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사촌 누이에게
어제 이모님 뵈었다. 건강하시다면서 낮부터 방에 누워 계시더라.
귀가 잘 안 들려 전화도 함부로 못하고 불편하신 게 많더구나.
거제면에 사는 둘째 사위가 가끔 들러 집 정리를 하는 갑드만, 끼니는 혼자 어떻게 때우시는지
궁금하고 안타까운 생각만 가득하더라.
자꾸만 동생 얘기를 하시데. 내가 다시 오라캤다. 싸아가면서 같이 살자캤다.
-잘 다녀가셨는지요?
엄마 뵈러 형제들이 다 가셨다니 감사합니다. 몸이 불편한대도 먼 길 다녀가시느라 수고가 많으셨군요.
그래도 이번에는 둘째 오라버니를 제외하고 형제들이 다 모이셨다는 소식 접하고 기뻤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빼다 박은 사촌도 보셨으니...지나간 일 용서해 주시고 넓은 맘으로 대해 주시길 저는 소망할 뿐입니다.
건강 속히 회복하시고, 올 여름 더위도 잘 견디시기 바랍니다. 그럼 길순 언니 딸 혼인식에서 뵈어요.
또 지나가는 말로 울 엄마 얘기도 하시더라. 너거 엄마캉 내캉 둘만 있을 때다. 이웃모실 어른이 집에 와 그라데. 저 재지바들이 아재 딸이요. 울 아배가 글타쿠이 그 사내가 너거 엄마를 갈키면서 재지바 인물이 참 좋소 그래.
저-기 인물만 그렇지 별 수 없어요. 울 아베가 그라데. 별 수 없다고...
이모님 그 말끝에 가슴에 피멍이 하나 엉키는 기분이더라. 억울하고 서러운 멍울 하나 내 속을 후비더라.
-' 부모 말이 문서다.'란 옛 말이 있잖아요. 어릴 적 부모한테 들은 말이 평생토록 가슴에 남아 그 사람의 삶을 좌우하는 것을 두고 이른 말이 아닐까요?
울 이모님은 어찌 그리도 곱고 순하기만 하셨던지..., 또 나는 예나 지금이나 왜 이리도 못 살아 엄마 같은 이모님께 제대로 효도도 못해드렸는지... 못내 가슴이 아픕니다.
이모님께서도 생전에 외할아버지가 했던 그 말을 제게 자주 되뇌이곤 하셨지요. 얼마나 상처가 깊었을지...저는 이모님 삶을 돌아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순아 큰 언니한테 받은 고통도 바로 그런 치명적인 말들 때문입니다. 불과 20분 거리에 사는 동생이 아프고 굶어서 다 죽어가는 상황인데 ,전화를 해선 다짜고짜 큰 소리로 역정을 부리더군요.(내가 무슨 도움을 청한 것도 아니었어요.)
“똑똑해도 별 수 없네!”
“니는 귀가 그리 생겨가지고 못산다!”
“왠만큼 따지는 집에서는 니처럼 귀가 그리 생긴 사람은 며느리로도 안 받아들인다.” 등, 등 비수같은 말을 내뱉곤 했었지요.
물론 평생 가난하게 사는 동생이 마음 아프고, 또 남 앞에 부끄럽기도 해서 그랬겠지만서도요.
어쨋건 저는 살아가면서 이모님 생각을 자주 합니다. 제가 힘들고 아플 때마다 엄마보다는 이모를 더 닮았다는 그런 생각을요.
내가 억울하다고 한 말은 울 엄니가 한 평생 아픈 속을 혼자 끌어안고 사셨기 때문이야.
그런 엄니를 나는 또 내 사정땜에 잘 모시지도 못한 채 일찍 여윈 것이 천추의 한이 되었다. 니는 어찌됐든 후제 억울해서 울지 않았으면 한다.
- 다 지나간 일입니다. 한스러워도 어쩔 수 없는 일. 자식들을 무심코 키웠던 옛 어른들이었거나, 자신의 삶에 반항하지 못하고 살아오신 이모님의 곱고 여린 성품이었거나,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환경이었거나 다 지나간 일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모님께선 세상 그 누구보다도 크고 깊으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 엎디어서 그 아픔을 다 고하셨을 터이니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결코 외롭지 않으셨을 겁니다.
외람된 말이지만, 이제는 남은 형제들끼리라도 화목하게 잘 사는 것이 돌아가신 분께 효도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억울해서 운 적은 없습니다. 기현이 아버지로부터 떠난 후로는요. 오지랖 넓게도 저는 이타적인 삶을 지향하기에 더 베풀지 못해서, 그게 아파서 늘 웁니다. 이 세상 한 켠에서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과,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연약한 동물들에게 더 많이 베풀지 못해서 울 뿐입니다.
큰 언니가 형제로서 서운하면 아픈 기억이 사라질 때까지 안 만나면 그뿐이라 생각합니다. 저와는 추구하는 것도 다르고 사는 방식도 틀리니까요.
