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소설

블라디보스톡의 추억들

알라스카김 2017. 3. 30. 09:05


레닌과 트로츠키가 소비에트라 이름 지은 공산당 일당독재는 70여 년 만에 그 막을 내리고 말았다. 국제공상당 그룹의 열렬한 이상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가 일찍이 소비에트 인민의 삶을 형해화(形骸化)한 삶이라고 예견했듯이, 극동의 도시 블라디보스톡의 낡고 허름한 풍경 또한  내겐 마치 해골을 대하듯 언제나 음산했던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블라디보스톡의 추억들(1) - 놔리샤

 

  어제 저녁 쁘레오브라쟈니예에서 돌아와 블라디보스톡 호텔에 하룻밤을 묵었다. 로얄층인 5층으로 하룻밤에 미화 40불을 받았다. 러시아 물가로 턱없이 비싼 요금이었지만 외국인에게 적용하는 요율이라 억울하단 소리도 하지 못했다. 현지인에겐 공식환율로 5불 미만이었고 중국인은 예전에 같은 공산주의 시절 맺은 협정이 작용하는지 20불 정도를 받았다.

 

9시쯤 레닌광장- 이차대전 승전탑이 있는, 2년 전 달리버의 영어통역관 블라디미르의 검은 털모자를 빼앗아 쓰고 바다바람을 쐰다고 서성이었던 곳- 부근의 여행사에 가서 사할린행 비행기표를 끊노라 시간을 보냈다. 달러를 지불하는 외국인 전용창구에서 매표시간을 기다리느라 2시간을 허비했으나, 사할린 영공에 안개가 심해 비행기가 뜨지 않는다고 했다.

 

 짐가방을 다시 호텔에 풀어놓고 오후에 얼어붙은 아무르 강의 하구로 내려갔다. 바닷물과 합수되어 염도가 떨어진 바다는 꽁꽁 얼어 있었다. 빙판을 염두에 두고 얼어붙은 바다를 향해 조심조심 걸어 나갔다. 구멍을 파고 낚시를 드리운 강태공들 곁으로 다가가 얼음의 두께를 살폈다. 그 두께가 60센티가 넘어 보였다. 바다에 엎드린 강태공들의 수가 어림잡아 300명쯤이나 되었을까 몰라. 사업장 단위로 자립경제로 전환된 후 조업률 감소와 자금난 등으로 감원되는 바람에 실업자들이 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세월은 명태쿼터를 사러 왔던 2년 전보다 더 황량하고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대구 새끼,대구와 명태의 잡종인 '나와가', 정어리, 시샤모 등이 낚시에 걸려 올라왔다.  

 그래도 사람들인지라 저들도 따뜻한 가슴은 있어, 신년의 첫 주말을 이용해 가족들을 이끌고 낚시꾼들을 기웃거리며 빙해(氷海) 위를 산보하는 모습들이 정겨웠다.

 

  호텔로 돌아온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오리털 파커 덕에 오한은 없었으나 귀와 발이 꽁꽁 얼어 스팀기운에 더워진 방에 앉아 있자니 가려움이 일어났다. 귀를 덮는 털모자가 필요했다. 구두도 벗어 버리고 겨울용 가벼운 등산화로 바꿔야 했다식당으로 내려가기가 싫어 쁘레오브라쟈니예에서 얻어온 연어알 통조림과 빵, 임연수어 절여 말린 것으로 저녁을 때웠다. 쉬이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가방에서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꺼내 읽었다.

 

 밤 열시나 되었나 보다. 난데없이 전화벨이 따르릉 울렸다.  

웬 전화인가 싶었다. 사장에 버금가는 사업의욕을 발휘하는 K 이사일까? 통화상대를 구하는데 그는 주야를 불문했고 계통과 지휘고하를 막론하여 종종 상대방을 곤혹케 하는 사람이었다.  

전화기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뜻밖으로 여자였다.  

" 미스터 김, 만나고 싶은데 방으로 찾아가도 될까요? "  

사무적인 어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보험사 아주머니들같이 상대가 누구든 작정하고 안겨드는 어투는 더욱 아니었다.  

" ...누구신지? 저를 아시는 분이예요? "  

" 호 호 호! 만나보시면 알게 됩니다. 그럼 잠시 후 뵙겠습니다. "  

첫 마디에 러시아 여자임이 분명했다. 여자의 영어는 어눌하고 느렸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녀가 내 성을 호칭하였으므로 괴이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옷을 챙겨 입었다. 곧 노크소리가 울렸고 문을 열자 중키의 금발머리를 한 여자가 불쑥 들어왔다. 여전히 궁금해 하는 나를 여자는 싱글거리며 바라보기만 하였다.  

" 뭐 마실 거라도...? " 

기가 찰 노릇이었다. 사무적인 일로 방문한 사람이라면 자기의 소개부터 하는 것이 예의일 터였다. 나는 꼬마 냉장고를 열어 캔 맥주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네며 의자를 권했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 나는 그녀의 다음 행동을 주시했다.  

" 저는 802호에 투숙하고 있어요. 이름은 놔리샤. 담배도 있으세요? "  

그 순간 그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냉큼 뜯지 않은 빨간색 말보르 한 갑을 가방에서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조그만 응접테이블의 의자에 앉아 맥주를 한 입 홀짝 들이 마신 후, 담배에 불을 붙여 한 입 길게 연기를 내뿜던 그녀가 잠시 허공을 향해 침묵했다. 그녀의 눈빛을 쫓으며 나는 한국에서 본 ' 인터걸=인터내셔널 걸'이라는 영화를 기억에 떠 올렸다. 창녀인 여주인공과 내연의 관계를 유지하는 스웨덴 출신 남자의 어눌하고 느려터진 러시아말과 지금 내 앞에 앉은 여자가 사용하는 영어 말투가 어딘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양이 너무 수수하여 마피아가 끌고 다니며 드러내놓고 호객하는 그런 천박한 타입은 아니었다. 얼굴 생김새도 짙은 화장을 하지 않은 탓인지 여염집 여자와 다름없었다. 그녀는 내게 놀 생각이 있느냐고 딱 한번 짧게 물었다. 그 말이 너무 무미건조하여 우리는 마주보며 서로 웃고 말았다.  

 그녀는 맥주 한 캔을 다 마신 후 덤으로 담배 한 갑을 선물로 얻고는 그냥 돌아갔다. 그녀는 30. 우크라이나에서는 치과의사였다는데 , 궁핍을 면하려고 남편과 아이들을 떠나 3개월 전 친구와 둘이 이곳에 왔다고 했다. 손님이 그들의 방으로 찾아올 경우 다른 한 명은 추운 복도에서 무작정 떨고 섰거나 아니면 염치불구하고 로얄 층의 아무 방에나 내려온다고  했다.

 

 그 해 4월까지, 나는 블라디보스톡 호텔에서 3개월 동안 장기투숙을 했다. 놔리샤는 그 후로도 종종 나의 방으로 전화를 했다. 그럴 때마다 나의 몸은 바깥 날씨처럼 싸늘하게 식어 전혀 성욕을 느낄 수 없었다엘리베이트에서, 일 층의 스낵바에서 종종 마주치며 눈인사를 건넨 적은 더러 있었으나 믿거나 말거나 그녀를 정식으로 내 방에 초청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블라디보스톡의 추억들(2)- 조선 모란봉 식당

 

 

러시아의 정통기독교는 그리스정교가 그 바탕이나 예배양식이 러시아식으로 조금 변형된 것이 특징이다. 크리스마쓰는 17일로 정해져 있으나 싼타 할아버지 격인 데드 모로즈(Ded Moroz ; 엄동설한의 할아버지란 뜻. 굴뚝대신 대문으로 출입함.)’는 신년이 오기 전날 밤에 나타나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주고 간다고 믿었다. 그러나 저러나 '93년의 1월은 더디게 지나갔다.

 

 연 사흘째 삭풍이 불었다. 오리털 파커를 입고 길에 나서면 바람을 안은 돛처럼 옷이 몸을 뒤로 밀어 걸음을 떼어 놓기조차 힘들었다. 다행히 오소리 털모자를 100불 주고 사 쓴 덕에 얼굴만 숙이면 칼바람은 두렵지 않았다. 마침 그날은 토요일이어서 나돌아 다닐 일이 없었다. 오전 내내 창가에 붙어 서서  아무르 강 하류의  얼어붙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유리창에 반사되는 아침 햇살이 눈부셨다. 아침안개가 아직도 바다에 머물러 얼음바다의 끝자락에 물려있는 청옥(靑玉)의 물빛은 볼 수 없었다. 멀리 안개 속에서 무적(霧笛)이 울렸다. 그 무렵 러시아 땅이 낯설어서 창가에 서면 늘 아프리카로 향하는 계절풍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그 땅은 척박하고 황량하며 외롭고 두려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차라리 돌아서서 역풍과 맞서며 싶었다.

 

 낮에 김명장 부장으로부터 방문하겠다는 전화가 왔다. 그는 해양대 26(70학번)로 호주시민권을 갖고 있었다. 작년에 같은 호주교포인 송() 사장과 동행하여 북한을 다녀온 후로 그는 블라디보스톡 사무실에 상주하며 북한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래서 일요일이면 아파트공사장에서 인부로 일하는 북한동포들이 그의 집에 한 번씩 놀러오곤 하였다. 언젠가 한번은 그의 집에서 북한 사람들과 조우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이 나의 눈길을 피하는 바람에 말을 붙여 보지는 못했다. 남조선 사람과는 절대 만나서도 얘기를 나눠서도 안 된다는 당의 지령이 있는데다가 그들과 함께 파견된 보위부 사람의 감시 때문이라고 했다. 다들 사십 초반의 동년배들이었으나 영양부족으로 얼굴들이 초췌했고 주름이 많아 우리보다 나이가 열 살은 더 들어 보였다. 용도폐기된 공산주의의 결과로 도시의 여염집 여자들이 길거리 창녀로 나서고 있는 러시아를 눈뜨고 보면서도 굶주린 백성의 등을 탄 북한의 교조주의는 여전히 태연자약이었다.

 

 우리는 호텔에서 나와 동쪽바다를 향해 언덕길을 조금 내려가다 역전(驛前)과 마주하는 모퉁이에 있는 '조선 모란봉 식당'으로 들어갔다. 가슴에 김일성배지를 단 처녀들이 주문을 받았다. 여성동무들의 살빛은 뽀얗고 붉었다. 군만두와 삼색나물(세가지 나물),닭곰탕과 밥 한 그릇, 김치 한 종기, 마지막으로 200그램들이 인삼곡주 한 병을 시켰다. 도합 3,200루불이 청구되었다. 공식환율로 미화 1불이 493 루불일 때였으므로 외국인에겐 싼 가격이었으나 러시아 현지인들에겐 부담스런 가격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건축기사의 월급이 5,000루불('926월 당시)이었으니 말이다.  

김 부장은 여성동무들과 안면이 많았다. 저녁에는 노래 부르는 가무단도 등장한다는데 이들이 낮에는 교대로 홀 써빙도 하는 눈치였다.  

" 여성동무! 얼굴 많이 예뻐졌수다."  

" -.김선생님은...오늘 저녁에 곡주 드시러 오시기요. 내래 노래봉사 하갔시요."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듯 목소리가 청아했다.  

김 부장은 너털웃음을 쏟으며 팁으로 200루불을 계산서 위에 얹어 주었다.

 

 

 

블라디보스톡의 추억들(3)- 타냐

 

  自由. 사르뜨르는 자기의 뜻에 따라 유추하여 행동하는 것이 자유라고 정의했다. 한 동안 추워서 서울에 두고 온 아이들과 어머니 생각을 잊고 지냈다. 잡다한 집안일과 살가운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에 가슴을 부대끼지 않으려고 일부러 작심한 것은 아니었다. 추위가 그런 상념들을 오래 붙들지 않았다. 페레스트로이카를 뒤집어엎으려고 쿠테타를 일으킨 공산당과 KGB와 군부의 두목들이 밤새 술에 취해 지휘능력을 상실한 것도 다 추위 때문이었다. 머리로 올라가는 피가 차가울수록 생각은 줄어들고 마음은 건조해진다. 그래서 나도 짐승처럼 한 동안 자유로웠다.

 

  타냐는 매우 고독한 여자로 보였다. 아마도 아이를 하나 둔 젊은 이혼녀일 것이다. 그녀는 어제저녁에도 호텔로비를 혼자 서성거렸다.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절박함이 매일 저녁 그녀를 화장시켜 길거리로 내몰았을 것이다. 키는 175센티미터 가량, 늘 붉은 곰 가죽으로 만든 모자에 짙은 갈색 털의 롱코트를 입고 있었으며 계란형의 얼굴이 붉고 화사했다. 백계 러시아 여인들의 특징일까? 그녀의 눈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나른하거나 혹은 이글거리는 태양을 닮았다. 예쁜 얼굴이었다. 그러나 왠지 그 얼굴엔 늘 구름이 흐르는 듯 했다.  

 젊은 여자들을 끌고 다니는 동네깡패인 세르게나, 8층의 놔리샤나, 지금 타냐처럼 소속 없이 부랑하는 여자들은 또 저들대로 저녁이면 호텔로비에서 또는 복도에서 각자 저들의 사업을 은밀히 펼치고 있었다.

 로비에서 타냐는 자주 나와 얼굴이 마주쳤다. 그녀는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가게주인처럼 수줍음이 많았다. 처음에는 늘 호텔 한 구석에 붙어 서서 오고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1월도 훌쩍 지나간 어느 날, 그녀는 모처럼 내게 다가오더니 명함을 한 장 건넸다. 8층의 놔리샤는 하루 1,000루불(2.5)에 방을 빌렸다고 했다. 손님에겐 50불을 받는다니 공일이 없으면 대단한 돈벌이를 하는 셈이었다. 세르게이는 100불을 받아 그의 여자들에게 30불을 떼어 준다고 했다. 그렇다면 타냐는 하루 저녁에 얼마나 받을까?

