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요약)
1963년 10월 9일. 수산대학을 갓 졸업한 스무 두 살의 청년 일수는 원양어선 지남2호의 실습항해사 자리를 얻어 이역만리 남태평양의 사모아로 떠난다. 그로서는 뜻밖의 행운이었다. 그가 탄 배는 마구로(참치)잡이 배로서 당시 선원들에겐 황금 알을 낳는 거위였다. 마치 희랍신화에서 만인이 동경하는 황금 양가죽을 찾아 먼 바다로 떠나는 아르고호와 같았다. 일수에겐 바다란 밤마다 별을 헤며 꿈꾸던 신세계였고,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바다를 향해 질주하는 새끼거북의 원초적이면서도 강렬한 그리움이었다. 그 그리움의 근저엔 고향 거제도에서 아버지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의 짧은 추억과 눈부신 아침바다의 풍경이 깔려있었다. 일수의 아버지는 평생 바다에서 멸치떼를 쫒던 망쟁이였고, 그러므로 그의 뼈와 살을 키운 것은 바로 그 멸치였던 것이다.
일본의 시모노세끼를 향하던 배는 현해탄을 건너던 중 기관의 중대한 결함이 발견되어 당초 배를 건조했던 도꾸시마 조선소로 항로를 바꾸게 되고 엔진수리를 위해 한 달여를 체항하게 된다. 황금 양가죽을 찾아 육지를 떠난 선원들에겐 금쪽같은 시간이었다. 지남2호는 시모노세끼로 다시 돌아와 이료 및 어구보충을 마치고 태평양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딛는다.
당직시간에 선장(강정중. 34세)을 보좌하게 된 일수는 선장으로부터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귀중한 얘기들을 듣게 된다. 그 첫 번째로 한국 최초로 원양어업을 개척한 이가 그의 회사 사장인 제동산업의 심상준씨이며, 당시 일본이 독점하던 미국의 통조림 공장 「밴 캠프」에 대한 사모아 어장의 배타적 마구로 공급권의 장벽을 무너뜨린 5여 년에 걸친 피땀어린 노력과 미·일을 오고간 외교전쟁의 전말을 듣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또한 선장을 통해 태평양의 관문인 붕고수로를 지나며 규슈의 남단인 가고시마현과 엮인 일본 메이지유신의 역사를 알게 되면서 조선이 구한말에 이르러 일본에게 나라를 강점당한 연유를 비로소 정확하게 이해하게 된다. 이후 강 선장은 항해기간 내내 일수에겐 초의선사의 스승 다산 정약용이었고 「표해록」의 저자인 조선 중엽 영롱한 선비 최부였다.
선장 외에도 일수를 언제나 즐겁게 한 것은 처음 보는 태평양이란 자연이었다. 바람에 따라 바뀌는 바다의 다양한 표정과 표층을 뚫고 수면 위로 도약하는 고기떼들이 그랬고, 하늘의 새들과 밤하늘의 찬란한 별들이 또한 다정한 벗이자 동반자들이었다. 바다에서 일수는 언제 어느 때고 ‘스스로 빛나는 별’을 꿈꾸는 학생이었다.
붕고수로를 빠져나와 처음으로 조우한 유황도를 시작으로 필리핀해구를 지나 적도에 이르기까지 일수는 선장으로부터 남양군도에 얽힌 미·일 간의 태평양 전쟁의 역사를 들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허상과 한계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인식하게 되었고 남양군도에 붙들려가 전쟁의 아수라장에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조선인들의 억울한 죽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오직 유일한 위안은 남태평양의 어딘가에는 분명코 한국인들의 후예들이 살고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적도와 날짜변경선을 지나 미국령 사모아의 파고파고항에 입항한 것은 그해 12월 7일이었고 동북방향의 쿡제도 인근 어장을 향해 사모아를 출항한 것은 12월 20일이었다.
사모아에서 체류하는 동안 일수는 초사의 주선으로 「밴 캠프」 사의 직원 챨리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챨리는 한국의 6·25 전쟁에 파병된 사모아 출신 미군 1,500명 중의 한 명이었다고 했는데, 더욱 놀란 것은, 그의 아내인 ‘앨리사 엄마’는 다름 아닌 개성 출신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일수는 그녀를 통해 아련한 기억속의 이웃집 곰보누나를 떠올리게 된다. 그녀는 일수가 국민학생일 때 일요일이면 일수를 찾아와 곧잘 전차를 태워 서면의 미군부대 주변을 기웃거리던 18살 먹은 앳된 처녀였다. 그녀가 어느 날 일수 앞에서 종적을 감추고 사라졌던 것이다.
출항 닷새 만에 첫 투승이 이루어졌다. 그들의 목표어종은 통조림의 원료인 알바코(날개다랑어)였다. 일본인이 횟감용으로 선호하는 참치류나 유럽인들이 즐기는 마린(새치류)은 값이 싼 잡어였다.
1회 조업의 전반부에 올라온 고기는 마린류 일색이었고 중반부는 상어 일색이었다. 20여 시간을 허비한 양승작업의 결과는 알바코 20여 마리에 불과한 흉작이었다. 그날 밤 풀이 죽은 선장과 선원들을 생각하며 일수는 혼자 밤하늘의 아르고호 별자리를 찾았다.
하루 뒤 어장을 이동한 2회 투망 결과는 알바코 140미를 포획한 전대미문의 대어였다. 투승과 양승에 따른 26시간의 고된 노동이었음에도 선원들은 졸음도 잊은 채 저마다 기뻐 날뛰었다. 작일의 실적에 고무된 3회 투망은 1회 때와 여일한 흉어였다.
