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5일, 경북 영주에 거처하는 J로부터 영암군에 내려왔다는 기별이 왔다.
왕인박사 추모 한시백일장에 참석하러 영주의 한시동우회 회원들과 버스를 대절하여 내려온 길이었다.
내려온 김에 일행들과 떨어져 나와 하룻밤 회포를 풀고 가겠노라 했다. 그와는 세상 읽는 눈이나 취향이 비슷하여 친구로 사귄 지 어느덧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J가 가족과 떨어져 고향인 영주에 홀로 독거하며 자연인으로 산지도 벌써 10년째다. 그가 한시에 주목하여 당송(唐宋) 팔대가의 시나 한국 한시백일장 장원시(壯元詩) 묶음 등을 필사하며 시간을 때운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불과 수삼 년 전이었다,
중국이나 한국도 이제 한시(漢詩)를 제대로 짓고 즐기는 사람들은 아주 희소하다고 들었다. 박정희 군사혁명정부이후로 한글전용시대가 오래 이어져, 70%가 한자인 우리말에서 한자 특유의 문자적 특장을 이용한 저서나 문학작품들이 지금은 거의 전무하고, 대학의 한문교수조차 한시는 함부로 지을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 알고 있다.
백일장의 심사가 끝난 오후 6시 무렵, 행사장에서 J와 만났다. 시상자 명단을 살피니 참방(參榜)에 그의 이름이 올랐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영주 한시 동우회 회원 7명이 장원, 차상, 차하, 참방에 두루 입선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과연 영주에 있다는 소수서원의 기와 맥을 이은 것일까? J는 이미 전국대회에서 차상에 등극한 전력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200여 명이 모인 이번 백일장에서 16위권에 드는 실력을 발휘한 것이다.
생선구경이 힘든 영주 사람을 나주에 있는 활어횟집에서 도다리 세꼬시 한 접시 시켜놓고 그로부터 한시수련에 관한 여담을 듣던 중,별안간 나는 심한 절망감을 느꼈다.
왜냐면 지난 설에 찾아온 친구가 절에서 심심할 때마다 옥편을 펼쳐놓고 한시를 읽는다는 얘기를 들은 후 나 역시 온유돈후(溫柔敦厚)의 덕을 기르고 치매도 예방할 겸 조만간 한시를 배우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나의 절망감은 한시작법의 기본이 한글로 시를 짓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었다.
김 시습은 4-5세에 할아버지의 등에서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이미 할아버지의 나이다.
J가 언급한 韻, 平仄(四聲)의 리듬,對句, 起承轉結,동자중복(同字重複)의 禁忌 등을 듣고 있노라니 수학시간에 미적분과 함수풀이에 진저리를 쳤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즉 한시작법이 마치 수학의 정석과 유사했다.
한자 고유의 四聲을 알고 그것을 이용한 平仄의 공식을 따르는 일을 어떻게 감당하며, 시의 골간이며 품격이라는 對句는 또한 어떻게 만든단 말인가? 그러므로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자유자재로 작시하는 일이 나로선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았던 것이다.
공자의 말씀을 따라 배우고 또 배워도, 아- 내게는 항차 10년의 세월이 아니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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