내 친구가 아지매하고 같은 동네 산다꼬 자갈치에만 오면 아지매 집에 단골이었소. 한 십 년쯤 전 일이요. 그 친구 부산에 내려왔다 하면 일 차로 자갈치부터 훑고 그랬소. 나도 서울 살 때는 자갈치가 젤 그리웠지요.
젊은 시절 , 남대문 시장 밑의 북창동 골목에서 술을 마시고 나면 어김없이 우리는 프라자호텔 뒤편 어둑한 골목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오줌을 쌌다. 그 때 어울렸던 수대水大동기들은 용호만의 개펄을 추억했고 나는 컴컴한 자갈치 앞바다를 떠올리곤 했었다. 짓굿게도 거센 오줌발로 잠든 바다를 일깨우던 학창시절의 그 오만함이란... 검푸른 파도 삼킬 땐 사나워도 나는 언제나 바다의 사나이. 흙냄새 그리울 땐 항구 찾아 헤매이고 사랑이 그리울 땐 파도 속에 뛰어든다. 아-아-아-아-아. 서울 도심의 밤하늘을 찌르던 그 노래소리도 이젠 끝을 이을 수 없다.
아지매가 접시에 지느러미 살을 서너 점 더 얹어주었다. 아-이씨, 다음에 또 오이소. 단골하면 많이 주는교? 그라지예. 소주 한 병을 다 비우지 못하고 일어섰다. 낮술은 여전히 무겁고 힘들다.
9.
나는 건어물 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고등학교 동기가 운영하던 신항상회는 주인이 바뀌고 한 삼년 지나 이름도 바뀌었다. 십여 년 전 일이지만 캐나다에 출장 갈 일이 있으면 늘 나는 신항상회에서 멸치와 쥐포와 김과 건미역을 한 다발씩 사곤 했었다. 영문을 모르겠지만 부산에서 제일 개발이 안 된 곳이 이곳이다. 오직 한 군데 (신)개성상인이란 간판을 붙인 집을 빼면 하나같이 상회商會돌림이며 수협건물을 빼면 또 하나같이 일제시대에 지은 목조건물이거나 해방직후 지어진 말 그대로 점방店房의 모습 그대로다. 그래서인지 이 골목을 들어서면 발걸음이 느려지고 마음도 편안해졌다. 상회골목의 멸치냄새가 오늘도 예외없이 유년幼年의 뜨락으로 나를 이끌었다.
경상남도 거제군 일운면 구조라리에서 30대의 젊은 아버지는 백부가 물려준 멸치어장을 지키고 있었다. 동창이 훤하게 밝아오면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났고 마루로 나서면 맨 먼저 눈부신 햇살이 낯을 씻어 주었다. 간간하고 따뜻한 냄새에 끌려 바다로 통하는 샛문을 밀고 나서면 대나무 소쿠리에 담아 방금 어장막에 널어 놓은 삶은 멸치가 아침 햇살에 사금파리처럼 반짝였다. 멸치 틈에서 빠알간 호래기 새끼라도 눈에 띄이면 물컹하고 입에 침이 고였다. 메가리(전갱어 새끼)도 좋은 요기거리였다. 멸치를 삶는 어머니가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진 한 식경이나 걸렸으므로 동생과 나는 허기를 참지 못하여 어장막을 헤치고 다니면서 호래기와 메가리는 물론이고, 삶은 멸치까지 집어먹었는데 그런 날이면 형제간에 설사를 만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온종일 뒷간을 들락거리곤 했었다.
다 말린 멸치는 창고 안으로 옮겨져 발로 젓는 날개가 큰 바람개비로 비늘을 털어낸 뒤 종이포대에 담았다. 일이 없는 날이면 그 작업장에서 동생과 나는 항용 숨바꼭질을 하며 즐겨 놀았다.
