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이 다만 하루라도

알라스카김 2008. 9. 24. 13:09


분꽃들이 흐드러진 마당에 참새떼들이 내려 앉는다.
아내가 뿌려놓은 곡식들을 먹겠다고 먼 길을 찾아온 진객이다.
조심성 많은 이놈들은 바스락 소리만 나도 지구를 뜬다.
아주 갔나 싶었는데 전깃줄에 오소소 앉았다.
나는 숨을 죽이고, 다른 소리도 영 숨을 안 쉬자 다시 포로롱 내려와 모이를 쫀다.
팬티차림으로 거실에 누워 햇빛을 가린 발아래로 마당을 훔쳐보는 나는 은밀하다.
일을 나가지 않는 나를 안해가 물으면 휴가라 답한다. 그냥 일없이 놀고 싶은 날이 있다.
지금 참새떼를 구경하는 자는 나말고 후랑코가 있다.
부드러운 몸을 한껏 풀고 앞발을 가슴께로 숨긴 그녀는 매력적이다.
자식을 낳아본 적이 없는 그녀는 하루 종일 저 혼자다.
그런 그녀도 우울한 날이 있다.
하루나 이틀 기척이 없어 찾아 나서면
종종 폐가로 버려진 이웃집 스레트 지붕위에 엎드려 아늑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아지처럼 애살궂지 않고 절대로 외롭다고 소리치지 않는 그녀가 사랑스럽다.
젊었을 때는 쥐도 잡고 나무에 내려 앉는 새도 잡던 그녀가 오늘은 나처럼 한가롭다.
새떼들 뒤로 분꽃들이 소녀처럼 빠알간 입술을 내밀고 있다.
분꽃들은 피고지고 국화가 피는 10월까지 저 짓일 게다.
동백나무와 무궁화 나무곁을 열심히 기어오르는 것은 수세미 줄기다.
올해는 늦었다. 안해가 다른 화초에 신경을 쓰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화단이 분주한 봄철내내 보이지 않다가 언제 뿌리를 내렸는지
저토록 늦은 삶을 분주히 챙기고 있는 것이 고맙다.
아-저들을 보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산다는 것이 다만 하루라도 저리 분주한 것을...
참새와 분꽃과 수세미를 바라보는 나는  잠도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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