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을 앞두고 불의의 낙상을 당했다. 퇴근 무렵 회사건물을 나서다가 계단에서 발이 꼬여 그 자리에 주저앉은 뒤 119에 실려갈 때까지 그러고 있었던 것이다. 살얼음을 밟은 오른쪽 다리가 순식간에 왼쪽 허벅지 아래로 빠져들면서 그 위로 체중이 실렸는데 일어설 수가 없었다. 가까운 종합병원으로 실려가 엑스레이를 찍어 보니 무릎 바로 위 대퇴골이 부러져 있었다.
수술전후의 짧고도 긴 고통의 시간, 나는 하나님을 떠올리며 내 죄가 무엇인지 헤아려 보았다. 신년 들어 담배를 끊은 것은 잘한 일이나 일상적인 반주와 늘 자만하여 남들 앞에서 목이 곧은 버릇은 여전히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이었다.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시:38-4)
회개를 거듭하던 어느 날, 우리 병동 수간호사가 방문하여 혈액검사 결과 헤모글로빈이 부족하므로 수혈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뼈가 빨리 붙으려면 수혈은 당연해 보였으므로 그러마고 했다. 정작 두 개의 피봉지를 들고 와 수혈을 하는 날, 설마... 하며 간호사에게 물었다.
“ 가져온 저거, 혈액형이 뭐요?”
“ B형입니다.”
“ 예-엣 ? 내 피는 AB형인데요.”
나는 물론이고 주사바늘을 들이밀던 간호사도 깜작 놀라는 얼굴이었다.
혈액형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 시절로 기억된다. 학교에서 신체검사를 받은 뒤 무슨 종이쪽지를 하나 받았는데 그때 머리에 각인된 나의 혈액형은 AB형이었다. 젊은 시절 누구나 한두 번 경험했을 헌혈조차 해본 적이 없고 , 내 평생 무슨 일로 수혈을 받아본 일도 없었으므로 무려 반세기 가까이 나는 나의 혈액형이 AB형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담당 간호사가 급히 달려 나가더니 혈액검사표를 지참한 임상병리학과 인턴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딱하게도 과학적 증거 앞에 내가 우길 건덕지는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수혈은 시작되었고,낯선 피가 몸속으로 스며든다는 생각에 처음에는 잠시 불안했으나 나중에는 마치 넋나간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스스로 확신해왔던 나란 존재는 간 곳 없고 갑자기, 지금까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온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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