사라호 태풍에 집이 바닷물에 잠긴 것은 내 나이 일곱 살 때였다. 어른들의 무등을 타고 물에 잠긴 마당을 빠져나와 앞동산으로 몸을 피했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내 고향 구조라舊助羅는 뱀이 바다를 향해 머리를 묻고 있는 형상이다. 뱀의 목처럼 가늘고 폭이 좁은 땅을 경계로 앞개는 고깃배들이 접안하는 어항이었고 뒷개는 모래가 깔린 백사장이었다. 금빛모래와 나이롱 고동이 발에 지천으로 밟히던 뒷개는 뭍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마치 작은 정원에 깔아놓은 예쁜 수석처럼 오롯이 떠있는 윤들섬과 함께 그 풍광이 빼어나 오래전부터 해수욕장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러던 것이 육이오때 포로수용소를 짓는 바람에 모래언덕이 폭삭 낮아졌고 여름이면 태풍이 또 모래를 헐어내곤 하여 지금은 해수욕장으로 옛 명성을 찾을 길 없다. 사라호 태풍때는 뒷개에서 파도더미로 덮친 바닷물이 뱀의 목줄기에 자리한 우리 집 마당을 가로질러 앞개로 넘나들었던 것이다. 그 시절 우리 집은 구조라에서 제일 크고 유일한 기와집이었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애석하다. 그 추억의 보금자리도 남의 손에 넘어가 이젠 고향이라고 찾아가도 엉덩이를 깔고 등을 누일 데가 없다.
멸치어장을 접고 형제들과 부산에서 양조업을 경영하다가 부도와 함께 당뇨.고혈압으로 병이 깊어 고향에 내려가 있던 부친은 내가 대학 2학년이던 1975년에 돌아가셨다. 음력으로 구월 열사흘이 기일忌日인데 선산의 해송海松숲에 누워계신다. 햇볕이 잘 드는 동향이라 숲이 우거지기 전에는 그 언저리에서 큰 형이 밀감밭을 일구기도 했는데 제주도와 달리 거제도에서는 밀감농장이 성공하지 못했다.
땔감을 산에서 구하지 않은 지가 수십 년이 지나 숲이 어찌나 무성해 졌는가 하면 옛날 나무하러 소 먹이러 다니던 산길은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산 중턱에서 남쪽의 해금강海金剛을 내려다보는 증조부묘에 닿으려면 해마다 낫으로 길을 내어야만 한다. 집안끼리 송사에 말려 조상묘를 돌보지 않은 게 한 오륙 년 되었지 싶다. 증조부묘에 이르니 봉분을 이루었던 흙더미는 온 데 간 데 없고 봉분 위를 뚫고 나온 참나무가 서너 발이나 하늘로 치솟았는가 하면 싸리나무 아카시아나무들이 묘주위를 어지러이 뒤덮어 기겁을 한 적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공동묘지도 마을에 씨족을 이룬 노盧씨나 강姜씨뫼 말고는 거의가 해송 숲으로 변해 있었다. 그곳이 무덤이었다는 흔적은 풀섶에 삐쭉 삐쭉 머리를 내민 비석뿐이었다.
서울 사는 팔순 넘은 고모님이 일러준 대로 아버지의 외조모 묘를 찾는답시고 공동묘지 옆 얕은 산허리를 더듬었는데 바다에서 건져 올린 돌로 세운 나즈막한 비석에서 효손국동孝孫國同이란 글자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냥 숲인 줄 알고 지나칠 뻔하였다. 국동은 백부伯父의 이름인데 젊어서 멸 어장을 한 덕에 힘센 장정들을 보내 상여를 메고 벼루목의 가난한 외갓집에서 거제도에서 제일 험하다는 망티재를 넘고 넘어 구조라 뒷동산에 외할머니를 장사지냈던 것이다. 효손의 이름을 알아낸 것도 8월의 그 염천지열에 땀으로 목욕을 하며 돌에 끼인 두꺼운 이끼를 벗겨내는 정성 없었더라면 불가능 했으리라.
