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늙은 마도로스의 편지

알라스카김 2008. 9. 25. 09:17

미애! 오랬만에 소식 전한다. 휴대폰으로 손가락 꾹꾹 눌러가며 메일를 보내다니...중학생들 같은 치기가 생각나 그만둔지 오래여. 네게 안부를 묻지않은것도 벌써 이태가 지났구나. 니가 남편을 여의고 주변도, 니 마음도 황량할 때 힘들어하는 니 모습을 보고 얼마나 안타까웠던지..

러시아의 오호츠크 바다위에서 명태와 씨름을 할 시절 ,네게 몸부림치듯 편지를 보낸적이 있었지. 그땐 니가 나보다 후훨씬 건강하게 살고 있었고 나는 얼어붙은 바다위에서 절박감에 매일밤을 뒤척치던 때였어.
잘게 부서러진 유빙을 헤집고 명태를 찾아 배가 사방 팔방 맴돌때 보드카를 홀짝이며 내가 응시했던 것은 깨어진 유빙위에 호롯이 앉아 먹이를 되새김질 하던 바다표범은 아니었어. 고적한 삶에 지친 내모습이엇을 거야.

어느 흐린날 목로주점에 앉아있겟노라던 중년 시인의 관조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먼,그저 젊음의 욱일하던 열정도 사라지고,내가 꿈꾸었던 인생이 이게 아닌데...하는 그런 사십대 남자의 퇴락한 허무였을거야. 어깨를 두드려줄 친구도 ,이불자락을 덮어주며 곁에 함께 살고있음을 무언중에 깨우치던 마누라도 없는, 막막한 얼음바다와 비릿내나는 명태와 쌩쌩거리는 칼바람만이 살아있는 흑백영화의 흐린 화면같은 오호츠크해였어. 나중에 니는 내가 엄살을 떤다고 했던가.?

그 항해를 마치고 나는 바다를 떠났어. 내가 진정으로 살고싶은 것,아니 내의지로 만들어가는 삶을 찾기위해서였어. 일년을 꼬박 놀았지.그때 너는 남편의 간병으로, 바쁜 직장일로 슴픔과 기쁨이 비빔밥이 된 표정으로 살고 있었지. 그러고 보니 남편과 사별한 지도 벌써 십 년  세월이네.

년전에 고려대병원 근처에서 만나 너에게 술 한 잔 사달라고 하던 밤,나는 니를 꼭 한 번 안아주고 싶었어.니는 그걸 눈치라도 챘는지 군대갈 아들을 불러 내었었지.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들면 낭만도 없어지고 귀찮은 일은 가급적 피해가는 법. 우리가 처녀 총각으로 만나 주거니 받거니 한 추억들은 우정이었다고 믿자. 내가 그날 그런 생각이 들었음을 지금 고백함은  니를 위로해주고 싶은,손을 내밀어 네 손이라도 따뜻하게 잡아주고 싶은  연민의 감정이 솟구쳤던게야.

내의지로 살아보겠다던 지난 십 년의 세월은 부도수표처럼 무책임했고 가족들에겐 우울한 시간들이었어. 바다로 다시 떠나고 싶은 충동도 없지않았으나 원양어업이 절단이 난 후라서 유일한 도피처도 사라지고 말았지. 어쩔꺼나,목숨부지하며 바람같은 꿈들은 접고 ,죽은 양물처럼 살아가는 것이.근육은 단련할 수록 기억력이 배가되어 ,중추신경의 지령이 떨어지면 즉각 반발한다고 하니... 죽은 것도 집념으로 살려보겠다고 ,그런 희망이라도 지니고 살아야겠다.

장성한 아들들이 머지않아 네게 훈장이되어 니가 살아온,살아갈 날의 보람이 되어주겠지. 옆구리가 허전하다고 많이 먹지말고 옥체보전하여 아름다운 친구로 계속  살아주려마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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