 

 오전에 하바로스크에서 날라 온 C사장이 사무실로 찾아와 노쓰 쿠릴(North Kuril)의 생명태 사업을 제안했다. 단구에 살집이 넉넉한, 그러나 얼굴은 멧돼지처럼 생긴 사십대 후반의 사내였다. 속초에 명태 필렛공장을 운영하고 목동의 45평짜리 아파트에 살며, 자가용으로 벤츠와 쏘나타 승용차 두 대를 굴리고 젊어서 종합상사 무역부에 근무했으며, 수산업계엔 모르는 사람이 없다며 시키지도 않은 제 자랑을 잔뜩 늘어놓았다. 나는 불민하여 그가 나열한 유명인사들을 한 명도 알지 못했다. 장황한 자기소개가 끝나자 그는 로바나가 어민들을 규합하여 잡은 생명태를 운반선으로 동해항까지 실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어민들에 대한 전도금으로 얼마를 내놓을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가 갑자기 말문을 닫았다.   

 그래도 넉살은 좋아 처음 본 나를 이끌고 사무실을 나서더니 그의 속초고등학교 후배라는 K군의 임대 아파트로 데리고 갔다. 아파트는 동쪽 해변에서 가까웠다. K군은 알루미늄 괴나 철강제품들을 구입하는 일로 회사에서 파견되었는데 아직 사무실을 얻지 못했다고 했다. C사장은 한국에서 들고 온 짐꾸러미를 풀더니 주섬주섬 상을 차렸다. 점심때부터 술이나 먹자고 했다. 그가 가져 온 가자미 식혜가 나를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들었다. 함경도와 강원도 동해안 지방에서 즐겨먹는 김치 식혜에는 명태와 가자미가 들어가는데 그 맛이 기가 막혔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 C사장은 여전히 저와 함께 놀아 달라고 보챘다. 결국 내가 묵고 있는 호텔방까지 따라와선 여자를 불러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동네깡패 세르게이는 아직 출근 전이었다. 놔리샤는 멧돼지 같은 그의 취향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놔리샤 대신 타냐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녀는 마침 집에 있었다.  

 타냐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도 C 사장은 잠시도 입을 가만두지 않고 주절거렸다. 장사할 게 많다. 지난 가을에 제주도에서 감귤을 한 짐 싣고 왔었는데 저온창고가 없어 냉동창고에 넣었다가 물건이 상해 낭패를 보았다, 다음에는 중국에서 사과를 한 배 싣고 오련다. 가을과 겨울씨즌에 맞춰 과일과 야채장사를 하면 재미가 있을 게야. 그러나 그의 사업구상은 개미처럼 국경을 넘나드는 중국인 행상들을 모르고 하는 얘기였다. 시간이 꽤 걸린다 싶었다. C사장은 무스탕 코트의 허리춤에서 조그만 병을 꺼내더니 시럽 두 알을 입에 털어 넣고 꿀꺽 삼켰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가 못생긴 얼굴을 무너뜨리며 해해거렸다.  

" 김 부장, 좀 드려요? 여자를 안으려면 먹어야 돼요."  

그가 삼킨 알약은 로얄제리 정제였다. 무척 탐욕스러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흐 흐 흐...남자가 거시기 못쓰면 돈도 안 빌려줘요. 나는 아직도 매일 그거 하고 싶걸랑요."  

 사내들이 흔히 하는 얘기였지만 나는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 세르게이가 찾아와 장사가 안 돼 재미없다고 투덜거려서 마지못해 50불로 깎아 여자를 방에 들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여자가 제 손으로 훌러덩 옷을 벗더니 또 제 맘대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워 나 잡아먹어쇼.’ 하는 바람에 바지도 벗지 못하고 돌려보낸 적이 있었다. 여자의 나신을 보았으니 돈을 주지 않을 수도 없고 해서 기분만 잡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선 타냐가 남자가 두 명인 것을 알고 눈으로 나에게 물었다. 셋이서 해요? 저절로 웃음이 났다. 그래 그것도 재미있겠군. 타냐가 품속에서 얇고 짧은, 납작하게 생긴 술병을 꺼내 한 모금 입을 다셨다. 여자들이 즐기는 브랜디라 짐작했다. 오늘 좀 힘들겠군. 아마도 그런 생각을 했으리라. 아니면 용기를 내기 위함이었을까? 나는 C 사장을 턱으로 가리키며 얼마냐고 물었다. 그 때였다.  

" -김 부장 ! 나 저 여자와 안 해, 안 한다고 말해요. "  

저게 뭔 소린가 싶어 타냐가 내 얼굴을 살폈다. 타냐는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깨끗한 몸일 것이란 믿음이 내겐 있었다. 그리고 또 얼마나 온순하고 수줍은가.  

" 아니 왜 그래요? 저만하면 훌륭한데 왜 그래요?"  

" 나는 못해요, 저런 여자하고는. K군 데리고 카지노에나 놀러 갈래 ."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말릴 틈도 없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와 타냐는 서로 마주본 채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에게 돌아가라는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다시 브랜디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이윽고 내가 말했다.  

" 타냐! 미안해요. 대신 나하고 놉시다. 좀 전의 일은 잊어 버려요."  

-케이. 술병을 탁자위에 내려놓는 소리가 내 귀엔 그렇게 들렸다. 그녀는 느린 동작으로 외투를 벗고 또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머리를 뒤로 틀어 묶은 머리핀을 뽑았다. 치렁한 머리칼이 어깨선까지 흘러내렸다. 숱이 많은 흑발의 기름진 머리칼이 불빛에 반짝였다. 내게 다가온 그녀가 허리를 약간 구부리더니 바지혁대에 손을 얹으며 나를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가라고 하지 않아서 고마워요. 그녀의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 불현듯 지구의 깊은 내부에서 펄펄 끓던 마그마가 휴화산을 뚫고 용솟음치듯 갑자기 뜨거운 불길이 전신을 감싸왔다. 단순하면서도 진정이 깃든 그 눈빛 하나가 내 몸을 그렇게 흥분시켰으니 놀라운 일이었다. 게다가 바지를 벗겨 내리던 그녀가 갑자기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는 것이 아닌가.

" 오친 볼쇼이! "  

 부끄러운 듯 아래를 살피던 나도 깜짝 놀랐다. 그녀는 새벽녘에 돌아갔다. 샤워기가 달린 좁은 화장실에서 아쉬운 듯 그녀는 한 번 더 나를 포옹해주었다


(註) 오친 볼쇼이: Much great. 볼쇼이는 Great,Grand 라는 뜻임 .볼쇼이 발레단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단어임.

 

 

 

블라디보스톡의 추억들(4)- 일루나 김

 

 

 5월 초였다. 호텔에서 바닷가 서쪽 언덕 위에 있는 아파트로 숙소를 옮겼다 . 방이 두 개고 2평쯤 되는 거실과 주방이 있어 혼자 쓰기엔 넉넉한 공간이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끝자락에 사무실이 있어 아침마다 바다를 보며 출근하는 기분이 근사했다. 아침이면 언덕을 내려가 해변을 산책하고 해안절벽에 기대 지은 아무르 호텔 앞의 헬기장에서 열 바퀴쯤 달리기로 몸을 풀었다. 똥을 누이느라고 아파트에서 끌고나온 크고 늘씬한 사냥개들만 아니면 그런 아침시간이 정말 기가 막히게 즐거웠다. 월세 300불이 집주인에겐 엄청 큰돈이었지만 호텔 숙박비에 비하면 거저인 셈이었다.  

 오후 다섯 시에 퇴근을 해도 고위도의 하늘엔 해가 서쪽으로 조금 비켜 가 있을 뿐 저녁이 되려면 하도 감감하여 다시 해변을 서성이기 일쑤였다. 낮이 길어질수록 남는 시간에 따챠에 가 일을 하라고 시골이나 도시나 퇴근시간이 다 그랬다. 해변에 산책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도, 벤치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해본들 금방 심심해졌다. 놔리샤도 타냐도 볼 수 없고 밤이면 썰렁한 집에서 혼자 시간을 죽이는 일이 점점 고역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어느 날 문득 러시아어 여자 과외선생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난 1월에 만난 C 사장의 속초고 후배인 K군은 한 시간 레슨에 500루불을 준다고 했다, 지난해 2월의 환율이 1불에 125루불이었으나 일 년 만에 570루불로 바뀌어 있었다. 금년 2월의 이발값이 600루불이었다. 시시각각 인플레이션이 상승그래프를 그리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모여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진압경찰과 충돌하여 많은 중경상자가 발생했다고 들었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져 날이 풀리자마자 광장으로 몰려들 나와 세상을 예전처럼 돌려놓으라고 아우성을 친 것이었다.

 

 한국의 일류 원양회사인 D산업이 지주회사고 우리 회사가 소액주주로 참여한 Rosskor 사무실은 동쪽해안가를 바라보는 레닌가에 있었다. 그 회사의 영어통역관인 모나코프를 앞장세워 나는 레닌광장에서 가까운 어느 초등학교를 방문했다.

  5월의 어느 목요일이었다. 예상 밖으로 모나코프가 데리고 나온 여선생은 젊은 조선족 여자였다.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고 했다. 참하게 생긴 얼굴에 키도 큰 편이었고 마음씨도 순박하게 느껴졌다. 한국말을 못하는 게 조금 아쉬웠지만 선 자리에서 월 100불을 주기로 하고 가정교사로 쓰기로 결정했다. 그녀의 이름은 일루나였다.  

 금요일에는 아침부터 하늘이 흐리다가 오후에 비를 조금 뿌렸다. 저녁에 우산을 손에 든 일루나가 처음으로 집에 왔기로 학습방법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그녀의 영어가 한국의 여느 고등학생 수준 정도여서 앞으로의 학습이 수월치 않을 것이라 짐작했으나 애초에 심심하여 외로움이나 달래자고 시작한 일이어서 크게 괘념치 않았다. 젊은 여자와 낮은 응접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았더니 몸이 따스해졌고 머리에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나의 미국 캘리포니아식 발음이 귀에 익지 않은 그녀가 가끔씩 말귀를 알아듣지 못해 얼굴을 붉혔는데 그녀의 볼에 물든 홍조가 마치 잘 익은 복숭아 빛깔 같아서 그 때마다 가슴이 저릴 지경이었다.  

 일루나는 스물 두 살의 앳된 나이였다. 러시아어 첫 수업은 내가 묻고 그녀가 대답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외국어를 쉽게 배우려면 현지 여자와 살림을 차리는 것이 첩경이었다. 그래서 언감생심 처음부터 나는 그녀를 아파트에 눌러앉히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칠 때마다 내 눈빛이 심상치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인지 자주 그녀가 앉음새를 고치거나 옷깃을 여미곤 했다.  

" -'위하여'란 말인데 '쟈 즈다로비야!' 는 건강을 위하여, 행운을 빈다는 말은 '쟈 우다쵸!' 성공을 기원한다는 말은 '쟈 웃떼흐!'라고 하지요."  

 술자리에서의 건배사를 물으니 그녀가 손에 밤알을 쥐어주듯 또박또박 가르쳐준 말이었다.

 

 일주일이 후딱 지나갔다. 토요일 오후엔 그녀가 사촌여동생이라는 '나탈리아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나탈리아는 러시아에선 혼기가 찬 열여덟 살이었다. 우스리스크 대학에서 한국인 목사로부터 한국말을 배운지 7 개월짼데 한국말을 해보고 싶어 저희 언니를 졸라 함께 왔다는 얘기였다. - 이 두 여자와 이 아파트에서 함께 먹고 자면 얼마나 좋을까. 다만 한 달만이라도 말이다. 부질없이 그렇게 자꾸 김치국을 마셨다. 5천루불을 주며 토요일이니 자매간에 쇼핑이라도 하라고 선심을 썼다. 잘만 보이면 그보다 더 큰 선물도 줄 수 있어. 사람을 얕잡아 보는 짐승 같은 교만이 마음속에서 일렁거렸다.

 다음날인 일요일 오전에는 그녀가 나탈리아 말고도 두 돌이 지난 '뺘샤'라는 아들까지 보듬고 왔다. 아이 아버지는 빠띠쟌스크에 사는 사람인데 헤어진 지 오래라 했다. 다음 일요일엔 그녀가 아예 살림살이를 몽땅 챙겨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한가한 시간이면 무얼 하세요?"  

나탈리아가 벌써 네 번째 던지는 질문이었다. 대답하기가 민망하여 웃기만 했는데 그녀의 호기심이 집요했다.  

" 책을 읽거나 바닷가에서 산책하고... 그래도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오. 나탈리아가 곁에서 말동무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나탈리아가 먼저 웃고 그 말을 러시아말로 전해들은 일루나가 뒤에 웃고, 자매간에 둘이서 함께 깔깔대며 또 웃었다. 여자들이 남자에게 품을 듯한 야릇한 감정이 그들의 웃음 속에 묻어있었다. 마흔 살 먹은 홀아비였던 나는 짐짓 민망했다. 라면을 끓여 점심을 대접하고 바닷가로 내려가 함께 산책을 한 후 그들과 헤어졌다.