나는 죽으면 화장火葬을 하리라 생각을 한 것이 바로 이 때였다. 그래서 몇 년전 돌아가신 어머니는 나의 고집으로 화장한 후 어머니의 안태고향인 학동鶴洞마을의 몽돌해변과, 멸치 뛰노는 초록바다와 , 이른 봄이면 피빛 같은 동백꽃이 열리고 팔색조八色鳥가 춤추고 노래하는 동백숲 우거진 절벽해안이 한눈에 잡히는 고갯마루에 재를 뿌렸다.
어머니 생전에 어리광이 많았던 막내는 지금도 화장한 것을 원망하듯이 말한다. 무덤이라도 있으면 찾아가 엎드려 펑펑 울고 싶소. 나이 사십 넘도록 여태 제 집 한 칸 없는 신세라 사는 게 얼마나 팍팍했으면 술김에 그런 말을 했으랴. 쯧, 매장문화가 어디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애수愛愁를 위함이던가.
註) 나이롱고동: 명주고동의 속어임. 발이 잠기는 조간대의 모래톱에서 소쿠리로 모래를 퍼담으면 함께 무더기로 올라오던 엷은 분홍빛이 감도는, 껍질에 석류알 같은 검은 점이 박혀 있는 동글납작한 고동 . 삶아서 속을 까먹으면 맛이 좋았음. 고동의 빛깔이 명주처럼 곱다 해서 명주고동이라 함.
10.
건어물시장의 상전은 아무래도 멸치라 불러야겠다. 해산물 중에 밑반찬으로 오랫동안 그리 흔하게 우리들의 식탁에 오른 것은 멸치밖에 없을 것이다. 멸치는 조리거나 뽁는 세멸, 고추장에 찍어먹는 중멸, 다시국물을 내거나 젓갈을 담는 대멸로 크게 나눈다. 봄에 많이 잡히는 살이 두터운 기장멸치는 회무침으로 유명하여 4월의 주말이면 대변항大邊港이 인파의 물결로 넘친다. 멸치는 산지나 건조상태 지방함유량 등에 따라 값이 천차만별이다. 멸치무더기에 세워 놓은 가격표 종이에 써놓은 죽방멸치란 이름이 눈에 띄었다. 죽방竹防 또는 죽방렴竹防簾이란 조석간만의 차가 큰 해역에서 대나무를 엮어 만든 발로 미로를 만들어 썰물 때 들어 온 대상 어종을 가두어 잡는 정치성 어구인데 주로 사천泗川이나 진해만鎭海灣 등지의 협수로에서 멸치를 잡는 데 사용한다. 죽방멸은 어체 손상이 적으므로 횟감용 활어로 많이 애용되고 건조멸이라도 상품上品으로 친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진열된 상품들을 기웃거리는데 누가 턱 어깨를 쳤다. 용마-이 아이가? 어데 간다꼬?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낮술에 얼굴이 불콰해진 키 작은 사내가 웃고 있다. 두 살 위인 세째 형이었다. 어-행님! 월맹(월명月明)인기요? 반가운 마음에 나는 덥썩 형의 손을 움켜잡았다.
용만用萬은 나의 어릴 적 이름이다. 웬 스님이 시주하러 사바세계에 내려왔다가 부잣집 시주에 생심하여 마당에 놀고 있는 나를 보더니 일언지하, 저 아이의 이름을 용만이라 지어라 했단다. 그래서 철이 들면서 그 스님의 영험을 믿고 나는 만물박사를 꿈꾸었다. 라디오밖엔 바깥세상을 알 수 없던 시절 동경올림픽을 중계하던 이광재나 임택근 아나운서는 나의 우상이었다. 조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지금 대한의 아들과 딸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태극기를 앞세우고 지금 막 이곳 동경 올림픽 스타디움을 들어서고 있습니다. 무료한 시간이면 동네골목을 누비며 그렇게 떠들고 다녔다. 아마 중학교 일 학년 무렵이었을 게다. 변성기가 오기 전까지는 이미자의 홍콩의 왼손잡이나 흑산도 아가씨 같은 노래도 신나게 불렀다. 또 만화에 푹 빠져 황순원의 '소나기'를 만화로 그려본 적도 있었다. 그 시절 대중의 인기를 얻는 스타라면 모두가 내가 살아있는 이유였고 목적이었다. 일개 가난한 범부일 뿐인 지금에도 내가 꿈꾸어 온 그 수많은 나날들이 있게 한 ,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스님이 마냥 그립다.
