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강원도 주문진 출신이다. 고향에서 수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곧장 수부(水夫)가 되었다. 처음에는 돈을 벌어 가난을 씻겠다는 각오였겠으나 차츰 그의 꿈은 황금알을 낳는 원양어선의 선장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 원양어선의 경우 수산대학 출신들이 거의 선장 자리를 독점하였으므로 고졸출신들은 실습 항해사로부터 시작하여 10년 넘게 선원생활을 해 보았자 선장자리를 얻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처럼 요원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항해과 출신들은 연근해의 중소형어선에 취업하는 예가 많았고, 원양어선일 경우에도 재주가 뛰어난 경우에 한해 참치연승이나 오징어채낚이 어선 등의 선장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짐작컨대, ‘80년대 후반 내가 모 원양회사의 수산부장으로 재직할 무렵 그는 부산의 자갈치를 무대로 돈이 되는 배를 타기 위해, 또는 선장자리를 얻기 위해 동가숙 서가숙했을 것이다. 언젠가 그가 "그 때 내가 선생님을 알았더라면 진작에 포클랜드 오징어배 선장노릇을 했을건데...."라고 말하며 좀체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을 길 없었던 억울한 과거를 되뇌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를 알게된 것은 세월이 훌쩍 지난 2007년 봄이었다. 우연한 계기로 그 해 부일신춘문예 해양소설부문에 당선된 후 내가 해양문학협회 회원이 되어 부산문단의 일각을 기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그 해 가을 ,그는 바다에서 쓴 시로 일약 부산문협이 주관하는 부산시의 한국해양문학상의 대상을 탔던 것이다. 그는 바다에서 조업중이어서 시상식때 수상소감은 그의 부인이 대독했다.
나이 50을 넘기고도 그가 있을 곳은 여전히 바다뿐이라 미드웨이해역에서 꽁치봉수망 배의 선장으로 일하면서 끈질기게 매달려온 문학에의 열정도 대단했지만 ,그가 상재한 시가 바다에서 갓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와 나는 그를 한국의 해양문학의 장래를 짊어지고 갈 좋은 동반자로 여겼었다. 그는 대상을 타기 1년 전쯤부터 울산에 거주하는 정일권 시인에게 시를 사사했다고 들었다.
시로 큰 상을 받은 후에는 자칭 한국 해양문학의 태두라는 천금성 선생을 찾아다니며 소설공부를 한다고 해서 뜨악했는데, 놀랍게도 그는 이듬해 한국해양문학상의 소설부문 우수상을 탔고, 그 다음해는 서울 소재 해양문화재단의 해양문학상 소설부문 우수상을 받았는가 하면,올해인 2011년 여수해양문학상과 부일 해양문학상을 잇달아 움켜쥐었던 것이다.
그의 문학적 열정에 대한 찬사는 여기서 잠시 접어 두자.
그가 흘려온 귀한 땀의 소산은 부산문단에서는 이미 놀라움과 질투와 시기의 대상으로 부상 되었다. 부산문단에 진작 이름을 올린 선배들(해양소설공모에 실패했던 일부 기성작가들)은 십중팔구 그들이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해양이란 불가근의 소재를 한탄하면서, 문학적인 품격보다는 현장성이 먼저 중시되는 해양문학이란... 천상 뱃놈들이 쓰는 글이라고 자위할 뿐이었다.
나는 그가 해양문학 현상공모의 문을 두드릴 때마다,글을 써도 발표할 지면을 제대로 구할 수 없는 동병상련의 현실을 이해하면서도, 작품의 질에 대한 고민을 해줄 것을 몇 차례 권고한 바 있었다. 그의 소설들을 대할 때마다 , 그가 누비고 다녔던 세계의 바다와 무수한 항해경험의 편린들이 소설적 구성요소를 갖추고 있다고는 하나 작가다운 주제의식이 떨어진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바다에 얽힌 특별한 기억의 반추가 아닌 작가 특유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주문했던 것이다.
지지난 해, 나는 부산을 떠나 전남 나주로 생활근거를 옮겼었다. 그래서 부산의 문학동호인들과는 한동안 적조했다. 그러다가 지난 12월 초 오랫만에 황을문 선생님(전 해양문학가 협회 회장이자 해양대학교 교수 정년퇴임)의 전화를 받게 되었는데, 마침 송년회 모임도 있고 해서 나는 부산 출행 때 시간을 내어 선생님을 만나뵙기로 약속을 하고 그 자리에 특별한 손님으로 그를 초대했었다. 세 사람이 공유하는 지난 날의 짧은 추억을 되새기고 그의 부일문학상 당선도 축하하기 위함이었다.
일요일인 그날 오후 세 시 무렵 ,우리 세 사람은 자갈치에 있는 꼼장어구이 집에서 마주앉았다. 그 자리에서 황 교수님은 “ 앞으로는 자수성가 하시오.”란 덕담을 세 번이나 했었다. 소설로서 잇단 수상경력이 붙게 되자 일각에서 그의 작가적 역량보다는 천금성이란 노회한 작가가 그의 뒤를 봐주었을 것이란 치기어린 말들이 나왔을 것이고 황 교수님도 듣는 귀가 있어 앞으로는 그런 여론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염려에서 한 소리였다고 나는 짐작했다.
그의 장래를 생각하며 나도 한 마디는 해야겠다 싶어,“ 현장성이라면 겨눌 사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그러나 작품으로서의 문학적 품격은 고민해야 할 점이다.”란 고언을 했는데 그는 당장 ,“나는 누구에게라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너희가 써보라. 쓰고 난 뒤에 말해라.” 라고 받아쳐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잠시 후 그는 더 할 말이 없다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일반문학으로 갈겁니다.”
내 귀에는 그 말이 “이제 오징어는 잡을 만큼 잡았으니 고래를 잡으러 갈랍니다.”라는 어선 선장으로서의 만용처럼 들렸다. 몇 가지 수상경력을 마치 자신의 문학적 성취로 과신하지 않았다면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도 아니라면 해양양문학 쪽의 상금은 다 한 번씩 탔으니 이제부턴 일반문학 쪽을 사냥하러 가겠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오직 해양문학의 창달을 위해 여기까지 왔노라던 황 교수님이나 그와 더불어 장차 해양문학의 중심에 서겠다며 동지적 연대감을 품었던 내게 그의 결의는 실로 황당한 선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현재 해양대학교에서 해양문화에 관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두어 곳 대학을 다니며 이런 저런 학점을 따 강원도의 모 대학으로부터 학사자격증을 받았다는 얘기는 그 전의 일이다. 내가 아는한 한 그는 일년의 반은 바다에서 어로와 문학작업을 병행했으며,일년의 반은 육지에서 만학에 전념해 왔다. 그런 그의 행적을 읽을 때마다 나는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그가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로 오랫동안 패배자의 인생을 살아왔으므로,문학 또한 실력에 걸맞는 명성을 얻으려면 무엇보다 학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세상적 가치에 스스로 휘둘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선장도 되었고 신예작가로서 여러가지 상도 받게 된 지금,그의 꿈은 과연 무었일까? 그는 과연 노력하는 천재인가 신분상승에 집착하는 속물인가?
다음날 출근을 위해 나는 나주로 귀환할 차표시간을 떠올리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오만한 언동에 열을 받았는지 술에 취했는지 잠시 머리가 어지러웠다. 배웅할 의사도 없는지 그는 자리에 앉은 채 물끄러미 나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순간 나는 게걸스럽게 아가리를 벌리고 물위로 뛰어오르는 상어 한 마리를 보았다.
2011.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