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군사우편(2)

알라스카김 2008. 9. 24. 14:35

김한빛 상병에게,

네게로부터 온 군사우편은 내게 아름다운 술 한 잔 이상의 기쁨이다.
유선상으로 부자간에 뭐라고 뭐라고 안부를 묻느니 육필로 한 자 한 자
마음을 찍어가며 글을 쓰고, 또 그 글을 읽는 느낌이란...

빛아! 귀대하자마자 상병으로 진급하였다니 축하한다. 5월에 몇 차레
고된 훈련이 줄서 있다니 훈련을 통해 몸의 근력도 키우고,이참에 목이 타고 육체가 감내할 수 있는 피로의 극한점까지 가 본 자만이 체험하는
감개무량의 자신감도 얻을 수 있으리라 본다. 그래서 병장이 되고 계급장만큼의 관록과 여유가 생기는 진정한 고참이되는 법이란다.

이제 군 생활도 일년이 채 안남았구나. 제대하기 전에 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사나이들의 멋진 추억들을 많이 그리고 원없이 만들어 가길 바래. 부언하잔다면, 사회에 두고온 기억의 잔재들에 얽매이지 말고 군인으로서의 임무에 충만하고 선후배간의 조직생활에도 잘 융화하여 군문을 나설 때 배낭에 지고온 그 추억들이 장차 너의 평생을 떠받히는 원동력이 되었으면 해.

전에도 말했듯이 한가한 시간이면 독서나 사색을 통해 정서를 다듬기를 바란다. 아버지의 경우 젊은 시절 그런 스스로의 감정을 조율하는 시간을 소홀히 한탓에,마흔살이 다 되도록 좌충우돌 불안정한 삶에 스스로를 소모한 안타까움이 남아있어. 종교란 것에 의지하여 겸손함을 배우기도 했지만 그것은 하나의 방편이었을 뿐이고...지금에서야 어렴풋이 알 것같아.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 나를 비운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젊었다고 자만할 때의 내가 가진 지식이나 삶의 체험들은 슈퍼마켓에 늘려있는 잡화같은 것이었어. 남에게 전시하듯 술자리에서나 함부로 떠들어대는 만용의 도구였으며 소인배의 자기 합리화를 위한 악세사리였던게야. 모두가 내 자신을 냉정하게 응시하지 못한,그런 시간을 제대로 가져본 적이 없었던 삼류지식인의 과오였으며,곧 사색의 결핍이 그 원인었다고 생각해. 예를 들어볼까? 쑈펜하우어가 "결혼을 해라.그러면 후회할 것이다. 결혼을 하지마라. 그래도 후회할 것이다."라고 말했어. 젊었을 때
나는 한동안 그의 말을 보도의 전가처럼 믿었고 결혼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편이라고 생각했던 게야. 독서를 통한 지식은 개별적이며 단편적이므로 사색을 통해 그것을 자신의 교양으로 발전시켜 나가야한다고 생각해.

너희 세대는 아버지의 시절과는 또 다른 환경이란다. 삼 십년 전의 그 때는 정치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제대로 지켜지지않을 때였고 그런 억눌린 세상을 타파할 독립군같은 지성도 없었어. 의지가 굳은 자는 수색견을 피해 도주하면서도 전봇대에 수배전단으로 살아있는 양심을 알리는 정도였고 ,대부분은 술과 노래로 풍진 세상을 윤간하고 말았어. 그래서 지금의 한국인들은 가치의 혼란에 빠져 살아간다고 생각해. 한 세대에 이르는 세월을 아버지 세대는 부끄럽게 살아온 셈이야. 나는 너희가 희망이라고 생각해.

몸성히 훈련을 마치고 다음 휴가 때 또 보자꾸나.

2003.05.20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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