아이고, 행님! 손이 왜 이리 거친교? 선원들이 꾸무적거리면 내가 모야줄도 잡고 얼음도 퍼고 그란다 아이가. 행님은 꼬둘배(고등어잡이 배) 운반선의 항해사다. 바다에 있는 날이 별과 같아 아버님 제사는 물론이고 명절차례도 빼 먹기 일쑤였다.
월명이면 바다가 훤해 고기가 흩어지고 사리(大潮)인 열 다섯물이라 조류가 세어 건착巾着(선망旋網)같은 뜰그물 배는 조업을 못한다. 그래 월명이면 배가 부두로 들어오기 마련인데 요행히 이번에는 부산항에 닿았고 지금은 영도에 있는 회사에 들렀다가 낮술에 기분이 낭창하여 영도다리를 걸어서 넘어 오는 참이었다.
재작년 여름이었다. 그 형이 공동어시장 후문쪽 부두에서 얼음을 싣다가 길가던 나를 보고 고함을 질러 반가운 마음에 배에 올랐더니 고등어회를 맛보라 했다. 동지나해에서 잡은 고등어는 여름이었는데도 살이 야물고 기름이 꽉 찼다. 방금 전까지 살아있었던듯 싱싱한 고기를 배를 따고 뼈를 추리고 납삭하게 포를 뜨더니 커피포트로 펄펄 끓인 물에 살짝 담구었다가 초장을 듬뿍 발라 입에 넣었다. 어느 생선이고 기생충이 다 있다 아이가. 등뼈 주변에 실 같은 충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여주며 형이 한 말이었다. 하기사 명태필렛공장에서는 살 속에 박힌 충을 핀셋으로 집어내는 공정이 있지 않는가.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 충을 죽이는 이것을 일본말로 유비끼(湯引)라 했다. 그나저나 난생 처음 먹어 본 고등어회가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그 후로 한 동안은 부두에만 나서면 형의 배를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리곤 하였다.
행님, 오늘 나가는교? 아이몬 소주나 한 잔 하입시다. 아이다. 얼음 싣고 저녁에 나간다. 니 하는 일은 어떻노? 그저 그래예. 우짜든지 몸조심 하이소. 배 들어오거든 미리 전화라도 주이소. 휴대폰이 있응께. 오-야, 알았다. 형제간의 조우도 길 위에선 싱겁다. 말로는 전화를 한다 해놓고 형은 늘 가물치 콧구멍이었다.
11.
건어물전이 끝나자 인삼이나 한약재를 파는 상회들이 나왔다. 기로에서 나는 영도다리 밑으로 돌아가는 샛길로 들어섰다. 오른쪽 구석에 있던 다정횟집은 문을 닫고 간판도 내렸다. 십여 년 전 원양회사에 근무할 때 부산사무소가 이 약재상 근처에 있었던 관계로 부산에 내려오면 단골로 다녔던 집이었다. 항용 껍질을 벗긴 오징어와 전어나 게르치 세꼬시 등으로 모듬회를 시켜 소주를 마셨고 서너 시간씩 끓인 걸쭉한 매운탕으로 식사를 하곤 했었다. 그 당시 부산사무소를 지키던 회사동료들이나 물 좋던 선장들은 다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작은 배들이 휴식하고 있는 짧고 좁은 안벽을 따라 바람막이 종이 같은 포장집이 두어 개 놓여있다. 연탄불에 굽는 것은 물기 없는 전갱어였다. 소주 한 병에 천오백원 안주래야 이천 원쯤 받는 모양이다. 좁은 탁자 위에 팔을 굽히고 앉은 중년사내는 전갱어 굽히는 냄새만으로 소주를 석 잔이나 비운 듯 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내가 앉을 자리는 천상 여기뿐인기라예. 나를 쳐다보는 사내의 눈이 그렇게 말했다.