 

 6월 두 째 주엔 에드워드라는 수산부 직원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사회간접시설에 대한 투자가 수십 년째 멈춰버린 듯 도시의 도로는 곳곳에 아스팔트가 벗겨져 울퉁불퉁했다.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의 운전은 위험했다. 공항으로 난 도로에선 툭하면 추돌사고가 났으며, 한 번은 차창으로 튕겨져 나온 여자가 길가에 숨진 채 누워있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그 무렵 나는 한국 D수산의 주재원으로 파견된 대학 후배를 만나 그와 함께 아무르 호텔의 카지노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처음 해보는 카드놀음에 슬슬 빠져들고 있었다. 가로수의 잎들은 하루가 다르게 녹음이 짙어지고 언덕 아래에 누운 바다의 물빛은 눈부신 햇살을 머금은 채 명징한 남색으로 점점 바뀌어져 갔다.  

 6월도 하순에 접어들고 있었다. 하루는 일루나가 입을 딸막거리더니 마지못해 꺼낸 얘기가 이랬다. 다음 주 7월부터 우스리스크의 단과대학에서 한 달간 영어회화반 개강이 있다. 거기에 꼭 다녔으면 한다. 그러자면 한 달 동안은 일요일만 과외가 가능하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일루나와 단둘이 마주앉는 일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다 싶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 만나야 한다니 괜한 걱정이 앞섰다. 카지노 출입이 한가한 시간을 때우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었으나 일루나와 매일 만나는 즐거움은 또 다른 재미였던 것이다. 그래도 젊은 여자가 공부를 하겠다고 저리 열심인데 싶어 월급은 똑같이 쳐줄 테니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김명장씨가 그예 회사를 그만 두었다. 해양대학을 나와 상선을 한 십 년 탄 모양이었으나 사업을 하다 부도를 낸 아버지 탓으로 마흔이 넘어서도 제 재산을 못 모았다고 했다. 호주에 이민을 간 것은 70년대에 이미 자발적인 이민을 선도한 해양대 출신들의 개척정신에 힘입은 바 컸으나 장사를 할 만한 재력도 없이 오직 배타는 기술밖에 없는 그로선 아내와 두 딸을 호주에 남겨둔 채 어언 십 년 가까이 해외를 떠돌고 있었다.  

 북한을 다녀온 그는 결국 북한과의 상업적 거래를 포기하고 말았다. 가져올 상품도 마땅치 않았고 설사 거래가 성사되어도 상품하자로 클레임이 생기면 뒷감당이 안 되는 것이 북한과의 거래였다. 년 전에 북한이 건설공사 노임대가로 러시아로부터 받은 명태를 일본상사를 통해 중국에 실어 보냈다가 품질하자로 십만 불 가량의 클레임이 발생했는데 일본상사에겐 꼼짝없이 물어주고 북한에겐 여직 한 푼도 받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도 북한출장이 클레임청산이었던 모양인데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사장에게 면목도 없고 해서 이점 저점 보따리를 싼듯했다

 러시아에서 내가 맡은 일도 시간이 흐를수록 제목과 내용이 애매해져 갔다. 모든 실권은 한국에서 행사했고 이곳의 투자내용은 현금이 투입되지 않은 그야말로 입으로 해 먹는 일과 같아서 결실을 맺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일이 없으니 시간이 남아돌았고 머리가 또한 늘 허전했다. 그러므로 하루하루 시간을 죽이는 일이 힘겨웠고 마음은 또 들개처럼 황폐해져 갔다.

 

 한편, 날씨가 따뜻해지니 내 몸의 생물학적 기능도 활기가 넘쳐났다. 저녁 시간에 일루나와 마주앉아 공부를 하노라면 머리에선 늘 아지랑이가 스멀거렸다.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그녀에 대해 내가 얼마나 더 인내할 수 있을지 그게 염려스러웠다. 해외출장을 숱하게 다니면서도 내 체질이 아니라며 극구 사양해왔던 카지노 출입을 시작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일루나가 채 한 달도 안 되어 가정교사 일을 관둘 것같이 말을 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며칠 전이었다. 그녀와 함께 스파게티면으로 저녁을 마친 후 잠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167 센티)와 몸무게(60키로)를 묻던 끝에 나는 뜬금없이 그녀에게 키쓰를 청했다. 이런 일은 말이 나온 김에 냉큼 해치워야 한다는 생각에, 어리둥절해 하는 그녀를 냅다 껴안으며 입술을 훔쳤지만 일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곧 정신을 수습한 그녀가 내 몸을 밀어내며 멀찍이 물러났던 것이다.  

" You are ... How do you think of me? "  

당신은 신사가 아니야, 당신은 짐승이야 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그랬다. 모국어를 쓸 수 없는 벙어리 같은 외로움이, 6월의 나른한 대기가 결국 나를 짐승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 A good and nice woman, you are. I feel, you're different from street woman. If it is hard for you to accept me, forget and excuse me of tonight ."  

그러나 그 날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말을 남긴 채 아파트를 떠났다.  

" Take a time! "  

 

 씨앗인 욕망은 과육인 사랑에 의해 감싸여 있다. 그러나 과육은 씨앗만큼 오래 가지 않는다. 어떨 때는 사랑이 욕망보다 훨씬 허약한 법이다. 사랑을 가장 쉽게 소유하는 형태가 결혼이라면 그것은 끝내는 자신에게 닻을 내리지 못하는 메마르기 짝이 없는 생활의 연속일 뿐이다. 욕망만을 느끼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건 나쁜 관계고, 사랑하는데도 욕망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가짜다. 사랑과 욕망은 서로 건강한 긴장감에 싸여 있어야 한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섹스는 그들의 본성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들은 몸을 통해 자신을 알고 상대방을 발견하고 세상을 바라본다. 관능은 그 자체의 법칙을 갖고 있다. 그것은 자의식을, 감정을 귀찮아한다. 심지어 사랑까지도. 그것은 " 나에게 완벽히 집중해 다오. 나의 뿌리까지 건드려 종처럼 울리게 해다오." 라고 요구한다. 몸의 욕망은 사랑의 색깔과 함량을 알아보고 사랑에게 가장 정밀한 필터노릇을 할 경우가 많다. 사랑이 없으면 섹스는 없다 또는 섹스 없이는 사랑도 성사되지 않는다. ( 윤효의 장편소설-노러브 노섹스의 서평에서 옮김)  

 

  다음 날 아파트를 찾아 온 그녀의 옷매무새는 보다 단정했으며 어제의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말과 행동에서 역력했다. 그녀가 러시아인이었다면 결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그녀와 나의 나이 차이가 그녀의 욕망을 제어했을 것이다. 멀리 발해국의 후손이었거나 또는 조선시대에 흘러들었을 법한 조상의 예의범절이 대물림하여 피 속에 머무른 탓일 것이다. 아무튼 나는 욕망에 굶주린 들개였다. 태백산맥과 남부군과 소설 동의보감을 다 읽고 구약성경의 이사야 편을 읽는 중이었어도 모국어를 하지 못하는 고립무원의 이방인으로서 나의 정서는 이미 자취하는 음식만큼이나 꺼칠하게 메말라져 있었던 것이다.  

 어제 그녀가 집을 나서면서 남긴 말을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시간을 가지면서 당신이 한 짓을 생각해 봐요. 아니면, 오늘 공부는 틀렸으니 그냥 쉬세요. 그게 아니면, 시간을 갖고 서로 생각해 보아요. 내게 시간을 좀 주세요. 그 중에 정작 어느 것이 그녀의 진심이었는지 모호했다. 여자에게 거절당하는 것이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처음엔 수치심을 느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경솔했다는 뉘우침이 왔다. 거듭되는 후회와 자책감은 자고로 여자를 의식적으로 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스스로 깨뜨린 대가였다. 어느 경우든 나는 여자가 저절로(자연스럽게) 마음과 몸을 열기를 기다리는 것에 오래 전부터 익숙해져 있었다감이 익어 제절로 떨어질 때까지 감나무 밑에 드러누워 입을 벌리고 있는 천치 같은 미련함을 오히려 즐기는 편이었다. 그래서 어쩌다  돈을 주고 허기진 욕망을 채울 때에도 나는 늘 긴 밤을 택했다

 비록 아이가 딸렸어도 일루나는 아직 앞날이 창창한 나이였다. 나는 나의 욕심만 부릴 일이 아니라 생각되어 당장 다음 주부터 한 달을 쉬자고 했다. 학비에 보태라고 7월분 급료로 100불을 준 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내가 말했다.  

" 영어회화공부 열심히 해요. 나도 7월엔 식구들을 보러 한국에 다녀올까 해요. 갖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말해요. "

100불을 거저 얻은 그녀가  황송한 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가  선물 이야기에 얼굴을 바로 하며 겨우 입을 떼었다

" 워커맨이 있으면 영어공부에 좋은데...전에부터  얇은 가죽코트가 입고 싶었어요. 그런데 정말 로 사주실거예요? "  

 그 순간 환한 표정으로  웃던 그녀의 모습이 눈부시도록 귀엽고 아름다웠다.

 

 휴가 차 서울에서 여름을 보내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8월 중순이었다.

 귀임하는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김명장씨를 만났다. 그는 이미 러시아 직원 두 명을 데리고 장사를 하는 사장이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오렌지쥬스나 초코파이 등을 컨테이너로 들여와 블라디보스톡과 우스리스크, 빠띠쟌스크 등지로 팔러 다녔다. 초콜렛을 좋아하는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초코파이는 러시아에선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좋아했고 변변한 음료수가 없는 극동지방에선 여름 날 오렌지쥬스는 날개돋힌 듯 팔렸다. 봄에는 두 배 장사였는데 너도나도 덤벼드는 일이라 지금은 마진이 30프로가 조금 넘는다고 했다. 러시아의 보따리장사꾼들은 은행에서 년리 130프로의 대출을 얻어 한국상품들을 실어 날랐는데 마진이 100프로 장사일 때는 두 달에 30프로 가까운 이자를 줘도 수지가 맞았던 것이다. 집도 절도 모두 국유인 시절, 담보를 제공할 수 없었던 시민들에게 높은 금리는 당연해 보였고 또 한편으론 물가앙등으로 인한 높은 인플레이션도 감안된 것이었다.

  나 또한 회사근무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당장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일 년이라도 기한을 채우는 것이 사장에 대한 도리라 생각했고, 자립을 하더라도 러시아를 무대로 뭔가 할 만한 일을 찾아보고 싶었다.  

 오래 비워둔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데 웬 편지봉투가 발에 걸렸다. - 일루나가 두고 갔구나. 8월 초에 오리라 하고 아마 몇 번 찾아왔다가 허탕을 친 모양이야. 급한 마음에 나는 짐도 부리지 않고 봉투부터 뜯어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만나서 말씀드려야 하는데...아직 돌아오지 않았군요. 오래 전부터 많이 생각했는데 당신에게 좋은 선생이 될 자신이 없어 늘 죄송했어요. 영어로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일이 제겐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가정교습을 그만 두렵니다. 용서하세요. 일루나 김.  

추신: 요즘 한국인들이 사는 아파트에 마피아들이 습격해서 돈이나 물건들을 자주 털어간다고 합니다. 부디 몸조심 하시고 건강하세요

 

 편지를 읽고 나니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설 마음이 차마 생기지 않았다. 선물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며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짓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회한에 젖어 가슴을 쳤다. 그녀에게 주려고 동대문 시장에서 구한 가죽재킷과 그녀의 아들 빠샤를 위한 장난감 총과 용산의 전자상가에서 산 워커맨은 그 해 12월까지 아파트 한 구석에 처박혀 오지 않는 주인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짐꾸러미를 볼 때마다  레닌광장 근처의 국민학교를 찾아 가려고 몇 번이나 마음을 들썩거렸지만 종당엔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일루나에 대한 미련을 버린 이유는 딱 하나,  내가 러시아에 계속 머물러 살 것이란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 봄 끝내 나는 러시아를 떠났고  새로운 일을 찾아 중국과 캐나다 등지로 돌아 다녔다. 그 몇 년 동안, 홀아비생활이 길어지고 이러다 영영 짝을 찾지 못하리란 절망감에 사로잡힐 때마다 일루나의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다.

 "중국에 가서 어디 조선족 여자라도 한 명 데려와 살지 그래."

홀아비로 늙어가는 내가 보기 딱했던지 만나는 친구들마다 농담처럼 그렇게 말했다. 그때마다 일루나 생각이 아주 간절했다.

 

 

) 발해국의 땅: 러시아의 극동인 연해주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모두 그 옛날 대조영이 세운 발해국의 영토였다.  

.

 

 

 

 

블라디보스톡의 추억들(5) - 타라센코

 

타라센코(Taracenko)는 달리버(극동어업총국) 총재인 마스칼쵸프(Maskalchov) 의 사위였다.

 

극동어업총국이란 오호츠크와 캄챠카, 쿠릴및 연해주 해역을 망라한 극동의 바다산업을 총괄하는 기관이다. 자원관리및 어업정책 뿐만 아니라 선박에 대한 유류보급과 해상안전시설의 관리 등 군사적 활동을 제외한 모든 해상활동을 관장하였으므로 공산주의 시절의 총재의 권한이란 막강한 것이었다. 그러나 198911월의 혁명으로 옐친정부가 등장하면서 자원분배(어획쿼터)같은 정책적인 사항과 외국어선에 대한 입어허가 등 인.허가 사항이 중앙부처인 수산부로 귀속되면서 총재의 힘은 점점 시들해져 갔다.  

