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병상일기(2)

알라스카김 2015. 3. 11. 14:52

내가 혈액형 때문에 받은 충격은 마치 이(李)씨 핏줄인 미혼모 신생아가 김(金)씨 집에 입양되었다가 반세기나 지난 뒤에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것과 비슷한 심정이었다. 이 비유가 너무 비약적이라고 한다면, 나는 나의 정체성에 대한 그릇된 정보와 함께 수십 년을 착각속에 살았다는 자아상실감이라고 해야겠다.

 

  혈액형에 따른 성격론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일본인이 지어낸 통계적인 가설일 뿐이라는 얘기를 오래 전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역학에서 다루는 사주팔자도 통계에 근거함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다재다능하고 예술적 기질과 재능이 있다. 다만 끈기가 부족한 게 흠이다’라는 AB형의 정의에 눈이 혹했던 중학생이 어찌 자신의 혈액형에 의심을 품을 수 있었겠는가. (최근까지 나는 스스로 다재다능한 사람이며 여태껏 한 우물을 파지 못해 대성하지 못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새삼 인터넷에서 B형의 성격을 알아보았다.

다정다감하다. 표현력과 어휘력이 뛰어나고 솔직담백하다. 사랑에 잘 빠져 사랑의 상처가 많다. 성급하고 끈기가 없다. 자아도취나 착각에 자주 빠진다.

  AB형의 특징이 어떤 성향이나 가능성에 대한 설명이라면 B형의 그것은 이제 보니 내 삶의 실제 사례를 열거한 것이나 다름없다. 놀랍게도 자아도취나 착각에 잘 빠진다는 말은 내게 아직도 진행형인 특징인 것이다.

 

  이쯤에서 나의 혈액형이 B형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랑의 상처(?)쯤은 감수하겠다. 그러나 부디 자아도취나 착각에 빠져 일을 그르치는 역사는 내게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

 

 

2015. 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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