바다가 잇닿은 길 모서리 오른쪽엔 팽이처럼 생긴 작은 건물이 바닷물에 발목을 담그고 있었는데 부산항검조소釜山港檢潮所란 명패가 붙었다. 물때를 알아보는 관측시설인데 일을 안 하는지 인기척이 없다. 왼쪽 모퉁이로 접어드니 바로 영도다리가 눈앞을 가로막았다. 그 다리 밑으로 거제에서 올라오는 공기부양식 여객선인 데모크라시호가 천천히 다가서고 있었다. 다리의 제일 높은 교각사이로 기어드는 모습이 아슬아슬하다. 다리가 들리지 않은지 삼십 년이 넘었다. 저 다리 위에서 현인이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른 시절이 언제였던가. 헐고 새로 지어야 된다. 부산의 명물이니 그대로 두어야 한다. 일 년 넘게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보수유지로 결론이 났다.
바다를 마주한 손바닥만한 터에 구멍가게만한 철공소가 문을 열었고 그 옆으로 지붕이 낮은 점집이 두 개 나란히 붙어 있었다. 목화점집의 유리창에 붙은 누렇게 변색된 한지에 가는 붓으로 꼭꼭 눌러 쓴 언문이 옛스러웠다. 택일.신수 행선.가출.신수.병점. 이사.작명.육효... 그 흔한 사주관상이란 문구대신 육효六爻라니?
육효의 효爻는 주역周易의 괘卦를 이루는 부호이다. 효는 양효陽爻(하늘,남자)와 음효陰爻(땅,여자)로 나뉘는데 양효가 옆으로 누운 직선이고 음효는 그것을 두 토막으로 쪼갠 선 곧 -- 로 표시된다. 괘의 기본은 8괘(소성괘:건乾.태兌.이離.진震.손巽.감坎.간艮.곤坤)이고 하나의 괘는 양효와 음효,또는 양효나 음효만인 3개의 효로 구성된다. 주역의 괘는 기본인 이 8괘의 각각인 두 개씩을 조합하여 모두 64괘(대성괘)를 이룬다. 우리나라의 태극기에 쓰인 괘가 소성괘인 8괘 중 건.곤.감.이 4괘이다. 두 괘가 조합된 육효六爻는 간지干支로 이루어지는 육갑六甲(육십갑자 六十甲子)과는 다르다. 육갑은 생년월일시生年月日時를 담은 사주四柱를 바탕으로 음양과 오행五行(木火土金水)을 함께 다루는 세운역歲運易에서 쓰는 말이고 육효는 생년월일生年月日만 집어 64괘 중 한 괘를 택하고 그 괘에 대한 해석(괘사와 효사)을 바탕으로 한 주역점周易占을 일컬음인데, 아마도 점바치가 사주를 육효로 잘못 쓴 게 아닌가 싶었다.
유리문을 들여다보니 한복을 단정하게 꾸며 입은 늙은 아지매가 손님도 없이 혼자 덩그렇게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근데 감긴 눈 모양을 보니 장님이었다. 아- 육효가 맞구나. 봉사가 점괘를 짚을 때는 엄지에 검지.중지.무명지를 뗐다 붙였다 하지 않는가. 엄지에 손가락을 뗐다 붙였다 하는 것은 삼효三爻를 그리는 것이 아닌가. 예를 들어 삼양효三陽爻인 건乾의 괘는 엄지에 검지 중지 무명지를 다 붙이고, 밑으로부터 양효가 두 개고 상효가 음효인 태兌는 검지를 떼고 중지와 무명지를 붙이는 모양이다.