이모님을 그리워 하시되 마음 아파하진 마십시오. 저의 글 ‘길 잃어버린 사람’에서 보시듯 이모님께선 이미 천상의 별지기가 되셨으니까요. 이 세상에서 가장 순하고 곱게 살다간 사람만 할 수 있는 별지기 말입니다.
그런가. 이번 기일에는 성경에서 형제들끼리 화목하게 살라는 말씀만을 골라 읽었는데 부덕이도 찾아오고 해서 기뻤다.
이모님 얘기를 또 해서 그런데... 누군가 곁에 있어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읽었어. 부엌에 가스가 떨어져 귀순이 누나를 찾았던가 봐. 몸이 성치 않은 누나가 영문도 모르고 이모님 드실 약재를 들려 다정이 엄마를 보냈다나. 이모가 그새 가스얘기를 잊고 만 거야.
끊어진 얘기는 내가 연통해 주었다만 이모님 상태가 온전치 않아 돌아오는 내내 걱정이 따르더라.
-오빠, 엄마가 저보고 오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재작년 일과 현재를 섞어서 말하는 겁니다. 치매증상의 일부이지요. 과거와 현재를, 자신의 생각과 희망을 온통 뒤석어서, 현재 일어난 일로 생각하고 인정하는 겁니다.
얼마 전에 덕순이 언니가 전화를 내어,
“네가 고모님한테 택배보냈나?” 하고 묻더군요.
엄마 말씀인즉,“짜야가 택배를 보내서,안방과 화장실 사이에 나뒀는데,없어짔다. 너거가 혹시 가갔나?‘
그러시더래요.
전화를 끊고 곰곰 생각해보니, 제가 3년 전에 그러니까 거제로 내려가기 전에 물청소기를 보낸 게 생각나더라고요. 엄마는 그 일을 지금 일로 착각하고, 없어진 것을 조카들에게 물었던 겁니다.
중요한 것은 저는 지금 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작년에 제가 집 문제로 갈 곳이 없어 고통을 받을 때도 뒷집 숙모님이 제게 전화를 하셔서, “네가 그만 도로 살러오면 안 되겠나? 엄마가 니를 불러오고 싶단다.” 하시더만 며칠 뒤에는 , "무슨 변덕인고 , 혼자 사는 게 편타시네.” 그러더라구요.
“짜야,니 내캉 살자! 혼자 못 살겠다.”
3년 전 엄마의 그 전화를 받고, 학교 일을 내던지고 곧장 거제로 내려갔지 뭡니까. 결과는 상처 뿐이랍니다.
언니들은 어쩌구요, 제가 엄마 곁에 눌러앉을까 봐 은근히 걱정이었던 모양입디다. 큰 언니는 전화에 대고 다짜고짜 호통만 치고 거제 작은 언니는 ‘엄마 때문이라면 오지마라!"라 하더군요. 덧붙여,‘엄마는 지금처럼 혼자 사는 게 더 낫다. 날 추우면 우리가 번갈아 가며 모시면 된다.’는 말도 했구요.
그러니 제가 어찌 혼자 맘으로 다시 내려갈 수가 있겠습니까? 제게 딸린 식구(짐승)가 한 둘이 아닌데요. 오죽했으면 부덕이가 임시거처로 삼았던 제주도로 살러갈까 생각했겠습니까. 큰 언니의 막말에 서러워하는 저와 한 시간 넘게 전화통을 붙들고 통곡을 하던 기현이가 그러데요.
“이제 어머니 화 풀릴 때까지 이모들도 보지 마세요!”
결국 아들의 도움으로 지금 살고있는 집을 구한 거랍니다.
엄마가 지난 날 저를 구박한 것은 이해하지만, 언니들 특히 큰 언니는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니 그라지 마라! 니가 동생이라꼬 면면해서 그랬지 니를 무시해서 그런 게 아니다.”
최근 저희 사촌 상가에서 조우했을 때, 빈소에도 아랑곳없이 내던진 말조차 제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울 엄마뿐만 아니라 이 땅의 많은 노인들이 온전치 못한 몸으로 혼자들 사십니다. 다만 자식들이 버젓이 있는데도 혼자 사시면서 이웃의 조카들을 귀찮게 할까 봐 그게 걱정입니다. 장차 이웃들의 수군거림도 자존심 상하는 일일 것입니다.
내가 그 사정 어찌 다 모른다 할 수 있겠나. 다들 제 언덕에 서서 바로보는 풍경이구나,
네 엄니도 울 엄니처럼 별 수 없는 인생일런가... 맘 편히 먹고 세월의 기약에 맡겨보렴.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거라.
⍟ 후기: 지난 5월 25일 어머니 기일을 맞아 형제들과 거제의 동부면 학동재를 찾았다.
어머니의 뼈를 뿌린 숲에서 추도예배를 가진 후 외갓집 마을에 독거중인 아흔 살 되신 막내
이모님을 뵙고 온 뒤, 그 이모님의 막내딸과 휴대폰으로 주고받은 문자를 글로 옮겨보았다.
장차 기회가 닿으면 단편으로 꾸며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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