  우스운 것은 그가 옐친정부의 초대 수산부장관으로 천거되자 막강한 권력의 본산이던 그 자리를 놓치기 싫어 사할린에 사는 시골뜨기 친구를 대신 추천했다는 것인데 외국의 수산관계 요인이나 극동의 내노라 하는 수산회사의 대표들이 어획쿼터를 구하기 위해 모조리 모스크바로 줄을 서는 바람에 그가 통곡을 했다고 들었다. 군인들이 탱크를 몰고 와 국회의사당 건물에 대포를 쏘던 그 무지막지한 정치상황을 생각하면 아마 그 때 그는 옐친만한 배짱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사가 제 자리를 잡기 전인 혼란의 시기였던 '86-'92 년 까지, 달리버 총재라는 직함 하나만으로 그는 무수한 이권의 중심에 있었고 외국자본이 물밀하던 '80년대 말의 몇 해 동안은 축재의 량도 엄청나 미국,일본,스위스 등지로 외화를 빼돌려 놓았다는 추측이 무성했다. 일견한 그의 풍채는 여지없이 덩치 큰 회색곰이었다. 탱크 앞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버티고 섰던 엘친의 분위기를 쏙 빼닮았던 것이다. 우악스럽고 미련하게 생겼지만 생존법칙에선 여간 지혜롭지 않은 곰의 이미지가 러시안인들의 특징인 듯 신문의 삽화로 오랫동안 즐겨 그려져 왔는데 나의 인식에도 그 이미지가 은연중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마스칼쵸프의 입에서 아직도 더운 김이 나올 때여서 그는 회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아마추어 복싱 라이트급에서 극동의 대표선수로 뛰었다던 아키모프(Akimov)의 뒤를 이어 타라센코가 그 해 3월에 로바나 블라디보스톡의 사장으로까지 승진했는데 내 눈에는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로 비쳐졌다.  

  로바나의 블라디사무실의 주요사업은 달리버를 상대로 명태합작사업을 지원하는 일이었다. 합작용 어획쿼터를 확보한 뒤 러시아 어선들을 규합하여 한국의 공모선이나 트롤어선에 양상에서 명태를 그물째 양도하는 것이 명태합작사업인데, 달리버로부터 쿼터를 따오고 한국어선에 대한 입역허가를 주선하는 일이 그것이었다. 타라센코는 달리버를 상대로 한 이 일의 핵심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난 12월부터 준비한 이 일이 처음부터 삐꺽거리고 있었다. 그 해 합작사업의 한국파트너는 고려원양이었고 공모선은 23천톤급 개척호였다. 그러나 러시아 수산부로부터 입역허가가 쉬이 발급되지 않았다. 1월도 하순에 접어들었고 명란철 조업씨즌이 코앞에 닥친지라 고려원양의 조바심은 여러 사람들의 피를 말리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달리버가 직영하는 조업선단을 활용하는 조건으로 달리버는 170백만 루불(30만불)의 선급을 요구하였다. 대출상담을 한 달콤은행(Dalcom bank)이 금방 해줄 듯 하며 시간을 끌다가 나중에는 30프로의 달러를 현금으로 예치하라고 말을 바꿨다. 달리버는 그 돈이 없으면 선박의 연료유를 살 수 없어 배를 내 보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은행의 대출교섭은 당초 아키모프의 임무였는데 이 일이 예상 밖으로 돌아가자 그의 입지도 사면초가가 되고 말았다.

  모스크바로부터의 개척호의 입역허가가 한 달이 넘도록 지연되자 달리버에서는 ,유빙이 많으므로 우선 노쓰 오호츠크에서 먼저 조업을 해라. 2월 한 달을 그리 버티면 캄챠카어장 허가문제도 해결이 난다. 아니 허가서 없이 어떻게 해요? 그랬더니, 어찌어찌 허가서란 것을 만들어 보냈는데 알고 본즉 그것은 예전처럼 무소불위의 힘만 믿고 달리버가 각 해역의 해양경비대에 보내는 업무협조 공문에 불과했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었고 모두들 권력의 중심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캄챠카립보드( Kamchaka Rypbod : 캄챠카 해양경비대)에서는 어장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달리버의 결정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딴죽을 걸었다. 미국과 머리를 맞대고 있는 캄챠카 경비대는 나름대로 긍지가 높았고 콧대도 엄청 높았던 것이다.  

  그때서야 말고 모스크바에서는 한.러어업협정을 위한 실무자회담이 개최되고 있었고, 2차 회담조차 결렬되어 쌍방이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래서 모스크바 당국은 한국어선에 대한 입역허가가 안중에 없었던 것이고 한국의 수산청에서도 맞대응을 한답시고 고려원양의 합작계약서를 승인해주지 않아 신용장개설이 지연되고 있었다. 이해 당사자들 모두 체면이 구겨져 누가 먼저라며 삿대질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하루하루 안타까운 시간들만 흐르고 있었다.  

  타라센코는 사무실에 아예 출근도 하지 않았다. 일의 종적이 오리무중인데 그나마 달리버 쪽의 정보만 주시하고 있던 나로서는 애간장이 녹을 지경이었다. 설상가상 2월이 되자 고려원양에서는 합작사업을 아예 유보하는 태도를 보였다. 로바나를 믿고 있다간 자칫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급기야는 러시아통인 권 상무(權常務)를 보내 자구책을 강구하는 듯싶었다. 그는 2월 초 블라디에 도착했고 그러고도 며칠째 이 편에서 아무런 소식을 주지 못하자 사할린으로 날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어대금 결재용 신용장 개설에 대해선 일언반구 언급조차 없었다.

 

  2월 초순의 이른 아침이었다.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간밤에 한국의 모 회사에서 출장 나온 사람 두 명과 어울려 보드카에 취해 곯아떨어진 터라 머리가 무겁고 속이 쓰리고 시야가 가물가물한 채 엉금거리며 일어나 겨우 방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엉뚱하게도 패트릭 스웨이지('사랑과 영혼'이란 영화에서 데미무어와 열연한 남자배우)가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어이쿠,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그는 타라센코였다. 그의 옆에는 수산부 직원인, 콧수염을 기른 발레리가 얼빠진 나를 보며 웃음을 짓고 서 있었다.  

" 미스터,! 모스크바에서 허가서가 떨어졌어요. 빨리 가서 서울에 전화해요."  

  일주일 내도록 사무실에 나타나지 않고 애를 태우던 친구였다. 그러나 허가서가 나왔다는 그 한 마디에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고 그 동안 혼자서만 삭혀왔던 울화가 한꺼번에 눈 녹듯이 사라졌다. 게다가 그가 눈을 찡긋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데야 웃음으로 맞장구를 칠 수밖에. 죽어서도 영혼으로 살아 사랑하는 애인의 곁을 맴돌며 결국은 그녀를 불행의 함정에서 구출해 냈던 영화 속의 멋진 남자, 패트릭 스웨이지. 타라센코는 얼굴뿐만 아니라 체격도 영락없이 페트릭 스웨이지를 빼닮았던 것이다.  

.

  캄챠카립보드의 허가서 승인은 닷새가 지나 떨어졌다. 그런데도 고려원양은 수산청을 핑계로 여전히 신용장개설을 미루고 있었다. 양상(洋上)인수도 어대금이 톤당 미화 550불이나 되었으니 그들에겐 어가가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할린으로 날아간 권 상무는 이 참에 좀 더 싼 가격의 사업파트너를 찾았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개척호가 명란철에 소화하는 명태원어량이 약 2만 톤인데 오십 불만 깎아도 백만 불이 오가는 거금이었다. 게다가 처음엔 멋모르고 달리버의 연줄만 믿고 로바나와 서둘러 계약을 했는데, 세상이 바뀌어 너도나도 합작용쿼터를 들고 있고 자선(子船)동원도 쿼터홀더들이 얼마든지 주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원어값이 자꾸 그들의 뒷덜미를 낚아채는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을 꼼짝 못하게 붙들어 놓는 것은 시간뿐이었다. 어업에서의 경제성은 원가요소보다는 한정된 기간에 얼마만큼 조업률을 증대시키느냐는 것이 대단히 중요했다.  

  신용장은 나중 일이고 우선 공해에서 놀고 있던 개척호를 캄챠카 서안(西岸)으로 불러들였다. 자선들은 인근어장에서 러시아 공모선과 조업하는 배들을 규합하면 될 터이므로 굳이 달리버의 자선에 목을 매달 필요가 없었다. 블라디보스톡의 '레닌콜호즈'와 사할린 지역의 콜호즈를 접촉하고 어장에 떠있는 달리버의 자선을 합치니 도합 10 척의 자선이 쉽게 확보되었다. 로바나 사할린에서는 옵서버들을 바다로 급파했다. 잠시 쉬었다 가라는지 때마침 바다에서는 강풍이 몰아쳤다. 바람 길목을 피해 배들은 산개하여 삼 일째 피항중이었다.

  2월 중순이 되어서야 첫 조업이 개시되었다. 개척호는 하루만에 500톤의 명태를 받았다. 북위 53도 어장의 고기는 씨알이 굵고 포란(包卵)상태도 양호했다. 대어(大漁)소식에 고려원양에서는 곧장 3천톤급 척양호를 추가 로 투입했다. 운이 좋았는지 3월 중순까지 바다는 순풍이었고 명태어군(魚群)50도 주변어장에서만 웅성거리며 산란했다.  

  그 해 4월 초순까지 로바나는 19,000톤의 생명태를 팔아 250만 불의 순익을 남겼다. 또한 고려원양도 명란철 사업으로 그 두 배의 이익은 챙겼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은행대출문제로 체면을 구긴 아키모프는 제 발로 물러났고 그 자리에 뿔피리를 불며 타라센코가 입성했다. 급기야는 5월 중순에 보너스로 타라센코는 영어가 유려한 샤포프를 대동하고 서울에 초청되었다. 그들은 홍콩을 거쳐 6월 중순에 귀환했다. 홍콩에서 수십 종의 잡화를 20피트 한 컨테이너 분량으로 주문하고 왔다는데, 그건 그렇다 치고 홍콩의 유사명품으로 양복들을 빼입은 그들의 모습이 흡사 영화배우를 방불케 했다. 특히 살결이 흰 샤포프는 60년대에 인기가 높았던 T.V 첩보시리즈물의 주인공 '로버트 쑈'를 연상케 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온 후로 사무실의 분위기가 차츰 이상하게 흘러갔다. 매주 월요일이면 내가 주관하는 업무회의가 열렸고 금요일이면 또 업무진행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는 회의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직원들은 출근시간이 저희들 멋대로 정해지고 사무실 입출도 불투명하여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뭘 하고들 돌아다니는지 도대체 알 길이 없고, 그래서 연 이 주째 회의도 열지 못한 채 여직원들만 모여 있는 사무실에 멍청히 앉아 있다가 퇴근하는 날이 거듭 반복되었다

 

  인간은 희망을 먹고 산다. 때로는 희망 그 자체를 위해 산다. 미래가 없다면 살아 있어도 죽은 목숨이고 희망이 없으면 죽음도 하찮은 것이 되고 만다. 블라디보스톡에서의 하루하루는 내겐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밤이면 밤마다 혼자 있는 시간들이 버거워 늘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 일쑤였고 우울증이 도질까 싶으면 억지로 술에 취해 쓰러져 잠드는 날이 많았다.  

  갈리나는 영어통역과 문서작성을 하는 비서였다. 스물여섯 살 먹은 호리호리한 몸매의 독신녀였다. 남자들이 나돌아 다니는 낮 동안 텅 빈 사무실에서 그녀는 나의 유일한 말벗이었다. 하루는 점심을 먹자고 스낵바로 데리고 갔더니 그녀가 뜻밖의 얘기를 털어 놓았다.  

" 타라센코가 그랬어요. 미스터 김은 껍데기라고. 서울 갔을 때 K 이사가 자기 집에 데려가 하룻밤 재우면서 그랬대요. 앞으로 블라디 사무실의 일은 타라센코의 책임하에 운영해라.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진다. 직원들 통솔도 미스터 김 눈치 보지 말고 소신껏 하라고 그랬대요. 그래서 홍콩 갔다 온 뒤 직원들 모아놓고 앞으로 내가 사장이니 내 말만 따르라고 그랬어요." 

  6월에 회사를 관둔 김명장씨도 언젠가 한번 비슷한 얘기를 내게 한 적이 있었다

" 김 형, 적당한 시기에 독립하세요. 송 사장 스타일이 절대 직원에게 권한을 주는 사람이 아니에요. 김 형 들어오기 전에도 세 명이나 스쳐 갔어요. 그 사람들 회사 돈으로 외국 나와 업무 본다고 여기저기 사람들 만나고 실컷 돌아 댕기다가 이권만 챙겨 제 살림 차려나간 셈인데 그걸 아는 송사장이 김 형이라고 전권을 맡기겠어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잘 생각하세요."

  듣고 보니 기가 막혔다. 애초에 로바나란 회사를 염두에 두고 6년 간 다니던 원양회사를 관둔 것은 미지의 러시아 땅에 대한 희망 때문이었다. 그 무렵 로바나는 국내 종합상사나 유수의 원양업체와 동반하여 수산업에 관한 합작사업을 세 군데다 벌려놓은 데다가 수산분야의 일은 미국출장 때 알게 된 J선배가 부사장으로 영입되어 총괄하고 있었다. 송 사장은 J선배의 광주일고 선배라고 했다. 인터뷰를 할 때 송 사장은 수산부문은 J부사장과 협력하여 멋진 작품을 한번 만들어 달라며 내게 각별한 애정을 보이기까지 했던 터였다.  

  그러나 송 사장은 호주에 상주하며 러시아사업을 죄 관장했고 그의 수족은 다름 아닌 K 이사였다. K는 나와 동년배로 한 때 어느 종합상사에서 곡물 등 국제선물거래 업무를 보다가, 공산화 직후 베트남이 미국으로부터 무역제한을 받던 시절 베트남의 쌀 등 농산물을 제 삼국에 팔던 송 사장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로바나의 자금 등 회사살림 전반을 도맡고 있었다. 그는 천성이 부지런한 사람이었고 달변가였으며 교활할 정도로 잔머리가 밝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부사장인 J선배는 수산관련업무의 기획이나 실무의 전결권은 가졌으되 의사결정과정의 권한은 K에 견줄 바가 못 되었다.  