그때서야 어릴 적 많이 듣던 ' 다리 밑에 봉사 점보러 간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옛날엔 영도다리 주변으로 약재상이 흥성했고 서울의 미아리처럼 점집이 흔했었다.점바치들은 주로 함경도지방에서 피난 온 역술인들이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또 생각나는 것이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는 말이다. 이 말의 속뜻은 각설이들이 모여 살던 다리 밑에서 데려온 근본 없는 아이를 비유한 말일 텐데 내 어릴 적 어머니는 말 안 듣고 속 썩이는 우리들에게 항용 영도다리 밑에 다시 돌려보내겠다며 겁을 주곤 했었다.
다리 바로 밑 어둑한 곳에서는 허름한 노무자 행색의 사람들이 천 원짜리 지폐를 무릎 앞에 쌓아놓고 도리지꾸땡이라 불리는 화투판을 놀고 있었다. 꼬시래기 제 살 뜯어먹기라 했던가. 벌건 대낮에 화투장을 부서져라 쪼개는 그들의 손끝이 간절했다. 하루살이 날품팔이도 줄을 설 데가 없다는 말이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다.
여기는 부산의 명물인 자갈치시장의 입구입니다. 이 장소에는 대.소변을 금합니다. 급한 용무가 있으신 분은 가까운 지하 롯데쇼핑이나 시청의 공중화장실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중구청장 백. 육중한 교각 옆에 다가서서 바다에 오줌을 누려다 머리위로 나붙은 경고문을 발견하곤 쿡하고 웃음이 터졌다. 바닷가 다리 밑에 숨겨진 도시都市의 남루襤褸가 잠시 안쓰러웠다.
註) 괘卦: 걸어놓는다는 뜻임. 천지만물의 형상을 64가지로 걸어놓아 사람에게 보인다는 의미임. 고대중국의 주周나라(BC.1000 )의 주공周公이 완성했다는 주역周易이 공자(BC.500)이전에는 단지 점복占卜의 기능이었으나 공자학파가 주역의 경經(8괘,64괘,괘사,효사)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시도한 전(傳)을 전하면서 동양의 정신을 집대성한 철학(易經)으로 인식되어져 왔다. 점괘를 뽑는다는 말은 사주를 지어 자신의 괘를 택한다는 뜻임.- 신영복의 나의 동양고전독법에서 옮김
12.
다리 밑을 관통하여 계단을 올랐다. 옛 시청자리엔 롯데호텔을 세울 기반공사가 한창이었다. 남포동지하도를 건너 광복동거리로 나섰다가 내친김에 용두산공원을 오르는 에스컬레이트에 몸을 실었다. 영도 남중南中을 다닐 때 토요일이면 으레 짝꿍들과 영도다리를 걸어 넘어 이곳의 계단을 걸어 올랐다. 송도해수욕장의 보트놀이보다 더 자주 이곳을 찾은 것은 항구도시인 부산이란 곳이 그 당시엔 사춘기인 우리들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줄 마땅한 공간이 달리 없었던 탓이다. 공원에 올라 바다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탁 트였고 멀리 수평선 너머를 가늠하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장차 닥아 올 미래에 대한 꿈같은 희망으로 가슴을 설레었던 것이다.
바다를 혹은 창공을 배경삼아 그 때 찍었던 색 바랜 흑백사진의 주인공들을 다시 불러 모을 수 있었던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행방이 묘연한 친구들을 세상이 좋아 컴퓨터가 금방 수소문해 주었던 덕분이다.
