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에서 내가 제일 행복한 일로 여기는 것은 산위에 올라 섬들의 꽃밭을 즐기는 일이다. 달마산 정상을 오르겠다는 무턱댄 충동도 이런 풍경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완도나 진도 주변, 무려 2,000여 개가 넘는 유.무인도가 새떼처럼 활거하는 남서해안의 아름다운 풍광을 다 섭렵하기란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큰바람재에서 긴 바위 능선을 타고 올라온 젊은 부부는 자기들도 아주 힘들었다며, 그러나 우리가 올라온 험난한 핼기장 코스를 당연한 하산길로 지목했다. 나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길이 수월한 코스를 택했다. 미라골 산등으로 내려가 큰바람재를 향하는 미황사 뒷편 둘레길이었다.
정상에서 직각으로 떨어지는 하산 길은 나무로 지은 가파른 계단길이었지만, 산허리에서 시작되는 둘레길은 무려 다섯 군데의 너덜바위를 지나는, 숲 그늘이 적은 따분한 길이었다. 평탄한 길을 걸어가는 내 다리는 차츰 평정심을 되찾았지만 , 만연산의 솔잎향기가 그리운 아내의 짜증은 시간이 흐를수록 도를 더해갔다. 2시간 정도면 끝날 것으로 짐작한 길이 아내의 지친 걸음으로 무려 3시간 이나 걸렸다. 아내를 이끄는 나의 발걸음도 미황사 가까이 어두운 숲길에 이르자 갈팡질팡 허둥대었음을 부인할 길이 없다.
생면부지의 길을 걷는 나그네는 외롭고 고달프다. 그러나 진정한 나그네는 길 위에서 결코 쉬어가지 않는다. 나는 나의 부주위한 달마고도 탐방를 아내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누구든 잘못이 있다면 사과하고 시정함이 마땅하다. 이 산행의 교훈을 추억하며 당분간 조국사태 따위 세상 일에는 초연하고 싶다.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送舊迎新 - 외딴섬의 파도소리 (0) | 2019.12.26 |
---|---|
나는, 쓸쓸하다 (0) | 2019.11.06 |
달마고도를 가다-2 (0) | 2019.10.10 |
달마고도를 가다 -1 (0) | 2019.10.10 |
己亥年-秋夕(손녀들) (0) | 2019.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