  명태합작사업이 종료된 후 블라디의 업무는 한가했다. 오렌지 쥬스나, 쵸코파이, 가전제품 따위의 무역은 명태사업에 비하면 하잘 것 없는 것이었고 대금회수문제와 다달이 치솟는 물가와 루불화 하락으로 점점 마진조차 보장할 수 없는 일이 되어갔다. 높은 수입관세도 문제였다.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해 빵과 육류 등 식품에는 면세 또는 저율의 관세가 적용되었고 공산품들은 대부분 50% 이상의 높은 관세가 적용되었다. 그래서 보따리 무역꾼들이 배로 비행기로 한국을 드나들며 극성이었고 중국과의 국경지대에도 농산물이나 생필품을 실어 나르는 밀무역이 성행했던 것이다. 명태와 가자미, 연어알 등 냉동수산물 무역도 성사직전에 번번이 무산되었다. 수산물 경우 규모면에서 많은 자금이 소요되는데 은행을 통한 신용장거래가 정착되지 않아 모두 현금결제를 요구했다. 문제는 본사에서 남의 돈으로만 일을 하려고 해서 현지에서 움직이는 나만 매번 신용없고 실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따분하고 외롭고 한심한 날들이 지나갔다. 러시아 직원들이 마음을 열지 않는 텅 빈 사무실에서의 빈 시간과 여름이 다가올수록 길어지는 낮 시간을 죽이는 일이 미치고 싶도록 지루했다. 가끔씩 쁘레오브라쟈니에로의 출행이 없었다면 나는 그 한 해를 다 채우지 못하고 짐을 싸서 귀국했을 것이다.

 

  7월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마침 쁘레오브라쟈니예에서 머리를 식히고 있는데 K 이사가 러시아 사업장 순방 차 블라디에 도착하는데 내 숙소에서 며칠 먹고 자고 한다며 빨리 올라오라는 급한 전갈이 왔다.   

  한국에 이면수와 가자미를 팔러갔던 합작회사 소속 트롤선 '루미안체보(Rumyantsevo)'가 부산사무소에서 부친 탁송품을 싣고 왔다길래 받아 보니 쌀과 김치, 명란젖갈, , 고춧가루, 미원 ,된장, 라면, 짜파게티 등 모두 내 자취생활을 위한 보급품이었다. 4월부터 아파트 생활을 시작했으므로 그 동안 블라디로 출장오는 사람들 편에 라면과 김치 등을 한 봉지씩 얻거나 시장에서 조선족들이 파는 음식들을 구입하여 근근이 메마른 식사를 해결해 온 형편이었는지라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쓸쓸한 자취생의 어려움을 걱정하며 가지가지 품목을 꼼꼼하게 챙겨준 부산사무소 직원의 손길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웠다.  

  블라디에 도착하니 오후 7시였다. 해가 서산에 걸려있어 아직 허기를 느끼기엔 일렀다. 술이나 밥이나 반드시 해가 저물고 어둠이 깃들어야 욕구가 일어났다. 이방인에게는 고독이 허기와 동무인 셈이었다. 아파트에는 K 이사 외에도 H 차장과 미혼인 L군이 함께 와 있었다. 나는 서둘러 쌀을 씻어 앉히고 냉장고에서 돼지고기를 꺼내 김치찌개를 준비했다. 첫 날 밤은 따뜻한 밥 때문에 서로 마음이 훈훈하여 마치 동포의 밤처럼 즐거웠다. 서로 먼 길을 왔으므로 긴한 얘기는 뒤로하자 서로 권하며 일찍 잠들었다.  

  이튿날 사무실에 나가니 러시아 직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서 열병(列兵)하듯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서울에서의 환대가 어떠했는지, 그 순간 K 는 명실공한 오우너(Owner)의 특명대사였으며 로바나 그룹의 2인자였다. K 는 타라센코와 무역팀의 샤포프(Shapov)와 수산팀인 발레리 와이너(Wainer)를 부르더니 H 차장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명색이 블라디 책임자인 나는 열외였다. 회의실 밖에서 그들의 밀회를 지켜보는 나의 심정은 참혹했다. 아내가 자기의 집 안방에서 외간남자와 불륜을 저지르는 장면을 목격한 어느 남편의 심정이 그러했을까. 내게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하필이면 왜 같은 한국인인 저들이 내게 이런 장면을 보여주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나의 임지에서 내가 저들에게 수모에 가까운 무시를 당하는 이유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년초부터 러시아 직원들이 몇 차례나 내게 물었다. 왜 결혼한 직원들에게 아파트를 사 주지 않느냐고. 작년 겨울 블라디를 방문했던 사장이 러시아 직원들에게 분명하게 약속한 사항이라고 했다. 작년 겨울이라면 20평 정도의 아파트 한 채 값이 달러로 5,000불 정도였으므로 사장은 명태사업만 성공하면 그게 뭐 대수겠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해가 바뀌자 아파트 한 채 값은 세 배나 그 값이 치솟아 있었다. 명태합작사업이 종료되자 타라센코가 또 말했다. 이익금의 20% 정도를 블라디 직원들에게 상여금으로 지급해 달라. 그의 요구대로라면 오십만 불의 거금이었다. 더 나아가 타라센코는 로바나 블라디의 자체사업 잉여금의 절반은 직원들의 몫으로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세상이 급변하고 정치.사회적으로 혼란이 거듭되는 이 때 누구든 한 밑천 잡아야 한다는 조급함이 그들을 사바나초원의 하이에나처럼 거듭 탐욕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욕심의 그림자 뒤에는 우리가 한국 놈들의 하수인 노릇만 하고 있을 수 없다는 자존심도 숨어 있었다.  

  이 점에 대한 나의 업무보고서는 간명했다. 사장이 한 약속은 사장이 해명해 주십시오. 러시아 아이들의 주장 중 일리가 있는 부분은 제도를 만들어 공식화 하고 명태사업의 경우 블라디나 사할린 공히 직급별 급여의 200프로씩 상여금을 지불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분명한 조치가 없을 경우 내년도 명태사업에 관한 타라센코 쪽의 도움은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 참에 저의 급여도 분명한 선을 그어 주시기 바랍니다.  

  서울을 떠나면서 또한 나는 나의 보수로 종합상사 부장직급의 해외주재수당기준을 적용해 달라고 요구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장은 내가 담당할 합작법인의 이익배당금의 20프로를 받는 성과급을 제안했고, '나는 용병으로 입사한 것이 아니고 직원으로 들어왔습니다.'라며 그 즉시 사장의 안을 뿌리쳤던 것이다. 설사 백만 불의 이익이 발생해도 러시아 파트너가 배당에 동의하지 않으면 어쩌며, 이익금 계산은 또 누가 언제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 후 반 년이 지나도록 내겐 생계비 수준의 기본급만 지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를 물으니 고작 하는 소리가 사장이 호주에 있어 결재가 떨어지지 않았다는 거였다.  

  어렴풋이 가닥이 잡혀졌다. -! 그렇구나, 블라디 사무실은 타라센코만 구워삶으면 모든 것이 잠잠할 터이고 나란 존재는 장차 합작회사의 명운에 달린 것이므로 그저 용병쯤으로 써먹다가 제풀에 옷을 벗으면 또 그만이고. 그런 생각에 이르자 나는 속이 터져 한 동안 정신을 놓고 말았다. - 나는 병신이고 얼간이로다. 사십이 불혹이라는데 내 꼴이 지금 이게 뭔가? 그리고 그날 밤. 마침내 나는 젊은 시절에 잠깐 버릇했던 노바디(Nobody)가 되고 말았다.  

  점심시간에 K 이사는 밥을 사겠다며 러시아 직원들을 이끌고 '만틔'라고 부르는 고기속을 넣은 찐만두가 일품인, '베리오쟈'란 이름의 식당으로 행차했으나 나는 밥 생각이 없다며 저들끼리 가라하고 아파트로 들어와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K의 처사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한 것은 그렇다 치고 도대체 그가 무슨 요량으로 러시아 직원들 앞에서 나를 핫바지로 만들었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블라디 사무실의 운영을 서울에서 직접 관장하겠다면 그렇다고 사전에 귀띔이라도 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이곳에 부임할 때 나는 사장의 대리인이며 블라디 사무실의 모든 업무를 관리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사령장을 들고 왔던 것이고, 그 사령장의 권위로 타라센코의 꼭지 위에 앉아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를 해왔던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고 침대에 누워 버렸다. 잠결에 전화기가 울렸다.

  "김 부장이요? 지금 로스콜(Rosskor)에 가는 길인데 같이 가지 않겠소?"  

  로스콜은 D산업과 동반하여 Turniff 란 러시아 어업회사의 트롤어선 두 척으로 만든 합작회사인데 한국측 운영주체는 D산업이었다. 25프로의 소액주주인 형편에 거기 가서 뭔 말을 한단 말인가. 뚜르니프에서 파견된 러시아 사장은 평소에도 한국측의 경영간섭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 특별한 안건이 있습니까? 인사 차 방문이라면 혼자 다녀오세요."  

  " 그런 건 아니지만 김 부장도 이 친구들 하고 친해 놓는 것이 좋을 듯해서..."  

  노회한 러시아 사장은 처음부터 로바나는 안중에도 없었고 오직 D산업의 눈치만 볼 뿐이어서 내가 한 번씩 놀러가도 어느 동네 강아지가 왔냐는 식으로 냉담했던 위인이었다. 자기 자신이나 자기가 맡은 업무와 직결되지 않는 한 그들은 따뜻한 눈인사도 일말의 유머도 주고받는 법이 없었다. 공산당이 다스리던 시절에 잔뼈가 굵은 관료들의 특징이 다 그러했다.  

  K를 외면한 채 오후 내내 나는 침대에서 뒹굴었다. 퇴근 시간인 오후 5시가 지나자 K와 그 일행이 아파트로 돌아왔다. 총각인 L군이 나의 눈치를 살피더니 오늘 저녁은 자기가 만들겠다고 목청을 돋우었다. 그도 분위기가 어색한 걸 느낌으로 알고 있는 듯싶었다. 밥은 해 놓은 것이 있고 해서 동태찌게를 끓이고 술안주로 돼지족발을 두 개 쪄보라고 일렀다.  

  돼지족발이 먼저 만들어졌으므로 쁘레오브라쟈니예에서 싣고 온 소주를 꺼내 술상부터 보았다. H 차장도 술은 꽤 즐기는 축이었다. 술이 세 병째 거덜이 나도록 내가 말을 아끼고 있자니 K가 먼저 수작을 부렸다.  

" 김 부장님! 블라디보스톡 사무실은 저 아이들이 하자는 대로 당분간 맡겨 둡시다. 어차피 명태합작사업 말고는 돈 되는 일이 없으니 겨울이 올 때까진 저 아이들 장사하는 것은 심심풀이로 하게 그냥 내버려 두자는 말입니다."  

  시작부터 존칭을 붙이는 게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나보다 싶었다.  

" 그건 나도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사님이 여기 도착하여 이곳의 현황을 파악하려면 먼저 내 얘기부터 들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서울서 받은 사령장은 이사님도 아실 터인데 나를 제쳐두고 타라센코와 그 심복들만 불러 회의를 한 이유가 뭡니까?"  

" ........ "  

소주를 세 병 더 꺼내놓고 한 병은 나 혼자 나팔을 불었다. K가 흠칫 몸을 뒤로 물리며 긴장했다.  

" 나는 뭡니까? 그 아이들 하는 대로 두고 그냥 놀고먹으라면 내가 여기서 미쳤다고 이러고 있을 겁니까. 내가 필요 없는 자리라면 한국에 불러들이든가, 아니면 쁘레오브라쟈니에에 처박혀 있으라든지 그래야죠."  

 내가 언성을 높이고 덤벼들자 L군이 어머나! 하고 부엌에서 뛰어나왔다.  

" 부장님, 찌게 다 되었는데요. 식사부터 하고 말씀 나누시죠." 

" 알았어. 찌게 들고 와! 밥부터 먹고 하자!"  

  내가 너무 서두르는 것은 아닐까. 이번 기회에 나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되겠다는 생각은 낮부터 다짐한 일이지만  K에게 따지고 추궁하는 내용과 감정표출의 수위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다시 생각해 볼 일이었다. 잔머리 박사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그는 이거 잘못하여 범털을 건드렸구나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밥을 입에 가져가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금년도 명태사업의 성공과 사장이 그 에게 보내는 전폭적인 신뢰에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명태사업으로 번 돈은 홍콩의 제3국 법인의 통장에 박아둔 채 사장은 한국과 러시아 직원의 급여만 살금살금 풀 뿐 현지법인의 사업경비는 현지 은행차입으로 운용해 나가고 있었다. 사장의 기법이 절묘하고 신통하다고 K는 늘 감탄을 하는 친구였다. 자금과 흩어진 각지의 사업현황을 매일 전화로 보고하는 입장에서 간혹 그는 독재정권 시절의 대통령 비서실장만큼이나 간이 붓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내 눈에 그는 사장의 독선에 놀아나는 한낱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나의 기개는 언제나 객관적인 상황판단에 따른 최선에 대한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의 우열과는 상관없었고 생업의 존폐와도 무관하였다. 밥그릇이 비자 K는 자리를 파하고 싶은 눈치였다. 동태찌게는 아직 국그릇에 반이나 남았고 자기에는 시간이 너무 일렀다.  

" 이사님, 아직 시간도 이른데 아까 하던 얘기나 마저 합시다. 이렇게 와서 훌쩍 가고 나면 나도 힘듭니다."  

