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 연휴가 끝난 뒤 첫 출근 날이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발신자 불명의 전화가 부재중 들어와 전화를 했더니 B의 음성이 튀어 나왔다. 느닷없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한 순간 머리가 먹먹했다. 그는 한 동안 내 기억에서 행방불명인 친구였던 탓이다.
그러니까 10년 전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전화도 메일도 지워버린 채 스스로 자취를 감춰버렸던 것이다. 그의 비현실적인 은거가 너무 일방적이어서 나를 포함해 그를 아끼던 지인들의 안타까움은 짜장 슬픔에 가까웠다. 특히 그와 40년 가까이 각별한 추억을 지녔던 J는 그가 사라진 뒤 수년간 백방으로 그의 행적을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별무소득인 채 홀로 그리움만 키우고 있었다.
경주 산내면 어느 산골 작은 절간에 의탁하고 지냈다는 그가, 설 연휴 때 무슨 일로 서울에 들러 오랜 숙제를 풀 듯 J를 찾게 되었다는데, 귀가 길에 경주 버스터미널에서 목포행 버스가 있음을 보고 이참에 나를 만나러 올 생각까지 했다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B는, 학창시절과 서울에서 학원 강사로 일했던 젊은 시절 내내, 별천지를 꿈꾸는 친구였었다. 그에게 인생이란 언제나 하늘에 뜬 구름이었고 애착할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는 한때 서울에서 재야의 여인과 살림을 꾸리기도 했지만 그 시간조차 그에겐 잠깐 스쳐지나가는 풍경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군대에 있을 때 이미 정관수술을 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 시절 태연자약했던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왠지 불안하고 초조했던 자들은 그의 주위를 맴돌던 우리였다. 그에게 친구로서 딱히 베풀 일이 없어 속수무책이었던 우리는 언제나 타인이었다.
나는 고3 시절 본의 아니게 그의 애인을 빼앗은 전력이 있다. 부산 K여고에 다니던 L이란 여학생이었다. 교정의 한 모퉁이에서 실연의 고통을 내게 토로하던 그의 억울한 표정을 떠올리노라면 지금도 입가에 웃음이 묻어나온다. L은 그가 애착했던 최초의 여인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그의 여자에 대한 본능적인 그리움이나 애착은 그 후로도 끊임없이 풍문으로 떠돌았다. 허무주의자 또는 염세주의자였던 그도 평생 어쩔 수 없는 한 마리 수컷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경주-부산-광주-나주의 먼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달려온 그와 무슨 얘기를 어떻게 나누었는지 사뭇 기억이 흐릿하다. 말뽄새가 스님보다 더한 친구였으므로 둘이 나눈 이야기의 대부분은 시골생활에 대한 나의 구차한 변명이었을 것이다. 1박 2일의 짧은 해후를 접고 그는 다시 바람처럼 떠나갔다.
떠나는 그에게 여행길에 읽으라고 최근에 펴낸 나의 소설집을 한 권 건넸을 뿐이다. 한 마리 늙고 외로운 수컷에 대해 나는 여전히 속수무책인 타인이었다. 그러니 B를 향한 내 마음은 마냥 초라하고 부끄럽고 애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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