종탑이 있는 광장엔 비둘기들의 극성이 여전했다. 사람들이 던져주는 모이가 싫다며 중앙동으로 내려가 식당골목에 진을 친 무리들은 결코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앉을 자리를 만들어둔 곳은 온통 일없는 노인들이 장기나 바둑판을 펼쳐놓아 접근할 수가 없다. 지하철이나 부산역에서 잠자리를 구하는 노숙자들도 더러 눈에 띄였지만 칠순 넘은 노인들 틈에서 커피를 팔고 있는 육순 넘은 할머니가 왠지 이십대 처녀처럼 예쁘다.
컨테이너부두가 새로 들어선 신선대쪽의 풍경은 날아갈듯 산뜻했다. 부산항은 내려다보아도 역시 아름답다. 10년 전 4월의 이른 봄날이었다. 겨울 내도록 얼음이 떠다니는 오호츠크해에서 러시아 어선들을 이끌고 명태를 찾아 사방팔방 쫓아다니다가 임기가 끝나 고려원양 소속 냉동운반선을 타고 귀항을 하던 차였다. 그 때 오륙도를 지나치며 올려다 본 부산항이 무척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바다에서 출렁이는 물결에 오랜 기간 몸을 맡긴 선원들이 뭍을 보면 환장을 하는 그 환희를 감안한다손 쳐도 부산항은 세상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미항美港이다. 남항과 감천만과 다대포를 훑어보라. 세계를 둘러보아도 바다를 이처럼 풍부하게 껴안고 있는 도시는 드물다. 낙동강과 금정산은 또 어떠한가. 부산은 바다와 산수山水가 조화롭게 어울린 천혜天惠의 항구도시다. 육이오 때 오키나와에서 항공모함으로 밤새 달려온 미국의 선군船軍들이 초량 뒷산을 빽빽하게 메운 전등불을 보고 깜짝 놀랐다가 다음 날 아침에 한 번 더 기겁을 했다는 얘기는 이제 먼 옛날의 우스개다.
그러나 영도다리주변을 보고 있노라니 공연히 머리에 김이 서리기 시작했다. 맨 먼저 눈에 거슬린 것은 영도다리 오른편과 영도대교 왼편으로 볼썽사납게 돌출한 아파트군이었다. 도대체 왜 저 자리에 고층 아파트를 짓도록 건축허가가 났는지 이해할 수 없다. 게다가 옛 시청을 허문 자리에 100층이 넘는 롯데호텔을 또 짓는다고 한다. 도대체 도시의 스카이 라인이라든지 미관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전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없다.
해양수산부에서 관리하는 항만지구가 있다지만 항구의 풍경을 관리하는 풍치지구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감천고개를 넘으면 복음병원이 있고 그 아래 바다를 가로막고 우뚝 선 탑스빌이란 거대한 타워식 건물이 있는데 버스를 타고 가다 그 건물을 보노라면 나는 늘 가슴이 답답해지고 속이 편치 않았다.
그 뿐이랴. 옛 시청 옆 연안여객선 터미널에서 부산세관으로 이어지는 수변에 조성한 수미르 공원과 마치 옮겨 심어논 나무처럼 기둥을 세워 지어놓은 을씨년스런 콘크리트 건물들을 보면 혀가 나올 지경이다. 쾌적한 수변공간을 조성하겠노라 지자체인 중구청에서 꾸민 작품이겠지만 세계적인 항구도시의 면모로선 초라하기 그지없는 졸작품이다. 진입로의 안내판도 없으니 시민의 휴식터로선 어림없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은 노숙자나 하릴없는 낚시꾼들뿐이다. 레스토랑식으로 지어놓은 그 건물들도 진즉에 입주자들이 다 철거하고 딱하게도 지금은 싸구려 임대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공무원들의 발상이 가여울 따름이다.