  그의 앞으로 술잔을 건네며 나는 일어서려던 그를 눌러 앉혔다. H 차장도 그를 따라 엉거주춤 일어서다가 다시 엉덩이를 깔았다. 그에게도 술잔을 따른 뒤 나는 서로의 잔을 부딪쳤다. L군이 잽싸게 상을 다시 고르고 남은 찌게를 새 그릇에 담아 왔다.  

 " 제 상식으로는 이사님이 오늘 아이들 앞에서 보여주신 태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그랬는지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 블라디나 사할린은 현지법인이므로 어차피 러시아 친구들에게 힘을 실어줘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랬던 것인데...김 부장님이 섭섭했다면 죄송합니다."  

 " 제가 섭섭하다고 이럽니까? 그럼 나는 뭐냐 이겁니다. 그 아이들 하고 앞으로 어찌 지내야 합니까. 내가 로바나 직원 맞습니까? "  

 " 그러니까...그 애들 너무 기죽이지 말고... "

  기가 막혔다. 그래서 나를 무장해제 시키겠다는 말인가. 굳이 내가 매사에 영감노릇은 하지 않는다 해도 이곳도 엄연히 회사의 한 조직인 바에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금이 어떻게 운용되는지 현지에서 관리 감독하는 사람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 노릇을 관두라는 얘기로 들렸다.  

 " 그러니깐 블라디 사무실 일에는 손 떼란 얘기 아닙니까? 지금 그 말씀이 사장의 생각이요, 이사님 생각이요? "

 " ......... "  

  K가 얼굴을 구기며 뭔가 열심히 대답을 찾고 있었지만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옷처럼 보기에 민망했다.  

 " 김 부장님,..그건 사장님 생각은 아니고 이사님이 깜박 잘못 생각하신 걸로 이해하십시오."  

  보다 못한 H 차장이 거들고 나섰다. 그는 사장의 조카였다. 한 사람은 사장이 살림을 통째로 맡긴 자이고 한 사람은 회계책임자였다. 그러나 일이 이리 된 데는 뭔가 음모가 있다는 심증을 버릴 수 없었다. 나는 끝내 망설이던 말을 토하고 말았다.  그 말은 어쩌면 무덤까지 들고 가야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명색이 수산회사의 부장을 지낸 체면에, 또 고심 끝에 다니던 회사를 저버리고 가족을 떠나 생면부지인 러시아로 고생길을 나선 나의 처지를 생각할 때 K의 농간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 내 말하리다. 타라센코가 한국에 갔을 때 이사님이 그랬다더군요. 미스터 김은 껍데기라고. 그러니 블라디 일은 니들 맘대로 하라고. 홍콩을 다녀온 이후로 그 아이들 행동이 어땠는지 알아요? 그 아이들한테 당신 입으로 한 말이 있으니 오늘 나를 핫바지로 만들었겠지요. 사장님 생각도 아닌데 당신 생각만으로 그럴 수 있는 일입니까? 에라이- 이 똥물에 빠져 죽을 놈아! "  

  포르테시모로 내닫는 나의 포효에 K는 꼼짝없이 꼬리를 잡힌 구미호였다. H 차장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런 K와 나를 두리번거렸다.

 다음 날 나는 K를 앞세우고 사무실에 나가 아이들을 불렀다. K 이사는 아이들 앞에서 나의 사령장을 펼쳐 들고 천천히 읽어 나갔다. 중간에 두 번인가 잔기침을 섞었다. 블라디 사무실의 자체적인 영업은 앞으로 너희들이 주체적으로 하되 반드시 미스터 김의 사전사후 승인을 받도록 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블라디 사무실의 무역업무를 배운다는 구실로 L을 남겨두고 그날 오후 KH는 사할린으로 도망치듯 떠났다.

 

  여름이 가고 겨울이 올 때까지 타라센코와 나는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심정으로 화목했다.

  사할린이나 블라디보스톡이나 회사에 소속된 러시아직원들은 로바나가 러시아인들의 단물만 빼먹고 여차하면 종적을 감출 회사라는 것을 모두 다 읽고 있었다. 그러니 그 들이 회사에 득이 되는 일을 궁리할 것이란 기대는 이미 물 건너 간 일이어서 제대로 된 영업실적이 나올 리가 만무했다. 명태사업으로 떼돈을 번 사장이 왜 러시아 직원들에게 땡전 한 푼 보너스를 지급하지 않느냐라는 불만에서부터 시작해서 왜 우리들 이름과 책임으로 무리한 은행대출을 감행시키느냐는 등 그들의 불신은 날이 갈수록 그 도를 더해 갔다.

  베트남전쟁 시절 미군의 하청으로 사이공을 무대로 토목공사를 해 한 때 큰돈을 벌었다가 예상 못한 미군의 철수로 은행에 묻어놨던 돈을 일거에 날려 버렸던 쓰라린 경험이 있는 사장은 한번 움켜진 목돈을 좀해서 헐려고 하지 않았다. 자연 러시아 내수사업은 빚으로 신용으로 꾸려갈 수밖에 없었고 러시아직원들에 대한 악역은 현란한 말과 잔머리에 도통한 K가 도맡아 하는 안쓰러운 일이 반복되었다. 합작법인의 일도 떡은 러시아 사람들이 빚고 다만 우리는 떨어지는 고물만 주워 먹겠다는 식이어서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에 돌아간 K가 나의 급여를 서둘러 매듭짓고는 1월부터 소급하여 가정송금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러시아의 경제질서는 여전히 혼란의 연속이었다. 물자가 귀하고 돈도 없으니 배 가진 자는 명태나 명란(明卵)을 준다하고 거짓말로 돈 많은 일본인들을 농락했고, 배고픈 군인들은 총을 들고 나와 암시장에 내다 파는 일이 다반사였다. 세금을 걷는 일조차 마피아들이 날뛰는 바람에 옐친정부는 외국으로부터 빚을 얻어 근근이 나라살림을 꾸려가고 있었다. 이젠 자연인으로 살고 있는 고르바쵸프가 일전에 신문에 기고한 고백은 내가 경험한 당시의 러시아 사회상을 돌이켜볼 때 매우 정확한 판단이었다.

 

-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1950년대 말 니키타 후르시쵸프와 알랙세이 코시킨 총리시절에 이미 싹텄다. 쏘련붕괴 이후 새로운 질서에 대한 구성원들 간의 구체적 합의가 부족했던 것은 불행한 일이었으며, 미국식 모델로의 맹목적인 진행이 러시아를 크게 후퇴시킨 결과가 되었다.

 

'구성원들간의 구체적 합의'- 이 말은 가정이나 회사나 오늘 이 시각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의 정체(政體)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블라디보스톡의 추억들(6)- 블랙잭과 여인들

 

6월이 지나면서부터 블라디 사무실의 사업은 매양 맥이 빠지고 한심한 일 뿐이었다. 내수시장을 겨냥한 껌, 쵸코파이, 담배, 오렌지쥬스, 컬러 T.V 등의 수입장사는 상반기까진 그런대로 재미를 보았지만 년리 130프로에 달하는 은행금리와 치솟는 물가와 환율하락으로 인해 점점 밑지는 장사가 되어 갔다. 생필품 품목이 보따리 장사꾼들의 소관으로 넘어가자 일이 없어 따분해진 아이들이 암내 맡은 수캐마냥 바깥으로 나돌기만 했다.

혈기왕성하고 멧돼지처럼 탐욕스런 타라센코와 그 똘마니들을 제 자리에 붙들어 두려면 뭔가 일상적인 업무가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되어 한 때 소규모 콜호즈 등을 방문하여 중형트롤어선을 한 척 사볼까 하고 돌아 다녔다. 사장도 부사장도 사업성이 있으면 발의를 하라고 두둔한 일이어서 한 번은 선박검수와 가격흥정까지 진행하였지만 결국은 본사의 석연찮은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고 말았다. 사실 그리 큰돈이 아니면 배를 한 척 사서 젊은 친구들을 그 일에 묶어두고 수산업에 대한 훈련도 시키고 세월도 낚아볼 심산이었지만 한탕주의에 이골이 난 사장이 이삼 년 뒤의 수확을 위해 돌밭을 일궈 볍씨를 뿌릴 리 만무했다. 종당에 나도 타라센코도 로바나가 미래를 보장해줄 직장이란 기대를 접고 있었다.

 

러시아어를 가르치던 일루나 선생의 발길이 끊긴 8월부터 저녁만 되면 일과처럼 나는 카지노로 달려갔다. 대학후배인 K와 동무하여 아무르호텔의 카지노를 들락거린 지가 두 달이 지났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시간이나 죽이겠다는 소박한 흥미차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데 선박구입 프로젝트가 물거품이 된데다 러시아어 공부마저 접게 되니 만사가 허탈하여 그때서야 말고 카지노가 유일한 안식처로 떠올랐던 것이다. 아무르호텔은 블라디보스톡 호텔과 길 하나를 두고 떨어져 있는데 바닷가의 절벽에 기대어 절벽높이로 지워져 언덕위의 길에서 들어가는 입구가 맨 꼭대기 층인 카지노로 연결되어 있었다.

미국이나 남미 등지에서 선원들과 무리지어 카지노를 드나들던 시절에도 한사코 나는 게임을 사양했었다. 시간을 죽이기 위한 오락의 차원이라면 몰라도 돈을 따겠다는 생각에 붙들리면 결국은 사람 버리고 돈 잃는 불행한 꼴이 되는지라 칵테일 잔을 들고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사람들 구경하는 것이 유일한 재미였다.

 

블랙잭(Black Jack)은 일반인에겐 카지노게임의 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스틴 호프만과 톰 쿠르즈가 열연한 레인맨(Rain man)이란 영화를 본 사람은 블랙잭 게임의 묘미를 기억할 것이다.

블랙잭은 딜러를 상대로 한 테이블에 보통 다섯 명의 사람이 앉아 즐기는 게임인데 처음에 딜러를 포함하여 한 사람이 두 장씩의 카드를 받는다. 맨 마지막에 갖는 딜러의 카드 한 장은 숫자가 보이도록 뒤집어 놓는다. 두 장의 카드를 합산하여 21이면 제일 높은 숫자가 된다. J.Q.K10으로 치고 A1 또는 11로 친다. J.Q.K 중 하나와 A를 잡으면 블랙잭이라 하여 삼팔 광땡처럼 제일 끗발이 높다. 손님은 자기의 점수가 낮으면 21이 될 때까지 몇 장이라도 카드를 더 받을 수 있는데 21이 넘으면 무조건 패하므로(날랐다라고 표현함) 카드를 더 받을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곧 각자의 실력인 셈이다. 딜러로부터 받은 두 장이 같은 숫자라면, 특히 J.Q.K.A 중 하나라면스플릿( split )이라 하여 패를 쪼개고 배팅을 전과 동일하게 추가할 수 있다. 쪼갠 카드에 또 같은 숫자가 겹치면 한 번 더 쪼갤 수 있다. ,딜러는 자기 패를 쪼갤 수 없으며 16 이하면 카드를 받을 수 있으나 17이상이면 카드를 받을 수 없다.

블랙잭의 최고 희열은 딜러를 날리는 순간이다. 딜러 바로 밑에 있는 사람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한데 보통 4짝의 카드를 뒤섞어 뽑아내는 카드의 숫자 중 정작 딜러에게 가는 카드가 하이(high)인지 로우(low)인지를 가늠하고 판단하는 것은 상당한 테크닉과 배짱이 요구된다. 또 동석한 손님들을 위해 희생정신을 발휘할 때도 있다. 딜러를 날리는 순간 먼저 날린 사람 외엔 모두 돈을 따므로, 그 때 터져 나오는 환호성과 손뼉소리를 상상해보라.

 

대학 6년 후배인 K는 부인을 데려와 살고 있었다. 원양어선을 타느라고 결혼이 늦은데다 갓 시집온 새색시와 떨어져 있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블라디의 공업기술전문학교의 교내에 있는 내빈용숙소를 개조한 아파트를 월세 2천불에 얻었다. 가족을 동반한 상사주재원이나 외국공관의 직원들은 마피아나 좀도둑들의 행패를 피해 보안시스템을 갖춘 비싼 아파트를 선호했다. 전직 간호사였던 29살의 새색시는 가녀린 몸매와 앳된 얼굴 때문에 쉽사리 남자의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타입이었다. 한번은 부활절이 낀 4월의 주말에 그들 부부와 차표검사도 하지 않는 삼등열차를 타고 인근의 오케안스키라는 마을로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여전히 쌀쌀한 바닷바람에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자갈무더기가 듬성듬성한 해안가를 소녀처럼 깔깔거리며 뛰어 다니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감성적이고 여린 여자를 데리고 밤이면 서부활극의 무대 같은 카지노를 K는 무시로 드나들었다. 아직 아이가 없고 이웃에 동무할만한 한국여자도 없었는지라 심심한 시간을 죽이는 방법으로 부부동반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겼지만 처음에는 'Get Away' 란 영화처럼 혹시 남녀가 한 패가 되어 카지노를 털어먹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공연한 걱정이었고 나중 얘기지만 정작 K와 그의 색시 때문에 내가 겪은 고초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르호텔은 블라디보스톡 호텔보다 방값이 싼 편이라 중국인 행상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자연 카지노 손님의 절반 이상은 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돈을 담은 전대를 늘 배에 차고 다녔다. 짧은 장사길에 은행에 맡기기도 호텔방에 숨기기도 여의치 않았거니와 전대를 몸에 두르는 것은 그들의 오래된 풍습이었다. 그 바람에 마피아들의 표적이 되어 어두운 밤길에서 칼침을 맞거나 총에 맞아 죽는 중국인들이 하나 둘 생겨났고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은 호텔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 덕에 처음에 나는 큰 돈 안들이고 블랙잭을 익힐 수 있었다. 그들이 앉는 자리는 칩 하나에 5센트씩 하는 싸구려판이었고 또 같은 몽골리언이라서 어깨동무하며 부담 없이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사라진 후부터 한 동안 카지노는 한산했다. 그래서 초저녁 시간이면 나는 여자딜러와 일대 일의 승부를 하며 놀았다. 나는 기본으로 세 패의 카드를 받았다. 그러나 첫 날 게임에서 딱하게도 나는 한 시간 만에 100불을 잃고 말았다.