마린류가 물밑에서 떼거리로 설쳐 어구를 마구 헝클어뜨린 바람에 조업을 포기한 채 선원들이 갑판에서 밤늦도록 어구정리를 하느라 여념이 없던 중이었다. 갑자기 배가 위로 들리는가 싶더니 큰 파도가 갑판을 덮쳐 일시에 배가 기울었다. 선원들이 황급히 움직여 배를 제 자리에 앉혔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큰 파도가 일어서더니 배를 짓눌렀다. 폭포수처럼 쏟아진 바닷물이 급류가 되어 곧장 기관실로 빠져들자 브리지가 잇는 선미부터 배가 물속으로 기울면서 기관실의 엔진과 발전기가 꺼져 삽시간에 암흑천지가 되어버렸다.
사고가 발생한 것은 12월 30일 오후 10시 경,서경 161도 남위 10도 해역이었다. 황망 중에 전원 바다로 뛰어들어 배 갑판의 어구들을 수습해 유리부자 뗏목에 몸을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맨 몸에 빈손들이었다. 선원들은 영문도 알 수 없는 바다의 횡포에 모두 넋을 잃은 채 무작정 남남서로 표류하기 시작했다. 혼이 빠져 달아나 침묵일색인 선원들을 걱정한 선장이 그들을 덮친 것은 큰 바다에서 드물게 만나는 삼각파도라고 알려주었다. 빈손인 그들에게 유일한 생명줄은 간간이 하늘에서 뿌리는 여우비였다.
날이 밝고 표류한 지 17시간 만에 일행은 수평선상에 나타난 섬 두 개를 발견한다. 남위 11도 선상의, 적도와 남쪽으로 600마일 상거한 라카항가와 마니히키 섬이었다. 선장은 뉴질랜드의 공군기지가 있는 섬이라며 구조요청을 하러갈 지원자를 구했다. 일수가 맨 먼저 손을 들었고 이어서 조기장과 2항사, 마지막으로 남해사람인 2기사 정명진이 손을 들었다. 그들이 섬을 향해 출발한 것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출발한 지 2시간쯤 뒤에 후미에서 뒤따르던 조기장과 2항사가 상어의 습격으로 비명을 지르며 물속으로 사라졌다. 남해사람 정명진은 능숙한 몸짓으로 여전히 선두를 고수하고 있었다. 하늘은 흐렸고 바다에는 이윽고 별도 뜨지 않는 어둠이 내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이 지치고 정신도 가물거렸지만, 일수는 의식을 놓지 않으려고 지나간 기억들을 차례차례 불러왔다.
일수의 정신을 결정적으로 붙들어준 것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의 삽화와 아버지에 대한
애증의 기억들이었다. 멸치어장을 하는 아버지에게 작은 각시로 들어간 어머니가 어린 자식 셋을 시댁에 맡긴 청상이었음을 안 것은 일수가 일곱 살 나던 해 외할아버지 초상 때 만난 외갓집 형님을 통해서였다. 이후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일수에겐 점점 기억하기조차 싫은 불만과 증오로 일관하였다. 아버지에 대한 원한에 가까운 일수의 그런 심정에 변화가 온 것은 고향인 거제도에 사라호 태풍이 찾아온 지 2년 뒤였다. 돌아가신 아버지 영정 앞에서 고모가 늘어놓던 넋두리를 듣고 난 직후였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글을 배우지 못해 평생 제 이름 석자밖에 쓸 수 없었던 아버지는 해방 후 근대화 과정에 적응하지 못한 무능하고 원시적인 남자였다. 다만 그런 아버지를 평생 위로하고 격려한 것은 멸치가 뛰노는 바다뿐이었던 것이다.
무려 11시간의 역영 끝에 일수를 라카항가 산호초에 발을 디디게 한 것도 바로 그 아버지의 바다였다. 지남2호의 생존자는 일수와 정명진 단 두 사람이었다. 조난시점으로부터 60여 시간이 지난 뒤 시작된 구조작업은 결국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21명의 선원이 남태평양의 바다 한 가운데서 몰살한 사건으로 국내는 온통 난리법석이었다. 일수는 정명진과 함께 국내의 사고수습이 마무리될 때까지 사모아에 머물다가, 이듬해 1월 말에 귀국한다.
정명진과 달리 일수는 다시 곧 사모아 어장으로 돌아오겠다는 결심을 한 지 오래였다.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의 못다 한 꿈을 대신 이루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먼저 아버지의 바다를 통해 ‘스스로 빛나는’ 별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던 것이다.
마침 4월에 입항한 지남5호의 2항사 자리를 얻게 된 일수는 출항을 앞두고 신변정리를 서둘렀다. 어머니에게 전 남편의 자식을 돌려주는 일이 그것이었다. 전 남편의 자식들에게 면목이 없다고 극구 반대하던 어머니를 겨우 설득하여 의붓 형님들과 마련한 식사자리였다. 놀랍게도, 일수는 그 옛날 가끔씩 그를 찾아와 전차를 태워주었던 이웃집 곰보누나가 바로 어머니의 딸이었고 지금은 흑인 미군을 따라 미국에 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날 밤 일수는 혼자 술을 마시며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를 눈물을 쏟고 있었다. 새삼 강 선장과 곰보누나가 무척이나 그리웠다. 강 선장의 얘기처럼, 인생이란 과연 우연과 필연이 결합된 수레바퀴였다.
1964년 5월. 일수를 태운 배는 다시 아버지의 바다로 돌아갔다.