처음 시청이 자리를 옮긴다 들었을 때 나는 그 넓은 공간을 수변공원으로 꾸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관광객들이 좁은 중앙동 뒷골목에 버스를 세워놓고 광동식 요리로 유명한 중국식당에 들어와 허겁지겁 요기를 때우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게 주차시설이 여의치 않아 그러려니 짐작하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자갈치 회센터 앞 버스길도 관광버스가 안심하고 주차할 노폭이 허락되지 않아 일본이나 중국관광객들이 번개쇼핑을 하고 지나가는 광경을 자주 목격했다.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봐도 숨이 탁 트이는 쾌적한 공간이 없다. 혼자거나 여럿이거나 남의 눈치 안보고 마음껏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 도심都心에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그 자리에 숲을 만들고 갈매기와 비둘기를 부르고 바다를 향해 넓은 조망을 갖춘 센트럴파크를 꾸미길 바랐다. 겸하여 대형버스가 주차할 공간을 만들면 그 곳이 부산을 찾는 관광객들의 출발점이자 회귀점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만 되면 공원을 중심으로 한 관광코스를 네 개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이고 특히 적자운영으로 종적을 감춘 관광유람선 테즈락호도 다시 띄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부산의 심장부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는 그 요지를 롯데그룹에서 호텔을 짓는 부지로 사들였다는 기사를 접하고 나는 속으로 통곡했다. 먼 미래를 내다보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아름다운 항구도시 부산을 가꾸려고 머리를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저급한 개발논리가 부동산을 사들여 땅값을 올리는데 천재인 롯데그룹에 그만 그 땅을 팔아치운 것이다. 시청이 연산동으로 물러간 뒤 식당손님들이 물밀듯이 빠져나간 중앙동이나, 젊은이들과 패션의 거리였던 남포동과 광복동이 진즉에 서면일대로 그 기능을 빼앗긴 지금에도 이 거리의 상인들은 롯데호텔이 완공되면 다시 옛날의 상권이 살아나리란 기대에 부풀어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호텔은 객실 외에 쇼핑몰과 식당가와 기타 실내레저 시설 등 복합기능을 두루 갖추어 손님들을 24시간 호텔 안에 가둬 두려할 것이다. 물론 길거리 쇼핑을 즐기는 싸구려 관광객은 고급호텔에 얼씬도 않을 것이다. 결국 교통만 번잡해지고 부산시는 고액의 재산세와 교통혼잡비용을 거둠으로써 득의만면할 것이고 그 자리에 홀로 우뚝 선 롯데호텔은 두고두고 부산의 흉물로 남을 것이다.
중세의 역사가 삶의 현장에 생생히 살아 숨 쉬는 파리나 프라하나 빈이나 로마를 부러워만 할 것인가? 황량한 사막위에 지극정성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만든 인공의 도시, 세계적인 미항美港으로 손꼽히는 샌프란시스코를 가 보아라. 스스로 천박하다고 언제까지 이 도시를 제멋대로 헐고 뜯고 들쑥날쑥 뒤죽박죽 만들고 있을 것인가. 성지곡 아래 히야리야 부대 자리에 시민공원을 짓자는 주장이 있는데 공원의 효용성을 백번 찬양한다 해도 그 자리가 센트럴파크로서의 입지나 또 부산의 명소로서 인구에 회자되기엔 역부족이란 생각이 짙다.
그런 생각들로 짜증이 나 머리를 가로젓다가 공원을 내려왔다. 해가 지기 전에 사무실을 들러 퇴근하려고 광복동 거리를 직행하여 옛 왕자극장 무렵에서 자갈치방향으로 길을 꺾었다. 지하도를 건너 수협은행을 끼고 버스길을 건너 생선골목으로 들어서다가 순간적으로 발길이 멈칫했다. 승주칼국수와 거제횟집 사이에 ' 바다가 보이는 풍경'이란 간판을 보았던 것이다. 바다와 직각으로 선 건물이므로 바다가 보일 리 없는데 간판이 그랬다. 호프와 음료를 파는 경양식집인데 상호와 메뉴가 그 골목의 그림에는 생뚱맞은 느낌이었으나 가게이름을 지은 주인의 그 서정敍情이 반가워 잠시 감격했다.
2005.3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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