저녁을 해 먹고 나면 늘 금고에서 미화 100불 한 장을 꺼내 카지노로 향했는데 그 돈이면 당시 한국 돈으로 85천원이었고 하루 저녁 유흥비로 충분한 셈이었다. 돈을 다 잃고 그래도 시간이 남아돌면 남의 판이나 기웃거리다 집에 돌아오면 그만이었다. 하룻밤의 가치로 100불이 여일했다. 일주일쯤 지나자 돈을 잃는 시간이 차츰 길어졌다. 이 주일 쯤 지나자 딜러와 나의 승률이 박빙으로 발전했다. 그 덕에 막간을 틈타 칩으로 술을 시켜 먹었다. 밤 아홉 시쯤이면 나는 얼굴이 불콰하여 기분이 느긋해졌고 기껏 본전으로 버텨오던 승부는 그 때부터 딜러 쪽으로 기울어지곤 했다. 그럭저럭 한 달이 다 되어갈 무렵엔 어느덧 딜러를 쓰러뜨리는 승부사가 되어 있었다. 테이블에 얹힌 나의 두 팔굽 사이로 칩이 홍수를 이루는 시각이면 여지없이 지배인이 등 뒤로 다가왔고 그 때마다 여자가 바뀌었다. '빅토리아'에서 '넬라','넬라''올가''올가'는 또 '올냐'.

9시가 넘으면 '올냐'도 따분하여 나는 수북이 쌓인 칩을 쓸어안고 환전창구로 가 1불짜리 블루칩으로 바꾼 뒤 K가 씨름하고 있는 테이블로 옮겨갔다. 블루칩 테이블은 조명도 왠지 고급스러운 분위기인데다가 눈매가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남자딜러가 주물렀기 때문에 미리 술도 깰 겸 옥상의 길가로 나가 바람도 쐬고 오줌도 누고 오고 그랬다.

 

K1등 항해사를 끝으로 선원생활을 접었다. 그가 육지에 발을 붙이기로 맘먹은 것은 원양어업이 사양산업으로 변모하여 어장도 배도 현격하게 줄어든 때문이었지만 만약 10년만 더 일찍 배를 탔더라면 선장노릇을 훌륭히 하고도 남았으리라. 그는 승부기질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배포도 커 늘 블루칩 테이블에서만 놀았다. 내가 여자딜러들을 물리치고 블루칩으로 자리를 옮길 무렵에 그는 이미 그 카지노에서 명사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가 판돈이 떨어지면 지배인이 손수 달려와 500불이니 1,000불이니 그가 요구하는 대로 신용으로 돈을 빌려줄 정도였다. 나의 판돈은 하루저녁에 100불이 한도였고 돈이 떨어지면 그냥 어깨너머로 구경이나 하고 말았지만 K는 돈을 잃기라도 하는 날은 밤을 꼬박 새웠다.

블루칩 테이블에서의 승률은 나의 경우 5할의 이쪽저쪽이었다. 초저녁부터 자정까지 술 마시고 놀고 100불이면 아까울 것이 없었으며 돈을 따는 날이면 적당한 시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룰렛게임이나 조금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K와 더불어 돈을 따는 날이면 함께 일찍 귀가를 했겠지만 도박판이란 게 운칠기삼(運七技三)에 또 각자의 일진이 있는지라 K와 함께 휘파람을 부는 날이 그리 흔치 않았다. 하루는 100불 가량을 따서 집으로 가려고 자리를 뜨는데 K의 색시가 쫓아 나오더니 나의 옷소매를 잡아 당겼다.

" 선배님, 저 사람 좀 데리고 나와 주세요. ?"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는 카지노를 향해 다시 발길을 옮겼다. K는 그날 1,000불을 다 잃고 지배인에게 다시 그만한 돈을 빌린 상태였다. 아무리 선배라지만 돈 잃고 열을 받은 사람에게 집에 가자고 일으켜 세우면 그 말을 듣겠는가.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와도 안 될 일이었다. 패가망신의 이치가 다 그러하지 않던가. K는 테이블을 독차지한 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등 뒤에서 일견하니 딜러의 페이스였다. K는 한 패에 칩을 다섯 개나 얹고 있었다. 나는 K의 밑으로 가 말없이 앉았다.

" 행님! 죄송하지만 좀 비켜 주이소. "

혼자서 끝을 보겠다는 얘기였다.

" ! 100불만 잃고 갈께. 조금 진정하라고.

흔히 하는 얘기로 노름판에는 끗발이란 게 있다. 그리고 카드에는, 특히 카드를 많이 섞어 하는 블랙잭에는 패의 흐름이란 게 있다. 나의 경험으로 볼 때 숫자가 높은 카드가 나오면 열 장 정도 계속 높은 자가 나오다가 낮은 카드로 또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흐름의 예측은 거의 7할이 적중했다. 그러나 그 흐름을 제 아무리 맹신한다고 해도 아마추어는 장시간의 승부로 가면 거의가 백전백패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님이 계속 이기면 곧장 딜러를 바꾸는데 딜러를 바꾸는 것은 끗발과 패의 흐름을 반전시키려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돈을 따게 되면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것이 요령이라면 요령인데, 돈을 따면 더욱 욕심이 생기는 게 인지상정이라 결국 딜러에게 돈을 다 털리고 쪽박을 차게 된다는 말씀이다.

K가 세 패를 받은 후 내가 한 패를 받았다. 운이 따르는지 내가 앉아말자 판의 흐름이 조금씩 바뀌어져 갔다. 나는 딜러를 날릴 기회만 엿보았다. 딜러의 까뒤집어진 카드의 숫자를 보고 그가 카드를 한 장 더 받아야 할 패라고 판단되면, K와 함께 억지로 카드를 쪼개 가며 흐름을 조절했다. 낮은 패의 흐름이 그치고 나의 차례에서 높은 자가 나와 나의 쪼갠 패가 죽게 되면 이 때다 하고 딜러에게 카드를 넘겼다. 아니나 다를까 십중팔구 딜러가 죽었다. 십중팔구니 딜러가 무사할 리 없었다.  

불과 2-3분 만에 한 게임이 끝나고 패를 네다섯 개씩 쪼개니 한 판에 4-50불이 왔다 갔다 했다. 독수리눈이 물러나고 `올냐'가 손을 씻고 왔지만 그 무렵 K는 잃었던 본전을 다 찾은 듯 했다. 시계가 새벽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이젠 그만 일어서지. 제수씨가 너무 피곤해 하는 것 같아."

냉정을 되찾은 K가 그때서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택시를 타고 어두움 속으로 사라지는 그들 부부를 보며 가슴속으로 쓸쓸한 기분이 가득 밀려왔다.

계절은 벌써 10월이었다. K는 카지노 출입이 벌써 6개월째였는데 일주일에 삼사 일은 카지노에서 살다시피 했으므로 그 동안 탕진한 돈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 짐작되었다. K나 나나 직원들 급여나 긴급한 용도를 위해 신년이면 달러를 뭉칫돈으로 갖고 들어와 관리하고 있었는데, 그는 지난 8월 부부와 휴가 차 귀국했다 돌아오는 길에 배타면서 벌어 은행에 맡겨둔 목돈을 헐었다고 했다. 그 얘기도 그의 도박벽에 진절머리가 난 그의 색시가 함께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남편 몰래 내게 귀띔해 준 것이었다. 그 후로도 색시는 자정을 넘길 요량인 낭군 곁에서 자주 울상이 되어 나의 도움을 구하곤 했다.

한번은 카지노 입구의 흐릿한 불빛 밑에서 K가 용렬하게도 큰소리를 내지르고 그의 색시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어 가까이 다가가 들어보니, 색시는 집에 가자하고 K는 나는 안 간다 택시타고 먼저 들어가라는 실랑이 끝이었다. K의 도박벽이 좀 과하다 싶어 선배랍시고 내가 쓴 소리를 했더니 돌아오는 답이 대뜸 험악했다.

" 당신이 뭔데 내 가정 사에 참견이요? 잃어도 내 돈이니 행님은 참견마소."

한국이었다면 단번에 경을 칠 일이었지만, 나는 허탈해서 그만 웃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K가 놀고 있는 블루칩 테이블에는 두 번 다시 앉지 않았다.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명콤비를 이룬 영화 '스팅(Sting)'처럼 도박판을 갖고 놀던 두 사람의 합동작전은 그래서 단발(短發)의 해프닝으로 끝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초저녁에는 언제나 싸구려 테이블에서 여자딜러들 하고 시시덕거리며 놀았다.

 

'비가(Viga: Victoria의 애칭)' 는 토끼 같은 눈에 다람쥐처럼 삐죽한 입을 가진 빅토리아풍의 미인이었다. 키는 훌쩍 크고 목이 길며 얼굴은 계란형으로 둥글고 긴 편이었으며 노란색이 많이 섞인 머리칼을 어깨 밑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항상 짤막하게 미소를 짓곤 했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고 아름다웠다.

'넬라(Nella)' 는 나이가 삼 십 초반인 금발머리의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그녀의 매력은 날씬한 몸매와 세련된 색상의 의상에 있었다. 그녀는 요새 말로 코디가 일품이었다. 영어발음이 제일 선명해 그녀와 독대하는 테이블은 늘 즐거웠다. 카드를 뽑는 손짓도 어찌나 예쁜지 프로다운 느낌을 주었는데 그녀와의 종합성적은 나의 미세한 우세였다.  

'올가(Olga)'는 반원형의 짙은 눈썹이 특징이다. 얼굴은 작고 갸름한 편이었으나 검은 머릿결만큼이나 불빛에 반짝이는 눈동자는 크고 검었다. 한편 약간 뻐드렁니인 이를 감춘 도톰한 입술은 작고 앙증맞았다. 영리하고 날렵하게 생긴 처녀였다. 영어가 서툴렀으나 ' I love you ' 를 러시아 말로 물으니 '야 류블류 드베'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 야 류블류 드베, 오케이?'하고 수작을 걸 때마다 싱긋 웃으며 'I don't know.'라고 응수했다. 딜러들은 어떠한 경우라도 테이블의 손님하고 정분을 나누어선 안되는 게 그들의 규칙이었다.

'올냐(Olya)'- '올가'의 애칭으로도 쓰이나 위의 '올가'와 구분하기 위해 '올냐'로 칭했음-는 키가 작고 아담하게 생긴 몸매에 눈이 주술사처럼 생긴 여자다. 하얀 피부에 늘 빨간 루즈를 발라 섬광이 발하는 듯한 눈과 함께 전체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풍겼다. 몇 번인가 말장난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바람에 나중엔 집적대는 일을 아예 포기하고 말았는데 게임을 할 때에도 그녀는 정확하고 냉담했다. 나의 냉정한 배팅에 연전연패를 거듭해도 그녀의 자세는 결코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고 손놀림만 더욱 민첩해질 뿐이었다. 지배인이 다가서기 전에 한 판이라도 더 놀고 싶었던 걸까? 그래서 최후에라도 나를 쓰러뜨리려 했던 것일까? 돈을 잃어도 결코 냉정심은 잃지 말라. 이것이 그들의 두 번째 수칙이었다.

날이 갈수록 카지노의 여인들과 지근에 마주하여 농담하고 술 마시는 일이 최고의 낙이었다. 그러다가 낙엽이 채 지기도 전에 성큼 겨울이 찾아왔다. 일 년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나의 긴 휴식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스산해졌다. 만주대륙 쪽에서 불어오는 북서풍이 점점 매서워져 바닷가로 향한 발코니의 문을 이중으로 걸어 잠궈도 실내가 으스스해 스팀을 틀기 시작했다.

 

블라디보스톡에 첫눈이 내리던 날, 서울에서 L군이 날아왔다. 본사의 분위기는 예상한대로 러시아사업의 부진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 자업자득인 것을 외면한 채 사장이나 K 이사는 현지 책임자의 능력을 성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들이 같잖고 불쾌하여 L군과 대구탕을 만들어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나는 반주로 혼자 보드카를 한 병 반이나 마셨다. 그리고 버릇처럼 그를 데리고 아무르호텔을 향해 발길을 내디뎠다.

어두워진 거리는 눈이 쌓여 꽁꽁 얼어 있었다. 최근의 일이지만 돈벌이가 좋은 러시아 상인들로 카지노는 벌써 붐비고 있었다. 따뜻한 실내에 들어서니 후끈 몸이 달아올랐다. 마침 넬라가 딜러를 보고 있었다. 테이블에 앉아 패를 받는데 갑자기 눈앞이 어지럽고 머리가 몽롱해지면서 몸이 불덩이같이 달아올랐다. 저녁반주로 먹은 술이 걸어오는 도중 바깥의 찬 공기에 얼어붙었다가 한꺼번에 풀리면서 몸속에서 대폭발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나는 화장실에 다녀오마고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카지노를 나왔다. 취기가 엄습하면서 시야가 흔들거렸다. 그러나 별 일 있으랴 싶어 나는 호텔옥상과 연결된 대로변의 어둑한 곳으로 걸어가 바지를 따고 사정없이 오줌을 누었다. 그 때 등 뒤에서 로스케의 사나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오줌의 끝자락을 털고 난 뒤 뒤돌아보니 방범순찰을 돌던 경찰복의 젊고 건장한 사내가 내게 손가락을 겨누고 떠들고 있었다.

" 왜 길에다 개처럼 오줌을 싸고 지랄이야, 이 일본 놈의 자슥아! "

돈이 좀 있다고 배고픈 러시아 사람들을 부추겨 원목이니, 알루미늄괴니,철강이니 수산물 따위의 자원을 무더기로 빼가지를 않나, 길거리에 나선 젊은 여자들을 함부로 아무데서나 희롱하지를 않나, 가뜩이나 배알이 틀려 죽겠는데 길거리에서 또 오줌으로 내 강토를 더럽히다니...그런 기분으로 화가 난 듯싶었다. 나를 일러 '까레이스끼'라 하지 않고 '야뽀니예쯔' 라고 했다. 일본인들에 대한 특별한 적개심은 1905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제국의 콧대를 일거에 뭉개버린 데서 비롯되었다.  

맨 정신이었더라면 내가 한국인이라 밝히고 '이쥐니비찌(죄송합니다)'라며 정중히 사과했을 것이다. 그런데 술김에 나는 나대로 화가 났다. 안경을 벗어 파커 안주머니에 넣고는 비칠거리며 그에게 다가가 오른쪽 무릎으로 바로 그의 낭심을 걷어 차 버렸던 것이다. 그가 양손으로 바지 앞을 싸잡고 풀썩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뿔싸, 그 순간에라도 곧장 어디로든 달아나 버렸더라면 좋았을 것을. 지난여름과 가을, 쁘레오브레쟈니예의 백사장을, 블라디의 해변을 누비고 달리며 길렀던 체력을 은연중에 자만하였는지 모른다.

" 자식, 조용하게 불러 얘기할 일이지... 그 만한 일에 삿대질은 왜 해?"

취중에 쓰러진 자를 내려다보며 아마 그렇게 중얼거렸을 것이다. 바로 그때 번쩍하며 눈에서 번갯불이 터졌다. ....쓰리.... 스트레이트와 훅을 섞어 정확히 네 번의 주먹이 얼굴을 난타했다. 어둠 때문에 또는 술김에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주위에 있던 그의 동료였다. 그의 주먹이 일순 숨을 고르는가 싶은 그 순간, 며칠 전 카지노에서 보았던 마피아들간의 육탄전 광경과 살과 뼈가 부딪혀 으스러지며 나던 둔탁한 소리에 진절머리를 쳤던 기억이 머리를 스쳐갔다. 어찌된 영문인지 얼굴에 부딪히는 주먹맛이 달콤하고도 썩 상쾌했다. 그래서 미처 헤드웍(head work)으로 피할 생각을 못했다. 이번에는 선수교대로 낭심을 차였던 자가 다가왔다. 창처럼 긴 주먹이 스트레이트로 눈가를 연거푸 찔렀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나는 꾸부정한 자세로 그 주먹들을 피할 생각도 반격할 생각도 없이 무방비로 맞고 있었다. 만약 그가 어퍼컷을 구사했더라면 나는 쓰러졌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그길로 그만 죽은 체 하며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 속에 나는 일이 예사롭지 않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낭심을 차였던 자는 손에 반지를 꼈던가 보다. 왼쪽 눈썹 위로 날아온 주먹과 함께 차가운 쇠붙이가 부딪히는가 싶더니 곧 이어 눈과 볼 위로 흘러내리는 따뜻한 물기가 느껴졌다. 손을 갖다 대니 피의 양이 장난이 아니었다. 피를 보자 그들이 흠칫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나는 반대로 대단히 화가 났다. 일이 이쯤 되자 영어는 어느새 본국으로 가 버리고 거친 경상도 사투리가 입에서 튀어 나왔다

" 이 씨발 놈들! 너거는 오늘 죽었다. 이 호로 마-안 새끼들! "  

벌집을 건드린 것이 그네들인지 나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한국이라면 의경(義警)이라고 해도 좋을 나이의 젊은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짐짓 뒤로 물러서며 그들이 타고 온 방범용 순찰차인 승합차를 타려는 눈치였다. 그 때도 울분을 참고 그만 정신을 차렸어야 옳았다. 그러나 술에 취해 거의 떡이 된 나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곧장 그들을 뒤쫓아 가며 고함을 질렀다.

" 이 자슥들! 어데 가노? 너거 순경이 사람을 때렸다 이 말이제? 이 새끼들 ,너거 오늘 내 손에 죽어봐라."

승합차 문에 다가서던 그들이 쫓아오는 나를 보더니 이거 안 되겠다 싶었는지 쫓아온 나를 둘이서 달랑 들어서 차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한 놈은 오른 편에 다른 한 놈은 왼편에 앉더니 나의 팔을 뒤로 낚아채었다. 운전석에 앉았던 친구가 하라쇼!(좋았어)’ 하며 불쑥 어둠속으로 차를 내몰았다. 지난여름 하바로스크에서 한국인 두 명이 실종된 사건이 있었다. 캄챠카에 서식하는 사슴뿔을 구하러 대구에서 온 약재상들이었는데 아파트를 빌려놓고 밤마다 러시아 여자들을 불러 정력을 뽐내다가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던 것이다. 마피아에게 용돈을 얻어 쓰는 처지인 지방경찰이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자 한국영사관의 요청으로 모스크바의 일급 수사관이 달려오고 했다는데 몇 달이 지나도 사건의 단서를 찾지 못 한다 들었다. 차에 싣고 허허벌판으로 가 사지를 찢어 흩뿌리면 어느 짐승이 와 물고 갔는지 모를 일이라고 했다. 취중에도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 겁이 났다. 그러나 내가 언제 적 노바디(Nobody)였던가.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차리자. 그렇게 이를 앙다무는데 좌우에서 날아 온 주먹이 숨 쉴 겨를도 없이 내 얼굴을 짓이겼다.

그리고 잠깐 정신을 잃었던가 보다. 눈 위로 쏟아지는 불빛이 눈부셨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우두커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 나 주위를 살폈다. 좀 떨어진 곳에 나를 차에 태웠던 그 젊은이들이 조롱하듯 내게 웃음을 던지며 서 있었다. 그들을 보자 다시 불같은 화가 솟구쳤고 나는 또 허세뿐인 악다구니를 내 질렀다. 딱하게도 힘을 쓸 수 있는 것은 입뿐이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무뚝뚝한 손으로 나의 어깨를 잡아 뒤로 쓰러뜨렸다. 그리고 그는 낚싯줄 같은 굵은 실로 내 이마를 꿰매었다. 물자가 귀하니 보드카가 수술용 마취제로도 쓰이는가 싶었다( 독자들이여! 찢어져 다친 곳을 깁을 때는 부디 얌전하고 조용 할지어다). 상처를 기운 후에도 계속하여 병원이 떠나가도록 떠드는 나를 그들은 또 달랑 들어 차에 싣고 달렸다.

웬 술이 이렇게 지독할까. 입만 겨우 용을 쓸 뿐 사지(四肢)는 여전히 내 것이 아니었다. 잠시 후 어느 건물 앞에 차가 멈추었다. 이번에는 불빛이 침침한 지하실로 끌려 내려갔다. 쇠로 만든 창살문이 보였고 어두운 불빛 아래 웬 노파가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그 노파가 고개를 들어 젊은이들을 일별하더니 대뜸 큰 소리로 꾸짖었다 . 이 추운 밤에 또 무슨 일로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끌고 왔단 말인가. 새파란 젊은 것들이 또 괜한 짓을 하고 있구나. 그렇게 나무라는 것 같았다술 먹고 함부로 까불다가 치도곤이 되어 끌려온 외국인이 내가 처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할 수 없다는 듯 나를 끌고 나와 건물 복도의 장의자에 앉혀 놓고는 아무 말도 없이 문안으로 사라져 버렸고 나는 비로소 술이 조금 깨는 것 같았다. 문득 얼굴이 무겁다는 느낌이 왔다. 거울이 없어 볼 수는 없었지만 느낌상 맞은 매에 얼굴이 찐빵처럼 형편없이 부어올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그들이 사라진 문안으로 들어섰다. 짐작에 그곳은 경찰서였다. 나는 방 안쪽의 등이 넓은 의자에 앉아 있는 중년의 남자를 발견하곤 다짜고짜 그에게로 다가가 사라진 젊은이들을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 방금 전에 들어왔던 젊은 놈들 어디로 갔습니까? 경찰이 무고한 사람을 이리 때려도 됩니까?"

양복상의에 얼룩진 핏자국과 엉망진창으로 부어오른 내 얼굴을 물끄러미 비라보던 중년 남자는 사태를 직감한 듯 출입구 쪽을 일별하더니 조용하고도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 잘 알겠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셨다면 내일 아침 통역을 대동하고 와서 자초지종을 밝히십시오."

중년남자는 직원을 부르더니 나를 집에까지 모셔다 드리라고 일렀다. 쓰빠시버.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젠틀맨은 첫 눈에 젠틀맨을 알아보는 법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셈을 할 수 없었다. 무턱대고 아파트 앞에까지 와 차를 보내고 나서야 L군이 생각났다. 아파트 열쇠도 내 호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L군을 찾으러 다시 카지노까지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했다. 오줌 누려고 나간 후 소식이 감감한 부장님을 찾아 틀림없이 그는 길가까지 나와 여기저기 살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차에 실려 연기처럼 사라졌으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하고 오만 걱정이 다 들었을 것이고 오도 가도 못한 처지가 된 그는 또 얼마나 황당했을까. 타박상의 고통이 슬금슬금 얼굴에서 솟아났다. 마지못해 나는 카지노를 향한 언덕길을 다시 걸어 오르기 시작했다. 술이 깰수록 얼굴에서 솟아나는 통증이 도를 더해갔다. 흉측하게 변해버린 얼굴을 생각하며 카지노 입구로 들어서는 복도에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데 마침 문을 열고 걸어 나오는 여자가 있었다. 흐릿한 조명아래 비치는 나의 흉상이 마치 후랑케슈타인처럼 괴기하리라. 나는 여자의 시선을 피하려고 얼른 고개를 벽 쪽으로 돌렸다. 그러나 저편에서 먼저 나를 알아본 여자의 놀란 목소리가 나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 어마나! 미스터 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예요? "

비명에 가까운 음성의 주인공은 넬라였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나의 팔을 붙들더니 복도 쪽에 있는 여자 딜러들의 방으로 황급히 끌고 갔다.

" 아이-어쩌나. 이를 어쩐담..."

넬라의 걱정은 진심이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방안에 있던 올가와 술을 나르는 아가씨들이 동시에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넬라는 소파에 나를 눕히더니 서둘러 부드러운 헝겊을 찾고 보드카를 찾았다. 그녀의 부지런한 몸놀림은 마치 사랑스런 여인처럼 따뜻하고 정다웠다. 그녀는 술을 묻힌 헝겊으로 나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그 순간 그녀의 손끝에 맡겨진 내 얼굴은 환희로 가득 찼다. 또한 그녀의 뽀얀 이마와 짙은 눈썹 뒤에서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으므로, 멀쩡한 나의 손이 나의 얼굴을 향해 몸을 숙인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는가 하면, 염치없게도 나는 그 순간이 영원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주일 꼬박 나는 집밖을 나서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영어통역 비서인 갈리나를 대동하고 경찰서를 찾는 일은 일찌감치 단념했다. 간밤에 넬라가 베풀어준 지극한 사랑이 나의 육신과 마음의 상처를 말끔히 씻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일주일 동안 나는 창가에 기대서서 얼어가는 바다를 바라보며 참회의 시간을 가졌다. 불쑥불쑥 치솟는 울화와 화를 삭이지 못해 버릇처럼 술을 마셔대는 못된 습벽과, 한번 시작했다 하면 죽음도 불사하는 치기어린 열정에 대해 회초리를 들듯 뉘우쳤다. 이제 돌아가 무엇을 할 것인가. 내게 주어진 남은 시간은 얼마쯤일까. -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신다. 나를 부정하고 나를 죽이라 거듭 이르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뜻하시는 나의 길이 정녕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나는 구약의 '욥기'편을 자주 펼쳤다. 하나님이 징치하는 재앙에도 인내하는 그의 믿음을 배우고자 했다.

 

-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조각을 가져다 몸을 긁고 있더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들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않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리라.(27-10)

 

 

경찰이 데리고 온 공짜손님인데다가 환자가 떠들고 난리를 피우니 흉터가 남고 안 남고는 의사의 안중에도 없었다. 흉터의 골이 깊고 두꺼웠다. 내 손으로 눈썹 위로 흉측하게 걸려있는 낚싯줄을 걷어내던 날 K의 부부가 소식을 듣고 집으로 찾아왔다. 그의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태교를 위해 경치 좋은 곳으로 곧 이사를 간다고 했다. 돌아갈 시간이 되어 일어서던 K가 내게 말했다.  

" 행님,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놉시다. 블랙잭으로 한바탕 멋지게 놉시다. ? "  

실소가 터졌다. 나는 메모지를 찾아 몇 자를 긁적인 후 네모지게 접어 그에게 건넸다.  

" 나는 인자 카지노에 발 끊었다. 이거 행님이 특별히 네게 주는 말씀이니 집에 가거든 읽어봐라. "  

쓸쓸한 기분을 숨긴 채 나는 웃으며 그들을 배웅했다. 그들과는 그것이 러시아에서의 마지막 시간이었다. K에게 준 쪽지에 내가 쓴 글은 이랬다.

 

 아들을 낳거든 김 끗발(巨發),딸을 낳거든 김 말려(末女)로 이름을 짓게나.

 

 

""

 

 

2004.12.28 


'비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메리칸 사모아 -1  (0) 2019.08.02
홍어와 가오리  (1) 2017.04.18
수바의 동쪽-20  (0) 2015.08.20
수바의 동쪽-19  (0) 2015.08.20
수바의 동쪽-13  (0) 2015.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